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페인 유골 분실 사건 - 상식의 탄생과 수난사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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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앞서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당시는 푸대접을 받다가 훗날 대접을 받는가 보다. 페인은 <상식>을 지은 1776년에 이미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제시했으니 얼마나 진보적이었던가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아니, 그는 평가를 받기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닐 테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죽은 후 묻히는 것조차 거부당했을 때 얼마나 낙심했을까.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런 문제에 초월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고통을 끝내고 싶어 죽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하니 꼭 지켜야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시켰을 뿐이다. "어떤 그릇된 것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오래 굳어지면 겉보기에 옳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상식>의 첫 번째 문장을 '실천'했을 뿐이다.

 토머스 페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름은 들어봤을지 모르나 그것조차 가물거릴 정도로 나와 멀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삶, 올바른 삶이라고 생각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았으니까. 이 책에서는 저자가 페인의 유골을 찾기 위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와 관련된 것들을 이야기해 주는 방식이라 페인에 대해 자세히 알기는 힘들다. 오히려 페인과 관련된 수많은 역사속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했다. 위험해서 출판하지 않으려는 책들만 골라서 출판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급진적이었던 칼라일, 처음엔 무조건 페인을 비난했다가 자신이 비주류의 처지에 있고 보니 페인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했음을 깨닫고 페인의 유골을 가져와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애쓰던 코빗, 남부의 부유한 상류층에서 태어나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테지만 운명적으로 북부로 가서 노예폐지 운동에 가담한 콘웨이, 콘웨이를 그런 길로 이끈 에머슨과 소로 등 많은 인물이 나온다. 소로나 에머슨, 브론슨 올컷처럼 아는 사람도 있고 칼라일이나 콘웨이처럼 몰랐던 인물도 있다. 그러나 하나 같이 모두 만남이 매력적인 인물들이었다. 특히 콘웨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페인에 대한 책을 읽는다는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콘웨이에 푹 빠져 있었다.

 "단순한 몸짓,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마감일에 쫓겨 허둥지둥 쓴 글. 이런 것들이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고 그 말을 한 당사자는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몸짖, 그 말 한마디가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감동받은 사람이 사실은 자기를 다른 방향으로 보내 줄 무언가를 목 빼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44쪽)

  바로 콘웨이가 에머슨을 만나게 된 순간을 묘사한 글이다. 에머슨이 쓴 글을 보고 콘웨이가 지금까지 믿고 있던 신념에 의심을 품으면서 가족을 버리고 에머슨에게 찾아갔다. 과연 에머슨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위의 글에 따르면 아닐지도 모른다. 에머슨이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이라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쏟아낸 말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콘웨이는 그러한 생각으로 인해 운명이 바뀌었다. 실제로 살면서 이런 순간을 마주치기도 한다. 당시는 잘 모르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후 돌이켜 보면 이것이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콘웨이가 바로 그랬다. 그건 운명이었던 것.

 페인의 유골을 찾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지는 모르겠다. 유골을 경매에 부친다는 얘기도 생소하고 보관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것도 낯설다. 그러나 이 책은 페인의 유골이 어디에 있고 꼭 찾아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기 보다 그것을 구실로 그의 삶을 재구성해 보고자 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야기하고 있어서 흡사 영화를 보는 듯했다. 어쨌거나 토머스 페인이라는 인물과 그 주변 인물, 그리고 당시 미국과 영국 사회의 모습도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간되면 페인에 대한 책과 그가 쓴 <상식>과 <인권>에 대한 책도 읽어봐야겠다. 미국의 독립에 큰 공헌을 했지만 너무 진보적이어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페인, 그나마 지금은 그를 높게 평가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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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뇌 -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뇌졸중 체험기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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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환자가 토로하는 고통을 의사가 어떻게 알까 궁금하다. 의사가 병을 '알고'는 있더라도 '앓아'본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현인데 의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이론적으로는 알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고 있을 뿐이지 느끼는 것이 아니잖은가. 의사인 친구 오빠가 하루는 다쳐서 동생인 친구가 소독해주는데 아프다고 난리치며 하는 말이 환자가 아프다고 할 때 뭐가 아프냐고 면박을 줬는데 진짜 아프더란다. 이처럼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아무리 설명해줘도 가슴으로 느끼긴 힘들다.  

 그런데 뇌과학자가 뇌졸중을 경험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니 마치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이 저승을 이야기해 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었던 게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솔직히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기대했기에 다 읽고 나서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것일까 생각해 봤다. 아마 뇌졸중이 일어나는 원인부터 진행되는 과정과 재활하는 동안의 세세한 이야기를 기대했나 보다. 일종의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뇌졸중을 설명해 주길 바랐던 셈이다. 헌데 그보다는 작가가 뇌졸중이 시작될 때부터 병원에 가기까지를 아주 세세하게 이야기하는 반면 재활의 과정은 상당히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마치 짧은 기간동안 아주 쉽게 회복된 것으로 여겨질 정도다. 8년이란 시간 동안 회복되었다니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뇌졸중이 발병하고 뇌가 어떻게 상처를 입는지, 어떻게 작동을 멈추는지 아주 세세하게 보여준다. 처음에 증상이 나타났을 때 샤워를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얼른 전화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긴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알고 난 후 이렇게 말하는 건 쉬운 법이다. 뇌과학자조차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일이 커진 후에야 자각하니 일반인은 오죽할까. 뇌졸중이 일어나면 바로 수술하는줄 알았는데 저자의 경우 2주일 후에나 수술을 했단다. 그동안 체력을 보강하고 집에서 꾸준히 재활 치료를 했다는데 그 사이 뇌가 더 망가지는 건 아니었나 보다. 이왕이면 그런 설명도 좀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좌뇌가 손상되어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면을 상실한 대신 감성적인 우뇌가 우세해졌기에 저자는 끊임없이 우뇌적으로 설명한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원한 것은 좌뇌의 역할에서 나오는 과학적이고 명확한 설명이었는데 작가는 계속 우뇌의 역할에서 나오는 감성적인 어투로 설명을 하고 있으니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던가 보다. 

 어떤 일을 할 때, 심지어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도 머릿속에서는 혼자 중얼거리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는 이것을 '뇌의 재잘거림'이라고 표현했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지 싶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생각한다'고 하는 것 같던데 재잘거림이라는 표현이 더 그럴 듯하다. 이것은 좌뇌에서 맡는 역할인데 저자는 이것을 잃어버려서 오히려 명상에 빠질 수 있었다고 한다. 뇌졸중에 걸린 사람 중 이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특히 뇌졸중에 걸린 것을 알아차린 순간 멋지다고 생각했다니, 지금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 아닐까). 저자도 때로는 재활을 포기하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좌절하기도 했다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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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라 고양이 - 가끔은 즐겁고, 언제나 아픈, 끝없는 고행 속에서도 안녕 고양이 시리즈 2
이용한 글.사진 / 북폴리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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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시골에선 다 그렇듯이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웠다. 내 기억으로 고양이를 여러 번 키웠던 것 같은데 유독 사람을 잘 따르던 어느 고양이는 주로 방에서 함께 지냈다. 고양이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썩 좋아하지 않는데 우리는 그 고양이 덕분에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후로 고양이가 새끼를 몇 배 낳았는데 언제부턴가 밖으로 나돌더니 아예 사라졌다. 들고양이가 된 것이다. 흔히 말하듯이 고양이는 예민한 동물이다. 강아지는 혼을 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인을 따르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우리가 키웠던 고양이는 그랬다. 그래서 저한테 조금만 서운하게 대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으면 집을 나가곤 했다.  

 한동안 고양이를 키우지 않다가 몇 년 전 사촌 오빠가 키우던 고양이를 데려다 시골에 놨다. 러시안블루로 족보 있는 고양이지만 시골에서 키우다 보니 예쁘게 치장해주지 않아 거의 들고양이처럼 산다. 그렇다고 남의 집을 기웃거리는 건 아니지만 마실을 간다는 이야기로 보아 아주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이 책의 달타냥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마당고양이지만 그렇다고 집에만 갇혀 사는 건 아니요, 마실도 가고 엄마따라 마을회관에도 간단다. 


 부모님만 계실 때는 집안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데 우리만 가면 아이들이 예뻐하는 걸 알고 들어와서 나가질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애교를 떨지 않는다. 책에서 고양이들이 발라당을 한다는데 난 이 고양이가 발라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전혀 없다. 대신 이 고양이가 낳은 새끼는 발라당을 한단다. 물론 이 고양이 남편은 족보 없는 시골의 마당고양이다.  


 사료를 넉넉히 주고 개밥도 빼앗아 먹고, 때로는 마실가서 얻어먹기도 하나 본데 이렇듯 먹는 걸 밝힌다. 과자건 아이스크림이건 못 먹는 게 없다. 안 주면 입에 들어가는 것도 채갈 정도로 아주 뻔뻔하다. 어디 그 뿐인가. 주방에 못 들어가게 한다거나 먹을 걸 들고 안 주면 아주 짜증난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야옹거린다. 고양이가 신경질을 낸다는 걸 요즘에야 알았다. 


 어미 고양이가 낳은 새끼 고양이가 이만큼 컸다. 확실히 위의 고양이보다 자태는 멋지지 않지만 애교는 많다. 우리가 부르면 꼭 대답을 한다. 어미 고양이는 자기가 필요할 때 야옹거릴 뿐 절대 대답하지 않는다. 얘 이름이 여름이인데 첫 배로 네 마리를 낳아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름을 붙여줬는데 두 마리는 입양가고 두 마리만 남았다. 헌데 한 마리는 어찌나 겁이 많은지 사람에게 절대 가까이 오지 않는다. 집에서 정성을 기울여 키우는 고양이도 이럴진대 들고양이는 오죽할까. 게다가 저마다 아픔을 갖고 있을 테고 먹이도 제대로 먹지 못하니 마음의 상처가 클 것이다. 심지어 사람이 때리거나 약을 놓아서 죽게 만드니.


 위쪽의 작은 고양이가 낳은 지 얼만 안된 새끼 고양이인데 오빠들(오빠인지 언니인지 형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어쨌든)이 항상 데리고 다녔다. '다닌다'처럼 현재형으로 말하면 좋으련만 이제는 과거형으로밖에 쓸 수가 없다. 새끼 여섯 마리를 산짐승이 그랬는지 수컷 고양이가 그랬는지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몇 마리는 산짐승이 잡아갔는데 나중에는 다른 집 수컷 고양이가 그랬단다. 꼬봉이(러시안블루)도 산짐승과 싸우다가 귀를 다쳐서 아직까지 상처가 남아있는 상태다. 좀 큰 녀석들은 그래도 살아남았다. 꼬봉이가 처음 새끼를 낳았을 때는 어찌나 애지중지 하던지 눈꼴시려 못 볼 정도였는데 두 번째에는 완전 나몰라라였다. 그래서 형 누나들이 데리고 다니며 교육을 다 시켰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와도 이처럼 할 말이 많은데 주변에 있는 들고양이 모두와 지낸 저자는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았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여기에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사는 곳 주변에도 들고양이가 꽤 있다. 걔네들을 볼 때마다 밥을 어떻게 먹을까 걱정되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까맣게 잊곤 한다. 길고양이들도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니 적어도 제 명대로만이라도 살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고양이가 보고 싶다고 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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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탁치는 심리학 이야기 만리무운 시리즈 3
이남석 지음 / 종이거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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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포함해서 주변에 심리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관심을 갖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눈에 띄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심리학은 재미있으면서도 끝이 없는 학문처럼 보인다. 게다가 묘한 매력까지 느껴진다. 심리학이 한때는 이상한 학문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만 그랬나?)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지고 다양한 분야에서 필요한 학문이 되고 있다. 꼭 심리학 용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알고 보니 심리학과 연결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창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생활하는 딸도 심리학에 무척 관심이 많다. 내가 갖는 관심과는 방향이 약간 다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소통을 하기 위해서라는 점만은 같을 것이다. 딸이 책을 소개하는 소책자에서 보고 <자아 놀이 공원>을 사달라고 해서 사줬더니 재미있게 읽었단다. 솔직히 철학이나 심리학은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학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딸의 부탁을 흔쾌히, 아주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며 들어줬다. 그러면서 저자를 기억했다. 저자나 제목도 자꾸 잊어버리는 요즘에 비해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던 때였는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 저자의 이름이 뇌리에 남았다. 그래서 다른 것은 보지도 않고 저자의 이름 하나만 보고 선택한 게 바로 이 책이다.

 사람은 자기위주로 생각한다. 그래서 동일한 책을 읽어도 감정이입하는 부분이 다르고 느낌 또한 다르며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다. 이것은 모두 기존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은 하나의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해도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다. 이것이 심리학이 어려운 이유이자 매력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동일한 경험을 했더라도 누구는 복수를 하고 누구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가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일까. 절대 그렇지는 않다고 이야기한다. 복수가 합리화될 수 없는 이유를 역시 심리학 이론을 알려주며 이야기한다.

 예전에 지인에게 아이 둘이 모두 AB형이라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가 어찌나 구박을 받았는지 모른다. 알만한 사람이 그처럼 떠도는 낭설을 믿는다고 말이다. 물론 나도 그러한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지 않지만 간혹 그런 이야기에 혹하기도 한다. 헌데 돌이켜보면 주로 안 좋은 일이 일어났거나 힘들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점을 보러 가는 사람의 마음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즉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원래 비싼 가격의 옷을 아주 싸게 팔면 얼른 사는 심리, 그러면서 마치 횡재를 한 것처럼 뿌듯해하는 마음도 자신의 프레임 때문이라고 한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또 합리화하는 것을 보니, 사람은 지극히 심리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나 보다.

 마하스님과 저자와의 대화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알고 보니 개정판이란다. 처음 나왔던 제목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긴 한다. 사실 불교건 기독교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는 책은 일단 제쳐두는 성격 탓에 만약 원래의 제목으로 나왔다면 분명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덕분에 알고 있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고 모르던 것은 새롭게 아는 시간이 되었다. 역시 심리학은 재미있단 말이야. 단,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경우만. 더 나아가 심리학을 알면 행복하다는 생각에까지 나아가라는데 내 지식으로는 아직 거기까지는 무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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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주식회사 - 질병과 비만 빈곤 뒤에 숨은 식품산업의 비밀
에릭 슐로서 외 지음, 박은영 옮김, 허남혁 해설 / 따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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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눈이 많이 오고 날씨도 추운 이번 겨울. 밖에서 조금만 돌아다니다 보면 어렸을 때 추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지경이다. 단열이 되지 않는 시골집의 윗목은 바람이 들어왔다. 그래서 아침이면 걸레가 얼어있었다고 엄마는 지금도 말씀하신다. 그런데 지금은 이처럼 추운 한겨울에도 집안에서 짧은 옷을 입고 있으니 세월  참 좋아졌다고. 어디 그 뿐인가. 여름에나 먹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깻잎, 고추, 호박을 이처럼 추운 겨울에도 먹을 수 있다. 그래서 갖가지 야채를 넣고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먹는다. 예전에는 떡볶이에 넣는 야채라고는 가을에 통에 심어뒀던 파를 넣는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깻잎에 호박을 넣는다.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좋다가도 문득 의문이 든다. 이런 것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료를 써야하는 것일까. 굳이 정확한 자료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딱히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한때는 제철 음식만 먹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요즘처럼 이런 한겨울에 먹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야채 중에서는 콩나물, 시금치, 두부 정도가 아닐런지. 예전처럼 말린 나물이 흔하지도 않을 뿐더러 워낙 믿을 수 없으니 실제로 선택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매번 엄마에게 얻어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아주 안 사먹을 수는 없으니 대신 많이 사먹지는 말자고 자신과 타협했다. 비겁한 행동 같지만 현재 내 선에선 그나마 적정한 방법이 아닐런지. 

 이미 먹을 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예전같지 않다. 생협이나 한살림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도 꽤 있고 유기농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만 먹는다고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문제는 돈이다. 자본주의답게 역시 돈이 최대의 걸림돌이다. 누구든 좋은 것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식료품값에 지불해야 하는데 그게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유기농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하는 점도 문제다. 그런데 매리언 네슬은 비록 유기농식푸밍 사람들의 건강을 눈에 띄게 개선시킬만큼의 효과가 있다고 장담하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대신 유기농법이 환경 손실을 훨씬 덜 일으키는 방식이라는 점은 확실하다며 이것만으로도 유기농식품을 선택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말한다. 내가 의문을 가졌던 게 바로 그 점인데 이런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겠다. 

 나와 아이들은 육식을 좋아한다. 가끔 소나 돼지가 사육되는 장면을 보면서 둘째가 불쌍하다고 말하면 큰아이는 대뜸 그런다. 그러면서 너는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냐고. 정육점에서 사는 고기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소와 돼지를 완전히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전혀 별개의 것도 아니기에 둘째처럼 그런 모순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도 그렇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소를 내다 팔 때는 애써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마음이 아플 테니까. 영화 <식객>에서 주인공이 한식구로 여기며 키웠던 소를 도살장으로 들여보내고 소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며 주인공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니 내가 그랬다기보다 아마 소를 직접 키우셨던 아버지가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예전에는 소든 돼지든 그들의 최소한의 권리는 지켜줬는데 요즘은 하나의 상품으로밖에 취급을 안 한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곳에서 오로지 육질이 더 좋고 양이 더 많은 '고기'를 생산하도록 하는 우리 인간. 그리고 그것을 좋다고 사 먹는 나는 또 어떻고. 그렇다고 소나 돼지를 직접 키워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참 어렵다. 물론 농가에 항생제를 먹였느냐, 어떤 방식으로 키우는지 등을 물어보라고 하지만 우리 현실과는 안 맞기에 그냥 지식으로 저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폴리페이스 농장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가축을 기른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훨씬 힘들고 더 많은 땅이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그게 맞는 방식이라는 걸 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일까. 글쎄,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간혹 돼지를 야산에 풀어놓고 키우고 소를 방목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다만 혼자 그런 방식을 택하는 것보다 좀 더 조직적으로 연대한다면 훨씬 지속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엄마도 닭을 기십 마리 키우신다. 순전히 달걀을 얻기 위해서. 그런데 요즘은 추워서 밖에 나가질 않아서인지 하루에 알을 두어 개도 낳지 않는단다. 한창 나돌아다닐 때는 하루에 열다섯 개 이상씩 낳던 닭들이. 그런데 양계장의 닭들은 어떤가. 그들에게 계절은 의미가 없다. 언제나 똑같은 수의 알을 낳으니까.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 댓가는 언젠가 꼭 치른다던데 혹시 시도 때도 없이 나도는 전염병이 그 신호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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