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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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의 소설을 읽다 보면 꼭 술이 땡긴다. 와인에 카나페 같은 거는 말고, 술은 무조건 소주로. 안주는...조금 먹기에 번잡스러운 거, 예를 들어 뼈 있는 닭발 같은 것으로 말이다. 뼈 있는 닭발을 먹으려고 손에 비닐장갑을 끼우다보면 잘 들어가지도 안거니와, 이렇게까지 해서 닭이라는 녀석들의 발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먹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데,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솜씨좋게 장갑을 끼우려는 내 모습을 보고 자괴감이 들기 마련이니까.


그것은 김금희가 <보통의 시절>에서 그린 한 풍경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어릴 적 부모를 잃은 사남매는 성탄절에 모였다. "언니네 집도 아니고 우리만의 추억이 담긴 장소도 아니고 맛집 같지도 않"은 구리의 고향삼계탕집에서. 사오십대가 훌쩍 넘은 그들은 이제 거의 망한 삼계탕집에서 남은 마지막 닭과 너무 익어서 군내가 다 나는 열무김치를 먹고, 김대춘을 만나러 갈 참이다. 김대춘이 누구인가. 김대춘은 보일러실에 불을 질러 부모님이 운영하던 목욕탕을 전소시키고, 형을 살고 나온 노숙자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삶을 망가뜨렸다고 믿는 그 김대춘을 만나러 간다. 그의 집 주소가 번듯한 아파트로 되어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만나서 도대체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비루하다. 책 말미에 실린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는 '잔존의 파토스'라는 고급진 표현을 썼지만, 사실 나는 비루하다, 외에 더 좋은 표현을 찾지를 못하겠다. 그렇게 그들은 비루하다. 아니, 나는 <보통의 시절>에 등장하는 그들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세실리아>에서 연말마다 만나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허무함과 환멸을 견디는 전직 요트부원 대학친구들, <조중균의 세계>에서 출판사에 갓 입사하여 '해란씨'와 알게모르게 경쟁하는 나(영주), 두 개의 라벨을 붙인 고기를 신고하여, 이제 짤릴 위기에 처한 마트 직원의 방문을 받는 <고기>의 그녀. 그리고 물론 <너무 한낮의 연애>의 필용. 아, 이 친구. 인사이동을 통보받고 십육 년 전 종로의 맥도날드에 있던 양희를 떠올린 한낮의 필용. 양희의 사랑한다는 말에 불가해한 기쁨을 느끼던 필용. 그러나...


"야 너, 최소한이라도 꾸미고 다녀. 널 위해 하는 얘기야. 아이고, 같이 다니면 내 얼굴이 화끈거려서. 젊은 시절 다시 안 와. 좀 있으면 값 떨어져. 그리고 연극도 좋고 가당찮은 대본도 좋은데 밥벌이는 하고 살아. 애가 어떻게 된 게 이천원으로 하루를 삐대? 야! 나도 어려워! 나도 힘들어! 야이 씨, 너 그동안 나한테 받아먹은 거 다 내놔. 일괄 계산하라고 이 계집애야."

양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가면 질려갈수록 필용의 말의 수위는 점점 더 높아졌다. 어떤 한계까지 올라 찰랑찰랑거리면서 파탄의 전조를 만들어내는데도 계속됐다. 필용은 퍼부어댔다. 아주 세상이 끝난 것처럼 퍼부어댔다. 양희가 맥도날드에서 나간 뒤로도 필용은 자기 말에 취해 마구 떠들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뒤늦게 깨닫고는 양희를 붙들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양희는 보이지 않았다.

- p.31~32.*


아이고, 이 친구야. 그러고도 문산까지 다시 양희를 찾아가서 사과도 못한 이 친구야. 그런데 김금희의 소설에는 비루한 그들의 옆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자신만의 세계를 쌓고 그들 나름의 규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비루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이들. <조중균의 세계>의 조중균, <세실리아>의 세실리아, <개를 기다리는 일>의 여학생, 그리고 물론 <너무 한낮의 연애>의 양희. 그들의 생각이나 행동 속에 들어있는 어떤 것들은 괄호가 쳐져 있어서 비루한 그들은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잘 알 수가 없는 것이 비루한 그들 뿐인가.


우리들 대다수가 잘 모르지 않은가. 조중균을, 세실리아를, 여학생을, 양희를, 그리고 사실은 자신이 비루하다는 사실을. 뭐 적어도 나는 그런 것 같다. 차분하게 펼쳐지는 김금희가 그려내는 세계를 읽다말고 나는 종종 딴 생각을 했다. 별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왜 나는 이때 소주가 먹고 싶어지는 것일까. 왜 이처럼 밝은 대낮에 소주를 먹으면서 무언가를 잊고 싶어지는 것일까. 나도 그렇게 <세실리아>의 왕년의 요트부원들처럼 정신이 완전 빙산이 되어, 대륙으로 이동하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온갖 똑똑한 척은 다하면서 결국은 손해로 끝나는 인생.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며 살아왔지만, 그것을 결국 인정해야 하는 때가 가깝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것을 인정하면 조금이라도 덜 비루할 수 있을까. 비루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비루한 거니까 인정해 버리면 낫지 않을까, 같은 쓰잘데기 없는 생각.


모르지. 아마도 그래서 그들에게는 조중균이나 세실리아나 양희가 필요했는지도. 비루한 그들이 나오지만 김금희의 소설에는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 멋진 순간들이 있다. 비루한데 멋질 수 있나, 싶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 그렇다. <세실리아>에서 세실리아가 가려다말고 뒤돌아서서 나를 꼭 안아줄 때, <보통의 시절>에서 상준이 잊기는 어떻게 잊느냐고 말할 때, <반월>에서 단짝에게서 온 편지를 뜯어볼 때. 비루한 그들이 만나게 되는 비범한 순간. 어쩌면 비루한 나도, 김금희의 소설을 읽다가 잠깐 딴 생각을 하며 그런 비범한 순간을 만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주를 마시러 가기에는 쨍쨍한 이런 너무 한낮에.



* 이 장면은 드라마스페셜로 방영했던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도 나오기는 했지만 실망스러웠다. 나는 그 장면을 조금 더 몰아부쳤으면 했지만, 그 장면은 소설보다도 훨씬 순화되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학생 양희와 대학생 필용이 어울리지 않았다. 현재의 필용 역을 맡은 '고준'은 나쁘지않았던 것 같지만.


** 김금희 작가의 신작 소설집이 나왔다. 친필싸인본을 준다고 해서 예약구매를 할까 싶기도 하고, 왠지 아, 너무 싸인할 책이 많아, 하고 좌절하는 작가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안할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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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8-23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김금희 소설 《경애의 마음》이 생각납니다 왜 그럴까요 같은 사람이 쓴 소설이어서는 재미없는 말이지만, 이걸 모르는 척할 수 없겠지요 단편에서 본 사람을 거기에서도 봐설지도... <너무 한낮의 연애>는 드라마로도 만들었군요 누구 삶이 옳다 말하기 어려울 듯해요 자기 마음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누군가는 그걸 의심하지 않고 살지 몰라도 많은 사람은 이게 맞을까 하고 의심할지도 모르겠네요 의심하면서도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새 소설 나왔다는 건 봤어요 저는 그걸 보고 또 책이 나왔구나 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빨리 나온 거 아니가 싶기도 한데 다시 찾아보니 소설집이군요


희선
 
고독한 직업 니시카와 미와 산문집 1
니시카와 미와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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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는 결국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글을 쓰는 도중에 자신을 적당히 드러내거나, 혹은 적당히 숨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글 속에 자신을 얼마나 드러냈는가의 문제와 별개로 그 글 속에 적당히 숨겨진 '그 사람'을 그다지 만나보고 싶지 않은(혹은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글도 있다. 영화감독 니시카와 미와의 글은 후자인데,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공감한 평은 책 뒤의 배우 문소리의 평이다. "그녀의 책을 읽고 나니 얼른 전화해서 밤새 맥주나 마시자고 빨리 나오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사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은 별로 대단한 이야기들은 아니다. 아마도 밤새 맥주나 먹으면서 할 수 있는 시시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오디션을 진행했던 이야기, 어렸을 때 축농증을 앓았던 기억, 새벽 2시에 만난 돈을 빌려달라던 수상한 남자,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처음 만나던 기억...그저 허름한 맥주집에서 맥주에 닭다리를 곁들이며, 아..맞아 나도 예전에 그런 사람을 만난적이 있었는데, 하고 맞장구를 치며 빈 술잔을 채워줄 뿐인 그런 이야기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술꾼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맥주집에서 결국 술잔 속으로 빨려 들어가 없어질 이야기에 불과할지라도, 누가 이야기하는가에 따라서 맥주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나는 영어를 거의 못한다. 다양한 나라의 영화제에 참석하고는 있지만, 해외 영화감독들이 대체로 쉽사리 영어를 구사하며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나는 그저 애매한 미소를 띠며 정기적으로 맥주만 홀짝이는 장식물로 변해서 일본의 이름을 계속 더럽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2004년의 일이다. 보스니아 분쟁의 격렬한 상흔이 남아 있는 수도 사라예보의 영화제에서도 내 추태는 폭발했다. 인구 400만 명도 안되는 그 나라에서는 일본어 통역사를 찾을 수 없었고, 나타난 사람은 고작 일본에서 고작 한 달 유학한 경험이 있다는 그 지역 청년이었다. 일단 함께 들어간 식당에서 메뉴에 있던 단어를 보고 "이건 뭐예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어, 음, ......잎사귀 같은 채소예요!"라고 대답했다. 아주 친절하고 호감가는 청년이었지만 그 채소가 '시금치'라는 사실이 판명된 순간 내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고, 그날 무대에서의 질의응답을 무모하게도 직접 영어로 감행했다. (하략)

-p. 154

 

이 짧은 발췌문에도 잘 드러나지만 니시카와 미와의 글들은 술맛, 아니 글맛이 살아있다. 뭐 그것을 그녀가 자잘한 유머를 적재적소에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혹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영화라는 세계에 발을 디디고 외부에서 잘 알 수 없는 여러 에피소드를 요령껏 솜씨좋게 들려주기 때문이라고, 아니면 하나의 허구로서 잘 축조된 작은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그 세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해 보인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이 어떤 안도감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사실은 저 사람도 그다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 28살에 데뷔한 영화감독으로, 데뷔작으로 일본 국내 영화상의 신인상을 여럿 수상했으며, <유레루>, <우리 의사 선생님>, <아주 긴 변명> 등의 영화로 여러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영화감독일지라도 사실 별 것 없다는 것. 실수를 저지르고, 때로는 타인을 다그치고, 자기관리에 게으른 나와 사실은 별로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 말이다. 누구나가 사실은 '어떤 부분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으니까. 예를 들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독파는 커녕 대충 훑어보지도 못한, 그저 활자로 채워진 물체(p.139)"라고 자신의 장서를 돌이켜보는 그녀에게 공감했으리라. (나만 그래요? 나만?)

 

그렇게 우리는 안도하며 살지 않던가. 오늘도 실수하여 부장에게 깨진 옆 동료의 에피소드를 맥주를 홀짝이면서, 오징어와 부장을 질겅질겅 같이 곁들여 씹으면서 듣지만, 사실은 그 순간에 몰래 안도하지 않던가. 그것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사실을, 혹은 매사 잘 나가는 듯이 보이는 저 친구도 사실은 별 게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만 그래요? 나만?) 그래서 니시카와 미와의 글이 조금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는 그녀가 그녀의 일상보다는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다. 니시카와 미와 본인의 말대로 '가짜 세계'를 만들어내는 영화감독으로서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메가폰을 들고 "액션!"을 소리높여 외치는 영화감독의 이미지를 그녀는 기꺼이 배반시키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동물연기자(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쥐)가 연기를 못해 노심초사하고, 대사를 바꿔달라고 말하는 배우 앞에서 어쩌지, 어쩌지를 속으로 반복하는 다심(多心)한 아줌마(라고 이야기해도 왠지 니시카와 미와는 이해해줄 것 같다)에 가까우니까.

 

그래서 어쩌면 그녀의 영화가 그렇게 다심한 세계를 다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책을 덮고, 2006년작 영화 <유레루>를 봤다. 영화를 보고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궁금해져서 책을 본 적은 있지만, 그 반대로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뒤늦게 찾아본 것은 처음이라 개인적으로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겉멋이 조금 들었기는 해도, <유레루>의 세계야말로 미묘한, 부서질 것 같은 세계, 사실은 너무도 우리 가까이에 있어 쉽게 뭉개버릴 수 있는, 그러니 더 조심히 다뤄야할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카가와 데루유키의 연기는 역시나 인상적이다.    

 


뒤늦게 다는 덧.

사실 이 책은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샀다. 때로는 단지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사기도 하는 법이다. 하기사 단지 포스터에 끌려서 영화를 본 적은 얼마나 많은가. 이 표지는 영화 <유레루>의 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사실 장면이라고 하기는 그런 게 이 부분은 영화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장면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 형제가 저렇게 흔들다리 위에서 같은 곳을 보고 있는 장면은 영화 속에는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저 장면의 의미를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는 컷들을 영화 밖에서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나의 프로필 사진이기도 한 저 장면은 영화 <어느 가족>의 스틸컷이기는 하지만, 사실 영화 속에 이 장면은 없다. 그러나 나는 스틸컷을 보고 안도했다.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그 안도의 의미를 알 것이다. 그러나 분명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있다. 그것은 감독이 난간을 기대고 웃는 저 소녀의 모습을 끝내 영화 속에서 보여주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 우리가 저 소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얻게 될 무언가, 혹은 잃게 될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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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8 0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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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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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 <설국열차>에 대한 스포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 대한 반응 중에 흥미로웠던 것은 찜찜하다, 씁쓸하다, 뭔가 개운치 않다는 말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일종의 성취 지점이 아닌가 싶은데, 뭔가 눅진하고 불길한 무엇인가를 영화 속에 남겨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에게 길게 달라붙어 있다는 점은 결국 봉준호가 원했던 부분이 아닐까. 영화 속 등장했던 수석처럼 말이다. 영화 속 기우(최우식)는 수석을 껴안고 누워있으면서 중얼거렸었다. 떼어내고 싶은데 떼어내지지 않는다고.

 

사실 그런데 봉준호의 영화가 언제 상쾌한 무엇인가를 준 적이 있던가. <살인의 추억>에서 빗속에서 DNA 분석 결과를 뜯어 보았을 때, <마더>에서 진범이라고 잡혀 들어온 이의 얼굴을 보았을 때, 뭔가 맥이 풀리는 그 순간. 그것이야말로 봉준호의 말대로 그가 즐겨 의도한 거대한 '삑사리'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에서 괴물이 쓰러지는 순간이나, <설국열차>에서 열차가 터져나가는 거대한 스펙터클의 순간에서도 모종의 쾌감보다는 어떤 씁쓸함이나 맥풀림이 더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기생충>은 그의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영화다. 여러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단적으로는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돌고돌아 처음 위치에 와 있는 것들.  <살인의 추억>의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논바닥 옆 어두운 배수로와 다시 돌고돌아 영화 마무리에서 만나게 되는 어두운 배수로, 아니면 <괴물>에서 한강 둔치에 서 있던 컨테이너 건물과 다시 어두운 한강 옆에서 홀로 서 있는 컨테이너 건물, <마더>에서 영화 시작과 함께 만나게 되는 마더의 춤과 영화의 끝 고속버스 안에서의 망각의 춤. 이것은 <기생충>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 반지하 방의 창에서 시작하여 걸려 있는 양말들을 비추며 카메라는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그대로 반복된다.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 반지하 방에는 여전히 기우(최우식)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어두운 배수로 안에는 여자가 죽어 있었고, 마지막에는 그 위에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괴물>의 마지막에서는 컨테이너에 원래 있었던 아이는 죽었지만, 대신 다른 아이가 살아남아 밥을 먹었다. 그리고 <기생충>에서는 마지막 지하방 그 이전에 환상이 이어졌다. 혹시 사실인가 싶은, 믿기지 않는 환상이.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지하방에 있고, 이제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는 참이다. 돌고돌아서 얻은 근본적인 계획. 그러나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안다. 그가 그렇게 그곳에 앉아서 환상을 보고 있는 한, (아니 사실은 환상을 보지 않더라도) 그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러나 아무튼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지라도 돌고돌아야만 한다. <설국열차>에서 결국 같은 곳으로 되돌아올지라도 열차가 같은 궤도를 돌아야 하는 것처럼.

 

<설국열차>. 영화가 봉준호의 전작들 연장선상에 있지만, 이 중에서 굳이 가장 가까운 영화를 꼽으라면 그것은 이 영화 <설국열차>이다. 예를 들어 <기생충> 그 마지막의 그로테스크한 활극은 설국열차의 그 장면을 연상시킨다. 혁명을 꾀하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열차의 머리칸으로 들어가고, 뒤에 남은 남궁민수(송강호)가 일군의 약에 취한 무리들과 대결을 펼치던 장면. 크로놀에 취한, 아니 사실은 크로놀로 상징되는 다른 무엇에 취한 그들은 기꺼이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처단할 참이다. 그들은 열차를 멈추게 하려는 위험한 자들이니까.(예전에 <설국열차> 리뷰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사실 어쩌면 커티스는 처음부터 열차를 멈추게 할 마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열차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열차는 어떻게든 돌아야 하니까. 그래야 우리는 살 수 있으니까. 위대한 영도자 윌포드의 뜻대로.      

 

커티스의 반란이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인 것은 결국 그의 시도가 열차를 계속 돌아가게끔 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시스템의 설계자 윌포드는 기꺼이 그를 머리칸으로 오도록 안내한다. 위험한 것은 커티스가 아니라 열차를 멈춰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남궁민수였고, 그래서 그는 광기에 가진 이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크로놀에 취한 그들은 윌포드를 위해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들을 위해서 남궁민수를 기꺼이 처치할 것이고, 그것은 <기생충>에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버전으로 변주된다.

 

지하실에 있던 남자가 기택(송강호)과 기우 가족에게 달려드는 것은 언뜻 보면 아내에 대해 복수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관점에서라면 사실은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가 했던 몇 개의 말들을 여기에 덧붙인다면 말이다. 존경합니다, 박사장님! 리스펙!! 아니,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인터넷에는 이를 방증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박사장(이선균) 내외도 피해자이며, 그들은 결코 악인이 아니라고 기꺼이 변호를 해주는 수많은 글들. 아니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면 그 존경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비슷하게 변주되고 있다. 이미 잡스와 빌 게이츠는 위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재용이라고 여기에 올라서지 말란 법이 있을까. (아니 이미 올라섰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냄새나는 것들은 바로 지금 지하철 내 옆자리에 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낯선 남자다. 아무나 밀치고 들어오는 할아버지들,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러 비집고 들어오는 아줌마들, 크게 음악을 들으며, 백팩으로 쿡쿡 찔러대는 젊은 남성들에게 나는 냄새를 혐오하며,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재벌들의 기사를 애써 읽으며 감탄한다. 리스펙까지는 아닐지라도 우와를 연발하며.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도 이미 <설국열차>의 윌포드에 혹한 바가 있다. 열차는 돌아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좁은 구석 그 안에서 열차를 돌리기 위한 부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열차는 돌아가지 않나요? 그것을 <설국열차>의 메이슨(틸다 스윈튼)은 간단하게 말한 바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머리칸은 머리칸, 꼬리칸은 꼬리칸. 자, 그렇게 그들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러, 아니 사실은 별도리가 없어서 '내려간다'. 빗줄기는 쏟아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반지하방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일까.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계단을 내려간 후, 그들은 겨우 자신들의 반지하방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침몰하는 중이다. 모든 곳은 가슴까지 물에 잠겼고, 변기는 계속 오물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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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0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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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0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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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2 17: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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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4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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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6 0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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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년만의 <씨네21> 구입. 숫자라는 것에 둔감하기는 하지만 이제 1200호라. 저 중에 최소 700~800호는 한 때 내 손에 쥐어져 있었고, 잘 보관해두다가 이사올 때마다 버리고 버려 이제 내 손에 남아 있는 것은 특집호 몇 권 밖에는 없지만, 그래도 내 가방 한 구석에 늘 들어있던 잡지라 애정이 간다.


좋아하던 필진도 많이 떠나고, 글의 무게감도 예전보다는 훨씬 덜해 애정이 많이 식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번 호는 1200호 특집이기도 하고, 기대하고 있는 작품들 - 봉준호의 <기생충>, 박찬욱의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전도연이 나온다는 이종언의 <생일>,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 등 - 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집어 들었다.


그나저나 위에 작품들 중 몇 개나 볼 수 있으려나.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 제목이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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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0 16: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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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 2019-05-12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성년과 생일을 봤어요. 정말 오랫만입니다. 맥거핀 님. ^^

맥거핀 2019-05-21 17:07   좋아요 0 | URL
저도 지난 주말에 뒤늦게 미성년을 다운받아서 봤습니다. 아..이게 김윤석 영화야? 싶더라구요. 첫 작품이 이정도라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충분할 듯 싶더라구요. 영화를 보시고 계시다는 말씀을 들으니, 왠지(?) 기분이 좋습니다.
 


뒤늦게 윤이형 작가에 대해 찾아보고 있는데,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윤이형 작가가 이제하 작가의 외동딸이라는 사실 같은 것. 여러 기사를 보다가 한 부분에 눈길이 머물렀는데, 최근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인터뷰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이 말에 꽤 공감했다.


"우리 사회의 남녀 갈등 양상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남녀 갈등과 대립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설 안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부부가 헤어질 때 원한에 가득 차서 서로를 미워하는 건 각자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고 봅니다."


사실 이 소설(<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의 인상적인 대목 중에 하나는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대목이다. "결혼이 남미의 오지로 떠나는 위험한 여행이라면, 아이의 양육자가 되는 일은 우주선에 탑승해 미지의 행성에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것과 같다. 앞서 간 여행자들의 데이터는 제대로 전송되어 오는 법이 없으며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이 지구에서와 다르게 흐른다.(p.45)" 나는 이것을 조금 비틀어 보고 싶다.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어쩌면 지구인과 외계인이 같이 미지의 행성을 탐사하기 위해 떠나는 스타트렉 같은 것이 아닐까(<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합쳐봤다). 남녀 중 누가 지구인이고 누가 외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떤 네 발로 걷는 외계인이 두 발로 걷는 지구인에게 너 왜 두 발로 걸어?라고 묻는다 해도 지구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해의 시작이란 결국 이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 개인 혹은 집단(남자이든 여자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의 어떤 것을 결국 (어떤 집단에 소속된)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 데리다는 "용서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해란 것도 사실 어쩌면 비슷한 것이 아닐까. 이해란,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최근 데리다의 책 <용서하다>가 나왔다. 나부터 읽어봐야 할 듯.)


아무튼 윤이형 작가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 이번달 Axt의 메인 작가가 윤이형 작가던데 읽어봐야 할 것 같다. Axt를 이번 달에는 건너뛸까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사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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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2 0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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