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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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이었던 아홉번째 커플은 원래 혼인신고만 하고 살려고했다. 둘 다 식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었고 실용적인 성격이었다.
그간의 저금으로 학교 앞에 투룸을 구해 깔끔하게 꾸몄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2년을 사는 동안 양가에서 폭격이 끊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식은 꼭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어머니가 울고 남자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은 지고 말았다. 두 사람이상의해서 생략했던 그 모든 과정을 결국 다 해야만 했다. 자포자기상태로 드레스를 골랐다.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 P15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을 때, 스무번째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내가 내 부모에게 속았나? 이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오랫동안 속아서 똑같은 삶의 궤도를 선택해버렸나? - P22

"어머, 임신한 거야?"
엠파이어 라인의 원피스를 입었을 뿐인데 거래처 사람이 물어왔다. 결혼하고 해를 넘기자, 여자는 그런 질문들을 자주 받기 시작했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선을 넘는지 새삼 놀라웠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만큼 가깝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걸매번 참았다. 사실 아무도, 가족도 그만큼 가깝지 않다고 여겨왔다.
여자는 타고난 개인주의자였다. 그런 여자에겐 일가친척들이 덕담이랍시고 명절마다 하는 말들이 징그럽게만 느껴졌다. 왜 다른 사람의 생식과 생식기에 대해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기이할 정도였다. - P24

마트 앞에서 크게 싸웠다.
"와, 홈패션 배우고 싶어. 수강료도 안 비싸고 좋다."
여자가 마트 문화센터의 수업 소개 게시판을 보다가 말했을 때,
남자가 쏘아붙였다.
"요리부터 배워."
한번은 그냥 넘어갔다.
"쉽게 하는 이탈리아 요리, 이거 배울까?"
"좀! 한식부터 배워 좀! 밑반찬부터."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격론 끝에 남자는 마트 앞에서 울었다.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 P25

남자가 잠결에 실수로 여자를 때렸다. 팔꿈치로 눈두덩을 힘껏친 것이다. 여자는 멍이 들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좀비 꿈을 꿨어."
남자는 공포영화를 잘 못 보면서도 즐겨 보는 편이었다. 이해할만한 일이었지만 여자는 화가 났다. 3일쯤 화가 풀리지 않았다.
4일째가 되어서야 여자는 깨달았다. 여자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이었다.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 사이엔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었다. 나중에 남자가 머리를 다치거나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지? 성격이 변해서 때리고 목을 조르면 어떡하지? 최악의 상상들이 연이었다. - P26

주말이 좋았다. 따뜻한 빵 위에 차가운 잼.
각자의 노트북을 무릎에 펼치고 샤워를 건너뛰었다. - P28

여자는 푸념했고, 교통사고 블랙박스 영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여간 어두운 생각 좀 하지 마."
남자는 간단하게 말했다. 여자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두워, 사랑은 어두워. 가족이 된다는 건 어두워. 어두운 면은 항상 있어. 아이를 낳으면 설마 그 아이의 죽음까지 두려워하게 되는 것일까? 여자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누운채로 늘어날 두려움을 헤아려보았다. - P33

하지 말걸. 폐백 같은 거 하지 말걸, 드레스만 입고 끝낼걸, 이게아닌데.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더라? 사람들은 이제 다 갔겠지? 동창들도, 직장 동료들도, 가까운 사람들도, 어려운 사람들도 모조리가버렸을 것이다. 연회장에 제대로 인사를 오지 않은 여자를 욕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낙심하고 말았다.
문득 상에 잔뜩 차려진 음식 모형들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모형을 앞에 두고 나는 진짜 이걸 왜 하고 있지? 전통 혼례를 선택한 것도 아닌데 어정쩡하게 왜?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필경사 바틀비」면서!
결혼을 통해 스스로에게 관습에 순응하는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한 여자는, 자주 ‘이것이 관습일 뿐인가?‘ 검토하는 사람이 되었다.
의미를 두지 않는 행동은 되도록 하지 않는 사람이. - P34

적의에 대해 생각해. 적의에 오래 노출되고도 괜찮은 사람은 여기든 거기는 없을 거야. 그 나쁜 입자들을 씻어낼 수 있는 샤워 비슷한 게 있다면 좋겠다고도 생각해. 간편한 에어샤워 같은 것. - P43

언니들이 아니었으면 난 정말 뛰어내리고 말았을 거야. 경리부의 맏언니 명희 언니, 편집기자인 소연 언니, 제작물류부의 예진 언니. 세 사람은 마치 운명의 마녀들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어. 내가 처음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왔을 때 놀라서 입을벌렸다 다시 입술을 깨문 언니는 셋 중에 누구였더라. - P95

회사 언니들과 나는 한달에 한번씩, 회사에 남아도는영화표나 공연표로 외출을 했어. 그런 날에만 잠깐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우리는 입안의 쓴맛을 누그러뜨려줄 기름진 음식을먹었지. 울다가 웃다가 욕하다가 탈진한 채 늦은 밤 귀가하면 내가사람 같았어. - P96

유전자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사람의심장이 너무 지쳐버렸나. 셋이서 고민하기도 하고 혼자서 고민하기도 하다가 어떤 날은 아예 고민하지 않기도 했다. 어쩌면 일정퍼센트의 어린 개구리들도 그냥 죽는지 모른다. 일정 퍼센트의 낙타들도, 박쥐들도, 악어들도, 문어들도, 우리가 인간이라서 자연스러운 도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불며 이렇듯 쓸데없는 짓을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모든 것으로부터 한발짝 뒤로 물러서는 마음이 드는 그런 날이 있었다. - P132

"하다가 죽지 않는 거, 하고 싶다."
"있어? 그런 거?"
그럼 하다가 죽어도 상관없는 거, 하고 싶다."
"그것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그 두 일에 대해, 혹은 둘의 교집합에대해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P142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감당이 안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성린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 P222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아직 상론하지 않은 세 작품을중심으로 정세랑 소설집의 공동체성을 해명하긴 할 테지만, 실은이제껏 그가 쓴 거의 모든 작품의 이면에 공동체성이 자리함을 말이다. 조직성과 공동체성은 다르다. 조직성이 각양각색의 구성원을 획일화하려는 권력이라면, 공동체성은 각양각색의 구성원이 자의적으로 연합해 뭐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모양새로 나타나는 움직임의 총체다. 정세랑은 당면한 이중 구속 상태에 공동체성으로 맞선다. - P262

이것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져 돌연사.net 관리에서 보윤이 손을뗀다 해도 괜찮다. "우리들의 그 아픈 네트워크에 하얀 점들이 등록되는 소리" (142면)를 그가 여전히 듣기 때문이다. 무력할지언정타인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겠다는 충실성의 윤리다. - P263

가장 잘 농축해 담은 소설은 「효진」인 것 같다. 그래서 쓸 때도, 고칠 때도 함께 있는 것 같아 즐거웠다. 스무살에 처음 만났을때부터 언제나 나를 가장 완벽히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어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이해를 구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유로웠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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