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창작물은 무엇인가를 '미화'한다. 예를 들어 그 대상은 언뜻 보면 매우 복잡해보이는 누군가의 일대기일 수도 있고,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누구나 긍정할만한 추상적인 무엇일 수도 있으며, 혹은 전화기이거나, 달력이거나, 컵이거나 하는 (사무실 눈앞에 보이는 아무 것이나 쓰고 있다) 무생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안기부일수도 있다. 아니, 벌써부터 화를 낼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예를 들고 있을 뿐이지' 안기부에 대한 미화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단 '미화'라는 단어에는 면죄부를 주고 싶을 뿐이다. 사실 최고의 예술작품은 역설적으로 '고도'의 미화가 성공했을 때 나오는 법이기도 하니까.


2.

즉 다시 '예를 들어 말하자면' 진짜 그 드라마가 안기부나 독재정권을 미화하고자 하는 것이라면(물론 사실은 안기부나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시 1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럼 무엇을 미화합니까?), 나의 관심은 그런 것을 미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미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미화의 양상이나 미화의 성공 여부에 있다. ("호오, 용케 그런 것을 미화하려고 생각했군. 근데 미화를 잘 하기는 한 건가?")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논쟁, 이 드라마가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혹은 무엇인가 매우 잘못된 것을 미화하고 있다,라는 주장에 조금은 나는 비껴서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잘 모르겠다. 드라마를 자세히 보지도 않았거니와 자세히 본다고 해도 잘 모를 것 같다. 아직 2회밖에 하지 않은 드라마에 그것을 정확히 말할 수가 있나? 영화로 따지자면 초반 10분을 보고 판단을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3.

그런데 여기서, 그러니까 방영 중지! 이렇게 얘기가 돌아간다면 나는 그것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아직 2회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판단하기가 어렵고, 그러니까 방영을 중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창작자가 아닌 타인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창작자가 아닌 이들이 어떤 창작물에 대해 최고의 형벌을 내리는 것은 '무관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넘어서는 폭력을 저지를 권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주어지는가?


덧.

별 시덥잖은 길지도 않은 글을 1과 2와 3으로 나눈 이유는, 이 모든 것이 혼재되어 돌아가는 지금의 논란에 머리가 아파서다. 1과 2와 3을 나눠서 생각하는 것, 그것부터가 일단 시작인 것 같다. 단지 나는 그냥 2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창작물이 아닌 논문의 경우지만, 굳이 아래의 글을 덧붙여 봄.

(그리고 한 가지 더, 촘스키는 유대인이다.)


1979년, 프랑스 리용2대학에서 20세기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던 로베르 포리송 박사는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거짓말”이며 “히틀러에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다행스럽게도 한 사람도 없었다”는 논문으로 법정에 기소되었다. 그러자 박해를 받지 않고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요청하는 국제적인 탄원서가 작성되었다. 촘스키는 친구의 요청으로 500명의 서명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서명자 가운데 그가 가장 유명했던 탓에 프랑스 언론은 이 탄원서를 ‘촘스키 탄원서’라고 불렀다. 촘스키는 이 일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자, 네오나치주의자, 유대인을 혐오하는 인종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중략)


드니 로베르와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가 촘스키와 했던 인터뷰를 정리한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창,2002)에서 촘스키는 “나는 포리송의 글을 전혀 읽지 않았”으며,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데 그 내용을 검토할 이유는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포리송이 “반유대주의자고,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정말로 신나치주의자라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표현의 자유까지 박탈당해서는 안 되며, 표현의 자유는 어떤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는 권리”이다.


[장정일 칼럼] 촘스키가 반유대주의자 처벌을 반대한 이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4291485267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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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12-2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오랜만이네요 드라마 이야기 잘 모르지만, 방영 중지 이야기까지 나왔군요 지금 기사 보니 어떤 시민단체에서 그 드라마 방영 중단 가처분 신청했다는 말이 있네요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면 좋겠지만, 역사가 들어가면 그러지 않는 듯합니다

중국에서 만든 영화 지난해였나 올해였나 꽤 많이 봤다는데, 그것도 그런 거 있다고 하더군요

며칠 전에 맥거핀 님을 잠깐 생각했는데,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곧 성탄절이네요 저는 늘 똑같은 날이지만, 성탄절 마음 따듯하게 보내시고 남은 2021년도 잘 보내세요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희선

맥거핀 2021-12-23 11:37   좋아요 1 | URL
희선님도 잘 지내시죠? 요새 너무 발길이 뜸했습니다. 알라딘은 책 살 때 외에는 요새 거의 잘 안들어와 보는 것 같아요. 희선님도 성탄절 잘 보내시고 몸건강 마음건강 잘 챙기시면서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뭐 꼭 그 드라마 얘기라기보다는 제 생각에는 조금 너무 지나친 것 같아서 잠깐 짬을 내어 끄적거려 봤습니다. 물론 뭐 동의하시지 않는 분이 더 많을 얘기라고는 생각합니다. :)

희선 2022-01-0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첫날이에요 몇 분 뒤면 둘째날이군요 쓰다가 둘째날로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새해 첫날도 게으르게 지냈네요 이런저런 꿈을 꾼 듯합니다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맥거핀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2년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늘 하던 거 하기... 이번에는 별로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지난해에도 별로 못했군요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희선

맥거핀 2022-01-03 10:57   좋아요 0 | URL
희선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준점이라는 게 점점 낮아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뭔가 놀라운 것, 큰 변화, 이런 것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런 거는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그저 조금씩 나아지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지난해보다 ‘조금 더‘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
 



지난 번 이상문학상과 관련한 짤막한 페이퍼에 썼던 문단 경력 10년차 이상 소설가의 소설만을 심사 대상으로 한다는 부분이 아무래도 조금 이상하여 여러 내용을 찾아보다가 나온 기사 하나.


이상문학상 심사에 문제 있어. 과도한 자사 문예지 밀어주기부터 수상에 대한 비판까지 (링크 클릭)

http://www.news-paper.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755


요약하자면, 첫째, 최근 이상문학상 수상작의 30% 정도가 자사 문예지 월간 <문학사상>에 발표된 소설들이다. 둘째, 수상자의 경력과 연령대 구성에도 의문이 있다. 셋째, 대상을 받은 이승우 작가의 수상소감이 아쉽다. (관심있으신 분은 기사를 한번 읽어보시길.)


이승우 작가의 수상소감에 대한 부분은 조금 너무 나간 부분이 있는 것 같고, 둘째 부분은 사실 의혹이긴 하나 정확하게 이유를 알 수도 없고, 설혹 이유가 있다 해도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될 성 싶지는 않다. 다만, 첫 번째 부분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문제가 되지 않나 생각한다. 2017년부터 최근 4년간 대상을 포함하여 선정되는 소설은 매년 총 6편 정도. 그 중에 매년 꼬박 2편씩 자사 문예지 <문학사상>에 발표된 소설들이 선정되었고,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대상을 받은 소설들은 모두 <문학사상>에 발표된 소설이었다. 이쯤되면 수상의 공정성이 당연히 의심될 수밖에 없다. 이게 사실이라면 책 뒤편의 각 심사위원들의 심사평과 심사 과정에 대한 장황한 글은 다 뭐란 말인가.


글쎄, 관행일까. 위 기사에 나온대로 창비에서 주는 신동엽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었다고 하니 일종의 관행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문학상도 이미 방송사 연말 시상식처럼 되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자신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린, 가끔은 보고 있는 게 민망해지는 방송사들의 연말 시상식. 그래도 방송사 시상식들은 허허 그러려니, 하고 연말 분위기에 휩쓸려 멍하니 보고 있을 수도 있지만, 문학상이 이렇게 되어가는 건 아쉽다. 특히 가장 권위있다고 알려진, 혹은 그래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상문학상이 그렇다는 것은 더 아쉽다.


한국문학은 이래저래해서 안 본다, 하는 분들한테는 가끔은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찾아보면 좋은 작가들 꽤 있기는 한데, 그런 마음. 그러나 그저 이렇게 자신들만의 민망한 잔치가 되어 간다면 그런 마음이 점차 줄어드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좋은 소설'을 (그런 이러저러한 것이 개입되지 않은) '좋은 소설'로서 남겨놓는 것이 그 소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드러내 보이고, 그것이 결국 독자들을 붙잡아두거나 끌어온다는 점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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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1-02-0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다고 했다가, 아쉽다고 했다가 엉망이군.

희선 2021-02-05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 받은 작품이 어디에 실린 건지 몰랐습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는 ‘소설 보다’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주는 상 후보라는 말을 먼저 하기는 하더군요 그것도 본래 다른 잡지에 실린 걸 문학과지성사에서 보고 소설 보다에 싣는 거겠습니다 거기 실린 작품이 다른 데서 상 받기도 하더군요 그럴 때는 문학과지성사 상은 못 받는가 한 적 있는데...

상이 좀 그렇지요 그런 거 생각한 적은 없지만... 팔이 안으로 굽을 때 많다는 말을 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소설 보는 게 좋을 듯해요 상 받았구나 하고 볼 때도 있겠지만...


희선

맥거핀 2021-02-05 15:19   좋아요 1 | URL
뭐 이렇게 되면 될수록 상의 권위라는 게 점차 떨어지는 거겠지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인데, 저만 몰랐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기본적으로 생각이 조금만 있다면 일부러라도 자사 문예지에 실린 소설들을 배제할 법도 한데, 이렇게 대놓고 한다는 것은 뭐랄까요...기본적으로 그게 문제라는 인식을 아예 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작년에 사건도 결국 그게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거구요.
저도 상을 받았다고 그 작품을 일부러 보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좋은 소설은 아닐까...하는 약간의 믿음은 있거든요. 그런데 조금 실망스럽네요.

2021-02-11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년 이상문학상이 이승우 작가의 소설 '마음의 부력'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만 듣고 책이 발간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며칠 전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서점에 가서 구매했다. 2019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100자평에 이제 이상문학상도 끝났다고 끄적거린 후, 실제로 2020년에 발간이 안 되어서 허허허...입이 방정인가,라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는데, 논란은 있었지만 그래도 서점 매대에 깔린 책을 보니 반갑다.


일단 급한대로 뒤에 심사평 관련한 부분만 먼저 보았는데, 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문단 경력 10년 이상의 작가들 소설만 추렸다는 것. 아니나다를까, 이승우 작가, 윤성희 작가, 박형서 작가 등 올드보이들의 이름을 표지에서 보면서 그 귀환이 반갑기도 하면서 뭔가 말 그대로 오올드한 느낌도 있었는데, 그래서 그랬던 걸까. 그런데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올해는 이러한 부분이 추가되었는지 모르겠다. 문단 경력이라는 것을 무슨 기준으로 나눌지도 애매할 뿐더러, 그게 중요한 건가 싶기도 하고. 뭐 아무튼 상은 주는 사람 마음이고, '젊은 작가상' 같은 것도 있으니 안될 것도 없겠지. 윤성희 작가의 '블랙홀'과 이승우 작가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던 것 같은데, 그것도 조금 아쉽다. 윤성희 작가도 받을 때가 되었기는 했는데.


젊은 작가상에 대한 얘기를 한 김에, 어제 신문기사에서 올해 젊은 작가상에 이름을 올린 작가들의 면면을 보고 개인적으로 조금 놀랐다. 대상을 받은 전하영 작가는 물론이고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작가들이 너무 많아서. 그나마 읽어 보거나 이름을 들어 본 작가라고는 박서련 작가나 김혜진 작가 뿐이다. 그래도 작년까지는 2/3 이상은 적어도 최소한 이름은 낯익었었는데. 한국문학에 대해 나의 관심이 옅어져 간다는 증거일까, 단순히 늙어가는 증거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작년에 김봉곤 작가를 둘러싼 논란이 있어서 올해는 어떨까 궁금했는데 일단 올해도 책이 나오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상문학상이든, 젊은 작가상이든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삶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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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1-01-27 17: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업무시간 30분을 때웠는데도, 아직도 5시다.

희선 2021-01-29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문학상도 작가가 되고 열해 지난 사람한테 주는 걸로 바꾼 건지, 이번만 그런 건지... 김승옥문학상이 작가가 되고 열해 지난 사람한테 준다고 하더군요 그 상이 문학동네로 가고는... 저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공모로 뽑았던 것 같아요 젊은작가상은 누가 받는지 벌써 나왔군요 책은 4월에 나오던데... 지난해 건 아직도 못 봤네요 저는 개정판 나오기 전 걸 사서 소설 일곱편 다 있어요 그 일은 나중에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면서 그 소설이 어떤 거야 하면서 찾는 거 아닐지...


희선

맥거핀 2021-02-01 15:19   좋아요 1 | URL
저는 꼭 사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문학상 같은 거는 누가 받는지 찾아보기는 하거든요. 말 그대로 누가 상을 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요즘에는 어떤 트렌드(?)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뭐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심사평을 읽는 재미도 있구요.

근데 아무튼 저도 늙어가고 있는 건지..요새 (특히 젊은 작가들이 쓰는) 어떤 소설들은 이게 좋은 건가, 잘 쓰는 건가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 사람들이 많이 읽는다, 재밌다고 하는데 저는 잘 느끼지 못하는 소설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아요. 이거 확실히 늙어가고 있는 거겠죠..헛
 



본 사람들은 대부분 욕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영화들이 있다. 며칠 전에 본 영화 <콜로설>이 그런 경우인데, 네이버에 들어가니 아니나다를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 거임?"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인 것 같다. 사실 스토리만 보면 그렇게 욕을 먹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느껴지는데, "내가 마음먹은 대로 조종하는 거대괴수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어린이들(혹은 낮술먹고 덜깬 어른들)의 헛소리(아니, 로망(老妄))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아마도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colossal은 '거대한'이라는 의미이지만, 사실 나는 살짝 비슷한 collapse(붕괴)라는 단어가 내내 연상되었는데,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대 괴수가 서울(그렇다, 우리 수도 서울)을 붕괴시키는 게 꽤 마음에 들었기도 하지만(가끔 서울을 때려 부수고 싶은 거는 나만 그런거 아니겠죠?), 그보다는 이 영화가 어떤 자아의 '붕괴'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밤새 술먹고 거짓말하다 얹혀사는 남친 집에서도 쫓겨나면서 영화 속에 첫등장하는 주인공 글로리아(앤 해서웨이)도 어떤 붕괴의 양상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글로리아의 친구(이자 사실은 빌런) 오스카(제이슨 서디키스)도 마찬가지다. 즉 그녀(혹은 그)가 서울을 때려 부술 때 사실은 그들은 그들 자신의 내면을 때려 부수고 있다. 글로리아가 뉴스를 보고 경악하며 어떻게든 서울을 붕괴시키지 않으려고 애쓸 때 사실은 그녀는 그녀 자신을 붕괴시키지 않으려 애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그냥 이 영화가 어떤 은유처럼 느껴진다. B급 괴수물의 외양을 두른 이 영화는 사실 붕괴되어 가는 어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사이드 아웃'이다. 하필이면 아침 8시 5분에 동네 놀이터에 등장하여야만 괴수 분신 기제(개인적으로는 '로보트 태권브이 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주인공 훈이의 태권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작동한다는 설정은 바로 그 시간과 장소야말로 대책없는 술꾼들이 자신의 붕괴되어가고 있는 내면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자 장소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줄줄이 학교로 향하는 그 시각(저 아저씨는 뭐야 엄마? 아유 빨리 학교나 가! 나중에 저렇게 되고 싶어?), 밤새 먹은 술이 여전히 덜깬 채로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노라면, 혹은 (더 최악으로는) 모래밭에 파전이라도 하나 부쳐낸다면 밀려오는 자괴감을 그야말로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게 단지 농담처럼만은 느껴지지 않는데, (혹시라도 이 쓰잘데기 없는 리뷰를 보고 영화를 보실 분을 위해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그것은 어쩌면 결국 그 붕괴를 이겨내는 길은 누군가의 위치에 서보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타인의 자리에 서서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알코올이든 혹은 자기혐오든 무엇인가에 찌든 자신을 조금은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 붕괴의 양상에서 조금이라도 기어나오는 방법임을 영화는 말해주는 게 아닐까(라는 헛소리).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나는 앤 해서웨이가 가끔은 정신줄을 놓고 이상한 짓을 하는 영화가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진지하게 각 잡고 등장하는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에서보다는 <신부들의 전쟁>이나 <겟 스마트> 같은 영화에서의 그 큰 눈을 굴리며 살짝 맛이 간 앤 해서웨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마음에 들거다. 또한 제이슨 서디키스의 연기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멀쩡한 미친 짓' 연기는 꽤나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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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1-1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서 서울을 무너뜨리다니... 영화에서 서울이 어땠길래 그랬을까 싶네요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괴수라니... 왜 이런 걸 만들었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맥거핀 님은 다른 걸 보셨군요 그것도 괜찮은 거네요 다른 데서 자신을 바라보기, 그거만큼 어려운 게 없는 듯합니다 저는 늘 제가 한심하게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이렇게 살지 뭐 할 때가 더 많아요

일본 드라마, 만화에서는 이상한 어른이 보이면 부모가 아이한테 저런 거 보면 안 돼 하더군요 그런 건 어디나 마찬가지겠습니다


희선

맥거핀 2021-01-14 15:21   좋아요 0 | URL
원래 도쿄에서 찍으려다가 ‘고질라‘와의 저작권 분쟁(?) 때문에 서울에서 찍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사실 보다 보면 왜 쓸데없이 이런 이야기 찍으려고 돈을 쓰지? 싶은 부분이 있어요. 제작비도 1500만 달러나 들었다고 하던데...그런데 뭐 사실 그게 영화의 매력 아니겠어요. 왜 굳이 이런 걸 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는가, 싶을 때가 있는데 그걸 보고자 하는, 보여주고자 하는 게 바로 영화의 매력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는 트랜스포머 같은 거도 그냥 자동차 변신이 다 인거 잖아요. 그냥 변신 장면 그 자체를 보고 싶어서 영화를 찍는 거죠.)

뭐 사실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저도 제가 한심해요. 가끔 많이 그렇죠.
 



아무리 하루키라도 이런 편집을 한 102페이지짜리 책을

13,500원 정가를 붙여 나오다니.

많은 책들이 단지 팬시 상품으로서 기능하는 것으로 전락한지 오래지만

이런 책은 안 사는 게 맞다.


하긴 책을 팬시 상품으로 내세우는 트렌드를 만든 본진에서

이런 소리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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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0-10-21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팬으로서 저도 지금 책 받아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책값을 다시 확인했고요. 이건 너무한데요. 일본에서 하루키의 예전 책을 우리나라와 계약할 때 기억은 정확치 않은데 어마어마한 선인세를 요구했다던 기억까지 소환되네요. 그건 하루키의 문제일까요, 일본 출판사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우리 나라 출판사의 자세 문제일까요. 착잡하네요.

맥거핀 2020-10-22 12:57   좋아요 1 | URL
말씀듣고 일본판은 어떤가 싶어, 일마존 들어가서 찾아보니 일본판도 한 가격하네요. 1320엔이니까요. 책 가격을 뭐 페이수에 비례해서 매길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렇게 단편소설 분량 밖에 안되는 글을 이런 식으로 책으로 묶어내는 것은 썩 유쾌하지가 않네요. 저런 것은 작가의 명성을 도리어 깎아먹는 일로 보이기도 하구요.

다락방 2020-10-22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저는 지난번 하루키 해피버스데이 였나, 그 책도 사놓고 너무 어이없었어요.. ㅠㅠ

맥거핀 2020-10-22 13:00   좋아요 0 | URL
요새 이런 게 일종의 트렌드인 거 같기는 합니다만, 가끔 보면 조금 심하다 싶은 게 있죠. 무거운 책을 들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춘 것일까요..? ;;;

2020-12-18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1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8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21-01-1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러스트 작가도 있으니 그 저작권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하루키도 일종의 브랜드화 되어서 살 사람은 사니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거 같아요^^;

맥거핀 2021-01-13 16:56   좋아요 0 | URL
뭐 사실 출판사만 탓할 일도 아니지요. 이런 책을 원하는 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대세를 잘 따라가고 있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저같은 사람은 점차 올드스쿨이 되어가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