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말하려는 '무정함'<유산, 세대 계승, 내리 사랑> 같은 인간 공동체적 정情의 계보에 연결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정함은 분명한 얼굴을 갖는 사회관계를 필요로 하며개체와 개체 사이를 규정하면서 시작합니다반면 무정함은 '개체 그 자체'와 '사회자본'과의 관계를 회의하는 상태에서 시작합니다유정과 무정이 발생하는 서로다른 방식에 주목합니다


제 경우를 대입해서 말씀드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바랍니다. 저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 특히 가족이나 학교, 직장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동질적인 공감력을 필요로 했던 상황에서, 저는 이 문제를 늘 고민해야 했습니다. 제 평판은 메마르고 모난 행동들로 인해 원성 속에 있곤 했습니다. 친밀함으로 연결되길 바랐던 가족, 친구, 동료, 시민들에게 매정하고 모질고 재수없고 싸가지없고 심지어 미친년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분들에게 반감을 가져본 적은 없습니다. 부당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함께 웃고 같이 울어야 할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 제 자신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평가의 시선들로부터 제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유지하고, 친절을 준비하고, 처음 건네는 말은 제가 기억해낼 수 있는 가장 감미로운 말들을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아마도 젊었던 그 날들, 십 몇 년은 그런 상태를 유지했을 겁니다. 좋은 점들도 생겼었지요. 그러다 주변에서 이상한 말들도 듣기 시작했습니다. 실실거리고 다닌다거나 뭔가 바람이 잔뜩 들어 입에 발린 말들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어두침침한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따뜻함을 제2의 천성으로 자리잡도록 하려고 했지만, 다짐-실패-실망-다짐-실패-실망이라는 패턴만 쌓이고 있었습니다.


딱 한번 꿈 속에서 행복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라는 억하심정도 없이, '너네가 뭘 알아'라는 건방짐도 없이, 성급함과 믿지 않는 태도를 쳐내버리고, 몇 십년을 유지한 그 습관 덕분에, 늙은 제 얼굴에 인자함으로 인한 따뜻한 주름살이 패여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제 얼굴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편안하고 인정 넘치는 분위기가 그득했습니다. 영구적 평화의 상태가 생각나는 장면이었습니다.


지금 제 얼굴은 피곤한 모양 그대로, 공포가 만든 양미간의 모양 그대로 깊은 골짜기를 형성해 주름져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길은 제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하고 싶은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는, '무정함'에는 비난, 조롱, 냉소, 비판, 공격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일입니다. 종種적인 연속감정이나 세대 내 공통감각 혹은 동질적 시대의식으로, 너와 나를 부르며, 우리에게 사람답게를 노래하는 '유정함'과는 대립되지 않는 무정함을 발견하려 합니다. 情의 양적 측정을 통해 +에서 -로 이동하는 방식으로는 설명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무정함은 완성된 형태로 오지 않습니다.


현재 구성된 사회적 관계를 부정하며, 나홀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논리가 아닙니다. 온갖 '관계의 비정함'을 양산해내며 '이해관계의 상대성'을 끌고오는 정당화 논리도 아닙니다. 물론 저처럼 흔한 안부인사조차 나눠 가질 대상도 없는 사람의 상태도 무정함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무한 마이너스의 상태로, 유정함의 결핍형태입니다.


영화 《어느 가족》을 통해 유정함의 과잉을 확인하고, 유정함에 기대려는 경향과 거리두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거친 영화는, 온정으로 꾸린 인스턴트 가정에 균열이 생기고 씁쓸해지게 되었을 때, 어떤 형식을 취하더라도, 기필코 가족을 구성할 것을 촉구합니다. 일견 새로운 가족론을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만, 제가 느낀 바대로 표현하자면, 누구보다 간절하게 유정사회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균열과 자본제적 관료적 물신숭배적 현실을 의미있게 연결하기 보다는, 가족이라는 근원적 유대와 신뢰 관계, 즉 유정함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 가족 구성원들은 가명을 씁니다. 한 명 한 명이 시대적 고통을 겪는 희생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공장에서 해고당하거나, 산업재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 친가족에게 학대당하고 방치된 아이들, 노령 연금으로 근근히 살며 고립된 노인들. 그들이 애써 일군 《어느 가족》의 포스터, 가족사진은 완벽해 보입니다. 혈육이 아니더라도, 네가 우리 유전자를 갖지 않았더라도 넌 우리 패밀리야 그래서 아껴주고 보호하고 혼내고 다독이고 먹이고 재우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함께 행복할거야 아침밥을 든든하게 나눠 먹고 저녁에는 하루 일과를 서로에게 도란도란 나눠서 그 삶의 수고를 위로할거야 잘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아 실수가 있어도 상관없지 우리는 가족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가족이 되는 거야. 너희들에게 부여된 사적 권한으로 완전한 가족이 된거야.


이 내적이며 사적인 가족에게 닥친 '가족붕괴'의 순간을, 영화는 실질적 가장이었던 할머니의 죽음과 매장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할머니의 장례를 진심으로 치뤘어야 했다는 듯이, 마당 한쪽에 묻고, 태연하게, 살아 있는 자의 몫 - 노령 연금을 수령하는, 남겨진 가족의 뻔뻔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절도 행각으로 쫓기다 적발되던 중에, 이 새로운 가족은 법적 절차를 통해 흩어지게 되는데, 이 가족의 운명이 ''에 의해 좌초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합니다.


이 가족의 생존력은 특이합니다. 필요한 물건은 훔쳐서 충당합니다. 상품경제를 상이하게 해석하며 절도 방법을 쇼타에게 전승하는 오사무는 반도덕적 생존술로 새로운 가족성립의 배경을 정당화했었습니다. 기존 가족에게서 얻은 이름을 버리고, 《어느 가족》에서 얻은 가명들은 완전한 가족을 지탱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낯선 장면들은 영화가 끝나갈 무렵 읊조리고 흐느끼는 아픔을 통해 완전히 익숙한 세계로 다시 돌아옵니다. 감옥에 갇힌 노부요가 참던 눈물을 훔쳐닦으며 아이들을 걱정합니다. 떠나가는 버스 안에서 쇼타는 진짜 가족은 오사무였다는 듯이 나직하게 아버지라고 불러봅니다. 집으로 되돌아간 어린 쥬리는 다시 학대받고 있습니다.


(유정) 가족은 법과 대치하지 않습니다. 도덕과 대결하지도 않습니다. 정情과 대척합니다. 아무도 아닌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머물렀던 가족명名을 지운 자리에 가명을 만들고 혈연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가족의 형상은 그대로 남습니다. 가족의 균열은 그 지점에서 발생하는데, 이 새로운 가족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어느 가족》은 일시적으로 성공했습니다. 저 빛났던 따뜻함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일들이 가능했던 이유도, 기존 가족을 부정하고 떠나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처럼, 그 유정함들을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족》은 실패와 성공으로 구분되지 않는 유정함의 가족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기나긴 가족의 전통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애야말로 너무 강력해서 늘 부숴져야 했던, 몇 천년의 역사를 가진 문제가 아닙니까. 부서진 가족 문제를 유정함의 세계로 되돌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요 사람은 항상 부족하고, 사람의 자리들은 늘 고통이라고요. 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어느 가족》이 짚어내는 틈을 사유하는 동안 성장한 것처럼 지금도 발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또 누군가는 법과 국가의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고도 할 것입니다. 법적 기준과 국가가 요구하는 질서에 맞춘다면, 유정함의 가족이 아니라 무정함의 세계를 가능하게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세계를 소위 무정함의 세계라고 한다면, 그곳에서 가족의 운명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 시점에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를 생각합니다. 아르투르 쇼펜하우어는 알려진 바대로, 서양철학사에 두드러진 흔적을 남긴 <의지의 형이상학>의 사상가입니다. 아르투르는 아버지를 절절하게 사랑했던 반면에, 어머니와 불화하며, 여성을 혐오했던 철학자입니다. 그가 키우던 흰색 푸들 아트만이 죽었을 때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누이 동생의 장례식에는 참석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진정성이 그득한 조사를 남겼던 반면,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가족 문제로, 노동과 경제의 문제 읽어보려고 합니다. 무정함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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