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그레 매그레 시리즈 19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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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명분에 어떤 의미를 두고 본다면 21권은 모두 다 뭔가 묵직하고 그럴듯한 작품이 되어야 하겠지만 continuity 또한 '명분'이나 '의미'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처럼 어제의 늦은 자리와 엄청난 더위로 힘이 딸리고 일은 많았던 날에는 비교적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쉬운 책을 골랐다. 


어쩌다 보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의 형사반장을 지낸 한 인간의 이야기를 19권이나 연달아 읽게 되었다. 조르주 심농의 19권을 구한 것이 2016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고 알라딘에 기록이 있는데 6년 정도가 지난 2022년에 읽기 시작해서 이후 추가된 두 권만 더 읽으면 모두 21권의 시리즈를 끝내게 된다. 홈즈와 뤼팽 그리고 크리스티를 완독한 것으로 기본을 했고 엘러리 퀸 시리즈와 캐드파엘, 그리고 브라운 신부도 예전에 끝냈으니 시리즈로 나온 것들은 꽤 섭렵한 셈이다. 일본추리의 황금기 작품들까지 하면 어릴 때 무협지와 역사소설을 읽느라 놓친 것들을 열심히 따라잡은 것이 된다.


은퇴한 매그레는 시골에서 끝이 나쁘지 않은 100-120년 전 정도 유럽의 공무원의 노년을 보내고 있다. 자식도 없는 매그레지만 외조카가 말썽이라서 형사로 취직을 시켜놓았더니 정신 나간 짓을 하다가 얕은 술수에 걸려 범인으로 몰리게 된 것. 은퇴한 반장이 무슨 힘이 있다고 이걸 해결하라고 은근히 취직시켜준 은혜는 커녕 반장 탓에 형사가 된 걸 원망하는 듯한 푸념까지 들어야 한다. 


어쨌든 뻔한 일이 생긴 걸 금방 파악한 반장은 단서를 찾아 이리 저리 탐문을 하고 그의 주특기인 심리분석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보려고 하지만 이번엔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다. 


고생 끝에 뭔가 되려고 하면 방해를 받고, 잘 만들어 놓은 틀이 깨져버리고. 하지만 단 한번의 기회를 잡고 언제나처럼 멋지게 사건을 해결하여 조카의 누명을 벗겨준다.


그 후일담이 우스운데 이 조카는 아무래도 사건의 여파로 충격을 받았던지 고향에 내려와 룸펜으로 사는 것으로 소식이 전해진다. 대가 약한 인간은 뭘 해도 힘들지만 100여년 전 파리에서 형사를 할 정도의 배포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딱히 조카를 탓할 수는 없다.


책을 읽으면서 매번 어떤 의미를 찾거나 뭘 배워서 '성공'하는 길로 가야하는 것이 아니란 말을 특히 강조하는 요즘이다. 지난 인문학 열풍 때 한 몫 단디 챙긴 인간들이 천박한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지금 지난 시간 그들의 책을 읽던 자신이 너무 후회스럽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의미를 찾아도 그만, 그냥 즐겨도 그만, 지식을 쌓아도 좋고 싹 다 까맣게 잊어도 좋다. 그전 '비인부전'이라고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같은 샘물도 뱀이 마시면 독이 되고 양이 마시면 양모가 된다. 그 품성이 천한 것들은 돈이 많고 공부를 많이 하고 성공할 수록 더 나쁜 짓을 할 것이니 제대로 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고 싶거든 그에게 재물이나 권력을 줘보면 된다고 했는데 요즘 뉴스 한 귀퉁이에서 연일 똥을 싸고 있는 지성 없는 지성이와 곡학아세의 증권사를 보면서 쏠리는 고급진 vomit 욕구와 함께 떠오르는 경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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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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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무더위가 계속 되고 있다. 목요일까지는 확실히 계속 이렇게 더울 것이고 이후 조금씩 가을의 날씨를 찾아갈 것이다. 오늘은 이곳에서 금년 중 가장 더운 날이 아닌가 싶은데 낮 최고가 무려 화씨 111도였으니 말이다. 원래는 dry한 이곳 여름이지만 요즘은 다소 습한 기운도 있고 무엇보다 dry하고 자시고 일단 화씨 111도가 되면 그냥 아스팔트에 눌러붙어 녹아버릴 듯 흐물흐물해져버리고 만다. 각오와는 달리 만성적인 게으름이 도져 집에서 일을 하다가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고 돌아오니 전기가 나가버렸다. 덕분에 오후 3시에 다시 짐을 챙겨 사무실로 나와야 했으니 이럴 것을 알았더라면 곱게 사무실로 나왔을 것을. 


오가면서 낭비한 시간만큼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고 오늘 저녁의 약속이 있어 책을 읽기 어려운 일정이란 걸 새삼 떠올리고 딱 그 낭비된 시간에 해당하는 만큼의 시간에 급하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이 책을 읽었다. 매우 놀랍게도 내가 기억하는 플롯이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으니 이 또한 재독 삼독의 묘미라고 해야하나?


하루키의 두 번째 작품으로 앞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익숙한 Jay's Bar의 Jay, 쥐와 맥주가 나온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종종 메타포가 되어주는 듯한 쌍둥이 여자애들, 우물 이야기가 나오고 하루키의 또다른 자아였을 것 같은 번역사업을 하는 화자와 쥐가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끌어나가다가 느닷없이 화자의 옛 기억속에서 핀볼머신이 소환되어 나온다. 


쥐는 Jay's Bar에서 여전히 맥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여자를 만나고 Jay는 맥주를 팔고 감자를 깎아 튀기고 있다. 화자는 공간 뿐 아니라 시간마저 여기서 멀어진 곳에서 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착실하게 친구와 함께 번역일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다. 물론 집에 가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쌍둥이 여자애들에게 care를 받거나 시달림을 받아야 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의미 없어 보이는 reptition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옛날 최고기록을 세운 핀볼 머신을 찾으려고 한다. 시작과 끝이 없이. 수소문 끝에 핀볼 머신의 덕후를 만나 결국 그 옛날의 핀볼 머신이 수집된 창고에서 과거의 인연을 마주하듯이 잠시 시간을 보낸 후 점잖게 돌아서 집으로 온다. 그리고 쌍둥이들은 떠난다. 


내가 기억하는 건 '쥐'의 죽음 (이건 아마 '양을 쫓는 모험'과 혼동한 것 같기도), 핀볼 머신을 만나 인생 최고의 게임을 다시 한번 하고 신기록을 세운 후 top에서 이별하는 것이었고, 도대체 쌍둥이는 아예 기억속에 없었으니까 상당히 다른 이야기로 이 책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의식의 흐름에 손을 맡기고 써내려간 듯한 소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분명히 훗날 각각의 작품으로 풀려나갈 이야기들이 이때 잉태된 것 같기는 한데. 


너무 더워서 술도 맛이 없을 것 같은 오늘 그러나 술이 있는 저녁의 약속이 있다. 그제부터 매일 마신 탓도 있지만 아마 더위 탓이 더 클 것이다. 이틀째 잠을 설치고 자다 깨기를 반복하니 시간의 흐름이 뒤죽박죽이 되어 상태가 영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은 gg를 외치기엔 조금 아까운 나이라서. 


난 핀볼 세대는 아니라서 처음에 미국에 와서 오락실이나 볼링장을 가면 꼭 핀볼 머신이 몇 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당구장/바를 가면 한두 대는 있는 것 같다. 공을 튀기고 여기 저기를 때리면서 점수를 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데 이게 재미있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 오리지널 백인 미국사람인 내 이모부가 그러고 보니 옛전에 386 PC로 핀볼 게임을 하던 걸 보면 재미가 있기는 한가보다.


화씨 111도의 위력으로 책도 겨우 읽고 일도 겨우 하고 운동도 그랬고 술도 겨우 마실 것 같다. 원래 걸어서 갈 약속장소 (술 마실 땐 차는 집에 두고 온다) 까지는 어쩔 수 없이 Uber를 불러서 나가야 하니 가뜩이나 이번 주에 줄어든 걷는 거리를 make up할 방법이 없다. 


문득 돌아보니 뭐든 의존성이 너무 높아진 듯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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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9-07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도 늦더위라 하셔서 의아했는데, 그냥 더운 수준이 아니라 많이 더운 날씨인가봅니다.
더운 날, 시원한 실내에서 소설 읽기 좋은데요!^^

저는 영어공부좀 해보겠다고 [영어회화 이디엄] 책을 붙잡고 있습니다 ㅎ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transient-guest 2022-09-07 09:51   좋아요 0 | URL
뭔가 배우는 건 늘 좋습니다. 저도 스페인어 배우려고 책 사서 좀 보다가 뒀는데 나중에 어학 역사 이런 것들 다시 공부해보고 싶네요. 네 사방에서 정전 나고 난리입니다.

yamoo 2022-09-07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 소설이 옷을 다시 갈아입었네요...

어학 공부는 하고 싶지 않은데...의외로 어학공부 취미인 분들이 많아 놀라워요~ 뭐, 사람들은 다 다르니까요..^^;;

트랜스님은 스펭인어 공부를 하시는군요~ 야~~대단하셔요!!

transient-guest 2022-09-08 07:53   좋아요 0 | URL
제가 고등학교 때 3년 했던 걸 살려보고 싶어서요.

얄라알라 2022-09-08 11:33   좋아요 0 | URL
미국 캘리포니아 거주하시는거죠?
스페인어 아니하실 수 없는 분위기 아니던가요?^^
그럼 3개국어 하시는 셈이시네요. transient님께서는^^ 부럽부럽

야무님도 왠지 언어적으로도 글로벌 하실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transient-guest 2022-09-08 11:51   좋아요 0 | URL
하면 좋죠 근데 많이 까먹어서 다시 제대로 공부해야 해요 한국도 글쿠 점점 3-4개국어는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스페인어 중국어 할 수 있으면 영어와 함께 세계 인구의 상당수를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씩 해보고 싶습니다

2022-09-08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8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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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를 잘 활용한 덕분에 길고 깊은 책 한 권을 오늘 완독할 수 있었다. 갑자기 닥친 가을 초입의 엄청난 늦더위로 잠을 설치고 겨우 일어나 잠깐 일을 하고 운동을 마친 후 점심시간을 조금 넘어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이 나쁘지 않았던지 금방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었다. 30대 중반이 조금 못 미친 예전의 내가 읽은 조르바와 이제 40대 중반을 넘긴 지금의 내가 읽는 조르바는 여느 책과 다름 없이 변함이 없었지만 읽는 나는 달라져 있었다. 이번 21일 21권 project 내내 익숙하게 느낄 이 감정의 창을 거친 조르바 또한 많은 '꺼리'들을 준 것이다. 


혁명을 향해 떠나는 친구와 이별한 화자는 부둣가 술집에서 조르바를 만나 크레타로 향한다. 갈탄을 파다가 털어먹고, 다른 일을 벌이기 위한 물품을 사오라고 보낸 조르바는 젊은 처자에게 빠져 돈을 다 털어먹고 돌아온다. 수도원을 털어 마련한 밑천으로 다시 일을 벌이지만 이 역시 망해버리고. 이 과정에서 조르바의 인생관에 매료된 화자는 잠깐 스스로를 풀어주지만 종국에는 다시 익숙한 law and order의 세계로 돌아간다. 


바이마르의 혼란과 2차대전을 겪고 소식이 끊긴 조르바의 부고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된 이 긴 방황과 구도의 이야기는 확실히 지금 나에겐 12-3년 전의 내가 본 기억보다 훨씬 더 쉽고 명료하게 다가온다. 이것이 경험의 독서인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오십의 나이가 왜 지천명이라고 불리는지 몇 년 후면 직접 확인하게 될 변방의 일개 변호사에게는 그런 의미로 보인다. 


학습에 의한 지적 사유에 속한 화자의 순진한 세계관은 실존적이고 실증적인 조르바의 삶과 만나면서 한바탕 격랑을 맞는다. 그저 놓아버리면 될 것을 꽉 쥐고, 관념속의 이론을 준비되지 못한 실제에 대입하다가 쿠사리를 먹고. 다가오는 걸 그 의미 그대로 받아 즐기는 것으로 존중하지 못한 탓에 잠깐 깨어나 지상으로 내려왔던 영혼은 금방 다시 천상으로 구속되어 버리고 그 끝은 조르바와 헤어져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조르바는 불한당이고 사기꾼이며 모험을 빙자한 허풍선이지만 그의 영혼은 그가 경험한 것을 녹여낸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면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흘러가는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데 화자나 나처럼 평생을 law and order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볼 때의 끌림은 자칫하면 우리 기준에서의 '인생'을 망치기 십상이니 조르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서의 조르바가 한때 이곳 저곳을 오르내린 시기가 있었고 앞으로도 종종 그런 시기가 있을 것이다. 단 조르바를 이렇다 저렇다는 표현으로 규정한다면 그건 더 이상 조르바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조르바를 읽고 교양을 쌓고 성공하란 무지성이 있다면 그 또한 조르바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난 오늘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 이겨내고 살아내는 것에서 조르바를 보았다. 실체가 없는 '도' 또는 '삶'의 옳은 정형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 사슴을 좇다가 숲을 못 보는 사냥꾼처럼 옆에 있는 실재하는 삶을 놓치는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 지금 이대로, 모든 기쁨과 슬픔, struggle과 striving을 그대로 온전히 받아서 살아내는 것에서 진정한 삶을 추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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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9-07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30대에, 40대에
십년 즈음 마다 다시 만나는 대작...
휴가 활용해서 알차게 읽으셨다니 이번 휴가를 뿌듯한 맘으로 기억하시겠어요
저는 아직 읽어본 적 없는데
올려주신 리뷰 읽다가, 그 옛날엔 [지와 사랑]으로 번역된 헤세 책이 생각 났어요^^

transient-guest 2022-09-07 02:17   좋아요 1 | URL
네 아무래도 긴 책을 읽으려면 평일엔 어렵겠다 싶어요. 주중에는 조금 쉬운 책으로 가고 주말에는 긴 책으로 갈 것 같아요. ‘지와 사랑‘은 처음 듣는 제목입니다. 예전엔 임의로 의역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는데 혹시 그런 건가요? ‘분노의 포도‘를 ‘분노는 포도처럼‘으로 기억하는 올드타이머들도 꽤 있더라구요.

얄라알라 2022-09-07 09:19   좋아요 1 | URL
분노는 포도처럼?

와...영화 제목 스타일이네요

저는 중딩 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세계문학 전집 중 [지와사랑]이 있어서 클 때까지 그 제목이 지와사랑인지 알았어요. 골드문트가 나오는 바로 그 책이요^^

transient-guest 2022-09-07 09:52   좋아요 0 | URL
그 시절 작명의 낭만이 있긴 해요. ㅎㅎ 영화제목도 그렇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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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9월 24일까지 하루에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에 도전하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시간이 좀 났기 때문인데 이런 도전은 숱한 독서인들이 이미 성공적으로 마친 바 개인적으로 리셋의 의미를 두고는 있지만 뭔가 대단한 건 아니다. 어떤 이는 벌써 여러 번 일년 365일 간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긴 바 있으니까 더더욱 21일 21권이란 건 일단 숫자로 보아도 그다지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첫 번째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은 건 내 독서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던 2012년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당시 여러 가지의 일이 한꺼번에 닥친 시기를 살아내고 있었고 어쩌면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나는 직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런 내가 여기까지 오는데 큰 힘이 된 전투적이고 꾸준한 독서를 시작한 2012년 남들은 이미 다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전작을 축으로 삼아 미친듯이 읽고 구한 그 시절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난 10년에서 앞으로의 10년으로 나아가는 힘으로 삼고자 한다. 


이 책은 이미 네 번째가 아니면 다섯 번째 읽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늘 그 시기의 화두에 맞춰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너무도 익숙한 그대로의 이야기지만 읽는 내가 늘 달라져 있는 것이 이유가 되지 않을까. 


대학을 다니는 화자가 방학 동안 Jay's Bar에서 쥐란 친구와 만나 매일 맥주를 마시고 그 나이와 시대에 맞는 뭔가 그럴듯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20대에서의 인생과 개똥철학을 논하고 어떤 여자를 만나다가 방학이 끝나 다시 도쿄로 돌아와 30대를 맞이하고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보통을 삶을 살면서 그 시절 한때의 사람과 장소와 경험을 회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심플하고 짧은 이야기로 무라키미 하루키는 '군조 문학상'을 받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이 책에서는 작가로서 하루키의 왕성한 시기에 나온 작품들의 모티브가 된 많은 테제들이 이미 등장한다. 하루키의 팬이라면 읽을 때마다 다른 작품으로 파생된 '쥐', '양', '우물', '우물에 빠진 남자', '자살한 여자친구', '재즈', '클래식', 'LP', '맥주,' '버번 위스키,' 등이 점차 선명하게 하나씩 들어오게 된다. 읽으면서 계속 다른 작품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말이다.


나의 20대를 돌이켜 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내 모습을 믿어 의심치 않고 그 밖의 것에는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도 어렵지만 그땐 전혀 몰랐던 인간관계의 어려움, 연애, 주고 받는 것이 뭔지 모르고 내 중심적으로 해석해나가던 인간관계, 허제, 겉모습, 비교우위, 뭔가 깊이 있는 듯, 하지만 실제의 경험에 바탕하지 아니했던 인생관 등등. 그야말로 부끄러움 90에 그리움 10인데 그 10은 젊음의 무한한 가능성에 매긴 점수일 뿐 당시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여러 면에서 훨씬 나은 사람 같아서 그 젊음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그립지 않은 시절이다. 


Jays Bar는 아니지만, 손쉽게 구하기 좋은 맥주를 마시면서 칩과 육포를 안주 삼에 참 많은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지 않을 땐 가끔 인적이 끊긴 깊은 한밤 중의 Pier에 나가서 바다 공기를 마시거나 나중에 달리기를 하게된 3-4학년의 어느 지점에서는 앞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track을 달리다가 안개를 뚫고 눈 앞에 나타난 사슴에 놀라기도 했다. 본격적인 목적의식을 갖고 삶에 달려든 4학년 시절에는 졸업을 준비하면서 인턴으로 뛰고, 알바를 다니고 하면서 진짜 하루의 자는 시간을 빼곤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 살기도 했으니 지금보다 못하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빛나던 지기는 그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가능성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지만 뭔가 이룰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과 의지가 늘 함께 하던 세기말 그때의 내가. 


세기말을 훌쩍 넘어 밀레니얼을 지나 금 세기 세 번째 decade의 초입인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거의 두 배의 나이를 먹어가고 있고 커리어나 금전적으로나 심지어 신체의 능력까지도 그때의 나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이다. '쥐'같이 개똥철학을 논하던 친구들도 하나 둘 씩 삶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차도 여러 대를 갈아탔고, 사는 곳도 많이 바뀌었고 재즈와 클래식을 즐기고 '우물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은 건' 내 자신이 되어버리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자살한' 과거의 여자친구 같은 건 없다. 


안정적인 은퇴를 꿈꾸며 노력하면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부지런히 세상을 봐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생겨버렸는지 내년부터는 근처의 안 가본 곳부터 하나씩 짧게다도 다녀올 결심을 해버린 나는 이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에 비해 짧아지는 것이 거의 확정될 반 세기의 나를 향해 가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보다는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신의 모습에서 장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자의 안쓰러움을 본다. 


점점 과거에 즐긴 많은 것들이 재미없어지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특히 한국 사람) 왜 늘 돈 얘기와 골프 얘기가 주요 테마가 되는지 이상하게 생각되는 요즘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심지어 비디오 게임은 더 이상 즐기지 않게 되더라도,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 몸을 쓰는 것, 여행과 정신, 그리고 영혼의 수양은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아무것도 모르던 그 시절을 함께했던 수많은 인연들에게도 축복을. 이제는 어느덧 우리는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음을 새삼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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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5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6 0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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