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 <설국열차>에 대한 스포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 대한 반응 중에 흥미로웠던 것은 찜찜하다, 씁쓸하다, 뭔가 개운치 않다는 말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일종의 성취 지점이 아닌가 싶은데, 뭔가 눅진하고 불길한 무엇인가를 영화 속에 남겨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에게 길게 달라붙어 있다는 점은 결국 봉준호가 원했던 부분이 아닐까. 영화 속 등장했던 수석처럼 말이다. 영화 속 기우(최우식)는 수석을 껴안고 누워있으면서 중얼거렸었다. 떼어내고 싶은데 떼어내지지 않는다고.

 

사실 그런데 봉준호의 영화가 언제 상쾌한 무엇인가를 준 적이 있던가. <살인의 추억>에서 빗속에서 DNA 분석 결과를 뜯어 보았을 때, <마더>에서 진범이라고 잡혀 들어온 이의 얼굴을 보았을 때, 뭔가 맥이 풀리는 그 순간. 그것이야말로 봉준호의 말대로 그가 즐겨 의도한 거대한 '삑사리'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에서 괴물이 쓰러지는 순간이나, <설국열차>에서 열차가 터져나가는 거대한 스펙터클의 순간에서도 모종의 쾌감보다는 어떤 씁쓸함이나 맥풀림이 더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기생충>은 그의 전작들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영화다. 여러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단적으로는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돌고돌아 처음 위치에 와 있는 것들.  <살인의 추억>의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논바닥 옆 어두운 배수로와 다시 돌고돌아 영화 마무리에서 만나게 되는 어두운 배수로, 아니면 <괴물>에서 한강 둔치에 서 있던 컨테이너 건물과 다시 어두운 한강 옆에서 홀로 서 있는 컨테이너 건물, <마더>에서 영화 시작과 함께 만나게 되는 마더의 춤과 영화의 끝 고속버스 안에서의 망각의 춤. 이것은 <기생충>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영화의 시작, 반지하 방의 창에서 시작하여 걸려 있는 양말들을 비추며 카메라는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그대로 반복된다.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이동한 반지하 방에는 여전히 기우(최우식)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완전히 같지는 않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어두운 배수로 안에는 여자가 죽어 있었고, 마지막에는 그 위에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괴물>의 마지막에서는 컨테이너에 원래 있었던 아이는 죽었지만, 대신 다른 아이가 살아남아 밥을 먹었다. 그리고 <기생충>에서는 마지막 지하방 그 이전에 환상이 이어졌다. 혹시 사실인가 싶은, 믿기지 않는 환상이.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 지하방에 있고, 이제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는 참이다. 돌고돌아서 얻은 근본적인 계획. 그러나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안다. 그가 그렇게 그곳에 앉아서 환상을 보고 있는 한, (아니 사실은 환상을 보지 않더라도) 그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러나 아무튼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지라도 돌고돌아야만 한다. <설국열차>에서 결국 같은 곳으로 되돌아올지라도 열차가 같은 궤도를 돌아야 하는 것처럼.

 

<설국열차>. 영화가 봉준호의 전작들 연장선상에 있지만, 이 중에서 굳이 가장 가까운 영화를 꼽으라면 그것은 이 영화 <설국열차>이다. 예를 들어 <기생충> 그 마지막의 그로테스크한 활극은 설국열차의 그 장면을 연상시킨다. 혁명을 꾀하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열차의 머리칸으로 들어가고, 뒤에 남은 남궁민수(송강호)가 일군의 약에 취한 무리들과 대결을 펼치던 장면. 크로놀에 취한, 아니 사실은 크로놀로 상징되는 다른 무엇에 취한 그들은 기꺼이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처단할 참이다. 그들은 열차를 멈추게 하려는 위험한 자들이니까.(예전에 <설국열차> 리뷰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사실 어쩌면 커티스는 처음부터 열차를 멈추게 할 마음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열차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열차는 어떻게든 돌아야 하니까. 그래야 우리는 살 수 있으니까. 위대한 영도자 윌포드의 뜻대로.      

 

커티스의 반란이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인 것은 결국 그의 시도가 열차를 계속 돌아가게끔 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시스템의 설계자 윌포드는 기꺼이 그를 머리칸으로 오도록 안내한다. 위험한 것은 커티스가 아니라 열차를 멈춰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남궁민수였고, 그래서 그는 광기에 가진 이들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크로놀에 취한 그들은 윌포드를 위해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들을 위해서 남궁민수를 기꺼이 처치할 것이고, 그것은 <기생충>에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버전으로 변주된다.

 

지하실에 있던 남자가 기택(송강호)과 기우 가족에게 달려드는 것은 언뜻 보면 아내에 대해 복수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관점에서라면 사실은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가 했던 몇 개의 말들을 여기에 덧붙인다면 말이다. 존경합니다, 박사장님! 리스펙!! 아니,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인터넷에는 이를 방증하는 수많은 글들이 있다. 박사장(이선균) 내외도 피해자이며, 그들은 결코 악인이 아니라고 기꺼이 변호를 해주는 수많은 글들. 아니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면 그 존경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비슷하게 변주되고 있다. 이미 잡스와 빌 게이츠는 위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재용이라고 여기에 올라서지 말란 법이 있을까. (아니 이미 올라섰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냄새나는 것들은 바로 지금 지하철 내 옆자리에 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낯선 남자다. 아무나 밀치고 들어오는 할아버지들, 어떻게든 자리를 잡으러 비집고 들어오는 아줌마들, 크게 음악을 들으며, 백팩으로 쿡쿡 찔러대는 젊은 남성들에게 나는 냄새를 혐오하며,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재벌들의 기사를 애써 읽으며 감탄한다. 리스펙까지는 아닐지라도 우와를 연발하며.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도 이미 <설국열차>의 윌포드에 혹한 바가 있다. 열차는 돌아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좁은 구석 그 안에서 열차를 돌리기 위한 부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열차는 돌아가지 않나요? 그것을 <설국열차>의 메이슨(틸다 스윈튼)은 간단하게 말한 바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키라고. 머리칸은 머리칸, 꼬리칸은 꼬리칸. 자, 그렇게 그들은 자기의 자리를 지키러, 아니 사실은 별도리가 없어서 '내려간다'. 빗줄기는 쏟아지고, 그들은 자신들의 반지하방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일까. 어디까지 내려가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계단을 내려간 후, 그들은 겨우 자신들의 반지하방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침몰하는 중이다. 모든 곳은 가슴까지 물에 잠겼고, 변기는 계속 오물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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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0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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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0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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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2 17: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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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4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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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6 0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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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년만의 <씨네21> 구입. 숫자라는 것에 둔감하기는 하지만 이제 1200호라. 저 중에 최소 700~800호는 한 때 내 손에 쥐어져 있었고, 잘 보관해두다가 이사올 때마다 버리고 버려 이제 내 손에 남아 있는 것은 특집호 몇 권 밖에는 없지만, 그래도 내 가방 한 구석에 늘 들어있던 잡지라 애정이 간다.


좋아하던 필진도 많이 떠나고, 글의 무게감도 예전보다는 훨씬 덜해 애정이 많이 식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번 호는 1200호 특집이기도 하고, 기대하고 있는 작품들 - 봉준호의 <기생충>, 박찬욱의 <리틀 드러머 걸> 감독판, 전도연이 나온다는 이종언의 <생일>,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 등 - 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집어 들었다.


그나저나 위에 작품들 중 몇 개나 볼 수 있으려나.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 제목이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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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0 16: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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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 2019-05-12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성년과 생일을 봤어요. 정말 오랫만입니다. 맥거핀 님. ^^

맥거핀 2019-05-21 17:07   좋아요 0 | URL
저도 지난 주말에 뒤늦게 미성년을 다운받아서 봤습니다. 아..이게 김윤석 영화야? 싶더라구요. 첫 작품이 이정도라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충분할 듯 싶더라구요. 영화를 보시고 계시다는 말씀을 들으니, 왠지(?) 기분이 좋습니다.
 


뒤늦게 윤이형 작가에 대해 찾아보고 있는데,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윤이형 작가가 이제하 작가의 외동딸이라는 사실 같은 것. 여러 기사를 보다가 한 부분에 눈길이 머물렀는데, 최근 이상문학상을 수상하고 인터뷰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이 말에 꽤 공감했다.


"우리 사회의 남녀 갈등 양상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남녀 갈등과 대립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설 안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부부가 헤어질 때 원한에 가득 차서 서로를 미워하는 건 각자의 행복에 도움이 안 된다고 봅니다."


사실 이 소설(<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의 인상적인 대목 중에 하나는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대목이다. "결혼이 남미의 오지로 떠나는 위험한 여행이라면, 아이의 양육자가 되는 일은 우주선에 탑승해 미지의 행성에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것과 같다. 앞서 간 여행자들의 데이터는 제대로 전송되어 오는 법이 없으며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이 지구에서와 다르게 흐른다.(p.45)" 나는 이것을 조금 비틀어 보고 싶다.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어쩌면 지구인과 외계인이 같이 미지의 행성을 탐사하기 위해 떠나는 스타트렉 같은 것이 아닐까(<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합쳐봤다). 남녀 중 누가 지구인이고 누가 외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떤 네 발로 걷는 외계인이 두 발로 걷는 지구인에게 너 왜 두 발로 걸어?라고 묻는다 해도 지구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해의 시작이란 결국 이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 개인 혹은 집단(남자이든 여자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의 어떤 것을 결국 (어떤 집단에 소속된) 나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 데리다는 "용서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해란 것도 사실 어쩌면 비슷한 것이 아닐까. 이해란, 결국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최근 데리다의 책 <용서하다>가 나왔다. 나부터 읽어봐야 할 듯.)


아무튼 윤이형 작가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 이번달 Axt의 메인 작가가 윤이형 작가던데 읽어봐야 할 것 같다. Axt를 이번 달에는 건너뛸까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사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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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2 0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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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TV를 끄고 정말 오래간만에 책을 읽었다. 머리 속에 있는 '아무 생각 없음' 버튼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TV'라는 스위치를 끄고, '책'이라는 스위치를 찾아서 켜는 일은 정말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무거운 몸을 들기 싫어서 애써 발로 전등 스위치를 켜듯이 어찌어찌 해냈다.


그래서 겨우 집어든 것은 며칠 전에 사놓고 던져놓은 이상문학상 작품집이고, 잠들기 전까지 읽은 것은 겨우 대상 수상작인 윤이형의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한 편이지만, 어찌되었건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의 감상이 들었는데, 하나는 이 소설이 대상을 받을만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은 현재의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위로 섞인 작가의 대답이라는 것이다. 사실 '위로 섞인 대답'이라는 말은 조금 웃기는 말인데, 위로면 위로고, 대답이면 대답이지, 위로 섞인 대답일 것은 무엇인가. 그렇지만 나는 결국 작가란 아무도 요청하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을지라도 현재에 대해 무엇인가가 답을 내놓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의 젊은이들을 서로 날서게 만드는 하나의 문제, - 이른바 페미니즘 이슈 - 라고 통칭할 수 있는 어떤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 작가로서는 대답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답은 또다른 <82년생 김지영>이 아니라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사실 이 소설은 그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아니 어떻게 보면 상관이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우회하는 이 방식이야말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면으로 부딪혀서 말하기에는 이미 많은 것들이 부정확한 사실들과 왜곡된 주장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 구부러진 거울을 정면으로 보면 구부러진 얼굴만 보일 뿐이다 - 하다못해 이런 졸려서 쓰는 잡글을 쓰는 데에도 조심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작가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이제는 그만 싸우고, - 그러니까 희은과 정민이 싸우다 지쳐 모종의 결단을 내린 것처럼 - 무엇인가 다른 방식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 나는 그들이 내린 선택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그 결과에 이른 어떤 과정, 그러니까 왜 그 사이에 첫 번째 고양이(의 죽음)와 두 번째 고양이(의 죽음)가 놓여져 있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록으로 끝나는 마지막은 너무 작위적이었기에 그렇게 훌륭했다고 보지는 않지만, 나는 왜 두 가지의 죽음 사이에 이들의 이야기가 놓여져 있나, 그들의 선택에 무엇이 작용했나를 생각했다.


나는 적어도 작가가 이들을 - 그러니까 현재의 남성 젊은이들, 그리고 여성 젊은이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녀 주인공의 입장에서 비교적(비교적에 이런 구차한 설명을 달아야 한다는 것이 슬프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 무게는 차이가 나고, 여성 작가이니 무게 중심은 아무래도 희은에 더 쏠려 있다.) 번갈아 서술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해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에 있다. 위로는 결국 최소한의 이해, 혹은 이해하려고 애씀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이제 젊다고 말할 수 있기에는 매우 애매해져 버렸지만, 그래도 그 애씀에서 모종의 작은 위로를 받았으니, 그래도 읽기 잘했다고 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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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2 0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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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지하철에서 3편의 영화를 보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어쩌면 이 첫문장을 보신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출근을 도대체 어디로 하기에, 3편이나?


아니, 그 3편의 영화를 (읽어)보았다,는 말이다. 허문영의 <보이지 않는 영화>에 실린 3편의 리뷰. 사실 지하철에서는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나는 영화는 절대적으로 사이즈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들여다보는 영화, 더구나 사람들에게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상황에서 보는 영화라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그것은 그 영화를 싫어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작은 화면으로, 게다가 안좋은 화질로 본 어떤 영화를 우연히 극장에서 다시 보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내가 본 영화는 그 영화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영화로 나에게는 받아들여졌다.


내가 서두에서 일종의 낚시질을 한 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허문영의 글들이 적어도 영화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을 본 것과도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 쓴 3편의 영화를 사실 아직 모두 보지 못했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이나 예고편 등으로 짧게 본 것이 전부이지만, 그의 묘사는 이상하게도 영화의 일정 부분을 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사실 그의 묘사력이 뛰어난 편이 아닌데도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그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글을 읽으면서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이미지화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실제의 영화(장면)를 보는 것도 거의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스크린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그 스크린은 이미지화되어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우리는 같은 장면을 봐도 다르게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그 이미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이미지는 더 생생해진다. 보지도 않은 영화의 이미지가.


허문영은 계속 질문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질문의 빈도라기보다는 사이즈다. 허문영이 묻는 것은 어떤 장면의 의미나, 그 장면이 소구하는 무엇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장면이 불러오는 영화라는 것의 작동방식이다. 혹은 그 장면이 단적으로 드러내보이는 영화라는 것의 메커니즘이다. 그 질문들은 점점 커져, 거의 걷잡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특히 오늘날의) 영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폭력 이미지, 그것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혹은 영화는 죽음을 어떤 식으로 넘어서는가, 혹은 넘어서려고 애쓰는가. 아마도 누군가는 이 마지막 문장을 보고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떠한 것도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는데, 고작 영화따위가?


그렇다. 사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도전이다. 허문영은 일단 벽을 먼저 세우고는 그 벽을 넘어서려고 애를 쓴다. 그 과정에서 벽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거대해진다. 어느 틈에 가면 벽을 넘어서려고 애쓰는 것인지, 그 벽을 더 단단하고 거대하게 만드려고 애쓰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그러나 그의 글들이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순간이다. 거대한 질문과 작은 답, 혹은 거대한 질문에의 도전. 그리고 예정된 실패.


개별 영화들을 다룬 2부보다, 영화의 윤리라는 거대한 질문에 도전한 잡문 성격의 1부가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 늘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답을 찾아서 제시하려는 욕망. 나는 당신보다 이 영화에 대해 이 만큼 더 알고 있어, 그러니 그것을 말해줄께,라는 식의 소아적인 욕망. 그래서 질문은 자신이 답을 낼 수 있도록 늘 빈곤해지고, 유혹에 쉽게 흔들린 글들은 이제 영화가 아닌 것을 다른 것을 보기 시작한다. 영화가 아닌, 자신이 본 영화,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들.


영화를 보면서(어쩌면 세상을 보면서도) 왜 우리는 눈앞에 현전한 것을 종종 보지 못하며, 거기 없는 것을 종종 보았다고 느끼는가.(p.7)


그래서 그는 예정된 실패를 알지만, 거대한 질문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결국은 계속 볼 수밖에 없다. 계속 봄으로써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계속 배반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반복하여 본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우리의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고자 하는 욕망, 그 욕망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허문영은 말한다. "우리가 응시해야 할 것은, 이 한 편의 영화 이전에 그 욕망과 충동일 것이다 (p.247)."

그것이 아마도 그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영화'이다.



덧.

그래서 물론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이 3편의 영화를 봄으로써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배반당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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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8 0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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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2 0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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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16: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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