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몬 라
빅토르 펠레빈 지음, 최건영 옮김 / 고즈윈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만한가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분명 교직을 이수했건만 무슨 과목을, 어떻게, 어떤 내용을 배웠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니 말이다. 물론 내가 그 분야에서 일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배웠던 것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현장에서 싸우고 있었겠지. 그러나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일을 했고 한동안 그 사실은 잊혀졌다. 그런데 희안하게 딱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푸투닉호'라는 단어다. 아니, 스푸투닉호의 의미도 아니고 그 뒤에 숨겨진 냉전 시대의 상황도 아닌, 단지 그 단어에 대한 기억 뿐이라니, 나도 내가 한심하다. 어느 과목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이가 연로하신(분명 정년퇴임한 교사가 아닐까 싶다.) 교수님이 낮은 소리로 강의를 하시는데 이 말만 꽤 여러 번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는 도대체 저게 뭐길래 저렇게 자꾸 강조를 하나 싶었다. 당시만 해도 책도 많이 읽지 않고 역사나 정치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 아이 키우면서 다양한 책들을 읽고 역사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뒤에 숨겨진 여러 정황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스푸투닉호의 거창한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으며 왜 그렇게 교수님이 그 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참 일찍도 이해했고 지금은 쓸모도 없지만.

 

  책을 읽자마자 아주 오래전의 그 스푸투닉이 떠올랐다. 바로 오몬 라가 그러한 우주비행사를 꿈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치르는 일련의 고생과 희생이 대개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뉴요커가 극찬한 이유가 순전히 '작품성'에만 기인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즉 오론 라 개인의 역사이기 이전에 소련이라는 나라의 비열함과 허구성을 고발하는, 그야말로 시대정신을 담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더 의미있는 갈채를 받았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원래 보여지는 그대로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은 그닥 환영받지 못하는 법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끄집어내서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욕구가 들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권력의 집요함과 허무함, 그리고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진짜로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나갔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설마 그건 사실이겠지). 마찬가지로 달이라는 곳에 꽂아놓은 성조기가 진짜 달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설마 이것도 사실이겠지). 이쪽 말을 들어보면 그런 것 같고, 저쪽 말을 들어보면 또 그 말도 맞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빅또르 뻴레빈은 소설이라는 장치를 이용해서 체제의 모순과 허구성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달 착륙 사실에 쏟아지는 그 숱한 의혹을 가지고 새로운 소설을 쓰는 누군가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든 마지막 부분의 반전은 소설에 대해 잘 모르는 나조차도 감탄사가 나오기에 충분했다.

 

  어느 사회든, 어느 조직이든 집행부만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있다. 그렇기에 정치인들이나 정부 관료들이 나와서 어떤 발표를 할 때도 과연 저들이 말 하는 것 중 얼마만큼이 진실일까 궁금한 경우가 있다. 아무도 진실을 모르는 '일'이 있을까. 예를 들면 천안함 사건 같은 경우, 누군가는 진실을 알고 있을 텐데 진짜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진실일까, 아니면 이면의 또 다른 진실이 있는 것일까.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여타의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추측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우주 비행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송국 사람들까지 알고 있을 정도라면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대개는 그처럼 알면 안되는 사람들은 '사고'가 나게 마련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려고 그토록 노력하는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메리카 트라우마 - 어느 외교 전문기자가 탐색한 한미관계 뒤편의 진실
최형두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을 보면 중국으로부터 왕이나 세자책봉을 인정받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스스로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다고 위로하지만 그걸 보며 의미상으로는 속국이었음을 느끼곤 했다. 실질적으로 정국을 따로 운영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중국의 신임을 받기를 원하는 상황을 보며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다가 당시 국제정세가 그랬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라는 상반된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데, 현대사를 돌이켜보니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은 착각(이라고 말하면 좋겠지만)이 든다. 박정희가 5.16쿠데타(이 용어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만의 기우일까.)를 일으키고 미국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던 점이나 전두환이 12.12로 정권을 잡은 후 마찬가지로 미국의 인정을 받으려 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국민들이 과연 그들은 미국의 인정을 받았는지를 끊임없이 캐물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미국이 둘을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서 인정해줬더라면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일까. 거기에 더해 5.18 민주화 항쟁 당시에도 미국의 승인이 있었는지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것을 보며, 만약 미국의 승인이 있었다면 그 후에 어떻게 대처할지도 의문이다. 물론 그런 의심의 기저에는 당시 군을 움직이는 주체가 미국이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인정받는 문제는 그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조선시대의 상황을 보며 한심하게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지금도 형태만 약간 달리할 뿐 비슷한 양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하긴 어디 그 문제만 그런가만은, 이럴 때마다 역사는 결국 되풀이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불과 60년 전의 문제가 아직까지,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생각하면 현재 우리의 판단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새삼 깨닫는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힘을 조금이라도 보태서 해방이 되었다면, 당시 분단되지 않았다면, 아니 전쟁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한국전쟁을 미국이 방조 내지는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었었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금의 행동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을 자극한 것이 아니냐 내지는 북의 조짐을 알고도 모른 척 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견이 있는데, 저자는 여러 근거를 들며 그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한쪽의 말만 듣고 진실을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저자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에게 그다지 중요한 나라도 아니었고 많이 신경쓸 여력도 없었다는 말은, 상당부분 이해가 간다. 당시의 국제상황을 보건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때만 하더라도 미국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에 치우쳐 있기 전이었을 테니까.

 

  미국을 비난하고 미워하면서도 미국에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도 그것을 알기에 이 기회에 미국을 제대로 알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정확히 하자는 의도에서 해방을 전후해서부터 지금까지의 미국을 파헤쳤을 것이다. 그런데 읽으면서 뒷부분으로 갈수록 약간 불편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미국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한국의 입장은 간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미국이 북한과 휴전협정을 맺은 당사국이라고는 하지만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다. 아무리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는 자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미국은 제3자 아닐까. 즉 우리가 북한에 대해 취하는 입장과 미국이 취하는 입장이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헌데 저자는 우리가 취한 행동, 특히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햇볕정책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데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마음이 아무렴 우리만 할까. 물론 그렇다고 북한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북한이 우리의 보수 정권을 엄청 규탄하면서도 돕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만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이 북한과 타협해야 하는 상황이 미국보다 더 많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참여정부시절 북한을 두고 미국과 마찰을 빚을 때 미국의 유해발굴을 위해 돈을 주듯 우리도 이산가족의 아픔을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고 접근했어야 한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여하튼 앞부분은 미국의 의도에 집중하며 읽었다면 뒷부분은 거기에 덧붙여 말이 통하지 않는 북한과의 관계를 어찌하면 좋을지(그래서 갑갑하긴 했지만)에 집중하며 읽었다. 적어도 북한과의 문제에 있어서 통미보다는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의 미술가 - Art in Nature
김해심.존 K. 그란데 지음 / 보림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릇 예술작품이란 특정한 공간에 설치되거나 전시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그야말로 전형적인 전시, 조각품만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앗'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는 책을 만났다. 이런 것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겠구나 내지는 이것도 예술작품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만한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설치미술을 보고 재미있다고 여기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한된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이었지 자연에 속하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어느 건물이나 공원에 설치된 작품은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언덕에, 산속에 설치한 작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음, 가만 생각해 보니 간혹 어떤 사람이 혼자서 산속에 돌탑을 쌓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듯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처럼 전문적인 미술가는 아니었기에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나 보다.

 

  왜 우리는, 아니 나는 공원이나 야외 미술관, 혹은 건물 주변에 있는 것들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연 속에 있는 건 작품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걸까. 솔직히 브루니가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배를 만들었다는 '승선'이라는 작품은 설명을 보니까 작품인 줄 알지 사전 정보없이 그곳을 간다면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니와 바바리의 공동작품인 '개울 길'을 보면 무척 부럽다. 그처럼 개울을 정비하는데도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그들의 문화가. 우리 같으면 예술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포클레인과 레미콘을 불렀을 텐데.

 

  자연에 있는 재료를 그대로 사용하고 최대한 자연을 해치지 않고 순응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놀라웠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이다. 산에 어떤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뭔가가 있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런 표식도 없고 설명하는 누군가도 없다면 말이다. 사진으로 봐도 글쓴이가 설명하지 않으면 도통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거나 어떤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는 작품도 많았다. 역시 나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구나. 암튼 공원에 작품을 설치해도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작품이라고 생각한 것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지구미술가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혼 초에 남편과 자주 싸웠던 이유 중 하나가 시간이었다. 타인과 한 약속시간은 철저히 지키지만 나 혼자 혹은 가족끼리 어디를 가기로 한 경우에는 늦출 수 있는 최대치까지 늦추곤 했다. 굳이 일찍 나가야 할 필요가 없다거나 꼭 시간을 지켜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에는 느긋하게 준비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여행가는 날 싸우면서 출발한 경우도 꽤 많았다. 물론 남편도 나와 똑같은 성격이었다면 싸울 일이 없었겠지만(대신 시간낭비가 심했겠지. 서로 미루다 엄청 늦게 출발했을 테니까.) 남편은 정반대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사사건건 싸웠다. 나중에서야 내 성격 자체가 그런 유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규범에 얽매이는 것 싫어하고 계획같은 거 못 세우는 형 말이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학교 다니면서는 줄곧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내 성격에 그런 면이 있으리라고는 나조차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성격유형검사를 여럿이 함께 했는데 나와 비슷한 성향이 나온 사람들도 학창시절에는 대부분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어쩜 그리 모범생이었던 사람들만 있는지. 하도 오래전이라 어렴풋한 향수로만 기억나서인지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 보면(엄마와 이야기하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말썽부린 일도 없고 부모님 속 썩인 일도 없다. 내 성격유형상 틀에 박힌 걸 무지하게 싫어하는데도 당시를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때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도 그런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한번 일탈하고 싶어서 자기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욕망을 드러내고자 애쓴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란다. 띠지에 있는 글귀와는 반대로 저자는 여전히 모범적인 남편이요 가장이며 아버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거기서 벗어나 보라고 권유한다. 본인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그냥 살겠다며. 저자는 인터넷 상에서 상당히 많이 회자되는 인물인가 본데 그의 책은 처음 읽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인생 어쩌고 하는 얘기가 귀에 안 들어온다. 모두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도 들고 이미 나도 인생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충고가 잘 안 들어온다. 솔직히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도 그냥 한번 가볍게 읽고 넘길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니, 나에게는 그렇지만 오히려 저자에게는 이렇게 용기를 내서 가족과 자기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글을 쓰면서 내면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었을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용기를 못 내니까 아직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많이 감추며 여전히 불편하게 살고 있는가 보다. 원래 이런 책을 읽으면 저자의 생각을 토대로 내 삶을 반추해 봐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아마 끝까지, 그리고 내면까지 모범생이고 특별한 어려움 없이 탄탄한 길을 걸어온 저자의 삶에 대한 삐딱한 질투 때문일 것이다. 선을 넘지 못하면 영역이라도 넓히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조차 안전이 담보되는 영역 내로 한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욕구란 끝이 없다. 오늘 간절히 바라던 것이 내일 충족되면 모레는 또 다시 새로운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다. 만약 그러한 욕구가 없다면 오히려 삶이 무미건조하고 의욕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솔직히 순수하게 나만을 위한 욕구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가족이나 아이들을 위한 바람이지 순전히 나에게만 해당되는 바람은 아니다. 이런, 아이들이 독립 못한 게 아니라 내가 독립 못 한 게 되어 버렸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을 어떤 욕망에 대한 면죄부를 얻거나 공감을 얻을 요량으로 선택했다면 오산이다. 저자는 여전히 안전하고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그곳을 넘을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저자가 그 울타리를 넘길 바라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주미힌 2012-05-30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 줄이 인상적입니다. ^^

봄햇살 2012-06-04 13:54   좋아요 1 | URL
ㅎㅎ 라주미힌님도 공감하시죠?
 
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 양철북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연히 일하게 된 학교가 시골이다. 그렇다고 논과 밭이 많은 시골이 아니라 도시에서 벗어난 변두리를 의미하는 시골이다. 우리 아이가 다니던 학교도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지만 이 학교는 거기보다 학생 수가 적고 분교도 있다. 분교도 두 학년을 한 선생님이 맡는다던데 교사가 아닌 나로서는 도대체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여하튼 최고 많은 반의 학생 수가 25명이고 대개는 15명 내외인 학교, 분교가 있으며 부모의 욕심과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어 공부에 찌들지는 않지만 그만큼 방치될 가능성도 높은 곳이 바로 여기다. 그러니까 탁동철 선생님이 다니는, 혹은 다녔던 학교와 상황이 비슷하다는 얘기다. 다만 탁샘은 그 아이들을 마냥 예쁘게 봐주는 천생 선생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에 안타까운 아이들도 있고 한심한 아이들도 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고나 할까.

 

  지역이 지역이다 보니 한부모 가정이 많고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과는 별개로(아니 어쩌면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가정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게 더 안타깝다. 아버지가 아프거나 술 때문에 늦잠 자는 날이면 자동적으로 지각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아이가 아침을 먹고 가는지 제 시간에 가는지 전혀 신경쓰지 않아서 아이 혼자 일어나서 시간 되는대로 학교에 오는 경우도 있다. 뭐 나도 내 아이의 학교 행사나 일정을 꼼꼼히 챙기지 못하기 때문에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가는지 숙제는 해 가는지 잘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관심은 있다. 그러나 이곳은 관심 갖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내가 이곳에서 본 아이들을 기준으로 보자면 탁샘이 가르치는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곳 아이들을 약간은 걱정스럽고 약간은 한심하게 바라보게 된다. 4학년인데도 아직 구구단을 잘 못 외우고 5,6학년인데도 기본적인 영어 단어조차 모르니 어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대신 나는 그 아이들의 단편적인 모습-도서관에 올 때만 보니까-만 보기 때문에 평소 친구들과 놀거나 공부하는 모습은 모르니 내 생각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비록 영어 단어를 잘 몰라도 다른 친구를 배려하거나 즐겁게 생활하는 모습을 본다면 탁샘처럼 아이들이 걱정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엄마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조건 허락한다며, 거의 방치 수준이라고 말하는 아이가 걱정스러운 건 여전하다. 분명 그 아이는 엄마가 자기에게 관심 갖기를 바라는 것 같았으니까. 오히려 엄마한테 혼나고 오면 아이들에게 자랑할 것 같았으니까.

 

  탁샘의 글을 읽으며 처음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내가 굳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일을 아이들 입장에서 보려고 애쓰고, 보통의 선생님들이 갖는 사고방식과는 달라서 그 점은 좋았지만 소소한 일상까지 알고 싶은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냥 이곳 아이들은 순박하구나 내지는 이곳도 역시 요즘 아이들이 살고 있는 똑같은 곳이구나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매일 돈을 가지고 와서 학교 끝나면 군것질을 한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어디나 비슷함을 느꼈다. 우리 아이 친구들도 그런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으니까. 그러나 탁샘에 대한 생각이 바뀐 순간은 마지막의 '곁에서 본 탁동철'이었다. 아,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래서 사람들이 그의 소소한 일상이지만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어했구나 알 수 있었다, 아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진심이 묻어나는 이야기이며 고뇌가 들어있는 글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렇게 글로, 책으로 내지 않더라도 이런 선생님이 많다면 우리 아이들은 행복할 텐데. 아직은 많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