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과 3인칭에서 2인칭으로, 그리고 비()인칭/무인칭/()인칭으로 바꾸어 말하려 해도, 여전히 전지적 시점이란 살아있다. 이제 무()인칭이 아니라 0인칭을 생각한다. ()인칭의 발견이다.]


사회란 말을 떠올릴 때마다 무()인칭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개인의 합을 초월하는 '사회'는 다자多者를 품을 수 있도록 무인칭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회는 권력의 원천으로서, 발전의 법칙으로서 일자一者의 말을 한다. 이익사회 속에서 수많은 개체들의 난립으로 보이지만, 실은 기존 사회 속으로 재결합할 여러 통로(사회적 관계)가 증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더 나아가 국가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다. 사회는 이름 없음에서 시작하지만, 끝내 이름을 부여하는 장소가 되어왔다. 무인칭은 실패의 장소다. 자연이며 인간이며 사물인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서 공인칭이라는 비어 있음을 요청해 본다.


왜 탈인간, 포스트휴먼을 상상하겠는가. 근대가 만든 인간상이 무참히 깨져가고 신선한 관점으로 이동이 필요한 학자들의 상품이기도 하겠으나,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근본 불안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로 발생되는 실천력을 사회-역사에 새겨넣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실패했고 근본적으로 이탈해 있다. 사회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대개 불분명한 사랑 속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계몽의 이상이었던 <성숙한 인간 사회>는 냉소 속에서 모욕을 견딜 운명이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어쩌면 도덕적이고 본질적인 명령이, 통일된 디딤판을 갖지 못하게 되었음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의 판단으로, 10분 만에 수백 명의 생명을 구하기라도 한 것처럼 뽐내듯 말한다. 이란에 폭격될 무기가 모두 파괴되어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는 상태라도 되었다면, 트럼프의 그 위선에 박수를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트럼프의 뻔뻔함과 파렴치함으로 인해 보호되는 사회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방법' 에 대해서는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고, 세계는 불만족이 아니라, 끔찍함으로 연결되는 <지금여기>의 곤란은 '()/() 인간'을 생각하게 한다는 말이다. 과학자에게서도, 형이상학자에게서도, 심지어 종말론자들에게서도 이 흐름이 빗겨가지 않는다. 이 글은 인간적인 것들을 빗겨가는, 아주 작은 상상을 해보려는 시도의 출발이다.


몇 가지 공인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본다

- 불안과 고통을 삭제시키려는 <'인간적'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 결핍을 채우려고 <발생을 가속화시키지 않는다>. 

- 쾌락의 활용에 <조직적 양식>이 형성되지 않는다


몇 가지 가능한 조건을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우선 '놀이하는 인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놀이하는 주체는 0인칭의,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지난 해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의 저자가 강연하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우리는 왜 타인을 미워하는가」라는 제목이었다.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라는 동화를 통해, 줄리엣 미첼이 말하는 동기간 관계가 인간조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부모 곰과 아기 곰이 살던 집에 골디락스가 나타나 아기 곰의 스프와 의자와 침대를 뺏어간다. 아기 곰에게 골디락스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타인”이 되었는데, 골디락스는 곰의 집에 침입한 이방인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여자동기 sister이라는 것이다


미첼은 『동기간-성과 폭력』을 통해, 오이디푸스의 삼각구조가 말하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 주목하지 않고, 측면에서 옆 사람의 자리를 확보해줄 수 있는 동기간, 친구간, 측면관계의 생성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동기간인 아기 곰과 골디락스는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수평적/측면적 생활터전을 발생시킬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아기 곰의 증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차이를 존중만 해서는 안되고, 차이와 동일성을 동시에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놀이연구가 이상호의 말을 인용하며, 아이들이 규칙이 있는 놀이를 통해서 문화의 기본, 황금율을 배울 때, 허약한 체력과 소심성, 정서불안 등을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청소년 문제가 “놀이 왜곡과 부재”라는 진단 아래 놀이가 아이들 자신을 변화시키고 함께 노는 사람을 변화시키며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강연자가 미첼을 강조하는 것은 부모자녀 관계가 커다랗고 수직적인 차이인 반면, 형제자매 관계는 작은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 작은 차이(일상적인 것들)에서 미움과 증오의 트라우마가 생성되기 쉽기에 증오가 없는 사회를 위해서는 자발적인 놀이문화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미첼의 『동기간-성과 폭력』에서 중요한 점은 모자관계와 사회화 과정에 필요한 문화적 토대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위치를 확보할 기반으로서의 '여성의 자리', 페미니즘의 정치적 지형이다. '동기간' 보다 '성과 폭력'에 집중하게 된다는 말이다. 줄리엣 미첼은 여성운동의 원로이며 마르크스와 정신분석을 결합해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사회주의 정신분석가이다. 미첼이 페미니즘을 연구하며 동기간에 집중한 것은 남녀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에 두어야 그 이후의 여성주의가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내 생각과는 별개로 미첼이 사회적 형제애를 내세워, 증오로 얼룩진 측면관계를 복원하려 한 점을 강조하고, 놀이를 통해 그 가능성을 짚어준 점은 우리가 곱씹어야 할 중요한 사회적 의제다.


쌩퉁맞지만, 그 무난한 주장 위에서 미끄러지는 하나의 지점으로 인해, 그 강의는 지루해지고 말았다. 강의 말미에 요즘 아이들이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에 미친듯이 반응한다고 냉소적으로 언급하며, 왜 그런 것들에 집착하는지 안타깝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현상들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볼수록, 그 무의미함이야말로 의도이면서 의도가 아니며, 사회적 구속도 자기구속도 아니지 않은가. 우적거리며 음식물 씹는 소리, 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 쓱삭쓱삭 필기하는 소리 … 규율이면서 규율이 아니기도 한, 신체적이면서 정신적인 것이며, 언어도 아니고 기호도 아닐 뿐더러 생성도 아닌 그 효과음들이야말로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자들이 누리기 좋은 최대한의 쾌락이며, 저항이 아닐까.


그렇다면 저자가 크고 단단한 것들로 사유를 확장해가려고 동화나 놀이 같은 작고 사소한 것들을 이용하는 것일까. 작은 것들이 빛나던 전통이 사라진 세계의 결과는 어둠을 잃은 세상이라는 도식이 전부일까. 애써 그 주장을 밝게 끌어올려, 내 방식대로 해석해보자면, 이익사회로 들어서면서 공동체가 가능했던 공동사회가 사라졌고, 타인의 자리-옆자리 관계가 불가능해졌지만, 평등과 자유, 황금율 같은 향유해야 할 이념들을 부르고 안착시킬 문화를 차근차근 가꿔 나가야 한다. 저자가 가진 폭넓은 적용력과 개념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돋보이는데도 굉장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보편성, 황금율, 개념, 관념 … 놀이하고, 다양성을 확장하고,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적 자유에 매몰되던 세계를 공적 자유를 꿈꾸는 세계로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는 논리에는, 미안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90년대 학생운동이 '생활 소모임'운동으로 전환되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다함께 전통놀이와 사물놀이를 즐기고, 꾸준히 학습하고, 생활 모범을 통해 동력을 확보해 가는 수평적 소모임들 말이다. 놀이하는 학교, 모험하는 사회는 생기있는 마을 공동체를 상상하기에 더없이 좋다. 그러나 이 시대가 어두운 것은 놀이터에서 유리조각을 줍던 페스탈로찌가 사라져서도 아니고, 동기간 형제애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도 아니고, 놀이 문화 때문도 아니다.


놀이 이론은 <사회적인 구속>이며 <자기결박>이 되어야 하는가에 의문을 던져본다. '놀이'의 영역이 어디까지일까.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포켓몬 고」같은 증강현실 게임도 놀이일까. 예를 들자면 위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저자는 대중문화의 상상력이란 오락이지 문화가 아니라고 단언했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등을 전쟁 • 모험과 일상을 분리시킨다고 비판적으로 본 점으로 미루면,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놀이를 두고, 아래 표와 같은 대치상황이 벌어졌으나, 여기에 하나의 칸을 만들어 덧붙인다. 이동연이 지적하는 '서드라이프' 정도가 되겠다.


놀이하는 인간은 사유가 정지된 인간이다

놀지 않는 사람은 병든 사람이다

상징계 진입에 실패하고

인생에 아무런 쓸모도 없이 게임에 몰두한다

자극이 부족한 삶이 내적 동기부여를 빈곤하게 한다

놀이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보상물이다


「서드라이프란 무엇인가; 기술혁명 시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관하여」, 이동연

온라인 게임 등은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가상공간 안에서 생생한 현장감을 즐기게 하지만, 그 자체가 현실공간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융합하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상공간이 실제 현실 안으로 들어와 개인의 감각을 활성화시키고, 놀이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포켓몬 고'는 이러한 현상의 아주 단순하고 초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서드라이프 Third Life라고 명명하고 싶다.


~ 서드라이프의 시대에는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의 공간 안으로 들어와 그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특이점을 생산한다. 기술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소멸시켜 새로운 감각의 순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특이점』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은 ~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른바 아서 C. 클라크의 세 번째 법칙을 떠올린다. 조엔 롤링의 해리포터 이야기 ~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포터의 모든 마법은 내가 책에서 소개할 기술들을 통해 틀림없이 실현될 것이다. 퀴디치 경기, 사람이나 물건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은 완전한 가상현실 뿐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나노 기계 장치를 통해서 실현가능하다.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 혹은 로봇틱스에 의한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 환경의 탄생이다.



생물학적 인간을 뛰어넘는, 기술과 존재가 뒤섞이는 새로운 인류를 예측하는데 게임이나 대중문화가 차지하는 역할은 적지 않다. 포켓몬을 포획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6개월 동안 87km를 걸었다. 감각을 이용하고 가상현실에 집중하며 더불어 증강현실에서 살아간다. 게임은 놀이가 가진 특성을 포함해 발전해 가는 중이고, 여전히 놀이처럼 현실과 가상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 하는 하나의 산업이고 문화다.


다시 0인칭의 가능성을 놀이에서 보는 문제를 생각한다. 이어지는 부분은 다음 글에서 만나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가면과 욕망』,『천 개의 고원』,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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