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한껏 부풀려진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야생의 삶을 결코 잊지 못하는 존재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그냥 동물로 인식하고 싶어한다. 『노루인간』의 다음 구절을 보자. "열일곱 살이 되자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숲에서 보내기로 작정했어. 그리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치르는 날에 반항심은 절정에 달했어." 저자는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홈스쿨링을 해야 했던, 사회부적응으로 문제를 겪는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생활세계에서도 인간의 굴레가 족쇄처럼 주어져 있다고 느꼈다. 그러던 저자는 숲이 자신을 맞이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노루와 같은 동물들과 섞여 살면서 비로소 "나를 사물의 질서 속에 있는 나의 진정한 자리로 되돌려 주었"다고 고백한다.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책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동물의 관계를 구축한 저자의 경험은 탈자본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영감이 될 수 있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수사슴과 정면으로 마주쳤어. 늦여름에 사슴이 빽빽 우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과감하게 다가간 적은 없었어. 열 살 짜리 소년에게 한밤중에 들리는 거친 울음소리는 너무나 위협적이었어.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나는 겁이 나서 돌처럼 굳어버렸어. 내 앞 1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육중한 몸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진동하면서 내는 그 생물이 발산하는 힘에 압도당하고 말았어.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던지 그 소리가 수백 미터 주위에서도 들릴 지경이었어. 돌연 그가 나를 향하더니 쉰 목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어.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암사슴들이 그보다는 조금 낮지만 강력한 소리로 화답하기 시작했어.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덜 떨렸어. 하이파이 시스템의 저주파처럼 말이야. 마침내 수사슴이 방향을 바꾸었어. 나도 뒤돌아섰어. 그 수사슴 때문에 거기 갔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이었어. 숲의 우여곡절이 두 존재를 만나게 했듯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어. 얼마 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 그 수사슴이 내 짧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교훈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동물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 했어. 야생이 세계는 초심자에게는 문을 열지 않아. "(『노루인간』)


그렇다면 이 책의 소개말에서  "우리는 자연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연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자.  늑대를 개로 길들이듯이 노루를 길들이지 않고, 자신의 몸을 노루에 맞춰 길들임으로써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나무랄 데가 없는 해석같기도 하다. 또 인류세로 접어든 인간의 반성과도 같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자연에 대한 뭔가 초월적인 믿음으로도 들린다. 저자가 노루와 함께 했던 7년의 생활에 대해서는 상상력 말고는 달리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왜 그곳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더듬거리며 이해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모아놓은 다음의 말들도 읽어본다.  "무례한 인간의 행동, 숲의 삶을 더 큰 관점에서 생각, 우리 행성 지구의 미래에 대한 존중이라는 기쁨과 걱정, 종種 간의 사려 깊은 동거의 의미 ..." 등은 "도토리를 주워 먹고, 이슬을 받아 물을 마시고, 노루처럼 낮에 쪽잠을 자고, 감기약으로 담쟁이덩굴과 소나무 싹으로 치료를 하며, 노루를 따라 하루 5킬로 정도 이동하며 생활한 7년"동안에도 인간의 <그것들>을 버릴 수 없었음이 아닐까.



절반의 인간, 절반의 노루가 아니다. 노루였던 인간의 고백에서 소외된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낯설음도 없어 보인다. 이토록 이색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저자의 경험을 기꺼이 껴안기 꺼려지는 이유는 아마도 노동하는 인간과 노루의 노동의 간격에 닿아 있다.  인간소외의 문제를 고민하던 마르크스가 자연법을 뛰어넘을 때 중시했던 노동개념을 꺼내들어온다. 노루인간과 기계인간은 노동의 소외를 제거할 수 있을까. 


"더욱이 자연과의 상호 작용은 너무나 긴밀하고 실존적으로 내밀해서, 우리는 자연을 인간 신체의 “비유기적” 확장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노동할 때 자연은 인간적 보철prosthesis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볼 때, 마르크스는 인간들에 관한 최근의 논쟁, 즉 기술을 사용해서 사이보그가 되는 인간들에 관한 논쟁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자연과 관계할 때 이용하는 기계들은 우리의 살만큼이나 우리 신체의 일부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살은 단지 '웨트웨어wetware의 일종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노동 개념은 아주 급격히 확장된 인간 개념, 즉 자연 전체를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로 통합할 정도로 확장된 인간 개념을 낳는다. 우리 자신의 활동에서 낯설어지면서, 우리는 또한 우리 노동이 포괄하는 더욱 확장된 형태의 인간으로부터도 낯설어진다[소외된다]." (『하우투리드 마르크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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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초원님에게 생스투유~ 책 담아갑니다

초원 2021-11-16 12:18   좋아요 1 | URL
이런 한갓진 곳까지 걸음 해주셨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며칠 전 프레이야 님이 올려주신 만요슈, 잘 읽었답니다.
책의 기운을 널리 전하시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이번 주는 따뜻하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