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 오늘의 일본문학 1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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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정리 중 발견한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퍼레이드>. 군복무 시절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다시 펼쳤는데 너무 오래되서인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살짝만 떠올려 보고자 읽기 시작했는데 금방 완독해버렸다. 가독성 갑일세.ㅎ

주요 등장인물 다섯. 나이도 하는 일도 다 다른 청춘들이 한 집에 모여살고 있다. 겉보기엔 사이 좋은 가족 같지만 내면의 깊은 이야기 따위 나누지 않는다. 누구든 당장 짐을 싸서 떠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사이.

여기서 살고 있는 나는 틀림없이 내가 만든 '이 집 전용의 나'이다 '이 집 전용의 나'는 심각한 것은 접수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 나는 이 집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 함께 사는 요스케, 고토, 나오키, 사토루가 나처럼 '이 집 전용의 자신'을 만들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들도 실제로는 이 집에 존재하지 않고, 결국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 133p

한 집에 같이 사는 청춘남녀들이라는 뻔한 설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끄는 것은 참신한 플롯이다. 각 챕터마다 인물의 시점이 바뀌는 방식은 처음이다. 물론 두 세명 정도가 연속으로 번갈아 가며 바뀌는 작품은 얼핏 기억나지만 이렇게 다섯명의 인물을 시간순으로 이어지는 각 각의 챕터에 한 명씩 포진시킨 것은 처음 본다.

이러한 형식 덕분에 독자는 읽는 내내 끊임없이 확인한다. 인간은 누구나 가면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일부 만을 남에게 노출한다. 그 모습은 사람이나 상황, 환경 등에 따라 달라지며, 심지어는 일부가 아닌 꾸며낸 가공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요스케나 코토도 그들이 아는 사토루 밖에 모르는 건 당연한 거야. (중략) 그러니까 모두가 알고 있는 사토루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야. 그런 사토루는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 - 183p

사실상 타인의 온전한 모습을 확인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에 더해 상대방의 진심을 확신하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은 순전히 믿음의 영역이다. 그래서 믿음, 신뢰가 인간관계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거다. 갑자기 어느 옛 유행가 가사가 떠오른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난 말이야. 그런 말 싫어해." "어떤 말?" "그러니까 그 진실이란 말. 난 도저히 그 말에서 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 209p

친구와 직장 동료, 심지어 연인과 가족까지, 우리가 보는 모든 타자의 모습은 그들의 일부거나 과장 또는 거짓된 모습일 수 있다. 문제는 진실과 실체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현대인은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온라인에선 익명성 뒤에, 오프라인에선 가면 뒤로 숨어 든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그 둘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지금과 같은 과도한 의존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익명이라는 악마......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익명을 부여 받음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만약 내가 익명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나는 절대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과장에 과장을 덧붙인 위선적인 자신을 연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132p

작품 중반부까지는, '안그래도 이 삭막한 세상에서 작품 속 인물들처럼 쿨한 관계라도 유지하는 것이, 히키코모리st가 되어 고독사 하는 것 보단 좋지 아니한가'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는 마지막에 다소 충격적인 반전을 숨겨 놓음으로 작금의 세태에 대한 경고를 던진다.

누군가 나에게 의지할 때...... 진심으로 나에게 의지하려는 누군가가 있을 때 사람들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아니 의식은 하겠지만, 그 사람이 얼마나 진지하고 절실하게 기대고 싶어하는지는 알 수 없는게 아닐까? - 1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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