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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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L인가.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소개한 소개글을 보면서부터 의문을 가졌다. 왜 '이한열'이 아니라 L일까. 김숨의 소설 <L의 운동화>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던, 우리가 흔히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고 알고 있는(그러나 또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말이 될 것이다), 대학생 이한열의 남아 있는 한짝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내용이 중심이 된 이야기이다. 사실 언뜻 보면 이 소설에서 굳이 이한열의 이름을 L이라는 이니셜로 처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소설을 읽으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 사건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을 터이고, 소설에서도 굳이 그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배경지식이 거의 없더라도, 소설을 조금 읽다보면 이 소설의 L이 이한열을 지칭하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그 사건이 어떠한 사건이었는지 자명하게 알게 된다. 다만 이 소설은 어떤 표현으로서 그를 'L'이라고 지칭할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이한열이 아니라, 왜 L인가.

 

소설은 크게 세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사건이다. 1987년 6월 9일 시위 현장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던 연세대생 이한열. 그의 왼발에 있던 운동화는 사라졌고 - 다시 말해서 집회 현장에서 한 여학생이 주인 잃은 운동화를 주워 집회 사회를 맡은 학생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끝내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고, 날들이 흘러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운동화가 이한열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것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후였다. - 그의 오른발에 있던 운동화만 남았다. 다른 하나는 복원이라는 것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이다. 무엇인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질문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왜 이것을 복원해야 하는가. 그것은 복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복원을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복원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이한열의 운동화라면 그 운동화를 새것같이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한열의 발에서 벗겨진 그 상태 그대로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이후 지금까지의 28년의 시간을 담아내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공산품의 하나인데, 굳이 이것을 복원해야 하는가. 복원을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복원해야 하는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며, 어떤 방법을 써야 이 복원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될 수 있는가. 해야 할 질문은 많고, 답을 찾기까지 고려하여야 하는 사항은 많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소설은 충분할 것 같은데, 여기에 다른 한 가지가 흥미롭게 끼어든다. 연관되는 듯, 혹은 연관되지 않은 듯한 다른 여러 사람의 이야기. 대표적인 것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주체인 '나'와 복원실에서 같이 일하는 동양화 전문 복원가 '그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한 이야기. 자폐성 발달장애가 있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치료하는 센터에 다녀오던 날, 버스를 탈 엄두가 안나고, 택시가 잡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집까지 데려오던 날의 기억. 두 시간을 꼬박 걸어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는 아들 운동화의 왼짝과 오른짝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왼발에 오른짝 운동화가, 오른발에 왼짝 운동화가 신겨 있었어요. 운동화 짝이 바뀌어 발 방향이 틀어진 아들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집까지 걸어간 거예요. 그늘 한 점 없는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아들의 손목을 잡아끌면서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아들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끌면서 집까지 걸어간 걸 생각하면...... 세검정 못미처, 아들의 오른발에 신긴 운동화 끈이 풀어져서 새로 묶어 주면서도 운동화 짝이 바뀐 것은 몰랐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운동화 끈이 또 풀릴까 봐 세게 당겨 묶으면서도요."(p.70~71) 아들은 이제 시설에 들어가 있고, 그녀는 가끔 꿈을 꾼다. 아들의 발에 운동화를 신기는 꿈. 그 꿈에서 그녀는 둘로 나뉘어져 있다. 아들의 왼발에 신기고 있는 운동화가 오른짝이라는 것을 알면서 신기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자신, 그렇게 쪼개져 있는 상태로. 이 소설에서는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말고도, 복원실 사람들, 혹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 의뢰하는 기념관장 등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그리고 '나'에게 보내온,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신문에 실린 L의 운동화 기사를 보았다는, 86학번이라는 익명의 사내가 보낸 메일도 있다.  

 

삼화고무에서 나온 흰색 타이거 운동화가, 영문으로 타이거(TIGER)라고 쓴 로고가 붙어 있던 그 운동화가 실은 제게도 있었습니다.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그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제 친구 M도, J도, L도, K도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L의 운동화는 저의 운동화이기도 하면서 M과 J와 L과 K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시절 L의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가 몇 켤레나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L의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  

- p.216~217

 

이 이야기들 속에서 김숨은 묻는다. 그 운동화들, 즉 '우리 모두'의 운동화였던 그 운동화들은 어디로 갔는가, 라고. 단지 L의, 그러니까 이한열의 운동화가 아니라, M의, J의, L의, K의, 그러니까 수많은 '나'들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그 운동화는 어디로 갔는지 말이다. 물론 김숨은 이때 단지 운동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86학번인 이 익명의 사내가, 하루종일 수없이 누군가를, 때로 자신을 혐오하다가도 체념하게 만드는, 각종 지긋지긋한 일들에 시달렸을 이 사내가 겨우 한숨 돌리는 마음으로 지하철 안에서 신문을 펴들고 그 안에서 우연히 이한열의 운동화를 보고, 주저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 긴 메일을 쓰게 만들었던, 그가 가졌던 궁극적인 의문이 이 메일에는 들어있다. 그 운동화가 유행하던 시절에 있었던 그 무엇인가, 그 '무엇인가'는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어쩌면 지금의 M도, J도, L도, K도,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가지고 있을지 모를 그런 의문.

 

다시 말해서 김숨은, 그녀가 만들어낸 이 허구의 이야기들, 그러나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단지 끄집어냈을 뿐인 이 이야기를 통해, 이 소설이 단지 역사적인 이야기로만 읽히기를 바랬던 것 같지는 않다. 즉 김숨은 이한열의 운동화를 단지 역사적 유품, 혹은 기념물로만 보기를 원치 않아 보인다. 복원된 이한열의 운동화를 보면서, 단지 어떤 역사적인 가치로 그것을 박제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개인들이 그 '무엇인가'를 각자 끄집어내어 복원하기기를 이 소설은 바라고 있다. 물론 그것은 간단하지 않다. 그 부서진 '무엇인가'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복원하는 것은 대체로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복원은 파괴 혹은 손상과 거의 동일하다.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무엇인가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손상시키고 파괴한 기억을 먼저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 속 '나'가 소설의 중반이 넘도록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기를 주저하는 것, 그리고 그의 운동화에서 유기물이 부패하는 냄새를 맡는 것은 아마도 그것에 맞닿아 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 복원을 결국 회피할 수 없다. 그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이 '이한열의 운동화'가 아니라 'L의 운동화'인 것은 어쩌면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단지 이한열의 운동화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익명의 L의 운동화이기도 했고, M이나 J, 혹은 K의 운동화, 즉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마음 속 어딘가에 이제 부서진 무엇인가를 품고 있다. 복원이 필요한 그것은 무엇이며, 복원이 된 그것은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의 한 형태는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이 아닐까. L의 운동화가 복원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그것을 본 '그녀'는 말한다. 지금도 꿈을 꾼다고. 아들의 발에 운동화를 신기는 꿈, 그리고 그런 자신이 쪼개져 있는 꿈. 그러나 그 꿈은 조금 형태가 달라져 있다. "셋이요.....아들의 왼발에 오른짝 운동화를 신기는 나와......그런 나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나.....그리고 그런 나를 심판하듯 똑똑히 지켜보는 나......그렇게 셋이요."(p.264)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런 '나'들이 있지 않을까. 잘못된 무엇인가를 택하는, 혹은 잘못된 무엇인가를 행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나. 여기에 이제 또다른 '나'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나를 심판하듯 똑똑히 지켜보는 나. 그 '나'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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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어떤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랐다.

 

대학을 다니면서 두 번째인가, 세 번째 집회를 나갔던 날의 기억. 집회의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커져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들은 어느덧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학교보다 시내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이상한 흥분감과 기대감, 그리고 불안감이 교차하는 사이, 점차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오늘 백골단이 나타날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사수대를 결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경험이 없던 1학년 학생들은 많이 불안해했고, 그 중의 하나였던 나는 아마도 더 불안해했던 것 같다. 내 불안한 눈빛을 읽었는지, 늘 우리들을 이끌고 다니던 선배 하나가 말했다. "야, 너는 여기 사람들 가방 다 모아서 집에 가있어. 가방 매고 뛸 수는 없잖아. 너는 여기서 집도 가깝고."

 

나는 선배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을까, 아니면 쉽게 머리를 주억거렸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크고 작고 형태도 다양한, 여러 색이 울긋불긋하게 섞여 있던 가방들을 어깨에 매고, 손에 들고, 머리에 이고 그렇게 나는 지하철 몇 정거장을 거쳐 집으로 갔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가방들을 억지로 가지고 집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지하철 보관함에 가져다 두거나, 가까운 카페 같은 곳에 가지고 갔어도 되었을텐데. 나는 그렇게도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까. 바보 같은 일이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을 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닐까. 나는 집으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열패감과 안도감이 교차했을까. 아니면 아무런 생각 없이 집에 어서 빨리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까.

 

몇 시간이 지난 후 중간에 무리가 산산이 흩어졌는지, 혹은 무엇인가에 쫓겼는지, 아이들은 하나 둘 씩 우리 집 근처로 오거나, 드물게 전화를 해왔다. 오늘은 가지러 갈 수 없으니 나중에 찾아가겠다거나, 내일 학교로 가지고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집 근처로 왔고, 나는 하릴없이 그 때마다 가방을 들고 그들을 만나러 가야만 했다. 땀에 젖은 아이들의 얼굴은 번들거렸고, 지쳐보이기도 했지만, 별 거 없었다며, 단지 열심히 뛰기만 했다고 웃으며 말하는 아이들의 입가에는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다른 것이 달려 있는 듯 했다. 같이 시내로 나갈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무엇인가가.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것이 아닐까. 그들이 가방을 들고 나타났던 나에게서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무엇이었을까. 나야말로 쪼개졌으면 좋겠다. 가방을 들고 나타난 나와 가방을 찾으러 나타나는 나로. 그리고 어쩌면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나로. 

 

나는 무엇을 복원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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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발과 가방 … 우리 모두가 가지는 감상(感傷)과 계시(啓示)에 대해서
    from 공음미문 2016-09-08 23:17 
    벌써 20년 전이 되었습니다. 한여름 우울 속에서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었던 일이. 그 책에서 강렬히 남았던 몇몇 인상 중 하나가 ‘잃어버릴 뻔했던 한열이 조카의 고동색 샌들 한 짝’입니다. 길에 버려진 많은 것들 중 신발은 유독 사람을 애잔하게 합니다. 머리끈이나 볼펜을 발견할 때와는 분명 다른 기분입니다. 맨발로 돌아가진 않았을 텐데, 대부분의 버려진 신발은 ‘이젠 쓸모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멀쩡한 신발을 볼 때엔 ‘사고’를 떠올리게
 
 
희선 2016-07-08 0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L이 이한열이라는 걸 알아도 L은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무언가를 되살려야 하는... 저는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네요 아니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느 날 아쉬웠던 일, 어느 날 잘못한 일... 이렇게 말하니 뭔가 생각날듯 말듯하네요 그런 건 아주 가끔 생각나기도 해요 잠깐 생각하고 말기도 합니다 어제도 걷다가 오래전 일을 잠깐 떠올렸네요 왜 그랬지, 하는... 그런 일 나중에는 안 하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르게 할지도...

둘로 나뉜 자신이라고 하니 은희경 소설 《새의 선물》이 생각나네요(여기 나온 건 아이가 어릴 때 그랬지만, 어린데 그러다니 싶네요 아니 어려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건 생각나지 않고 그것만 생각납니다) 둘로 나뉜 자신을 말하는 게 그것만은 아닐 테지만, 여기에는 하나가 더 나오는군요 셋이라니... 꿈속의 꿈, 세번째는 잠자면서 그걸 바라보는 자신...

사람은 좋았던 것보다 안 좋은 걸 더 잘 기억하기도 하네요 살면서 좋았던 일도 있었다는 걸 기억하라는 말도 있고, 잘못한 걸 더 잘 기억해내라 하는 말도 있으니 둘 다 맞는 말이겠죠 어떤 일이냐에 따라 다를 것도 같네요


희선

맥거핀 2016-07-08 14:10   좋아요 2 | URL
인간의 기억이란 대체로 불완전하고, 또 매우 스스로를 속이기 쉬운 것이라서, 대체로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잊어버리고는 합니다. 자신에게 좋지 않은 기억, 혹은 어떤 거대한 불행과 같은 것들 말이죠. 기억을 억압하는 것,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자꾸 들춰내는 것은 어떤 고통을 동반하기에 그렇겠지요. 작은 사건도 그렇고,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 같은 것들도 사람들이 자꾸만 더 이야기하지 마라,하는 것도 그런 것과 연관이 있겠죠.

하지만 어떤 사건은 기억해내는 게 아주 고통스러울 지라도, 기억해야만 하고, 다시 되살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 되살려야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이 복원가의 질문이고, 그리고 또 우리모두가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은 왜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긴 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모두들 어딘가 하나쯤은 복원해야 하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억이라는 것을 너무 믿지 말고 말이죠.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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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떠올렸다. 단지 이 소설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마약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소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시카리오>를 보면 언뜻 영화 본편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한 가족의 모습이 본 줄거리 사이사이에 등장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가족이 영화의 본편과 상관이 있음은 물론, 전혀 생각지 않았던 질문까지 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는 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아마도 예전의 리뷰에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영화의 마지막, 어디선가 들려오는 총격 소리에도 그다지 크게 놀라지 않고 아이들의 축구 시합을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마약으로 인한) 만연한 범죄에 이제는 무감각해진, 어쩌면 그것을 당연한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는 도시 후아레즈는 거의 악마의 도시처럼 묘사된다. 거리 곳곳에서는 끊임없이 총격 소리가 들리며, 길 한복판에서 총격전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별로 놀라지 않으며, 경찰들이 대규모로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도 사람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일상이며, 그 모든 것에 무감해진 것일까. 그런데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고 나니, 어쩌면 내가 영화를 잘못 이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아야하는 것은 그 무감각한 표정 이면에 깔린 공포, 그 공포에 담긴 살고싶다는 외침이 아닐까. 그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아가기 위해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은 척 하는 법, 혹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 자주 언급되는 콜롬비아에서 마약 카르텔이 지배하고 있던 '고난의 10년'의 시간에서.  

 

특별한 시대였어요. 그렇잖아요? 폭탄이 누구에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대.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으면 다들 걱정을 하고. 자신이 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어디에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가 있는지 알아야 하고. 공중전화가 없으면 전화를 빌려 쓸 수 있는 집을 알아내서 그 집 문을 두드려야만 하고. 우리는,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죽을 가능성에 매달리고,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가 죽은 자들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들을 안심시키는 일에 매달리면서 살아야 했죠. 우리는 각자 집안에서 지냈죠. 기억해요? 공공장소는 피했어요. 친구의 집, 친구의 친구의 집,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의 집, 어떤 집이든 공공장소보다는 선호했죠. 

- p.313~314

 

소설의 시작은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동물원에서 도망친 하마, 그러니까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만든, 이제는 쇠락한 오래된 동물원에서 도망쳤다가 죽은 하마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주인공의 회상에서 시작한다. 그가 그것에서 떠올린, 그에게 고통을 준 한 남자, 리카르도 라베르데와의 오래전 만남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는데, 우리는 적어도 이 서두에서 한 가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주인공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사건은 오래 전 일어난 사건이며, 주인공은 이제 그것을 되돌아보며 서술하고 있다는 것.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고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제 그 사건이 주는 고통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서술할 수 있을 때는 오로지 그것에서 벗어난 이후일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결국 기억이라는 행위를 통해 고통,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나 사실 이 소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자신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준 한 사람의 삶을 읽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드리운 고통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로 읽으면 아름답고 좋으련만, 단지 그렇게 읽을 수만은 없다. 그것은 소설의 마지막이 명징하게 보여주는데, 주인공에게는 이제 아내가 떠난 텅 비어 있는 집만 남아있다. 그것에서 어떤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그것은 불안한 마무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리카르도 라베르데나 그의 부인 엘레나 프리츠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부부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혹은 그들이 무엇을 극복했다,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를 극복했다거나, 이겨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 소설에서는 이것을 이야기한다.  

 

지금 이 순간에는 여러 상황들의 연계 고리, 또는 범죄적인 오류들의 연계 고리, 또는 다행스러운 결정들의 연계 고리 하나가 있는데, 그 연계 고리의 결과는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내가 그것을 인지한다 할지라도, 비록 그런 일들이 발생해서 내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불편한 확신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결과들을 정확히 예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손해를 벌충하고 최대한의 이익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연계 고리가 우리를 현재 상태의 우리로 변화시켜버렸다는 사실을 누군가 우리에게 알려줄 때면 왠지 모르게 공포감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런 계시를 줄 때,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대해 행사하는 통제력이 적거나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   

- p.290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몇몇 장면이 이 소설에는 있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이 영화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장면인데, - 사실 이 소설은 영화적인 묘사가 들어가 있는 부분이 많다. 이 장면도 물론 영화로 만든다면 빛을 발할 장면이리라. - 엘레나 프리츠가 장마를 맞은 집에서 갑자기 찾아온 마이크 바비에리를 만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가득한 불안감과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평화를 가장하는 엘레나와 마이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깨뜨리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총성. 이 장면은 뒤의 숨겨진 이야기를 정확히 이미지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삶은 그렇게 가득한 불안감 위에 띄워진 가장된 행복과 같은 것이었음을 말이다. 엘레나는 직감적으로 그 모든 것에서 불안감을 감지하지만, 그것에서 사실 엘레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리카르도나 마이크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 연계 고리 안에서 결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이 현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에게 놓여진 그 녹음이 상징하는데, 그들이 아무리 그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듣는다 할지라도 이미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모든 일이 벌어지는 순간에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엘레나가 그 소음을 같이 듣는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을까. 아니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위의 인용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그것의 한 예는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했던 행위가 보여주지 않을까. 즉 그것은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리카르도는 자신이 (비록 전직조종사라도) 그 사건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그 녹음을 입수해서 들으려 애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슬픔과 고통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중 화자 '나'(얌마라)도 마찬가지이다. 얌마라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했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에 휘말렸고, 그것을 단지 불운한 일로 치부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었지만(그리고 아내도 그것을 원했지만), 그는 사건에 숨겨진 부분을 알기를 원했고 그것을 알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며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것이 아마 이 소설의 태도일 것이다. 사실 삶의 많은 것은 우리에게 결코 통제권이 주어지지 않지만, 우리가 단지 그 통제력이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는 것. 소설의 이야기는 늘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얌마라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리카르도 라베르데를 우연히 처음 만났을 때부터이며, 마야가 리카르도와 엘레나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그 기원에 있는 것, 즉 리카르도의 할아버지 훌리오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부터이다. 아무 연관이 없어보이는 그 처음으로 거슬러 오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연계 고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거슬러 올라가 그 고리의 끝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연계 고리의 반대편 끝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그 연계 고리의 다른 반대편 끝을 살펴보는 것은 결코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그것들이 지닌 효력에 대적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정교하게 짜인 이야기들을 통해 그 연계 고리들을 흥미진진하게 끝까지 바라보며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삶에 깊숙히 박혀 있는 공포와 그 공포를 이겨내려는 미약한 몸짓이 지닌 숭고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참 좋은 소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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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6-1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많이많이 늦었네요.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이렇게 마지막 리뷰 올리고 정리글 같은 거 쓰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안하는 모양이군요...

2016-06-15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0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8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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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홀. '짝이 없이 혼자뿐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오기는 홀로 살아남았다. 아내와 함께 떠나던 여행길. "노면은 부드러웠고 제동 거리는 짧았고 힘껏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는 속절없이 미끄러져 나갔다. (p.31)" 옆자리에 탔던 아내는 죽고, 오기는 몸을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말을 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잃었지만, 어쨌든 그래도 살아남았다.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아내의 어머니, 즉 장모 뿐이다. 오기의 엄마는 오기가 어린 시절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독선적이었던 데다가, 오기가 제 돈을 뜯어내려는 속셈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오기의 아버지 역시 오기의 결혼 3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 아내는 죽었고, 그의 곁에서 불구의 몸이 된 그를 도와줄 사람은 장모 뿐이다. 

 

그러나 단지 그가 '홀'로 남았다는 것은 어떤 눈에 보이는 관계의 측면에서만은 아니다. 오기는 고립되어 있다. 편혜영은 이 소설을 거의 오기의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오기가 사고 후 말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설정을 통해 이를 효과적으로 가중시키는데, 오기는 이 소설을 통해 장모를 비롯한 간병인, 물리치료사, 친구 등등 어느 누구와도 거의 단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목소리를 잃었다'는 물리적인 측면에서만 비롯된 문제는 아니다. 소설의 중후반부 오기가 필담으로라도 소통이 가능해진 순간에서도 여전히 어떠한 대화나 소통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들의 대화는 어딘가 어긋나 있고, 그 중 어느 누구도 오기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게 단지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홀. hole. 구멍.  

그들은 오래전부터 대화하지 못했다. 오기와 아내. 교수로서 학교 일로 바빴던 오기는 아내가 가진 공허감이나 부재감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해할 생각이 없었고, 오기는 학교와 자신의 친구들과의 관계, 그리고 허위에 갇힌 자신만의 세계에, 아내는 글을 쓰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정원을 가꾸는 또다른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각자의 구멍에 들어가 있었다. 대화는 없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을 대화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목적지가 30킬로미터 정도 남았을 무렵 아내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쓰고 있던 것을 최근에 완성했다고 했다. 아내가 이런 화제로 이야기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래? 축하해. 뭘 썼는데?"  

운전에 주의하며 오기가 물었다. 도로에는 덩치 큰 차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좀 특별한 얘기야. 한 인간에 대한 고발문이거든."  

"지난번에 쓰고 있다던 그 고발문?"  

오기가 아내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인간이 어떻게 속물이 되는지, 그 관찰기라고도 할 수 있어."  

아내가 갑자기 웃었다. 오기는 운전에 집중했다. 아내의 말에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오기를 화나게 하는 게 아내의 목적이라면 오기는 오로지 여행지에 닿고 싶었다.   

- p.181~182

 

그의 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모와의 관계는 어떤가. 오기의 기억 속에서 장모는 속을 알 수 없는 꺼림칙한 사람이다. 편혜영은 여기에 흥미로운 설정을 더하는데, 장모가 사실은 일본인(혼혈)이라는 부분이다. 오기가 처음 장모의 집에 갔을 때의 에피소드가 이를 잘 말해주는데, 오기는 집안에 유골함을 두는 일본인의 습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일반적인 자기로 착각한다. 오기에게 장모는 결코 알 수 없는 자신만의 어두침침한 구멍에 들어가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제 장모는 아내가 죽은 후 엉망이 된 정원에 다시 구멍을 판다. 아내처럼. 아니, 아내가 팠던 구멍들보다 더 깊게.

  

홀+er. 구멍을 파는 이들. holer 혹은 horror. 호러.   

(아니면 '홀'이라고 발음하며 거울을 한 번 쳐다보라. 영화 <스크림>에서 이와 비슷한 얼굴을 본 것 같지 않은가?)  

장모는 다시 구멍을 파고 있다. 왜 장모는 구멍을 파는가. 나무를 심기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 묻는다면 무엇을 혹은 누구를 묻는다는 말인가. 편혜영의 <홀>은 후반부로 접어들면 접어들수록 점점 호러 무비가 된다. 오기는 집안에 갇혔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탈출은 쉽지 않다. 도대체 장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내, 그러니까 자신의 딸이 죽은 것에 오기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오기의 피를 말려 죽이려는 것일까. (이 문장은 전적으로 <곡성>의 영향이다.) 혹은 장모가 오기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은 나이가 들어 그 모든 것이 벅차기 때문인걸까. 아니면 장모가 아내가 쓴 '고발문'을 읽었기 때문인걸까. 오기는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고립된 채로 갇혀 있다. 좁게는 불구라는 육체의 감옥에, 넓게는 오기가 싫어하던 덩굴로 둘러쳐진 집에. 방에서 대문까지 가기 위해서는 아내가 지배했던, 이제 장모가 지배하는 넓은 정원을 거쳐야 하며, 이제 게다가 그 정원에는 곳곳에 장모가 파놓은 넓은 구멍들이 있다. 

 

홀. whole. 전체의, 모든, 온전한.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볼 필요는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오기의 오해 혹은 망상이 아닐까. 과연 장모는 그를 고의로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 다스케테구다사이. 장모가 짧게 중얼거렸던 그 말. 살려주세요 혹은 도와주세요. 어쩌면 장모도 너무나 많은 삶의 짐 속에서 이제 오기라는 짐까지 떠맡고,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런 질문. 과연 소설을 읽는 우리는 오기의 이 모든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에 더해지는 조금 무서운 질문. 과연 아내의 죽음은 단순한 교통사고일까. 이 소설은 어쩌면 오기의 이름 그대로, 誤記 즉 잘못된 기록이 아닐까.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편혜영의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소설을 읽는 우리는 철저히 오기의 시점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홀(whole), 그러니까 전체상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물론 아마도 그것이 실제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는 방식과 유사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삶의 전체상을 들여다보려고 아무리 애쓴다한들, 결코 그것을 완전히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것은 오기가 전공하는 지도와 닮았다. 지도는 세계를 표현하지만, 어떤 지도도 결국 세계를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지도는 오로지 세계의 불완전한 유사물일 뿐이었다.   

 

지도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지도만으로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중략) 정확히 알 수 없고 하나로 분명하게 해석될 수 없으며 온갖 정치적 의도와 편의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세계라면 지금 이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지도는 실패를 통해 나아졌다. 그 점에서는 삶보다 훨씬 나았다. 삶은 실패가 쌓일 뿐, 실패를 통해 나아지지는 않으니까.   

- p.75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홀, 구멍 속에서 자신만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주 가까운 누군가라도 해독할 수 없는, 오로지 자신만이 읽어나갈 수 있는 지도. 그러나 그 지도는 어떤 지도라도 결코 완전한 전체상을 그려내지 못한다. 모든 지도는 왜곡된 지도이다. 각자의 구멍 속에서 자신만의 왜곡된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어떤 삶의 전체상에 이르지 못한다.

 

적어도 편혜영이 보는 세계는 그런 것이 더욱 심화된 세계인 것 같다. <홀>의 오기와 아내는 편혜영에게 2014년 이상문학상 수상을 안겼던 그녀의 단편 <몬순>에 등장했던 부부의 (조금 더 절망에 가까워진) 다른 버전인 것 같다. <몬순>에서 편혜영은 관계의 단절, 소통 불가능한 삶에 빠져있는 부부의 모습을 그렸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어떤 여지를 남겼다. 소설의 말미에서 남편이 아내가 있는 아파트에 들어갈까 망설이는 동안 아파트의 불은 켜지고, 다시 불이 꺼지고 켜졌다. 그러나 <홀>의 오기에게는 이제 아무런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다. 소설의 말미에서 아내는 이미 죽었고, 오기는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있다. 그리고 오기는 그제서야 운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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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5-27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요즘 글 올리는 시간을 보니 다 새벽 1시 이후로구나..

2016-05-27 0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31 0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끼 2016-05-2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우와... 라임 멋져요 ㅎㅎ 언어를 자유자제로 상상하는 맥거핀님의 상상력에 감탄..

맥거핀 2016-05-31 02:55   좋아요 0 | URL
그냥 말장난입니다. 말장난에 `현혹`되지 마시고, 내용을 봐주세요. ㅎㅎ 아무튼 고맙습니다.^^
 

    

 

 

(경고합니다. 영화 <곡성>에 대한 각종 스포 있습니다.)

  

  

 

1.  

<곡성>을 본 후 그 리뷰들이 궁금해서, 인터넷에 '곡성'이라고 검색어를 넣으니, 친절하게도 '곡성 결말', '곡성 줄거리'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그만큼 <곡성>의 황량한 결말의 의미나, 줄거리의 의문점들을 찾아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일게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 쓰는 방법들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관객의 머리 속을 최대한 복잡하게 만들어서 관객에게 그 영화의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게 하고, 다시 그것을 확대 재생산 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홍보에는 결정적인 힘이 될 테니까. 그러나 <곡성>에 대해서 그런 질문을 하게 하고, 정답을 알게 하는 것은, 다른 결에서 참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곡성>의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그 결말에 대해서 더욱 생각해보게 되면 될 수록 그 영화를 보고나온 관객은 더 황량해지기 때문이다.

      

2.   

사실 <곡성>은 영화를 본 후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넘쳐나는 영화이다. 그것은 영화 내부적인 면에서도, 혹은 외부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그럴까. 영화의 개봉을 전후해서 이른바 '스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어떤 결에서 보면, 이 영화는 스포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은 사실 어떻게 해석해도 그다지 틀리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야기의 여러 갈래를 세세하게 늘어놓을 생각은 없지만, 예를 들어 인터넷 누군가의 단평대로 이 영화를 그저 경찰관 종구(곽도원)의 한바탕 꿈이라고 해도 안될 것은 없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이고, 불친절함을 넘어서 여러가지 반대되는 해석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이야기를 이끌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곡성>은 영화 시작부의 씬을 통해 이미 관객에게 일종의 경고 혹은 힌트를 준다. 던져지는 미끼, 넘쳐나는 떡밥.

 

3.   

그런 장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물론 무당 일광(황정민)이 '살을 날리는' 굿을 펼치는 장면일 것이다. 종구의 딸 효진은 '인간이 아닌' 어떤 존재인 외지인(쿠니무라 준)에 의해 거의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일광은 그런 외지인을 없애기 위해 굿을 벌인다. 그리고 장면들은 교차된다. 굿이 더 활기를 띠면 띨수록 외지인은 거의 죽음 혹은 소멸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이며, 아이는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 과정을 견뎌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관객은 믿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뒤집힌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관객은 묻게 된다. 아니, 그러면 그 장면들은 다 무엇이지? 친절한 홍진씨는 다른 인터뷰에서 이 장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 장면은 외지인에게 살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효진에게 사실 살을 보내는 것이었다고. 이것은 사실 꽤 이상하다. 이런 설명은 '감독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내부적으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교차편집 어디에서도 그것은 조금이라도 암시되지 않았다. 관객은 어리석거나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보통의 영화문법을 해석하는대로 일상적인 해석을 했을 뿐이다. 아니 도리어 감독의 말이 맞다면 이것은 잘못된 씬의 설계이다. 그 설명대로라면 이 교차편집에서 외지인이 그런 식으로 들어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의 잉여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맥락에 따라 포장되었지만, 사실 포장지를 풀면 다른 것이 들어가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흔히 낚시, 혹은 떡밥이라고 부른다. 

 

4.  

이런 식의 어떤 낚시들, 떡밥들이 이 영화에는 넘쳐난다. 그러니 영화가 끝난 후 어찌 이야기들이 넘쳐나지 않을 수 있을까. 상당수의 것들은 맥락에 따라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어보면 다른 것이며, 다른 나머지 것들은 그런 맥락조차도 없다. 저렇게 해석해도 이야기가 되고, 이렇게 해석해도 이야기가 안될 것은 없다. 뭐 좋다. 떡밥이 맛있다면, 그리고 그 떡밥을 먹고도 낚시줄에 걸리지 않고 다시 물로 돌아와 즐겁게 헤엄치며 배를 두드릴 수 있다면 그 떡밥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영화가 뭔가 꺼림칙해 보이는 것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떡밥을 삼키고, 이제 마지막 떡밥을 삼키려고 할 때, 그러니까 영화로 말하자면 마지막에 무엇인가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처럼 보였을 때 생긴다.

 

5.  

영화에서 굳이 메시지를 끌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영화의 포스터에도 들어있는 저 여덟 글자, 그러니까 '절대 현혹되지 마라' 정도가 될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들의 파멸은 그들의 현혹에서 비롯되었으니까. 마지막에 나홍진은 이상해보이는 두 개의 만남을 이번에도 기어이 교차편집한다. 종구는 무명(천우희)을 만나고, 사제 이삼은 그 외지인을 만난다. 그저 종구가 외지인을 만나는 것이 영화적으로는 훨씬 말이 되지만(그 개 앞에도 벌벌 떨던 이삼이 그 밤중에 외지인을 찾아가는 게 많이 이상해 보이지만, 그 정도는 익스큐즈하자. 그런 것도 익스큐즈 안하면 이 영화에는 익스큐즈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홍진은 억지로라도 그런 구도를 만들어서 다시 교차편집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두 가지의 의심을 교차하며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종구는 무명(천우희)을 믿지 못하고, 무명의 팔을 뿌리치며, 이삼은 외지인이 악마라는 확신을 끝내 가지지 못하고 의심한다. 이 두 개의 의심, 혹은 두 개의 현혹. (물론 이 영화에는 이 현혹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초반부터 계속 꾸준히 쌓는 장면들이 있다. 반복되는 현혹과 의심들. 외지인을 의심하는 종구의 생각은 사실 명확한 증거에 기초했다기보다는 어떤 근거없는 의심들에 더 가깝다.)

 

6.  

그래서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종교적 도그마에 대한 공격을 읽고(사실 의심 속에서 종교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니),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영화 그 자체'를 읽는다. 이 중 조금 더 재미있어 보이는 것은 '영화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실 영화란 현혹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영화는 사실 거대한 속임수이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어떤 이야기를 보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의 모든 일면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오로지 감독이 보여주고 싶어한 것만을 본다. 물론 <곡성>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는 이 영화는 각종 현혹을 차례로 전시하며,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믿게 하거나, 혹은 믿도록 암시한다. 위에 든 일광의 굿 장면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이야기의 흐름상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게 한다. 예를 들어 지금 흔히 나오는 얘기대로 이 영화에 어떤 '반전'이 존재한다고 이야기된다면, 그것은 그 현혹이나 암시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도 된다.

 

7.   

그것은 사실 이상한 자기모순이다. 현혹되지 말라고 하면서, 일부러 현혹시키는 것 말이다.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기본적으로 현혹시키는 것임을 전제하더라도 이상하다. 일전에 영화를 마술과 비교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영화와 마술이 통하는 점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건, 마술을 보는 이들이건, '이것이 현혹시키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미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현혹을 어떻게 잘 구축하는가에 그 공연(영화나 마술)의 성패가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 게임은 누군가는 속이고, 누군가는 속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데에서 생겨나는 쾌감을 즐기는 게임이 아니고, '자 이제부터 속입니다'라고 말한 후, 정해진 규칙 내에서 그 속임의 정교함을 최대한 즐기는 게임이다. 그런데 나홍진의 <곡성>은 그 규칙들을 거의 지키지 않을 뿐더러, 그 속임의 세공은 (의도적으로) 허술하다. 이야기를 어떻게든 짜맞춰도 이야기가 된다는 것은, 역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짜맞춰도 서사의 빈공간이 생겨난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런데, 게다가 이 영화는 거기에 이 메시지마저 덧붙인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8.  

그 결과물이 바로 인터넷에 넘쳐나는 수많은 각종 해석들이다. 수많은 근거가 불확실한 해석들, 흔히 말하는 '스포'들로 넘쳐나는 이 영화에 대한 글들. (물론 내가 쓰는 이 글도 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재생산되는 방식은 영화의 초반부에 외지인에 대한, 혹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방식을 닮았다. 무명은 이 모든 것이 종구의 의심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말했다. 사실 '의심의 문제'에서, 결국 그것이 실제로 진실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것은 '의심'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방식, 그리고 그것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글들은 그 의심들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을 닮았다. 영화 속 그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을 이야기했고, 그것을 어느 틈에 믿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영화 밖의 우리들은 결코 우리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느 틈에 맞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영화 <곡성>은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판을 짜 놓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일광의 대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네, 낚시할 때 뭐 어떤 게 걸려나올지 알고 하는가? 그놈은 낚시를 하는 거여. 뭣이 딸려나올진 지도 몰랐것제." 그런데 나홍진 감독은 뭣이 딸려나올지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9.  

마술사들이 마술을 하기 전 종종 덧붙이는 말이 있다. "절대 속지 마시고, 눈을 크게 뜨고 보세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바로 그렇게 말하는 제스처가 그 속임(현혹)의 일부라는 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마술사의 입을 쳐다보는 순간, 혹은 그 소리에 눈을 더 크게 뜨려고 눈을 비비는 순간을 이용해서 마술사는 무엇인가를 감추거나, 뒤바꿔놓는다.

 

현혹되지 말라고 하면서, 온갖 현혹을 점철하고 있는 이 영화 <곡성>은 속지 말라고 하는 마술사의 그 외침을 닮았다. 우리가 눈을 더 크게 뜨려고 노력하는 순간, 이 영화는 무엇을 뒤바꾸고 있는 것일까.

    

 

덧.  

사실 이 글에서 나도 한가지 낚시(?)를 했다. 위의 1은 예전에 <황해> 리뷰에서 썼던 문장들인데, 그대로 <곡성>으로 제목만 바꿨다. 이것은 나홍진의 영화가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 모두들 <곡성>에서 텅빈 냉장고 문을 열어보이며, 이것이 증거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해주길 바란다.) 이야기에서 결락을 만들고, 이야기를 괜히 비트는 것은 이미 <황해>에서부터 보던 방식이며, 예를 들어 영화의 시작부에 영화의 전체 내용을 암시하는 글을 삽입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 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유령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린 마태복음의 한 대목. 원래 인간은 쉽게 현혹되고, 쉽게 미망에 사로잡히는 존재들이다. 그렇게 수련을 쌓은 제자들도 그런데, 우리 범인(凡人)들이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개인적으로는 현혹되지 말라고 하며 각종 현혹을 남발하는 영화보다는, 어쩔 수 없이 현혹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인간에 대해 묵묵히 그려나가는 영화를 보고 싶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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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7 0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31 0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7 0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모신 하미드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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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모신 하미드의 소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이하 <떠오르는...>)은 확실히 그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이 소설들에는 어떤 '장치'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이야기 내용적인 면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소설 내에 긴장감은 그 외에 다른 것에서 더 강하게 배어나온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호명되는 '당신'이라는 존재인데, 이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점점 한편으로 궁금해지는 것은 이 소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지난 삶을 늘어놓는 화자 파키스탄인 '찬게즈'가 아니라, 이 반대편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청자 미국인 '당신'이다. 그리고 처음과는 다르게 소설은 점점 마지막으로 갈수록 이 긴장감 쪽에 서서히 무게를 두기 시작한다. 이 듣는 '당신' 미국인은 누구이며, 여기에 왜 왔으며, 왜 '찬게즈'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가. 이 소설은 결국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에야 책을 읽는 '우리들'은 불현듯 깨닫게 된다. 이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찬게즈'가 아니라, 이 소설에서 결코 드러나지 않는 미국인 '당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신 하미드는 이 긴장감을 주는 방식을 이번 소설에서도 써먹고 싶었던 것 같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는 그것이 가상의 청자를 상정하여 그와 화자 사이에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방식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비틀었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일종의 자기계발서 같은 형식으로 만드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실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시아(파키스탄)에서 살고 있는 한 인물의 일생이지만, 그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동력을 그 이야기 내부에서 찾기 보다는, 자기계발서라는 외부의 장치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소설은 대니 보일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형식적으로는 퀴즈쇼에 나가서 문제를 푸는 자말의 모습을 비춘다. 그러나 사실 영화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자말의 퀴즈쇼가 아니라, 그 퀴즈쇼를 통해 자말이라는 인물의 삶의 역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떠오르는...>도 마찬가지이다. 자기계발서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의 '당신', 그러니까 한 남자의 삶의 역정이다. 사실 그것을 소설에서는 간단하게 알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의 '당신'은 결코 부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더럽게'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말이다. 소설의 제목에 원래 쓰인 단어는 filthy인데, 이것을 '더럽게'라고 번역하는 것이 조금은 다른 효과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더럽다'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것을 '대박 부자'라고 만약에 번역했다면, 조금은 다른 뉘앙스로, 어떻게 보면 이것이 도리어 풍자적인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사견으로는 여기에서 '더럽게'라는 것은 '쟤 드럽게(?) 돈 많어." 할 때의 '더럽게'에 조금은 더 가까운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의 주인공 '당신'은 결코 그 '드럽게 돈 많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각 장에 붙은 소제목들에서도 그런 면이 있는데, 소설을 처음 펼쳐들고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것은 이 소제목들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이상주의자를 멀리한다."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등의 정말 싸구려 자기계발서에 붙을 법한 그 소제목들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소제목들은 그렇게 붙어 있지만, 각 소제목들에서 그 주인공 '당신'은 그 소제목들을 결코 충실히 이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라는 소제목이 붙은 장에서 주인공은 사실 (짝)사랑에 빠지며, "스스로를 위해 일한다"라는 장에 등장하는 것은 그녀와 가족을 위해 일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며, "부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장에서는 부채로 인해 거의 끝장이 난다. 

  

그러므로 이 소설 역시도 어느 정도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비슷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내가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고 쓴 리뷰에서 그 영화에서 퀴즈쇼라는 장치를 빼면 사실 주인공 자말을 둘러싼 이야기는 (시쳇말로) 쌍팔년도 스토리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역시 사실 '자기계발서'라는 외피를 벗겨놓고 보면 거의 쌍팔년도 스토리에 가깝다고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단지 자본주의적인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파키스탄은 과거의 우리, 그러니까 쌍팔년도 혹은 그 이전의 우리가 겪었던 발전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로 보자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다른 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흔히 '쌍팔년도'라고 할 때에는 그런 뉘앙스가 거기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러니까 이 책을 읽는 한국의 독자에게는 이 책의 이야기가 어딘지모르게 익숙하다. 실제로 그런 세태를 겪어왔던 아니던 간에,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에 (경험으로, 혹은 미디어의 영향으로) 익숙해져 있으며, 따라서 이 소설의 주인공의 성공 스토리(사실은 실패 스토리)는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많이 봤다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아마 이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당신'이라는 표현 말이다. 왜 작가는 굳이 여기에 '당신'을 끌어들였을까.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의 자리에 왜 소설을 읽는 '당신'을 끌어들였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도 당신을 계속 호명하는 소설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소설에서의 '당신'은 이 소설의 '당신'과는 다르다. 그 소설의 시작은 '당신'이 미국인임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에 이 당신이 누구인지 혼동하지 않도록 장치의 특성을 설명해주면서 장치를 도입한다. 그리고 이 장치를 단지 장치로서 끝내지 않고 멋지게 역이용하면서,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훨씬 더 큰 무게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떠오르는...>은 조금 다르다. 이 '당신'은 자기계발서의 당신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주지하고 있듯이 이 자기계발서의 '당신'은 바로 그 자기계발서를 읽고 있는 독자 '당신'이다. 다시 말해서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의 '당신'은 사실 존재하고 있는 그 누군가, 어떤 이미지가 규정되어 있는(어떤 '전체상으로의 미국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고, 따라서 여기에서 '당신'을 호명하는 것은 어떤 테크닉에 더 가까웠다면, 이 <떠오르는...>에서 '당신'을 호명하는 것은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독자는 그 '당신'의 자리에 이미지로 규정된 누군가가 아니라, 소설을 읽는 누군가, 그러니까 바로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넣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 말이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에 냉소적이면서도, 결코 냉소적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내가 그런 비슷한 발전 단계를 거쳐온, 아니 사실은 그런 발전 단계가 아직 끝나지 않은 헬조선에 살고 있는 한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다른 경우를 상정해보자. 예를 들어 사실 이 소설이 주 타겟으로 삼았을 미국이나 유럽의 독자들에게는 어쩌면 이 소설이 재미있는 풍자 쯤으로 읽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풍자는 사실 그 풍자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웃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 풍자의 현실이 현재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그 풍자에 사실 온전하게 웃을 수 있을까. 웃을 수 있다해도 그것은 웃프다. 

 

아니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모신 하미드가 이 소설을 단지 서구의 독자들을 웃기기 위해서 썼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와 동시에 모신 하미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작가는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는 중간자로서 미국인에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그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내내 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계속 듣는 '당신'에 대한 의식이 있다. 그러나 이 <떠오르는...>은 조금 다르다. 이 소설에서는 더 이상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청자 '당신'은 없다. 대신에 이 소설은 당신을 지우고, 이야기하는 '나'의 위치에 당신이 서볼 것을 권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모신 하미드는 이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어때? 우스꽝스럽지?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이 바로 이 위치에 선다면 당신이라고 크게 다를 수 있을까? 이것도 하나의 삶이고, 그냥 우리는 '이렇게,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는 거야.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는 부끄럽지 않아, 당신이 비웃거나 무시할 권리는 더 없고 말이야. 뭐 그런 거라고 할까.

 

다만, 그래도 나는 마지막으로 이것 한 가지는 이야기하고 싶다. 모신 하미드에게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그가 만든 이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그렇게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이야기가 미국에서 태어난 후, 파키스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컨설팅 회사에서 일했던 작가 본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가상의 누군가가 아니라, 계속 이 화자와 작가를 겹쳐놓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의 '당신', 그러니까 남자는 모신 하미드와는 조금은 더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누군가는 모신 하미드가 만들어낸 누군가는 될 수 있지만,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모신 하미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신 하미드는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 자꾸 이 책을 읽는 당신이 '당신'이 되어보라고 권한다. 자신은 그렇게 된 적이 없으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되어보라고 권하는 이것은 온당한가? 

 

아..자기계발서라는 것이 원래 그런 거라고요? 뭐 그렇다면 할 말은 더 없지요. 단지 자기계발서를 덮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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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5-10 0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나도 작가의 영향으로 `당신`을 호명하는 리뷰를 써볼까,하고 실제로 몇 줄을 썼지만, 쓰는 도중에 왠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만뒀다. (그러니까 사실 그렇게 쓰는 것은 상당히 내공을 요하는 일이다.)

다르게 써보고도 싶지만, 너무 졸립기도 해서 그만 이런 딱딱한 리뷰를..졸립다. 졸립다.

아무튼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새벽에 살포시 몰래 올려놓고 갑니다.

cyrus 2016-05-10 14:08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다른 형식으로 쓰는 시도를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

맥거핀 2016-05-10 17:48   좋아요 0 | URL
다음 번에 한잔 먹고 시도해보겠습니다. 맨정신에 하려니 힘들더군요.^^

2016-05-12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27 0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6-07-1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는 이게 일종의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처럼 느껴지데요.

맥거핀 2016-07-19 00:49   좋아요 0 | URL
중간자로서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부인할지 몰라도 그의 사고방식은 미국인에 더 가까워졌다고 봐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