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ning both end of the candle"인가 비슷한 표현이 있다. 요즘 내 꼴이 딱 그 모양이다. 일이 진행되는 속도가 더디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늘 번득이던 창의적인 영감은 어디로 갔는지 나오지를 않는다. 평소보다 더 많은 케이스가 보충을 요구하며, 운동으로 겨우 버티고는 있지만 먹고 자는게 신통치 않은 탓에 결국 피곤은 양방향에서 온다. 오늘이 그랬다. 어제에 이어 행정업무와 비교적 머리를 덜 쓰는 루틴한 것들을 처리할 수 있었고, 중요한 일은 한참을 씨름하다가 말았다. 그나마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긴 했는데, 야식으로 운동한 걸 망쳐버렸다.
도대체 한국의 직장인들은 어떻게 그리도 큰 스트레스와 잦은 술과 야식에도 버틸 수 있는 것일까? 아침저녁의 출퇴근길에 걷는 것이 운동의 전부인 사람이 태반이라던데.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범죄행위에는 목적이 있고 추리소설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간혹 명인들의 작품에서 이걸 간단히, 하지만 교묘하게 무시하는 것으로 트릭을 삼는 경우가 없지는 않기 때문에 사건을 추리하려면 이런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말은 쉽지만, 물론. 범인이 없는 범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싸이코패쓰도 아닌데 범죄 그 자체의 목적이 없는 범죄가 발생하면 잘 나가는 드루리 레인이나 엘러리 퀸도 애를 먹기 십상이다. 거창한 "Y"의 비극은 그렇게 명탐정을 엿 먹인 것이다.
지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 흥미롭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그것도 상시 변하는 주변상황을 반영해서 대응하는 다체로운 능력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당금 화두의 인공지능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는데, 결국 무엇인가 한 가지를 또는 몇 가지를 잘 하는 것, 그리고 그 능력의 주체가 사람인 이상 인공지능은 진정한 의미의 지능이 아니라는 것. 이 말에서 일말의 안도감은 느끼는 나는 사람이지 말이다. reproduction과 AI가 함께 가는 날, 그러니까 AI가 자기복제를 하고 자신을 위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는 날 특이점과 함께 우리의 황혼이 올지도 모를 일.
2차대전의 망명자들, 주로 유대인들, 러시아계, 그리고 독일의 반체제인사들이 아웅다웅 살아가던 뉴욕의 한 때. 명망있는 의사는 겨우 조수자리에 만족해야 하고, 협잡질에 동원되는 사람도 있고, 수위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짜스러운 능력을 나치를 속이고 사람들을 빼돌리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여권이 없는 사람들, 불법으로 미국에 온 사람들의 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인데, DACA의 폐지로 뉴스를 탄 트럼프정부의 반이민정책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가난으로, 사지로, 디아스포라로 내몰 것인지. 그 와중에 박수를 치는 많은 한인이민자들은 또 뭔지.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은 그 탈을 쓴 백인우월주의 우선주의정책인 걸 모르는 한심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요즘 미국이다.
독일을 탈출한, 추적당하고 고문당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서도 그 기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아련한 기억으로 향수의 대상인 고향은 더 이상 그들이 아는 곳이 아닌것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종전과 동시에 삶도 종언을 고하는 것이고, 받아들이더라도 변한 곳에서 이방인이 아닌 이방인이 된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서구권에서 큰 전쟁이 없이 지난 70년 정도가 흘렀는데, 앞으로의 70년도 그럴 수 있을런지...
'그늘진 낙원'의 프리퀄 같은 책. 한 유대인 망명자가 독일인 반체제인사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댓가로 받기로 한 미국행배표 그리고 여권. 독일인이 줄 그 여권은 그 독일인이 다른 사람에게서 넘겨 받은 것인데, 화자를 거쳐 종전 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면서 죽은 사람은 계속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레마르크는 평생 반전소설을 써왔는데, '서부전선 이상없다'보다 더 깊이 들어간 것이 이런 displaced의 삶인 듯,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를 비롯한 명작이 많이 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기본교양으로 이야기하는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가 아니지만, 현대소설위주의 독서에서 '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들을 몇 권 읽는 맛이 참 새로웠고, 덕분에 다시 '문학'에도 눈을 돌릴 힘을 받게 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머리와 꽉 찬 답답한 가슴은 좀더 편한 책을 찾을 것 같다. 떄로는 양으로, 때로는 질로 그렇게 다변한 독서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유령탑'을 만난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거시 영감을 얻어 뤼팽3세 -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작품은 매우 typical한 란포의 작품으로 적절한 기괴함과 약간의 동화적인 유치함이 섞인 추리물이다. 그의 시대의 양풍숭상에 걸맞게 지금은 원작조차 찾기 어려운 몇 개의 서구소설이 각색되어 녹아들어 있다고 한다. 인간의 완전함을 믿은 19세기, 이를 의심하기 시작한 20세기, 그리고 이것이 완전히 무너진 21세기로 시대를 구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요즘이다. 비록 환상이긴 했지만, 다시 인간지성의 완전함, 하지만 과거의 실수에서 배운 겸손함을 겸비한 그런 믿음을 회복할 수 있을지? 란포는 어쨌든 늘 즐겁다. 워낙 번역된 작품이 적은 덕분에 다소 유치한 이 작품도 즐겁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다는 것, 실천한다느 것, 뱉어내는 것, 그것이 해석되고 다시 뱉어지는 과정까지 생각이 많은 요즘이고, 떄로는 쓸데없다고 생각할 만큼 조심스럽기도 한 요즘...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