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결이 다른 얘기지만, 주인공에게 나타나는 유령은 꿈 속에서 깊은 시간을 함께 살았다가 깨면 사라져있는 존재 같다. 이런 꿈을 몇 차례 꾼 적이 있고, 깨고 나서는 실제 이별을 맞닥뜨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 꿈속 존재는 실재였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않다면, 이 생생한 상실감은 무엇인가. 그래서인지 내겐 하레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성에 관한) 꿈을 깨고 난 후 느끼곤 했던 이성애적/나르시시즘적 안타까움과 구분이 어렵다.하레이는 자아/자의식에 대한 메타포 같다. 스스로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지만 자아/자의식이란 것이 애초에 없는 것처럼 그녀의 존재는 환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그래서 하레이가, 존재기반이 없는 존재가, 제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괴로워할 때, 이를 목격하는 우리 의식은 하레이가 아니라 제 실제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자아가 어떻게 없는가. 이 질문에도 그것은 제 존재를 드러내고 마는데. 아마도 우리는 자신에 대한 연민을 끝내 버릴 수 없고, 이 경쟁적인 자기증명의 무한굴레를 마침내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주제를 바탕으로 천문학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의 최신 정보를 적절히 차용, 여기에 섬세하고 따뜻한 문체로 인간종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지적으로 힙한 소설.혹은 정서적으로 지적으로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아내를 잃고 상실감을 못이긴 사내가, 자기연민에 사로잡힌채 연이은 잘못된 판단으로 제 자식을 파멸로 밀어넣고 마는 이야기.
속도감 있게 잘 읽힌다. 너무 잘 읽혀서, 다루는 주제를 고려하면, 이렇게 흥미진진해도 되나, 머쓱하게 된다. 아파트 분양광고 아래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을 두기란 쉽지 않다. 마치 잘 정형된 고기나 소시지 같은 제품의 형식으로 고기의 동물성을 거세하여 우리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처럼, 아파트 분양 광고는 그 분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지리한 절차와 세입자들의 고통과 건물주의 욕망 같은 것을 가린다. 마치 없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있다. ‘산자들’은 있는 것을 있다고 얘기하는 소설이다. 르포기사처럼 디테일이 살아있고 재기발랄한 문장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