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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ㅣ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유령의 시간 소설에서는 귀신이나 유령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유령이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조차 나오지 않고,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 같은 것도 변변히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어느새 유령의 시간이라는 제목은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소설은 유령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 마치 유령처럼 살아야만 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본인의 행동 때문에 그렇게 된 것조차 아니었고, 순전히 특정한 시대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고 자라 살았기 때문에 그런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유령의 시간에서 유령처럼 살아야만 했던 모든 이야기가 더욱 마음 깊이 와닿게 된다.
이 소설에서 역설적이면서도 극적인 부분은 바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챙기며 이기적으로 굴었다면, 오히려 덜 불행하고 덜 파국적인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북한에 있고 아내와 두 아들은 북한 밖에 있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가족을 위해 남편은 북한을 떠났고, 바로 그 때 아내는 북한 땅으로 들어왔다. 아내는 결연하고 갸륵한 마음가짐으로 위험한 땅에 들어갔지만, 바로 그 결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 유령처럼 살아야했던 그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부부가 살았던 시대는 그런 행적 자체로 사람을 통째로 짓밟고도 남는 시대였다. 북한 땅에 다시는 갈 수 없는 남편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지만 북한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새로운 가족에게도 여파를 미치고, 남편의 새로운 아내와 아이마저 유령의 시간을 함께 지내는 심정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내와 두 아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족들이 간첩으로 파견되기를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먹먹한 심정으로, 남은 일생 동안 살아가는 텅 비고 공허한 삶이 이어진다. 본인에게도, 그리고 가족에게도 말이다.
유령의 시간은 남편이 자신의 일생을 담은 자서전을 쓰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두번째 결혼에서 태어나서 자신이 태어난 이후 그 모든 것을 보고 듣고 겪은 딸이 마저 써내려가는 장면이 핵심 스토리처럼 묘사된다. 유령처럼 살았던 아버지가 품었던 모든 회한을, 유령의 시간의 구성원처럼 보내야 했던 딸이 회고하고 정리하는 장면. 그 장면은 죽었던 사람의 모든 기억과 사연이 죽음으로 잊히지 않고 남은 사람들에게 계속 기억되며, 남은 사람이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계속 기억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본인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읽는 다른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태어났다면 유령처럼 살지 않았을 평범한 사람이 유령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 모든 이야기를. 평범한 사람이 졸지에 맞닥뜨린 비극적인 사연이기에 더욱 절절하게 와닿는 사연을 말이다.
한 사람의 사연, 그리고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까지 마치 유령같은 기분으로 살아야만 했던 그 시대에 대한 수많은 사연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유령의 시간은 단순히 한 개인과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일뿐만 아니라, 그런 시대를 살아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낸 개인의 드라마와 그 시대의 이야기를 두루 아우르면서, 이 책은 깊은 여운과 함께 먹먹해질 정도의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