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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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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기준에서 아름다움이란, 결코 완벽하게 파악되는 균형적이고 정확한 어떤 것이 아니라 불명료하고 모호한 형태가 감상자에게 새로운 여운을 남기는 것이었다.

- 서양 미술사 1 (진중권) 본문 ' 명료성에서 불명료성으로' 中, p.242 -


*

 초기 미술사는 한 인간의 성장기와도 비슷한 것 같다.


 신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지상에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제 발로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 그리스 시대였다. 중세에서 근대 사상으로 이전하는 과도기적 시기에는 미술 또한 다시 이 그리스의 이성주의와 감각주의를 부활 시켰는데, 이가 바로 르네상스다. 당시의 미술사는 인간이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이성을 펼칠 수 있다는 근대 철학, 과학과 맞물려 문명의 변화 행적을 같이 한다. 


르네상스의 변천, 그리고 미술사의 성장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다빈치는 이상적인 신체비율을 경험적으로 종결한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라는 걸작을 남겼다. 생각하니 고로 존재한다는 위대한 명제가 17세기에 기록 될 수 있도록 시대 과도기적인 자양분을 조성한 것도 르네상스다. 이제 르네상스는 어디로 변천하고, 미술사는 어느 방향으로 성장 하는가?


 슬프게도 인간은 그만큼 불행해졌다. 인간은 객관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본질적인 진리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검증하고 신뢰할 수 있는 명제는 겨우 '나 자신이 존재한다' 는 고독하고도 처연한 한 문장뿐이었다. 더 객관적이고 진실한 것을 스스로 구하겠다는 발걸음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 더 많은 논쟁과 대립을 불렀다. 


 긍정적이고 건강한 과정들은 때로는 지나쳐 반목과 전쟁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결국 신의 보금자리를 잃은 개인은 더욱 고독해졌으며 성서의 가르침을 의심하기 시작한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는 만큼, 찾아내야 할 것도, 의심해야할 것도, 더 많아졌다. 서양 사상사에도 드디어, '사춘기'가 찾아온 것이다.


사춘기의 인간들은 그럼 어디로 향했을까?


  제 발로 가장 아름답고 절대적인 것을 찾아 나섰던 인간들이, 단 하나의 완벽한 이상향을 거부하고 각기 사물과 개인의 모호한 아름다움을 주관적으로 추구하는 바로크 미술로 안착하는 스토리텔링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사춘기를 겪은 소년은 이제 제 방에서 무엇이 자신을 이야기 하는지 발견하였을까?


  인간의 만족도를 이루는 것 중에 주된 것으로 꼽을 수 있는 '미(美)'에 대한 세계관이 초월적 세계에 의존한 직관적인 담론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 드디어 르네상스를 거친 바로크다. 단 하나의 이상적인 기대치를 향한 엄격한 잣대도 내려놓은 채, 작가의 주관적 표현을 중시하고 색채가 표현하는 정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신이 없어도, 절대적인 평가 잣대가 없어도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것을 '주관적인 아름다움의 존재론' 에서 획득 했다는 것이 큰 의미다.


  물론 바로크 이후로도 미술은 변한다. 


 물론 바로크 이후로도 미술은 변한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미술사의 초기 변천사와 서양 사상사의 궤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 자아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관의 美' 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크 시대 미술로의 서사는 개인의 자아 발달사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한하다. 우리는 선택과 가치 설정에 있어서 늘 절대적으로 옳은 것에 대한 목마름을 갖는다. 


 진리에 대한 수많은 견해 속에서 우물 안 경쟁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가 가진 모호성과 주관적인 표현을 존중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때 개인은 새 길을 열고 역사를 쓴다. 바로크뿐만 아니다. '독립적인 표현'과 '창의적인 세계관'으로 '시대의 정신'을 공유하는 작품이 대중의 찬사를 받는 현대도 동일한 상황을 보여준다. 


 서양미술사와 그로 보는 사상사를 통해서 인간 발달사를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인류 역사의 발전사를 통해 개인의 자아 성장이 어떤 부침을 겪는지 유추해보는 것도 짐작키가 어렵지 않다. 문명사에 관한 공부는 역사에 대한 탐닉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탐구가 된다. 그래서 서구 회화 변천사의 방향성을 통해서 동시대의 세계관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또 어떤 새로운 사고관의 반영과 반추를 발굴했을 지, 다른 독자들의 발견이 궁금하다.



* 추천하기 전에


 책은 읽기 쉽게 구성되어있다. 친절한 작품 설명이 시대 사상의 변천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등장한다. 그러나 서양 미술사에 관한 개괄적인 배경 지식 없이 이 책을 접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지라도, 서양 근대 사상사에 대한 개괄적인 배경 지식 없이 이 책을 접하는 것은, 책에서 보다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을 조금 접고 시작하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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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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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의 주부들은 종교 모임이나 반상회를 통해 정기적으로 만나 주부 교양, 일상 생활, 자녀 교육, 재산 투자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스스로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결속한다. 바로 이 주부들의 네트워크, 수다와 소문의 사교 공동체가 거실의 프레임을 응시하는 타자이다. 그녀들은 관상학자의 눈매로 이웃집의 생활 수준과 행복 지수를 가늠해본다. (p.82)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이 가져온 고성장의 신화는 시중의 유동 자금을 증가시켜 주가와 더불어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부추기고 있었다. 특히 가파른 상승의 그래프를 그리던 아파트 가격의 폭등세는 중산층으로의 진입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기능했다. 그로 인한 피해는 1955년 이후 출생해 이제 막 내 집 마련을 준비하고 있던 베이비 붐 세대의 몫이었다. (p.94)


- 콘크리트 유토피아 (박해천) 본문 中 - 







 자, 여기. 경기 북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음모론이 있다. - 휴전선 근방에 왜 하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을까? 그건 바로 남북전쟁시 북침에 대비한 수도 방위 방패막이야! - 이 음모론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에 건설된 아파트 단지의 존재는 팩트요, 도시 계획의 숨은 군사 전략은 픽션이다. 


 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두려움과 동시에 발생한 유머는 시대 정신이다. 안타깝게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한민국 아파트 공화국의 가장 큰 넌센스 퀴즈는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인지 하거나 인지해볼 엄두도 못냈던 수많은 아파트의 시대적 의제를 이끌어내고 긁어 주며 논의 한다. 


 아파트가 읽어주는 사회는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콘텐츠들이 서로 가까이 혹은 멀리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예를들면, 아파트의 공간 구조가,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문화콘텐츠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을 낳았다고 보는 일견을 살펴보자. 텔레비전 드라마의 수많은 장면들이 쌍방 클로즈업을 반복적으로 비추며 대화로 70%의 이야기의 비밀과 복선을 개진 하는 이유의 한 켠에는 아파트가 자리 한다는 논리다. 


 아파트에서는 기존의 주택에서 마루 밖에 독립적으로 위치하던 부엌이 거실과 붙어 있다. 설거지하며 요리를 하는 주부는 거실의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일일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주부를 배려하는 아파트 거실 구조의 매카니즘은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끌어 내고 주부에게 멀티태스킹의 묘미를 학습 시킨다. 


 결국 드라마를 적절하게 시청하며 거실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주부의 생활 경험치가 확장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물론 드라마의 매카니즘과도 연계될 수 있다. 텔레비전 연속극은 주로 가정에 머물러 있는 주부들을 공략해야 하는 형편이고, 매일 방영하다보니 아주 신속하게 제작되어야 한다. 수많은 부연설명을 위해, 찻집에서 벌이는 두 여자의 날서린 한판승 한 장면이면 충분할 것을, 수려한 앵글 전환으로 수고를 늘릴 필요는 없다. 


 한때 설거지 하는 동안에도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어떤 모략을 펼치는지 다 외우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그녀의 뒤통수에 경외감을 표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공간 구조학적이고 매체 특수성 반영적인 고찰을 시도한 것은 이 책이 나보다 먼저가 아닐까, 음? 하고 펼쳐 들어 오! 하고 읽게 되는 책이다.



콘크리트로 보는 사회학, 우리 시대의 성찰


  이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주는 재미는 다채롭고 또 깊이 있다. 시대 문물을 통해서, 개인의, 가계의, 사회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사람들의 욕망과 소비의 발현이 어떤 주소를 거쳐왔는지 살펴 보는 일은 즐겁다. 이는 작가의 박학다식함과 다방면에 걸친 사료 수집 능력으로 견고하게 도움 받는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김영하와 유하를 오가는 문학적 감수성과 배경 지식은, 작가가 건축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에 자기의 전문 분야로 시대를 읽어 내기 위한 지식과 통찰력을 가진 지식인에 대한 경외감 까지 느껴지게 한다.



 그렇다면 아파트로 읽는 현 시대는 어떤 사회학적 콘텐츠들이 유기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며 동시대 과제를 반영하고 있을까? 부동산 가격은 치솟고, 직장 5년차 봉급 모아서는 서울 근교에 집 한채도 사지 못하는 형편이니 집 사서 장가 가고싶은 예비 신랑들의 초혼 연령대는 자꾸만 높아 진다. 점진적으로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결혼을 꿈꿔야 하는 남성의 상대적인 기존 권위는 낮아진다. 이는 건강한 남녀평등의 정착이 아니라 건전한 논의를 생략한 기형적인 젠더 균형의 맹점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한편 높은 집 값은 장성한 성인 자녀가 부모의 경제적 원조를 받아야 하는 순간이 잦아졌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개인의 부모로부터의 독립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렵다.


 집값, 양육비, 교육비, 겨우 겨우 모으고 나면 노후 대책할 시간도 없이, 다시 자녀 아파트 값. 이렇게 평생 하는 일이라고는 예정 되어 있는 소비를 위해 빚지고 돈 버는 일 뿐인 시대. 정해진 인생 주기의 소비 패턴은 개인의 만족감이 돈 버는 데서만 급급하도록 만들었으니 직장 생활 틈틈이 어렵게 확보한 여가 시간에도 빠르고 쉽게 재미를 주는 것은 소비이고 소유다. 놀이 문화의 상실. 자기 표현의 소외. 속도 숭배와 물질 만능 주의! 유토피아는 콘크리트 처럼 딱딱하게 굳어간다. 


 아파트라는 키워드로 살펴 본 사회의 어느 단면은, 그저 일면으로 그치지 않는다. 때문에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짚어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흥미롭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읽어준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아파트'로만 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오늘의 팩트는 무엇이고 픽션은 무엇이며 시대 정신은 무엇인가? 오늘도 우리는 농담을 한다. 당신의 그것이 아파트에 관한 것은 아닐지라도. 

 


* 추천하기 전에


 일단 책을 읽게 되면 작가의 박식함에 놀라고, 그 박식함이 새어 나갈 틈 없는 그의 문장력에 놀란다. 덕분에 주관적인 시대 기호 읽기가 거부감 들지 않을 만큼 공신력있게 느껴진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아파트와 대한민국 사회학이 '픽션' 이라는 재미있는 구성으로 살아나 여가 시간에 신선한 사회 참여를 독려할테니, 적지 않은 책의 두께에 미리 겁 먹지 말았으면.


   forested-islan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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