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목을 읽고 정말로 놀랐습니다.
전영애 선생님의 ‘스케일‘과
‘제대로‘에 대한 수준 때문입니다.
늘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저라면 떠 올리지도 못했을 선물을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재대로 지으셨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꽤 여러 편의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선생님의 이런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여준 내용은
없었던 것 같아요.
‘괴테 금메달‘을 받으셨는데 이 메달의 의의,
독일에 지으신 시의 정자,
독일에서 동생분의 사진과 함께 내신 시집 등은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쉬운 대목입니다.
노학자의 연구 성과에 대해
제대로 다루어주는 기사나 방송, 책이 있었으면 합니다.
천안에서 정자를 다 지어서, 다시 헐어서, 컨테이너에 실어서 일산에 가서 소독을 해서 포장을 하고, 다시 컨테이너에 실어서 부산으로 가서, 배로 독일 북쪽 끝의 항구 브레머하펜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컨테이너가 실어 동남쪽 끝 파사우까지 갔다. 파사우에 내려서도 산비탈인 건축지까지의 수송이 만만치 않았다. 화물 박스를 직선으로 늘어놓으면 길이가 24미터가 되었고, 하중은 승용차로 운반하자면 열여덟 대 정도가 필요한 것이었다. 터는 독일에서 별도로 닦아놓았고, 그 닦아놓은 터에다 나와 내 동생이 한옥 전문가 일곱명과 함께 가서 호텔에 묵으며 재조립을 했다. 긴 수송 기간을 생각해서 공사 기간을 오래 잡았는데, 독촉도 많이 했건만 결국 일이 늘어져서 한겨울에 공사를 시작하게 된 탓에 한파의 내습으로 마무리를 못하고 일단 귀국을 했다. 날이 좀 풀린 다음 다시 와공 두 명과 함께 가서 2차 공사를 했다. 마침내 공사가 끝나고 정자에는 ‘시정‘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독일에 정자를 세우는 일을 몹시 기뻐하셨던, 내 아버지의 글씨이다. (아버지는 정자를 보시지는 못하고 돌아가셨다.)
- <도나우 강변에 지어두고 온 ‘시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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