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章, ‘Kant에 대한 반응’, 3節, ‘분석적 진리’)
3. 분석적 진리
Kant의 최초 착상은 이렇다: ‘분석적’ 진리가 어떻게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지닌 개념들을 ‘분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때의 분석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 Kant가 지녔던 생각, 즉 분석이란 어떤 개념을 그 “부분들”로 나누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은 과도하게 단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Frege는 좀 더 중립적인 태도로 오로지 논리와 정의(定義)definition에만 의존하는 증명proof에 관해 말하는바, 여기서 Frege가 말하는 ‘정의’란 Kant가 ‘분석’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동시에 그보다 덜 제한적인 것이었다. 확실히 Frege는 개념에 대한 모든 올바른 정의가 그 개념을 구성하는 “부분들”을 명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1)
1) 관계의 ‘선조성(先祖性)’‘ancestral’ of a relation에 대한 Frege의 정의는 확실히 이런 식으로 기술될 수 없다. R을 임의의 관계라 해보자. 그러면 (非고유적인improper) '선조성' R*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R*(a,b) ↔ ∀F((Fa∧∀xy((Fx∧R(x,y)) → Fy)) → Fb)
(中略)
하지만 여기서 나는 Frege의 정의와 관련하여 조금 다른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Frege식 정의개념은 분석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가 칭한바 논리 역시 분석적인 것들의 항목에 포함시킨다. 그의 설명이 주목시키고자 하는 바는 일상적으로 이해된 정의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진리도 보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표준적인 사례를 들어보자면, ‘총각’의 정의는 그 단어가 ‘미혼 남성’과 동의어임을 말해준다. 이 정의를 적용하면 다음문장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
는
모든 미혼남성은 미혼이다.
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후자의 참을 보장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자연스런 답변은, 또 다른 추가적인 정의라든가 의미에 대한 추가적인 분석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인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Frege가 보기에 논리적 진리는 자동적으로 분석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이는 우리가 애초에 시작한 지점인 Kant의 단순한 착상에 균열을 낸다. Kant의 말대로 우리가 이미 지닌 개념을 분석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사실(그것이 정말 사실이긴 하다면)만으로는, 우리의 선험적 지식이 전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Frege식 정의개념을 따를 경우, 우리가 논리적 참을 어떻게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지 역시 설명되어야 한다. Frege 자신은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에 나는 분석성을 설명하기 위한 좀 더 야심적인 시도로서, 앞서 언급된 한계점들(가령 ‘분석’을 명시적 정의explicit definition에만 한정하는 것)을 극복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논리학 자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 역시 설명해내고자 하는 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바로 다음과 같다: 분석적 진리란, 단순히 그것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단어들의 의미에 의해 참인 것으로 결정되는 진리이며, 이는 논리적 참을 포함하여 모든 분석적 진리에 적용된다. 이러한 관점의 사례로서 A. J. Ayer가 『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 4章에서 제시한 설명을 살펴볼 것이다. 영어권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이미 익숙할 것이기 때문이다.
Ayer는 논리학과 수학의 진리가 분석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친숙한 정의를 제시한다: “한 명제proposition의 타당성validity이 그 명제에 포함된 기호들의 정의에만 의존할 경우, 그 명제는 분석적이다.”(78쪽)2) 그런데 이 뒤에 이어지는 논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정의라 생각하는 바에 거의 호소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가 다양하게 칭하는바 ‘언어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77쪽), ‘단어의 기능’(79쪽), ‘우리의 단어사용을 지배하는 규약(規約)convention’(79쪽), ‘단어를 특정 방식으로 사용하겠다는 우리의 결정’(84쪽) 등에 관해 말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경우 그가 사용하는 용어들이며 이는 특히 논리학의 법칙들에 대해 논의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2) Ayer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명제는 문장에 의해 표현된다. 문장은 기호들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명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본문의 정식화는 이 구분을 무시한 다소 부주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리 깊이 천착할 사안은 아니다.
(中略)
Ayer의 핵심 주장은, 이런저런 명제들이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음이 “언어적 규약linguistic convention”들 그 자체만으로도 보증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유일하게 제시해볼 수 있는 명백한 답변은, ‘언어적 규약’이란 여차여차한 것이 참이 된다는 규약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규약들 중 일부, 가령 논리적으로 올바른 추론규칙rule of inference에 상응하는 규약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문 형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여차여차한 명제가 (규약에 의해서든 혹은 여타 수단에 의해서든) 참이라면, 여차여차한 다른 명제들 역시 참이 된다. 하지만 어떤 명제가 그저 규약 자체에 의해서 참이 된다면, 적어도 일부 규약들은 직접적으로outright 참을 약정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다.3) 다소 인신공격처럼 느껴지겠지만 어쨌든 내가 논평하고자 하는 것은, Ayer 자신은 추론규칙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초점은 분석적인 명제였기 때문이며, 그는 분석명제가 단순히 우리의 언어적 규약에 의해 참이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도 그는 연역이 분석성에 관한 논의와 무관하다는 점을 논리학을 염두에 둔 맥락에서 명시적으로 표명한다.
모든 논리적 명제는 그 자체로 타당하다. 논리적 명제의 타당성은 그 명제가 어떤 체계에 포섭된다거나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특정 명제로부터 연역된다는 데에 의존하지 않는다. 논리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분석명제를 발견하거나 어떤 명제에 분석성을 인가하는 데에 유용한 수단이긴 하지만, 그러한 목적에 대해서마저 그 자체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분석명제에 대해 오로지 그 형식에 의해서만 분석성 여부가 판별될 수 있는 표기체계를 생각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81쪽)4)
그렇다면 Ayer의 최종 결론은, 단순히 언어적 규약이 명제의 참을 즉각적으로 약정하며 그렇게 약정된 것들이 바로 분석명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명제들 그리고 오직 그런 명제들만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
3) 자연연역natural deduction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물론 Ayer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할 당시에는 자연연역법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대를 제기할 것이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참이라 규정되는 것이 일절 없을 경우에는 그 반대가 충분하겠으나, 우리는 본문에 제시된 바와 같은 식의 조건화 원리를 감안해야한다. 그런 식의 규약에 따르면, ‘P’가 참이면 ‘Q’가 참이라는 것이 규약일 경우, ‘P이면 Q이다’가 참이라는 것 역시 규약이다. 이는 한 규약을 다른 규약에 적용한다는 착상과 상당히 복잡한 방식으로 연관되어있지만, 이하에서 이런 복잡한 사안은 대체로 도외시될 것이다.
4) 짐작건대 여기서 Ayer는, 가령 Wittgenstein이 『論考Tractatus』(1921)의 4.27-4.442 등지에서 발전시킨 바와 같은, 진리함수들에 대한 ‘명료한 표기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사실 Ayer는 전문적인 논리학자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가 염두에 둔 방식으로든 혹은 다른 방식으로든, 1계 양화논리마저 결정가능decidable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어규약이 (심지어 조건적 진리도 포함하여) 진리를 그저 약정할 뿐이라면, 이러한 약정은 의미meaning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에 제시될 수밖에 없는 대답은, 우리가 특정 문장을 참이라고 약정함으로써 그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에 즉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단어들은 그것이 나타나는 문장의 참됨을 보증하는 의미를 지니게끔 약정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적 규칙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의미를 명시하되, 이를 다소 우회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셈이다. 무엇이 참인지가 언어규칙에 의해 먼저 명시되고 나면, 그로부터 우리는 단어들의 의미와 관련된 사안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석적 참은 약정된 참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통적 의미에서 ‘분석적’이라고, 즉 ‘의미에 의해 참’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문장을 참이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 자체가 약정되기 때문이다. 의미가 그 자체만으로 참을 보증하는 방식에 대해 이와 다른 설명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이설은 궁극적으로는 소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이 개념분석에 적절한지 여부를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의 논리적 지식과 관련하여 무엇을 함축하는지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논리규칙들이 단순히 우리에 의해 약정되며 약정되는 것은 곧바로 참이어야만 한다고 선제하지만, 사실 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Prior가 제시한 ‘tonk’ 연결사이다(Prior, 1960[「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추론티켓The Runabout Inference-Ticket」]). Prior가 관련 논문을 저술할 당시에는 자연연역법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기에, 그 역시 여기서의 논의와 유사한 방향에서 이 사례를 제시하였다. 새로운 문장연결사로서 ‘tonk’가 도입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이 연결사의 문법은 논리학의 ‘그리고’ 및 ‘또는’과 동일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tonk’의 의미는 자연연역의 두 가지 규칙을 만족하는 것으로 약정되는바, 다음과 같이 그 첫 번째는 도입규칙이고 두 번째는 제거규칙이다: 임의의 명제 P와 Q에 대해 다음 논증들은 올바르다:
물론 위 예를 Ayer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바꿔 쓰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문이 언제나 참이 된다고 약정할 수도 있다:
P이면, P tonk Q이다.
P tonk Q이면, Q이다.
명백히 이러한 약정은 성공할 수가 없다. 올바른 추론에 대해, 혹은 ‘…이면 …이다’의 의미에 대해 우리가 가진 기존의 ‘약정’들을 계속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P와 Q가 어떤 명제든지 간에 다음과 같은 논증을 늘상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혹은 다음 조건문을 항상 옳은 것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P이면 Q이다.
동일한 가정 하에서, 우리 언어에 이러한 ‘tonk’ 연결사가 부가될 경우 그 언어가 非일관적(가령 Post가 말한 의미에서의 비일관성으로서, 모든 문장은 어떤 것이든 증명 가능하다는 것)이게 됨을 쉽게 보일 수 있다. 이로부터 이끌어내야 할 교훈은, ‘tonk’가 이런 사례들을 올바른 것으로 만들어주는 의미를 갖는다고 약정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문장연결사도 그런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친숙한 사례로서 Grelling의 역설을 들 수 있다. 내가 당신에게 ‘타술적(他述的)인heterological’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약정한다 해보자: (i) 이 단어는 형용사로서 통상적인 형용사와 동일한 문법을 지니며, (ii) 이 단어는 모든 형용사 x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타술적이다’는 x에 대해 참이다 ↔ ¬(x는 x에 대해 참이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와 ¬의 통상적인 의미를 가정한다면 내가 시도한 약정은 모순으로 이끈다. ‘타술적이다’는 스스로에 대해 참이 아닐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스스로에 대해 참이 되며, 이에 우리는 또다시 위의 약정이 틀렸다고 추론해야 한다. 모순문은 참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어떤 단어도 모순을 참이게 만드는 식의 의미를 지닐 수는 없다. 약정될 수 있는 것에는 모종의 제한이 존재하는바, 논리 자체가 그러한 제약을 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논리 자체가 단순히 약정되는 것이라면, 논리가 약정에 대해 어떻게 그런 식의 ‘재가권’을 가질 수 있는지는 불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기서 우리가 본격적으로 씨름해야 할 사안은 아니다. 의미에 관한 임의의 약정들 집합에서 특정 일부를 다른 것들에 비해 어떤 식으로든 더 ‘권위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회의적이라고 해도, 그러한 임의의 약정들 집합이 모두 일거에 만족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Ayer가 옹호하는 형태의 규약주의conventionalism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규약주의의 기본 착상은 선험적 지식이 의미에 대한 지식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의미는 우리에 의해 약정되는 것인바, 우리 스스로가 약정해놓은 바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놀라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바는, 우리 스스로가 약정해놓은 것을 아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외에도 여전히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결정한 약정이 정말로 성공적인지 여부, 약정들이 진정한 의미를 도입하는 데에 (규약주의 이론 측면에서) 성공했는지 여부 등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규약주의는 이러한 사안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일절 제시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말해온 바는 그러한 사안들을 아는 데에 논리학이 어떻게든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던바, 이는 다음과 같은 나의 두 번째 반론으로 이끈다: 규약주의는 우리의 논리적 지식을 어떤 식으로든 만족스럽게 설명해낼 수 없다.
기본적인 요지는 무적 단순하다. 논증 목적상, 참이라고 약정되는 것의 참됨을 우리가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을 일단 받아들여보자. 그 경우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약정되는 바의 논리적 귀결(歸結)logical consequence 역시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약정의 논리적 귀결 그 자체는 약정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알려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런 설명도 제시되지 않은 셈이다.
이러한 요지는 정통적인 명제논리에서 골라낸 극도로 단순한 사례를 통해 예시될 수 있다. 이를 선택한 이유는 약정된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데에 아무런 불합리함도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리-함수들의 의미는 그것들에 대한 진리표에 의해 주어진다. 이제 진리표를 통한 계산의 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가령 ‘P∨∼P’라는 式에는 항상 ‘참’값이 할당됨을 보여주는 단순한 계산이다. 이를 도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진리표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요소들로만 축소된) 추론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i) | ‘P’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
(ii) | ‘P’가 참이라면 ‘P∨¬P’는 참이다. |
(iii) | ‘P’가 거짓이라면 ‘¬P’는 참이다. |
(iv) | ‘¬P’가 참이라면 ‘P∨¬P’는 참이다. |
따라서 다음과 같다:
(v) | ‘¬P’가 참이라면 ‘P∨¬P’는 참이다. |
(i)-(iv)까지의 전제들은 논증의 목적상 직접적으로 약정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i)은 문장문자sentence-letter의 용법에 대한 규약, 즉 문장문자들은 참 혹은 거짓이라는 확정적인 진리치를 갖는 문장들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규약에 의해 주어진다. (ii)와 (iv)는 ‘∨’ 기호를 정의하는 선언문 진리표에 의해 주어진다. (iii)은 ‘¬’ 기호를 정의하는 부정문 진리표에 의해 주어진다.) 하지만 결론 (v) 그 자체는 직접적으로 약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그것은 최초 약정의 귀결이이라고 주장된다argued. 전제들의 참됨을 선험적으로 안다고 가정했으므로, 이 논증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결론의 참됨 역시 선험적으로 안다고 추측할 것이다. 하지만 전제들은 직접적으로 약정된 반면 결론은 그렇지 아니하다. 이보다 훨씬 복잡한 논리식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 경우에도 우리는 최초의 규약을 명백히 이해하지만 그 규약들이 여차여차한 특정 식에 야기할 효과는 전연 알지 못할 것이며, 후자를 파악하게 되면 그럼으로써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의 시작점이 선험적 지식이었다면 그 새로운 지식 역시 명백히 선험적인 것이다.
혹자는 ‘존재론적’ 견지에서 말하길, 전제들의 참은 그 자체만으로도 결론의 참을 ‘결정’하거나 ‘보장’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응수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요점은 그런 의미에서 존재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인식론적인 것이다: 결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제공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바는, 그러한 요인에는 전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뿐만 아니라 결론이 그것들로부터 따라 나온다follow from는 사실을 ‘이해하는see’ 우리의 능력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나는 전제에 대한 지식이 직접적 약정에 대한 지식으로 설명된다는 점을 논증의 목적상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제들로부터 무엇이 따라 나오는지를 ‘이해하는’ 능력 자체는 약정에 관한 지식이 아니다. 결론은 단순히 따라 나올 뿐인바 우리는 이를 ‘이해’할 수 있지만, 이는 따라 나오기로 약정된 것이 아니다.
이러난 논지에 대한 논증이 요구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이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기본 착상은 최초 약정이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의미가 파악될 수 있다면(그리고 이 경우 의미는 분명 파악될 수 있어야 한다), 최초 약정들의 수는 유한할 것이며 사실상 상대적으로 무척 적을 것이다. 하지만 상기한 바와 같은 단순한 경우에마저 그 약정들은 무한하게 많은 귀결들을 갖는다. 따라서 그 모든 귀결들 자체가 약정일 수는 없다. 이러한 반론은 Quine의 유명한 글 「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1936)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제시되었지만, 거기 제시된 논증은 일반화로부터 그 사례를 얻는 문제에 더 집중한다. 왜냐하면, 최초 약정들이 무한하게 많은 귀결을 가질 경우, 그 약정들은 일반문장 형식으로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의 예시를 활용하자면) ‘임의의 명제 “P”와 “Q”에 대해, “P”가 참이면 “P∨Q”는 참이다’와 같은 식으로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경우 우리의 추론은, 임의의 명제 ‘P’에 대해 그 부정인 또 다른 명제 ‘¬P’가 존재함을 그 약정으로부터 추론하는 식으로 진행될 것이며, ‘P’가 참이면 ‘P∨¬P’는 참이라는 것이 그 경우에도 성립할 것이다. 이것 역시 최초의 일반 규칙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특정 사례에 적용하는 하나의 추론이다.5) 나의 논의와 달리 Quine의 글은, 이러한 추론이 일반적인 약정으로부터 특정 사례들로 진행하는 추론일 뿐만 아니라, 다수의 특정 사례들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연역되는 추가적인 결론으로 진행하는 추론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두 가지 모두 우리가 고려해 보아야 할 적절한 사항들이다.6) 어쨌든 전반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의미-부여적인 약정meaning-giving stipulation들로부터 어떻게든 단어의 의미를 배우고자 한다면, 그러한 규약들의 수는 유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규약들로부터 귀결되는 바는 잠재적으로 무한하며, 명백히 우리는 실제로 무엇이 하나의 귀결인지를 종종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이해’란 전통적으로 선험적인 것이라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 경우 따라 나오는 바는 선험적 지식이 의미-부여적인 규약들(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 이 경우에도 하나의 추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최초 규칙을 메타언어적 정식으로 바꿔 시작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본문의 규칙을 메타언어적으로 바꿔보면 ‘임의의 식 φ와 ψ에 대해, φ가 참으로 해석되면 φ∨ψ는 참으로 해석된다’이다. 다음으로 ‘P’가 식이며 따라서 ‘¬P’도 식이라는 추가전제가 필요하다. 이 모든 전제들을 합침으로써, ‘P’가 참으로 해석되면 ‘P∨¬P’는 참으로 해석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6) Quine의 「규약에 의한 진리」에서 제시된 또 다른 요점은, ‘…이면’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간주되는 규칙을 진술할 때마저 ‘…이면’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P’가 참이고 ‘Q’가 거짓이면, ‘P이면 Q이다’는 거짓이다.) 따라서 ‘…이면’의 의미를 말해준다고 가정된 약정을 이해할 수 있기 전에, 그 단어의 의미를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 역시 규약주의 이론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긴 하지만, 이 반론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독창적인 방식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그러한 시도는 Boghossian, 1996 및 2000에서 제시된 바 있다.)
David Bostock, Philosophy of Mathematics, Wiley-Blackwell, 2009, 74-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