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빌리 엘리어트》에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 공권력, 계급, 공동체, 상징자본, 메리토크라시, 자유 등의 굵직한 주제들이 주렁주렁하다. 부르디외의 사회학 이론을 덧대어 읽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읽어보려 한다. 1980년대 영국노동자 가족이 겪었던 사회적 고통이 빌리 엘리어트의 성공으로 치장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 다른 방법으로 이 영화를 읽고 비교해 본다. 《빌리 엘리어트》의 두드러진 중심 공간을 문제삼아 유토피아와 헤테로피아의 관계를 생각한다. 먼저 재키 엘리어트를 중심으로 줄거리를 풀어보고 난 후 특이성을 갖는 공간, 이질적인 공간,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생각을 덧붙인다.


2. 광부와 댄서

저 유명한 대처리즘의 중심부에 있던 광산촌 더럼에서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 재키는 평생 광부로서 자신과 가족을 지켜온 심지있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동료와 마을 공동체에서도 신임이 깊은 위치였으나, 파업의 장기화로 심각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데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방황하게 되면서 노쇠한 가부장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중 재키는 빌리의 꿈을 보았고 혼란에 빠진다. 윌킨슨 선생은 빌리에게 발레를 가르쳤는데, 능력이 남다르다며, 왕립학교에 오디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이 제안에 당황한 재키는 격하게 거부하고 빌리를 설득하려 했으나, 기어코 윌킨슨 선생으로부터 따끔한 충고를 듣고 얼굴을 붉히고야 만다. 이 구렁텅이에서 빌리만은 탈출할 수 있다고 윌킨슨 선생은 확신한다. 잿빛 광산촌에서, 서로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는 갱도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화려한 미래가 빌리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들 빌리를 위해 노조를 배신할 결심을 한 후, 광산노조의 주축으로 활동하던 큰 아들 토니와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하면서, 재키는 새로운 인물이 된다. 즉 가족 내에서 무력했던 모습을 벗고 생기를 찾는다. 아내의 유품을 전당포에 맡기고 마련한 돈으로 빌리에게 오디션 기회를 선물한다. 그리고 큰 아들 토니를 앞세워 갱도로 복귀하면서, 빌리의 신세계를 완성할 학자금을 준비한다. 희생하는 아버지,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고, 군림하지 않으며, 배경으로 물러서는 아버지가 된다. 그 결과는 십 년 정도 흐른 후, 런던의 웅장한 오페라 공연홀에서 보상받는듯 보인다. 재키 엘리어트는 당당하게 빌리의 가족이 도착했다고 알린다. 공연의 주인공이 된 빌리의 가족이 여기 왔다고 전한다. 힘을 잃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던 가부장 재키는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다. 가족의 가치를 새로운 형식으로 지켜낸다.  Be yourself!



2.

공간은 모든 공동체적 삶에 근본적인 것이며, 모든 권력 행사에도 근본적인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는 푸코가 유토피아에 대비시켜 사용하는 용어인데, 아마 이런 구절에서 매혹적인 유인가를 갖게 된다.


"스쳐 지나가는 통로가 있고 거리가 있고 기차가 있고 지하철이 있다카페 영화관 해변 호텔과 같이 잠시 멈춰 쉬는 열린 구역이 있고휴식을 위한 닫힌 구역자기 집이라는 닫힌 구역도 있다그런데 서로 구별되는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그것은 일종의 반反공간 contre-espaces이다이 반공간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 어른의 사회는 아이들보다 훨씬 먼저 자기만의 반공간자리매겨진 유토피아모든 장소 바깥의 실제 장소들을 스스로 조직했다예를 들면정원이 있고 묘지가 있고 감호소가 있고 사창가가 있고 감옥이 있고 클럽 메드의 휴양촌이 있고 그 밖에도 많다." (『헤테로토피아』)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는 실재하는 유토피아이며,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이라고 주장했을 때, 저항감이 있었는데, 마치 공간을 텍스트로 옮겨 버린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알려진 대로 푸코 자신도 더 전개시키지 못하고 유야무야 덮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헤테로토피아가 가정하는 어떤 특정 요소가 사람들을 유혹한다. 영원성의 양식인 박물관에서 한시적인 시장, 변두리, 마을 공터, 가건물, 좌판을 헤테로토피아로 등판시킬 때,마음 한쪽 비어 있는 구멍이 그 자리이기라도 하는 냥 끌린다. 아니, 뭔가 그럴 것이라는 가능성에 믿음을 실어버린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로 지목하는 장소들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데 그 원리가 있다 “. 유토피아와 대립관계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어제의 헤테로토피아가 오늘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움직이고 생활하고 거주하는 현실 공간은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와 어떻게 다른가. 푸코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 규칙 안에서 작동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유토피아는 상상력으로만 작동하는 현실에 없는 장소를 뜻하는데, 이때 가상과 허구는 당연하게도 정상적 규칙 밖에 있게 된다. 헤테로토피아의 경우에도 정상성을 벗어나 질적 차이를 갖는 공간을 말한다. 푸코는 현실세계의 바깥 공간, 빈 공간을 사유하며 반反-공간을 설명하며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사유하라고 말한다.


" 그것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의제기를 수행할 수 있다아라공이 말햇던 매음굴처럼 나머지 현실이 환상이라고 고발하는 환상을 만들어냄으로써아니면 그 반대로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정리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이라고 보일 만큼 완벽하고 주도면밀하고 정돈된 또 다른 현실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냄으로써한동안-특히 18세기에-식민지는 적어도 사람들의 계획 속에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했다물론 이 식민지들이 커다란 경제적 유용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거기에는 상상적 가치들이 결부되어 있었으며이 가치들은 확실히 헤테로토피아의 고유한 위광에 빚지고 있었다그리하여 17세기와 18세기 영국의 청교도 사회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시도했다."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들이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제기라고 한다면, 그 이의제기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공간 자체가 되어야 할텐데, 위 문단 같은 설명을 보자면, 그 당사자는 마치 현실의 착취관계를 허물어버리는, 오히려 착취자의 이의제기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는 특정 주체, 계급들처럼 보인다. 헤테로토피아는 정상성 바깥에서 정상성의 수호천사라도 된 듯하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헤테로토피아로 분류될 수 있는 장소는 50센트 권투 연습 클럽 활동의 장소요, 노조 회합의 장이며, 빌리를 돕기 위한 모금 행사장이 되기도 하는 마을공동체 센터다. 이 센터에서 빌리는 발레 수업을 구경할 수 있었고, 운명적 일탈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너무나 이상적이다. 그리고 실재한다. 지배자도 없고 탄광회사의 규칙도 자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마을 센터를 헤테로토피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센터는 대처리즘으로 상징되는 영국 사회의 규칙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유토피아도 헤테로토피아도 아니지 않는가. 마치 광부 재키의 집에 석탄이 떨어졌고, 피아노를 부숴 만든 장작이 그 난로를 가동시킨 것처럼, 마을 센터는 장작이 된 피아노이기라도 한 것일까.


재키와 토니 엘리어트 부자는 발레 관람을 위해 코벤트가든에 있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를 찾는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허겁지겁 들어선 그 공간은 2300여 개의 좌석이 있는 웅장한 극장이다. 과거에는 국왕의 지원을 받고 왕과 귀족을 위해 공연한 곳이었으나, 현재는 입장료를 낸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공연장이 되었다. 빌리에게 꿈의 공간이었다. 이제 빌리의 유토피아는 현실 공간이 되었다. 아니다, 빌리는 사실 성공한 발레리노로 로얄 발레하우스에서의 공연을 꿈꿨을텐데, 이를 두고 유토피아라고 할 수는 없다. 푸코의 지적대로 “사각형의 무대 위에 온갖 낯선 장소들이 연이어지게 만들어지는” 극장이기 때문에 헤테로토피아라고 해보자. 개인적 의식의 차원을 벗어나 사회적 회로를 돌려보면 이해할 수 있을까. 로얄발레하우스가 헤테로토피아로서 드러내는 정상성 바깥의 존재-사유는 어떻게 정상성들을 타격할 수 있을까.


재키와 토니에게 이 로열 발레 하우스는 어떤가. 관람자로 하나의 좌석을 배정받았고, 공연을 향유할 수 있으나 그들에게 그 곳은 어떤 공간이라고 하겠는가. 유토피아인가, 헤테로토피아인가, 현실공간도 아니라면, 도대체 코벤트가든 로얄발레하우스는 무엇일까. 노동자 아들 빌리가 수석무용수가 되었다, 로얄발레하우스에서.


누가 헤테로토피아를 만드는가. 일종의 제도적 공간들이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로 제시하는 공간들은 자본주의가 거대한 세계체제로 나아갈 동안 심한 부침을 겪었던 곳들이다. 푸코의 온갖 헤테로토피아들은 그 공간의 질적 경험들을 아예 지워버리거나, 정상성의 꼭대기를 향하고 있는 주체들을 환영한다.


"만일 자급자족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지만 바다의 무한성에 숙명적으로 내맡겨져 있는장소 없는 장소이자 떠다니는 공간의 조각인 배, 19세기의 거대한 배가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이 홍등가에서 저 홍등가로 이 항로에서 저 항로로 전전하면서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동방의 정원 안에 아주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것을 찾으러 식민지까지 갔다는 점을 고려하면우리는 배가 왜 우리 운명에서-적어도 16세기 이래로는-가장 거대한 경제적 수단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그것은 특출한 헤테로토피아이다배 없는 문명이란 자녀들이 뛰놀 만한 커다란 침대를 갖고 있지 않은 부모를 둔 아이들과도 같다그리하여 그들의 꿈은 고갈되고정탐질이 모험을 대신하며경찰의 추악함이 해적의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대체하고 마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


만약 빨간나라가 유토피아라면, 그 안에 헤테로토피아는 어떤 모습일까.


규정된 사회관계로 보자면 엘리어트 가족은 임금노동자 계급이며빌리를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하는 로얄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경제력을 갖고 있다그런데 이 영화는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의 결단 아래 빌리는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신분상승이 문제에는 두 가지 딜레마가 있고각각 다른 존재론적 함의를 갖는다그리고 이런 질문들이 연이어 나올 것이다성공한 빌리가점점 더 퇴락해져가는 광산촌 더램에서 여전히 분투하고 있을 형 토니와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빌리가 살던 골목길에 홀로 서 있곤 하던어린 소녀는 무얼 하고 있을까.


1대항공간이라는 대안도 가능할 것이다. 한데 우리말에서 '대항'은 맞선다 거스른다는 反의 정적인 의미에 더해, 덤빈다는 좀더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어감까지 담고 있다. 헤테로피아는 사회에 의해 고안되고 그 안에 제도화되어 있는 공간이며, 다만 그 존재 자체로써 나머지 정상 공간들을 반박하고 이의제기하는 공간이기에, '대항공간'보다는 '반공간'이 좀더 적절한 번역어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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