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여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다큐멘터리의 진실의 정치학'이라는 주제로 몇 편의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그 중에 두 편, 김성균 감독의 <꿈의 공장>과 이강현 감독의 <보라>를 보았다.

꿈의 공장 Dream Factory, 김성균 감독



멍청한 질문과 당연한 대답. 왜 노동자(굳이 무식하게 구분하자면 '공장' 노동자)들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좌파적 성향을 띠는 것처럼 보이는가. 어떤 우연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만이 노동자가 되는 것인가, 혹시 노동자들 사이에 소위 불순분자들이 자꾸 끼어들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노동자들이란 유난히 욕심이 많은 집단이기 때문에,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인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이 영화 <꿈의 공장>은 아직까지도 일부 전근대적인 구조를 가진 한국의 노동현실에서 노동자들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결국에는 생존의 문제와 연관이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연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연대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방편이다. 여러 방법 중에서 그것이 가장 그나마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쓰는 것이다.

2007년 3월, 기타 제조회사인 콜트/콜텍사의 인천공장 근무자 55명이 집단 정리해고됐다. 다음달인 4월에는 대전공장이 '무기한 휴업'이란 성의없는 종이쪽지를 내 건채 폐쇄되었다. 이 영화 <꿈의 공장>은 그런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생존(복직)을 건 사투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노동자들만 그려내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방식의 연대가 있다. 그것은 여러 뮤지션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흐른, 브로콜리너마저 등 수많은 뮤지션들은 이들의 뜻에 공감하여 '콜트/콜텍 노동자를 위한 콘서트'를 했고, 이 연대는 바다건너 수많은 외국의 뮤지션들(예를 들어 '오디오슬레이브'의 톰 모렐로, 오조매틀리 등)에까지 연결되었다.

왜 이들은 기타 공장 노동자들의 이런 생존 투쟁에 동참하는 것일까. 이들이 착한 뮤지션이기 때문에? 이들의 어떤 '참여'가 단지 '선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영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한다. 하나는, 좋은 음악을 위한 것이다. 콜트/콜텍사는 오랫동안 팬더, 깁슨, 아이바네즈 등 유명 기타 제조사들의 하청을 받아 기타를 제작해왔고, 그 기타는 세계 여러 곳에 수출되어 유명 뮤지션들의 손에까지 전달되었다. 그러나 콜트/콜텍사는 경비절감을 위해 제조공정을 무리하게 단축하고, 인원을 절감하였고, 그 결과는 품질의 저하로 나타났다. 그리고 품질의 저하는 곧 뮤지션들의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즉 이 뮤지션들의 노동자들의 복직에 대한 열망에의 동참은 좋은 소리를 내고 싶은 열망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영화에는 잠깐 '노동자들의 피가 묻은 기타'를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즉 여러 노동자들의 피섞인 투쟁과 한맺힌 외침이 서린 기타를 구입하지 않는 것, 그것은 예를 들어, 착취적인 아동 노동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사지 않는 것과 같다. 그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착취에 동참하는 행위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연대가 실제적으로 가능하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아름다운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한편으로 보여준다. '한 걸음 더 들어왔다고, 당신이 이해한 것은 아니다'라는 영화의 자막처럼(아마도 노래가사나 제목인 듯 한데, 잘 모르겠다. 내가 알아본 것은 모리씨의 'The More You Ignore Me, The Closer I Get' 뿐.) 이 영화는 연대의 여러 어려움에 대해 한편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영화 속 뮤지션들의 토로에서도 드러난다. 콜트/콜텍의 기타가 다른 기타보다 상대적으로 싼데, 내가 만약 돈이 있다면 모를까, 돈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어쩔 수 없이 그 기타를 사지 않을까. 아니면, 우리가 기타 이외에도 이미 수많은 물건들을 구매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부당하게 만들어진 물건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기타만을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혹은, 설혹 어떤 물건이 예를 들어 아동착취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그 아이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라도 사지 않으면 굶어 죽을 테니까...같은 질문들.

동시에 이런 연대와 관련된 질문들 외에도 영화는 여러 생각해 볼 만한 질문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외국인은 말한다. 당신(콜트/콜텍 노동자들)의 CEO가 그렇게 부당한 인물이라면, 당신들이 왜 그렇게 복직을 주장하는지? 차라리, 당신들이 나가서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기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나 이 질문은 현실의 벽을 맞고 튀어나와, 혹은 악보 속의 도돌이표처럼 돌아와 노동자들을 감싼다. 이 많은 노동자들이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무슨 돈으로 투자를 하고 공장을 만들어낸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꿈을 꾼다.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내건 기타를 만들어내는 꿈을, 그리고 그런 기타가 여러 뮤지션들의 손에 의해서 훌륭하게 연주되는 꿈을. 누군가의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에서 이제 자신들의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절박한 외침이지만, 다른 누군가에는 편리하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에 불과한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의 가증스런 의미와 '연대'란 왜 필요하며, 그 앞에 놓인 장벽들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노동자들의 애타고 필사적인 호소로, 그들을 도와줄 것처럼 보였던 팬더나 깁슨은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결국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겠다고 통보한다(물론 이들의 이런 행동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콜트/콜텍의 그런 부분을 예전부터 충분히 그들이 알고 있었음을 영화는 말해준다). 그리고 콜트/콜텍사의 복직 문제는 여전히 우리 법원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의 공장을 향한 애타는 외침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진다.

보라 The Color of Pain, 이강현 감독



엇, 이게 뭘까. 상영시간 텀이 짧아 저녁 대용으로 구석에 앉아서 몰래 먹던 참치김밥이 목에 걸린다. 이강현 감독의 <보라>는 기이한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저 족보 없는 구도는 뭘까. 산업체에 보건관리를 나온 의사와 업체 직원의 대화는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데, 카메라는 다른 어떤 직원의 등 뒤의 사무실 구석에서 이들을 화면 한 귀퉁이로 몰아넣고 찍고 있다. 감독이 너무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찍는 걸까, 혹은 이건 일종의 몰카인걸까.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구도는 영화 내내 이어진다. 영화의 내용상 이 영화는 여러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모습과 노동자들과 보건관리를 나온 의사들의 대화를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영화 가운데에서 커다랗게 보여지는 법은 좀처럼 없다. 카메라는 구석에 박혀 있거나 천장 가까이에 가있고, 인물들은 화면의 구석에 밀려나 있다. 때로는 인물은 말하지 않는데, 어디선가 말소리들이 들리고, 인물은 말하고 있는데, 그들의 말소리는 공장 소음에 묻혀 있다. 인물은 소외되어 있고, 다른 물성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은 요즘에 말하면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이 분명한 뭐 그런 단어, 그러니까 낯부끄러워지는 것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예를 들어 '노동 속에서 소외되는 인간' 같은 것일까.

먼저 팜플렛에 나온 영화의 소개.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하면 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의 근로자는, 해당 사업장의 보건관리 업무를 맡은 보건관리대행기관의 산업의학전문의에게 3개월에 한 번씩 보건관리(작업환경 점검, 건강 상담, 직업병 상담)를 현장에서 받도록 되어있다. 이 영화는 위 법률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현장보건관리를 1년여간 촬영한 기록물에서 출발한다."

영화 내용의 소개에서 미루어 보듯이, 이 영화에는 의사와 노동자들의 연이은 상담들이 빈번하게 출몰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 대화들은 일종의 부조리한 코믹극처럼 보인다. 의사들이 거의 형식적으로 하기 때문에, 혹은 노동자들이 이것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혹은 노동자들이 멍청하기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 영화에 나온 의사들은 나름 성의를 가지고 노동자들을 상담하는 것처럼 보이고, 노동자들은 최대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거의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노동자들도 알고 있고, 의사들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근골격계 질환, 혹은 특정 약품이나 공정에 의한 여러 증상들은 그 노동을 그만두어야만 호전된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만두면 누가 이들의 생존을 담보하는가. 거기에 있는 의사들이 이들을 먹여살려 줄건가. 그러므로 노동자도 웃고, 의사들도 그저 웃을 수밖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으시죠? 하하, 허허. 그러므로 의사와 보건관리기관의 대응은 사후적이고, 그 대응의 최대치는 단지 조사하여 표본화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것은 동시에 부조리해보이는 것이다. 즉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비디오를 면밀히 체크하며 할머니가 고추밭에서 일분에 몇 번이나 쭈그려 앉는지를 세는 의사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워보이는 이유는 그 의사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 행동이 근골격계질환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밝혀낼 수 있어도, 그 할머니의 그 행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동시에 그런 조사가 그렇게 의미가 있을까. 영화 속 한 노동자는 말한다. 우리가 왜 아픈지는 딱 하루만 일해보면 알아요). 또 한편으로 보건관리기관의 특정 약품에 대한 역학조사발표 중에 이루어지는 마이크 조작미숙으로 큰 소음이 일어나는 해프닝이 단순히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발표내용 때문이다. 이미 10명 이상이 넘는 노동자가 한 공장에서 죽어나갔음을 밝히는 그 사후성이.

또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러한 조사들은 불확실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음이 그러하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유리섬유를 다루는 공장의 모습과 어떤 은퇴한 공장노동자의 발언의 교차편집. 예전에 석면을 다루는 공장에서 일했다가 이제는 몸이 망가져 거의 집안에 갖혀서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된 은퇴한 공장노동자의 증언. 그리고 이제는 석면이 거의 유리섬유로 대체되었다는 공장의 설명과 유리섬유는 현재 완전히 유해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는 자막. 그리고 교차되어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증언. 아..글쎄, 그 공장에서 2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그게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렇게 갑자기 영향을 미칠 줄 알았나. 이제 대체된 유리섬유는 노동자의 몸에 잠복해 있다가 언제가 되서야 나타날 것인가.

영화가 한편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이후이다. 영화는 이렇게 꽤나 장시간 노동현장의 보건관리를 다룬 후 갑자기 어느 인터넷 서버관리자의 밤샘근무를 보여준다. 그리고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활동(이것은 그 전의 노동조합에 계신 분이 공들여 회의 장면을 사진으로 찍는 것과 겹쳐진다)과 두 명의 아마추어 사진가의 인터뷰를 보여준 후 갑자기 망가진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는 약간 사짜 풍의 남자의 작업을 보여준다. 도대체 이건 무슨 조화일까. 앞의 노동현장의 모습과 뒤의 취미활동의 대비를 생각해보면, 이 중간의 인터넷 서버관리자는 일종의 브릿지이다. 그의 노동의 형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취미와 노동의 중간에 와 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듯이 그는 감독에게 자신이 취미로 만든 홈페이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영화는 취미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그 취미의 영역에서 영화는 달라진다. 인물들은 가운데에 위치하기 시작하고,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되며, 심지어는 BGM이 깔린다. 취미로 사진을 찍고, 야구를 하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깔려지는 그 아름다운 BGM을 들을 때의 안도감(이는 앞의 공장의 소음과 극명히 대비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취미라는 것과 대비되는 노동의 가장 중요한 특성을 다시 일깨운다. 그것은 노동은 생존이라는 것. 취미로서의 행동들과 앞의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의 행동이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은 결국 생존을 걸고 하는가, 아닌가라는 점이라는 점.

그렇게 보면, 인터넷 서버 관리나 하드디스크의 복구라는 것도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만은 않는다. 인터넷 서버는 결국 수많은 하드디스크가 모아져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 수많은 기억의 집적인 것.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러 온 남자에게 묻는 복구의 이유. 거기에는 10년간 모아온 수많은 음악 파일이 들어있고, 사진들도 들어 있고...취미로서의 기억들의 집적. 그러나 이와 대비되어 기억되는 영화 전반부의 어떤 풍경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할머니에게 의사가 묻는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하세요. 몇 시간이나마나 하루 왠종일하지 뭐. 그럼 매일 그렇게 왠종일 하세요. 아니 매일 그렇게야 못하지. 왠종일 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언제부터 농사를 지으셨어요. 글쎄 얼마나 했나. 기억해 보세요. 시집올 때부터 했지 뭐. (하하 웃으며) 글쎄 시집을 언제 오셨냐구요. 18살 때 왔지....노동의 시간은 엄청나게 집적되지만, 그것은 기억에 없는 것. 노동의 시간이란 축적되지만, 그것은 기억의 축적이 아니라, 고통의 축적인 것, 어떤 의미에서는 망가져버린 하드디스크와 같은 것.(이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시간의 연결 방식을 생각해 보도록 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나감을 아주 극도로 짧은 암전으로 처리한다. 어쩌면 노동이란 이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에 없는, 지나고나서 보면 극도로 짧은 암전같은 것, 남은 것은 망가진 몸뿐인 것.)

노동이 결국 생존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결코 녹록하지 않다. 이강현 감독은 이 영화의 제목이 '보라(The Color of Pain)'인 이유가 보라색이 멍이 든 색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하며, 이 영화의 촬영 대상으로서의 공장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는 인터뷰(그러고보면 이 영화에서 한 노동자가 "사고나는 장면은 언제 찍을거냐"며 그런 장면이 들어가는 영화 아닌가 라고 물었던 컷이 있다. 또한 이 영화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촬영한 화면을 보는 장면도 있는데, 지아장커의 <24시티>나 <무용>과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를 했다. 그 인터뷰를 곱씹어보면 이 영화가 더욱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나마 사람들이 찍을만하다고 허락해준 공장들과 인터뷰들이 이 정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지 못한 영화들에는 어떤 장면들이 담길까. 전작 <파산의 기술>에 이어, 이강현 감독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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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9-10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9월 1일부터 매주 목요일 밤 12시에(그러니까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EBS에서 '독립다큐관'을 방영하고 있다. 위에 쓴 이강현 감독의 전작 <파산의 기술>은 9월 29일 방영 예정.

2011-09-10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1-09-20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이거 어떻게 하면 볼 수 있죠?! 보고 싶은데...리뷰 보니 정말 보고 싶어 졌어요!

맥거핀 2011-09-20 19:42   좋아요 0 | URL
<꿈의 공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현재 절찬리(^^) 개봉중입니다. 헌책방 다녀오셨다는 글로 봐서는 yamoo님이 서울권이신거 같은데, 씨네마 상상마당이나 KU시네마테크(건국대), 인디플러스 등에서 상영하고 있구요.

<보라>의 경우는 후반기에 개봉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아직 정식개봉 전이고, 지금은 영화제나 독립영화 상영회 같은데에서 띄엄띄엄 상영하는 중입니다.

<꿈의 공장>이나 <보라>나 배급사인 씨네마 달(http://cinemadal.tistory.com/)의 홈페이지에서 상영시간표나 개봉관을 그때그때 안내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확인해보시는 것도 좋으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극장상영이 완료되면, 인디플러그(http://www.indieplug.net/) 사이트에서도 다운로드 서비스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영화를 한 편, 한 편 계속 보면서, 결국 영화만의 그 어떤 결정적인 특성에 주목하게 된다. '영화만의 그 결정적인 특성' 중의 하나는 카메라다. 영화는 필름이든, 디지털이든 결국 카메라로 '촬영'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그 카메라를 든 자의 주관적인 시선 혹은 입장, 권력이 개입되며, 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이 어떻게 촬영되는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매우 다르게 전달된다. 하나의 경우로, 남녀가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담는다고 했을 때, 같은 대화라도 그것이 어떻게 촬영되는가에 따라 분위기는 매우 달라진다. 예를 들어 남녀를 각각 오른쪽 왼쪽에 배치하고 하나의 프레임안에 담으면 어떤 친밀한 분위기를 느끼게 할 수 있다. 반면, 남녀 각각을 따로 잡아 번갈아 배치하며 잡으면 이전 보다는 친밀성이 떨어지며 각각의 입장이 도드라질 것이다. 아니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 남 녀를 동시에 잡되, 그들을 카메라를 등지게 한다면... 그 때는 어떤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될 것이다. 더욱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다면, 카메라를 바닥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발만을 잡을 수도 있다. 경우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남녀를 동시에 잡되, 사운드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 대사야 자막으로 처리하면 된다.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 사운드를 매우 증폭시킬 수도 있다. 배경소리가 증폭되고, 남녀의 대화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될 때의 묘한 분위기는 어떨까. 아니면, 남녀 중에 한 명만 흐릿하게 처리한다면....선택의 수는 무한대로 증폭되고, 그 때마다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어제 본 두 편의 영화 모두 카메라의 활용이 흥미롭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각각의 독특한 촬영 방법들은 영화를 종종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즉 카메라는 이야기보다 우위에 있다. 이 이야기가 다른 각도로 전달되었으면, 우리는 이 이야기들을 분명히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환호성 (Hurrahh!) - 정재훈 감독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의 연장선이지만, 이 영화는 카메라의 활용이 독특하다. 사실, 이야기로만 봤을 때는 이 영화는 거의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혼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있다. 이야기는 그저 이 남자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는 집에서 누워있다가,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시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잔다. 이야기는 이것이 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다양한 카메라, 사운드의 활용이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먼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운드다. 이 영화의 사운드는 전반적으로 묘하게 증폭되어 있다. 당구장이나 세차장에서 일할 때는 주위의 소음들이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크게 증폭되어 있다. 또한 영화 중간중간에 산의 풀숲들을 찍은 화면들이 지속적으로 삽입되는데, 이 때는 웅하는 바람소리 비슷한 것들이 스며들어가 있고, 이상한 소리들이 끼어든다. 이 풀숲 장면들만 놓고 보았을 때 영화는 거의 어떤 공포물처럼 보인다. 이외에도 마치 촬영을 잘못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 영화에는 이상한 소리들이 스며들어 있다. 카메라 역시 마찬가지다. 화면은 때로 핀트를 잘못 잡은 듯이 나가버리고, 때로는 일부분이 거의 깨져버리기도 한다.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을 찍었는데, 마치 이 인물이 유체이탈을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가까이에서 일부의 조명으로만 인물을 잡아, 인물은 매우 기괴하게 보인다. 이러한 효과들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수도 있다. 이것은 별 의미없는 실험같은 것의 총체가 아닐까, 아니면 만든 이의 여러 실수가 너무 지속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닐까, 그도 아니면, 이것은 그저 카메라를 가지고 노는 장난같은 것일까, 또는 어느 영화과 학생의 쓸데없이 과잉된 자의식의 치기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감독의 전작 <호수길>을 본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조금은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어떤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이 영화는 <호수길>의 연장선에 와 있다.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호수길>에서도 마치 실험과도 같아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고, 그것은 사실 영화 전체에 의도적으로 주의깊게 삽입된 것이었다. 여러 효과들로 인하여, 그저 평범한 산길과 마을의 모습을 담은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거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영화가 되었다. 그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마을 한 가운데에서 마을을 때려 부수던 포크레인이 '드디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경험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쌓은 그 효과들로 인하여.

그러므로 이 이야기도 조금은 다르게 읽힌다. 몇몇 효과들은 그 장면을 거의 다르게 우리에게 인식시킨다. 예를 들어, 사운드의 증폭.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주위의 배경음은 늘 크게 들린다. 당구장이나 세차장에서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도 마찬가지. 그 상황에서는 어쩌면 그 소리들은 그렇게 크고 무시무시하게 들릴 것이다. 남자의 배가 비춰지며, 이상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것은 어떨까. 배고픈 자에게 자신의 꼬르륵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 아무 것도 없는 방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것은 자신의 꼬르륵 소리 뿐이다. 그 소리는 무언가를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내면의 필사적인 외침이기도 하다. 반면, 밤의 외부 화면을 찍은 화면이 일종의 공포물이 되어 있는 것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외부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처럼, 화면 속의 그에게도 공포이다. 그가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결국 돈을 벌지 못하고, 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니까. 이 겨울에 바깥은 공포이다(겨울산의 배경). 그러므로 그 바깥에서 그는 때로 유체이탈이 되고, 화면의 깨진 픽셀은 유령처럼 서 있다. 그 유령은 깨진 화면 속에서 '으스스하게' 존재하고 있다. 돈 없고, 배고픈 자여 이리로 오려므나. 

한 젊은 남자가 있다. 그는 낮에 집에 누워 자신의 꼬르륵 소리를 듣고, 밤에는 유령처럼 일어나 때로 티비를 본다. 때로는 밖을 어슬렁거리고 뒷산에 올라가 산길을 하염없이 느리게 바라본다 (뚝뚝 끊어지던 느린 풀숲 트래킹). 그는 살아 있지만, 때로 죽어있다. 그를 가끔 반겨주는 소리는 오로지 '밥이 다 되었습니다'라는 밥통의 소리 뿐이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고, 쌀이 떨어지면, 그는 아르바이트를 나선다. 그러나 남자의 지루한 사투도 거기까지. 어느날 밤, 남자는 밤의 산 속에서 무엇인가를 '저질렀다' 혹은 '시도했다'. 그리고 원경으로 잡은 산 속의 불빛 속에서 명멸하던 생명은 결국 꺼져버렸다. 남자는 어디론가로 사라졌고, 남은 집은 거의 페허가 되었다. 집은 철거되었고, 그 곳에는 오래된 음식들만이 남아 있다는 그런 이야기. 다시 <호수길>의 리와인드.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시 제목에 생각이 미친다. 지금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아마도 영화의 시작부분에 관객의 귀를 찢었던 그 환호성은 사실은 거의 비명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공포에 질린 자의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 물론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오독.

시종일관 절망도 희망도, 기쁨도 슬픔도 아무 것도 보여지지 않는 남자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지금의 시대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일까. 젊은이들이 절망할 수도, 그렇다고 그 절망의 끝에서 분노하는 것마저 쉽게 허락되지 않은 지금의 풍경들. 그 속에서 남아 있는 것은 으스스한 공포뿐이다. 또는 남아 있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 느껴지던 이상한 구멍일 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그 구멍 속에 빠져 있다. 기어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영화가 끝난 후, 영화가 정신을 멍하게 만들어, 기분 전환이나 할까 하고, 스마트폰을 열어 몇 개의 뉴스를 들여다보니, 한 여당 고위 공직자의 친인척이 783명의 구조조정 속에서 단 한개의 정규직을 쟁취한 놀라운 인간승리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지금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자는, 어쩌면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한 개의 '환호성' 속에 783개의 사라져 버린 다른 <환호성>의 이야기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때로 현실은 영화보다 잔혹하다.

플라잉 피쉬 (Flying Fish) - 산지와 푸시파쿠마라 감독



이 영화의 카메라는 줄곧 등장인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있다. 때로는 카메라는 몇 걸음 더 물러서서 이들을 몰래 찍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카메라가 때로는 깊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썩어가는 생선들과 가득 붙은 날벌레들, 동물의 사체에 달라붙은 벌레들, 거의 나무 등걸처럼 되어버린 다리와 거기를 기어올라가는 벌레들, 누군가가 뱉어버린 오물을 그대로 뒤집어 쓰는 카메라. 썩어가고 있는 것들, 역겹고, 더러운 것들을 때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가까이에서 잡는다. 어쩌면 신체의 일부를 가까이에서 잡는 것도 비슷한 것일까.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은 썩어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안에서부터 조금씩 변해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을 저지른다. 파국은 예정되어 있고, 영화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그 파국을 조용히 바라본다.

카메라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있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몇 걸음 뒤로 물러섬으로써 관객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것을 가로막는다. 어쩌면, 그것은 관객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감독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우리는 마지막 충격의 삼연타를 맞았을 때 버텨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시종일관 물러서 있었음에도 우리는 어질어질하니까. 또 한 가지는, 그럼으로써 감독은, 우리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의 외면을 둘러싼 것들을 보기를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런 질문들이다. 등장인물들이 왜 결국 이러한 일들까지 저지르는가. 혹은, 이렇게 되도록 이들을 몰고간 것들, 이러한 극한까지 이들을 몰아붙인 것들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나.

사실, 이 영화는 영화의 배경을 모르고서는 조금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영화에서 어렴풋이 드러나지만, 이 영화는 스리랑카 내전과 타밀 반군들을 둘러싼 정황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모든 전쟁은 사실 그 나름의 이유를 안고 시작되지만, 그 속에서 죽어나가고, 망가지는 것은 그 이유에 대해 거의 관심도 없던 다른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영화를 보고서도 우리는 마찬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영화 속 군인(타밀 반군)들은, 타밀 족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분 속에 죽어나가고, 망가지는 것은 그 국가가 결국 보호해야 할 타밀인들이 상당수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이 인상에 강하게 남는다. 그 세 사람을 태운 버스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운전하는 사람도 없이 이 버스는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가.  아무 보호도 없이 내버려진 이들은 이제 어디로 흘러갈 수 있을까. 이들을 보호해야 할 자들에 의해 망가지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두려움 속에서 남아 있는 것은 위태로운 운전뿐이다.

이 영화의 구성은 한편으로 독특하다. 조금은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도 보였던 이 영화는 마지막 충격적인 장면들을 연달아 붙여서 내보낸 후, 관객에게 어떤 수습할 틈도 주지 않은채 막을 닫아 버린다. 글쎄. 나로서는 이렇게 마지막에 강한 씬들을 잇따라 붙이(고 끝내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라는 생각이 조금은 든다. 이것은 어떤 너무 거짓된, 선택이 없는 속에서 영화적인 끝맺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감독이 등장인물을 너무 놓아 버리고, 그저 이 비극을 관객들에게 던져버리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그을린 사랑>과 비슷한). 검게 변해버린 스크린 위에 감독이 관객에게 놓아버린 진통만이 남아 있고, 그 속에서 나름의 욕망과 희망으로 애써 살아내려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는 사라져버리고, 얼얼한 충격만이 남아 있다.    

 
(모든 사진은 CINDI 홈페이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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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8-23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편 중에(여기 쓰지 않은 <머리카락> 포함해서) 굳이 한 편을 고르라면, <환호성>이다.

맥거핀 2011-08-24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없는 <환호성>의 몇 개의 평들을 보니, 88만원 세대를 넘어선 다른 이야기로 보는 관점들이 있는듯..그러나 나는 쉽게 그런 이야기로 생각하고 말았으니, 점점 늙다리가 되어가나 보다.

yamoo 2011-08-31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이론서들을 보면 카메라 기법에 따라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고 분석되어 있죠. 작품과 함께 친절한 해설이 덧붙여져서^^

근데, 맥거핀님은 정말 영화를 좋아하시나바요? 최고 재밌는 영화 몇 편만 추천해주세요~

맥거핀 2011-08-31 22:32   좋아요 0 | URL
네..아무래도 제가 영화 이론서만큼 쓸 재주는 도저히 안되고요.^^ 저도 처음에는 카메라가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라고 영화이론서 같은 것을 어깨너머로 조금 보면서 의문을 가졌었는데, 영화를 조금씩 조금씩 더 보면서, 확실히 영화의 그 '카메라'에 대해서 조금 더 주목이, 그리고 추가된 의문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추천이라..글쎄요. 추천이라는 것은 항상 늘 위험한 거라서...안전하게 최근에 본 개봉작들 중에서 추천하고 싶지만, 최근 개봉작들은 거의 안 봤구요.^^ 아..오늘 뱅크시의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이거 봤는데, 참 재밌던데요. 홍상수의 <북촌방향>도 곧 개봉인데, 홍상수 감독 영화야 늘 추천이구요. (물론 홍상수 영화도 취향을 탑니다만..;;)
 





불이 꺼지고, 아핏차퐁 감독의 영화제 트레일러가 시작된다. 이 트레일러는 묘하다. 기묘한 분위기의 피아노 곡이 흘러나오면서, 몇 겹의 커튼이 열렸다가 닫히고, 그 안에 숨겨진 스크린이 드러날 듯 하다가 다시 가려진다. 멜로와 공포와 미스터리와 스릴러와 슬픔, 그 어느 것도 전부는 아니지만, 묘하게 그런 이미지들을 조금씩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영화도 어느 것인지 모른다. 이 영화는 멜로일 수도, 공포일 수도, 혹은 스릴러일 수도 있다. 그렇게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드디어 열린 스크린을 들여다본다.

테러리스트들 (The Terrorists) - 툰스카 판시티보라쿤 감독

"작은 고깃배 위에서 두 소년이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카메라는 이윽고 바다를 관통하는 빛을 응시하고, 바닷물 아래 헤엄치는 작은 생명체들을 관찰한다. 그 수면에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비치고 있다. 고무 농장의 어둠 속에, 꺼질 듯 희미한 불빛만이 길을 밝히고 있다. 현재의 진실은 피에 굶주린 과거와 겹쳐진다. 과거는 태국 역사의 페이지에서 지워지고, 남은 것은 그들이 테러리스트라는 비난뿐이다."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글은 위와 같다. 그러나 사실 위의 글은 영화를 조금은 오해하게 만든다. 어렴풋이 외곽을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제대로 설명할 것인가. 영화가 시작하면 몇 명의 남자들이 배 위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 수면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고,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서 한 남자가 성(性)고문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전환되고 고무나무에서 고무를 채취하는 남자의 빠르고, 지속적인 손길이 이어진다. 그 다음, 고무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어지러운 대화. 그리고 그 다음 한 남자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자막이 이어진다. 이 자막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 다음....그 다음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내 옆에 남자는 모자를 뒤집어 쓰고, 어느덧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로 달려가버렸다.
 
몇 가지 말할 수 있는 것, 혹은 몇 가지의 불친절한 독해. 이 영화에서는 자막의 독특한 활용이 도드라진다. 이 자막은 일견 화면의 내용과 거의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위의 계곡에서 목욕하는 남자의 경우 다음에는 한 남자의 세밀하게 촬영된 자위 화면 위로(이 영화는 남성 성기의 노출이 참으로 빈번하다), 1976년 태국의 대학에서 일어났던 군인들에 의한 학생들의 학살 사건에 대한 리포트가 이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막으로 이런 말이 나온다. "테러리스트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위험한 범죄자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투사일 수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맥락.) 그것을 화면으로도 비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자위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쾌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강제로 당하는 행위(성고문을 당하던 남자)는 엄청난 고통일 수 있다..는 것? 아니,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다른 독해. 어쩌면 이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자막들만 지워버리면,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움베르트 에코의 포르노의 정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조금은 정적인 게이 포르노에 가까워진다. 검열관은 그저그런 포르노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잠들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불편해진다. 그리고 아직까지 눈을 뜨고 있는 몇몇 사람들도 불편해졌을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성기노출이 빈번한 이 화면인가, 아니면, 이런 화면과 함께 1976년에 일어났던 이 학살사건의 세밀한 리포트를 듣는 것인가.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화면과 자막은 조금씩 일치하기 시작한다. 아니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옛날 사진들과 자막으로 나오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태국의 기차역과 기차역에 있는 외국인과 태국인들을 보여주는 화면 위로 지나가는 다음의 이야기들. "1978년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가 말을 잘들으면 전차를 태워주신다고 하였다. 태국에서 전차는 1976년 모두 철거되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전차를 탄 기억이 난다. 과연 어떤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1976년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차역에서 조금은 지쳐 보이는 태국인들의 모습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현재의 태국의 모습과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것밖에 할 수 없어서 거리로 나와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묘한 울림이 생기며, 처음의 질문을 돌아보게 만든다. 완전히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예를 들어 군인들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의지할 것이 테러밖에 없을 때 행하는 테러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들을 단지 테러리스트라고 규정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에는 다른 이유가 들어 있는 것일까.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도 나는 테러를 반대한다, 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지금까지 깨어있는 사람은 꼭 보아 달라는 듯이 아주 충격적인 화면이 이어진다. 누군가가 몰래 촬영한 듯이 보이는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의 모습. 충격적이지만 낯설지는 않다. 우리는 이 비슷한 화면을 몇 번이고 보았으니까. 예를 들어 1980년 광주에서의 일들. 그러므로 영화의 질문을 되돌아 우리에게 물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우리는 요즘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잘도 기억하는 대신에, 몇 가지를 잊고 있다. 얼마전 어느 전직 대통령은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책임이 없다는 투로, 회고록을 써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난다. 평택에서, 용산에서, 명동에서, 울산에서,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어느 곳에서. 그것이 어쩌면 단지 기이한 포르노였던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 이유다.

감옥과 천국 (Prison and Paradise) - 다니엘 루디 하리얀토 감독



약간은 내 책임도 있지만, 비슷한 내용을 다룬 영화를 하루에 연이어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고, 202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거의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고, 외국인들이 많았지만, 현지인들의 사망도 적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당시 사건의 주범들에 대한 인터뷰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 일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이 인터뷰들의 연결고리는 그 사건의 범인과 학창시절 룸메이트로 지냈던 워싱턴포스트 기자 이스마일이다. 그는 또한 테러를 조사하는 전문가로서 이 사건과 함께, 테러라는 것의 전반적인 의미를 이해하려 애쓴다.

영화의 막바지, 이스마일은 자신이 처한 위치의 딜레마적인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는 자신이 지하드(성전)를 지지하는 세력에게는 미국의 앞잡이, 경찰의 끄나풀이라고 오해받고 있다고 하고, 동시에 경찰에게는 이들 세력을 비호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고 토로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끝나고, 하리얀토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토로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는 양쪽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과격한 이슬람 지하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관점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동시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 영화가 인도네시아인들을 과격한 테러 분자처럼 묘사하고 있으며,  테러리스트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의 말이 이해가 간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장시간 동안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논리를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내보인다. 이들은 한마디로 확신범들이다. 그들은 공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비이슬람인의 관점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주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으며, 확신을 가지고 테러를 저질렀으며, 자신들의 죽음(사형)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알고 있으며, 그것의 논리도 한편으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죽음에는 한편으로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정의 여지가 없다기 보다는, 동정이라는 것은 어쩐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말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슬람 자살 폭탄 테러범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흥미롭지만, 영화가 한편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단순이 이들의 논리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발 비틀어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이들 폭탄 테러범의 가족들의 모습과 그들의 인터뷰를 보여주며, 묻는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의 가족이 죽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어린 아이들은(이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남겨진 어머니들은 몇 년이 지나 아버지들이 사형당한 후에도(영화는 사건이 일어난 후 8년 후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아버지가 사실은 테러리스트라고 밝히지 못한다. 아마도 어쩌면 거의 영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피해자 가족들이 받은 충격 못지 않게 이들이 받은, 혹은 받게될 충격도 못지 않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일종의 영화의 균형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밝혔듯이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들의 논리를 관객들에게 그대로 펼쳐보이는 동시에 이스마일의 입을 통해서, 이들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 비판은 이들의 지하드가 잘못된 지하드라는 것이다. 테러는 민간인들에게 가해졌을 때 정당화 될 수 없다. 테러, 혹은 공격이 정당화되는 것은 군대 대 군대, 무장한 자와 무장한 자 사이의 경우이다. 그러므로 상당수의 민간인 관광객들과 일부 현지 민간인 무슬림에게 행한 발리의 자살 폭탄 테러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스마일의 논리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마일은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지하드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 다른 방식의 지하드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도 이런 이스마일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 부분에서 그러한데, 한 가지는 이스마일이 이 영화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화자이기도 하려니와(그러고보니 이름도 이스마일), 영화의 마지막이 이스마일의 발언 컷으로 끝난다는 점, 다른 한 가지는 음악의 활용에 대해서다. 이 영화는 피해자나 가해자 가족의 인터뷰를 보여줄 때에는 으레 서정적인 음악이 삽입된다. 그러나 이 테러리스트들의 인터뷰에는 어떠한 서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관객과 이들은 두가지 의미에서 '차단'되어 있다. 하나는 인터뷰를 행하는 이들 앞을 가리는 감옥의 창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정의 차단. 따라서 이들의 논리는 나름 논리적이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과격 이슬람 옹호자들의 이 영화에 대한 비판에는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가 논쟁을 피하는,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은 영화를 살짝 비트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 이야기를 영화의 겉에 씌우는 것이다. 감독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남아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영화는 논쟁의 불씨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것은 지하드와 이슬람 정치 운동, 테러리즘, 인권 등에 관한 불씨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거기에는 한 가지의 논점이 포함된다. 그것은 과연 가해자의 가족들을 영화라는 이유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라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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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파워블로그들에 대한 여러 문제점과 그에 대한 논의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여러가지 두서없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먼저 일차원적으로는 파워블로그라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파워블로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아이러니를 조금은 느낀다. 사실, 블로그라는 것의 처음 시작의 의의 중의 하나는 기존의 미디어 권력들이 가졌던 독점적인 발언권을 해체하고, 그 발언권을 무수히 많은 개인들, 시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언론의 권력이동을 꾀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 그 블로그들 중에서 기존의 미디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권력을 행하는 소위 '파워블로그(거)'들을 볼 때에 느껴지는 그 씁쓸함의 정체는 뭘까. 어쩌면 그 씁쓸함의 비밀은 그 '파워'블로그라는 천박한 이름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뉴스에 보니, 포털사이트들에서 파워블로거들을 선정할 때, 상업성을 배제한 블로그들을 선정한다고 하던데, 그런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우선 드는 생각은 상업성을 배제한다고 했을때 그 기준이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문제가 된 것처럼 블로그에서 특정 회사의 제품을 공구하는 것을 여기서의 '상업성의 기준'이라 한다면, 그것은 그에 뒤따르는 다른 질문을 낳지 않을까. 예를 들어, 그렇다면 블로그에 광고를 도배하는 수많은 다른 '파워블로그'들은 '상업적이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굳이 광고를 걸지 않더라도, 거의 제품에 대한 홍보와 리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일부의 블로그 글들은 '상업적이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그런 선정을 그만두는 것이 아닐는지. 개인적으로는 도대체 왜 그런 식의 블로그들을 선정하는 작업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직은 내가 모르는 몇 가지의 비밀들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일 게다. 

사실 이야기를 먼 곳으로 돌릴 필요도 없이, 이곳 알라딘의 블로그들을 보아도 이 상업성의 경계는 상당히 모호하다. 예를 들어 별 의미가 없는 40자평으로 도배를 한 몇 개의 블로그들이나, 잔뜩 리스트만 올려놓은 블로그들을 내가 상업적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다음의 몇 개의 질문들에도 답해야만 할 것이다. 리뷰를 올리고, 혹은 때로 리스트를 올리고, (거의 들어오지는 않지만)  thanks to를 받는 것은 그렇다면 상업적이지 않은 것인가. 신간평가단이라고 참여하여 그 책들에 대한 리뷰를 올리는 것은 상업성과 무관한 것인가. 이달의 영화 리뷰에 뽑혀 알사탕(별사탕이던가?)을 받는 것은 상업성과 무관한 것인가. 알라딘에서는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지급해준다는 말인가.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는 특정의 인터넷 서점 블로그에 계속적으로 리뷰를 남기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상업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왠지 이것은 삼성 문제에 대한 대처들의 모호한 경계와 닮았다. 예를 들어 삼성을 비판하는 의미로 삼성 제품을 불매한다고 했을 때, 다음의 어떤 질문들. 그렇다면, 나는 삼성 TV를 버리고, LG 제품을 쓰면 조금은 나아지는 것인가. 아니면, 중소기업의 제품을 써야하는 것일까. 아니, TV를 아예 버려야만 정답이 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간에, 어쨌거나, 나는 여전히 이 블로그에 리뷰들을 (요즘에 들어서는) 아주 가끔 남기고 있고, 부수입들을 얻고 있다. 그래서, 상당히 양가적이고, 이중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블로그에 광고들을 도배하는 블로그를 보면서, 참 저런 블로그들은 뭐야..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리뷰가 이달의 리뷰로 뽑히는 것은 즐겁고, 우쭐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 즐겁고, 우쭐한 마음의 어딘가에는 알사탕이 떼굴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예전에는 뭔가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 블로그들을 보면서, 여러 비판들을 마음껏 하기도 했었는데, 말은 점점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내가 그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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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고, 좀더 가벼운 투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이야기가 다른 결로 빠진 것 같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파워블로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왜 지금 무엇을 쓰는 걸까'라는 문제를 생각하고 싶었다. 그 파워블로거들도 처음에는 그저 뭔가를 쓴다는 사실이 좋아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것이 좋아서 시작했을 것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마음일까. 무엇인가를 쓰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눈다는 그 순수한 사실이 그들을 지금도 기쁘게 할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떤 것 때문에 지금도 이 블로그라는 것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내 블로그 생활을 돌이켜 보면, 처음 시작은 '블로그인'이라는 사이트였고, 그 후에 네이버 블로그 생활을 꽤나 길게 했다. 그 때 블로그 생활이라고 해봤자, 주력은 락음악들을 올리는 것이었고, 그 외에 잡담을 올리고, 짧은 영화 감상을 올리는 것이 다였다. 그 이후에 좀 제대로된 리뷰들을 써보자 싶어서 시작한 것이 티스토리였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 '씨네21' 블로그에서도 잠깐 티스토리의 글들을 옮겨 놓았었고, 알라딘에서는 영화 리뷰를 10개인가 올리면 적립금을 준다기에 시작했고, 어쩌다보니 여기에도 지금까지 글들을 옮기고 있다. (그러고보면 알라딘에서의 시작이야 말로 철저한 '상업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도리어 알라딘에만 쓰는 글들이 있고(이 글을 포함하여), 티스토리보다 여기에 훨씬 더 자주 들르게 되었다. 

티스토리보다 알라딘에 훨씬 더 자주 들르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에는 글을 올리면, 누군가가 읽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그리고 몇 마디 이야기라도 나누게 되니까. 티스토리의 경우 꾸준히 들러주시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도 요즘은 블로그를 거의 안하시고, 트위터를 주로 하시는지라, 당장 티스토리를 그만둔다고 해도 별 죄책감이 없다. 그러나 알라딘은 매우 상업적인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즐겨찾기등록: 16명'이라는 우측의 표시와 아주 가끔 늘어가는 추천수와 꾸준히 들러서 글 읽어주시고, 코멘트를 남겨주시는 몇몇 이웃 분(제가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겠지요?)들을 뵈면 뭔가를 자꾸만 써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추천수나 즐겨찾기 숫자에 민감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분 나의 어떤 욕망과 연결된다. 그것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다. 사실 예전에 '씨네21' 블로그에 글들을 옮기게 된 것도 거기에 글을 올리면, 거기는 아무래도 날카로운 눈들이 많은 곳이니 누군가 나의 글들을 발견하고 신나게 까주지 않을까 해서 시작하게 되었고, 즐겨찾는 사람이 1명 생길 때까지만 버텨보자 싶었는데(거기도 알라딘과 비슷하게 확인이 가능하다), 결국 버티지 못했다. (블로그를 그만두게 된 것은 사실 '씨네21' 측이 블로그 운영을 함에 있어서,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는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에 보니 결국 블로그 쪽을 일방적으로 닫아버렸다. 현재 '씨네21' 사이트에서는 블로그와 관련된 어떤 링크도 없다. 예전에는 블로그 글들을 일방적으로 사이트 메인에 올리더니, 관심을 못 끄니 한마디로 블로거들을 '팽' 한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가끔, 그리고 자주 이 블로그에 들러 글을 남겨주시는 분들을 보면 참 감사하다. 그것이 어떠한 내용의 글이 되었건, 내 글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밑거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장 감독을 비참하게 만드는 영화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영화다. 줄줄이 별 0개의 20자평이 달린 영화라 해도, 아무 20자평도 달리지 않는 영화보다는 감독을 기쁘게 만들 것이다. 글도 당연히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몇몇 그런 블로그들을 알고 있다. 정말 괜찮은 글들이 올라오는 블로그였는데, 그 블로그에는 아무 댓글들도 없었고, 블로그 주인은 어느날 슬며시 블로그를 닫고는 어디론가로 없어져 버렸다. 영화 <경>에 나왔듯이 그들은 없어졌다기보다는 그저 더 이상 '검색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검색되지 않음'에 쓸쓸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쓸쓸함에는 나에게 느끼는 쓸쓸함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무언가 열심히 댓글을 남겨주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쩌면 파워블로그 100위를 뽑네, 어쩌네, 알라딘에서도 서재의 달인이네, 어쩌네 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도 같다(글의 초반에는 비판 비스무리하게 해놓고, 이제는 옹호하고 있으니 글이 어째 점점 병맛으로 가는 것 같다). 우리들 모두는 검색되지 않음을 두려워하니까. 100위 안에 들어서 어떻게든 이곳 어딘가에 자신의 블로그 이름을 남겨놓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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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글의 결론을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전형적인 병맛이다. 처음에는 왠지 요즘에는 리뷰를 잘 쓸 수가 없어서, 가볍게 아무 이야기나 하자, 그리고 한 달에 한 개 올린 리뷰로 2달 연속 이달의 영화리뷰를 받으니 참으로 민망해서, 뭐라도 쓰자 싶어서 시작한 글인데, 글을 쓰다 보니 이야기는 점차 산으로 가고,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도 원래 하려던 얘기는 뜬금없이 하자. 몇 개의 메모들을 쌓아두고 있는데, 뭔가 리뷰 같은 것을 왠지 쓸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 와서 바로 쓰면 좋으련만, 여차저차 자질구레한 이유로 조금씩 미루다가 결국 나중에는 영화 내용이 기억이 안나고, 메모의 맥락을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못 쓰게 되는 악순환이 점차 늘어만 간다. 지금도 한 영화 5개 정도가 그런 식으로 쌓여 있는 상태고, 책 <사유의 악보>는 오래전에 책을 다 읽고, 메모에도 무엇인가 잔뜩 적어두었는데, 여전히 무엇인가를 쓰지 못하고 있다. 반딧불이 님께 꼭 쓰겠다고 한 공언(?)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평가단이라고 받은 책인데 꼭 무엇인가는 써내야하지 않겠냐는 다짐이 있다. 

김혜리 씨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 <방랑기>(위에서 말한 영화 5개 중에 하나다)를 보고 남긴 글에서 첫머리에 반성하고 있다고, 나는 지금 너무 많이 먹는 대신에 너무 안쓰고 있다,고 남겼던데, 이 말은 나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당연한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김혜리 씨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고, 너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이다. 글쎄. 이렇게 말하게 되면, 다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나는 왜 무엇인가를 자꾸 쓰고자 하는가. 왜 지금도 뭔가를 쓰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서? 

글쎄. 아무튼 아주 오랫동안 뭔가를 조금씩 쓸 수 있었으면 좋겠고,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내 글을 읽어준다면 기쁠 것 같아서...라는 대답은 대답이 될까. 그냥 나는 가늘고 길게 갔으면 좋겠다. 가끔 정말 엄청나게 공력이 들어간 것 같은 글들을 보며(사진도 엄청 들어가고..) 저런 글들을 따라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곧 포기하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다. 몇 개의 글들은 그렇게 써볼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런 다음 아마도 곧 나는 지쳐서, 더 이상 별로 글을 쓰고 싶지 않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그런 다음은 어쩌지?...라는 그 공포. 그러니, 그저 가늘고 길게. 내 스타일대로, 읽을테면 읽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그래도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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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8-11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워블로그에 대해선 엄청나게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고 있어서, 누구라도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있어도, 끝맺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역시.. 몇 번인가 썼다 지웠다 임시저장은 되어 있으려나. 하는 상태. ^^

제가 생각하는, 지향하는 파워블로그는 '상업적'인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블로그에 '파워'를 더해주고요, 더 나은 포스팅을 생산하게 하지요. 그러니깐, 블로그 포스팅 하는 것이 '일'이라면, 그건 당연히 더욱 전문적이고, 시간과 돈과 노력이 들어간 포스팅이 되는거죠. 뭔가 꼬여버린 우리나라의 소위 '파워블로그' 들 말고, 전문적인 해외 파워블로그들처럼요.


맥거핀 2011-08-11 11:23   좋아요 0 | URL
고견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이드 님의 '상업적'과 제가 말하는 '상업적'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글의 가치로서의 어떤 ‘상업성’이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즉 글 자체의 가치,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간 포스팅 그 자체의 상업적 가치 말입니다. (다만, 그것이 상업적이 되어야만, 그 글이 퀄리티가 올라가게 된다는 것에는 부정적입니다.) 예를 들어 제 글이 엄청나게 퀄리티가 좋아져서, 미래에 언젠가 제 글이 상업적으로 팔린다면 기쁘겠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를 들어 지금의 일부 블로그처럼, 이 글을 보려면 이 정도 광고는 감수해라는 식의 광고 도배를 ‘상업성’이라고 부른다면, 저는 그 ‘상업성’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예전의 한 블로그에서는 이런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성형의 만연을 걱정하는 포스팅이었는데, 키워드 광고기법(맞나요?)을 쓴 탓인지, 그 밑에는 성형외과 광고가 즐비하게 붙었더군요.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동시에, 블로그 포스팅의 퀄리티를 높이려는 노력 없이, 다른 상업적인 이익을 낼 방도만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블로그들도 마찬가지구요. 말장난이라고 느끼실지도 모르겠지만, 블로그의 최후의 목적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좋은 포스팅(글)을 써내는 것’이어야겠지요...작가들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글을 쓰지만, 결국 모든 작가들의 최종의 꿈은 불멸의 명작을 써내는 것인 것처럼요. (말씀하신대로 ‘파워블로그 문제’에는 여러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밖에 없나 보네요.^^ 아무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이드 2011-08-11 23:03   좋아요 0 | URL
상업적이 되어야 퀄러티가 올라간다는 것은 그것이 일인 경우에, 예를 들면, 제가 꽃일을 하고, 꽃에 관한 포스팅을 올린다면, 그건 부지런한 일반인이 따라올 수 없는 전문적인 포스팅이 되겠죠. 전문적이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서 팔로워들, 즐찾들, 이웃들이 많아지면, 저의 포스팅은 '광고' '홍보' 효과가 있는 것이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겠지만, 보여지는 이미지.를 생각한 유익하고 올바른(?) 포스팅을 내킬때마다가 아닌, 꾸준히 일로서 하게 되는거.

그런것이 제가 생각하는 상업적인 것입니다.

해외 블로그 중에서는 잘 알려진 '사토리얼리스트' 과 같은 블로그나 제가 자주 가는 디자인, 데코, 책, 뉴스 블로그들이 그 카테고리에 들어가구요. 우리나라에선 롤모델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맥거핀 2011-08-12 00:32   좋아요 0 | URL
네..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일종의 '강한 의무감'을 말씀하시는 거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그냥 좋아서 쓰는 것이 아닌,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끼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포스팅을 생산해내는 것..

제가 외국블로그 쪽은 잘 몰라서, 어느 정도 퀄리티를 의미하시는지는 감이 조금 덜 오지만, 그런데 한편으로는 여전히 어떤 의문이 남기는 합니다.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퀄리티가 창출된다고 볼 수 있을까..도리어 그런 일종의 의무감과 책임감이 매너리즘을 만들어내고, 도리어 포스팅의 질적저하로 이어지지 않을까..(일부 국내의 파워블로거들이 걸어가는 길을 보거나, 혹은 일부 소위 전문가들이 어느 순간 이상부터 매너리즘에 빠진 글을 양산해내는 것을 보면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문제겠지요..

cyrus 2011-08-1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와닿네요. 댓글은 안 달더라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한 명일이지라도)
읽어주게 된다면 참 좋겠죠. 글 쓰는 맛도 나고요. 저도 작년에 처음 블로그할 때
서재지수, 추천에 좀 민감하게 반응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차츰 변하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겁이 나면서도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어요. 맹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독서를 하면서 경험을 흔적에 남기는 글쓰기의 목적 자체가 전도되어버리거든요.
그리고 저 이외에도 서재 이웃분들도 그런 마음을 한번쯤은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작년부턴가 아예 서재지수랑 즐겨찾기 수를 확인할 수 있는 거를 비공개로 해버렸어요.
이게 최선의 방안이지는 모르겠지만,, ^^;; 저나 이웃분들이나 서로간에 수치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었답니다.

어쨌든 많이 부족한데도 댓글이라도 달아주시는 이웃분들 보면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제가 이웃분들에게 직접 서재에 들리지 못한 저의 나태함 때문에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역시 온라인 관계 역시 오프라인만큼 오랫동안 유지되는게 어려운가 봅니다. ^^


맥거핀 2011-08-12 00:46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글에도 썼지만, 다른 분들 블로그에도 많이 가서 댓글도 남기고, 글도 좀 꼼꼼하게 읽어보고 그래야하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한편으로는 반성하게 됩니다. 때로는 댓글을 남길까 하다가도, 괜히 주저되기도 하구요. 몇 번 왕래가 있는 블로그들도 그러한데, 처음 보는 블로그는 더더욱 그러기가 쉽지 않구요.

저는 처음에 여기 왔을 때, 글 추천수 같은 것은 도대체 왜 있을까 싶어서, 거의 다른 분들 글들을 읽어도 '추천' 같은 것은 누르지 않고 그랬는데요. 제가 이후 어느 순간부터 그거 한 개 올라갈 때마다 꽤나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다른 분들 글 중에서 좋다 싶은 것은 꼭 잊지 않고 추천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하고 있기는 하지요. 추천수가 많다고 꼭 더 좋은 글도 아닌데(다른 분들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제 글끼리 비교해보면요), 왜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까...라구요. 그래도 알라딘만의 재미있는 시스템이라 생각해서 굳이 거부감은 가지지 않으려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실 들러주셔서 한 마디 해주시면 늘 고맙지요. 저는 다른 분들께 잘 못하는데, 블로그에 굳이 찾아와 주셔서 의견 남겨주시는 거니까요. 물론 cyrus님도 감사드리구요. 좀 다른 얘기지만, 제가 위의 글에 공력이 많이 들어간 글 운운하며, 저는 그렇게는 못 쓴다..고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때 중에 하나가 cyrus님 블로그에 들를 때에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cyrus님의 글들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걱정이 되는 때가 있어요. 이렇게 한편한편 공을 들이시다가 어느 순간 지쳐서 아예 안 쓰시면 어쩌나 하구요. 하하..오지랖이지요? 부담감 가지시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그저, 좋은 글 편한대로 많이 써주세요. ^^

2011-08-11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2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의 트위터 한마디. 

정말 맞는 말이다. 동시에 아주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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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6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8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9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9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