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킨제이 보고서; 킨제이, 자신에 대한 보고서

 

#1. 왜 진작 몰랐을까. 덩치 크고 복잡해도 인간도 흑벌이란 걸

자연과 야생을 벗삼아 자라온 한 소년이 있다. 하루종일 숲에서 뒹굴고 만나는 동물마다의 그림을 그리던, 절대 혼자가 아니었던 소년은 자연과 생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공부를 해보고자 생물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바로 이 소년이 후에 남성과 여성의 성행동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 알프레드 킨제이다. 흑벌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강단에 선 그를 아버지는 탐탁지 않게 여기고, 당시 그의 제자였던 아내는 존경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본다. 서로의 '남다름'에 이끌린 킨제이와 아내 맥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된다. 킨제이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벌레나 모으러 다니는' 한심한 인간으로 취급하고 그런 아버지를 아내에게 보인 후 아이처럼 운다.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추고 자신의 분야에 열심히 매진을 하며 살아온 그도 정상적이지 못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언제나 트라우마였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트라우마 앞에서 그는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바라는 마냥 어린 자식일 뿐이었다.

아내와의 결혼과 결혼생활에 대한 강의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사람들의 성행동에 대한 연구를 하기로 결심한다. 자연을 벗삼아 왔던 그에게 자연이 탐구대상이었듯이, 결혼 후의 그의 일상 또한 그의 또 다른 탐구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킨제이 그는 무엇을 바라고 얻기 위해 연구를 행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궁금했고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파고들었다. 그렇기에 킨제이 보고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흑벌 연구에 매료됐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흑벌 하나하나 마다의 다양성과 특별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 연구를 통해 인간을 탐구해나가면서 깨닫게 된다. 덩치 크고 복잡하긴 해도 인간 역시 흑벌처럼 저마다 다른 '특별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영화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모두가 다 다르다'는 것을. 다름을 연구하는 영화 속 인물들의 다름은 '킨제이보고서'와 더불어 또 다른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저마다 다름을 지닌 킨제이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이 다름을 풀어나가는 것. 바로 이 영화의 숨겨진 묘미다.


#2. 사회적 제약- 서로 상처주지 않기 위한 배려

인간 성행동 연구의 사전조사 격으로 킨제이와 그의 제자 마틴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기 위해 각지를 떠돌며 막무가내 들이대는 인터뷰를 하게 된다. 그러다 동성애에 대한 연구로 이성애와 동성애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면서 킨제이와 마틴은 사회적으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아내는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린다. 사랑 없이도 섹스는 가능하다며 본능을 자제하는 것은 사회적인 제약 때문이라는 남편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상처주지 않기 위해 제약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당신과의 결혼 때문에, 그리고 아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자지 않는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는 아내 앞에서 남편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킨제이는 이 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성행동 연구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킨제이가 제자와 성관계를 가졌느냐 하는 것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남성 성행동에 이어 여성의 성행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킨제이 연구단은 내부 자체적으로 실험을 하게 된다. 바로 연구원 서로 간의 아내를 바꿔 성행동을 연구해보는 것이었다. 과학실험 연구에 있어 결코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킬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킨제이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 실험연구로 인해 연구원 간의 불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실험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게 될 줄 예상치 못했던 킨제이에게 제자 마틴은 쏘아붙인다. 사람들 모두가 교수님처럼 냉철하고 매정하진 않다고. 우리는 실험용 쥐가 아니라고. 망할 섹스가 인간에게 전부가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킨제이는 정말로 사랑이라는 감정과 섹스를 완전한 별개의 것으로 여겼을까?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의 성행동을 연구하고자 했던 킨제이는 오히려 사랑이라는 감정을 더욱 염두해두지 않았을까. 그랬기에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과학적인 연구방법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을 아니었을까.


#3. 킨제이보고서가 남기고 간 것

킨제이는 미국 전역을 돌며 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개별적인 인터뷰를 통해 미국사회의 다양한 성행동에 대한 보고서를 세상에 알리게 된다. 이 보고서는 세간의 이목을 끌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뒤 이은 여성 성행동 보고서는 금기시되던 여성성에 대한 내용으로 사회적 논란이 일었고, 록팰러 재단의 자금 지원이 중단되면서 킨제이의 연구는 난항을 겪게 된다.

그러나 킨제이의 연구에 있어 가장 큰 치명타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연구자 자기 자신의 연구와 삶에 대한 의지 상실이었다. 삶이 곧 연구이며 연구가 곧 삶이었던 킨제이에게 연구와 삶의 의지 상실은 곧 킨제이 자신의 상실과도 이어지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나락에 떨어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연구와 삶 이었다. 자신의 연구로 인해 사회가 변화했다며 자신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손을 꼭 잡아주는 피실험자, 아버지의 힘들었던 유년 시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아버지와의 성행동 인터뷰는 연구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그의 의지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만 명이 넘는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 피실험자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있다. Am I normal? 제가 정상인가요? 저 평범한가요? 이런 게 일반적인가요?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사람들은 대부분 불안함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다. 성행동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성행동이 특이한 것인지, 남들과 다른 자신은 변태취향인 것인지 걱정하며 그들은 한결같이 묻는다. 이런 나는 정상인가요? 남들과 같나요?

이에 킨제이는 답한다.

"자신이 하는 성적인 행동을 남들도 할거라고 여기지. 허나 소위 변태성욕이라는 것도 생물학적으로 정상적인게 많아. 사회는 도덕적인 잣대로 이를 비난하겠지만 그걸 이상하다고 하면 오히려 우스운 거야.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야. 문제는 다들 같아지길 원한단 거지. 다르다는 기본적인 조건을 무시하고 대다수와 같아지고자 열망하여 본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말아. 금지된 것에 쾌감을 느끼면 강박관념이 돼."

모두가 같아지는 사회. 그 얼마나 단조롭고 재미없을까. 만약 사람들의 성행동이 모두 다 지극히 평범하고 동일했다면 킨제이보고서는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사회는 그 역동성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더 가치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제2의 킨제이가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킨제이보고서는 단순히 남녀의 성행동만을 담고있지 않다. 다름의 가치. 킨제이보고서가 남긴 또 다른 흔적이다.




+) 영화를 보면서 인간 킨제이를 엿볼 수 있었던 장면이 있다.

인터뷰 사전연습을 하면서 제자 마틴과 킨제이가 나눈 대화 장면이다.



-하나 더 묻겠습니다. 개인사를 다 말씀하셨죠. 유년시절, 가족, 경력, 성관계를 가졌던 사람들까지. 근데 사랑에 대한 언급이 없군요.


- 사랑은 측정할 수 없으니까요. 측정하지 못한다면 과학이 아니죠. 그 문제점을 골똘히 생각해봤어요.


- 문제점이요?


- 사랑에 관한한 우리는 문외한이니까요.


- 사랑이 중요하다고 보시는군요.



이처럼 객관적인 통계를 다루는 과학자이면서도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한 킨제이. 마지막 장면에서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던 숲에서 아내에게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어떤 종족은 나무가 불완전한 인간이라며 한자리에 붙박인 걸 슬퍼한다고 믿지만 자신은 불평하는 나무를 본적이 없다고. 나무는 나무란 사실을 사랑한다며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던 그 손에는 언제나처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한 여자의 남자로서 한 곳에 뿌리내렸던 그는 과학자이기 전에 삶을 사랑했던, 사랑할 줄 알았던 한 인간이었다. 이제 '킨제이'하면 '보고서'가 아니라 '인간' 킨제이가 떠오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날아올라, 빌리 엘리어트

어려운 시대 상황과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 속에서 자식을 훌륭한 무용수로 키워낸 감동적인 영화인만큼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제목을 지었을 수도 있을 법한데 이 영화, 참 멋이 없다. 우리 사회로 빗대자면 영화제목이 '김철수'인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는 생각은 '제목 참 잘 지었다' 하는 것이었다. 권투 글로브를 벗어던지고 발레 슈즈를 집어든 소년, 빌리 엘리어트. 그 안에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모든 것이 이 조그만 소년에게 다 담겨 있으니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 제목은 참, 있는 그대로다.

"태어나자마자 난 춤을 췄어요. 죽을 때까지 춤을 출거에요" 형 몰래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LP판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빌리는 그렇게 날아오르고 춤을 춘다. 기력이 노쇠한 할머니와 탄광촌에서 일하다 노조 파업에 한창인 아버지와 형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아가는 빌리. 할아버지를 거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권투 글로브를 끼고 권투 연습장에서 거부할 새도 없이 당연하게 권투를 배워왔다. 하지만 익숙한 권투 연습장에서의 낯선 발레 풍경은 갑작스레, 그리고 서서히 빌리의 가슴속을 파고든다. 분명 어린 소년에게는 낯설기만한 발레였을테지만 어쩐지 빌리에게 발레는 권투보다도 더 익숙하게 다가온다. 숨겨져 있던 발레 그리고 춤에 대한 열정을 온몸으로 깨달아가는 빌리에게 발레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어려운 가정형편도, 삐걱대는 가족관계... 그 모든 것은 발레 속에서 사라져갔지만, 언젠가 빌리는 깨닫게 되었을까. 자신이 날아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사라져간 그것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2. 처음이기에 어색할 수밖에 없는

빌리를 둘러싼 관계들은 서로의 진심을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 어쩐지 조금은 어색하다. 탄광촌의 생활을 빌리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는 발레가 전부인 빌리에게 발레고 권투고 모두 집어치우라고 호되게 꾸짖고, 어린 동생을 아끼는 형은 괜히 동생에게 야박하게 대한다. 빌리와 그 가족들이 부닥치게 되는 모든 갈등은 처음이기 때문에, 그 어색함을 드러낼 줄 모르고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 모두가 다 처음이기 때문이다. 게이인 친구도, 발레 선생님과도 가끔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만 그러한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성장한다. 완강하게 반대하는 아버지 앞에서 빌리는 온 진심을 다해 춤을 추고, 게이 친구에게 발레를 가르쳐주고, 선생님께 엄마가 남긴 편지를 보여준다. 결국 가족들은 온 마음을 다해 빌리를 지지하게 된다. 비록 그것이 떠나는 버스 유리창 사이로 간신히 드러내는 진심이라 하더라도, 어찌됐던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런던으로 떠나기 전 "저 떨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빌리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괜찮다, 아들아. 우리 모두 겁내고 있어" 떨고 겁내도,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이들과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의 어색함과 보이지 않는 진심도 이해할 수 있는.


#3. 한 가족의 백조의 호수

또 다시 빌리가 날아오른다. 항상 혼자서 몰래 LP판을 틀어놓고 날아오르던 그 때의 빌 리가 아니라, 이젠 최고의 무용수가 되어 날아오른다. 무용수로서 잠재된 빌리의 능력은 타고난 자기 자신만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건 계란세례를 받으며 탄광촌으로 향하던, 합격 봉투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자신의 가족들이었다. 한 가족이 만들어 낸 백조의 호수를 빌리 엘리어트는 날아오른다. 혼자가 아니라, 자신을 있게한 그 모든 것들과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 왜 국가와 사회는 인권침해를 부인하는가
스탠리 코언 지음, 조효제 옮김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검은 표지의 앞뒤에 그려진 두 손은 무엇인가를 가리고 혹은 막고 있다. 번역된 제목에서는 잘 읽어낼 수 없는 책의 주제와 가려져있는 그 무언가는 바로 부정, 'States of Denial'이다.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국가의 잔인함과 외면하는 대중을 '부정'이라는 핵심 틀로 풀어나간다. 진실을 보려하지 않는 국가와 대중은 자신과 서로의 눈을 가리고, 혹여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막은 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건 간에 따뜻하고 좋은 것, 선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 반대로 차갑거나 무서운 것, 악한 것은 멀리 한다. 그것이 인간 본성에 의한 것이든, 이분법적 기준을 학습하고 체득한 것이든 간에 '권선징악'을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이 타인과 함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곳에서의 특정한 객관적인 사실, 진실로서 옮겨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난하고 불안정하고 폭력으로 찌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의 조건이 유난히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곳에서 군대와 난민, 암살대와 기근을 매일 대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명백한 사실들을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나와 상관없는 그들로 타자화해 먼 거리에서 지켜볼 뿐이다. 그들의 삶이 안타깝고 딱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눈감아버리고 외면한다. 관점과 해석의 차이로 묘사되는 사회적 고통은 의식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자체로 악한 것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악한 누군가의 행위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과 삶마저 악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진실을 외면해버리기 일쑤다. 이런 행동이 오히려 더욱 큰 악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로 말이다.


이 책은 인간이 외면하고 싶은 고통스런 행위와 그로 인한 현상을 인권침해로 간주하고, 인권침해의 가해자이면서도 그러한 행위를 부인하는 국가와 가해자, 그리고 인간의 사회적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부인하는 일반대중의 경향을 사회심리학적 분석과 역사적 진실 속에서 파헤치고 있다. 일반대중의 부인, 무관심, 소극성에 대해 비써르트 호프트는 '아는 것 knowing'과 '모르는 것not knowing' 사이의 어스름한 상태로 규정한다. 이에 저자는 우리가 이런 일을 '알려고만' 했다면 모든 일을 이해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정이 아닌 시인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골치아픈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해야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폭로하고 도전하고 허물어뜨려야 할 어떤 것에 있어 일종의 정도를 벗어난 부인의 상태를 허물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고통을 대변하는 표현들을 많이 접할수록 이 문제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인이 일으킬 수 있는 정말 위험한 상태는 바로 '소통의 부재'가 아닐까 한다. 무지의 상태에서의 부인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의 부인은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다. 말하지 않고 외치지 않는 것은 불통을 넘어선 소통 자체의 부재를 뜻한다. 외면하고픈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를 고쳐나가기 위한 움직임을 이끌어가기 위해선 시인을 통한 소통의 트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그러한 일들은 개개인의 의식에 등재되고 소화될 수 있으며 정책이나 여론을 만들어내고 바꾸어나갈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눈감아버리지 않고 떳떳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더 나아가 이에 대해 끊임없이 소통하고 갈등하면서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어가려는 관심과 태도를 국가와 대중 모두가 가진다면 외면하고픈 진실 속 존재들-어쩌면 나 자신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눈을 가린 손을 떼어내어 사실을 직시하고 입을 열어 사실을 이야기할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