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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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제목을 곰곰 생각하지 않더라도 촛불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모 출판사 웹진에서 작가의 글을 가끔 보았기에 그쪽에 관심이 많고 더불어 마음도 그쪽에 가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표지가 참 예쁘다. 이건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여성 독자가 좋아할 만한 표지가 아닌가 싶다. 사실 분홍색은 여자색, 파란색은 남자색이라는 이분법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이럴 때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생각의 틀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여전히 여자들이 훨씬 눈길을 줄 표지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솔직히 촛불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뻔히 알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이 답답했다. 혹 나중에 정말 제대로 된 사회가 오면 모험담처럼 이 때를 추억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다. 이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인가. 장정일 소설가가 '촛불 집회를 소재로 삼은 한국문학을 정리한다면 이 책이 일착으로 검토되어야 할 소설'이라고 했지만 글쎄. 소설을 잘 몰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읽는 동안 그닥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변한 게 하나도 없는 현재가 너무 답답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상당부분 사실을 근거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장정일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 

캐나다 오지 마을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사는 지오가 하필이면 촛불 집회가 열리는 때에 한국에 와서 겪는 일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모든 것을 자연으로부터 배우기 때문에 획일적인 공교육을 받는 우리로서는 그저 지오가 부럽기만 하다(물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걱정하기도 한다). 또한 지오는 세상의 일반적인 눈(그러나 어찌보면 편협한 시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으로 보면 특이한 환경에서 산다. 작가는 일부러 지오의 환경을 우리에게는 비정상적으로 보일 것들로만 꽉 채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일들을 겪고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너무 훤히 알고 있는 일들이라 그런지 신선함을 느끼지 못했고 그냥 사건을 줄줄이 서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즉 후대 사람들은 여기 서술된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현재를 사는 '나'는 그저 그렇게 읽었다.   

<연금술사>를 읽으며 산티아고가 사막에서 바람과 태양과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거슬리지 않았는데 왜 여기서 지오가 숙자 할머니의 개와 이야기하는 장면은 억지처럼 느껴졌을까. 단지 한 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일까.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문학의 미음도 모르면서 이런 말 하기가 좀 뭣하지만 그게 바로 관록이라는 것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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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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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을 욕심에 책세이로 쓰겠다(리더스가이드 사이트다. 워낙 쟁쟁한 분들이 많아서 서평쓰기가 유난히 두려운 곳이다.)고 덜컥 약속은 해 놓고 책을 읽으며 무지 걱정했다. 아니, 솔직히 후회했다. 그냥 리뷰로 쓰겠다고 할 걸하고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여기에 나오는 단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일반 리뷰로 쓰는 것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은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이 읽는다. 게다가 프랑스 소설은 가뭄에 난 콩이 그 뒤에 난 홍수에 쓸려간만큼이나 읽었을까 말까한다. 얼마전에 모임 사람들과 르 끌레지오의 <나는 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를 돌려보며 읽었다. 참고로 이 책에는 <륄라비>라는 제목으로 들어가 있다. 그 책을 읽고 나눴던 말은 '참 난해하다'였다. 어린이책 이론서를 보더라도 프랑스 작가의 책은 정말 어렵다. 하물며 문학은 오죽할까. 그런데 이 책에서 보자면 르 끌레지오의 작품은 쉽고 잘 읽히는 편에 속한다는 거다. 그만큼 내겐 난해하고 어려웠다. 전문 분야가 아닌 문학작품이 이처럼 어려울 수도 있구나를 처음 알았다고나 할까. 

중학생 딸에게 한국 현대문학작품을 읽으라고 종종 이야기한다. 그런데 아이는 재미없단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 시대적 배경이 전혀 달라서 당췌 그림이 그려지질 않을 테니 오죽할까. 그나마 나는 부모가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당시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갖추어진 상태에서 생활한 요즘 아이들은 소설 속에 나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그저 구질구질하게 왜 이렇게 사냐는 마음만 들겠지. 문득 프랑스 문학 전문가, 아니 적어도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 하소연이 한국 문학에 대한 딸의 하소연과 같지 않을까 싶다. 그 사람들은 그림이 그려지고 계보가 그려지기 때문에 소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눈에 들어올 텐데 나 같은 사람은 설명을 해줘도 명확하질 않고 그런가보다 하니 말이다. 편역자가 존경스럽다. 역시 난 문학적 감수성과는 거리가 먼가 보다. 

얼마전 모임(위에서 얘기한 모임과는 약간 다른)에서 사람들에게 질문해 보았다. '여러분들은 일반 문학, 그러니까 소설을 읽으시나요?' 대부분 고개를 젓는다. 주변을 둘러봐도 어린이책을 보는 사람들은 일반 문학을 거의 안 본다. 관심은 있어도 어린이책 보기도 바쁜데 시간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특히 내 경우) 소설에서 삶의 방향을 조언 받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해서가 아닌가 싶다. 사랑 이야기는 덧없고 자기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이미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문학을 비평할 것도 아니니 목적이 없는 것이다. 항상 이렇듯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긴 하다. 그러나 어린이책은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기도 하고 내 아이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보기도 하고 이런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를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린이책만 보았다는 얘기다. 내가 소설을 안 읽는, 실은 못 읽는 이유를 장황하게 변명하듯 이야기했는데 그 와중에도 그래도 읽으면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읽었던 작품들이 삶의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이해가 되고 의미가 확 깨우쳐지는 경험을 가끔 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 중 나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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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삶이 내게 왔다
정성일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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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참으로 건방지게도 다른 사람, 특히 사회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않았다. 어차피 그 사람들의 인생여정을 내가 알아봐야 나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환경도 다 다른데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은, 약간은 삐딱한 마음에서다. 아마도 그 이면에는 질투심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잘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좋은 머리를 가졌던가 아니면 좋은 부모를 가졌던가 그도 아니면 주변에 든든한 뒷배경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 모든 것을 갖지 못한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은 그저 남들이 조금 알만한 사람을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치 자기가 그들 무리에 속한 양 착각하고 산다. 사실 그래서 한때는 나도 그런 사람(다른 사람이 인용하는 사람)이 되길 무척 갈망했었다.  

방송작가였고 책도 쓴 지인이 한겨레신문에 실린 내 인터뷰 기사(그게 벌써 2년 전이다.)를 보고 남편에게 '내가 아는 사람이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누군가에게 인용이 되기도 하는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희망을 버렸다. 자신이 없어졌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잠시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이처럼 유명한 사람은 그저 유명한 사람일 뿐 내가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알겠다. 누구에게든 배울점이 있는 법인데 내가 상처받을까봐 외면했다는 것밖에 안된다. 

다양한 분야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내가 참 안이하게, 수동적으로 삶을 살았구나 싶다(그런데 그 순간에도 이 책을 기획하면서 인물을 선정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유학을 가고 삶의 기반을 쉽게 잡은 것을 보면 완전 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닐 거라는 못된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 그들의 삶을 구구절절 적지 않았을 뿐이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단면을 보고 전체가 순탄했을 것이라는 우를 또 범하고 만다. 하긴 그래야 내가 지금 이처럼 현실에 안주하고 안이하게 사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테니까. 

여기 나오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자신을 돌아볼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다. 지금의 많은 학생들은 그냥 취업이 잘 될 것 같은 직업을 찾고, 어른들이 정해주는 진로를 '따라'간다. 과연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렇게 평탄하게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과연 남의 고통을 돌볼 줄 알까. 당연히 모를 것이다. 모든 것이 구비된 환경에서 그냥 살기만 하던 사람이, 모든 것을 만들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을 이해할 리 없다. 그래서 지금처럼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것일 게다. 문득 어떤 개그가 연상된다. '취업하면 (저절로)차 생기고 결혼하면 집 생기는 거잖아요.' 

뒷표지에 이런 문구가 있다. '삶이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때로는 찾아오기도 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어떤 삶의 한복판에 있을 때는 그냥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지만 지나고나서 보면 이런 게 운명 아니었을까 싶은 일들이 꽤 있다. 그런데 아직도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걸 보면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나 보다. 아니면 혹시 지금 이 순간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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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조선의 영웅들 - 시대를 풍미한 도적인가, 세상을 뒤흔든 영웅인가
이희근 지음 / 평사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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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주류보다 비주류에서 이야기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내가 비주류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일에는 하나의 원인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라는 평소의 생각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책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뒤집어 보는 역사'라는 타이틀과 '시대를 풍미한 도적인가 세상을 뒤흔든 영웅인가'라는 부제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글쎄,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모호하다는 생각과 깊이가 없었다는 생각(남편도 동의했다.)이 든다. 

어떤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윤색되기도 하고 미화되기도 한다. 이것은 비단 여기서 말하는 홍길동이나 임꺽정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붓뚜껍에 목화씨를 몰래 가지고 와서 백성들의 겨우살이에 큰 보탬이 되었다는 문익점에 대한 이야기조차 후대에서 '약간' 과장한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있는 마당에 홍길동이 그냥 도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의 홍길동과 소설 속의 홍길동을 일치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임꺽정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두 인물을 분석한 이야기는 그닥 새로운 것도 없었다.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인물의 실제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중언부언하는 바람에 정확히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호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가장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은 홍경래와 박지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혁명가라고 평하는 홍경래가 사실은 사회적 욕구가 강한,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평하는데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 매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인이 아닌 다음에야 자신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 사회의 불합리한 현상을 개탄하고 개혁하려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상은 정반합의 형태로 점차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을 바꾸고자 노력하고 결국 합의를 이루고 다시 거기에 불만인 사람이 나타나 바꾸다 보면 점차 나아지는 것 아닐까. 따라서 홍경래가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향촌 세력의 유력자라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기 보다 어쨌든 당시의 불합리한 사회를 바꾸고자 일어난 것이라고 본다. 비록 확실한 사상적 근거가 없었고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고 해도 지배층에게 불만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그 자체가 의미있다고 본다. 꼭 성공해야 의미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박지원에 대한 부분도 그렇다. 내가 박지원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재야의 인물로 꿋꿋하게 생활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출세욕이 하나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어쨌든 거기에 연연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를 신분해방론자라고 대개의 사람들이 평가하는 부분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내가 박지원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양반전>에서 자신'도' 속한 양반을 풍자하고 비꼬는 그런 넉넉함이 좋아서다. 적어도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고칠 가능성이 있으니까. 솔직히 난 그를 신분해방론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보았다. 조선시대에 지배층이 말하는(흔히 사극에서 회의할 때 들먹이는) '백성'은 우리가 생각하듯 흰 옷 입은 백성이 아니라 보통의 '양반'을 뜻한다고. 당시는 아무리 진보적인 시각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신분을 완전히 평등하게 하는 것에까지 나아간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것을 가지고 단지 양반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를 바라는 특권 체제 옹호자였다고 단정짓는데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양반전>에서 돈을 주고 양반을 산 천한 부자가 양반이 누릴 수 있는 특혜를 듣더니 양반은 순 도둑이라며 달아났다는 부분이 저자의 해석처럼 천한 부자의 어리석음을 조롱함과 동시에 학문을 닦은 선비만이 양반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일까. 그보다는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을 풍자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천한 부자도 도둑질은 하지 않는데 하물며 양반이라는 자가 사실은 도둑보다 더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은근슬쩍 꼬집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잘못 해석하고 있었던 것일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아무리 진보적인 생각을 하더라도 사회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기란 힘들다고 생각한다. 즉 연암의 경우도 비록 양반의 일부 특권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의 모습이 허구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진보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모든 면에서 진보적일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 연암은 당시 사고의 틀을 벗어난 사람이었다. 성군이라고 불리는 정조의 많은 개혁정책조차 한편에서는 단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을 시대적 상황은 배제한 채 완벽하게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연암에 대한 저자의 평가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다. 

객관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사실에 입각해서 설명을 하고 있으나 간혹 주관이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의 다양한 면을 살펴본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했다. 어차피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은 정해진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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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학교 행복한 아이들 학교희망보고서 1
작은학교교육연대 지음 / 우리교육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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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현재의 공교육에 만족하는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목받는 학교가 바로 여기 소개된 학교들이 아닐까 싶다. 지난해에 남한산초등학교 사례가 방송된 후 그 학교는 문의전화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라고 한다. 사실 나도 그 때 남한산초등학교를 처음 알았다. 아니, 그런 학교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보통 그런 류의 대안학교는 있지만 공교육에서 마치 대안학교처럼 꾸려가는 학교가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간혹 시골에 있지만 시설이 좋다느니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그건 그냥 외양을 갖춘 것 뿐이라는 생각에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여기에 소개된 7개의 학교는 단순히 남에게 보여지는 것들에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인성에 초점을 맞춘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각 학교의 교사들이 학교를 일군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어려움과 보람을 함께 말한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 아이들이 생각났다. 우리야말로 시내의 복닥대는 학교에 있다가 지금의 학교로 전학을 왔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찌어찌하다 보니 지금의 학교에 오게 된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에서 버스를 운행하는 큰 학교로 옮길 기회가 있었지만 통학하기 불편함을 감수하고 지금 학교에 남았다. 교실에서 40여 명이 공부하는 교실과 20명이 채 안되는 교실은 보기에도 차이가 많이 난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갖는 관심의 정도도 차이나는 건 당연하다.  

오죽하면 둘째는 40명씩 10개 학급이 있던 학교에 다니던 때와 지금을 종종 비교하며 마치 옛날을 이야기하듯 한다. 그 학교에서는 복도에서도 교실에서도 그냥 돌아다니는 게 허용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물론 지금 학교에서도 복도에서 뛰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혼났다고 말하지만 그것조차 재미있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어떤 선생님은 교실에서라도 뛰어놀라며 대신 복도에서는 뛰지 말라고 '조장'하기도 했다. 지금 아이는 아주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하며 자신감도 많이 생겼다. 처음엔 괜히 변두리로 와서 학업에 지장을 준 건 아닌가 회의가 들었지만 지금은 만족한다. 비록 학업은 시내 아이들과 조금 차이가 나겠지만 소중한 유년기의 추억을 얻었다고 본다. 다만 학생이 자꾸 줄어서 이번 새학기에는 반이 하나로 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래도 시내의 과밀학급 보다는 낫겠지 싶다. 

학교 교육은 단순히 선생님이 의욕이 많다고 잘 되는 게 아니다. 행정관료인 교장과 학부모의 도움 없이는 정말 힘들다는 것을 7개의 학교 사례에서 보여준다. 거산초등학교나 삼우초등학교 등의 학교가 모두 남한산초등학교의 사례를 보고 힘을 얻어 시작했다고 하니 남한산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더 존경스럽다. 이후 생긴 학교에 남한산초등학교가 모범이 되었다니 말이다. 만약 남한산초등학교가 없었다면 이런 학교가 생기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을 것 아닌가. 누군가가 이미 시작한 일을 따라가는 것과 새로 만들어서 시작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까. 

참 신기하게도 각 학교를 만들 때 나타나는 어려움은 모두 비슷해 보인다. 일부 학부모들의 이기적인 생각, 교육청과의 마찰, 교사들끼리의 의견 대립 등.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것은 어느 학교나 있는 현상일 뿐 이 학교의 학부모들이 특이해서도 아니고 선생님들이 주장이 세서 그런 게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극복하고 이제 차츰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학교도 있고 2기를 맞이하는 학교도 있다지만 앞으로 순탄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을 게다. 그래도 처음 보다는 훨씬 덜 아프고 덜 힘들이며 함께 만들어갈 것이라고 본다. 

우리나라의 모든 학교를 이렇게 바꾸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라도 안다. 사실 이런 학교를 만든 교사의 가족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이 힘들어 보였다. 그러니 아예 불가능하다기 보다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런 학교가 점점 늘었으면 좋겠다. 이제 몇 년 있으면 내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해서 나와 상관없는 일이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이런 학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아니,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를 생각하는 학교, 아이가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는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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