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그가 밀려나던 날 

멍멍이가 일없이 왜가리를 쫒기도 하고 

자전거 바퀴살이 묶인 채 산책길에 뒹글기도 하면 

도시에 더 무슨 반가운 것이 있으랴한다 

꺼슬한 청춘들이 얼어오는 두 발로 지치기도 하고 

부족해진 점심에 애닳도록 간식을 두리번하다

공원엔 김날리는 트럭들에 기름내 들썩이다

이것은 가는것이다


어찌하든 한 시간 끄적이기를 마치지도 못하고 멍하다.

평전들을 서렁서렁 넘기다보면 이름이 아니라 사회적 무의식이 드러나기도 한다. 


어느 잊지 못할 저녁, 아버지는 열여덟 살쯤 된 벤야민을 루더슈트라세의 이 나이트클럽에 데려가 위층 칸막이 좌석을 마련해주었고, 그 명당자리에서 벤야민은 몸에 달라붙는 흰색 세일러복 차림으로 바에 앉아 있던 창녀에게서 거의 눈을 떼지 않았다. 벤야민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그 후 오랫동안 그의 에로틱 판타지를 좌우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모든 수요를 사업과 연결시키고자 했는데, 이렇듯 가족의 유흥 수요까지 사업과 연결지으려던 것에 대해 아들 벤야민은 "무모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투기 기질"과 긴밀히 관련된 무모함이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이런 게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벤야민이 회고하는 아버지는 세도와 위엄을 지니면서 동시에 점잖고 정중하며 준법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감식안을 회고하는 대목, 예컨대 아버지가 와인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구두 바닥이 너무 두껍지 않으면 발볼로 카펫의 품질을 구분할 줄 알았다고 하는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당시 이미 가정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했던 전화로 통화 중일 때의 아버지는 가끔 평상시의 온화함과 상반되는 험악함을 드러냈다. 훗날 벤야민은 자신의 진로 문제로(그리고 처자식 부양의 책임을 회피하고 부모에게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하게 된 것과 관련된 문제로) 아버지와 여러 차례 심하게 다투는데(벤야민 세대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헝악함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 평전』)

 

면직업계의 거물이었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 상류층의 호사 취미인 여우사냥을 즐겼고, 멘체스터증권거래소 회원이자 잘나가는 독일계 이주민 클럽인 실러연구소의 운영위원장이었다. 매력적인 스타일리스트답게 엥겔스는 인생의 온갖 즐거움을 한껏 누렷다. 바닷가재 샐러드, 프랑스산 최고급 포도주 샤토 마고, 체코식 필젠 맥주와 비싼 여자들 등등. 그러는 한편으로 40년 동안 카를 마르크스를 먹여 살리고 그의 자녀들을 돌봐줬으며, 마르크스의 분노를 다독여주었다. 동시에 『공산당 선언』의 공저자이자 후일 마르크수주의로 알려지게 되는 사상의 공동 설계자로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데올로기적 동반자 관계의 반쪽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20세기 들어 마오쩌둥 주석의 중국에서부터 동독의 슈타지 국가까지, 아프리카의 반제 투쟁에서 소련까지 지구촌 인류의 3분이 1이 다양한 형태로 마르크수주의라고 하는 매혹적인 철학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정책을 설명하고 비행을 정당화하거자 정권 유지를 위해 자주 거론한 인물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엥겔스였다. ... 그는 때로는 잘못 해석되고, 때로는 잘못 인용되기도 했다. 『엥겔스 평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