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장과 '조직'은 자본주의 사회를 근거짓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시장의 가능성들이란 …  오늘 아침의 저 푸르고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만끽하는 모든 생물들에게 닿았던, 자유의 향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조직으로부터 시장'이라는 생산양식이 짙게 응축된 봉합경제에서는, 그 편향성으로, 뭉게 구름이 뛰노는 저 하늘마저 즐길 수 없도록 노동자를 몰아대고 있다. 


'신봉건주의'적 틀로 해석하게 될 때야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회의 양상에 주목하길 바랐다. 봉합경제에서는 대결해야 할 지점이 뚜렷하다. 시장을 비판할 게 아니라 '조직'에 주목해야 했다. 누구도 홀로 시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 명의 자본가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 창의적 아이디어를 마구 쏟아내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날만큼 댓가가 주어질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한 명의 노동자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을 쉬지 않고 노동운동을 하더라도 그 영향은 그렇게 커지지 않는다. 한 명의 학자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을 계급론과 노동가치설을 연구해 보고서를 써내더라도 그 실재는 크게 진동하지 않는다. 주체를 예속적 위치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핏대를 세울 게 아니라, 개체들의 놀이터, 쉼터, 일터, 공터를 돋워야 했다. 체계나 제도, 질서 등의 무생물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생물에 주목해야 했다. 위계질서로 고착된 조직은 '조직'이라 부를 수 없다. 주체를 세울 수 있는 곳은 노동자, 한 사람의 내면이 아니라, '조직'이다. 조직의 주체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역사는 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조직'들의 출현으로 전도된다. 이것이 하나의 계급이다. 


현대 신봉건주의에 상존하는 계급이 있다면 당연히 '시민'이다. 산업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에 부르주아는  여러 굴절을 겪으면서 와해되었다. 부르주아지라고 부를 계급은 이미 제도적으로 체계로 흡수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유연한 '조직'이었다. 부르주아지는 한 명의 부르주아가 변절하느냐에 합류하느냐에 따라 흔들리지 않았다. 그랬다면 계급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조직'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노동이 그들의 생존지위를 흔들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누구나 노동자다. 아이가 태양에게 묻는다. 어제도 그제도 어디갔어요? 하루종일 비만 내렸어요. 태양은 답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느 순간 알게 될 게다.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노동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노동을 어떤 위치에 놓던지 간에 항상성을 갖는 노동자의 위치는 인류 성립의 본질이다. 노동자가 일터로 가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그곳은 일터가 아니라 전쟁터다. 노동자는 적극적으로 생산계약에 참여해야 한다. 그 계약은 근무시간과 보수에 한정하는 고용계약이 아니다. 모든 생산은 사회적 생산이므로, 계약은 총체성을 지녀야 한다. 


2.

하나의 문제틀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 수십 번 대지가 붉으락푸르락 변해가고 있었는데, 아직도 끄적거리고 웅얼거리고 더듬더듬 짚기만 한다. 지지부진 하다가 간혹 참조할 흥미로운 책이나 자료를 발견하게 되면 다시 뽀드락지 올라오듯 서술 욕구가 솟아난다. 지난 달 『불쉿 잡』 목차를 보다가도 그랬다. 세상의 쓸모 여부로 직업을 바라보는 일이 탐탁치 않지만, 경험적이며 실증적인 온갖 자료들을 하나의 문제틀로 만들어 가는 작업은 여전히 힘을 만든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하려고 했더니 이미 누군가 대출중이었다. 예약을 걸어 놓고 기다리다가 며칠 전 대출해 왔다. 눈대중으로 읽었고 어떤 부분은 착실하게 짚어가며 다시 읽으려 한다. 역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답게 1장에 “마피아 행동 대원은 왜 불쉿 직업이 아닐까?”다. 불쉿 직업이 종사자에게 어떤 고통을 유발하고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여러 번 반복되는 사실 중 하나는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을 불쉿이라고 여기면서 정신적 폭력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레이버가 던진 이 문제의식을 한 자락 잡고서 불쉿 직업과 노동 존엄성과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봐야겠다. 그런데 불쉿 직업의 확장이 자본주의의 위기인지 부흥인지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책을 기다렸던 이유인 7장의 “경영 봉건제도하의 정치와 문화는 '원망의 균형'으로 유지된다”의 한 단락이다. 


"경제의 금융화와 정보산업의 만개, 그리고 불쉿 직업의 확산 사이에는 원천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기존 자본주의 형태의 재측정이나 재조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과거의 것들과 깊은 단절을 가져왔다. 이렣게 말할 수도 있겠다. 불쉿 직업의 존재가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증식하는 한 가지 이유는 현재 시스템이 자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아니면 적어도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혹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 밀턴 프리드먼의 연구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자본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지대 추출 시스템rent extraction으로 변해간다.


이 시스템의 내적 논리, 마르크스주의자가 좋아하는 표현으로는 이 시스템의 “운동 법칙”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경제와 정치의 필수 조건들이 대체로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이것은 영주, 봉신, 가신의 끝없는 계층제를 만들어 내는 똑같은 성향을 드러내는 중세의 고전적 봉건제도와 닮았다. 다른 면에서는(특히 그 경영주의적 에토스는) 심오하게 다르다." (313~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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