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경제학 이타적 경제학
데이비드 보일 & 앤드류 심스 지음, 조군현 옮김 / 사군자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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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DP가 2만 달러를 넘어설 때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글쎄, 개인이 체감하기에 달라진 것도 별로 없는데 무엇이 발전했고 풍족해졌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과연 몇 년 전보다 지금이 발전했을까. GDP가 올라갔다고 해도,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내가 느끼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 어찌된 것일까. 소득 상승율이 물가 상승율을 못 따라가니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니 참 답답한 노릇이다. 물론 그 와중에 누군가의 경제 사정은 훨씬 좋아졌으니 그런 통계가 나오는 것일 게다. 또 그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 바로 요즘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 책의 초반부터 GDP의 허구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는데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 요즘은 행복지수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던데 이제는 단순히 재화에 초점을 맞춘 숫자 놀음보다는 가치에 초점을 두는 측정치가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뭐, 측정만 하고 끝나면 GDP에 집착할 때와 별다른 차이가 없겠지만, 적어도 후자의 것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조금이나마 어떤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금융자본주의가 얼마나 허약하고 말도 안되는 체제였는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거기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듯하다. 그쪽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 수는 없지만 전통경제학자 혹은 주류경제학자들이 여전히 경제정책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며(하긴 그러니까 주류경제학자들이지) 그들이 내놓는 정책들이 금융 위기가 닥치기 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특히 웬만한 공공재에 속하는 것들조차 위탁경영이라는 이름으로 민영화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말이 안 나온다. 그들이 기준으로 삼는 건 오직 하나, 경제성 뿐이다. 요즘은 어린이나 청소년들도 모든 가치의 기준을 돈으로 잡던데, 어른들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아니, 어른들이 그러니까 어린이들이 배우는 것인가. 만약 진정으로 경제성을 따져서 민영화를 하려고 한다면 그나마 봐 줄 수 있다. 문제는 일부 사람들이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민영화를 추진한다는 점이다. 통으로 추진하면 거센 저항에 부딪치니까 부분부분 쪼개서 추진하는 살라미 전술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이런 건 더 이상 얘기해 봤자 열만 받으니 책 이야기로 돌아와야겠다.

 

  저자는 전통경제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새로운 경제학을 제시한다. 자국의 예를 들어가며 이야기를 하는데 영국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는다면 그게 영국의 이야기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우리의 현실과 똑같다. 이미 자본주의의 부작용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흐름은 미약하다. 언론이나 정치인 등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한 자본주의에서 이득을 보기 때문이 아닐런지. 이런 때일수록 그들의 프레임이 아닌 나만의 프레임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행인 것은 이 책에서 대안으로 제시하는 지역화폐나 대안화폐를 만드는 경우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다양한 대안들을 제시하는데 모두가 수긍할 만한 것들이다. 다만, 보조금이 지급하며 보호하는 농업에 대해 보조금을 없애고 전면 개방하자고 하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나라라면 그렇게 해도 별다른 타격이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타격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무역에 대한 파트는 국가간에 얽히고 설킨 문제는 무시한 채 너무 단순화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현재의 경제학을 맹신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은 알겠는데, 대안이 없으니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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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도서관에 끌리다 선생님들의 이유 있는 도서관 여행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 엮음 / 우리교육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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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 간 사자>라는 그림책에 보면 사자가 도서관에 들어와서 아이들과 함께 뒹굴거리다가 사람들을 도와주고 밖으로 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도서관에 간'으로 검색을 하면 다양한 책이 나온다. 공주님도 있고 암탉도 있으며 박쥐에 여우까지 있다. 그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바로 사자가 나오는 책이다. 이 책에서 마지막에 사자가 어디로 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책을 읽으며 많고 많은 동물 중 왜 하필 사자였을까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흔히 보기도 힘든 사자를 왜?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 의문이 풀렸다. 비록 내 추측이긴 하지만(보스턴공공도서관에도 사자상이 있으나 그건 내부에 있으니 이렇게 짐작해본다). 미국의 뉴욕공공도서관 앞에는 커다란 사자 상이 두 개 있는데 그것을 모티브로 삼은 게 아닌가 하는 추측 말이다. 이 사자상은 야구경기가 있으면 커다란 야구 모자를 씌워 놓고 공사중일 때는 헬맷을 씌우는 등 일종의 홍보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석상 보호를 위해 그만두었다고 한다. <미래를 만드는 도서관>을 보니 그렇게 사자 석상을 이용하기까지 사서의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아이디어가 쉽게 나온 것이 아니라 도서관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사서들이 고민했다는 얘기다.

 

  아직도 우리는 도서관이 턱없이 부족하고 시설도 미흡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도서관을 많이 다녀보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의 도서관은 더더욱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주변에 있는 도서관을 보더라도 외관은 그럴 듯하나 내실은 썩 괜찮아 보이지 않는 곳이 많다. 게다가 아직까지 도서관에 가는 이유가 책을 빌리거나 공부하기 위해서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나마도 아이의 독서에 관심있는 어른이 자녀를 데리고 가는 곳이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가는 곳은 아닌 듯하다. 도서관에서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양한 행사를 하면 스스로 찾아가지 않을까. 보스턴공공도서관에서 청소년들을 위한 공간을 보고 든 생각이다. 물론 실상을 따지고 보면 그들도 도서관을 이용하는 청소년들이 전체 청소년에 비해 극히 일부일 테지만 그런 공간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부럽다.

 

  수지에 있는 느티나무도서관은 지자체에 기부하려고 했으나 받질 않아서 법인을 설립해 꾸려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엔 어떻게 그런 굴러들어오는 떡을 걷어찰 수가 있을까 의아했는데, 카네기가 기부하면서 도서관 건물을 지어주되 운영은 지자체가 알아서 하는 조건을 붙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이해가 갔다. 그만큼 도서관은 짓는 것보다 운영에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얘기니까. 잠깐 딴 얘기지만 우리나라는 왜 대학에만 기부하는지 모르겠다. 카네기처럼 도서관을 짓도록 기부하는 사람이 없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도서관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이처럼 작은 차이가 바로 선진국을 가르는 척도가 아닐런지.

 

  챈틀리도서관 입구에 있다는 책 읽는 소년의 동상이 참 인상적이다. 어린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기에 거기에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 같으면 경건한 자세로 앉아서 책 보는 동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아이들에게 존대말을 가르쳐야 한다며 고유한 책 제목을 바꿔서 싣는 현실이니 말이다. 이런 하나하나가 부럽다(한편으로는 그 또한 우리의 문화이므로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혼란스럽다). 그런데, 만약 우리나라에 있는 괜찮은 도서관들을 이렇게 책으로 꾸며놓으면 또 그럴듯하게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미국과 캐나다의 공공도서관 시설을 보며 외관도 멋지지만 내실있게 꾸려가며 역사와 전통이 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의 공공도서관 역사가 짧기도 하거니와 인식이 변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차차 나아지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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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유럽사 - 유럽을 만든 200년의 이야기
데이비드 메이슨 지음, 김승완 옮김 / 사월의책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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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다 보면 조금만 방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을 간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례로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이 불과 60여 년 밖에 되지 않았으며 그 전에는 나라가 계속 생기고 사라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왜? 국사라는 과목에서 배웠고 여기저기서 듣거나 읽어서 알고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정작 다른 나라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나라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의 모습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전의 모습에는 관심갖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도 당연히 그러한 과정을 거쳤을 텐데 말이다. 우리나라는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에 더해 유일한 육로라고 할 수 있는 방향에 외교가 단절된 나라가 자리잡고 있기에 땅을 밟고 다른 나라로 여행하는 일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에서 다른 나라로 자유롭게 여행하고 쉽게 국경을 넘는 사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의 방증이 아닐런지.

 

  유럽, 언젠가는 꼭 여행하고 싶은 곳 1순위.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럽의 화려한 문화와 역사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이유가 가장 크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문화가 서구인(서양, 동양이라는 말조차도 그들의 시각으로 붙여진 말이지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음악이나 미술, 철학 등 대개의 분야에서 서양의 문화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동양의 철학과 문화도 제대로 연구하면 서양 못지 않을 것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일종의 반감이 들지만 뭐 어쩌겠나.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제대로 아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을.

 

  유럽의 역사는 세계사 시간에 잠깐 배운 것이 전부이고 지금까지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간혹 유럽의 책들을 보면 복잡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헷갈려서 알아두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선뜻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고대 역사나 신화에서 잠깐씩 얻어 들은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유럽의 역사에는 문외한이었다가 현대사를 접하면서 조금씩 알게 된 것이 지금까지 유럽에 대한 내 지식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 지식의 폭을 이제 조금 넓히게 되었다. 200년을 개략적으로 훑었기 때문에 유럽사에 대한 지식이 상당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조금 유럽의 상호관계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말로는 처음 읽는 유럽사라고 하지만 사실 유럽의 역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무지하게 헷갈리겠다.

 

  중학교 때 사회 선생님이 각 대륙별로 나라와 수도를 외우도록 시켰다. 아주 지독하게.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나중에 그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1990년을 지나면서 그 전에는 없었던 나라들이 갑자기 많이 생기고 있던 나라도 쪼개져서 그쪽은 지금도 헷갈린다. 그곳이 바로 동유럽이다. 동독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나라들이 독립하며 생긴 나라들. 1989년과 1991년까지의 유럽의 변혁을 굉장히 의미있어 하면서도 정작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냥 새로운 나라들이 생겼다는 정도라고나 할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떠했는지, 어떤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 보인다. 여전히 그곳과 아무 관계도 없지만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나 할까. 만약 지금 그곳에서 인종 문제가 발생하거나 내부의 권력구도가 바뀐다면 왜 그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듯하다. 또한 독일은 동독과 서독이 나뉘기 한참 전부터 그냥 독일이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이제는 하지 않게 되었다. 찌는 듯한 여름, 무기력하게 보낼 뻔한 날들이 이 책으로 인해 의미있는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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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멜빈 버지스 지음, 정해영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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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부모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만약 아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뒷바라지 해주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자괴감을 느낄까 싶다. 어느 한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능력되는 한, 아니 능력이 조금 안 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뒷바라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렇다면 특별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원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해줘야겠지. 그게 부모의 역할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럼으로써 약간의 희생을 치러야 하고 노후를 담보로 해야겠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빌리의 아빠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큰아이가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강력히 요구하는 바람에 살짝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때에 이 책을 보게 되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주변에서 이 영화를 추천하기에 아이들과 함께 봤었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왔다기에 더욱 뿌듯한 마음으로 봤는데 마지막 장면(거의 마지막인지 완전한 마지막인지는 모르겠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본격적으로 발레를 배우기 위해 발레학교로 떠나는, 빌리와 아버지가 가방을 들고 허름한 동네 한가운데 난 길을 걸어가는 장면이었지 아마. 앞으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묻어나는 빌리의 표정, 아들이 어려운 발레 학교에 입학해서 기쁜 마음과 함께 앞으로 뒷바라지를 어떻게 할지 걱정이 교차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떠오른다. 앞뒤로 이어진 길 위를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 말이다.

 

  어느 나라나 비슷한 과정을 겪나 보다. 우리나라도 한때는 호황을 누리던 탄광산업이 새로운 산업의 발전에 밀려 탄광이 폐쇄되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떠났고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영국에서도 탄광을 폐쇄하는 절차에 들어가자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탄광일을 하는 빌리의 형과 아빠가 파업에 적극 동참하면서 살림은 점점 궁핍해진다. 발레 선생님인 중산층을 비꼬는 그들의 모습에서 계층간 위화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속으로는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파업에 참여하다가 사측의 회유에 넘어간 사람들을 맹비난하던 빌리의 아빠가 아들의 발레 오디션 참가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버리는 모습을 보며 과연 빌리의 아빠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마침 노사가 타협을 해서 빌리의 아빠는 명분도 잃지 않고 일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배신자라고 비난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부모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빌리의 형도 말로는 발레를 하겠다는 동생을 못마땅해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가족이니까.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훔치던 장면이 떠올라 책을 읽으면서도 역시 그 장면에서 눈물이 핑돌았다. 어쩌면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부딪치며 힘겹게 적응해야 할 빌리를 보며 그보다 더 험난한 길을 가고자 하는 딸이 오버랩되어 감정이입이 됐는지도 모른다. 버거운 현실을 헤쳐나가기도 힘든데 자식을 위해 어쩌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빌리의 아빠에게서는 우리 부부가 오버랩되었다. 발레 오디션을 보러 가서 인터뷰 할 때 심사위원의 질문이 꼭 내게 하는 질문 같았다. "빌리를 전적으로 뒷바라지 하시겠습니까?" 무엇이든 일단 시작하면 전적으로 뒷바라지 해야 하는 것, 그게 우리 부모의 역할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작이 있는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과 반대로 영화를 소설화하는 것은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감동적인 영화로 인정받고 성공한 영화라면 더욱 더.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도 소설에 빠져 읽었다기 보다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읽었다. 그래서 이게 잘 되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책을 읽는다면 어떨까. 잘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는 게 더 감동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책을 읽었더라도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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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속의 문맹자들 - 한국 공교육의 불편한 진실
엄훈 지음 / 우리교육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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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남매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아빠 혼자 아이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가장 걱정되는 게 '먹는' 문제일텐데 다행히 학교에서 아침을 주고 저녁까지 준다. 물론 큰 아이는 고학년이라 종일돌봄에서 제외되지만 학교측의 배려로 돌봄교실에서 아침을 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 셋째가 이제 일학년인데 처음에 봤을 때 다들 놀란다. 키가 너무 작아서. 아무래도 먹는 게 부실하다 보니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흔히 아빠 혼자 키우는 집 아이를 보면 가장 먼저 걱정하는 부분이 먹는 것일 테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어른과의 상호작용이 부족해서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글을 읽을 줄 모를 뿐더러 어렸을 때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연계학습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엄마나 아빠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숫자를 세는 모습, 솔직히 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누구다 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 아이들을 보면서 그게 아주 중요한 '공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이와의 상화작용들이 실은 굉장히 의미있는 행동이었으며 차후에 영향을 많이 주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정작 내 아이들은 다 컸을 때 알았다. 물론 나는 무의식중에 그런 행동을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루는 1학년이 셋째 아이가 책을 빌리려고 하는데 이미 상당 기간 연체가 되어 빌릴 수가 없다. 글도 많지 않고 내용도 재미있어서 그 아이에게 딱 맞는 그림책이건만 정작 그 아이는 필요할 때 빌릴 수가 없다. 그동안 틈만 나면 책 갖고 오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책을 어디에 뒀는지 모른단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책을 빌릴 방법은 없어 보인다. 원래 처음에 글을 배울 때 흥미있어 하는 그림책을 자꾸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거기에 있는 글자들이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내가 괜히 안타까웠다. 도저히 안 되겠기에 며칠 후에 그 아이에게 빌리고 싶어했던-사토 와키코의 <집보기>였다.-책을 선물했다. 집에서 하루에 한 번씩 꼭 읽으라는 이야기와 함께. 다음날 도서관에 오더니 다짜고짜 어제 책 읽었단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내가 준 책을 읽었다는 얘기였다. 일단 칭찬해 주고 매일 읽으라고 다시 한번 얘기한 다음 첫째에게도 동생 책 읽는 것 좀 도와주라고 일렀다.(하지만 큰아이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눈치다.) 방학 하기 얼마 전에 위의 그 아이가 오더니 책을 읽겠단다. 그러마고 말하고 열심히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내게 오더니 언제 읽을 거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그림책을 읽자는 얘기였다. 책을 대충 정리하고 함께 앉아서 읽는데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헌데 책에 어려운 글자들이 조금 나오니까 금방 싫증을 내는 눈치였다. 그래서 서가를 돌아다니며 아이가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들어간 책 제목을 읽었다. 조금 있으니 담당 선생님이 오셔서 공부하러 가기에 여쭤봤더니 부쩍 글자에 관심이 많아졌으며 꽤 늘었다고 한다. 그럴 때 집에서 조금만 신경 써 주면 한글 익히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참 안타까웠다. 게다가 방학이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 아닌가.

 

  세 아이는 모두 방과 후에 공부 지도를 받는다. 둘째 아이도 2학년까지 한글이 안 돼서 담당 선생님을 참 애먹였었다. 그런데 셋째 마저 한글이 안 되고 첫째는 한글은 되지만 학습 의욕이 없어서 소수 정예로 지도하는 공부방에 참여하는 실정이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양육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솔직히 학교에서 지도하는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정과 연계가 되지 않으니까 효과가 너무 미미하다. 1학년 아이의 경우 조금만 집에서 봐주면, 하루에 한 권이라도 책을 읽어주면 또래 아이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 시작이니 격차를 줄이는 시간이 훨씬 줄어들 것 아닌가. 현재 1학년 아이를 그냥 방치할 경우 첫째의 전철을 밟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다행히 여기 학교에서는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든 구제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이든 따로 선생님을 붙여서든, 노력을 하고 있다.

 

  다른 모든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먼저 읽은 이유는 이처럼 많은 부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6학년이 되어도 학습의욕이 없어서 문제를 읽지도 않고 답을 체크해서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하는 아이, 학습 수준이 3학년에 머물러 있어서 넓이의 단위를 처음 보았다는 아이, 그러나 정작 부모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환경에 처한 아이를 보며 안타까웠다. 그 아이는 책은 곧잘 읽는단다. 그런데 국어 문제를 풀지 못한다. 그야말로 해독은 되지만 독해가 되지 않는 전형적인 경우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중학교 가서 어떨까 걱정이다. 교실에 앉아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혼자 있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런지. 저자가 만난 창우 같은 아이가 되지는 않을런지.

 

  그림책에 빠져 살면서 그림책의 위력을 실감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그림책을 활용해서 읽기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교정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여건만 된다면 처음에 이야기한 1학년짜리 아이에게 저자가 한 것처럼 적용해 보고 싶었던 차였다. 물론 마음만 그렇지 현실은 아니지만. 아니, 언젠가는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방식으로 아이들과 교류하며 도움을 주고 싶다.

 

  그림책 작가 중에 페트리샤 폴라코라는 작가가 있다.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보면서 내용 자체에도 감동을 받았지만(그래서 읽을 때마다, 읽어 줄 때마다 울컥한다.) 그 나라의 시스템에 감탄을 한다. 주인공 트리샤가 5학년이 되어도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안 선생님이 방과 후에 따로 글을 가르치고(물론 학습의 형태가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담의 형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서 선생님을 따로 붙여서 읽기 지도를 하는 걸 보며 제대로 된 시스템이 가동되는구나 생각했었다. 우리도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저자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보고 함께 해결해 나가려는 모습,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닌가 싶다. 저자가 직접 학교 현장에서 학생과 교사들을 보고 때론 겪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하나같이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정말이지 학교 현장을 가까이에서 보니 선생님들이 공문 처리하느라 보내는 시간이 상당히 많다. 나도 어떤 때는 똑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두세 군데에서 보내라고 해서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비효율적인 업무 시스템 자체도 문제다. 그러나 시스템이 변하기 위해서는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이 시작점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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