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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여행기
미셸 에켐 드 몽테뉴 지음, 뫼니에 드 케를롱 엮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9월
평점 :
목표의 1/3지점이다. 주말에는 그런대로 긴 호흡의 책도 도전해보겠는데 평일에는 까딱 잘못하면 저녁에 퇴근해서 잠들기 전까지의 4-5시간에 다 읽어야 할 수도 있어서 역시 묵직한 책을 평일에 읽을 엄두가 나지는 않는다.
Indian Summer인지 Climate Crisis가 불러온 heatwave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주의 무더위는 오늘부터 꺾이는 듯 견디기엔 좀 더 낫다. 그래도 아직 더위의 여파가 있어서 시원하다는 기분은 들지 않지만 다음 주부터는 확실히 달라지는 것으로 예측이 되고 있으니 다행이다.
이미 오늘 읽으려고 뽑아놓았던 책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으로 유명한 그 몽테뉴가 말년에 17개월 하고도 8일간 프랑스에서 독일과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온 이야기라고 한다. 생전에는 출판되지 않았고 존재는 사후 200년 정도가 지나서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상당히 치밀한 고증을 거쳐 몽테뉴의 원고임을 입증 받았고 출판이 되어 다시 200년이 더 지나서 한국에서 번역이 되었다고 한다.
목적지까지 가는 속도가 5세기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빨라진 지금도 사실 지구사람들 대다수에게는 여행이란 돈과 시간이 어느 정도는 갖춰져야 가능한 '사치' 아닌 '사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바빠서, 돈이 없어서, 여유가 안되서, 등등의 이유로. 술은 마시고 친구를 만날 작은 여유는 가능해도 막상 여행을 하려고 생각하면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 근처의 여행은 그 수준 (짧은 거리, 익숙한 그곳, 짧은 일정 등)에 비해 너무 비싸게 느껴지고 아주 조금이라도 그럴 듯하게 일정을 잡아보려면 주머니도 그렇지만 우선 시간을 빼는 것이 쉽지 않다.
자영업 노동자라고 자신을 규정하지만 어쨌든 이젠 그럭저럭 아쉬운 소리는 안 하고 사는 요즘도 그래서 여행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그냥 맘 내키는 대로 갈 수가 없는 것이 나의 처지라서 너무 안되겠다 싶어서 내년부터는 근처의 가까운 도시부터 하나씩 주말에 가볼 생각이다. Portland나 Seattle처럼 같은 서부에 있어서 비행기로 가면 금방 갈 수 있고 차도 빌릴 필요가 없는 도시 하나씩을 잡아서 말이다. 기왕에 생각난 김에 왜 금년부터 가지 않냐고 물으시면 그건 그 나름대로의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하지만 딱히 합리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 어른의 사정이란 절대로 쉬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 모두들 먹고 사느라 분투하는 걸 뻔히 아는데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중요하다는둥 그래도 젊을 때 다녀야한다는 둥 하면서 꼰대스러운 말을 할 생각은 없다. 원래 젊을 땐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고 늙어서는 돈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가 많고 이로 인한 서로의 입장의 간극은 영원히 좁힐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다. 사실 늙어서도 못 다니고 젊은 사람도 인생의 방향을 다르게 설정하여 실컷 놀러다니는 경우도 있으니까.
다시 몽테뉴로 돌아와서.
여행을 다니는 내내 나름 명사의 대접을 받고 치안이 개판이었을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큰 말썽이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안전성이 보장되는 신분.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바쁜 보통사람의 대다수, 아니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을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17개월 8일의 시간을 내서 교통도 좋지 못했을 시대에 여행을 했으니 어찌 글로 남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문제는 이 글이 신장결석에 좋다는 온천욕과 온천수 드링킹이 반 정도고, 거기서 거의 매일의 대소변을 관찰하면서 돌과 모레가 얼만큼 나왔다는 이야기가 추가되고, 먹고 마시고 잔 이야기를 뺀 나머지가 도시와 문화, 종교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 의학이 퇴보했던 시대라서 뭔가 치료를 한다는 건 그저 몸에서 빼는 것이니 부항을 뜨거나 먹어서 배출하는 것 외엔 마취가 없는 수술 정도였으니 만성으로 신장결석을 앓는 사람이 온천수 (보통 매우 mineral이 풍부한)를 마시고 당연하게도 그 결과로 마신 만큼의 돌과 모레를 쏟아내는 것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
Leisure로써의 여행이란 개념은 극히 일부에게만 해당했던 시대였고 집안이나 배경과 명성이란 것도 결국 소수의 계층에만 적용되었을 터, 몽테뉴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귀족, 주교, 수녀원장 (귀족집안출신의), 영주부인 등이고 이미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해 알고 있었고 쉽게 만나고 선물을 주고 받는 걸 본다.
이 시대 한국은 임진왜란을 7-8년 정도 앞둔 시점이었는데 둘 다 전제왕정국가였지만 뭔가 1982년에 나온 Fast time at Ridgemont High을 보면서 광주를 잔인하게 진압한 신군부 치하의 한국이 떠오르는 것처럼 묘한 기분을 느낀다.
17개월 8일의 여행이란 어떤 의미일까. 지금 같으면 세계일주도 가능할 것 같은 긴 시간인데 그 긴 시간 집을 떠나있으면서도 딱히 집에 가고싶다거나 고향이 그립다는 말은 없다. 심지어 신장결석으로 매일 고통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과연 진정한 귀족의 호화판 여행인가 하면 딱히 그랬던 것 같지도 않지만 (이것 요즘 기준으로 볼때 여행수단이나 묵는 곳, 음식이 별로라서 그런 것 같다) 몽테뉴가 여행을 좋아하긴 했었구나 싶다.
소설을 읽은 것도 아니고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읽은 것도 아니라서 뭔가 긴 책을 마구 읽었는데 남는 건 계속된 의문이다. 신장결석이 있는 사람이 온천욕을 하는 건 좋겠지만 왜 온천수를 마실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엄청 많이.
지금부터 딱 10년 후엔 나도 17개월 8일의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못할 것이다. 일단 여행이 그렇게 길다면 정말 곳곳으로 떠돌아 다녀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일을 완전히 던지지는 못할 것이라서.
그저 하와이에서 은퇴를 꿈꾸고 있고 세계여행을 꿈꾸고 있고 그 일환으로 언젠가 Malta에서 교환학생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중해에 위치한 작은 공화국이고 성요한기사단의 마지막 거처였던 곳이고, 현재의 기준으로는 꽤 저렴한 체류비용이 요구되니까 이탈리아어를 배운다는 명목으로 학생비자를 받고 작은 아파트를 빌려서 공부하는 틈틈이 지중해에 면한 유럽을 돌아다닐 꼼수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오늘까지 딱 일곱 권을, 한 권씩 매일 읽는 것으로 지난 일요일 세운 목표를 채웠다. 재주가 있는 사람은 quality도 따지고 깊이나 집중력을 따지겠지만 나같은 보통사람은 그저 꾸준함과 양으로 승부할 뿐이다. 뭐라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