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3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장혜경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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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다닐 때 국어를 참 어려워했다. 우선 왜 정답처럼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남이 해석해 놓은 것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아예 글을 쪼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어쨌든 국어를 못했고 국어가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처럼 책을 읽는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청소년기에 책을 안 읽은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기억하기로는 책을 읽으면 독서록을 쓰곤 했던 기억이 있는데(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렇다면 책을 수동적으로 읽은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하튼 지금처럼 다양한 분야의 책과 고전을 열심히 읽었다면 국어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물론 책이라는 것을 시험을 잘 보기 위한 도구로 삼아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이가 청소년이 된 지금 내가 이렇게 고전을 열심히 읽지는 않을 테니까.

 

  카프카의 <변신>은 전에도 읽었으나 나머지 단편들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지인이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며 어렵다고 하던데 카프카의 단편에 비하면 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문학도인 내겐 카프카의 작품들이 난해했다. 뒷부분의 해설에 나오는 것처럼 혹시 그레고르가 나중에 극적인 방법으로 다시 변신하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심지어 그레고르가 죽자 온 가족이 홀가분하게 나들이를 떠나는 장면은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다른 구성원에게 도움이 될 때만 가족이라면 그것인 진정한 가족일까. 그런데 그레고르는 다른 가족에게 그런 존재나 다름 없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때는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자 무관심해지고 급기야 없어져야 한다고 여기니 말이다. 카프카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의 인간성 상실을 이런 식으로 그리고 있다고 하는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언제나 유효한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례로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는 대우받지만 그 역할에서 물러났을 때 홀대받는 가장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인격적으로 존중받기보다는 경제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평가받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레고르의 아버지도 좋은 예가 되겠다. 아들이 돈을 벌어 올 때는 힘없고 무기력한 가장이었지만 그레고르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후부터 오히려 생기가 돌고 가족도 그레고르의 아버지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씁쓸하지만 카프카가 지적한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안타까운 현실만 확인했다.

 

  다섯 편의 단편 중 그나마 <변신>은 안타깝고 가슴 아픈 결말이긴 하지만 비교적 쉬운 작품에 속한다. <시골 의사>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경우 마치 앞이나 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중간 부분만 덜렁 보여줄 때의 그런 모호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공부 잘하는 모범샘보다는 말썽만 부리는 학생이 더 기억에 남는 선생님처럼 말이다. 카프카는 참 불친절한 작가다. 시골 의사가 왜 그랬는지, 당시 상황이 어떤지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이 그저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판결>은 또 어떻고. 페테르부르크에 친구가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갈피를 못 잡겠다. 이야기할 게 분명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참으로 매정하게 끝내버린다. 작가란 그 시대의 모습을, 문제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카프카는 거기에 충실한 작가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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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나이든다는 것 - 민담, 전설, 신화로 들려주는 나이듦의 여섯 가지 여정
앤 G. 토머스 지음, 박은영 옮김 / 열대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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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간접체험 혹은 치유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문득 가슴으로 느꼈었다. 솔직히 그 전까지만 해도 책이 좋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럴싸한 말로 포장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깨달음'의 기쁨을 맛본 뒤로는 전적으로, 진심으로 독서의 기능을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찬양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물론 아주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똑같은 책을 여럿이 읽더라도 그것이 주는 느낌이나 영향은 다르다는 점이다. '적시에(right time)'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도 어찌보면 나에게 적시에 찾아온 책이 아닌가 싶다. 전반적인 내용이 적시라기 보다는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는 의미의 적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내가 나이 든 여자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가족, 즉 원가족의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남편의 성격이 다시 이해가 안 가기 시작했고, 혹시 나에게도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예전에 소그룹으로 의사소통 수업을 받으며 내면의 심리가 의미하는 바와 원가족의 영향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변하면서 사람의 생각이나 상황도 변하는데 나는 예전에 듣고 느꼈던 것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나에 대해,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나 표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친 김에 심리학에 대한 다른 책도 찾아 읽어보았고 지금은 남편에 대해서도 다시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으니 하나의 계기가 된 책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신화나 전설, 민담(즉 옛이야기)을 통해 그 안에서 여자의 말이나 행동을 읽어내며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잘 풀어주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옛이야기는 대부분 잘 모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상징하는 바를 조목조목 설명해주는 글을 읽고 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물론 꼭 이렇게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도 꽤 있지만 어차피 모든 이야기는 해석하기 나름일 테니 저자의 해석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주는 내담자의 이야기가 더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몇 년 전에 엄마가 나에게 당신의 삶에 대해 한탄하셨던 적이 있다. 당시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렇게 한탄할 필요가 없는 일을 가지고 괜히 그러신다고 생각해서 엄마의 마음을 읽어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엄마가 왜 그러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철이 덜 들었던 것도 그렇게 생각한 이유였을 테고. 지금은 나이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깨닫지만 당시만 해도 무엇을 하든 '나이'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엄마가 그때 참 힘드셨겠구나 싶다. 힘들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중년 후반에 와 있는데 남은 것은 하나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나'를 위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을 때의 허탈감과 허무감을 느꼈던 게 아닐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던 것과 엄마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했던 게 참 죄송하다. 이제 깨달았으니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워낙 무뚝뚝한 딸이다 보니 그것도 쉽지 않다.

 

  역자와 이야기하던 도중 지금 우리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자기를 돌아보고 치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이야기하시던데, 정말 그렇다. 이런 책을 통해서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과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책이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적 환경이 이루어졌으나 그 분들은 이미 그것을 누릴 여건이 되지 않는다. 시간은 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도 종종 그러신다. 젊었을 때 생각하기로는 나이 들면 책이나 실컷 보며 여유있게 살려고 했는데 책을 조금만 보면 머리가 아파서 읽을 수가 없다고(그래서 드라마를 엄청 보시는 건가). 이런 책을 읽고 더 확장해서 다양한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독서로 치유가 가능할 텐데, 아쉽다. 그런 의미에서 나보다는 엄마에게 더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직 손자 손녀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할 나이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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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기와 마음이 자라는 나무 35
차오원쉬엔 지음, 전수정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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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부모님이 소위 '내가 어렸을 때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무척 싫어했다.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추억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했지만 비교하면서 지금을 평가하고자 하는 이야기라면 처음부터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이들한테 어렸을 때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지나칠 정도로. 그리고 남편이 아이들에게 '아빠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로 이야기를 시작할라치면 조목조목 따지곤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이 책이 마치 어른이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작가가 겪었던,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의 이야기를. 그러나 작가는 마치 나의 이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작가의 말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에만 기대는 작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과거라는 지하자원을 현재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면서. 그런데 왜 나는 작가가 어린 시절의 추억에 기대어 쓴 작품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걸까.

 

  이 책은 문화혁명의 격변기에 중학생이었던 남자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담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모든 아동청소년문학은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읽히고자 하는 목적이므로. 그래서 대개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던 우리의 성장소설을 읽다가 이처럼 몇 년간의 생활을 주루륵 훑는, 특별한 사건이랄 것은 없지만 분명 인물들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책을 읽으려니 마음은 편안했으나 심심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황선미 작가의 <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이 생각난다. 상당히 자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 그동안 날카롭게 문제를 끄집어내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황선미 작가의 여타의 작품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묻어두고는 배길 수가 없나 보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더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도 혹시?

 

  린빙이 문화혁명 당시 중학생이었다면 그나마 부모님이 상당히 깨인 분이 틀림없다. 하긴 린빙의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니 공부는 해야한다고 생각했겠지. 학교를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서, 혹은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여겨서 학교에 보내지 않은 부모가 많았던 상황이 우리의 5,60년대와 비슷하다. 린빙은 학교가 멀어서 기숙사에서 생활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추억이 쌓였을 것이다. 게다가 유마디 중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것 자체로 식자의 상징이자 우러음의 대상이었으니 그들의 어깨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겠지.

 

  처음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게 된 마수이칭과 셰바이싼, 류한린과의 생활이 소소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린빙이 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이야기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현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담담히 서술할 뿐이다. 특히 마수이칭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아이다. 자신의 분노를 죄없는 할아버지에게 풀며 지내는 모습은 아슬아슬하다. 혹시 저러다 무슨 사고라도 치는 게 아닌가 해서 말이다. 우리 작가의 책이었다면 분명 사고치고 여차저차하면서 뉘우치던가 새사람이 되는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마수이창은 끝까지 인간적이다. 아니, 현실에서 마주칠 수 있는 전형적인 청소년의 모습이다. 어쩌면 이런 점이 이 책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분위기에 휩쓸려 다녔던 문화혁명 당시의 상황도 잠시 보여준다. 어찌보면 유마디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도 타도의 대상이 될 수 있을텐데 아직 생각의 깊이가 얕은 학생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당시 지식인으로 보이기만 하면 고초를 겪었다던데 유마디 중학교 상황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마 소설 속에서 만나는 이러한 사건이나 문화가 책을 읽는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만으로도 이런 책의 존재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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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여동생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1
펑슈에쥔 지음, 펑팅 그림, 유소영 옮김 / 보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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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아동문학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듯이 중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중일 3국 중 그나마 일본이 가장 앞서 있다. 사실 우리의 아동문학을 이야기할 때도 의견이 분분하다. 왜 안 그렇겠나. 1930년대의 작품속 아이들이 지금의 아이들 모습과 다른 것은 자명한 것을. 특히 우리의 경우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굴곡이 질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의 잣대로 당시의 작품을 평가할 수 없으리라는 점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민주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회가 많이 변했듯이 중국도 문화혁명을 겪으며 많이 변한 것으로 안다.

 

  여하튼 중국의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에 따라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동화를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사회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당시 중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는데, 이를테면 학생들도 일정 부분 노동에 동원되고 '간부 댁 따님'이라도 그런 노동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돈을 벌기 위해 어린이들도 돌 깨는 일을 하는 것과 묘족의 장례풍습을 볼 수 있는 것 등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네 일하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습이라고나 할까.

 

  고위 공무원인 엄마와 아빠가 묘족마을로 잠시 이사를 하는 바람에 그곳에서 지내게 된 주인공(이름이 기억 안 난다.)과 랴오벤의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묘족이라면 흔히 몽족이라고 하는 그 민족이다. 우리 학교 원어민 선생님도 몽족이던데. <총, 균, 쇠>에 의하면 어떤 이유 때문에 상당히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이라지. 처음에 읽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읽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묘족의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던 셈이다.

 

  사실 이 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일 뿐 특별히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더구나 아타오네보다 훨씬 여유있고 지식인층인 주인공의 서술 방식은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동화다. 그러나 자전적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읽는 동안 주인공 자매의 생활에 동화되기 보다는 아타오네와 동네 사람들의 생활모습에 더 눈이 갔다.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아슈 할머니나 동생을 미워하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역시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싼타오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랴오벤을 귀찮은 동생쯤으로 생각하다 아타오의 막내 동생을 보며 자신의 동생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변화 과정을 보며 가슴 뭉클해진다. 그럴 때는 대개 우리 아이들도 이런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겠지만. 여하튼 이런 책은 문학작품을 통해 다른 나라의 생활모습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닌가 싶다. 마치 <압록강은 흐른다>나 <지로 이야기>를 읽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랄까. 내가 문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그저 느낌만 이야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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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냐오의 백합계곡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2
차오원쉬엔 지음, 전수정 옮김, 이철민 그림 / 보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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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책을 무수히 만나면서 영미권이나 유럽의 작가들은 이름만 대면 작품 이름이 술술 나올 정도가 되었지만 중국의 작가는 오직 한 명만 기억난다. 바로 차오원쉬엔. 그렇다고 특별히 감동을 받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배경이 우리랑 비슷한 듯하면서도 이질적인 듯해서 상상하기 쉽기도 했지만 유럽의 동화책을 읽을 때만큼의 동경은 없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중국인들의 생활모습이나 정치 사회적 수준이 그다지 높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덩달아 아동문학 수준도 낮게 여겼던 게 사실이다. 특히 그동안 만났던 중국 작가-특히 이 작가-의 작품이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하거나 낙후된 의식수준을 드러내는 책들이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현실과의 치열한 고민 끝에 성장한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고 그저 생활모습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한 단계 발전된 중국의 아동문학을 만난 듯했다.

 

  우리와 연관되지 않은 중국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을 언제로 상정해야 할지 몰라 헷갈렸지만 읽으면서 그런 것은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의 판타지와 현실의 절묘한 조화,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면서 차츰 성장하는 모습 등이 그동안 만났던 이 작가의 작품들은 물론 다른 중국 작가의 동화와는 달랐다. 물론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처음에는 현재를 배경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옛날을 배경으로 한 것인지 몰라 상상하는데 약간 헤매기는 했다. 말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대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옛날이라고 하기에는 생활모습이 근대적이라 그때그때 연상되는 모습을 따라야했다. 하긴 그런 것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런 판타지 요소가 들어간 책에서는 더욱 더.

 

  이 책은 한 마디로 흰독수리 발에 묶여 있던, 즈옌이라는 소녀가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읽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즈옌을 구하러 가는 건냐오의 대장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꿈속에서 즈옌이 살고 있는 곳을 본 건냐오는 그것이 단지 꿈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더구나 천에 쓴 편지까지 있지 않던가. 그러나 사람들은 건냐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편지일 뿐 흰독수리도, 꿈도 건냐오의 환상이 만들어낸 일종의 몽상일 뿐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건냐오의 아버지도 처음에는 믿지 않지만 결국 아들이 떠나도록 허락한다. 백합이 많이 피어있던 꿈의 모습에 의지해 백합이 핀 협곡을 찾아 무작정 떠나는 건냐오를 두고, 사실 독자도 제정신이라고 믿어주기는 힘들다. 서쪽으로 떠나면서 겪는 모험은 또 어떻고.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기 때문에 독자로서도 혼란스럽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건냐오의 모험은 더욱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가는 곳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여지없이 나쁜 사람도 만나 곤경에 처하지만 마찬가지로 신비한 조력자의 도움으로 그곳을 벗어난다. 여기에는 약간의 옛이야기적인 요소가 들어있다. 특히 하얀 말의 경우가 그렇다. 처음에  하얀 말을 얻게 된 경위도 그렇지만 그 후로 끝까지 건냐오의 수호신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하긴 옛이야기는 모두 환상성을 갖고 있으니까. 그러나 건냐오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조력자가 도움을 준 것은 아니다. 실패를 거칠 때마다 건냐오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반성한다. 그래서 끝내 건냐오가 백합계곡을 찾아가고 그런 성취 못지않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안락한 집과 가족을 떠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비록 나중에 다시 안락한 곳으로 돌아올지라도 일단은 떠나야 하는 것이다. 건냐오는 어린이에서 청년으로 변해가는 동안 계속 모험을 했다는 점이 보통의 동화와 다르지만 그의 여정만큼은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완전한 판타지를 상상하지 못하고 현실과 비슷한 배경을 설정하거나 약간의 억지(힘들게 사막을 건넜다가 돌아와서 다시 떠날 때는 분명 같은 방향으로 갔음에도 사막이 나타나지 않아 의아했다.)로 의문이 남긴 했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중국의 동화책 중 가장 몰입해서 읽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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