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큐레이터 - 건축과 디자인을 전시하기
플러 왓슨 지음, 김상규 옮김, 정다영 감수 / 안그라픽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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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방식의 연결

플러 왓슨, 김상규 옮김, 정다영 건축 감수 『뉴 큐레이터』(안그라픽스, 2023)




틀을 깨는 큐레이션으로

관객과 작가를 잇는 큐레이터


 플러 왓슨의 『뉴 큐레이터』가 안그라픽스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RMIT 대학교 건축 및 디자인 학부의 부교수이며 협력적 큐레토리얼을 실천하는 스튜디오 섬싱 투게더의 창립 이사다. 건축과 디자인 전시에서 완결된 작품을 그대로 선보이거나 건축가의 건축물을 모형 또는 사진으로 재현하여 전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건축과 디자인을 전시하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움직임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큐레이터가 실천하는 다양한 행위성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많은 사람이 전시를 보러 간다. 서울만 놓고 봐도 여러 구에서 각기 다른 전시가 열리고 어떤 전시는 얼리 버드를 해서라도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은 흐름은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직접 체험하고자 하는 욕구가 늘어났다는 것이며, 동시에 작가와의 쌍방향 소통을 원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전시는 작품을 보기 전에 엄청나게 긴 설명이 벽에 적혀져 작품의 의도와 배경을 모두 설명한다. 일반인들에게 더 폭넓고 깊은 이해를 주기 위해 설명이 불가피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러한 설명과 작가의 생각이 적힌 도움은 오히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끔 한다는 단점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관객과 저자 사이에 유의미한 소통이 발생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걸까. 저자는 큐레이터의 역할에 관해 언급한다.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전시는 작품을 재현하여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통적인 전시 방식의 틀을 벗어나 저자는 건축과 디자인을 전시하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움직임을 제시한다.

여섯 가지 움직임이란 공간 제작자, 번역가, 개입자, 사변자, 행위자, 드라마쿠르그로서의 큐레이터가 실천하는 행위성을 가리킨다. 건축과 디자인 아이디어를 실험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수행적 큐레이션’을 논의하는데, 여기서 큐레이터의 역할을 설명하는 방식이 새롭다. 보통 큐레이터는 예술 전문가로 담당하는 예술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자는 ‘전문가’가 아닌 관객과 전시를 잇는 ‘매개자’로서의 큐레이터가 되어야 함을 언급한다. 24개의 전시 사례와 9편의 큐레토리얼 대화를 통해 ‘뉴 큐레이터’를 탐구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큐레이터가 고민하는 지점을 파고든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큐레이터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말하거나, 다양한 이들을 한데 모아 예술이라 칭하는 형태로 만들어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이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뉴 큐레이터』는 미래의 큐레이터를 말하는 듯했다. 앞으로 자신의 작품 혹은 다른 이의 작품을 말할 때 더 효과적인 것을 찾고 서로를 이어 각자가 고민하는 지점을 토로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게끔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책에서 나오는 내용은 해외를 중심으로 건축과 디자인을 말하지만(호주와 베니스비엔날레의 사례) 이와 같은 담론은 충분히 현재의 한국에서도 다룰 수 있고 고민해야 할 것들이 많다고 느껴졌다. 『뉴 큐레이터』는 일종의 커다란 가능성을 말한다. 정답이 없는 전시를 계속해서 말하고 더 깊고 더 자세하고 더 아름답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고민한다. 그래서 『뉴 큐레이터』를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 정말 좋은 책이며 동시에 노력이 많이 들어 있는 책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건축과 디자인 그리고 전반적인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와 우리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하고 풍부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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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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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인간이 선명해질 때까지 바라보기

마리아 투마킨, 서제인 옮김,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을유문화사, 2023)


불가능한 이해를 시도하기 위해

망가진 기억의 저편으로 걸어가는 여정

마리아 투마킨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이 을유문화사의 암실문고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소련 하르키우(현재 우크라이나에 속함)에서 태어난 작가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여 다양한 사회 문제와 인간 내면의 수수께끼를 탐구하였다. 2018년에 해외에서 먼저 출간되었던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이 전미 비평가 협회상 비평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가끔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타인의 고통에 관해 들었을 때 ‘나는 너를 이해한다’라는 식의 말을 한다고 해도, 타인의 고통의 실제적인 고통과 아픔 그리고 이후의 여파까지 체감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아예 시도조차 될 수 없는 미지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최근 팬데믹을 지나며 많은 예술 작품 혹은 사회의 태도에서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고통을 많이 겪는 약자를 공감하고 이해하여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에서 말이다. 약자를 이해해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식의 생각에서 비롯된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이해를 시도하고자 하는 사람 중에서 정말 그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거나 고통 이후의 세계에 발을 디뎌 피부로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이해하고자 하는 행위나 연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약자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껴 손을 건네는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호의는 아닐까? 이해는 시도와 동시에 결례와 오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해조차 ‘이해해 주려는 사람’이 섣부르게 베푸는 호혜”(책소개)일 수 있다고 한다. 정확히는 타인을 향한 태도로서는 합당하지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는 아름다운 결말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이해는 환상에 가깝다고 언급한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시도하고 실패의 벽에 머리를 박으면서도 기어코 시도하는 실패-움직임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저자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대화하여 듣게 된 고통을 어떤 고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고통을 들은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보여주는 고통 그 자체는 어딘가 뒤틀려있고 평생 평평해질 수 없는 망가진 땅처럼 보인다. 뒤섞이고 망가져 어떤 이야기는 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도착하는 혹은 도착할 수 없는 미래의 이야기처럼 먼 곳에서 고통이 기다리는 듯하다. 고통을 겪는 사람은 끝이 고통인 그 길을 계속 걷게 된다. 저자는 그 걸음에 함께하며 그저 듣고 이해되기 전의 고통과 사건을 통해 한계 없는 슬픔을 목도한다.

이것은 태어난 환경이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운명이 어떻게 세대를 건네 이어지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다시 말해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부모로서의 고통, 슬픔 학대(당한 것이든 가한 것이든), 무관심, 손에 쥔 채 건네 주지 않은 애정, 마치 탱크처럼 자식의 삶을 밟고 올라가 터뜨려 버리기.

「역사는 반복된다」 중에서

저자는 자신이 이주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중심으로 다양한 국가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그 문제에 피해를 받은 사람들과 대화한다. 자살 생존자, 마약 중독자, 홈리스, 전쟁 이민자, 나치 집단 수용소 생존자, 가정 폭력 피해자 등 많은 당사자의 증언은 사회에서 밝혀진 것들과는 조금 다르다. 이유 없이 자살하거나, 홈리스를 도왔지만 그를 사망케 한 사건이 일어나고 아이들은 나치 정체성을 배운 적도 없는데 배워버린다. 사회에 나타나는 다양한 통념들이 뒤섞이고 전복된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을 분류하고 통합하는 사회 제도가 실패하는 지점들을 보여주며 암담함을 직시한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커다란 요트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왜냐고? 난 어디에 가든 진심 어린 환영을 받지는 못할 것.“(「내게 일곱 살이 되기 전의 아이를-」) 같아서 점점 침잠하고 상징체가 되어가는 약자가 되어간다.

한 인간의 내면을 추적하기란 힘든 일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의 다른 면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충분히 당황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 인간은 다양한 파편으로 이루어진 깨진 거울 같아서 들여다볼 때마다 다른 표정을 볼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글의 구조 자체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타인의 마음의 복잡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복잡함은 누군가를 이해하기 전에 이미 구성되어버린 것이어서 이해를 거부하면서 발생한다. 그래도 저자는 왜곡하지 않고 들여다본다.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는 꽝꽝 언 호수 위에 선 사람처럼 말이다. 그것이 언제 깨질 줄 모르고 오도 가도 못하는 한 사람이 여기 있다.

언젠가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는 것을 포기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깨진 면 전체를 멀리서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균열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깨져 있는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부터 저자가 말하는 이해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주하기 어려운 것을 마주하는 것, 이해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 앞에는 표지의 무거운 돌처럼 커다란 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흐린 세네카처럼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멀리서 보일 때까지 바라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이해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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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간식집 - 겨울 간식 테마소설집
박연준 외 지음 / 읻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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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겨울은 무슨 맛입니까?

박연준, 김성중, 정용준, 은모든, 예소연, 김지연, 『겨울 간식집』(읻다, 2023)

저마다 겨울을 잘 지내기 위한

따뜻하고 쌉쌀한 음식을 다룬 여섯 편의 이야기

읻다 출판사에서 겨울의 장면에 음식을 접목하여 만든 테마 소설집 앤솔로지 『겨울 간식집』이 출간되었다. 『겨울 간식집』에는 박연준, 김성중, 정용준, 은모든, 예소연, 김지연이 참여하였으며 각각 뱅쇼, 귤, 다코야키, 만두, 호떡, 유자차를 소설에 등장시켜 겨울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들의 이야기는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쌉쌀하다. 독자들은 필진이 내놓는 간식을 손에 쥐듯 소설을 쥘 때마다 이야기의 풍경으로 들어가 각기 다른 겨울의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겨울에 가장 좋은 음식은 뭘까? 개인적으로는 호떡, 귤, 다코야키, 굴 …. 너무 많이 떠올릴 게 뻔하니 이만 줄여야 한다. 아무튼, 겨울에는 따뜻한 음식이 좋다. 그건 겨울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시원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겨울에는 오히려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것도 추운 겨울에 더욱 정신을 차리기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냉면 같은 음식. 생각해보면 겨울에는 손이 시려운데도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누군가와 국화빵을 함께 나눠 먹으며 추운 거리를 돌아다닌다거나, 다코야키 트럭 아저씨 앞에서 오 분이고 십 분이고 기다렸다가 열두 알 정도 사서 후후 불어먹는 장면들. 이런 순간들은 생각만 해도 속이 뜨뜻해지고 손발이 시렵다.

『겨울 간식집』에 작품을 실은 작가들은 각자 겨울에 내놓고 싶은 음식들을 통해서 다채로운 겨울의 장면을 보여준다. 박연준의 「한두 벌의 다른 옷」에서는 뱅쇼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팔각은 어째선지 시적이기도 하다. “알 수 없는 붉음”으로 주머니가 물드는 상상은 오직 겨울의 몫이겠거니 싶다. 김성중의 「귤락 혹은 귤실」에서는 귤을 둘러싼 귤락에 관해 말한다. 누군가는 귤실이라고도 했지만, 귤을 보호하는 귤실 같은 누군가 혹은 대상을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겨울 간식집』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크게 무겁거나 어려운 소설집은 아니다. 겨울의 어느 화창한 하늘을 보면서 읽거나, 눈이 펑펑 오는 날 뜨거운 뱅쇼 혹은 캐모마일 차를 마시면서 읽기 좋은 편안한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누군가는 아껴먹으려고 하나씩 읽을 수 있고, 나처럼 맛있는 것을 못 참는 사람들은 다 먹어버릴 듯 한 자리에서 완독해도 좋다. 겨울은 그런 맛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주목한 소설은 정용준의 「겨울 기도」였다. 다른 소설들도 분명하게 좋았으나, 나는 다코야키를 좋아하니까…. 겨울 간식 테마소설집인 만큼 내가 먹고 싶은 걸 리뷰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만두를 가장 좋아하지만, 만두는 겨울보다는 새해가 좋다.

정용준의 「겨울 기도」에서는 몸도 마음도 혼란한 시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스무 살, 신경이 등장한다. 학교도 나가지 않는 신경은 기숙사에서 나와 고시텔에서 살고 있다. 그런 신경을 찾아온 엄마는 문어를 가지고 오고 신경은 그것을 정말 싫어했다. 문어를 버리려다가 고시텔 관리인이 제지하고 문어를 삶고 손질해준다. 105호 여자는 신경에게 다코야키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허기를 채운 신경은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야만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정용준의 소설은 대표적인 겨울의 감각을 보여준다. 겨울이란 한 해의 마무리기도 하지만 다음 해의 포문을 여는 도약으로써의 계절이기도 하다. 갓 스무 살이 된 신경은 자신이 넘어야 할 문턱 앞에서 배고픔을 겪고 있다. 몸과 마음이 배고픈 그에게는 어떤 온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온기의 역할을 하는 것이 소설에서는 다코야키이며 다코야키는 겨울의 생경함과 추위를 지워주고 배와 마음속에 온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주변의 인물들에게 받은 사랑과 따스함으로 자신이 과거에 사랑을 받았던 사람에게 다시 사랑을 베풀려고 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은 선경이 새벽에 엄마의 병원에 가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 나는 겨울의 감각을 엿본 것 같다. 우리에게 겨울은 어떤 의미이며 겨울 속에서 무엇을 바라볼 수 있는가. 나는 정용준이 제시하는 장면에서 겨울만의 온기를 볼 수 있었다. 인물의 행위를 통해서만 발현되는 온기를 말이다.

다른 소설들은 소개하지 못했지만, 소설마다 주목하는 바가 다르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이 다채롭다는 점은 증명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간식처럼 이번 소설들을 하나씩 빼먹으며 나는 겨울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아무래도 조금 따뜻하면 좋겠다는 생각. 『겨울 간식집』을 통해 나의 겨울에 몇 가지의 맛을 더 수놓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맛의 겨울을 가졌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당신의 겨울은 무슨 맛입니까? 묻자마자 주변이 따뜻해지는 감각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겨울을 지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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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체조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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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쥔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오쿠다 히데오, 이영미 옮김, 『라디오 체조』(은행나무, 2023)


마음의 여유를 스스로 찾게 도와주는

닥터 이라부의 이상하고 날카로운 처방전

오쿠다 히데오의 『라디오 체조』가 은행나무에서 출간되었다. 『라디오 체조』는 오쿠다 히데오의 대표작 ‘공중그네 시리즈’로서 17년 만에 출간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정신과 의사 이라부와 그의 속을 알 수 없는 조수인 간호사 마유미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엉뚱하면서도 기발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후속편을 거부하던 오쿠다 히데오는 팬데믹 이후의 혼란과 불한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라부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궁금증에서 귀환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상하기에 마음을 관통하는 이라부의 치료에 독자들은 읽는 순간 유연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팬데믹 이후 정신과를 다니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뉴스에서는 코로나 블루로 불리기도 했다. 바깥을 나서지 못해서 우울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람 간의 교류가 없어졌기에 고독을 집에 들여 커다란 수렁으로 빠지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크게 힘들었던 것 같다. 상담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의 문제는 너무 많은 생각으로 불안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화로 선생님과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믿지 못했지만, 점점 만날수록 달라지는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으로 알게 된 건 사람 간의 일은 사람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라디오 체조』에 등장하여 치료받는 인물들은 각자 다른 심리적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다. 시청률에 미친 PD, 화를 낼 줄 모르는 세일즈맨, 강박이 심한 피아니스트, 오래 격리된 탓에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대학생 등 마음이 다친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심리적으로 고립되었다는 점이다. 고립은 서서히 마음의 목을 졸라 서서히 숨통을 조인다. 숨의 끝에 매달린 사람들은 긴박해지고 어딘가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자신이 스스로 발목을 잡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이들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자신이 버틸 수 있다고 한다지만, 어떻게든 의사를 찾게 되고야 만다. 그들에게 필요한 의사는 어떤 의사가 좋을까. 아무래도 여유롭고 자유로운 사람이 좋을 듯하다. 타인의 호흡을 한 번 끊어 일정하면서도 느릿한 박자를 몸에 심어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라디오 체조』에 등장하는 닥터 이사부다.

이사부의 처방은 다른 의사들과는 다르다. “그만둘 거면 다 써버려. 1엔짜리 하나 남기지 말고.”(「어쩌다 억만장자」) 돈을 탕진하라고 하거나, “일단 지각부터”(「피아노 레슨」) 하라는 식으로 행동을 교정한다. 그의 처방에 환자들은 이사부를 미쳤다고, 잘못 걸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사부가 요청한 행동을 조금씩 시도하는 환자들에게서는 처방보다 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자신이 겪는 괴로움이 서서히 해소된다는 점이었다. 어딘가 풀리지 않는 매듭이 서서히 풀리는 듯한 기분을 경험하면서 환자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게 된다. 이는 어쩌면 이사부가 환자들의 꽉 쥔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주면서 힘을 멀리 놓아주는 것은 아닐까. 의사처럼 행동하고 말하진 않지만, 어느 의사보다 더 확실하게 치료하는 이사부의 처방은 지금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필요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에는 자연스럽게 웃는 표정까지 나왔다.

가슴속에 막혀 있던 뭔가가 단번에 배출된 느낌이 들며, 마음이 가벼워졌다.

돌발적인 행동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해냈어. 껍데기를 깼어.

스스로를 칭찬했다.

「라디오 체조 2」 중에서

「라디오 체조 2」에 등장하는 가쓰미는 화를 내지 못하고 쌓아둬서 화병(한국식 표현을 빌리자면)에 걸린 사람이다. 그를 위해 이라부는 “일단 나가서 고함부터” 쳐볼 것을 권한다. 함께 차를 타고 난폭 운전을 당했던 도로로 가보며 정상 속도로 가다가 사고를 내보기도 한다. 이라부는 언뜻 보면 가쓰미의 분노를 키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매번 당하던 난폭 운전과 다른 화나는 일을 겪으면서 억지로 화를 낼 수 있는 굴뚝을 마련해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처방으로 가쓰미는 여러 일을 겪으며 마지막에는 화를 낼 수 있는 인물이 된다. 나는 이라부의 행동이 가쓰미의 혈을 뚫은 것처럼 보였다. 그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은 이와 같다.

여하튼 그 의사 선생이 나오면 묘하게 치유가 되더군.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거겠지.

우울함의 특효약은 힘을 빼는 걸지도 몰라.

「해설자」 중에서

결론적으로 보면 이라부의 처방은 힘을 빼주는 것이었다. 「라디오 체조 2」에 등장하는 가쓰미도, 다른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라부의 처방으로 인물들은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게 된다. “유야는 한 번쯤 자기를 깨보고 싶은 기분”(「퍼레이드」)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 “전액 기부”(「어쩌다 억만장자」)를 생각하게 된다. 이라부는 혈을 뚫어주는 역할을 하고 이후를 담당하는 건 전부 환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생활에서 힘을 조금 풀었을 때의 여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파장이 되어 개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아주 큰 기쁨으로 말이다.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주고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가 있다. 이라부의 기묘하지만 어딘가 편하게 만들어주는 처방은 힘들고 빡빡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이라부가 필요하다. 잠시 손에 쥔 것들을 놓을 수 있는 용기를, 스스로 옥죄는 생활에 숨통을 틔는 쉼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라디오 체조』가 도와줄 것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라부의 유쾌함에 몸을 맡겨보는 것도 좋다.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얼굴에 힘을 풀고 웃고 있을 것이다. 그 웃음이 미래를 여는 도입부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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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여행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29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황승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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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라는 나침반으로 걸어가는 미래       

  


하인리히 하이네의 『하이네 여행기』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하이네는 여행기에서 자신이 살던 시대의 상황과 문화적 요소들 그리고 종교와 분열된 시대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며 독일과 유럽의 상황을 이야기한다.     

독일 문학을 깊게 접해본 적이 없는 내게는 독일 문학이 다소 고루하다거나 진지하여 무겁다고 생각한 적 있다. 특히 고전은 더욱 그러했고 하이네의 문학은 더욱 그랬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유럽적 사건으로 불리는 그의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그의 배경을 알고 접해야만 했다. 하이네는 낭만주의 시기를 살던 작가이지만 수필과 시의 형태에서 본다면 사회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여타 다른 낭만주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방향성과는 다르다.

그의 책에는 「북해」와 「이념-르그낭의 책」을 묶은 책인데 「북해」에서는 바다에서 시작하는 여행기를 볼 수 있다. 신기한 점은 여행기인데 시의 형태로 풀어낸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점은 내게 신기하게 다가왔다.           


저녁이 오면서 어스름이 깔리고

파도는 더욱 거칠게 포효했다.

바닷가에 앉아

물결의 하얀 춤을 보자

내 가슴은 바다처럼 부풀어 올랐다.

어디에서나, 어디에서나,

휘잉휭 불어 대는 바람 소리에도, 철썩이는 파도소리에도

내 가슴의 탄식 소리에도

어디에서나 내 주위를 맴돌며

어디에서나 나를 부르는     

「선언」 중에서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여행의 한 장면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그 장면은 그의 언어로 이루어진 장면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회상과 성찰을 반복하여 오가며 결론적으로 다양한 시간대를 오가는 그의 방대한 시대의 여행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점들은 마치 당시 상황에 독자를 놓아둔다.

하이네 여행기는 시의 아름다움과 시대의 냉철함이 담긴 복합적인 책이다. 독일 문학을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면 하이네 여행기를 먼저 접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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