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찾아서 창비시선 438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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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호승은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로 유명한 시인이 새롭게 내놓은 시집은 이때까지 유명했던 대표작을 기억한다면, 다소 생뚱맞은 느낌마저 준다. 적어도 첫인상은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이야기라기보다는, 순교를 추념하는 등의 종교적 이미지에 훨씬 더 가까운 시들이 다수 선보인 것이다.


종교적 메시지를 전면에 드러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기피하는 경우가 은근히 많은데, 정호승 시인의 이번 신작 시집도 자칫 비슷한 걱정이 들게 할 수 있다. 시에서 다루는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는 불편함을 줄 것 같고,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는 무언가 딱딱하고 경도된 느낌을 줄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런 선입견이나 추측은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시집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받을 만한 차원에 도달한 여러 종교인들의 드높은 품성 그 자체이며, 그것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 등의 감정과도 직결되는 것이다.


외우려면 외울 수 있을 정도로 글의 길이는 짧고, 어려운 단어도 거의 쓰이지 않는 작품들이다. 언뜻 보면 왠지 모르게 만만한 느낌마저 준다. 하지만 일단 읽고 감상하고 곱씹기 시작하면, 도저히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감명깊고 깊이 있는 여운을 남기는 시들을 <당신을 찾아서>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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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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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일단은 SF 장르의 작품이다. 굳이 "일단은"이라는 전제를 붙인 것은, 이 단편집의 작품들은 SF 장르의 작품에서 흔히 나올 법한 요소가 극도로 배제된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SF장르라면서 현대 과학으로는 불가능한 갖가지 과학 기술을 상상하고, 그런 과학 기술로 만들어낸 다양한 발명품이 묘사되는 것을 기대한다면, 이 책은 마치 인도 음식점에 갔는데 프랑스 요리가 나오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SF장르에 거의 고착화된 이미지 수준으로 정착된 요소는 거의 나오지 않는 대신, 그 빈 공간을 다른 이야기로 채우고 있다. 바로 사람들의 드라마와 여러 딜레마이다.


이 책은 단편집으로, 여러 단편들은 같은 세계관의 이야기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같은 세계관이라고 짐작할 만한 단서는 딱히 보이지 않는 편이고, 한 단편에서 나온 인물이 다른 단편에서 언급되는 부분조차 없다. 하지만 굳이 다른 세계관이라고 못박은 부분도 없고, 그렇게 상정해도 무리 없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같은 세계관에서 병립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부분은 없는 것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다. 지구조차 더없이 광대한데, 여러 행성을 넘나들며 우주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시대에 여러 사건이 서로 전혀 접촉하지 않고 별개로 따로따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는 책이 쓰인 시점에서는 불가능할 과학 기술이나 발명품이 당연하다는 듯이 마구마구 나온다. 우주 여행은 기껏해야 현대의 해외 여행 쯤으로나 여길 정도로 보편화된 분위기이고, 심지어 광년 단위를 넘나들며 우주를 여행하거나 아예 미지의 우주 세계로 가는 일도 현실적으로 실현성이 있는 프로젝트로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 책이 펼쳐내는 이야기는 그런 과학기술이 없는 세계의 사람들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여러 드라마와 딜레마에 대한 것들이다.


이 책에서 나온 여러 사건은, 본질적으로는 현대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사안들이다. 그리고 SF적인 설정 덕에 그런 부분이 극대화된다. 이런 경향은 딜레마가 정면으로 제시될 때 극치에 달한다.


성형수술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돈이 있으면 미녀미남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돈이 곧 외모의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첫번째 단편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는 사람의 배아를 조작할 수 있는 시대에, 이런 경향은 성형수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간극을 벌려버린 세계가 등장한다. 로라, 혹은 디엔은 건강하고 유능한 인물을 배아 단계에서 만들면 좋은 세상이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배아를 조작해 태어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더러 불완전하다고 멸시하는 구실만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런 현상을 없애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려 했고, 나름대로 일단은 성공한 듯이 보인다. 로라, 혹은 디엔이 최종적으로 만들었던 그 장소는 적어도 그런 차별 개념은 없었던 곳이니까.


그리고 로라의 포부가 나름대로 성공한 것은 또다른 딜레마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그 나름대로의 성공은 이른바 결함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텔레비전이 없는 고립된 시골에서는 자신들의 삶을 바깥의 화려한 삶과 비교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처럼 아예 그런 개념이 없었기 때문일까. 만약 후자라면, 자신이 사는 곳 바깥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를 들려주지 않는 것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인 걸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통제해서 사람들이 행복해졌다면, 적어도 불행해지지 않았다면, 숨겨진 진실을 알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특한 시도로 취급되어야 하는 건가?


'스펙트럼'은 언뜻 보기에는 나름대로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좀 뜬금없고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우주 어딘가에 있는 외계생명체와 조우했고, 그 곳에서 한 생명체와 나름대로 우정을 쌓은 이야기이면서, 그 이상의 메시지는 딱히 없는 소설인 것 같다. 외계생명체와 만났는데 물질적 증거를 갖추지 못했고, 증거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근거 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한다는 전개는 전형적이면서 흔하다. 그 와중에 근거가 없어도 낭만적인 이야기는 막연하게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묘사를 유난히 강조한 것이 좀 특이하기는 한데, 외계인 이야기나 미스터리 이야기에는 아주 흔한 일로 보인다.


하지만 결말을 읽고 나면 이야기가 달리 보인다. 외계생명체의 물증은 실제로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물증이란 바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 외계생명체 루이가 환생하듯이 생을 거듭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낸 수많은 스케치였다. 외계인이 그린 수많은 그림이라면 외계인이 있다는 물증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이도, 물감도 지구에 없는 재질이니 그것만으로도 증명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개하지 않았다. 차라리 본인이 헛소리꾼 취급을 받을지언정, 그 그림들을 공개하지 않고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다. 본인이 죽은 뒤에 손녀가 유품을 정리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을 정도로, 가족에게도 철저하게 숨겼다.


자신의 행적을 인정받거나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왜 그랬는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어느새 저절로 이해하게 된다. 소중한 기억을 흥밋거리로 공개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 소중한 추억이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에서 관찰당하는 것이 난도질처럼 여겨질 것만 같은 마음,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이유로 루이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그렇기에 손녀도 그 수많은 그림들의 사본을 구태여 일일이 만드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원본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할머니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도록 결심했을 것이다. 평생 소중하게 오롯이 간직한 기억을, 언제까지나 소중히 곁에 둘 수 있도록 말이다.


'공생 가설'은 고정관념이나 막연한 예상을 엄청나게 큰 스케일로 뒤집는 발상이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누군가가 생생하고 구체적이고 자세한 외계 행성의 모습을 그린다면, 아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반응하게 될 것이다. 류드밀라가 바로 그런 화가였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연작 시리즈가 되었다.


이쯤 되면 화가 류드밀라가 유난히 그 행성에 대한 그림만 그린 것도, 얼마든지 있을 법한 일처럼 보이게 된다. 비슷한 주제로 비슷한 작품을 그리기만 하면 부와 명성이 보장된다면, 그 주제의 작품만 만드는 건 누구나 할 법한 일이니까. 심지어 자기복제 같은 말을 들을 일도 없고, 사실상 자신만이 묘사할 수 있는 세계이니 독보적이기까지 하다.


어쩌다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낸 예술가의 작품으로만 보이던, 류드밀라의 행성 연작은 어느 날 완전히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한다. 우주 저편에서 정말로 그런 행성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한 술 더 떠, 어린아이들이 모두 그 행성에 대한 것을 의식하다가 7살 즈음 아동기의 기억을 잊으면서 그 행성에 대한 것도 잊는다는 사실까지 발견된다. 오로지 한 명, 류드밀라만 예외였다. 그리고 류드밀라는 그 기억을 그림으로 남기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그 기억을 공유했다.


모두가 겪었지만 모두 잊어버린 일들을 혼자서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류드밀라는 그림을 그리면서 그 세계를 표현할 수 있었고, 그 그림이 실제 세계가 아니라 상상해서 그렸다는 평을 받을지언정, '스펙트럼'의 주인공과 달리 헛소리꾼 취급은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증언과 달리 예술작품은 실제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허구와 상상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우선하기에, 류드밀라가 진짜 행성을 그렸다고 한 말은 다들 흘겨들을지언정 그림 자체는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류드밀라가 그런 효과까지 의도했는지는 불명이지만, 아마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류드밀라는 그야말로 머릿속에 떠오른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어서 그린 것이니까. 하지만 그 행성의 모습을 그림으로만 그리겠다는 류드밀라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여러 사람에게 두루 좋은 결과를 낳았다. 류드밀라 본인도 명성을 얻고 평탄히 잘 살았고, 그 행성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지는 효과도 생겼던 것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단편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을 법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곳에서는 일어나고 있을 질문을 던진다. 웜홀을 통해 우주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발견되자, 우주의 사회는 웜홀 위치를 위주로 재편된다. 기존의 이동 방식으로는 나름대로 각광받던 장소도, 웜홀 이동으로 이동할 수 없다면 졸지에 외진 변두리 취급을 받게 되고, 외부와의 교통편인 우주선마저 끊기고 만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통이 편리한 촉망받는 개척지랍시고 잔뜩 사람을 보내던 그 별에.


기껏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사람을 잔뜩 보내놓고, 그냥 고립시켜 버린 것이다. 졸지에 변두리 행성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 행성에 살던 사람들을 소환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그 사람들이 일군 것을 외부에서 버리게 만든 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별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우주선조차 없이 그냥 버려둔다면? 그 사람들은 그냥 고립되어 버린다. 다른 별에 있는 가족들과 만날 길도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나름대로 미리 여러 번 알렸다고는 하는데, 촉망받던 과학자이던 안나에게조차 따로 알려주지 않고, 안나가 연구에 전념하느라 따로 공고를 챙겨보지 못해서 몰랐다면, 공고를 미처 챙겨보지 못해서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들었던 사람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별에도 그런 일이 많았을 것이다.


안나는 냉동수면을 반복하면서, 다시 그 별로 가는 우주선이 나타날 때까지 백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낸다. 우주선이 끊기기 전에 그 별로 떠나갔던 가족들을 그리면서. 이미 가족들은 죽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운이 좋으면 그 별에 도착해 남편 곁에 묻힐 수 있을 것이라는 안나의 말은, 이미 죽은 사람의 시신이라도 고향에 안장하고 싶다는 정서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경제성이라는 측면에서 잘려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게 된다. 교통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교통편을 끊어버리는 일이 비단 이 작품 속의 우주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그런 지역에 남겨진 사람들이 졸지에 고립되고 어느새 잊혀지며, 딱히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미미한 존재 취급받는 것이 이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속 편하고 좋은 일이었을까. 이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어떤 의미로는 바로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세계에 살기 때문인 것을.


'감정의 물성'은 희한하고 괴상한 발명품이 발명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행복의 돌을 구입하면 행복해지고, 우울의 돌을 구입해서 만지면 우울한 기분이 되는 식으로, 가지고 싶은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상품이 개발된 것이다. 묘한 것은 우울, 증오 등 부정적인 감정을 다룬 상품도 꽤 팔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의 말미에서 굳이 그러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과, 부정적인 감정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기에 차라리 제어하고 싶은 심정이 되면서 일부러 그런 상품을 구입하는 사람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이 작품은 결국 서로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끝나버린다.


막상 그 상품을 구입하기 전에는 별다른 갈등이 없는 원만한 사이였는데, 저 상품이 개발되면서 이견의 차이가 벌어지더니 파국 직전까지 치달아버렸다. 공연한 발명품이 개발되는 사람에 사단이 났다고 치부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은 이런 질문도 던지고 있다. 저런 식으로 견해가 극명하게 갈렸다는 이유로 깨질 사이였다면, 애초에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얄팍하고 약한 관계였던 것은 아닐까? 사람의 감정과 생각, 사고관이 다르다는 것은 언제 어떤 계기로든 결국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확실한 답을 내릴 수 있는 게 있다면, 애꿎은 신상품 탓만 하는 것은 결코 본질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이미 있던 현상을 드러내거나 더 빠르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만 한 것이지, 없던 것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니까.


'관내분실'은 죽은 가족의 이야기이자, 디지털 시대의 데이터 보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죽은 가족의 데이터를 영상처럼 보관하며 살아 있는 사람과 간단한 상호작용도 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록만 행방불명되었다! 그 기록을 찾으려면 생전에 의미가 있던 물건을 가져와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20년 동안 같이 살았던 어머니인데, 유품 중에 흔한 공산품과 디지털 자료만 잔뜩 있고,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는 개별적인 증거 같은 물품은 없다. 마치 중년 여성용 물건을 그냥 사다 놓기만 한 것처럼. 디지털 시대의 자료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교감 없는 관계가 얼마나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는지, 담담한 어조로 날카롭게 찌르듯이 서술된다. 마침내 찾아낸 단서가 아무리 사양업계였다지만 임신으로 졸지에 경력단절되기 이전 직접 디자인했던 물품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 단서로 어머니의 영상을 찾아 마주한 뒤 마지막에 하는 말도 정말 감동적이었다. 디지털 시대의 기록은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과 감정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해서 더욱 기억에 남았다. 


이 책의 작품들에서 여러 방면에서 과학이 고도로 발전했기에 오히려 측면에서 부각되는 부분이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편견을 가지는 측면이 여과없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지막 단편인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서 그런 부분은 절정에 달한다는 표현이 전혀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뚜렷하게 두드러진다. 신체적 결함이 있는 재경이 우주인에 선발되자, 장애가 있는 사람도 뽑는다는 상징성 때문에 막상 능력 자체는 떨어지고 자격도 없는 사람을 뽑았다는 식의 반응이 잇달아 이어진다. 그 신체적 결함은 무중력 공간에서는 딱히 흠이 되지 않는다거나, 그런 결함을 극복한 것이 대단하다는 것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의 인간성과 인간적인 측면을 배제한 움직임이 생겨나고,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견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에서 보도되고 회자되는 모습은 결코 낯설지 않다. 언론과 여론이라는 단어의 조합에서 이미 그런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의 통념이 이미 있으니까. 이쯤 되면 여론이 언론 기사를 주도하는지, 아니면 언론이 여론을 만들어낸 것인지조차 모호해질 지경이다. 현실 세계에서 아주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 말이다. 그리고 거대하면서도 견고하게만 보였던 그 여론이라는 것은 알려진 몇몇 사항에 반응하는 경우가 아주 많으며, 그 부분적으로만 알려진 사항조차 언론사 등에서 선별해 걸러진 경우가 그 못지 않게 많다는 것도 잘 보여준다. 이른바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거나,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일명 여론과 언론의 논조라는 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주 급격하게 바뀐다. 그리고 주목받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흐름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까지 있다. 이 소설의 결말은 SF장르의 전형적인 요소와는 동떨어져 있다 못해 당혹하게까지 느껴지지만, 그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더없이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개성과 특징이 뚜렷하고, 분위기나 감성 등도 많이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서로 묶었는데도, 이질적이거나 어색하다는 느낌은 딱히 들지 않는다. 오히려 마치 이 다양한 이야기들이 넓디넓은 우주와 세계에서는 같은 시간대에 일어날 수 있을 법한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이 이 단편집의 드라마가 더욱 공감 가고 와닿게 만든다. 정말로 그런 기술이 발명된다면, 오늘날 사회의 사고관과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 기술을 바탕으로 할 것 같은 행동과 일어날 것 같은 사건들과 생겨날 것 같은 갈등 요소들이 속속들이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마음 깊이 속속들이 이해되고 공감가고 와닿는 이야기가 되어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짧다면 짧은 이야기 일곱 편이 수록된 단촐한 분량의 책인데도 불구하고, 책을 덮는 순간 묵직하게 감명받고 깊은 여운이 몰려오는 책으로 남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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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집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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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집>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었을 법한 바로 그 생활을 정면에서 다루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치열하게 일하면 생활을 마무리짓고, 고즈넉한 곳에서 나만의 집을 짓고 느긋하게 살아가는 것.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가 연달아 떠오른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나올 법한 풍경이면서, 동시에 그 단계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막연히 전원적인 생활이란 여유롭고 멋질 것 같다는 동경 차원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또한 막상 정말 그런 생활을 해 본다는 생각만 해도, 도시에서 더없이 익숙해진 갖가지 편리한 시설이 그런 곳에서는 없거나 적어서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만 해도 아예 손사래치는 경우도 많다.


<만년의 집>은 그런 생활을 동경하는 것도, 무작정 기피하는 것도 아니라, 말 그대로 관조하듯이 느긋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런 삶을 살면서, 도시에서 일하던 시절에서는 느끼지도 못했던 것들,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 생각하지 않았거나 생각이 미처 미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전체적으로 담담한 에세이풍의 글이면서, 그 담담함을 밋밋함이 아니라 잔잔함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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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01091


정혜영의 식탁 속 레시피 책 중에서 티라미수 레시피에서 특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티라미수를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 버전의 레시피를 꼭 추천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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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00853#


워킹맘을 위한 초등 1학년 준비법 이벤트 페이지입니다.

이벤트에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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