도서관에 800번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놀라게 된다. 어떤 도서관은 총류와 철학을 합쳐야 1개의 서가에 불과한데 문학은 몇 개에 걸쳐 있다. 그러면 문학 생산자들은 모두 잘 살고 있어야 하는데, 또 듣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군중이 모이지만 공공의 역사가 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달콤한 케이크는 쓰디쓴 커피가 있어야 한다. 케이크의 느끼함은 케이크의 부작용일까. 아닐 것이다. 새벽에 신간 해제글을 읽다 뭔가 이상하고 어려운 대목를 읽었다. 옮겨놓고 다시 생각해 보려 한다.
<해제 중에서>"예컨대 나는 알튀세르가 “문학사의 병리학”에 관해 말한 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 “전 세계 모든 문학의 사산아들”(58쪽)에 관한 문학사라니! 이런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알튀세르는 이러한 문학사가 진정한 의미의 문학사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지. 더 정확히 말하면 문학사는 항상 세 가지 요소를 품고 있는데, 첫 번째가 “문학으로 추구되었지만 문학에 이르지 못하고 유산되었던 것의 역사”라면 두 번째는 문학으로 생산되고 성공했던 것의 역사이며, 세 번째는 “문학의 은총을 받지 못해서 문학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의 역사가 바로 그것들이지(61쪽). 참 놀라운 생각 아닌가? 자네가 방금 전에 언급한 비-역사와도 관련되는 것이지. 더 과감하게 말하자면, 알튀세르의 과소결정 개념은 결국 이런 사고방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야.
- 그건 알튀세르 제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마슈레가 “문학의 재생산”에 관해 말했던 것을 연상시키는데. 마슈레가 [문학은 무엇에 관해 사유하는가?](1990) 이후로 ‘문학 생산의 이론’보다는 ‘문학 재생산의 이론’에 더 관심을 기울였지. 그리고 그건 결국 문학의 역할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서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서 공백, 빈 틈, 균열을 발견하는 것에서 찾지. 알튀세르의 생각과 아주 가까워 보여.
- 그런데 오늘날은 ‘문학의 종언’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사실 문학사는 비-문학의 역사가 된 건가? 아니면 문학의 비-역사가? 하하."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답답함이 몰려왔다. 문학을 표현하는 방식도 놀랍다. 사산아들이라거나 유산이라거나, 은총이라거나.
며칠 묵혀 정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