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망不忘


어느 시대든 이러한 꿈을 향한 측면, 즉 어린아이 같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전 세기에 이러한 측면은 아케이드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의 교육이 전통 속에서, 즉 종교적인 가르침 속에서 그러한 꿈을 해석해준 데 반해 오늘날의 교육은 아이들의 기분전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프루스트가 하나의 전례가 없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속한 세대가 집단적 기억을 위한 신체적, 자연적 보조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이전 세대보다 더 가여운 상태로 방치된 채 고독하고 산만하며, 병적인 방식으로만 아이들의 세계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


나는 곧잘 쪼잔한 일에 빠져들어 앞뒤 가릴 것 없이 묻곤 했다. 곤경에 이르고서 이제 그 버릇을 고치겠거니 하겠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른바 '싹수가 노래' '싸가지'도 요령도 없는 종자였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대인관계가 없어, 그 대꾸들은 책을 향해 날아가고, 침묵 속에서 대갈들의 기미만 읽을 뿐이다. 공들여 돌이키면 조잡한 일이었고, 들이댔던 질문들도 특정 인물에 닿지 않았지만, 크고작은 파란을 일으켜 제 신세를 구부려뜨려왔던 것이다. 그 불망, 몇 개의 기억들을 불러와 <주체와 구조-사목 권력의 양상>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불충분하더라도 제 짝이 맞춰지고, 너덜거리고 바래버린 상태로 '형태를 잃게' 되었으면 한다.


국민학생 어디쯤, 《양치기 소년》을 수업시간에 들었다. 소년은 양을 지키는 일을 한다. 늑대가 나타나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소년은 어느 날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쳤고,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왔다. 소년의 거짓말이었다. 그 후로도 양치기 소년은 또 다시 거짓말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지쳐갔다. 그러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힘껏 외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 놈이 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양들은 늑대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아주 짧은 이야기로 듣고나서, 나는 그 소년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다급하게 캐물었다. 소년이 마을에서 쫓겨났나요, 감옥에 갔나요, 마을사람들은 왜 소년을 도와주지 않아요? 왜 거짓말을 했대요? 내 다급한 재촉을 가뿐히 노려보고 난 뒤, 그 노련했던 선생은 거짓말 하지 않기, 어른들 말 잘 듣기, 약속 지키기 등의 훈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나는 양치기 소년을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밤낮으로, 마을 밖에서 홀로 양들을 돌봐야 하는 소년은 매일 거짓말을 한다. 이야기는 너무너무나 불완전했다.


어떤 밤 양치기 소년의 꿈을 꾸었다. 거적을 두르고 작대기만 가진 양치기 모습만 비추기도 했으나, 대개는 사연을 갖고 꿈 속을 찾아왔다. 내 꿈 속에 나타나 호소하던 소년은 거짓말 했던 걸 숨기지 않았다. 마을이 떠들썩하게 잔치를 열던 날, 등성에 서서 지켜봐야만 했던 소년이 일부러 심술나고 질투심에 가득 차 외치면서 거짓말이 시작되었단다. 


어떤 날은 실제로 나타났던 늑대들이 마을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날 꿈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게, 온힘을 다해 “저기 늑대가 도망가고 있어요 보세요 저기요저기” 외치는데 말소리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비명소리만 내다가 깨어났었다. 


더러 다친 양을 도와주려고 마을 사람들을 꾀어 낼 거짓말을 했다 한다. 아주 가끔은 너무 심심해서 늑대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로움을 참을 수 없어 늑대가 출현하길 바랐다는 마음을 전하는 소년이 불쌍해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꿈이라는 것도 잊고, 성심껏 대꾸를 해주곤 했는데, 양들과 친해지라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혼자라도 할 수 있는 놀이같은 걸 일러 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혼자 보내지 말았으면 했고, 실제 일어난 일 마냥 늑대의 출현을 알리기도 했다.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멈출 수 없었듯이 나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꿈 속에서조차.


머리통이 크고 나서는 양치기 소년의 꿈은 더이상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글을 쓰다가 불쑥 깊은 그림자를 끌고 나타나기도 했다. 사회학 책을 읽다가, 정신분석에 대해 배우다가, 페미니즘의 계보를 찾다가 문득 나타나 묻곤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라면 양치기 소년/소녀에게 무슨 말을 할까. 그 불망의 꿈들은 무한 재현의 미디어, 이미지로서 정치, 이야기로서의 정체성이 범람하던 시대의 사소한 반영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공동체적 시선과 감각으로 양치기 소년을 떠올리지 못한다. 양치기 소년이 이솝 우화 속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집단적 결속과 사회화의 문제로 받아들였어야 한다. 개인을 내세우기 위해서 보편을 특수화로 안내하는 일관된 질서와 방법을 동원하려는 의지를 가졌어야 한다. 내면에 신이나, 위인, 민족이든 또는 스승을 지녔어야 한다. 인간의 길을 벗어나지 않을 준거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만이 원칙이고 자신만이 존재하는 땅에 자연이 생성될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분명한 나의 문제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꿈 속의 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걸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을 합당한 행동으로 이끌어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하는데만 전전긍긍했다. 따뜻한 보호 속에서 생활하고 싶음이 내가 가진 소망이었었나 보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보호가 그냥 올 리도 없는데, 마을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런 면에서 양치기 소년 읽기 매뉴얼의 문제는 나의 고질적인 병의 문제이다.


양치기 소년을 놓지 못하는 한심함은 종결을 두려워하는 시대의 영향도 있다. 어느 버전, 어느 시즌에서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텐데 후속작을 계속 만들고 있다. 양치기 소년에 대한 변론이 비루하고 공황에 빠진 내 삶에 대한 변론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면죄부를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가 도대체 뭐가 면죄부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나는 불안장애에 빠졌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꿈으로 만났던 양치기 소년이 맹랑한 대갈만이 아니듯 이 글의 최후도 그러하길 바란다.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점은 사회를 불변항의 시스템이라 당연시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대중이 아닌 '사회' 자체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꿈 속의 양치기도 마냥 무시하기에 무겁다. 만약 질문을 바꿨다면 어땠을까 …마을 사람들이 보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내 꿈 속에 선 양치기 소년은 반복적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을 조장하며 권력을 즐기는 종자가 아니었다. 늑대를 불러내 공동체를 와해하는 흑마술사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들판을 가로질러 잃어버린 마지막 양 한 마리를 찾는 '예수'처럼 결연하기도 했다. 양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사고를 치더라도 양의 안위를 걱정하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불안장애 이전이다. 지금부터는 공황상태에 빠진 환자의 병상기록이라고 봐도 좋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양치기 소년 읽기의 마지막 매뉴얼을 낭송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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