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돌이 우리 형
존 D. 피츠제럴드 지음, 하정희 옮김, 정다희 그림 / 아롬주니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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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네 부모 세대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어렵고 힘들었어도 옛날이 좋았고 그립다고. 모내기 철이 되면 품앗이를 하기 때문에 동네 모내기가 전부 끝날 때까지 근 한 달간 힘들게 일을 하고, 저녁에 늦게 돌아와서 빨래며 집안 일을 했는데도 말이다. 원래 사람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진짜 힘들었던 일을 제외하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기억된다지만 그립다면 몰라도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힘들게 일 하는 것이 좋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과 사람 사는 것처럼 지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기억에도 당시는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처럼 느껴졌으니까. 우리 옆은 아이가 많았는데 우리 엄마가 먹을 걸 만들면 그 집 아이들이 우르르 왔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엄마는 일부러 넉넉하게 만들었었지. 마치 존의 엄마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잃어버린 추억을 되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씌어진 연도를 보니 1967년이란다. 장소만 미국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정서는 모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 풍부하진 않더라도 서로 돕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이며 아이들도 집안일을 나름대로 자기 몫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다. 상당히 너그럽고 공정하고 아이들을 위하는 존의 엄마가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식을 보고 내심 놀랐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당시는 모두 그랬겠지만.

 

  존이 바로 위의 형인 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이지 톰은 못말리는 개구쟁이다. 그러나 무조건 말썽만 부리는 게 아니라 아주 의로운 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견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면 지나치게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는 얘끼다. 이민자인 바실리우스를 위하여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열심히 영어를 가르쳐주고 싸움에서 이기게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나 사실은 바실리우스 아빠가 제안한 '돈'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그런 식의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리를 절단하고 좌절한 앤디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도 역시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뭔가 댓가를 요구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는 진짜로 톰이 변해서 속에서 뭔가 좋은 느낌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며 개과천선하게 된다.

 

  톰이 꾀가 많고 영리하긴 하지만 그건 모두 뭔가 대가가 있을 경우에만 그렇다.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경우에는 꾀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밉기도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미워할 수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도 속은 것 같아서 항의하다가 결국 형의 설득에 넘어가서 오히려 사과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게 어디 존 뿐인가. 독자도 존과 같은 입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중간중간 위트가 넘친다. 처음에 바실리우스에게 삼형제의 이름을 가르쳐 주는 장면과 영어를 잘 하는 바실리우스 아버지에게 가서 이름을 제대로 말해 달라고 하는 장면, 앤디가 자살하겠다고 하자 존이 진지하게 도와주지만 결국 실패해서 오히려 존이 미안해하는 장면, 톰한테 불합리한 점을 따져보지만 형의 설득에 넘어가 사과하는 장면 등 읽으면서 혼자 비실비실 웃었다.

 

  어렵고 사는 게 힘든 시절이지만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놀며 지내는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지는데, 문득 우리 아동문학에서 70년대를 그리는 어린이는 어떤가 생각해 본다. 대개 일하는 아이들, 힘겹게 문제를 헤쳐가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현덕의 글에 생각이 미친다. 맞다, 현덕의 글에 나오는 노마와 기동이, 영이(이름이 맞는지 모르겠다.)가 노는 모습이 마치 톰과 존이 노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에게도 그런 작품이, 그런 작가가 있었지. 순수하게 어린이다운 이야기, 현덕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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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5
헤르만 헤세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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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어떤 사이트에 가입할 때 가장 감동적인 책을 쓰라는 질문을 받을 때 적는 게 바로 <데이안>이다. 그러나 무안하게도 내용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중학교 때 읽은 책인데 당시 어려웠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에 나도 많이 끌렸다는 점이다. 그때만 해도 다른 매체에서 인용된다던가 사람들이 추앙하는 글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시절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만 그냥 끌렸던 듯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그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문장의 의미가 이해되면서 머릿속에서 불꽃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더랬다. 모르긴 해도 그 후부터 이 책이 더욱 가슴속에 남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까지 문학 작품에 대해 그런 경험이 딱 두 번인데 한 번은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의 환희란 경험해보지 않고는 표현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여하튼 그러한 경험을 했던 책이 바로 <데미안>이라서 언젠가는 꼭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한지라 읽어보고 싶은 것과 읽는 것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딸에게 읽어봤으면 하는 책 중 하나라서 민음사의 책을 사줬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읽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푸른숲주니어에서 보내준 이 책을 받고 그 날 당장 읽기 시작했고 금방 다 읽었다.

 

  책을 덮고 나서 그 여운을 더 느끼고 싶어서 다른 책을 안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리뷰를 쓰고 싶었으나 이 또한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지라 며칠을 미루고 말았다. 한창 감수성이 풍부했던 시절,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마음을 빼앗겼는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 읽은 지금도 그 당시와 다르지 않은 감흥을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둘이 똑같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을 때 단순히 내용만 새록새록 상기되는 게 아니라 당시의 분위기와 느낌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테스>에서 건초 냄새가 나는 길을 마차를 타고 가는 부분이 있다면 가을의 어떤 부분과 연결지어서 마치 내가 그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중에 <테스>를 떠올리면 내용보다 시골의 그런 정취가 기억에 더 남는 것이다. 분명 이 책을 읽을 당시도 주변의 것보다 내 안의 감정에 더 천착하지 않았을까 싶다. 뭐, 그때 고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피상적인 일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싱클레어의 자기내면으로 향한 고뇌와 데미안의 충고가 그토록 서늘한 느낌으로 다가와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아 버렸던 게 아닐까.

 

  지금 다시 읽어보니 당시 내가 얼마나 이해하고 읽었을지 의문이 든다. 서양의 종교가 발전하고 변천하는 과정도 몰랐을 테고 독일이 어떤 나라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텐데 여기서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으니 그런 부분은 그냥 넘겼을 것이다. 그래도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대화를 읽다 보면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닌, 제대로 된 대화와 생각이 무엇인지 느끼지 않았을런지. 솔직히 요즘 아이들의 대화를 들여다보면 도대체 그 중에서 대화라고 할 만한 게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든다. 하긴 어른들의 대화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언제나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만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언제나 하나마나 한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서양의 문학고전을 읽다 보면 종교에 천착(솔직히 내가 보기엔 집착같지만)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종교를 갖지 않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여기서도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그다지 거슬리거나 이해가 안 가거나 하질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에 대한 비판도 있다고 하는데 문학도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런 부분까지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의아했던 것은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전쟁에 어떠한 거부감이나 의심 없이,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원한다는 부분이다. 데미안이 전쟁에 나갔다면 그것은 독일군으로 참전한 것일 텐데 말이다. 헤세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던가? 소설은 당시 사회를 비춘다는데, 요즘 우리 사회를 비추는 소설은 뭐가 있을까. 내가 워낙 그런 소설을 즐기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제대로 사회를 풍자하고 꼬집는 책은 없어 보인다. 자극적이고 판타지적인 것 뒤로 숨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해 본다. 물론 우리 소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여전히 감흥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아주 오랜만에 옛날을 떠올리며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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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션맨이 왔어요! 그림책은 내 친구 33
미니 그레이 글.그림, 황윤영 옮김 / 논장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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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키운 사람이라면 전적으로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갖고 싶은 장난감이 있으면 어떻게든 얻어서 한동안 장난감과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아이들, 게다가 온갖 상상력을 덧붙여 장난감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생물로 취급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미 트랙션맨 인형을 갖고 있었지만 험하게 갖고 놀았는지(이후에 새 트랙션맨을 갖고 노는 걸 보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고장나서 산타할아버지한테 새 트랙션맨을 사 달라는 편지를 쓰는 주인공. 그리고 잠을 자는 방에 선물을 두고 가는 어른의 뒷모습이 나오는 첫 장면으로부터 드디어 소원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별히 말이나 글로 하지 않지만 속표지의 편지와 그림 한 장면에서 그간의 일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선물을 받은 주인공은 신나서 트랙션맨을 갖고 논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줄곧 트랙션맨을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을 주인공 아이가 조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들이 노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 이후의 여러가지 사건은 모두 트랙션맨이 해결한다. 트랙션맨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것 같지만 모두 주인공 꼬마가 트랙션맨을 갖고 노는 모습이라는 얘기다. 얼마나 좋으면 설거지도 나서서 하고 거기서 쓱쓱 솔이라는 애완동물까지 얻는다. 물론 아이들에게, 특히 갖고 싶어하던 장난감까지 선물로 받은 아이에겐 설거지도 일종의 놀이일 뿐이지만.

 

  설거지 도중 트랙션맨을 도와준 솔을 애완동물로 명명하고 난 후 둘은 어디든 함께 다닌다. 솔을 애완동물로 생각하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그것을 할머니 집까지 갖고 가는 것으로 봐서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단순한 일회성 장난은 아닌 듯하다. 그야말로 진짜 놀이가 된 것이다. 할머니 집으로 가는 도중 '둘은 긴 여행 동안 꼼짝도 않고 죽은 듯이 자기도' 한다지만 그림을 들여다보면 주인공 아이가 트랙션맨과 솔을 끌어안고 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차 의자에는 트랙션맨을 그린 그림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정말 요 또래 아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트랙션맨의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준비하는 자상한 할머니 모습은 읽는 이를 흐뭇하게 만든다. 그동안 주인공의 다양한 행동과 놀이를 보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 부분에서는 그런 느낌을 더욱 강하게 받는다. 전에는 이런 걸 봐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결코 모두가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여하튼 할머니가 준 선물을 정작 트랙션맨은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다. 주변의 친구들이 모두 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그 선물로 일을 멋지게 해결하고 영웅이 되기까지 한다. 리뷰를 쓰기 위해 책을 펼쳐 놓고 있는데 한 아이가 오더니 읽어도 되느냐고 묻는다. 물론 된다고 했더니 다 읽고 나중에 책 읽어 주기 할 때 읽어 달란다. 그러면서 마지막 초록색 옷으로 숟가락을 구해 준 일이 재미있었는지 그 부분을 이야기한다. 읽어주고 싶긴 한데 글이 생각보다 많아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읽어주면 몰입도는 좋을 것 같으니 수요일엔 읽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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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갱 아저씨의 염소 파랑새 그림책 95
알퐁스 도데 글, 에릭 바튀 그림, 강희진 옮김 / 파랑새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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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처음 본 게 어림잡아 10년 전쯤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 때문에 열심히 도서관에 들락거리다 만난 책이다. 알퐁스 도데의 글이라는 건 알았지만 유명한 작가의 글이어서가 아니라 뭐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 책이었다.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림이 어땠었는지 잘 기억나는 것도 아니지만  그 후로 이 책이 가끔 생각나길래 소장하고 싶어 사려고 했더니 절판되었단다. 그래서 그냥 가끔 생각나는 책이 될 뻔했다. 그런데, 올 봄에 수서작업을 하던 중 이 책이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년엔가 몇몇 사람들과 알퐁스 도데의 단편집을 읽고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물론 그때도 이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 내 마음이 움직였는지는 모르지만 스갱 아저씨의 염소가 측은하면서도 이끌리는 뭔가가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다 이번에 이 그림책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면서 깨달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책을 그렇게 좋아했는지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평소에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내 자신을 블랑께뜨와 시인인 피에르에게 감정이입했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선택한 어떤 것들이 비록 현재의 풍요를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끝내 그것을 접지 못하는,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현실을 직시하라는 핀잔을 듣는 내 모습이 시인 피에르 같아서였다. 적어도 내가 옳다고 생각한 신념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키고 싶었고 지금도 그러고 싶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고(아니, 손해나 안 보면 다행이다!) 커다란 명예가 따르는 것이 아니어도 후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다.

 

  블랑께뜨가 처음 산으로 갔을 때 마냥 즐겁고 신비롭지만 밤이 되자 안락한 스갱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잠시 느낀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처음 읽을 때는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다. 산 속에 있으면 늑대에게 잡아먹힐 것이 뻔하니까. 나였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모르긴 해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생각하면 블랑께뜨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블랑께뜨처럼 목숨을 내놓는 것까지는 불가능할지라도 적어도 손해나 불이익 때문에 신념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문득,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보수적으로 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내가 보수적으로 변한다는 얘기는 아니고, 또 안 그러려고 노력하지만 보편적으로 그런 듯하다. 처음 읽었을 때도 '죽지 않고 싶다'가 아니라 최대한 오래 버티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블랑께뜨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이제 깨닫는다. 그러면서 <오늘은 5월 18일>이라는 그림책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서 안락한 집을 빠져나갔던 누나와 <레 미제라블>에서 혁명을 이끌던 남자(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부유하고 권력도 있지만 그런 것을 버리면서까지 혁명에 동참했던 남자 주인공의 친구)가 오버랩된다. 물론 블랑께뜨는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선택이고 나머지 두 인물은 대의를 위해서라는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신념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런지.

 

  블랑께뜨가 산을 동경하며 무작정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니 딸이 떠오른다. 처음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라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여기서 점수도 그럭저럭 나오는데 왜 굳이 연고도 없고 언어도 전혀 통하지 않는 곳에서 혼자 지내려고 하는지 걱정은 둘째치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워낙 뜻이 강경해서 결국 우리가 졌다. 한편으로는 큰 세상으로 나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게 좋을 것도 같지만 스갱 아저씨처럼 걱정되는 건 여전하다. 비록 나는 블랑께뜨가 되고 싶어하면서 딸이 블랑께뜨가 되려고 하는 건 우려하는 이 모순된 감정이란.

 

  커다란 사이프러스 나무가 우뚝 솟아있는 표지가 인상적이다. 이러한 그림으로 인해 글만 있는 책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간혹 그림책으로 만들면서 차라리 글책으로 남는 게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는데 이 책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그림책으로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림 덕분에 더 기억에 남고 블랑께뜨의 상황과 마음이 쉽게 전달된다. 특히 시인 피에르에게 쓴 글이 다른 글씨체로 다른 면에 배치되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확실히 드러난다. 그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경우였다면 너무 뻔한 주제를 드러낸다고 싫어했을 테지만 이 경우는 그것조차 좋아보이니 지나치게 주관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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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랏차차 뚱보 클럽 - 2013년 제19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일공일삼 83
전현정 지음, 박정섭 그림 / 비룡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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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에 언제나 다이어트 중인 사람이 꽤나 있다. 물론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보기에 별로 뚱뚱하지 않은 사람조차 다이어트를 해야한다는 강박이 들 정도로 다이어트 열풍이 거세다. 지금은 뚱뚱한 것이 보기 안 좋아서가  아니라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보기 안 좋아서라는 이유가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은찬이 엄마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아들이 친구들에게 놀림받을까봐 다이어트를 종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즘은 초등학생들 중에도 비만이라고 여겨지는 아이들이 꽤 많다. 그런데 비만인 아이들의 특징 중 하나가 먹는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거나 먹을 걸 달고 산다는 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편도 그런 편인데, 먹는 것에 대해 초연해지면 안 되겠느냐고 이야기하면 마음은 그러고 싶지만 절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먹는 것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뚱뚱한 사람들은 그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몸이 그렇게 반응한다고 말한다. 은찬이가 먹을 것만 생각하고 먹을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은찬이는 그나마 좋은 기회를 만나서 다행이다. 대개의 뚱뚱한 아이들은 그저 놀림의 대상이 될 뿐인데. 실제로 은찬이처럼 그렇게 운이 좋은 아이가 현실에서 얼마나 될까. 역도부가 있는 학교도 드물 뿐더러 뚱뚱하다고 역도를 잘 하는 것은 아닐 테니. 그나마 은찬이는 아빠의 피를 물려 받아 선천적으로 튼튼한 몸을 타고 났기 때문에 역도를 할 수 있던 것이지 그냥 뚱뚱하기만 하다고 역도를 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니 은찬이가 얼마나 운이 좋은가 말이다.


  뚱뚱한 아이도 나름대로 비만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뿐이고 뚱뚱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예쁜 옷을 입고 싶어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은찬이와 은찬이 엄마의 입을 통해 이야기한다. 실제로 큰사이즈 옷을 판매하는 홈쇼핑에서 보통의 모델에게 옷을 입혀서 광고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은찬이 엄마의 일이 갑자기 잘 풀리는 설정이 조금 억지스럽다. 동네 짜장면 집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마침 그 자리에 홈쇼핑에 나오는 회사 사장이 있었다는 설정이 뜬금없어 보인다. 그 사장이 나오는 순간 앞으로 은찬이 엄마의 일이 잘 풀리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몇 장 남지 않게 되자 예슬이와의 일도 자연스럽게 잘 풀리고 역도부 주장과의 관계도 좋아졌으며, 아니 오히려 든든한 멘토가 되기까지 한다. 얄미운 행동을 하는 준영이의 행동도 고쳐지는 등 모든 것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바뀐다. 항상 지적하듯, 결말에서 모든 것을 급하게 마무리지으려는 조급성이 엿보인다. 그렇다고 관계가 안 좋은 상태로 끝마치면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끝마치는 책도 꽤 있으니 독자도 어느 정도 그런 식의 결말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어쨌든 뚱뚱한 사람들의 마음과 애환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동화책이라는 점만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뚱뚱한 어린이나 뚱뚱한 엄마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를 다룬 이야기가 있긴 했지만 뚱뚱한 것을 창피해하고 어떻게든 살을 빼려고 하는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뚱뚱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이야기는 처음이지 싶다. 그것만으로도 읽은 보람이 있다고 하면 지나치게 관대한 평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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