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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다시 책 추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솔직히 얘기해서) 신간평가단이 도서정가제 위반일 수 있어 신간평가단 활동을 중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더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쉽다,는 것보다는 도대체 지금의 도서정가제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묘한 궁금증이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정가제 시행이 1년을 막 넘긴 지금 시점에서, 이 도서정가제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가제가 시행되고 있는 듯 하지만, 어떤 도서 온라인몰들은 상품권 제공이니, 카드사 쿠폰이니, 세트 할인이니, 적립금이니 하면서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할인율을 보여주고 있고, 또 한편에는 정가제 위반을 신고하여 보상금을 타는 일명 '책파라치'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또한 시행 전에는 출판사들이 정가제가 시행되면 책의 가격을 낮출 것이라는 전망(또는 기대)이 있었는데, 지금 책의 가격들을 보면 거의 낮아지지 않거나 도리어 높아진 것 같고, 살아날 것을 기대했던 작은 서점들은 여전히 말라죽어 가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르겠고, 누가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 이 짤막한 잡담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이라는 것이 점점 알 수 없는 세계로 가고 있다는 것,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른 것인지, 누가 무엇으로 이익을 얻고, 누가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인지, 어떤 것이 비윤리적 일이고, 어떤 것이 해야만 하는 일인지 점점 알아차리기 힘든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예를 들어 그것은 노덕 감독의 영화 <특종: 량첸살인기>를 보고 나왔을 때 달라붙어 있는 묘한 찜찜함, 답답함, 또는 무기력함 같은 것과 비슷하다. 진실이 거짓이 되거나, 거짓이 진실이 되어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사회, 혹은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이 도리어 나아보이는, 혹은 더 나아가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것이 더이상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사회, 그런 이상한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혹은 그 모든 일이 너무나도 빠르게 뒤바뀐 후에도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의미 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영화의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길거리들을 비추는 마지막 컷들은 무심하게 말해준다.

 

그런 세상에서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것, 읽는 데 최소한 몇 시간이 걸리고,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기억할 틈도 주지 않고 살짝 자국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들을 읽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정말 의미가 있을까.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넘어가지 않는 책장을 어떻게든 넘기려고 애를 써본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백민석, 한겨레출판

 

나는 백민석과 백가흠을 늘 헷갈린다. 물론 성이 같아서,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두 소설가의 세계가 겹쳐지는 부분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백가흠의 <조대리의 트렁크>와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이 트렁크 엽기전이나, 조대리의 목화밭이 되어도 그렇게 이상할 것 같지는 않다. 지난 페이퍼로 백가흠의 소설을 추천했으니 이번에는 백민석을...이라는 것은 농담이고, 아무튼 백민석의 소설을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에 첫등으로 골랐다.

 

 

독, 이승우, 예담

 

이번 달 신간을 보니 이승우 재조명 주간이라도 되는지, 이승우 작가의 지난 책들이 두 권이나 다시 출판되었는데, <에리직톤의 초상>과 <독> 중에서 고르라면 아무래도 내 취향은 이쪽이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문학과지성사

 

최근에 들어 이름이 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김엄지 작가의 책도 마찬가지로 두 권이 출간이 되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와 <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아무래도 나는 단편집 취향이니 이쪽으로.

 

 

첫숨, 배명훈, 문학과지성사

 

배명훈이니 읽는 재미는 보장하겠지만, 아마 안될거다.

 

 

다시 소설 이론을 읽는다 - 세계의 소설론과 미학의 쟁점들, 김경식 외, 창비

 

안다. 이건 더 안될거다.

 

 

덧.

여러 다른 분들의 추천글을 보다가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추천이 +1점이라면 -1점, 그러니까 마이너스 추천도 있었으면 좋겠다.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가 될까봐 불안하다. 솔직히 장강명 작가의 책은 그만 읽고 싶다. 일단 "제가 쓴 소설 중 가장 빠르고 가장 독합니다!"라는 카피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소설이라는 녀석은 가장 빠르고 가장 독한 것과 가장 멀리 있어야 되는 물건이다. 빠르고 독한 것은 어제 먹은 고량주, 그거 하나로도 충분하다. 빠르고 독하게 사람을 훅! 보내준다(어디로?). 아직도 그곳에서 완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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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 2015-12-0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이거이거..<배명훈이니 읽는 재미는 보장하겠지만, 아마 안될거다> 저도 이렇게 생각이 들어서.. 리스트에 넣었다가 뺀 건데... ^^;;;;
게다가... 장강명 작가의 <댓글부대>가 될까봐 저도 불안... 저도 이제 장강명 작가의 책은 그만 읽고 싶은데 말입니다.. ㅋㅋㅋㅋ
마이너스 추천이라니.. 기발하면서 멋진 생각이십니다. ㅎㅎㅎ


맥거핀 2015-12-02 23:38   좋아요 0 | URL
정말 농담이 아니라 딱 한 권만 마이너스 추천을 할 수 있는 투표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피하고 싶은 책 한 권 쯤은 있지 않을까요...

근데 진짜 이번에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장강명 작가 책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 같아요. 아유..뭐 되면 싫어도 읽어야죠. 싫은 책 읽게 되는 것도 신간평가단의 매력이니..가끔 그 매력이 너무 지나치긴 하지만.^^

2015-12-03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3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9 0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5-12-03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댓글부대 글 읽으니깐 어제 끝마친 오르부아르 생각나네요. 어제 그 책 끝마치면서 이나이에 이런 농도 찐한 글을 쓰다니, 놀랍더라구요.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빠르고 독하다는 표현은 아닌 것 같아요. 그건 독자가 판단할 몫이지. 그나저나 댓글부대 별론가봐요!!!

맥거핀 2015-12-03 13:30   좋아요 0 | URL
뭐 제 취향에 안맞는다는 거지, 평들을 보니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더군요. 그런데 기억의집님 말씀대로 저도 소설이든 영화든 작가가 혹은 감독이 자신의 작품이 이런 것이다, 이런 의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또 위의 말씀대로 그 내용도 그다지 와닿지 않구요. 아..그런데 <오르부아르>가 좋은 모양이군요. 그 책 추천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다락방 2015-12-0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건지 모르겠는데, 저는 장강명 작가의 책을 단 한 권 [한국이 싫어서]만 읽었거든요. 이걸 책장을 빠르게 넘기며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이것만 읽으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었어요. 이 작가의 책을 더 읽고 싶다, 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 싶은 거요. 제 느낌하고 비슷한건지 잘 모르겠어요. 반면,

이승우의 책이라면, 읽어도 읽어도 새로운 작품을 또 읽고 싶죠. 자꾸 자꾸 열심히 책을 내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독]도, [에리직톤의 초상]도 보관함에 담아두고 있습니다. 제 책장 한 칸은 이승우에게 내어줄 작정이에요.

맥거핀 2015-12-03 13:35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합니다. 정확히 설명하라면 할 자신이 없지만, 이 작가의 쓰는 방식이 대체로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이 있어요. 그 방식이 저는 공감이 안되기도 하고, 조금 식상하기도 하고..그래서요. 물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런데 아무튼 많이 쓰는 것 하나는 인정해줘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요새 장강명 작가의 책 진짜 자주 나오더군요.

이승우 작가 좋아하시는 군요. 저는 사실 이승우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한지가 별로 안되서 모르는 작품이 많아요. <에리직톤의 초상>도 기꺼이 읽을 용의가 있습니다만, 책소개를 보니 <독>이 조금 더 흥미가 가더군요.

하..근데 왠지 이번에는 제가 추천한 책은 어째 다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

cyrus 2015-12-03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신간평가단 활동의 단점이 독자 팬덤이 두터운 작가나 신작의 저자가 많이 선정되는 것 같아요. 특히 소설, 에세이 분야에서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지만, 덜 알려진 작가의 책이 선정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정말 제대로 된 신간도서를 알리는 거잖아요. 제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는 상황을 좋아하거든요. ㅎㅎㅎ

맥거핀 2015-12-04 20:2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많이 알려진 작가의 책들 위주로 선정되는 것 같기는 합니다.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요. 저도 의외의 재미 좋아하는데..이번달 출간 책만 봐도 어떤 책이 될지 감이 온다랄까요..그래서 마이너스 추천이라던가, 혹은 가중치 추천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장강명 작가 책만은 제발...

2015-12-05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8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도>의 내용, <종이 달>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이준익, 2015

    

영화 <사도>에는 몇 가지의 죽음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광기의 눈빛을 하고 사납게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사도세자(유아인)를 만난다. 그는 이제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죽이러 가려는 참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죽음은 시도되었을 뿐 실행되지 않았지만, 다른 죽음도 있다. 영화 상에서 좋지 않았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급격히 파탄의 국면으로 들어서는 것은 대왕대비 인원왕후(김해숙)의 죽음을 둘러싼 언쟁에서 촉발되었다. 물론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죽음이 있다. 표면상으로 볼 때 이 영화 <사도>는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어가는 8일을 다룬다. 중간중간에 거대한 플래시백들이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칼을 빼들고 영조를 찾아간 사도세자와 그런 그를 뒤주에 가두는 영조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니까 <사도>에서는 하나의 느린 죽음이 진행되는 셈이다. 

 

느린 죽음? 느리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뒤주 속에서 서서히 말라가며 죽어가는 사도세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영화상으로 볼 때('영화상으로'라는 표현을 자꾸 쓰는 것은, 나는 이 영화의 해석이 실제 사료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혹은 이 영화의 해석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타당한가의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이미 그 전부터 죽어가고 있거나, 거의 죽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니까. 영화 속에는 수많은 이미지들이 있지만,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아 떠도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이 반복되는 옥추경이 울려퍼지는 무덤 속에서 관에 들어가 누워있는 사도세자가 벌이는 기행이었다. 그는 왜 하필이면 상복을 입고 무덤 속 관에 누워있는 것일까. 이것을 단지 죽은 할머니에게 바치는 독경이라고 보기에는 그 형상이 너무도 기괴하다. 혹시 어쩌면 그는 스스로를 이미 죽은 존재이거나, 혹은 죽어가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말라 죽어가고 있었지만, 영화의 플래시백들 속에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대리청정과 반복되는 선위 파동으로) 그 이전부터 거의 말라 죽도록 괴롭히는 것처럼도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도세자는 영조를 죽이려 했던 것일까? 영화 <사도>는 올해 몇 차례 등장했던 살부 서사의 계보에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가깝기로는 <암살>의 살부. <암살>의 자식, 그러니까 안옥윤(전지현)은 아버지를 죽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죽지 않는다. (그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더라면, 그는 그의 쌍둥이 자매와 마찬가지로 가차없이 아버지에 의해 제거되었을 것이다.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은 친일파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지만 그 대신에 그것으로부터의 도피(와 그로인한 죽음)를 택한다.) 반면 (아주 거칠게 말한다면), <사도>의 사도세자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죽음을 맞는다. 아니면 조금 다른 살부 서사들도 있다.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의 홍이(김고은)나 <차이나타운>의 일영(김고은)이나 그들의 아버지를 향해(<차이나타운>에서 일영이 맞서게 되는 것은 엄마(김혜수)이지만, 사실 여기서 김혜수의 외양에서 감지할 수 있듯, 그녀는 엄마라기보다는 아빠에 가까운 것 같다.) 거의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죽음을 겨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다면 그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이 기이한 살부 스토리들은 왜 올해 극장가를 떠돌고 있는 것일까? 혹시 현실에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숭앙하려 애쓰는 이들에 대한 반감이 여기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를 고쳐쓰면서까지 그들 정신적 아버지들이 벌인 추악한 일들을 가리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작은 가운데 손가락은 물론 아니겠지. 

 

아무튼 보지 않은 영화나 잘모르는 정치에 대한 얘기는 이쯤 하고 다시 <사도>로 돌아오면, 아버지를 죽이러 가며 기세등등하게 시작했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묘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처음 영조와 사도세자라는 부자관계에서 출발했던 영화는 점차 다른 부자관계로 중심점이 이동하는데, 그것은 사도세자와 정조라는 부자관계이다. 영화의 중반부까지 뒤주에 들어가서도 어떻게든 죽지않으려 날뛰는 사도세자는 어느 순간부터 점차 죽음을 납득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순간은 뒤주를 깨고 나온 사도세자가 다시 뒤주에 갇히며, 그의 장인 홍봉한이 밀어넣어준 부채를 보는 시점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부채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태어나던 날 사도세자가 기쁨에 겨워 그린 그림이 들어있는 부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세자는 이 시점부터 그가 왕인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세자가 아니라(즉 역모를 일으킨 세자가 아니라), 그저 미쳐 날뛰다가 죽은 세자가 되어야 자신의 아들이 살 수 있다는 논리(그의 장인이 이 부채를 밀어넣어 주는 것도 아마도 그것을 납득하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에 따르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는 막바지에 이르러 뒤주 속에서 죽은 세자에게 전하는 영조의 대사로 재확인한다.

 

이것은 사실 조금 이상하다. 영화는 초반부에는 영조를 이상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며 사도세자에게 중심을 맞춰 놓는다. 즉 <사도>의 초반부는 자식을 괴롭히는(혹은 친일을 하는) 이상한 아버지와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자식들의 전형적인 스토리이다. 그런데 중반부에 이르러 그 고통받는 자식은 이제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고, 그 논리를 그 괴롭히던 아버지를 통해 재확인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중심점은 영화 초반부에는 아들 사도세자에게 놓여져있었지만, 두 개의 부자관계가 교차되면서 아버지들에게 중심점이 옮아간다. 자식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아버지(사도세자)에 다른 아버지(영조)를 겹쳐내면서, 마치 영조도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를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은 명백한 착시일까, 아닐까. 만약 착시라면, 이 착시는 의도치 않게 빚어낸 착시일까, 아니면 고도의 계산이 가미된 착시일까. 단지 무의도라고 보기에는 이 논리가 지금의 현실의 논리들과 비슷하게 닮아있어 어떤 찜찜함이 계속 남는다. 

      

 

  

종이 달, 요시다 다이하치, 2015

      

첫 영화를 애초 생각보다 너무 길게 썼으니, 두 번째부터는 짧게짧게 써야겠다. 마지막에 이르러 뭔가 묘하게 방향을 트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이준익의 <사도>만이 아니다. 요시다 다이하치의 <종이 달>의 여주인공 리카(미야자와 리에)에게는 거의 정해진 결말만이 남은 것처럼 보인다. 점점 부풀어만 가던 횡령은 전모가 드러났고, 남자와의 관계는 끝났으며, 이제 그녀에게는 정해진 대가를 치르는 것만이 남았다. 동료 여직원 스미의 말대로 이제 그녀가 할 일은 '가야할 곳에 가는 것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상으로도 형식적으로도 다른 어떠한 것이 여기에 끼어든다. 일단 형식적으로는 플래시백의 등장이다. 이 영화 <종이 달>은 리카의 과거, 그러니까 리카가 수녀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을 비추면서 시작하지만, 이 과거는 아주 짧게 등장한 후 곧 이야기가 1994년, 즉 리카가 계약직 은행원이 되어 횡령을 처음 시작하던 때로 점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선형적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정해진 시간의 선을 따라 굴러가고, 그 굴러감에 따라 리카의 횡령 규모도 점차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런데 리카의 횡령이 밝혀지는 이 때 다시 영화는 리카가 교복을 입고 있던 과거의 시점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마치 이 과거가 현재의 어떤 의문들에 대해 답을 주려는 듯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 과거씬은 왜 지금 이 시점에서야 여기에 등장하는 것일까. 단지 현재의 어떤 의문들, 즉 리카가 왜 횡령을 저질렀는가에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등장했을까. 기부를 하기 위해 아버지의 돈을 훔치던 소녀의 도벽이 더 큰 것으로 발전되었을 뿐이라는 식의 해답을 주기 위해 여기에 그 플래시백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의 핵심, 즉 '종이 달'이 상징하는 어떤 가짜의 세계에 대한 어렴풋한 실체라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플래시백은 그녀의 가짜 세계에 대한 인식, 손가락으로 달을 지워낼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어떻게 안에서 만들어졌는지 설명해주지 못한다.

 

(어떤 것의 연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멈추기 위한 시도의 하나가 아닐까. 이 플래시백이 현재의 가짜 세계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그 플래시백은 해답과는 거리가 멀다. 리카의 '종이 달', 즉 가짜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플래시백이 등장한 후, 영화는 기어이 가장 가짜같은 장면을 등장시킨다. 창문을 깨고 도망가는 리카. 이것이 가능한가, 아닌가는 차치하더라도, 이것은 이 가짜 세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녀의 도피는 언제까지라도 가능할까.)

 

다만 그 플래시백들은 다른 것을 말한다.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기부하는 것, 그것이 나쁜가요. 리카는 되묻는다. 어쩌면 리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 돈 몇 푼 없어졌다고, 재해를 맞은 외국의 소년보다 더 나쁜 상황에 이르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아버지는 결과적으로 기부를 하게 된 셈이니 좋은 것이고, 외국의 소년은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으니 좋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생각에 화답하듯이 이상한 장면들을 붙인다. (횡령의 피해자이지만) 카메라를 들고 관심을 보이는 노인, 여자친구와 즐겁게 걷고 있는 남자(리카의 불륜상대), 여전히 활달하게 잘 지내는 남편, 꿈꾸는 듯한 눈빛의 스미, 그리고 영화 속 어느 때보다 힘차게 달리고 있는 리카. 모두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 2015

    

언뜻 보면, 홍상수가 그려왔던 세계의 반복인 것처럼 보인다. 상황을 비슷하게 반복시키고, 같은 대사를 다시 하거나, 같은 공간에 비슷한 인물을 넣어놓음으로서 반복이 만들어내는 어떤 화음을 보고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과거의 영화들과 이 영화는 몇몇 차이가 있는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 어떤 영화적인 내부장치로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인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던 홍상수의 과거 영화들을 짚어보자. <극장전>은 영화 속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형식이었다. <하하하>는 두 인물이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취했다. <옥희의 영화>는 한 영화를 여러 개의 장으로 분절했다. <북촌방향>은 시간을 흩뜨려 버렸다. <다른 나라에서>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축으로 해서 이야기를 고쳐쓰는 작업이었다. 즉 여기에는 어떤 장치들이 숨어 있다. 영화 속 영화, 대화, 이야기, 시간의 뒤섞음, 시나리오의 퇴고 등등. 그 외에도 홍상수는 꿈과 같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장치를 쓰며 이야기를 반복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런 외부적인 장치가 없다. 그저 한 영화가 거의 동일하게 다시 상영될 뿐이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두 개의 별개의 영화가 나란히 상영되는 것 뿐이다.(<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한 영화가 끝난 후 다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이 등장하면서 다시 영화가 시작된다.) 즉 관객이 보는 것은 그저 두 편의 나란한 영화이다. 제목은 같고, 등장인물도 같고, 내용도 거의 같으나 미세한 몇몇 가지가 달라졌을 뿐인 영화. 이것은 어떤 영화적 내부 장치, 혹은 형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저 한 영화를 두 번 트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 전의 영화들과 달리 이것이 가지는 효과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조금 더 '차이' 그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 같다. 즉 홍상수의 예전 영화들에서는 어떠한 것이 반복된다는 징후가 없기 때문에 관객들은 갑자기 반복이 일어날 때 반복 그 자체의 양상에 주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관객이 대체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반복되고 있다'는 그 사실,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한 영화가 다시 반복되는 것은 다르다. 한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이야기 그 자체에 주목하는가? 대부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미 다 알고 어떠한 인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다 알기 때문에 그보다는 주목하지 않았던 배경이나 미세한 뉘앙스, 어떤 숨겨진 의미에 그만큼 더 주목하게 된다. 홍상수의 이 영화도 비슷한 것을 노린 것은 아닐까. 즉 두 번째 반복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볼 때 우리는 함춘수(정재영)가 이미 어떠한 행동을 하고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즉 큰 줄거리의 사건은 반복되기 때문에) 반복의 양상보다는 그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훨씬 더 주목하게 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복 그 자체에 현혹되지 않고 반복이 야기하는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영화 속 인물이 말하는, 표면에 숨겨진 것들을 들여다보는, 그럼으로써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은 아닐까. 어떠한 것이든 표면은 대체로 너무도 심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표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늘 놓친다. 표면은 늘 같으니까, 같은 일들이 반복되니까. 홍상수는 억지로 같은 표면을 두 번 보게 만든다. 그래서 그 표면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차이를 어떻게든 찾아내게 만든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럴까? 어쩌면 지금은틀리고그때는맞을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송곳, 김석윤, 2015

      

<어셈블리> 이후로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데, 1회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드라마가 있다. 많은 분들이 반농담삼아 이야기한대로 이 드라마에는 송곳 같은 대사가 많이 나오지만, 나에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송곳같이 파고들었던 대사는 노동상담소 소장 구고신(안내상)이 했던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한편으로 구고신이 늘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하는 이 대사와도 통한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드라마 속 뒷부분을 봐야 더 확실해지겠지만, 구고신이 그 '시시함'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그것을 몸으로 체득했던 것이 아닐까. 드라마 속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과거 고문을 받았고, 아마도 누군가의 이름을 실토한 다음 겨우 풀려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기 위해 누군가의 이름을 털어 놓는 시시한 인간. 이 '시시함'을 깨닫기 위해 그가 바쳐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시시함은 결코 가벼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아니, 꼭 고문이 아니더라도, 그가 수많은 노동운동을 이끌면서 얼마나 시시한 꼴을 많이 봤을 것인가, 살기 위해 배신하는, 혹은 겁내면서 주저하는 시시한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으며, 시시한 일들을 얼마나 많이 벌였을 것인가.

      

그리고 그가 말한대로 거대한 악처럼 보이는 그들도, 사실 거의 대부분 시시한 인간들의 집합이다. 거의 1회에는 절대악처럼 등장했던 정부장(김희원)도 2, 3회에 이르면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중간관리자에 불과할 뿐임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는 또 얼마나 조인트가 까였으며, 누군가에게 굽실댔을까. 그렇다면 그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사상무(정원중)가 절대악일까, 아니면 그도 시시한 강자일까. 적어도 구고신의 눈에는 그들 모두는 시시한 강자이다. 살기 위해 패악질하는 시시한 녀석들. 그래서 어쩌면 구고신은 노동현장에서 사람들을 밀어내는 용역들에게도 노동상담소 명함을 던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용역질하다가 돈 못받고 떼이면 찾아오라고 말이다.

      

<송곳>은 한편으로 그러한 것을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끄덕거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과거 이수인(지현우)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부장. 그녀는 이수인이 곤경을 받고 있을 때 과거 서사와 함께 뜬금없이 등장해서 그를 도와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시청자에게 갖게 하지만, 그녀는 아무 도움도 없이 다만 실없는 응원을 던지고 가버릴 뿐이다. 그들 대다수는 그런 인간들이니까. 그저 악한것이 아니라 다만 시시할 뿐이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도 노동하는 대상이고, 또 서는 위치가 바뀌면 시시한 강자들과 싸워야 하는 시시한 약자가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시시한 약자들과 시시한 강자들의 문제이다. 악은 선이 될 수 없지만, 시시한 강자는 시시한 약자가 될 수 있다. 그들 모두는 시시하니까. 그것은 절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아주 희망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악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시시한 이들이 시시하지 않게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 물론 그 전에 선행되어야할 것은 자신이 시시한 인간임을 깨닫는 것이다. 늘 그것이 가장 어렵다. 그래서 구고신의 일침이 늘 필요하다. "당신들은 다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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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4 0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0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주말에 시간이 있어 (미뤄두고 미뤄두었던) 책장을 정리했다. 한동안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과 읽지는 않았지만 보지 않게 될 것 같은 책들을 빼내고, 그렇게 비워둔 자리에 그간 사놓고 아무렇게나 쌓아둔 책들을 꽂아두었다. 책을 정리할 때 되도록이면 같은 주제의 책들, 같은 분야의 책들을 모아놓으려고 하는 편인데, 이렇게 새롭게 정리하다보면 어떤 특정 분야의 늘어나고 줄어드는 물리적 공간의 비중이 최근 나의 관심사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재미있다. 이번에 정리할 때 보니 소설 분야의 비중이 꽤 늘어났는데, 최근에 소설을 더 많이 사게된 것도 이유겠지만, 한편으로는 신간평가단으로 받은 책들이 꽤 되는 것에도 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또한 그것은 지난 6개월 동안 제대로 정리를 안했다는 얘기도 될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좋은 책들을 받아서 읽게 된다는 것이 늘 고맙다. 몰랐던 작가를 알게 되고, 이 신간평가단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분명히 읽지 않았을 책들을 어떻게든 읽게 된다는 것이 고맙다.

 

정리하는 김에 알라딘 보관함에 있던 책들도 같이 정리했다. 이미 구매한 책들, 혹은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은 책들, 언제 넣어 놓았는지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 책들, 아마도 앞으로 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믿는 책들의 목록을 하나하나 지워나간다. (생각난 김에 첨부하는데, 알라딘 보관함도 책을 분야별로 더 세밀하게 분류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물리적인 책장이 이미 읽었거나, 가까운 시일 내에 읽게 될 것들의 목록이라면, 알라딘 보관함의 책들은 언젠가 읽을 것이라는 기대의 목록이다. 그 기대가 막연한 기대를 넘어서 간절한 욕망으로 바뀐다면, 그 보관함의 책들은 실물로 변해 내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게 되겠지. 그 기대의 목록에 있는 몇 권의 책들을 여기에 늘어놓는다. 이 막연한 기대는 실물로 바뀔 수 있을까. 왠지 어려울 것 같지만, 모르지, 알 수 없지. 욕망은 늘 힘이 무지막지하게 센 법이니.

 

이번 신간평가단에서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면 우리 작가의 소설들을 많이 읽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희망마저도 질식하고 있는 것 같은 사회, 이 사회를 읽어내는 동시대인의 날카로운 시선들을 통해 세상을 본다면, 희망을 구출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작은 위로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분명히 무력하지만, 우리는 늘 무력한 것들을 통해 위로를 받아왔으니까.

 

 

 

사십사, 백가흠, 문학과지성사

 

출판사 책소개를 보니 꽤나 우울한 내용일 것 같다. "불편한 진실에 가닿는 고통스러운 일, 외면하고 싶은 모습의 속절없는 경험 등 진실 발견을 위한 특유의 고행" 그런데 뭐 그것은 그렇게 낯설지 않다. 사실 백가흠의 소설 속 세계는 거의 그랬다. 끔찍한 무엇이 담겨 있었고, 등장인물은 고통을 피하지 않았으며, 아니 거의 부러 고통 속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고통의 이면에는 늘 서늘한 진실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그의 소설에서 어떤 극악한 것을 보게 될지를 알면서도 읽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신촌의 개들, 이상운, 문학동네

 

지나간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지만, 단지 청춘의 회고담은 아닐 것 같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책을 골랐다. 하나는 신형철의 "오십 년 만에 다시 쓰인 「환상수첩」(김승옥)을 읽었다는 생각도 든다."라는 문장. 다른 하나는 '신촌'이라는 공간이 불러오는 기억의 무한한 환기.

 

 

빨간구두당, 구병모, 창비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한다고, 구병모 작가의 책을 지나칠 수는 없겠지. 출판사 책 소개대로, 구병모의 이야기가 권선징악의 교훈만을 담은 청소년 권장도서에 들어갈만한 동화는 아닐 것이다. 그 세계는 환상 속 무엇이지만, 늘 현실을 가장 날카롭게 담고 있었다. 아마도 어떻게든 내 책장에서 실물로 만나게 될 것 같다.

 

 

조선소,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 문학과지성사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내용에 끌려서 골랐다. 소개된 내용을 봐서는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고독과 소외로 존재의 무의미성을 느끼는 현대인의 실존적인 고뇌"까지는 읽지 못하더라도, "우루과이의 혼란스러운 정치.경제 상황, 부패한 관료제도, 불의한 인간 군상" 정도만 읽을 수 있어도 꽤나 성공일 것 같다.

 

 

신들의 마을, 이시무레 미치코, 녹색평론사

 

책의 내용보다도 출판사의 이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녹색평론사에서 내는 소설이라니. 산업공해로 생긴 미나마타병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데, 책의 내용과 출판사 이름이 주는 선입견과는 달리, 단지 사건의 경과와 피해를 다룬 사회고발문학의 성격만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근대는 무엇이며, 과연 좋은 삶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하니 신간평가단이 아니더라도 읽어봐야할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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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10-05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도 하시는군요 읽고 싶은 책이 되면 좋고, 그게 아니어도 새로 알아서 좋은 것도 있을 듯하네요 어떤 책이 나왔는지 찾아보는 기회를 갖기도 하겠습니다 잘 알려진 것은 우연히 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건 우연히 보기 어렵잖아요

사십사라는 제목부터 안 좋아 보이는... 차일드 44라는 책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그 책 안 봤습니다 예전에 볼까 하다가 못 봤군요 그런 책이 한두권이 아니기는 하네요 구병모 책은 청소년 걸로도 나왔더군요 사람한테 나쁘다는 건 처음부터 모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알았다면 그만 써야 할 텐데... 예전에는 잘 모르고 사람한테 안 좋은 것을 여기저기에 쓰기도 했더군요 아니 수은은 안 좋다는 거 알았겠네요 오래전에 화장품 같은 데 넣기도 했잖아요 그때 그게 안 좋다는 걸 알았을 것 같은데... 다음에 무슨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돈만 벌려고 하면 안 된다’ 안 좋은 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서 사람한테 해를 입힌 게 아닌가 해서...

얼마전에 본 소설에서는 공장에서 버리는 물 때문에 벌레 같은 게 금으로 바뀌었어요 공해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거였군요 공장 자체가 커다란 벌레는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데... 다행스러운 건 그것을 안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걸 안 사람이 많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조금 무서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건 어떻게 봐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희선

맥거핀 2015-10-05 19:21   좋아요 0 | URL
네 이번에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추천도서를 쓰는 것은 두 가지인 것 같아요. 정말 이 책을 이번에 받아서 읽고 싶다는 게 하나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서평단 도서로 받지는 못해도 언젠가는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도서를 넣는 거죠. 사실 위에 도서 중 몇 권은 이번에 선정이 안될 게 분명하거든요. 그래도 굳이 넣은 것은 다음번에 언제가 되었든 읽겠다,라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고, 또 이 글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알았으면 좋겠다,라는 욕망도 있는 거겠죠.

사십사,라는 제목은 아마 나이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고 많은 나이 중에서도 굳이 사십사를 선택한 데에는 작가 나름의 이유(혹은 어떤 뉘앙스)가 있겠죠. 사십사...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나이이인데 잘 모르겠네요. 사십사에는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지..

예전에 저도 다큐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 미나마타병 사건이 생각보다 상당히 거대한 사건이더군요. 피해규모도 크고, 이 사건이 다른 여러 부분에 미친 영향도 크고요. 참..그렇죠. 인간들이란 어떻게 될지도 모르면서 여러 알 수 없는 물질들을 막 사용하고, 흡입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물건을 만들어내고 하잖아요. 환경 문제를 다룬 영화나 다큐를 보면, 다들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고 하죠. 아마 지금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다루는 물질 중에서도 같은 케이스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 무심코 사용하지만, 그게 나중에 재앙이 될지 모르는 일이죠.

2015-10-15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19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수의견, 김성제, 2015

 

 

(영화의 내용 및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 <소수의견>의 마지막 장면들은 상당히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재판부는 배심원단의 의견을 뒤집고 피고 박재호(이경영)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죄를 적용한다. 그리고 퇴정하는 재판부와 결과에 분노하는 방청객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준 다음, 박재호의 얼굴을 비추고, 곧바로 이 사건의 키, 그러니까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으려 애썼던 사건 당시의 바로 그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법정을 나서는 박재호로 돌아와 그가 (이유가 어찌되었건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 다음, 교도소 안에서 복잡한 감정에 잠긴 박재호의 모습을 보여주고, 여기에 자식을 잃고 회한과 슬픔에 잠긴 (박재호에게 살해당한) 전경 김희택의 아버지(장광)의 모습을 비춰준다. 이 마지막 장면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두 아버지의 위치는 거의 비슷하다. 자식을 잃은 두 아버지, 서로가 가해자로 얽혀 있는 이상한 상황. 그러나 두 아버지는 (원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는다. 김희택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박재호에게 말한다. 그것은 피치 못할 어떤 상황에서의 실수일 것이라고. 눈 앞에서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장면들에서 이 두 아버지는 서로에 의해 아들을 잃었지만, 서로를 깊이 원망하는 대신에 묘한 연대(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의 지점에 와 있다. 그렇다면 그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의 힌트는 아마도 그 장면들 사이에 이상하게 끼어든 것처럼 보이는 그 결정적 장면, 즉 사건 당시의 화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사건 당시의 장면이 서 있는 위치는 조금 이상하다. 이 장면 전후로 붙은 것은 박재호에 대한 클로즈업이다. 즉 보통의 영화문법에서라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회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 보이는 것은 이 장면들이 박재호의 증언을 강화하거나 그의 입장을 강조해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사건의 상당 부분은 어떤 증언들이나 정황적인 증거, 혹은 검사 홍재덕(김의성)의 위증 강요가 밝혀짐으로서 드러난 상태이고, 배심원단에 의해 박재호의 정당방위가 인정된 상태이다. 물론 그 후에 재판부가 그 결정을 바로 뒤집기는 하지만, 그 장면 바로 후에 재판부의 굳은 얼굴로의 퇴장과 항의하고 분노하는 방청객들의 모습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것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위치가 어디인지 대략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어져서 위치한 이 '사건 당시의 진실' 혹은 '박재호의 시점에서 본 사건의 진실'은 조금은 다른 인상을 심는 것처럼도 보인다. 사건의 어떤 팩트들, 그러니까 전경 김희택이 박재호의 아들 박신우를 죽이고, 다시 박재호가 전경 김희택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것이 영화적으로 눈앞에서 재구성되었을 때 그것은 조금 달라 보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쩌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만약 이 장면을 재판부, 혹은 배심원단이 보고 판결을 내린다면, 그 때는 그에게 정당방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뒤통수를 가격하는 장면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정당방위라고 인정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실제라면 이것은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이 볼 수 없는 장면이 영화적으로 관객에게 심는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이 장면만을 놓고 박재호의 무죄 여부를 판단한다면, 그에게 영화를 본 우리는 무죄를 선고할 수 있을까. 아마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리어 (팩트는 그대로이지만, 거기에 어떤 영화적인 효과를 심은) 이 장면은 박재호에 대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질문을 하기 위해 거기에 위치한 것처럼도 보인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 그들은 거기에서 왜 맞닥뜨리고 있는가. 이제 막 철거되려는 어둡고 침침한 성당 건물에서 그들은 왜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나.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은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을 거기에 몰아넣고, 이들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 자,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한 묘한 연대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 즉 '국가'는 누구인가. 이들은 결국 피해자들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이 재판에서 (보이지 않은) 승리한 자들이다. 영화 <소수의견>은 사실 두 가지의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박재호가 정당방위인가 아닌가를 밝혀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게 배상 책임을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재판에서 박재호와 김희택(의 부)은 모두 지면서 피해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고, 오로지 국가만이 승리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다른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흔히 용사 참사라고 불리는 그 사건. 경찰 1명과 철거민 5명이 죽음에 이르렀던 그 사건. 영화 <소수의견>은 "이 영화의 사건은 실화가 아니며 인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라는 단호한 자막으로 시작하지만(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방지하고, 영화가 하나의 방향으로만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만들어진 후 한참이 지나고서야 지각개봉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분명 어떤 하나의 사건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것은 철거민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도 아니고, 영화를 둘러싼 어떤 이야기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청와대에서 이 사건 대신에 연쇄살인마를 다룬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하라는 요청을 내려주는 장면 같은 것(실제 용산참사에서도 연쇄살인마 강호순 사건을 더 강조하여 보도해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이 있었다)들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런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실제 사건과 영화 속의 사건,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위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 국가가 승리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김영진 평론가는 <씨네21> 지면을 통해 <소수의견>을 다루며, 이 영화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를 희생자의 자리에 위치시키면서, 그들이 희생자의 자리에서 자존을 회복하지 못하게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랬을지 몰라도, 이 장면들은 분명히 어떤 분노를 보는 이에게 불러 오는데, 실제의 사건에서도 모두가 피해자였을 뿐, 승리자는 국가였고, 그들의 하수인이었다. 살기 위해서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올라간 철거민들은 물론,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두 개의 문이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영화<두 개의 문>), 무리한 진압 작전에 투입된 전경 및 경찰들도 피해자다. 이들을 그 옥상에서 맞닥뜨리게 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푸른집에서 나와 그분이 자서전을 쓰시는 동안, 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진압 작전을 지휘한 김석기 씨가 총선에 출마하고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가는 동안, 철거민들은 희생자의 위치에서 자존감이 억눌린 채 살아야만 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의 카타르시스는 이들이 희생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자존을 회복하는 것으로 충족될 지 몰라도, 실제의 어떤 것을 상기시키는 데 이는 때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이 영화가 장면을 소구하는 방식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결정적인 장면의 공개를 최대한 늦춘다. 마치 최대한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사건의 진실이 영화의 키가 되는 법정영화에서 흔하지 않은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 <소수의견>은 어떤 사실관계를 법정에서 추리하면서 밝혀내, 그로인해 어떤 영화적 쾌감을 얻고자 하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정황적 증거는 법정을 통해 거의 밝혀졌으므로 이 장면의 공개로 사실이 뒤집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장면은 어떤 희생자의 정서를 두 사람에게 덧붙이는 것 외에도 (본의 아니게) 어떤 다른 것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 장면의 공개가 이렇게 최대한 지연된 후 드러남으로써 실제의 사건, 즉 용산참사에서의 그 공백을 다시 생각케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화 <두 개의 문>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3천 쪽에 달하는 초동수사 기록과 경찰이 촬영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존재하지 않는 'No Signal'의 채증 영상. 그 곳에서는 사람이 불타 죽었지만, 그들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아무런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공백을 앞에 두고, 오로지 철거민들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를 영화에 물을 수 있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영화 속 재판부나 혹은 윤진원 변호사(윤계상)의 위치에 비슷하게 서 있다. 우리는 정황적인 증거를 보고 있지만, 사실 중요한 지점은 여전히 공백에 놓여져 있다.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박재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물을 수 있다면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러나 실제의 재판부는 영화 속 재판부와 같이 그에게만 책임을 물었고, 그들만 피해자이자 희생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결정적 장면을 결국 영화 속에서 공개하지 않고 끝내는 것도 가능한, 어쩌면 더 훌륭한 선택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의 설정대로라면 이 장면은 결국 우리가 볼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볼 수 없는 것을 영화가 보여줄 때 생기는 쾌감, 혹은 정서와 그와 동시에 발생하는 어떤 미심쩍음. 그것은 늘 비슷한 무게이지만, 그 미심쩍음이 종종 더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도 그렇다.)

 

이 바깥에, 그러니까 박재호나 김희택의 부 외곽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있다. 아마 우리들 대다수도 그에 해당할 것이다. 영화는 두 가지의 인물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경직되어 마치 어떤 부품처럼 존재하는 사람들. 국가의 대리인으로 나온 자들, 그들은 마치 어떤 기계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들이 보여주는 차갑고 기계적인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미소(특히 여검사가 보여주는)도 마치 로봇이 보여주는 그것같아 섬뜩하다. 그것을 홍재덕 검사는 영화 끄트머리에서 요약하여 말해주는데, 그것은 자신이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즉 그 '넌 뭘했냐'는 그 물음은 네가 부품으로서 뭘했냐,는 질문인 것이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인물상들이 있다. 윤진원 변호사, 장대석 변호사(유해진), 공수경 기자(김옥빈) 같은 인물. 이들은 언뜻 '대의'라는 큰 틀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동시에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지향점이 있다. 즉 어떤 대의도 물론 중요하지만, 동시에 윤변호사는 지방대를 나와 국선변호사나 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고, 공기자는 특종을 터뜨리고자 하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어떤 대의라는 큰 기계의 부속품은 아닌 것이다. 각자 나름의 욕망으로 최선을 다해서 그 대의를 수행하고자 하는 어떤 각축도 여기에는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에는 대의가 단지 선의의 총합만으로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완수될 수도 없음을 아는 어떤 현실 인식이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윤진원 변호사는 하나의 일화로 잘 요약하여 들려주는데, 그가 떨어지는 실력에 지방 국립대에나마 갈 수 있도록 공부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학생운동으로 인한) 수배자로 방에 숨어있던 형의 친구였다. 영화 속 장대석의 한숨섞인 한탄대로, 이 386 따라지에 대한 (한숨섞인) 부채 의식. 이는 영화 속에서 이들이 처한 위치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 부채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같이 말해준다. 그것은 기계가 지시하는대로만 움직이는 부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신의 욕망과 염치를 가지고 그것에 대응하며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이에 대비되는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그 로펌으로 들어간 홍검사, 아니 홍변호사의 몰염치). 몰염치의 시대의 최소한도의 염치,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의 인물들, 윤변호사와 장변호사, 공기자, 그리고 더 나아가 박재호와 김희택의 아버지 등은 보여주고 있다(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 혹은 원망하지만 그것이 피치 못할 사정임을 아는 것).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국가라는 기계가 벌이는 몰염치의 공습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저번에 양심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베테랑>의 쪽팔림을 묻는 그 질문도 여기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몰염치의 시대, 우리는 우리의 염치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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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6 0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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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7 18: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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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5-08-2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읽었고, 영화는 아직 못 봤어요.
맥거핀 님의 글을 읽고 나니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맥거핀 2015-08-27 18:30   좋아요 0 | URL
저는 반대로 영화만 봤지, 책은 못봤습니다.^^ 책도 평은 괜찮은 것 같은데, 영화도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강력추천 합니다.

2015-09-01 1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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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2 1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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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2 14: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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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2 15: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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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2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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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2 16: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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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4 1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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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9-03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사회와 심리정치의 행렬처럼 양심-몰염치....맥거핀님이 보는 이 사회의 영화적 계보도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 기대되는 수순입니다? <위로공단> 보시면 또하나 나올 거 같은데 말입니다.
인상적인 리뷰였습니다.

맥거핀 2015-09-04 12:25   좋아요 0 | URL
저번에 양심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염치가 더 맞을 듯 해요. 요즘에 뉴스를 보면 시대의 트렌드(?)가 몰염치인듯 싶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에까지 이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뻔뻔하게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아마도 그런 내용의 영화들도 점점 늘어나는 것이겠죠. <위로공단>은 조금 위로가 될까요..

2015-09-09 16: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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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6 0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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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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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류승완, 2015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류승완의 신작 <베테랑>은 전작들, 특히 그 중에서도 <부당거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영화다. 물론 어떠한 것들이 대척점에 서 있으려면 그것들은 공유하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부당거래>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역시 경찰 내부가 주 무대가 되며, 그들의 활동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가 된다. 류승완은 이를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활용하려는 듯이 보이는데, 예를 들어 배우들의 거리낌없는 활용이 그것이다. 황정민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 형사 역할을 다시 맡고 있으며, 천호진, 안길강, 김민재 등의 배우들이 비슷하게 재변주된다. 물론 <베테랑>은 <부당거래>와 다른 점이 훨씬 많은 영화다. 그것을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캐릭터에 보다 확실한 색깔을 입히려 했다는 부분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당거래>나 그 이후 나왔던 <베를린>이나 인물들의 캐릭터는 복합적이고, 구도는 복잡하다. 인물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모호하게 자리잡고 있고, 이야기는 점점 중층적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베테랑>은 다르다. 인물들의 선악의 경계는 확실하고, 영화는 그들의 거의 처음 등장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이 인물의 성향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방점을 찍는다. 

 

그러니까 이번 영화에서 류승완은 드라마에서 다시 액션으로 방향을 튼 것처럼 보인다. 예전 <베를린>에 대한 평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지만, 좋은 액션물에서 이야기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캐릭터를 어느 정도 명확하게 규정짓는 것은 필수적이다. 어떤 액션물이든 관객은 심정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액션물이든 설혹 주인공이 지나친 폭력을 휘두르는 듯이 보여도, 관객은 그 캐릭터를 응원하며 영화를 본다. 그 캐릭터가 어느 쪽의 편에 서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까닭에 그렇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액션물에서 캐릭터의 성향을 규정짓는 것은 그들의 액션의 형태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특유의 액션들이 있다. 성룡의 영화에서 성룡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고, 본 시리즈에서 주인공 본이 보여주는 액션이 있으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서 주인공 에단 헌트가 보여주는 액션이 있다. 그것은 각각의 형태가 다른, 특유의 액션이며, 캐릭터의 성향과 결합된 액션이다. 이 영화 <베테랑>에서도 주인공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보여주는 액션과 악역 조태오(유아인)가 보여주는 액션은 다르다. 서도철이 보여주는 것은 그의 느물느물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한 성룡 식의 슬랩스틱 액션이다. 어딘가 허술해보이고, 맞기도 많이 맞지만, 사실은 기술적으로 꽤 다듬어져 있다. 그러나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며, 치명적인 공격은 피한다(성룡의 공격으로 사람이 죽는 법은 없었다). 반면 조태오의 액션은 비열하고 치졸한 액션이다. 즉 예전 동네 비열한 양아치들이 일대일 주먹 싸움에서 불리해지면 접이칼을 꺼내들던 식이다. 그는 불리해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어떤 잔인한 방식도 서슴치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액션 방식은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 있다. 쪽팔리게 하지 말자. 이 말은 주인공 서도철이 계속 반복적으로 하는 말이자, 그가 어떤 삶의 태도로서 지향하는 말처럼 보인다. 서도철은 조태오의 돈의 회유에 넘어간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압력을 가할 때, 늘 되풀이하여 말한다. 쪽팔리지 않아요? 부끄럽지 않아요?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부끄럽게 맞기보다는, 차라리 정정당당하게 맞서는 쪽을 택하라고 말하며, 그것은 다시 그의 아내(진경)에게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이는, 그러니까 무리하게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리어 감독이 가장 하고 싶어하는 말처럼 보이는 장면은 아내가 경찰서에 와서 하는 그 대사이다. 나, 쪽팔리게 하지 말라는 것.) 즉 류승완은 대놓고, 노골적으로 이 영화에서 묻고 있다. 그거 쪽팔린 거잖아,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즉 이 핀트는 조태오에게 어느 정도 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조태오의 악행을 돕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영화 상에서의 조태오는 그것이 쪽팔린 건지, 아닌지 이미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인물이니까. 그 메시지는 조태오의 하수인들, 그러니까 최상무(유해진)를 비롯한 조태오의 곁에서 악행을 실행하는 인물들(하다못해 조태오를 수행하는 경호원들에게까지)이나 그의 돈의 유혹에 굴복하여 서도철에게 압력을 가하는 경찰 내외부의 인물들에게 향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감독 류승완이 이 사회에 던지는 나름의 진심어린 호소일 것이다.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 제발.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것은 사실 순진한 메시지일 수 있다. 쪽팔리지 말자, 부끄럽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어떤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배반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잘 알면서도 류승완은 그것에 건다. 어쩌면, 류승완은 이제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양심이라는 것은 이제 류승완의 영화에서 묘하게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류승완의 초창기 영화는 보다 순진했다. 사실 알고보면 순진한 남자들이 순수한 것을 지켜내려고 싸우다가, 혹은 그것에 배반당해 죽었고, 그것을 류승완은 촌스럽게 찍었다. (물론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제 더이상 그렇게 촌스럽게 찍지는 않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주먹이 운다>, <짝패>의 인물들. 그 이후에 류승완은 시스템의 문제를 엿봤다. 그것은 아마도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양심으로만은 안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반대편에는 거대한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혹은 그 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부당거래>에서의 시스템의 탐색은 여전히 그것이 견고하다는 재확인이었다. (<부당거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한다면, <부당거래>는 결국 그 시스템이 작동하는 그 방식으로 정확하게 끝을 맺으며 거기에는 어떤 절망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베테랑>의 어떤 호소가 있다. 쪽팔린 줄 알아. 즉 류승완의 처음 영화들이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개인들의 실패를 응시했다면, 두 번째에서는 그 조직이 바뀔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탐색하며 다시 그것에 절망감을 맛본 다음, 이제 <베테랑>에서는 약간은 우회적이지만, 보다 강력한 접근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그 조직, 시스템 구성원들의 개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거기에 그러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니.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순진한 호소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가장 근원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설사 어떤 악이 거대할지라도 그 악은 소수의 절대적인 악과 다수의 중간자적 모호함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의 모호함들을 선의 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면 악은 뿌리뽑힐 수 있다고 류승완은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류승완의 게임이다.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이제 걸어보는 마지막 승부수. (다시 말해서 류승완이 보는 한국사회는 혼탁해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무협영화의 강호이다. 갑은 굳건하고, 을이 을과, 또는 을이 병과 싸우게 만드는 이상한 법칙이 난무하는 세계 - 조태오의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격투는 바로 그 풍경이다. 너무 노골적이기는 하지만 - 그러니 시스템과 맞서는 개인, 그러니까 액션 영웅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이 액션 영웅은 단지 절대악을 처단하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다. 배트맨의 임무도 결국 절대악, 예를 들어 조커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선량한 이들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협영화의 영웅도 절대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강호의 도리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베테랑>의 서도철도 이 지점에 비슷하게 위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승부수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 영화는 사실 정확한 마무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서도철의 승리로 게임이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게임의 결말은 아직 알 수 없다. 우리는 현실에서 승리처럼 보였지만 승리가 사실 아니었던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로 인하여 새삼 화제가 되었던 여러 지난 사건들. 그 지난 사건들에서 가해자들은 어떻게 처벌되었고, 결국 현재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이 영화의 결말이 승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안다. 그 끝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어쩌면 류승완은 이 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을 풀어준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에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일조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 하고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의 순진한 호소가 너무 딱해서 내가 말하는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보여주지 않은 것에서 무엇인가를 봤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억지이니까.) 다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자. <베테랑>은 거대한 조직과 단지 가지고 있는 조그만 힘으로 대결하려는 개인을 보여주는 류승완의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영화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개인은 조금 더 느물느물해졌고, 단지 고독한 액션 영웅이 아닌 주위를 돌아보고 활용하는 방법을 조금은 배운 것 같다.

 

그것이 단지 두 시간 동안의 영화적 쾌감으로 끝나는가, 혹은 그 이후의 다른 것으로 조금이나마 연결되는가는 결국 관객의 몫이다. 다시 말해서 상대의 알 수 없는 진심을 믿고 벌이는 순진한 게임. 그 순진한 게임이 순진한 패배로 끝날지 아닐지는 이제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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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8-1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괴물은 될 대로 되었고, 괴물의 과도기에 있는 이들에게도 먹히지 않을 ˝쪽팔리진 말자˝...쪽? 그 까짓 거 힘있으면 다 돼(꾸미든, 상대를 철저히 부수든) 하는 시대, 구호가 광고보다 못한 시대, 괴물이 되는 악의 심리와 마찬가지로 선의 심리도 건드리겠다는 거군요. 악에 쉽게 경도되는 전염성 만큼이나 선의 추구도 그 전파성을 믿어보아야겠지요. 우리가 기대는 희박성. 그러나 또한 우리가 모르는 미래.

그런데....문득 유하 감독 영화들에서 그 시대/세대적 감수성이 점철되는 걸 생각해 볼 때 류승완 감독의 작품들에서도 저는 그런 유사성을 느낍니다...˝쪽팔린다˝란 말이 한참 회자되던 시대가 있었죠. 요즘 세대는 ˝쪽팔린다˝ 그리 잘 쓰지 않지 않나요??
도킨스도 말했다시피 우리는 조상과 부모와 닮기보다 세대를 더 닮기 마련이라는 점도 겹치네요...
어쨌거나 ˝쪽팔린다˝에 대해 부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맥거핀 2015-08-15 14:36   좋아요 1 | URL
네..촌스럽죠. 어떻게보면 딱하기도 하구요. 위에도 썼지만 그게 류승완의 감성이기는 했습니다. 옛날에는 내용도 형식도 촌스러웠다면, 이제는 형식은 많이 나아진 편이죠. 근데 그런 순진한, 나이브한 메시지가 결국에는 궁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죠. 류승완의 영화가 촌스럽기는 하지만, 힘이 생기는 것도 바로 그런 나이브한 메시지 때문일 것이구요.

다만 이것이 단지 영화 안의 쾌감으로서가 아니라 영화 밖의 무엇인가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조금 세련된 마감들이 필요하리라고 봅니다. 단지 이것이 영화 안의 쾌감으로, 혹은 도리어 그 반대로 작용한다면 순진한 메시지들은 결국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요즘에는 `개쪽`이라고 하겠죠. (아니..어쩌면 이것도 옛날말이려나요.) 그런데 그 개쪽이란 그 옛날의 `쪽팔리다`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쪽팔림`이 예전에는 대체로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이 `개쪽`은 대체로 타인을 향해있죠.

2015-08-15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5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