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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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유명한 책이기에 진작 사 놓고 읽으려고 했으나 내용이 너무 어려워 쌓아 놓기만 했던 책인데 이번 여름에 다시 시도해보니, 읽을 만하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마도 그동안 과학 분야 책을 읽었던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즉 독서력이 좀 좋아졌다고나 할까.

 

책에 대한 설명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로 워낙 유명하고 많이 읽히고 리뷰도 많은 책이지만, 또한 이 분야의 리뷰는 되도록 쓰지 않지만(대개는 책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이번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대개는 책을 다 읽으면 바로 다른 책을 읽는데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다. 이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뭔가를 끄적거려야 할 것 같은 중압감에 결국 간략한 느낌이라도 적어야겠다.

 

이 책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을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기계로 보았다는 점인데, 맣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처음에는 그 정의에 살짝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갔다. 생물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손을 많이 퍼트리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저자의 의견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자손이라는 것이 결국 유전자의 집합체이므로. 극단적인 표현으로 생존 기계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이지 의미면에서는 동일하다고 본다. 3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한 여학생이 이 책을 읽고 인생이 허무하고 목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며 교사가 항의 편지를 보냈다는데 이 또한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책을 덮을 때쯤에는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갔다. 다만 나는 '허무주의적 염세관'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자연의 신비에, 그리고 결국은 유전자의 신기함에 놀랐을 뿐이다.

 

진화론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진화했을까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처음 생명체가 생겨날 때는 하나의 원소에서 시작했는데 어떻게 전혀 다른 개체들이 생겨났는지, 또 언젠가는 하나의 개체가 다른 개체로 수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조금은 해결되었다. 원시 수프(이에 대한 설명이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데 <코스모스>를 전에 읽었기 때문에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만약 <코스모스>를 읽지 않았다면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어깃장을 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에서 생명체가 태어나고 그러한 것들이 서서히 진화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위의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는 해결이 안 된 상태였으나 이제 이해가 간다.

 

우선 진화란 유전적인 변화, 즉 돌연변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를 하면서 개체를 만들고 끊임없이 이어져내려오는데 돌연변이가 없다면 언제나 같은 모습일 게다. 만약 돌연변이가 안 좋은 상태로 되었다면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 긍정적인 돌연변이가 결국 개체를 진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병목형' 생활사에 대해 병목말과 가지말을 예로 들며 자세히 설명하는데 명쾌하다. '병목'이란 개체가 단일 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세포분열을 한 후 완성된 개체로 발전하고 최종적으로 수정란이라는 단일 세포를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병목형 생활사에서는 전혀 새로운 제도판으로 돌아가서 어떠한 돌연변이로 인하여 진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개체가 다른 개체로 수렴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인다. 어차피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므로. 기껏 변해봐야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원시 수프에서 하나의 원소로 시작했는데 어떻게 지금처럼 수많은 종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가 의문으로 남는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13장의 '숙주와 기생자'에서 설명하고 있다. 기생자 유전자와 숙주 유전자가 후손을 남기기 위한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같이 일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두 개의 몸이 하나의 몸이 되도록 진화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애초에는 두 운반자가 존재했다는 것조차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즉 '우리 같은 개체는 이러한 유전자들 여럿이 합쳐진 궁극적인 통합체(412쪽)'라고 설명하는데 그렇게 되면 위에서 제기한 첫 번째 의문이 해소된다. 물론 <코스모스>에서는 조금 다르게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의 방대한 내용을 내 짧은 지식으로 정리할 수 없으므로 인상적이었던 부분만 적어보았다. 이 밖에도 죄수의 딜레마가 인간의 생활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생활에도 적용된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으며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조금 씁쓸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다는 여학생의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하다시피 어차피 유전자는 스스로 목적을 가지고 행동할 정도로 영악한 것이 아니라 미리 프로그램된 대로 행동할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냥 자기가 가던 길을 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읽었던 이 분야의 책들이 실은 이 책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원래 과학이라는 학문이 선과 후가 명확한 경우가 꽤 있다고 들었다. 따라서 저자의 의견을 기반으로 이후 더 많은 연구가 활발했을 테고 그에 대한 책을 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한 책을,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던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름은 뿌듯하게 보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세포는 똑같은 유전자를 품고 있다. 다만 다른 종류의 특수화된 세포마다 다른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질 뿐이다. -417-

만일 흡충의 유전자가 달팽이의 난자나 정자 속에 들어가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고 하면 두 개의 몸은 하나의 몸이 되도록 진화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애초에는 두 운반자가 존재했다는 것조차 알아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 같은 `단일` 개체는 이러한 유전자들 여럿이 합쳐진 궁극적인 통합체다.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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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가우디다 - 스페인의 뜨거운 영혼, 가우디와 함께 떠나는 건축 여행
김희곤 지음 / 오브제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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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에 터키를 다녀오고 난 후 다음 여행 장소로 점찍은 곳이 스페인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텔레비전 프로그램 때문이냐고 묻는데 전혀 아니다. 우리집은 딱 네 개의 채널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지도 몰랐다. 하긴 터키를 갈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더랬다. 난 그냥 순수하게 터키를 다녀왔을 뿐이고 다음은 스페인을 가고 싶을 뿐이다.

 

  스페인을 간다면 당연히 가우디의 건축물을 보고 싶을 테고 보고 올 것이다. 스페인 여행에서 가우디를 빼놓을 수 없을 테니까. 가우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아이들 책을 통해서다. 간단하게 설명된 책이었지만 어찌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지 그 후로 절대 잊지 못하는 이름이 되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연물을 본따 건물을 짓고 곡선을 이용해 지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보여주기 위한 건물이 아닌 사람이 살기 위한 집을 지을 때조차 곡선을 이용했다니 얼마나 기발한가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니.

 

  이 책을 통해 가우디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건축가가 본 건축가 이야기이므로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눈으로 보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스페인이 가우디를 통해 얻는 관광수입을 보며 가우디라는 인물을 키워낸 스페인이 대단해 보였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니 가우디라는 인물이 있어서 스페인에게 큰 행운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작 시 당국은 카사 밀라가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철거 명령을 내렸고(물론 가우디는 따르지 않았다.) 벌금을 내라고 했다지 않은가. 하긴 불법으로 도로를 점거하고 3년이나 공사를 강행한 가우디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다. 나중에는 카사 밀라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여 시정명령을 취소했다고. 게다가 밀라 부인은 가우디가 죽은 후 실내를 로코코 양식으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원래 의뢰인의 취향과 주변 환경, 역사 등을 고려해서 건물을 짓는다는 가우디의 방식이 밀라 부인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밀라 부인의 사고가 지나치게 경직됐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후세인인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밀라 부인이 시대를 읽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누군가의 칼럼에서 우리네 서울의 건물들은 주변의 건축물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혼자만 잘났다고 우뚝 솟은 건물이 아니라 주변과 얼마나 조화를 이루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가우디는 진정한 건축가가 아닐런지.

 

  터키를 다녀와서 그와 관련된 책을 꽤 읽었다. 다녀온 후 기억을 되살려가며 읽는 맛도 좋지만 다음에는 가기 전에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지금은 스페인에 대한 책을 열심히 수집하고 있다. 2년 후에 가려고 마음 먹고 있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지인에게 터키에서 찍은 사진을 나는 무척 뿌듯하고 감동적인 기분으로 보여줬더니 그런다. '나는 그냥 책에서 보는 사진이랑 별반 차이가 없어.' 이 책에도 사진이 많이 나오지만 내가 그 사진을 보는 느낌이 딱 그만큼일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 눈으로 보는 차이를 말해 무엇하랴. 여행은 보는 것 이상으로 그 곳의 공기와 바람과 햇살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내가 아직도 에페소의 바람과 공기를 기억하고 파르테논 신전의 따스했던 햇살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냥 유명하고 위대한 건축가라고만 알고 있던 가우디의 건축인생을 그가 지었던 건축물 순서대로 살펴보며 다양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재미있게 들려주는 책이다. 그래서 쉽게 잘 읽힌다. 물론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우디가 위대하긴 하지만 건축비 때문에 고민하고 고집불통에 부자들의 건물만 짓는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더 인간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런데 오타가 많고 급하게 펴냈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하게 편집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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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나이든다는 것 - 민담, 전설, 신화로 들려주는 나이듦의 여섯 가지 여정
앤 G. 토머스 지음, 박은영 옮김 / 열대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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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간접체험 혹은 치유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라고,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문득 가슴으로 느꼈었다. 솔직히 그 전까지만 해도 책이 좋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럴싸한 말로 포장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깨달음'의 기쁨을 맛본 뒤로는 전적으로, 진심으로 독서의 기능을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찬양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물론 아주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똑같은 책을 여럿이 읽더라도 그것이 주는 느낌이나 영향은 다르다는 점이다. '적시에(right time)'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도 어찌보면 나에게 적시에 찾아온 책이 아닌가 싶다. 전반적인 내용이 적시라기 보다는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는 의미의 적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내가 나이 든 여자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가족, 즉 원가족의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남편의 성격이 다시 이해가 안 가기 시작했고, 혹시 나에게도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예전에 소그룹으로 의사소통 수업을 받으며 내면의 심리가 의미하는 바와 원가족의 영향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시간이 변하면서 사람의 생각이나 상황도 변하는데 나는 예전에 듣고 느꼈던 것만 생각하고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나에 대해,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나 표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내친 김에 심리학에 대한 다른 책도 찾아 읽어보았고 지금은 남편에 대해서도 다시 조금씩 이해가 가기 시작했으니 하나의 계기가 된 책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신화나 전설, 민담(즉 옛이야기)을 통해 그 안에서 여자의 말이나 행동을 읽어내며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잘 풀어주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옛이야기는 대부분 잘 모르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상징하는 바를 조목조목 설명해주는 글을 읽고 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물론 꼭 이렇게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도 꽤 있지만 어차피 모든 이야기는 해석하기 나름일 테니 저자의 해석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주는 내담자의 이야기가 더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몇 년 전에 엄마가 나에게 당신의 삶에 대해 한탄하셨던 적이 있다. 당시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렇게 한탄할 필요가 없는 일을 가지고 괜히 그러신다고 생각해서 엄마의 마음을 읽어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엄마가 왜 그러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철이 덜 들었던 것도 그렇게 생각한 이유였을 테고. 지금은 나이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깨닫지만 당시만 해도 무엇을 하든 '나이'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엄마가 그때 참 힘드셨겠구나 싶다. 힘들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새 중년 후반에 와 있는데 남은 것은 하나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나'를 위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을 때의 허탈감과 허무감을 느꼈던 게 아닐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엄마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던 것과 엄마의 마음을 읽어주지 못했던 게 참 죄송하다. 이제 깨달았으니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이야기하면 좋겠지만 워낙 무뚝뚝한 딸이다 보니 그것도 쉽지 않다.

 

  역자와 이야기하던 도중 지금 우리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자기를 돌아보고 치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이야기하시던데, 정말 그렇다. 이런 책을 통해서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과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책이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적 환경이 이루어졌으나 그 분들은 이미 그것을 누릴 여건이 되지 않는다. 시간은 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도 종종 그러신다. 젊었을 때 생각하기로는 나이 들면 책이나 실컷 보며 여유있게 살려고 했는데 책을 조금만 보면 머리가 아파서 읽을 수가 없다고(그래서 드라마를 엄청 보시는 건가). 이런 책을 읽고 더 확장해서 다양한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독서로 치유가 가능할 텐데, 아쉽다. 그런 의미에서 나보다는 엄마에게 더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직 손자 손녀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할 나이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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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클래식 보물창고 18
알베르 카뮈 지음, 이효숙 옮김 / 보물창고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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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문학고전에 맛을 들였던 지난 겨울부터 읽기 시작했던 책 중에 마침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가 있었다. 사실 언젠가부터 문학에 흥미를 잃은 후로 그냥 작가 이름과 제목만 들어봤을 뿐 읽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책을 고른 기준이 '유명한 작가의 책'이었더랬다. 누가 보면 참 무식해 보일지 모르는 방식이지만 그렇게라도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게 어디냐고 위안을 해본다. 그래서 까뮈의 <페스트>를 읽으면서도 그를 유명하게 해준 <이방인>을 꼭 읽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지금까지도 그 많은 사람들이 까뮈하면 이방인을 자동으로 떠올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읽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참 이상하다고,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낯설기도 하고 겉도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은 작품 자체가 이방인이다'라고 한 사르트르의 말이 어렴풋이 이해된다고나 할까. 흔히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 중 하나에게 나를 대입해서 나도 모르게 일희일비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끝까지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다. 특히 주인공은 그 어떤 독자도 자신에게 동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자신의 일을,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말하는 방식이 정말 낯설다고나 할까.

 

  1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만 하고 있는데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주인공의 삶을 나열하고 있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셨고, 장례식에 가서도 의례적인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돌아온 주인공을 보면 감정이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비인간적인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언론을 장식하는 사이코패스랑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게다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도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거나 마치 남의 재판 구경하듯 하는 행동은 상식적으로 낯선 사람의 모습이다. 즉, 이방인의 모습인 셈이다. 어디에도 적극적으로 속하지 않는, 속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주인공 뫼르소가 결국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법을 무시한 다른 죄목으로 사형당하는 모습 또한 이방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뫼르소의 친구들이 모두 그를 변호하기 위해 애쓰는 걸 보니 뫼르소가 잘못 살지는 않은 듯하다. 곳곳에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품고 있어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고 분석된다는 까뮈의 <이방인>. 사르트르는 뫼르소에게서 까뮈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뫼르소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거창하게 해석했던데, 문학에 문외한인 나는 그저 참 낯설고 독특한 주인공을 만난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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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천국, 쿠바를 가다 - 세계적 교육모범국 쿠바 현지 리포트
요시다 타로 지음, 위정훈 옮김 / 파피에(딱정벌레)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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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원어민 교사가 캐나다인이었다. 학교측의 배려로 학부모들도 원어민과 영어공부를 할 수 있었는데 그때 원어민이 한국의 어린이들이 각자의 교실을 스스로 청소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단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생활했던 것을 그들이 보기에는 독특한 교육으로 보였나 보다. 그 이야기를 큰아이에게 했더니 대뜸 이런다. "직접 해보라고 그래!" 내 딴에는 우리 교육 방식이 서구의 개인주의적인 것보다 훨씬 낫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건데 완전 빗나갔다. 남이 보기에 교육적이고 획기적인 일도 당사자가 느끼기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이었다. 오죽하면 5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날까.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높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교육수준이 높고 성취수준도 높지만 만족감은 낮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꼭 따라붙는 이야기가 있다. 교육은 백년을 바라보고 계획해야 하는데 책임자(장관이 됐든 교육감이 됐든)가 임기 안에 성과를 내고 싶어하기 때문에 졸속으로 진행해서 그렇다는 비판 말이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만들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왜곡하는 열혈 학부모가 있는 한 변하기는 힘들다는 소리도 들린다. 모두 맞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쿠바의 교육을 높이 평가하는 이 책이 무척 궁금했다.

 

  쿠바하면 체 게바라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핵 위기도 떠오르고, 관타나모 기지며 미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자구책으로 실시한 정책들이 오히려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것도 떠오른다. 한편으로는 저자도 지적했듯이 혁명으로 지금의 성과를 이루어냈다고는 해도 어쨌든 독재를 했고 지금은 정권을 동생에게 물려주는, 상식적으로 보기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나라라는 점에서 과연 벤치마킹할 것이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안에 있는 '교육'을 따로 떼어내 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가 가장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지나친 경쟁과 모든 것을 돈으로 가치를 매기려고 하는 모습을 슬기롭게 헤쳐나갔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연대니 조합이니 하며 서로 모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던데 쿠바의 경우는 그것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잘 활용하고 있다. 사실 정리해고를 하더라도 쿠바처럼 급여가 그대로 나오고 재취업을 위한 교육을 시켜준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얼마나 환상적인 정책인가 말이다. 그러나 어떤 논문에서 지적했다고 하듯이 아주 일부만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밖에서 보기엔 이상적인 정책으로 보여도 그 실상을 들여다 보면 헛점이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큰아이가 화내며 이야기했듯이.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정책을 여러 번 언급하했던 사실도 그렇고. 원래 사람이란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법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교육정책에 문제가 없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다른 나라의 정책에 대해 환상을 갖진 말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큰아이가 이 책을 보더니-비록 책을 읽진 않았지만-쿠바로 유학가고 싶단다. 처음에는 제목을 보고 쿠바는 못 사는 나라가 아니냐고 의구심을 갖길래 자초지종을 설명해줬더니 한 말이다. 우리는 어느새 의료나 문화, 복지와 같은 수준을 외부에 보여지는 그 나라의 경제력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생각 또한 자본주의의 폐해가 아닐런지. 실은 나도 쿠바가 의료천국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교육수준까지 높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생경한 지명과 연결되지 않는 이름들, 그리고 예를 든 것들이 일목요연하지 않은데다 숫자가 너무 많이 나열되어 집중하기 어려웠다. 인터뷰를 정리해서 시스템을 설명하는데 이용했더라면 이해가 쉬웠을 텐데 그냥 장황한 설명이 계속되어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야심차게 읽기 시작했다가 끝까지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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