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극장전>의 마지막 대사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 "이제 생각을 해야겠다. 생각을 더 해야 해.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살 수 있도록...." 마지막, '죽지 않게 오래살 수 있도록...'이라는 말이 웃기기는 한다. 물론 이 말의 방점은 '오래산다'가 아니라, '죽지 않게'에 찍혀있다. 죽지 않은 상태에서, 산다는 것. 매일매일 죽어있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살아있음을 만끽하면서 산다는 것. 그것은 생각으로 가능할까.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 대우 명제, 즉 '죽어 있는 자들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참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말들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이제 책을 읽어야겠다. 책을 더 읽어야만 해. 책읽기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살 수 있도록..." 이미 쌓아놓은 책이 너무 많아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결의를 다지는 의미로 집에 오는 길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움베르트 에코의 <젊은 소설가의 고백>, 백가흠의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를 샀다. 요즘 그나마 남는 시간들을 <한겨레21>과 <씨네21> 및 인터넷 기사들을 정독한다고 거의 써버리고 있는데(이 넘의 정부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하게끔 한다. 평화로운 강정은 애초 우리모두 알 이유도, 알 필요도 없는 그저 가만히 두면 되는 곳이었다), 책 읽기에 그 시간들을 돌려서 써야겠다.

 

덧.

요 며칠 사이에 옆에 즐겨찾기 등록의 숫자가 3명이나 줄었다. 옛 여인은 새로운 여인과의 만남으로 잊으면 되고, 꿀꿀한 영화에 대한 기억은 이어서 본 다른 영화에 대한 기억으로 덮으면 된다. 마찬가지로, 한 명이 줄은 기억은, 또 다른 한 명이 줄은 기억으로 덮으면...된다. 다만, 단지 나는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인데, 누군지 몰라도(몰라야) 좋으니, 즐겨찾기 목록에서 제거할 때, 익명으로 그 이유를 반드시 남겨야만 가능하도록 만들어지면 좋지 않을까, 진지한 뻘생각을 해본다. 글들을 더 이상 보지 않는 이러저러한 이유를 글쓴이도 알게 되면 좋지 않을까. 그래야 뭔가 더 나아질 여지가 있을텐데. 레알 잡담에 어울리는 허접한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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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2-03-08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켁~ 이건 뭐죠~ 지금 저도 백가흠 읽고 있는데요 ㅋㅋ 이런 이런 ㅋㅋ 그런데 중고서점 종로에 있는거 말씀하시는거죠? 거기 책상태좋나요? 제가 중고품질에 대해선 거의 불신에 찬 태도를 지니고 있어서요 ㅋㅋ 만약 좋다면 대량매입 가능합니다 ㅋㅋ

아!!!!!!! 즐겨찾기 삭제 그 3명중에 한명이 전데요 여기 손손요!!(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그냥 깔끔하게 서재운용할려고 즐겨찾기 삭제한건데(기존의 있던건 다 삭제했어요 그리고 즐겨찾기 하신분들이 계속해서 베스트 글 되니 할필요 없겠더라고요) 그냥 님글은 계속해서 알라딘글에 등록되니 거기서 보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서요~ 또 이런 가슴아픈 사연을 듣게 되네요~ 흐음~ 그러면 그냥 등록하고 갈께요^^ 물론 맥거핀님의 글이 나빠서 그런건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요새 가만히 책상에 앉아있으니 영화보다는 문학작품을 더 읽게 되던데요 ㅋㅋ 그래서 그런지 아무래도 영화에 대한 글에 남다른 글을 쓰시는 맥거핀님 글을 더 많이 볼꺼 같네요 ㅎㅎ

아~ 그리고 강정 그 다큐멘타리를 아직 보지 않아서 코멘트 못남기고 있는데 ㅋ

더불어 아무래도 올해 가장 좋았던 영화로 버넷 밀러<머니볼>과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스의<네번>이 아직도 저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헤매고 있네요~ 그래서 한번 머니볼에 대해서 더 얘기하고 싶네요~

맥거핀 2012-03-09 15:19   좋아요 0 | URL
하하하..억 예상치못한 배신입니다. 역시 추궁하니 자백(?)이 나오네요. 자진납세 감사합니다.^^ 근데 정말 궁금한 건 '누가'보다 '왜'에요. 저는 궁금한게 많은 인간이라..

네..종로점 맞구요.(신촌은 좀 멀어서...) 책의 물리적상태를 말씀하시는 거죠? 뭐 복불복이긴한데, 제가 산 3권의 책은 모두 거의 새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책입니다. 거의 출판사에서 바로 가져나온 새책같은 책들이 꽤 있어요. 근데 아직도 인문쪽은 많이 부족한 느낌이고, 소설쪽은 그래도 읽어볼만한 책들이 꽤 있는 것 같아요. 입구에 바로 들어가면 오늘 들어온 책들이 있는데, 거기에 건질만한 것들이 주로 꽤 있구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별로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오늘 들어온 책 중에서 안팔린 것들이 안으로 들어갈테니..)

프람마티노 <네 번> 진짜 좋나요? 이거에 대한 극찬을 몇 개 봐서, 영화에 대해 궁금중이 좀 있어요. 염소와 노인 이야기가 뭐그리 별게 있을까..싶었는데요. 극장에서 보고 싶은데, 상영정보 캐취하시거든 알려주시면 감사~! <머니볼>에 대한 글도 빨리 쓰시고...

아이리시스 2012-03-09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대로 있어요, 즐찾ㅋㅋㅋ

맥거핀 2012-03-09 15:21   좋아요 0 | URL
배신하면 제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ㅋㅋ

카스피 2012-03-0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즐찾이 줄어들면 왜 줄어들었을까? 제 글이 마음에 안드셨나 하고 머리를 쥐어짭니다용^^;;;

맥거핀 2012-03-09 15:2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저만 그런거 아니죠? 저만 소심한 거 아니죠? 다들 그러시죠? (^-^;)

2012-03-10 0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11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E-9 2012-03-11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만이 날 구할 수 있어'란 대사는 저 역시 MB 정권 내내 모토처럼 여기고 산 말이었는데 반갑네요. 정말 MB는 많은 공부를 하게 했죠. 집권 초기부터 운하의 효용성, 리먼 브라더스, 디도스, 천안함, 민영화, 의료 보험, 표현의 자유 등등...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잊지말아야 할 것도 참 많은 정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니 투표란 스트레스를 줄이는일도 되겠지만 내가 좀 더 편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군요. 강정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엔 정말 제대로 투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맥거핀 2012-03-12 13:02   좋아요 0 | URL
우리 가카는 사실 탄핵을 당했어도 몇 번을 당했어야 했지 않겠나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하신 디도스나 무리한 민영화, 부활되는 검열 등도 그렇고, 측근들의 잦은 비리나 내곡동 비리, 다이아몬드 광산 사건,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간인 불법사찰 이거 하나로도 게임 끝이죠. (뭐 비교하기도 그렇지만, 노무현 전대통령이 측근비리와 낮은 경제성장 -지금 가카의 경제성장률은 얼마죠?- 으로 탄핵된 것에 비하면 말입니다.)

뭐 근데 저는 관대한(-_-) 사람이라, 왠만하면 가카 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대운하니 해군기지니, 핵발전소니 하면서 이 나라의 산천을 망가뜨리는 것만은 못 봐주겠네요. 그건 가카로 끝나는 게 아니니까..가카야 본인이 생각하시는 할 일 하시고 가시면 그뿐입니다만, 그 망가진 산천은 어떻게 돌아오나요? 말씀하신대로 투표만이 살길입니다만, 솔직히 요즘 민주당이나 진보당 쪽의 행태를 보면 그다지 투표에 희망이 안 생기네요.

2012-03-23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3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3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4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4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컷, 아미르 나데리, 2011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이 들어있음)

 

 

아미르 나데리의 <컷>은 사실 줄거리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영화다. 예술과 오락이 결합된 영화만들기를 꿈꾸지만, 자신의 영화를 실패하고, 불법 상영회로 꿈을 근근히 이어가던 슈지(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자신의 영화 제작비 때문에 야쿠자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죽은 형을 대신하여 오로지 맞는 것으로 남은 빚을 갚아나간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감독 아미르 나데리는 이야기의 핍진성 따위는 별 개의치 않는듯, 오로지 메타포와 직접적 메시지로 서사의 빈 구멍을 메워나간다. <씨네 21>에 보면, 이 영화를 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 영화의 메타포를 간파하여 말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기요시에 따르면, 슈지가 매를 맞는 행위 자체는 감독의 영화 만들기의 비유이며, 그에게 장소와 돈벌 기회를 제공하는 조폭 중간 보스는 프로듀서, 옆에서 그의 맞는 행위를 돕는, 슈지가 오즈 영화들의 아버지와 같다고 말한 노인은 촬영감독, 그의 매맞기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요코(토키와 다카코)는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실 일종의 비유적 메시지가 이 영화에는 가득한데, 구로사와 기요시의 비유를 조금 더 연장하여 살펴보면, 슈지가 돈을 손에 가득 쥔 남자들의 펀치를 받는 장면들은, 영화 제작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폭력적인 자본의 계속적인 간섭과 요구들로 볼 수 있다(이것이 한편으로 조폭들의 폭력으로 보여지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 어떻게보면 가장 자본주의적인 것이 조폭이며- 조폭들은 왜 명품수트를 입는가 -, 그런 조폭이야 말로 오로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산물들이기 때문이다). 감독 슈지는 그런 자본들의 요구에 맞서서 계속 자신의 영화, 즉 육체를 지탱시키고, 자신의 세계를 지켜나갈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자의식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이다. 즉 이 영화에서라면 이는 슈지가 맞으면서 계속 되뇌이는 자신이 상영회에서 상영한 영화 고전들의 목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흥미로운 것은 또 한편으로 이는 결국 환영(幻影)으로 이 세상을 버티게 해 줄 동력을 제공한다는 영화의 근본적 가치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맞는 행위 자체가 슈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슈지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맞아서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소리 없이 어떻게 환영을 지속할 것인가). 그러나 슈지에게는 지금 여기에서, 그 펀치를 맞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눈앞에서 이어지는 펀치라는 것은 자본의 끊임없는 투입을 감독에게 계속 처절하게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적어도 자본의 펀치를 계속 인식하는 것이고, 최소한 그것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슈지는 돈을 거저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에 강력한 펀치 앞에 자신의 육체를 맞서서 기꺼이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슈지는 호의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조폭 중간보스의 제의를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자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며, 그 자본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슈지에게는 멍들고 망가진 육체가 필요했다. 멍들고 망가진 육체라는 것은 자본의 힘에 망가지고 상처난 부분이 어디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 자본을 아무 댓가 없이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머리 속의 망가진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한 동시에 슈지에게는 '이 장소에서' 맞는 것 또한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영화를 믿고 아무런 간섭없이 제작비를 대준 형이 죽어간 장소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자신의 영화를 기꺼이 지지해준 관객들에 대한 보답이며, 그 사라져간 최후의 관객에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의 육체를 어떻게든 지속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슈지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일단 그 메타포를 무조건 긍정하기 전에 그 메타포로 만들어지는, 그리고 이 영화에서 전제로 하고 있는 몇 가지의 질문들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슈지의 말대로 예전의 많은 영화들은 오락과 예술이 결합되었던 것임에 비해, 오늘의 많은 영화들은 오로지 폭력적인 자본이 투입된 오락영화들일 뿐인가. 그리고 이와 연관된 질문으로 오늘의 많은 영화들이 단지 오락영화일 뿐이라면, 이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폭력적인 자본의 책임인가, 아니면 그 영화들을 기꺼이 보아준 수많은 관객들의 책임인가. 혹은, 그 와중에서 진정한 영화라는 것은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많은 곳에서는 오늘도 몇몇 논쟁들이 고스란히 반복된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거대자본이 투자된 영화들, 그 거대한 스펙타클을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것이 왜 나쁜가, 이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그리고 재미없는 어떤 영화들을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이 왜 나쁜가를 묻고 있다. 이의 반대편에서 다른 사람들은 그 거대한 스펙타클이 사실 당신 안의 어떤 세계를 조금씩 망가뜨리고 있으며, 그 사람들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그 영화들이 어떠한 부분에서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도리어 그 영화들에 어떠한 재미가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물론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예전부터 계속 반복되어 오던 문제들이며, 여전히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슈지는 이 영화에서 예전에는 오락과 예술이 결합된 영화들이 많았고, 현재는 오락과 예술이 분리되어 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지만, 과거의 영화들도 오락과 예술은 거의 하나가 된 적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일례로, 슈지가, 아니 감독 아미르 나데리가 밝히는 최고의 영화들의 목록을 살펴보아도, 당대에는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지만, 후일에 재평가된 영화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재평가에 크게 기여를 하여 새로운 영화의 흐름을 이끌어낸 사람들이 바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욕을 먹고 있는 영화비평가들이다.) 예전의 많은 시기에도 오락영화는 오락영화일 뿐이었고, 예술영화는 예술영화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대중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예술적으로 가치가 인정되는 영화들이 당대에 많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는다는 것은 대중들의 감식안이 떨어진다는 반증일까.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바꿔보면, 단지 오락물로서만의 가치를 지닌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관객들이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영화들이 많이 양산이 되는 것일까. 자본의 입장에서도 소위 '예술적' 영화들이 관객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다면,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이 부분에서 관객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영화에서도 자본은 점점 거대해지고 있으며, 영화의 거의 전부에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자본의 큰 간섭 없이 만들어진 작은 영화들은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루트 자체가 대자본으로 공습하는 영화들과 비교가 되지 않으며, 많은 대중영화들의 시작에 감독이나 주연배우들의 이름보다 투자사의 이름이 먼저 오르는 것은 일종의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부분에서 관객에게 완전한 '무혐의'를 부여하는 것 또한 어렵다고 본다. 다시 이 영화 <컷>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한다면 슈지에게 펀치를 날린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나, 그 펀치 세례를 그대로 방조한 책임을 조금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화라는 것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살인의 방조, 혹은 자살의 방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죽어가고 있다면'이라는 가정인 것은, 영화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 영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이 리뷰의 범위를 넘을 뿐 아니라, 내 깜냥의 범위도 넘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 펀치 자체를 아예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했지만, 영화에는 자본의 펀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펀치라는 행위의 형태도 그렇지만, 그 펀치 자체로도 그렇다. 즉 영화에는 자본이 필요하다. 이제 이 영화의 끝으로 가보자. 영화의 마지막 슈지는 결국 모든 빚을 갚지만, 다시 그 조폭에게 돈을 빌린다. 그리고 그것으로 새 영화를 찍는다. 자 이것은 희망적인 결말인가?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자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다른 모든 예술들보다 훨씬 자본이 필요하며, 자본과 밀착하게 결합된 예술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으로부터 탄력을 받아,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하였고, 영화 역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이를 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영화의 시작은 자본주의의 시작과 거의 그 궤를 같이 하였다. 이러한 시기의 겹침은 물론 우연이 아니다. 필름은 예나 지금이나 자본을 상당히 잡아먹는 물건이다. 디지털이면 달라질까. 그대신 이제는 3D라는 자본을 먹는 괴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또한 동시에 영화는 초창기부터 그 자본의 펀치들을 같이 맞아온 대중들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있었다. 영화가 '그들만의 예술'이었던 적은 없었다. 영화는 한번 만들어지면, 반복하여 상영이 가능했고, 대량으로 전파가 가능했다. 즉 클래식 음악이나 미술이나, 연극(물론 '글'은 말할 것도 없고)이 특정 조건을 갖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이었다면, 영화가 그런 예술의 지위를 누린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슈지에게 가해지는 100대의 펀치와 크로스되어 제시되는 아미르 나데리가 관객들에게 가하는 100대의 펀치(100개의 영화 리스트)를 맞으면서,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 이는 일종의 '인정 투쟁'처럼도 보였기 때문이다. 왜 다른 예술들과 다르게 영화에서 만은 이런 '리스트'가 횡행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대중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자라난 영화가 어떻게든 그 대중들을 밀어내려는 몸부림같은 것은 아닐까. 나는 뭔가 이렇게 다른 영화를 보아왔다는 몸부림. 자신만의 새로운 리스트를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려는, 대중들과 자신들의 사이에 방벽을 치려는 무의식적 자의식. 영화가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려는 몸부림은 혹시 아닐까. (차라리 영화의 역사나 혹은 감독들의 계보를 나열했다면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왜 BEST 100인가. 왜 BEST 100의 형식이어야 했나라는 물음.) 그 마지막의 장면들에서 나눔과 연대, 동지적 의식보다는, (요즘의 많은 리스트들의 제시에서 느껴지듯), 경쟁과 구분의 뉘앙스가 더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미르 나데리의 영화 <컷>은 끝까지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결기(혹은 허세)로 밀어붙이는 영화다. 이야기의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가 제시된 후, 갑자기 순간 무성(無聲)이 되어 무대밖과 안을 넘나드는 장면을 그대로 재현해보인다거나,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나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흑백으로 전환되는 것 등), 이야기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씨네필이 아니라면 씨네필이 아닌 사람들을 거의 아무 생각 없는 자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불편할 것이고, 씨네필이라면 씨네필로서의 자의식을 과잉하여 드러내보이는 이 영화가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아미르 나데리는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하다. 그저 영화는 마지막에 외칠 뿐이다. 컷!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할 때가 되었다. 컷, 잘라낸다는 것. 잘라내고 싶은 것은 자본인가, 대중인가. 그 둘 중 어느 것도 잘라낼 수 없다면, 영화에서 잘라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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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대 한 대 얻어맞는 주인공이 그런 '리스트'를 읊었다면 좀 불편해졌을 것도 같아요. 아무래도 영화광 특유의 '구분과 우월감'의 문화가 실제 영화광의 세계에 있으니까요. -이건 정말 많은 영화들이 접근성이 무지하게 떨어져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사실은 리스트의 영화를 다 보고 싶었는데 많이 보지 못했다는...
그나저나 주인공이 육체성과 고통으로 정직하게 자신의 자리를 매기고 싶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허리케인 죠"가 생각나요.^^ (-아아 저도 좀 오타쿠였어요.ㅎ)

맥거핀 2012-03-02 23:35   좋아요 0 | URL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읊는 수준이 아니라 별개의 자막과 컷으로 아예 리스트가 제시되니까요. 영화관에서 다른 영화들의 목록을 제시하는 영화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리스트를 좋아하나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영화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런가요? 예를 들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설 BEST 100 리스트를 만들어 서로 비교해보고 그러나요..?) 위에 좀 끄적거리기는 했지만, 그게 해답은 아닌 것 같고,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저 리스트를 볼 때에 위압감과 부러움, 그리고 폄하(여우의 신포도)를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요.

네오 2012-03-03 00:05   좋아요 0 | URL
리스트선택은 저에게는 100으로 환산해서 허세 90, 습관 8, 관심2 로 구성되어져 있어요~ 사실 그렇죠~ 많이본것 뽑내기같은거 하고 싶지 않나요???? 저는 많이 그런데요 ㅎㅎ

문학 베스트 100을 선택하라는 시험지가 있으면 대단히 구미가 댕기네요~ 영화보다는 이쪽이 더 상대방에 대한 교양을 알수 있을거 같아요~ 왜 타자에 대한 교양을 제가 따지냐 고요 라고 불평하시면 할말이 없습니다만 ㅠㅠ

그런데 밑의 페이퍼도 있지만 정말 영화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시네요 보리스 바르넷은 저는 누구지 모르고 있다가 작년 서울아트시네마회고전때 알았습니다 그녀는 그 유명한 세느좌안이야기라는 소리를 듣고 아직 "나는 멀었다'라며 극장문을 나오던 아픈 추억이 있네요~

맥거핀 2012-03-03 13:29   좋아요 0 | URL
원래 영화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어느 정도는 허세가 있지 않나요..? 안본거도 아는 척하면서 이야기하는 경우들도 있고..정도가 심하지 않다면야 어느 정도는 '익스큐즈'해야 그래도 얘기가 됩니다.^^

문학 BEST 100 같은 거 하자고 하면 저는 절대 안해요. 말씀하신대로 제 교양이 드러나기 때문에..하하 (근데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만 이렇게 리스트에 집착하는 거 맞죠?)

아..그리고 세느좌안이야기라는 소리를 듣고 "나는 멀었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네오 2012-03-03 23:58   좋아요 0 | URL
헉!! 뜨끔했네요!! 제 얘기하시는거 같아서 ㅎㅎ 맥거핀님도 리스트 꼽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리잖아요 ㅎㅎ 아마도 정성일 영향도있을걸요~

바네사가 알랭레네 또는 크리스 마르께가 속하는 센느 좌파란것을 몰랐다말이죠~ 누벨바그사람들이랑 반대되는 대착점에 있는 사람들이지요!! 뭐 맥거핀님이 영화적 교양이 월등하시니ㅋ 이런 설명 필요하겠습니까만은 ㅎㅎ

아~ 키노 재창간 소식이 들리던군요 같이 손잡고 들어갈볼까요 ㅎㅎ

맥거핀 2012-03-04 12:07   좋아요 0 | URL
아..아네스 바르다 얘기하시는가 보군요. 작년에 저도 회고전 가고 싶었는데, 이러다저러다 보니 가지를 못했네요(뭐 늘 그렇지만.;).

확실히 우리나라에서는 이 리스트 놀이의 유행에 정성일 씨의 영향이 좀 있는듯 합니다만, 외국애들도 열심히 하는 걸 보면 꼭 우리만 그런거 같지는 않고..(뭐 정성일 씨도 외국에서 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았겠지만..)

이번에 정성일 씨가 트위터에서 말한 키노 재창간설로 마음이 싱숭생숭한 영화팬들이 좀 있죠.ㅋ 저도 왜 다시 정성일인가,라는 의문은 조금 있지만, 그간 키노 폐간 후 여러 행보들을 보고 생각해봐야 하는 거겠죠. 그간 영화비평을 이야기하는 다른 매체들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키노만큼의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고, 그만한 담론들을 이끌어내지도 못한 것은 사실이니, 정성일의 귀환이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측면도 있어요. 그러니 왜 키노인가를 묻기 이전에, 그간 우린 뭐했나..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는 느낌이구요. 다만, 키노의 전성기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소위 SNS의 시대, 새로운 유형의 잡지들이 나오는 시기이니 어떤 형태로의 키노인가, 얼마나 새로운 키노가 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뭐 어떻게보면 정성일씨의 주도로 키노의 재창간이 논의된다면, 그것 자체가 약간은 슬픈 일이기도 하겠구요..)

이진 2012-03-03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으, 이것이 바로 맥거핀님의 위엄이었던 것인가요.
샤이닝님께서 제게 맥거핀님의 글을 읽어보라 강추하셨던 이유가 있었군요.
일단 일본인이라는 데서 마음이 동하였고 자극적인 내용에 마음이 끌리는군요.
스크린샷에 완전 마음이 반하였습니다 ^_^꺄붕~

아, 그건그렇고 글 너무 멋진걸요~

맥거핀 2012-03-03 13:3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소이진님. 좋은 말씀 감사하구요. 그간 스쳐가면서 글 봤었는데, 이렇게 인사나누네요. 이 영화는 이란 감독 영화지만, 일본에서 일본배우들과 촬영했고, 일본색(?)이라는 게 약간은 있어요. 감독이 일본영화들에 대한 상당한 경외를 보여주기도 하구요.

저 스샷에 있는 주인공 나름 멋있어요. 복근도 아주 좋구요. 복근이 저 정도는 있어야 저렇게 맞아도 저렇게 계속 버티겠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물론 그렇다고 해도 말이 안되긴 하지만요.;) 그간 다른 영화들에 조연으로 꽤 나왔다고 하는데, 처음으로 관심이 생겼어요.

아이리시스 2012-03-03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 이제 LIST 100을 읊어주세요^^ 신기한 영화다..(혼잣말)

포스트가 멋있어요. 예전에 기타노 다케시 영화삘이네요!!! 내용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예전에 저 일본영화 중에 폭력적인 것들 좀 좋아했어요. 하하.

Shining 2012-03-03 19:59   좋아요 0 | URL
후훗, 저도 아이리시스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리스트 100은 과연 무엇인가요?+_+

저도 기타노 타케시 좋아해요, 미이케 다카시 영화 보면서 뒷목 잡았던 적은 있지만요_-

맥거핀 2012-03-03 23:43   좋아요 0 | URL
댓글들을 보고, 이거 분명히 리스트를 다 정리한 분이 있을 거 같아서 찾아보니 진짜 있네요.+.+ (무려 3번을 보시고 정리했다합니다..이 영화 3번보기 쉽지 않은데..)

카페에 있는 글이라, 링크시켜도 못 보실 것 같고, 그 중에 베스트 10만 말씀드릴께요. (영화 상에는 '무순'이라고 제시되지만, 뒤에 나오는 영화들을 베스트 10으로 봐야할 듯 싶어요. 따로 사진이 나오기도 하고..)

10 <스페이스 오딧세이> 스탠리 큐브릭
9 <만춘> 오즈 야스지로
8 <수색자> 존 포드
7 <선라이즈> F.W.무르나우
6 <거미의 성> 구로사와 아키라
5 <달세계여행> 조르주 멜리어스
4 <라탈랑트> 장 비고
3 <우게츠 이야기> 미조구치 겐지
2 <8과 1/2> 페데리코 펠리니
1 <시민 케인> 오손 웰즈
(각 영화에 대한 설명은, 제 서재에 들러주시는 네오님께 패스~)

저는 몇 가지 영화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리스트를 보니 새롭네요. 한국영화로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100위 안에 있구요. 말씀하신 기타노 다케시 감독 영화도 있네요. <하나비>

근데 미이케 다카시 영화는 진짜 보기 힘들어요.-_- 그래도 끝까지 열심히 봤어요.-_-

네오 2012-03-08 06:01   좋아요 0 | URL
앗!! 뭐예요 ㅎㅎ 리스트10 다본영화라서 이 영화들에대해서 쓰고 싶어지잖아요~ 지금 obs에서 스탠리 큐브릭 음악서재를 봤는데 스탠리 큐브릭에 대한 모든영화에 대한 평을 쓰고 싶더라고요~ 오홋 정말 위대한 예술가라고 영화카피라이터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더군요 ㅎㅎ 갑자기 불끈 베스트10 영화쓰고 싶어지는 밤이군요^^

맥거핀 2012-03-04 12:11   좋아요 0 | URL
제 예상대로 네오님은 당연히 다 보셨을 줄 알았어요. 아..저는 어떠냐구요. 묻지 마세요. 다 보진 못했다..정도로만 (여전히 허세를 담아) 말해두죠..; (그러니 위에도 썼지만 설명이 필요하신 분은 네오님께..)

아..그리고 제목을 쓰다보니 위에 하나 수정사항이 있네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입니다. '2001'이라고 하니 왠지 SF느낌이 안나네요.

아이리시스 2012-03-07 19:38   좋아요 0 | URL
오, 네오님, 맥거핀님. 저걸 다 보는 끈기는 어디서 오는 겁니까. 어떻게하면 생기는 겁니까. 솔직히 저런 리스트 치고 재미는 별로 없..( '')

저는 링크해주세요. 100개 중에 몇 개 봤는지 자가진단 하게요, 맥거핀님. 부탁해요. 저는 혼자 못 찾겠어요. 어딨어요, 대체!

맥거핀 2012-03-08 00:10   좋아요 0 | URL
네이버 스폰지하우스 카페에 '으갸갹'님의 글이에요. 저는 가입되어 있는 상태라 바로 볼 수 있는데, 외부에서 바로 열람이 가능한지 모르겠네요.^^
http://cafe.naver.com/spongehouse/26714

저도 솔직히 본 영화 찾는게 더 빨라요. 안본거, 못본게 훨씬 더 많네요.

아이리시스 2012-03-08 01:4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맥거핀님. 저는 네이버에 더 많이 접속하니 카페가입하면 돼서 괜찮아요. 등급제한만 없다면 했었는데 없거나 이미 제가 가입해뒀거나 했나 봐요. 오호라, 그런데 영어목록으로 -_-;;

저 한 번 더 절망했어요ㅋㅋㅋ

맥거핀님이 왜 10개만 가져왔는지도 알겠어요. 제목 처음 들어보는 것도 엄청나요. 그런데 구할 수 있다면 차례로 보고싶은 리스트이긴 하네요ㅋㅋㅋ

맥거핀 2012-03-08 01:48   좋아요 0 | URL
네..나머지 영화들의 한국어 제목을 찾아내기가 너무 귀찮아서..^^;; 근데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나데리 감독은 이 100편 다 보기는 했을까요..? (했겠죠..그랬겠지..그랬을거야..)

네오 2012-03-08 06:0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님 지금 예술가의혼이 담긴 열정을 무시합니까? "나데리 감독은 이 100편 다 보기는 했을까요..?" 질문은 불경스럽네요 ㅋㅋㅋㅋㅋㅋ

아이리시스님 재미없는 영화보기는 혼자서 하기에는 정말 따분한 일입니다~ 그래서 영화모임이 필요한 법입니다 ㅋㅋㅋ 저는 명작을 볼때마다 항상 졸죠 ㅋㅋㅋㅋ 그런데 다봤다고 치고 이야기를 하죠 ㅋㅋㅋㅋ

영화보기는 전적으로 시간을 버티는 예술이라 그게 가능하면 누구나 할수 있겠죠?????

맥거핀 2012-03-09 15:26   좋아요 0 | URL
많은 감독들이 사실은 자기 영화 외에 다른 영화들은 보지 않는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설마 모르셔서 하는 얘깁니까? ㅋㅋ (그리고 명작은 중간에 자야 제맛..자서 중간에 모르는 부분은 어떡하냐구요? 그건 자신의 상상력가득한 꿈으로 채워넣으면 됩니다. 그래서 명작.)

아이리시스 2012-03-10 00:27   좋아요 0 | URL
진짜 지겨우면 만드는 사람도 있는데 가만 앉아서 보지도 못하면 사람도 아니다, 이러면서 막 본 적도 있는데, 저는 예전에는 영화 만드는 분들이나 영화광들은 저런 걸 봐도 전혀 하나도 졸지 않고 '재밌게' 보는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3-11 02:28   좋아요 0 | URL
예전에 모 고전영화 보러갔었는데, 영화와의 사투에 도저히 이기지못하고, 잠깐 자다가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그나마 몇 명 없던 관객들도 거의 자고 있어서, 상영기사님께 왠지 미안해서 참고 버티며 보려 했으나, 또 잠들어서 결국 대절멸을 맞이했던 투쟁의 역사가 불현듯 생각이 납니다.-_-

네오 2012-03-12 14:36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전멸한 영화가 어떤 영화인데요??????

맥거핀 2012-03-12 20:46   좋아요 0 | URL
잉마르 베리만 영화였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나네요. <산딸기>는 아니었고..영화 내용도 기억도 못하는데, 제목만 기억해봐야.ㅋ

ICE-9 2012-03-04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대중들이 빠른 편집, 시각의 과잉을 더 편애하는 것은 의식적인 면 못지 않게 신체적인 길들임도 분명 한 몫 할 것 같아요. 시각의 과잉이 장차 '무사유'를 뜻하는 뇌의 죽음을 불러올 것이다라고 들뢰즈도 말했다지만 대중의 체험이 이미 롱 쇼트를 기반으로 하는 긴 호흡과 오즈나 후 샤오시엔 혹은 타르코프스키의 명상적 시선을 더 이상 신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의식적 차원과 신체적 차원이 모두 지금과 같은 대중의 편애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합니다.(비평의 기피 또한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구요) 물론 산업이 될 수 밖에 없는 영화인 이상 자본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장 뤽 고다르는 비디오에서 자본에서 해방된 영화의 대안을 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정말 대단한 영화들은 작가들이 온전히 자본에서 자유로워졌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과 싸우면서 그렇게 변증법적 투쟁 가운데 나왔던 것 같습니다. 스튜디오와 싸우면서 만들어낸 30~40년대 헐리우드 영화들에 까이에 뒤 시네마의 키드들이 '작가주의'라는 라벨까지 붙이면서 열광했던 것 처럼 말이죠. 말하자면 사람은 한계를 직면한 가운데 더 진화하는 존재랄까요? 대표적인 것이 고다르의 '경멸' 같은 것이겠죠. 가장 많은 자본을 들였던(웬 뜬금없는 소리를^ ^;) 뭐, 그런 이유로 나데리의 이 영화가 참 보고 싶어지네요.(계속 두서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요^ ^;) 그런데 베스트 10이 너무도 흔한 리스트라 조금 실망이에요. 미이케 다케시의 '이치 더 킬러' 같은 게 있었으면 오, 이 사람 뭔가 더 새롭구나 하면서 더 빠졌을 것 같은데^ ^

맥거핀 2012-03-04 12:2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확실히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긴 한 것 같습니다. 그게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지금의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과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습득하는 방식,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정보 자체를 조직하고 습득하는 방식이 예전과는 달라졌을테니까요. 근데 또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금 시대에는 지금에 맞는 영화문법이 무엇인가의 문제를 계속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보다 훨씬 빠른 것들에 길들여진 현재의 대중에게 예를 들어 말씀하신 타르코프스키나 차이밍량, 벨라 타르 등이 먹히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영화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새로운 방식의 문법, 새로운 실험들이 점점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그것이 예를 들어 <트랜스포머>의 엄청난 숏트 수가 돨 수도 있고(트랜스포머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지만, 그것은 또 한편으로 거대한 영화적 실험이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구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겠죠. 즉 그것이 영화의 시작부터 같이해온 롱테이크,롱숏의 회귀라는 건 어떻게 보면 게을러 보이기도 하구요. 대중에 무조건 맞추라는 얘기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대중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더 어떻게 먼저 치고들어갈 것이냐의 문제가 계속 고민되어야 하지 않나 봅니다. (따라서 비평적인 측면에서도 과거에 대한 회고와 찬양보다는, 현재의 실험들에 주목하는 비평들이 더 개인적으로는 흥미가 가는 것이 사실이구요.)

물론 이러한 실험에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투입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자본이 투입될 때 영화가 새로운 진보를 획득했던 것은 또 사실이라고 보여지구요. 사람들은 과거의 고전들이 지루한 옛날 영화라고만 생각하지, 때로는 당대의 가장 많은 자본이 투입된 당대의 거대한 블록버스터, 혹은 거대한 실험이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 말들이 거대한 자본만이 영화의 새로운 실험들을 촉진한다는 식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혁신이 돈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죠. 다만, 어느 정도의 자본과의 결합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도 쓸데없는 이야기 많이 했네요.^^; 제 생각에도 오손 웰즈가 1위로 뽑히고, 페데리코 펠리니나 존 포드, 무르나우 등이 등장하는 이 리스트는 확실히 식상하죠. (뭐 그나마 특기할 점이라고는 일본 감독이 3명이라는 점 정도?) 근데 '미이케 다카시'는 상당한 파격인데요..? 하하. 감독으로서는 나름 안전한 선택을 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만, 안전한 선택은 늘 심심하죠.^^

마녀고양이 2012-03-0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들이 워낙 제가 모르는 분야의 전문적인 이야기로 채워져있어
어찌 댓글을 달아야하나,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머 그런거 신경쓰는 사람이겠습니까.... ㅋㅋ. 영화가 어떤 이에게는 생애 전부지만, 어떤 이에게는 지나가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하나의 대상일 뿐이겠죠. 저는 가끔, 영화 감독이든 소설가이든, 나는 이렇게 썼고 나는 내 자유대로 썼으니 알아서 판단하라고 하면서, 그러면서 인정을 못 받는 것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듯한 느낌에 대해 일반적 관객으로써 부담감을 느낍니다.

물론 자본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부분들이 그다지 좋지도 않습니다만....

자본에 의해서,,, 그것은 여기 알라딘 서재를 운영하면서
알라딘을 바라보며 느끼는 모순과 혼란도 비슷합니다. 세상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채워지는군요. 그래도.... 맥거핀님, 3월의 봄비 내리는 월요일,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

맥거핀 2012-03-06 12:22   좋아요 0 | URL
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면 되죠.^^ 하기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도 감독의 분노가 가득 담겨져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너무 직접적인 메시지만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구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창작자의 입장에서 이해해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구요. 저만해도, 리뷰 한개 쓰더라도 사람들의 반응이 꽤 신경이 쓰이는데, 한편의 영화, 소설이라면 훨씬 더하겠고, 사람들의 반응이 없을 때는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말씀하신대로 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온도차가 있으니까요. 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일반관객은 일반관객의 입장에서 읽히는 것이 있을 것이고, 평론가들은 평론가들 입장에서 읽히는 것이 있겠죠. 평론가들은 그러한 영화를 보는 훈련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대중들과 영화보는 눈이 같다면, 그들의 존재이유 자체가 없죠. 가끔 평론가들은 이상한 영화만 좋아한다고 불평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그럼 저는 궁금해요. 대중들의 감식안과 동일한 감식안을 가진 평론가가 존재이유가 있는가..말이죠. 평론가들이나 영화감독들이 대중을 무시해서도, 훈계해서도 안되겠습니다만, 그들이 일종의 선구자적 역할을 맡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하기는 요즘에는 소위 일반대중들 중에서도 거의 준평론가들이 많아서 그 경계가 점점 엷어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영화도 다른 모든 분야와 같이 전문가와 일반의 구분은 여전히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어...쓰다보니 댓글이 괜히 길어졌네요. 마녀고양이 님에게 인사나 전하려고 했는데, 괜히 쓸데없는 말이 길었네요. 진짜 봄이 오나봐요. 비가 오는데, 썰렁한 기운보다는 뭔가 봄내음 같은 게 오네요. 이 비가 그치면 꽃샘추위가 한 두번은 올 거고, 그거 끝나면 진짜 짧은 봄이 오겠지요? 마녀고양이님도 좋은 한주 되세요.~^_^

꽃도둑 2012-03-06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서 잘라낼 수 있는 건 필름이에요, 필름,
더 이상 바라지 않아요...^^(이거 나혼자만 대답했어!)

저도 마고님처럼 위에 있는 분들이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건지...
영화하고 담쌓고 사는, 일종의 '묻지마 병'의 증세겠죠?.,..
하지만 자극만 없으면 자각증세 또한 없으니...크~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긴 한데..
맥거핀 님이 있는 세계가 조금 부러운 건 왜 그렇죠?...

맥거핀 2012-03-07 14:40   좋아요 0 | URL
아..그쵸. +.+ 필름..잘못 찍으면 잘라낼 수 있는 영화처럼, 이 세상의 일들도 잘못 진행되면 잘라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뻘 생각을 해봅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는가, 혹은 무엇을 볼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무엇을 보려고 애쓰는가, 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위 '수준'같은 것과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요.(물론 그것을 일괄적으로 나눌 수도 없고..) 누구나 자신의 세계 안에서 생각을 해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푸른 바다로, 보리스 바르넷, 1936

 

 

 

정복자 펠레, 빌 어거스트, 1987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열리고 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두 편의 영화, 올해 소개될 100편의 시네마 오딧세이 중 한 편인 보리스 바르넷 감독의 1936년작 <저 푸른 바다로>와 장준환 감독이 추천한 빌 어거스트 감독의 1987년작 <정복자 펠레>를 보았다. 특별히 그럴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 <저 푸른 바다로>를 유토피아적인 세계로만 소개한 것으로 볼 때도 그렇지만 - 보고 나니 두 편의 영화가 묘하게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주 단순하게만 말하자면, 이 두 편의 영화는 바다라는 것으로 연결된다. <저 푸른 바다로>는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시종일관 거칠게, 또 때로는 아름답게 일렁이는 바다가 매우 인상적이며(표현 기법 면에서도), <정복자 펠레>는 바닷가 주변의 어느 농장의 이야기로서, 중간중간 그들을 위협하는 존재로서(바다에서 얼어죽은 사람들, 난파한 선원들) 바다가 등장한다. 그리고 <저 푸른 바다로>는 바다에서 난파하지만, 도리어 유토피아적 공간에 도착하여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되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다시 그 공간을 떠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다로 나아가는 두 선원의 이야기이고, <정복자 펠레>는 힘들게 바다를 건너 아무도 그들을 반겨주지 않는 외로운 땅에 도착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다시 거친 바다로 향하는 아들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바다에서 귀환하여, 미지의 공간에 도착하지만, 결국 다시 바다로 나아가며 이야기가 끝난다. 다만 그 미지의 공간이 일종의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또다른 지옥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층 더 생각해보면 이 두 영화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다른 지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정확한 배경이 제시되지 않아 추측해 볼 수밖에 없지만, <정복자 펠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덴마크 바닷가 어느 농장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스웨덴에는 기근이 만연했고, 아버지 라세(막스 폰 시도우)와 아들 펠레(펠레 베네가아르드)는 먹을 것과 살 방도를 찾아 무작정 바다를 건너 덴마크로 온다. 배 안에서 펠레는 아버지에게 '아이들은 일을 안해도 살 수 있으며, 버터를 빵에 발라먹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을 듣지만, 아무도 데려가려 하지 않는 그들에게 스톤 농장 관리인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을 합쳐 1년에 100만 크로네를 주겠다."라는 제안을 하고, 그들이 살 곳을 안내 받는다. 그들이 이 제안을 어쩔 수 없이 수락하고, 앞으로 살게 될 마구간 문을 열어보는 영화의 짧은 순간, 그들에게 펼쳐질 고난은 불을 보듯 뻔해지고, 영화의 모든 내용은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진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이 시기, 산업혁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으로 믿어진 시기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스톤 농장은 거의 중세의 어느 시점에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로는 고용되어 있다고 하지만, 아버지 라세와 아들 펠레는 거의 노예에 가깝게 일을 하며, 그것은 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겨우 식은 청어만을 먹는 인간 이하의 삶을 이어가며, 그 와중에도 라세와 펠레는 끊임없이 자존감을 유지하려 애쓴다. 호색한 농장주와 그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는 부인은 이들과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이들과 농장주 부부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로서 탐욕스럽고, 거친 농장관리인과 차갑고 펠레를 괴롭히는 수련생(관리인 수련생)이 등장한다. 이들 중간관리인의 존재는 영화 내내 꽤 인상적인데, 그것은 중세 이후부터 영주가 농노들을 관리하는 방식인 중간 관리인, 마름의 존재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즉 중세 이후부터 근대,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직의 최고 우두머리는 결코 직접 나서지 않는다. 그들은 뒤에서 은밀하게 지시하며, 모든 상황이 마무리 된 이후에만 등장한다. 농노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지시를 받은, 그리고 항상 지시 이상의 것을 해내는 중간관리인이었고, 영주는 그 중간관리인만 적절히 이용하면 되었다. (도리어 농노들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영주는 이상한 취급을 받았으며, 때로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영화 속에서도 이와 연관된 장면이 몇 번 등장하는데, 호색한 농장주의 아이를 내세우며 돈을 달라고 말하는 거지 여자를 관리인이 힘겹게 몰아낸 후에야, 모든 상황을 먼 창문으로 관찰한 농장주가 느긋하게 등장하는 장면이라든가, 관리인의 일방적 지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에릭을 위시한 일꾼들이 일종의 봉기를 일으키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은 봉기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봉기의 규모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타겟은 중간관리인이지 그 뒤에 숨은 농장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중간관리인 이상의 것, 즉 농장과 연관된 커넥션 자체를 이겨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 커넥션은 미카엘 하네케가 <하얀 리본>에서도 잘 보여줬듯이 농장주(영주)-목사-학교로 이어지는 커넥션이다. 즉 농장주는 돈으로 이들의 현재를 관리하고, 학교는 그들의 미래(자식)을 담보하여 관리하고, 목사는 하느님으로 그들의 내세를 관리한다. 그러니 그것을 모두 지켜본 펠레가 결코 수련생이 될 수는 없었다.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 그가 아무리 잘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위치는 봉기에 나서다 바보가 된 에릭을 어딘가로 몰래 데려가 버리는 관리인의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그럼 이제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문제는 여기에서부터다. 그는 바다를 건너 어디로 갈 것인가. 당시의 청년들에게는 그다지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미국의 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 러시아를 필두로 한 공산주의 혁명, 제국주의의 전쟁들에의 투신, 혹은 지독한 파시즘. 물론 그 세계 중의 하나는 보리스 바르넷이 <저 푸른 바다로>에서 그려내려고 한 유토피아, 즉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다. 이 영화 <저 푸른 바다로>는 소비에트가 탄생하고,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1930년대의 어느 집단농장이 배경인 것처럼 보인다. 즉 이 유토피아는 그들이 유토피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리고 믿고 싶었던 그런 공산주의 유토피아다. 보리스 바르넷은 이 영화에서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대한 선전, 의식고취와 약한 비판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예를 들어 집단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 속에서 개인적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농장의 유일한 기술자인 알료샤가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비판, 서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다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뻔한 두 선원 알료샤와 유수프), 이러한 집단주의의 추구에 우스꽝스러운 시선을 내비치기도 한다(싫다는 유수프에게 억지로 옷을 입히는 농장 사람들). 또한 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를 그려내고, 결국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이 의미가 없어지는) 그녀의 뜻을 따르는 두 남자의 모습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적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집단농장을 떠나 고향으로 가겠다며 다시 바다로 향하는 이 결말은 체제에 대한 비판인것도 같고, 체제선전인 것도 같은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 집단 농장화 시기는 흔히 공산주의 혁명이 변질되어, 소비에트가 망가지기 시작하는 시기로 불리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몇 가지 키워드들은, 계획경제와 공업화, 농업 집단화로 시작되어 대기근과 대숙청으로 마무리된다. 스탈린 시기 소비에트 연방에서 죽어나간 소련 사람들이 500-600만명 정도로 추산될 정도로, 이 시기의 소비에트 연방은 그렇게 유토피아라고 불릴만한 곳은 아니었다. 대외정책으로 볼 때도, 소비에트 연방은 영토에 대한 욕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으며, 파시즘의 독일과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독일이 폴란드에 침공할 때,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그러므로, 이 당시 스탈린에 반하는 공산주의 청년들을 실망시킨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도리어 그 혁명을 열성적으로 일궈낸 그들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러한 세계를 만들어내자고 혁명을 하였던가?

 

그러므로 펠레는 어디로 갈 수 있을 것인가? 펠레는 사람들을 구획을 지어 분리시키고, 가장 약한 자를 짓밞아 무너뜨리는 중세 봉건주의와 근대의 경계선을 보았다. <하얀 리본>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복자 펠레>의 농장과 주변의 아이들은 펠레나 후트와 같은 자신들과 다른 것으로 믿어지는 가장 약한 자를 배제하고 먹잇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파시즘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하얀 리본>은 숨막히게 드러내보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다른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그렇다면 가장 약한 자들을 보호하는 사회인가? 앞에서 이야기한 스톤 농장의 모습들은 현재의 자본주의, 그리고 스탈린 이후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죽어나간 것은 늘 가장 약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똘똘 뭉쳐 스웨덴에서 온 가장 가난한 소년인 펠레를 배제하는 마을 아이들의 모습에서 상징되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약하거나 다르게 보이는 자들은 늘 타겟이 되고, 지배층은 이를 교묘히 이용한다. 지배하는 자들은 밑의 사람들을 구분짓고, 서로에 대한 반감을 더 부추겼다. 그런 부추김으로 중산층은 늘 최상층보다 빈곤층을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가진 조그만 것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스웨덴과 덴마크의 반목을 이용하듯이, 지속적으로 외부의 더 큰 적을 만들어내고, 지배당하는 자들에게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뭉쳐야 한다고(그러니까 우리 지배층에게는 그만 관심을 끊으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최후에 가족을 내세운다. 가진 자들만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까. 없는 자들일수록 믿는 것은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가족은 이들의 최후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반복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며, 끊임없이 주입시킨다. 그리고 이 반복된 효과는 결정적일 때 빛을 발한다. 그들은 억압된 가난한 사람들이 일어나려 할 때마다 최종적으로 가족을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한다. 가족들 봐서라도, 그러면 되겠어? 펠레도 고민한다. 아버지가 이토록 좋아하시는데, 수련생의 하얀 옷을 입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펠레는 아버지 때문에 주저앉지 않았다.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닌가? 제기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질문마저도 우리는 답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도리어 쉽다. 여기에 펠레는 답했고, 바다로 나왔다. 그러나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바꾸자면 이 영화들에서 우리는 어떤 대중을 보아야 하는가. 그 대중은 <정복자 펠레>에서 펠레가 스웨덴인이라고 채찍질하고 놀려대는 그 대중이기도 하고, 같이 흥겹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대중이기도 하고, 좌초될 뻔한 선원들을 구해내는 대중이기도 하고, 동시에 농기구를 들고 중간관리자에게 나아가는 대중이기도 하다. 동시에 <저 푸른 바다로>에서 거친 바다에서 서로를 도와가며 열심히 물고기를 잡는 대중이기도 하고, 동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중이기도 하고, 유수프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헹가래를 치며, 억지로 양복을 입히는 대중이기도 하다. 이 대중들이 만들어낸 여러 매우 다르지만, 또 조금은 비슷해보이기도 한 세계들. 자본주의, 공산주의 혁명, 파시즘.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 사회들에서 수많은 펠레들에게 우리는 버터를 바른 빵을 내밀 수 있는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덧.

물론 <정복자 펠레>는 성장드라마의 측면에서 보아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감탄한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 고조와 이완이 적당히 반복되어 끊임없이 리듬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지루한 반복으로 그치지 않고, 결론적으로 최종의 메시지에 다가간다는 점일 것이다. 장준환 감독이 이야기한 스토리텔링이라는 측면에서 본 이 영화의 가치나, 캐릭터와 이야기에 집중하는 말 그대로의 '영화'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데에도 기꺼이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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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2-22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킥이 안하니까 뭔가를 끄적거리게 되는군...

네오 2012-02-23 12:17   좋아요 0 | URL
어~ 그거 어떻게 끝났어요?

맥거핀 2012-02-24 12:11   좋아요 0 | URL
아직 안 끝났어요. 이번주는 내내 스페셜방송이라는 명목으로 때우는 중...;

꽃도둑 2012-02-2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이거 동물농장 냄새가 나는걸 그러다가,,,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국가의 체제라는 것이 곧 폭력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가장 약한 자는 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게 되네요.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노예로 살지 않으려면 '저 바다 넘어'를 사유하듯 체제를 전복하고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혁명 같은 역동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네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좋은 영화 같아요..^^

맥거핀 2012-02-28 16:55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약한 자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다른 많은 사회들에서도 가장 먼저 희생당한 것은 늘 약한 자들이었으니까요. 지금까지의 상당수의 혁명들이 결국 어떠한 것을 불러왔는가는 많은 역사에서 증명이 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라는 것의 가치와 의의를 부정하는가...는 아니구요. 다른 방식의 혁명, 다른 의의의 혁명을 생각해봐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센던트 (The Descendants), 알렉산더 페인, 2011 

 

 

잔잔한 이야기와 무난한 결말. 아마도 이 영화의 미덕은 그런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미래의 어느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가까이에 있다는 것, 그리고 누구나 자기 몫의 인생을 살고 자기 몫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별 걱정 없이 보이는 삶일지라도, 그만큼의 고통과 그만큼의 미움과 그만큼의 오해와 또 그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삶은 어떠한 결정적 분기 이후에도 다시 비슷하게 반복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지속된다는 것. <어바웃 슈미트>, <사이드웨이>의 알렉산더 페인은 이번 영화 <디센던트>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 영화에서도 하나의 메타포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하와이이다. 겉으로 간략하게 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 맷 킹(조지 클루니)의 삶처럼 하와이 역시 그저 알려진 평화로운 휴양지일 뿐이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삶이 있고, 땅을 개발하고, 리조트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복잡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마냥 평화로운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다들 비슷한 무게의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산다는 것. 물론 거기에서 알렉산더 페인이 가치를 두는 것은 '디센던트'로서의 삶이다. 그것은 작게는 맷 킹의 한 가족이 지켜내야 할 가치이기도 하고, 크게는 하와이언들이 지켜내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가장 재미있게 보이는 부분 중의 하나는 하와이 땅을 둘러싸싼 맷 킹의 선택이다. 그는 그 까닭으로 뭔가 거창한 이유를 내세우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럴까. 중요한 것은 가까이에 있다는 페인의 메시지로 볼 때, 아마도 이 자체가 하나의 반농담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영 따듯한 인간은 못된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따듯함이 영 마음에 와서 닿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영화 속 맷 킹은 자조를 섞어서 말한다. 자신들은 아이를 비싼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부유한 백인들일 뿐이라고. 내가 느낀 생각도 비슷했다. 이는 그저 어느 하와이 땅부자의 가족과 가치 재발견 프로젝트라고 밖에 느껴지지가 않으니. 하이힐을 신고 뛰는 여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칙릿 영화들과 이 영화가 특별히 다른 게 뭐가 있지? 그런 영화들이 뉴욕과 패션을 양념으로 추가했다면, 이 영화는 하와이와 두 딸들을 양념으로 추가했을 뿐이다. (물론 하이힐을 신고 뛰는 것도 나름의 힘든 삶일 것이다. 그러나 정 그렇다면 그 하이힐 꼭 신어야만 하는 걸까. 물론 여기에 하이힐은 커녕 운동화를 신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바일 것이다.) 즉 알렉산더 페인은 이 남자 맷 킹을 동정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어느 정도는 연민하기를 바랬을 것 같다. 갑자기 아내를 잃고, 자신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두 딸과 함께 남겨진 데다가 땅을 둘러싼 여러 복잡한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더구나 뒤늦게 그 아내의 비밀까지 알게 된 한 남자에 대한 약간의 연민을 관객이 가지기를 바랬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마도 분명히 나만 그런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영화 내내 나를 지배하는 정서는 이 남자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일종의 부러움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는 모든 칙릿 영화들이 내세우는 최종의 정서이기도 하다. 부러움과 그 부러움으로 만들어지는 대리만족.) 엄청난 사고를 치는 것처럼 등장한 두 딸의 문제는 단지 애교일 뿐이고(말이야 바른 말이지, 영화 속 두 딸의 모습은 요새 우리 아이들의 모습에 비하면 약과일 뿐이다. 그들은 영화내내 시종일관 아버지와 잘 대화하는 좋은 딸일 뿐이다), 하와이 땅을 둘러싼 맷 킹의 고민은 현금을 손에 쥐는 부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땅부자가 될 것이냐의 고민일 뿐이다. 물론 그리고 그 최종적인 부러움의 근원은 칙릿 영화를 보고 감탄하는 모든 이들의 부러움의 근원이 '뉴욕'과 '명품'이듯이, 나에게는 '하와이'와 '살랑살랑대는 음악'이다.

 

물론 안다. 이것은 단지 삐딱함의 정서, 뭐 간단하게 말해서 일종의 열폭이라는 것. 어쩌면 내 무의식 깊숙이에 자리잡고 있는 '있는 자들'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전작들에서도 어느정도는 느꼈지만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은 내 취향이 아닌 것으로만 정리해두자. 아무튼 이 치유계 영화를 보며, 무의식을 억지로 내리누르려고 하는 나를 보게 되니 도리어 더 피곤해진다. 예를 들어 아주 비싼 식당에서 '그간 너무 비싸서 우리 식당을 이용해보지 못했던 당신을 위해 내놓았다'고 말하는 특별 세일 메뉴를 먹으러 갔더니, 맛있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계속 먹으면서도 그 맛보다는 주머니속 얇은 지갑만 생각나는 느낌이랄까. 무난한 연출력을 가진 감독이 만들어낸 무난하고 좋은 이야기라고 말하기에는 나의 무의식과 욕망이 계속 걸린다. 아무래도 더 얘기하다간 안 좋은 얘기가 계속 나올 것 같아서 이쯤에서 마무리.

 

 

덧.

 

각종 수상경력과 '올해 오스카는 따놓은 당상이다'와 같은 평들로 도배된 이 영화의 포스터가 이 영화에 은연중 내재된 정체성을 묘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서점에서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의 뒷 표지가 꼭 이런 모양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뭐 아닌게 아니라 아카데미가 꽤나 좋아할 영화인 것도 같다. 조지 클루니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익숙한 그 연기'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괜찮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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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2-02-2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이 영화 호평일색이던데. 전 조지 클루니의 연기가 기대됩니다. 솔직히 말해 연기자로서 감독으로서의 그보다는 남자로서의 그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만(여자치고 조지 클루니 싫어할 사람 거의 없을 거...라고 변명해봅니다) 그래도 기대되는 건 사실(아, 저는 <인디에어>의 그의 역할이 참 좋았더랬죠, 영화도 그렇고).

맥거핀 2012-02-20 23:56   좋아요 0 | URL
조지 클루니는 뭐 멋있어요.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 영화 속 캐릭터로서도 그렇고, 그 캐릭터를 벗어나서도 그럴 것 같고..영화를 보고 아마 많은 여자들이 깊이 의문을 가졌던 것 중의 하나는 저렇게 괜찮은 조지 클루니를 옆에 두고 왜 저런 별로인 사람과 아내는 바람을 피웠던걸까...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때로 다른 영화에서 망가질 수도 있겠죠. 조지 클루니 같은 사람이 망가지는 것은 그나마 봐줄만 하니까요. 원래 엉망인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망가지는 연기를 할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리시스 2012-02-20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평 왜 이렇게 길어요!!! ^_________^

맥거핀 2012-02-20 23:58   좋아요 0 | URL
아...짧아서 단평이 아니라, 단적인 평이라서 단평입니다, 라는 건 개드립이구요. 의외로 길어보이지만, 사실 읽다보면 별 내용이 없기 때문에 단평입니다. 하하.

네오 2012-02-21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볼까 말까하는 작품이긴한데요~ 제가 알렉산더 페인에 패인이라서요 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2-22 01:19   좋아요 0 | URL
아..알렉산더 페인을 좋아하시는지 몰랐어요. 페인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뭐에요?

네오 2012-02-22 08:19   좋아요 0 | URL
좋아해요 두번 좋아해요 ㅋㅋ 그의 데뷔작 일렉션 일렉션 두번 쓰고 말았군요 ㅋㅋㅋㅋ 리즈 위더스푼과 매튜 브레데릭 출연하는데 ㅋㅋㅋㅋ 학교에 정치가 개입하는 순간 ㅋㅋㅋㅋ 사랑해 파리에서도 마지막 분분이 이분 영화인데 뭔가 울림이 있던군요~ 미국에 사는 중년여자가 불어를 배우고 파리를 여행하는 내용인데 뭔가 설레임보다는 성찰적인 자세 ? 뭐 저는 이런걸 봤어요 ㅋㅋ

맥거핀 2012-02-22 20:07   좋아요 0 | URL
아..일렉션..저는 위더스푼 양의 새초롬한 얼굴밖에 생각이 안나는 영화인데.ㅋ <사랑해, 파리>도 보긴한거 같은데 전혀 생각이 안나는게, 머리 속에 영화를 먹어버리는 귀신이 사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페인 씨는 내 취향이 아닌걸로 다시 마무리.ㅋ

네오 2012-03-12 14:43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영화를 따뜻하게 봤습니다만......뭘랄까......그 풍경안에서의 인간이 자연스럽게 어울려진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천천히 머릿속에서 정리한다음 더 깊은 대화를 했으면 합니다~

맥거핀 2012-03-12 20:48   좋아요 0 | URL
그래요. 제가 페인 영화에 편견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별로 깊이 생각을 해보지를 않아서요. 저도 좀 생각을 해볼께요.^^

꽃도둑 2012-02-22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조지 클루니가 너무 멋있어 침을(왜하필?)흘린(?)적이(아니 자주)있었어요.
이 포스터에선 별루네요,,,^^
젊은 애인을 옆에 끼고 공식석상에 나타날때부터 아마 별루라고 생각했지 싶어요.
맥거핀님의 좋은 리뷰에도 불구하고 조지 클루니를 보고 싶지 않아요..ㅡ.ㅡ.
누가 보면 혼자 열라 짝사랑 한줄 알겠네요...
전 그런거 안해요, 다만 조금 침을 흘렸을 뿐이에요..ㅋㅋ

맥거핀 2012-02-22 20:12   좋아요 0 | URL
이 포스터 너무 구려요. 그렇지 않나요? 다 그렇다치고, 맨 위에 '아카데미 5개 부문 노미네이트!' 이건 뭔가요..아 촌스러. 이런 쓸데없는 멘트깔지 말고, 잘 나온 조지클루니 사진으로 포스터 하나 뽑고, 딸들 사진으로 다른 포스터 뽑고 그랬으면, 여성관객부터 젊은층까지 잘 공략할 수 있었을텐데..누가 촌스럽게 요새 '아카데미다!'하고 영화보러 간다고..

하하..젊은 애인을 끼고 나타났을 때부터 싫어지셨다라..

프레이야 2012-02-28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바웃 슈미트'를 재미있게 본 저도 페인의 이 작품을 보려고 하고 있는데
몇 군데, 그것도 시간이 잘 안 맞는 곳에서 상영하고 있어서 아직이요.
조지 클루니야 뭐 제 취향은 아니지만, '인디에어'에서는 괜찮았고요.
맥거핀님이 별로 따듯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가 이 단평의 핵심인가요? ㅎㅎ
(농담입니다^)

맥거핀 2012-03-01 00:45   좋아요 0 | URL
저한테는 좀 맞지 않는 영화였지만, 저같은 삐딱한 심성을 조금 잠재우신다면 괜찮게 보실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이 되네요. 조지 클루니야 뭐 항상 어느 정도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주니까요. 요즘에 좀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도 있어서 영화를 봐도 좋은 소리가 안나오는 듯도 싶구요. 하하.

근데 이제 영화보기의 가장 큰 적인 봄이 오는군요. 봄에는 아무래도 어두운 극장안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는 때가 종종 있지요.^^ 좋은 봄날들 맞으셔요.

2012-03-02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진짜 별로 안 땡기네요. 리뷰를 읽고 나니.. 그치만 조지 클루니가 멋지게 나온다면 충분히 볼 가치가 있어요.ㅎㅎ
/ 영화보기 망설여지는 계절, 봄이라니 생각만 해도 멋지군요. 그런 봄에도 굴을 파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 어떤 쾌감이 또 있을 것 같군요. 자학일까요? 후후

맥거핀 2012-03-02 23:38   좋아요 0 | URL
제가 삐딱해서 그런건데..ㅎㅎ 영화를 보시면 또 나름의 좋은 점을 발견하실 것이고, 분명히 제가 보지 못한 어떤 것을 또 보실 겁니다. 아무리 봄이 와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어둠을 사랑하죠. 아무리 따듯한 봄이 와도요. 자학이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권이라고 해두죠.
 

 

 

 

웰컴 투 마이 하트(Welcome to the Rileys), 제이크 스콧, 2010



(영화의 내용이 군데군데 들어있음)


이야기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가, 이야기의 옷을 입기 시작한다. 먼 도시로 출장을 떠난 남자가 한 어린 스트립걸을 만나고 그녀와 동거를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그리 신기할 것이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남자 조금 이상하다. 이 동거는 성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그런 관계다. 운영하고 있던 회사까지 정리하고, 집에는 일방적으로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통보한 이 남자는 여자를 돌보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주고, 화장실 변기를 뚫어주고, 깨끗한 매트리스를 깔아주며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찾아 아내가 먼 도시로 차를 몰고 찾아온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곧 펼쳐질 파국의 예감. 그러나 이 여자도 이상하다. 아내는 남편을 이해하고, 남편과 스트립걸과 함께 동거를 시작하고, 스트립걸을 같이 돌보고 속옷과 잠옷을 챙겨준다. 이건 무슨 이상한 이야기일까. 이야기가 우리가 아는 보통의 세계와 다르게 전개될 경우 그것은 세 가지 경우 중의 하나가 아닐까. 먼저 첫 번째 케이스는 이들이 우리가 아는 그런 '인간'이 아닐 경우다. 그들은 단지 '보통의' 인간이 아닐 수도 있고, 기계장치일 수도 있고, 외계인일 수도 있고, 인간 이상의 어떠한 다른 존재일 수 있다. 두 번째 케이스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세계의 이야기일 수 있다. 이른바 SF의 세계. 다른 시공간, 다른 세계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규칙. 예를 들어 20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남녀가 섹스를 할 경우 둘 중의 하나가 죽게 되어 있는 뭐 그런 세계. 마지막 하나의 케이스는 가장 흥미로운 케이스로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이 이야기에 도통 관심이 없는 경우다. 이야기야 뭐 될대로 되라지. 이야기 말고 다른 것을 보세요. 나는 서사 따위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나는 이 간단한 줄거리를 쓰는데 몇 가지 사실을 고의적으로 숨겼고, 관객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이 남편 더그(제임스 갠돌피니)와 아내 로이스(멜리사 레오)는 인간이 아닌 것. 인간은 인간이지만, 안은 비어있는 어떤 상태. 뭐 그러니까 기계장치이거나 옥수수이거나 한 그런 상태. 이들이 이렇게 된 이유를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신은 인간을 비워내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그것은 그에게 자식을 안긴 후, 그 자식을 먼저 데리고 가는 것이다. 가끔 잘못 만들어진 불량품도 있기는 하지만, 신은 인간을 그런 존재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신은 더욱 확실한 안전장치를 해두었다. 남편 더그는 딸이 죽은 후 애써 마음의 끈을 잡게 해준 애인마저 잃어버렸다. 아내 로이스는 딸의 죽음에 자신이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둘은 기계장치이거나 옥수수이지만 보통의 기계장치나 옥수수도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원유지장치만 겨우 기능을 하고 있는 기계장치이거나 닭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그야말로 안이 바싹 말라버린 옥수수인 것. 그러니 이들이 스트립걸 앨리슨(크리스틴 스튜어트)이든 다른 무엇이든 돌보지 않을 이유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 더그가 공구들을 사다가 집안을 수리하고, 변기를 뚫고, 집안의 빨래들을 통에 담을 때, 그리고 로이스가 벌벌 떨며 차 안 시트에 앉아 시트 위치를 조절하다가 차 안에 끼일 때, 그리고 쓰레기통을 들이받아 에어백이 터질 때 뭔가 울컥할 수 밖에. 그 몸짓들이 비어있는 자신 속에 뭔가를 필사적으로 채우려는 듯한 움직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더그의 끊임없는 흡연 같은 것. 하다못해 담배 연기같은 것이라도 가득 채워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즉 필사적으로 채워넣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비어 있는 자신에 대한 부정이며, 삶에 대한 강한 욕구이며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영화는 이 중년의 두 인물을 가장 밑바닥에 떨어뜨려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이것은 체념과 절망이 가득 담긴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라, 젊은 삶의 욕구로 가득차 있는 그런 이야기라는 사실이며, 도리어 이 부부에게서 역설적으로 (비정상적인) 삶의 활력 같은 것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도 더그를 가장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딸의 무덤이나 애인의 무덤이 아니라, 아내가 미리 만들어놓은 자신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죽음을 예비한다는 것이고, 자신의 늙음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늙음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더그가 스트립바를 찾아간 것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더그가 스트립바에 갔으면서도 어떠한 성적인 관계도 맺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 (더그는 누군가의 강권에 의해 그 곳에 간 것이 아니며, 아는 이를 만났을 때 놀라 피하는 것으로 볼 때 그 곳이 어떠한 곳인지 물론 잘 알고 있다. 그가 굳이 이곳에서 성적인 서비스를 피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당연한 해석은 미성년자인 앨리슨을 만났을 때 자신의 딸이 생각나서, 혹은 어린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윤리적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자꾸 오독을 하고 싶어진다. 더그는 그 자신의 삶의 활력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보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오직 자신의 육체의 쇠락을 처절하게 인식한 남자들만이 어린 여자의 육체 앞에서 벌벌 떨고 감탄하며, 그리고 동시에 자신에 대한 혐오를 맛보며 섹스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젊은 여자의 나신 앞에서 자신의 육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자는 정신적으로 젊은이 뿐이다. 더그의 성적인 관계에 대한 회피는 어떤 정신적인 젊음에 대한 자신감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즉 이 영화에서 더그와 앨리슨에게는 성적인 관계는 거세되어 있지만, 여전히 어떤 성적인 긴장감은 남아있다. 이것은 부녀관계인가, 아닌가.)

그러한 정신적인 젊음은 앨리슨에게도 남아 있다. 앨리슨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가장 밑바닥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언뜻 보면 툭하면 상소리를 내뱉고, 아무 거리낌 없이 성적인 말들을 던지는 그녀는 젊음이라는 것은 닳고닳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사회에 대한 반감과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 같은 것에서 만들어진 공격적인 위악이 아니라 체념(과 체념에서 만들어진 방어적 위악과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자기파괴)이다. 그녀의 거친 말들이 단지 위악일 뿐이라는 것은 더그에게 스트립바에서 일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여실히 드러난다. 그 이유란 고작 견인된 차를 찾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것. 적어도 차에 대한 혹은 돈에 대한 욕망이 있는 것이 아무런 욕망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래서 더그도 아마 어느 정도는 안심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거기에서 일하고 몸을 파는 이유가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라고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어린 여자가 나이든 아저씨들과 돌아가며 자는 것이 단지 그들을 이로써 경멸하는 것만이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한다면 우리는 그녀를 어떻게 건져낼 것인가.  

거의 텅빈 극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은 나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어느 커플과 영화를 보았다. 그들은 더그가 집안을 수리하고 변기를 뚫고, 침대에 누워 정신없이 잠을 잘 때 까르르 웃어댔다. 로이스가 시트를 이리저리 조절하고, 벌벌 떨며 운전하다가 에어백이 터지고, 멀미를 하며 종이봉지를 입에 급히 갖다댈 때도 까르르 웃어댔다. 나는 짜증이 났다. 도대체 이 장면들이 뭐가 웃긴거야. 도대체 뭘 안다고 저렇게 웃어대는 거야. 그러나 그들은 나의 관심 따위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했다. 지금 영화를 다 보고 생각해보니 오로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보다 나이어린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나이가 더 어린 사람들은 그보다 나이많은 사람들의 반응 따위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의 굳어버린 생각에 대해 (비)웃을 뿐이다. 오로지 늙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젊은이들의 반응을 살필 뿐이다. 자신은 예전에 그러지 않았다고, 더 나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더그와 앨리슨의 정신적 젊음을 충분히 맛본 지금에는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다. 나도 웃는다. 하하. 저거 정말 웃기잖아.



덧. 

이 영화에 대한 카피문구에 "슬픔과 희망에 대한 따뜻한 대화! 상처입은 당신에게 전하는 위로와 용기!"라고 되어 있는데, 그런 건가...그런 생각이 든다. 이들은 원래 이런 사람인 것처럼도 보이니까. 상처라는 것은 원래 깨끗한 피부에 생기는 것이니까. 원래 망가져 있는 피부 따위에 상처같은 것이 생겨도 눈에 보일리 없으니까. 신은 인간을 비워낼 수는 있어도, 다른 인간으로 바꿀 수는 없어요,라고 영화는 겨우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이 영화는 그럴듯한 악인도 나오지 않으니까. 오로지 착한 당신에게만 이 영화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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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2-02-17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내용이 군데군데 들어있음말에 읽지는 않았어요~ 괜히 스포일러보면 아~ 영화가 보고 싫어지더군요 ㅋㅋㅋㅋ 그런데 이 감독이 스콧형제중 둘중하나의 아들이 아닌가요????

맥거핀 2012-02-18 21: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무려 리들리 스콧 감독 아들이라고 합니다. 뭐 아직은 특징적인 면이 보인다고 하기는 그렇고, 아버지 같은 대가가 되려면 수련을 더 쌓아야겠지요.

꽃도둑 2012-02-18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에요..^^
아 좋아요~ 포스터도 좋고 내용도 좋아요.
영화관에서 영화를 언제 봤는지...가물가물 하네요.
추천 꾹꾹 누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맥거핀 2012-02-18 22:00   좋아요 0 | URL
오늘 꽤나 추운 날씨였는데, 아랫동네는 어떤가 모르겠습니다.
날씨 따듯해지면 영화관 나들이도 좀 하고 그러셔요.^^
기회되신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구요. 특별히 그렇게 흠잡을 만한 데는 없는 영화니까요.

꽃도둑님의 영화리뷰를 보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지요.^^

반딧불이 2012-02-1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그와 앨리슨, 아니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을 치유해나가는 듯하군요. 내용을 차치 하고라도 누군가 제가 저 제목처럼 말해준다면 뒤도 안돌아 보고 뛰어 들 것 같습니다.

맥거핀 2012-02-18 22:03   좋아요 0 | URL
상처가 생기면 또 아물 때가 있을 것이고, 처음에는 아문 자리가 도드라져 보여도, 어느 순간보면 또 상처난 자리마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올 겁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렇게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말들을 해주면서 버티는거죠.^^

아이리시스 2012-02-18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웃어요. 하하. ^_____________^ (젊은 아니, 어린 애들 짜증나..-_-;;)
저는 웃는 것도 싫고 뽀스락 거리는 것도 싫고 휴대폰 조용히 받을 거라고 속삭이는 것도 싫고 그렇게 바쁘면 스케줄이나 소화하든가ㅋㅋㅋ

영화는 둘이 보는 게 아니라 혼자 보는 행위니까 같이 못 오게 했으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얘기가 이상한데로.. 미안요!!!) 히히히.

크리스틴 스튜어트 예뻐요!!!

맥거핀 2012-02-18 22:06   좋아요 0 | URL
응..? 댓글을 읽다보니 시끄러운 애들이 싫은건지, 단지 '커플'이 싫은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ㅋㅋ 하기는 영화관에서 좀 심한 애들(?)이 있기는 있어요. DVD방도 아닌데..킁킁. 위의 글에 쓴 것처럼 그 커플과 저, 영화관에 달랑 3명이었는데, 그 커플이 제가 들어오는 걸 보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크리스틴 스튜어트 마지막 장면 보고, 아니 저렇게 이쁜 얼굴을 왜 저따위 화장으로 영화 내내 망쳐놓은 것이냐..! 이 생각을..총총.

2012-03-0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드는 오독입니다. 영화는 종종 '오독'하며 놀기 좋은 매체라 좋아요.^^
그리고 그냥 인간애, 휴머니즘의 주제라 해도 좋아요. 이런 줄거리, 좋구요. 결론은, 봐야겠다~~입니다~!ㅎㅎ

맥거핀 2012-03-02 23:42   좋아요 0 | URL
많은 오독들이 쌓여서 결국 영화의 큰 힘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에는 당연히 정답은 없습니다만, 오독들이 때로 일으키는 공감이 만들어내는 큰 힘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영화의 평들이 처음에는 얼마나 공격을 받는지를 생각해보면요.) 저는 왠만하면 다 좋아해요. 다만, 보고 난 후에 머리를 비우게 만드는 영화는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