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으로서의 자은은 하지 않을 일을, 관직에 있는 자은이라면 망설임 없이 할 것이었다. 거인의 손가락 중 하나이기에 어딘가 구름 속에 있는 머리가 시키는 대로 행했을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더 큰 힘에 종속되어버렸다. 그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대신 본연의 모습과는 멀어지고 있었다. 스스로만 느끼는 줄 알았더니 곁의 인곤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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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메모리>를 봤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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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출신 미셸 프랑코 감독의 영화입니다.

13년간 알콜중독자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로 의지가 굳고, 돌봄센터에서 일하면서 13세 딸을 홀로 키우는 실비아가 나옵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문에 열쇠가 네 개나 달려있고, 냉장고 수리기사도 여성기사로 요청할 정도로 조심스럽습니다.

어느 날,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여동생이 이제 데이트도 좀 하라고 하면서, 같이 동창회에 가자고 합니다.

동창회에서도 물만 마시며 춤을 추거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가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는 실비아 옆자리에 앉자 그녀는 조용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옆자리 남자가 집앞까지 따라와서 비가 퍼붓는 밤에도 꼼짝하지 않고 계속 그자리에 있습니다. 조심성 많은 실비아는 많이 걱정이 되서 딸에게 창문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합니다.

범상치 않은 도입입니다.

성장 영화라고 봤습니다. 어떤 면에서 멈춰있던 부분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는 어른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보호자인 어머니를 지키고 곁에서 응원하는 열세살 딸이 나옵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남자 사울과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낸 여자의 사랑 이야기가 큰 줄거리이지만, 그 안에 각자의 아픔이 나옵니다.

알콜중독자 모임에서 “바꿀 수 있는 건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건 받아들이는 지혜를 주소서”라는 기도를 합니다. 이 기도대로 실비아는 행동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혹은 처음으로 제대로 느낀 사랑 앞에서 두 번 도망치지만,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그것도 제대로. 영화포스터는 사랑을 받아들이기 전,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신뢰감을 잘 나타내줍니다. 옆에서 자다가 울고 있는 사울을 위로하다가 같이 잠든 실비아의 모습입니다.

한편 외할머니와 엄마 사이가 왜 안 좋았는지 몰랐던 딸은 자초지종을 이해하게 되면서, 아주 친한 이모에게 왜 그때 외할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이모는 자신도 어렸었다도 합니다. 이모도 마음 한켠에 웅크리고 있던 여덟살 꼬마에서 세 아이의 엄마로 돌아옵니다.

그동안 피하던 외할머니와 마주치며 못다란 이야기를 쏟아내고 울면서 잠든 엄마를 딸이 뒤에서 꼬옥 안아줍니다. 밥도 차려다 드립니다.

나중에는 다른 이유로 상심한 엄마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합니다.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수수한 옷차림의 실비아의 심경의 변화가 표정, 화장, 머리모양과 옷에서 나타납니다.

맨투맨을 입다가 몸에 붙는 라운드넥이나 수수한 색에 반짝이 장식이 달린 상의를 입는다거나, 머리를 꽁꽁 묶고 다니다가 푼다거나, 곱게 립스틱을 바른 모습 등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청바지와 겉옷과 가방은 바뀌질 않았습니다. 이게 굉장히 사실적이라고 느껴졌어요. 사실 갑자기 다른 스타일로 변하면서 아름다워졌다면 13년간 알콜중독자 자조모임에 나갔던 저력이 잘 안느껴졌을 겁니다.

정말로 우리는 지금을 살 수 밖에 없는데, 조금 더 현재에 집중해서 지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지금의 나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소중한 현재를 과거에 내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경이 뉴욕이라고 했지만, 왠지 뉴욕같은 느낌은 옅었습니다. 실제 촬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동생이, 아마도, 데이트하러 간 밤에, 잠든 사울을 돌보면서 영화를 보고 있던 실비아는 영화에서 사랑하는 남자가 죽은줄 알고 통곡을 하다가 깨어나자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옆에서 자다가 우는 사울을 달래다가 잠든 새벽, 조카딸이 학교에서 돌아와 큰 아버지를 찾다가 가까이에서 자고 있는 두 사람을 봅니다. 조카딸은 큰 아버지와 가깝고 잘 챙기는 사이지만, 오해가 생깁니다.

여러 관계들이 나오고 여러 인물들이 나옵니다.
사울과 남동생. 사울과 조카딸. 실비아와 딸. 실비아와 여동생. 실비아와 어머니. 여동생과 어머니. 부인의 가족 사이에 있었던 일을 대하는 실비아의 제부의 모습 등등 실비아와 사울 두 사람의 관계와 각각의 모습 외에도 다양한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어디에도 AI나 최신 기술이 나오지 않아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스토리 중에는 과거의 힘든 일들이 나오지만, 현재의 이야기에서는 이용해먹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이 중심에 있어 좋았습니다. 각자 자신을 위한 결정을 하면서 상처가 생기는 힘든 삶이 나오지만, 공포스러운 스토커도 아니고 욕설이 난무하지도 않으며 처절하고 잔인한 복수로 피가 튀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기억하게 될 지금의 선택에서 영화는 끝납니다. 결코 쉽지 않을, 녹록치 않을 시간이 다가올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을 때 영화가 끝납니다. 그냥 내지르는, 파국을 향하는 결정이 아니라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들의 결정이라 이 선택의 무게가 진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무 기대없이 봤는데, 의외로 여운이 남습니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삶에서 이런 만남이 실제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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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엔 감기 등으로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설연휴 첫 책인 «설자은, 불꽃을 쫓다»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작가의 첫 번째 미스테리 장르 책,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읽고 후편을 기다렸는데 설 연휴에 읽을 수 있어 좋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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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풍당의 사계절»을 읽기 시작한지 햇수로 4년이 됐어요.
부록에 보니 일본에서는 10년 동안 100화를 연재했다고 합니다.

4년 동안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읽어서 전체 에피소드가 자세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편안한 만화입니다.

18권 마지막화와 19권은 독특한 미적 감각을 갖고 있으며 운동을 좋아하고 활기차고 추상적인 라테아트를 구사하는 구레, 그레고리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19권에서 구레가 녹풍당에서 느낀 고요함이 선유도 공원에 갔을때 느꼈던 도심 속 고요함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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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계곡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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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잘 받았습니다.

아직 읽지 않아서
별점은 중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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