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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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매력이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도 흔해진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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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1-01-22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나‘로 돌아간 하루키. ‘나‘로 시작했던 많은 작가들이 세상을 탐험하다가, 노년에 다시 ‘나‘로 돌아오는 것은 흔한 경우이다. 다만 대부분 이 때는 처음의 ‘나‘와 돌아온 ‘나‘는 달라져 있기는 하다. 문장은 짧아지고, 생각은 깊어진다. 그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미안하게도 부연은 늘었고, 생각은 (원래도 그다지 깊지는 않았지만) 흐릿해졌다.

이제는 하루키를 그만 읽어야할 때인가 보다.

2021-01-23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21-01-25 14:19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기대하는 부분이 있으면 실망하기 마련이지요.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는 뭔가 특유의 어떤 무엇(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특유의 무엇 말이죠)을 항상 기대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그런 부분을 개인적으로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론 뭐 그런 부분을 찾으신 분도 계시겠죠. 제가 그 정도의 하루키 팬은 안되나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루키하면 학교 도서관에 있던 그 낡아빠진, 원래 있던 표지가 하도 낡아서 하드커버를 덧씌운 하루키의 책들이 생각납니다. 그만큼 많은 학생들이 읽는 책이기도 했죠. 하루키와 같이 늙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하루키 소설에서 어떤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좋은 한 주 되세요. 벌써 1월도 마지막 주에 이르렀군요.
 



연초에는 의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지나간 <씨네21>이나 영화 블로그들을 돌아보며 작년의 베스트 영화들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물론, 시간이 나면 그 중의 몇 편을 보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도 시간이 있어 그 중 몇 편의 영화를 보았고, <사라진 시간>은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영화 중의 하나다. (<씨네21>에서 뽑은 올해의 한국영화 4위, 물론 작년에는 코로나 여파로 개봉된 영화가 적었으니 상대적으로 순위들이 인플레이션된 경향이 있어 보인다.)


언젠가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보았을 때는 스릴러나 미스터리 영화같은 인상이 있었는데, 그런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이 영화는 그나마 '빌미'라도 주었지만 사실은 문제인 게, 영화 소개 프로그램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든 영화를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처럼 재구성하여 소개하는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 '소중한' 사라진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거냐는 관객들의 볼멘 소리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아마 대부분은 이 영화를 장르 영화로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사건의 진실 찾기 게임을 기대했던 관객의 욕망을 이 영화는 깨끗이 배반하기 때문이다. 잘 짜인 장르물을 기대했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황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태도는 그런 건 내 알바 아니올시다,인 것 같고 이 영화의 매력도 아마 거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아무튼 딱한 관객들은 어떻게든 황당함의 늪에서 빠져나오고자 애처롭게 버둥거린다. 어떻게든 이야기의 얼개를 짜맞춰 보려는 수많은 영화 리뷰들의 시도가 아마도 그것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말해서 꿈의 얼개를 맞춰보려는 아침의 시도는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물론 나는 이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시도는 덧없다는 말이다.) 도리어 얼개가 맞는 꿈은 급격히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꿈의 매력은 아마도 그 불가해한 이물감이 아닐까. 아니! 아니, 나는 미스터리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아무리 주장해봤자, 그런 거 애당초 없었는뎅?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진한 표정을 지으니, 화내는 이쪽만 더 화가 날 뿐이다.


아무튼 간에. 이 영화의 매력은 도리어 그 중반 이후에 있다. 사건을 둘러싼 마을의 비밀을 어떻게든 밝혀내려고 박형사(조진웅)가, 아니 사실은 관객들이 애쓸 때 영화는 시치미를 뚝 떼고 슬그머니 방향을 돌린다. (사실은 이미 방향은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박형사가 체념한 이후이다. 그가 전화번호를 지갑에 집어 넣고 수업 준비를 시작할 때, 이제 영화는 영화 자체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장르물을 내놓으라고!"라는 관객들의 화를 어르고 달래며 쉰 떡밥이라도 던져주었지만, 이제 영화는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투다. 아니, 나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거야, 보기 싫으면 관두던가요,라는 투랄까.


그 '영화 자체의 욕망'이라는 것을 뭐 여러 갈래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일종의 위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진영이라는 배우 출신의 영화 감독이 계속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같은 입장의 배우들을 향해서 보내는 일종의 위로. 그러나 그 위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위로는 이야기를 관통한 후 묘하게 조금 더 확장된다. 처음에는 선생 부부가 이상하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코웃음치며 듣던 박형사가 뜨개질 선생님 초희(이선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거 많이 아프다고 공감하며 다들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할 때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 속 배우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위무처럼 느껴진다. (이 장면은 카메라, 그러니까 당신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박형사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사실은 우리도 다들 어쩔 수 없이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되어서 살고 있으니까. 맡고 싶지 않은 역할을 기꺼이 맡고 때로는 체념하면서. 우리가 온전한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온전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은 삶일 수 있지만, 다른 역할을 기꺼이 떠맡으면서 적당히 체념하면서 사는 것도 꽤나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처음의 "참 좋다"와 마지막 "참 좋다"는 분명히 톤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어떤 게 꿈(소설)이고, 어떤 게 현실인가. 혹은 어느 것이 망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영화는 그것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보다는 영화가 묻는 질문은 조금은 핀트가 달라보인다. 시간은 사라졌어도, 여전히 나, 혹은 나의 기억은 남잖아요? 영화는 되묻고 있다.




덧 1.

영화의 초반부 김선생(배수빈)과 그의 아내 윤이영(차수연)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다. 그 이후 등장하여 혼자말을 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는 박형사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랜 배우 경력을 가진 정진영 감독이 이 과장이 가져올 단점을 당연히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필요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의 영화, 극 중의 극을 보여주는 것은 촬영기법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과장된 연기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배우 출신 감독이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덧 2.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황규덕 감독의 2007년작 <별빛 속으로>가 떠올랐는데, 이상하게도 그 영화를 이야기하는 리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시간>의 감독 정진영은 이 영화에서 교수 역할로 출연하며, 차수연 배우도 중요한 역할로 나온다. 물론 꿈과 현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이 영화의 내용도 <사라진 시간>과 꽤나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교수로 나오는 정진영이 직접 낭독하기도 하는 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인 릴케의 이 시 "파괴하는 시간이 정말 있을까?"도.


시간이 정말 있을까 파괴하는 시간이

쉬고있는 산 위에서 언제 시간이 성을 부숴버릴까

끝없이 신들에게 속해있는 이 마음에게

언제 조물주는 폭력을 휘두를까

운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처럼

우린 정말로 불안에 찬, 깨어지기 쉬운 존재일까

유년 시절은

깊고도 기약에 찬 유년시절은

그 근원에서 말이 없는 것일까, 훗날에


출처: 영화, 별빛 속으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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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1-21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는 모습을 보면 미스터리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주 바뀌는군요 자신은 그걸 기억하는가 봐요 형사였다는 걸... 그러고 아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건지... 이런 거 언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정말 본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주 처음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시간여행을 하는 사람이 역사속 사람이 되는 것도 있던데, 그것과는 다를 듯합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꿈일지 현실일지, 그런 게 나중에 나오지 않는군요 나오지 않는다 해도 그것도 진짜일 수 있다 생각하면 나을지...

늘 다른 사람을 연기하던 배우가 자신은 누군가 하는 생각하는 하는 영화도 있지 않던가요 갑자기 그런 것도 생각나는군요 정말 배우만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때도 있겠습니다 그게 힘들다 해도 그렇게 사는 것도 대단하겠지요 그런 걸 아주 못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시간이 사라져도 기억이 있다면 그건 정말 있었던 일이기도 하겠지요 기억조차 없다면 더 안 좋을 듯합니다


희선

맥거핀 2021-01-21 18:03   좋아요 1 | URL
사실 비슷한 이야기는 많죠.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고, 기억이 뒤섞이고...조금씩 버전이 다르지 비슷한 내용은 많습니다. 제목이 ‘사라진 시간‘이긴 하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사라졌다,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현실이 바뀌었다,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흥미로웠던 것은 그런 식의 이야기들은 많지만, 대부분 이걸 미스터리 같은 장르적 관점에서 접근하거든요. 근데 여기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얼키고 설킨 실타래를 장르적으로 푸는 게 아니라, 어떤 정서예요.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의 어떤 정서. 뭐 그래서 이 영화가 싫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람이 많겠지만, 저는 도리어 더 좋았습니다.

그렇겠죠. 인간을 무엇에 버티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억의 힘이 아닐까요. 무엇인가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힘든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주 큰 힘이 되기도 하겠죠.
 



본 사람들은 대부분 욕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영화들이 있다. 며칠 전에 본 영화 <콜로설>이 그런 경우인데, 네이버에 들어가니 아니나다를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 거임?"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인 것 같다. 사실 스토리만 보면 그렇게 욕을 먹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느껴지는데, "내가 마음먹은 대로 조종하는 거대괴수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어린이들(혹은 낮술먹고 덜깬 어른들)의 헛소리(아니, 로망(老妄))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아마도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colossal은 '거대한'이라는 의미이지만, 사실 나는 살짝 비슷한 collapse(붕괴)라는 단어가 내내 연상되었는데,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대 괴수가 서울(그렇다, 우리 수도 서울)을 붕괴시키는 게 꽤 마음에 들었기도 하지만(가끔 서울을 때려 부수고 싶은 거는 나만 그런거 아니겠죠?), 그보다는 이 영화가 어떤 자아의 '붕괴'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밤새 술먹고 거짓말하다 얹혀사는 남친 집에서도 쫓겨나면서 영화 속에 첫등장하는 주인공 글로리아(앤 해서웨이)도 어떤 붕괴의 양상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글로리아의 친구(이자 사실은 빌런) 오스카(제이슨 서디키스)도 마찬가지다. 즉 그녀(혹은 그)가 서울을 때려 부술 때 사실은 그들은 그들 자신의 내면을 때려 부수고 있다. 글로리아가 뉴스를 보고 경악하며 어떻게든 서울을 붕괴시키지 않으려고 애쓸 때 사실은 그녀는 그녀 자신을 붕괴시키지 않으려 애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그냥 이 영화가 어떤 은유처럼 느껴진다. B급 괴수물의 외양을 두른 이 영화는 사실 붕괴되어 가는 어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사이드 아웃'이다. 하필이면 아침 8시 5분에 동네 놀이터에 등장하여야만 괴수 분신 기제(개인적으로는 '로보트 태권브이 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주인공 훈이의 태권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작동한다는 설정은 바로 그 시간과 장소야말로 대책없는 술꾼들이 자신의 붕괴되어가고 있는 내면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자 장소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줄줄이 학교로 향하는 그 시각(저 아저씨는 뭐야 엄마? 아유 빨리 학교나 가! 나중에 저렇게 되고 싶어?), 밤새 먹은 술이 여전히 덜깬 채로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노라면, 혹은 (더 최악으로는) 모래밭에 파전이라도 하나 부쳐낸다면 밀려오는 자괴감을 그야말로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게 단지 농담처럼만은 느껴지지 않는데, (혹시라도 이 쓰잘데기 없는 리뷰를 보고 영화를 보실 분을 위해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그것은 어쩌면 결국 그 붕괴를 이겨내는 길은 누군가의 위치에 서보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타인의 자리에 서서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알코올이든 혹은 자기혐오든 무엇인가에 찌든 자신을 조금은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 붕괴의 양상에서 조금이라도 기어나오는 방법임을 영화는 말해주는 게 아닐까(라는 헛소리).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나는 앤 해서웨이가 가끔은 정신줄을 놓고 이상한 짓을 하는 영화가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진지하게 각 잡고 등장하는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에서보다는 <신부들의 전쟁>이나 <겟 스마트> 같은 영화에서의 그 큰 눈을 굴리며 살짝 맛이 간 앤 해서웨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마음에 들거다. 또한 제이슨 서디키스의 연기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멀쩡한 미친 짓' 연기는 꽤나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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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1-1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서 서울을 무너뜨리다니... 영화에서 서울이 어땠길래 그랬을까 싶네요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괴수라니... 왜 이런 걸 만들었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맥거핀 님은 다른 걸 보셨군요 그것도 괜찮은 거네요 다른 데서 자신을 바라보기, 그거만큼 어려운 게 없는 듯합니다 저는 늘 제가 한심하게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이렇게 살지 뭐 할 때가 더 많아요

일본 드라마, 만화에서는 이상한 어른이 보이면 부모가 아이한테 저런 거 보면 안 돼 하더군요 그런 건 어디나 마찬가지겠습니다


희선

맥거핀 2021-01-14 15:21   좋아요 0 | URL
원래 도쿄에서 찍으려다가 ‘고질라‘와의 저작권 분쟁(?) 때문에 서울에서 찍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사실 보다 보면 왜 쓸데없이 이런 이야기 찍으려고 돈을 쓰지? 싶은 부분이 있어요. 제작비도 1500만 달러나 들었다고 하던데...그런데 뭐 사실 그게 영화의 매력 아니겠어요. 왜 굳이 이런 걸 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는가, 싶을 때가 있는데 그걸 보고자 하는, 보여주고자 하는 게 바로 영화의 매력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는 트랜스포머 같은 거도 그냥 자동차 변신이 다 인거 잖아요. 그냥 변신 장면 그 자체를 보고 싶어서 영화를 찍는 거죠.)

뭐 사실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저도 제가 한심해요. 가끔 많이 그렇죠.
 



일 때문에 자료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뒤늦게 찾아본 기사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일들을 무심하게 나열한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근대지진 관측사상 최대 규모(리히터 규모 9.0) 지진이 일본 도호쿠 지방을 강타했다. 몇 차례의 여진이 이어졌고, 한 시간 뒤 최대 높이 40.5m의 초대형 쓰나미가 연안 지역을 덮쳤다. (중략) 사고 당일 쓰나미로 이 지역 어린이 75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74명이 미야기현의 작은 시골 마을 가마야의 오카와 초등학교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이 학교의 재학생은 108명. 이 중 78명이 파도에 휩쓸렸고 단 4명만이 살아서 나왔다. (중략)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교사 엔도 준지 뿐이다. 그는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대피하는 과정에서 파도가 들이닥쳤고, 모든 절차를 따랐지만 속수무책으로 파도에 휩쓸려 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진은 오후 2시 46분에 일어났고 학교의 시곗바늘은 3시 37분에 멈췄다. 아이들에게는 51분의 시간이 있었다. 200m 남짓 떨어진 대피소까지는 달려서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51분 동안 아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국일보 기사 '동일본 대지진 당시 오카와 초등학생들은 왜 가만히 있었나' 중에서>


그러나 가끔은 사실의 무심한 나열이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사건을 6년에 걸쳐 취재하고 그 내용을 담은 리처드 로이드 패리의 책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을 읽으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정서는 그 어떤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에서 비롯되는 무서움이다. 그는 <더 타임스>의 아시아 담당 특파원으로서 한 걸음 뒤에 물러서서 이 책을 썼다. 한 걸음 뒤에 물러섰다,라는 것은 내용을 부실하게 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아이들을 잃은 부모가 아니었고, 그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주민도 아니었고, 지방 공무원도 아니었고, 부모들을 위로한 승려도 아니었다. 그는 한 걸음 뒤에 물러서려고 어떻게든 애썼기 때문에 보다 많은 것을 들려줄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지 사실을 나열하고 그것 자체에서만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왜 교사들은 바로 학교 뒤에 있던 산으로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교통섬으로 가려 했던가, 왜 시간은 지체되었고 아이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는가,와 같은 사건의 진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그 뿐만은 아니다. 도리어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조금 다른 방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신을 빨리 찾은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는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가 결국 얼굴을 안 볼 정도로 갈라서는가, 혹은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일본인의 특징이 이 사건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와 같은 사회학자적인 입장에서 흥미를 가질 이야기도 있고, 아니면 아이들과 이야기하려고 심령술사를 찾는 부모들과 쓰나미에 휩쓸린 영혼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조금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내용들도 이 책에는 켜켜이 쌓여있다. (그러나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담담한 술회들은 마음을 짓누른다. (물론 그 부모들을 인터뷰한 저자의 마음도 짓눌렀을 것이다. 위에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책의 초반부,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 아침과 아이들의 시신을 찾던 날을 회상하는 부모들의 목소리를 담은 몇 줄의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지진이 일어난 후 '시간이 있었다'라는 사실이다. 즉 지진이 일어난 후 쓰나미가 오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으며,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몇몇 아이들은 이렇게 살았다.) 그 공백에서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부모들의 기억은 때로 한 가지 사물이나 사실에 포커스를 맞춘다. 아이들이 그날 아침 신고간 신발이나 옷, 아침에 아이들이 던졌던 싱거운 질문.


그렇게 연말에서 올해로 넘기는 시간 동안 나는 이 책을 느릿느릿 읽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재난 상태에서 또다른 재난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었고 몇 가지 질문을 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고 있다고만 말해지는 무서운 쓰나미. 그것은 다르지만 묘하게 닮아 있다. 재난을 겪고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가 않다. 부모들은 어쩌면 '그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이들의 죽음을 다른 무엇으로 치환하려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굴착기 자격증을 따고 매일 진흙을 퍼올리는 일일 것이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심령술사를 찾아 매일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일일 것이다.


물론 그 부모들에 비길 수야 없겠지만, 우리도 크건 작건 이 재난들을 무엇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쓴다. 우리는 이것들을 무엇으로 바꾸고 있는가. 내 노력 중의 하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만난 최고의 책. (이라고 해두자. 올해까지 읽기는 했지만 올해의 최고의 책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지나간 시간이 너무 짧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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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1-12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아이들이 피하지 못했다니,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건 나왔을지... 저는 그런 게 더 알고 싶네요 그걸 안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겠습니다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모를 테고... 이걸 보니 세월호가 생각나는군요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간 부모도 있었군요 그러지 못한 부모는 지금도 마음이 아프겠습니다 그날이 마지막이 될지 몰랐겠지요 시신을 찾으면 좀 나을지... 아무것도 없으면 아이가 죽었다고 믿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살았다고 믿고 기다리지도 못하겠네요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까요


희선

맥거핀 2021-01-12 09:34   좋아요 1 | URL
책 내용대로라면 교사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허둥지둥했던 것 같고, 패닉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쓰나미의 위험을 과소평가했던 것도 같구요. 뭐 사실 대부분의 사건들이 그렇듯 여러가지가 중첩되었던 것 같아요.

책에 보면 책을 쓰는 시점(2018년)까지도 아이를 찾지 못한 부모가 나와요. 근데 포기를 못하고 계속 아이들을 찾으러 수색을 계속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 세월호 사건에서도 끝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부모들이 있었죠. 공식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한 걸로 아는데, 사실 부모의 마음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계속 찾고 싶을 겁니다.
 



아무리 하루키라도 이런 편집을 한 102페이지짜리 책을

13,500원 정가를 붙여 나오다니.

많은 책들이 단지 팬시 상품으로서 기능하는 것으로 전락한지 오래지만

이런 책은 안 사는 게 맞다.


하긴 책을 팬시 상품으로 내세우는 트렌드를 만든 본진에서

이런 소리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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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0-10-21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팬으로서 저도 지금 책 받아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책값을 다시 확인했고요. 이건 너무한데요. 일본에서 하루키의 예전 책을 우리나라와 계약할 때 기억은 정확치 않은데 어마어마한 선인세를 요구했다던 기억까지 소환되네요. 그건 하루키의 문제일까요, 일본 출판사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우리 나라 출판사의 자세 문제일까요. 착잡하네요.

맥거핀 2020-10-22 12:57   좋아요 1 | URL
말씀듣고 일본판은 어떤가 싶어, 일마존 들어가서 찾아보니 일본판도 한 가격하네요. 1320엔이니까요. 책 가격을 뭐 페이수에 비례해서 매길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렇게 단편소설 분량 밖에 안되는 글을 이런 식으로 책으로 묶어내는 것은 썩 유쾌하지가 않네요. 저런 것은 작가의 명성을 도리어 깎아먹는 일로 보이기도 하구요.

다락방 2020-10-22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저는 지난번 하루키 해피버스데이 였나, 그 책도 사놓고 너무 어이없었어요.. ㅠㅠ

맥거핀 2020-10-22 13:00   좋아요 0 | URL
요새 이런 게 일종의 트렌드인 거 같기는 합니다만, 가끔 보면 조금 심하다 싶은 게 있죠. 무거운 책을 들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춘 것일까요..? ;;;

2020-12-18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1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8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21-01-1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러스트 작가도 있으니 그 저작권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하루키도 일종의 브랜드화 되어서 살 사람은 사니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거 같아요^^;

맥거핀 2021-01-13 16:56   좋아요 0 | URL
뭐 사실 출판사만 탓할 일도 아니지요. 이런 책을 원하는 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대세를 잘 따라가고 있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저같은 사람은 점차 올드스쿨이 되어가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