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 - 교토의 명소,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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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제본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마지막권 '교토의 명소'편을 읽었다. 처음에는 앞서 다른 편들보다도 ('교토의 명소'라는 제목에 걸맞게) 많이 알려지고 내가 가보기도 했던 곳들 - 예를 들어 금각사(긴카쿠지), 천룡사(덴류지), 용안사(료안지) 같은 곳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조금 더 읽기가 수월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 편에서는 이전의 답사기 일본편들과는 약간 핀트가 달라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기도 했지만, 이번 편의 포인트는 일본미(美)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정원이다. 일본인들의 정원에 대한 개념은 우리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데, 일본의 정원은 빈 마당을 꾸미는 조경(造景)이 아니라, 정원을 만드는 작정(作庭)이며, 이 정원에는 당대의 어떤 역사적 배경, 지배세력 간의 관계, 정신적인 세계, 미의식 등이 총망라되어 들어간다. 즉 일본의 정원은 시대 배경을 따라 침전조 양식, 마른 산수 정원, 서원조 정원, 지천회유식 정원 등 그 형태를 달리하여 왔으며, 이 각각의 다른 양식은 당대의 여러 요소들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하나하나 자체가 당대를 말해주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따라서 교토의 명원을 순례하는 이번 답사기는 그 자체가 일본 역사를 되짚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모두를 아우르는 '일본미의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어떤 '배경지식'들이 꽤 필요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정원들이 특정의 양식과 형태로 만들어진 것에는 반드시 어떤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이며, 역사적인 배경을 전혀 모르고 정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단지 경치의 일부분으로만 받아들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이번 편은 이전의 편들에 비해 조금 딱딱한 감이 있다. 이전 편에 대한 리뷰에서 유홍준 글쓰기의 장점은 과거와 현재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번 편에서는 그 조화는 사실 조금 부족한 감도 없잖아 있다. 저자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제 답사를 가서 "이제 공부 끝, 답사 시작!"하면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 '공부 끝'이 꽤 기다려지는 느낌이랄까. 물론 유홍준 교수 특유의 핵심을 짚는 설명으로 그 공부가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물론 그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며, 글의 중간중간에 이렇게 설명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어떤 미안함을 살짝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정원이 어떻게 아름다운가라는 문제보다도 왜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움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보는 것이 결국 '답사'라는 것의 핵심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배경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답사기 자체로 돌아와 이야기한다면, 그 일본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은 이 정원과 건물들의 내력을 살피는 것이다. 책의 부제인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라는 말처럼, 유홍준은 사찰과 정원에 들어서기 전에 그것이 왜 그 자리에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독자에게 '썰'을 푼다. 예를 들어 에도시대에 건립된 왕가의 별궁이자, 유명한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극찬을 한 '가쓰라 이궁'이 왜 그렇게 공을 들여 건립되었는지 그 배경의 일단을 보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와 공가(천황가)와의 관계를 알아야만 한다. 막부는 천황과 공가를 견제하고자 공가가 지켜야 할 법도를 정해 공표했고, 그것의 제1조는 "공가 사람들은 밤낮으로 학문에 전념할 것"이었다. 이는 천황과 공가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학문과 예능에만 몰두하라는 견제를 담은 뜻이었으며, 그것이 또한 한편으로 천황과 공가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즉 공가의 별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해서 학문과 예능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천황의 정신세계가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왕가의 재력이나 불세출의 건축가 고보리 엔슈를 모셔올 수 있는 능력에도 그 이유는 있을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것 밖에 뜻을 둘 수 밖에 없었던 공가의 어떤 심정도 그것에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이 가쓰라 이궁이나 수학원 이궁을 따라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역사의 큰 단면 중의 하나인 쇼군과 천황의 관계를 어림하여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내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답사의 기본이기도 하다.

 

또한 더 나아가 이 책은 답사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이는 각각의 사찰, 정원, 건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양식을 아울러 살피는 것이며, 전체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다. 책은 전체적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명찰, 무로마치 시대의 명찰, 전국시대 다도의 본가, 에도 시대의 별궁 등을 차례로 살피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는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면서 동시에 정원 발달의 흐름과 그에 내재한 어떤 역사적인 흐름을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책의 말미에 유홍준은 이를 친절하게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정원으로 보면 가마쿠라 시대에는 용안사의 석정(石庭)과 같은 마른 산수가, 그리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금각사와 같은 서원조 양식이, 그리고 그 사이에는 모모야마 시대의 다도(茶道) 문화가 그리고 에도 시대에는 가쓰라 이궁과 같은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 양식들이 등장한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예를 들어 가마쿠라 시대에 선종이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하면서 선을 추구하는 마른 산수가 발달하고 안정된 무가사회에서는 서원조가 탄생하였으며, 모모야마 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조촐함을 추구하는 다도 정신을 구현한 초암 다실과 노지와 같은 양식이 발전하였고, 또 다시 에도시대라는 안정기에는 왕가의 별궁과 다이묘 정원의 비교적 화려한 지천회유식 양식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 각각의 정원 양식에는 당대의 정치 분위기와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은 단지 한 정원의 내력만을 살펴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며,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을 차례로 살펴본 이후에만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일본의 역사는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낯설다. 그것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해 약간은 의도적으로 일본사의 상당부분을 소홀히 배운 측면에도 있기도 하지만, 이 일본의 역사에는 우리 역사와는 상당히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우리의 왕과 상당히 개념 차이가 있는 천황, 혹은 무사라는 집단과 그들이 이야기하는 무사도(사무라이 정신), 쇼군과 다이묘, 공가(公家)와 무가(武家), 그리고 불가(佛家) 같은 것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까지 어떤 일본인의 정신세계나 정치적인 부분(예를 들어 군국주의 같은 것)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의 사고란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절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예를 들어 이 책에서 말하는 다도의 핵심이라고 하는 '와비사비 - 꽉 짜인 완벽함이 아니라 부족한 듯 여백이 있고, 아름다움을 아직 다하지 않은 감추어진 그 무엇이 있는 것'와 같은 것)이 있다랄까.

 

그런데 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을 이 답사기는 최대한 설명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건물의 내력을 살피기위한 불가피한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효과를 가지기도 한다. 그것은 이 답사기 일본편들의 시작과 연관되는 것으로, 우리를 일본이라는 세계 곁으로 조금 더 가깝게 이끄는 것이다. 답사기 일본편의 첫권에서 유홍준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이야기하며 어떤 균형을 잡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 일본의 역사를 따로 분리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일관계사로서 양국의 역사를 보는 것이며, 그것은 싫어도 옆나라인 일본과의 향후 관계 개선과 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답사기 일본편 1권과 2권에서의 상당부분은 우리역사와 일본역사의 관계, 예를 들어 도래인의 흔적, 일본에 끌려간 우리도공들의 발자취 같은 것에 상당부분 지면을 할애한다. 그러던 것이 3권과 특히 이번 4권에 이르러서는 우리보다는 그들에게 조금씩 무게중심이 옮아간다. 즉 그들이 가진 특수한 어떤 것,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시킨 독특한 문화가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무게중심이 달라졌다고 해서 말하고자 하는 본연의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전해준 것이나 우리와 비슷한 상대방의 문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가진 나름의 독특한 것이 무엇인가 보고자 하는 노력도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대방이 가진 독특한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에 필요한 자세를 이 책은 잃지 않고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 가진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되,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도 잃지 않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는 우리 것, 특히 백제 문화의 미덕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유명해진) 표현을 썼다. 儉而不陋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조금 변형하여 이 책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謙而不羨 讚而不卑 (겸이불선 찬이불비)-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고, 칭찬하지만 우리 것을 비하하지 않는다. 그것이 상대의 것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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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11-05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편이 네권으로 나온 건 많을지도 모르겠는데, 마지막이라고 하니 아쉽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와 관계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번에는 많이 줄었을 듯하네요 세번째에서도 그렇게 보였는데... 일본 역사도 어느 정도 배울 수 있겠네요 다른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 역사도 깊이 공부하나요 지금 생각하니 학교 다닐 때 일본 역사는 거의 못 들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와 상관있을 때만 들은 듯합니다 어쩌면 조금 있었지만 제가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네요 중국은 또 어땠나 하는 생각이... 언젠가는 중국편도 나오겠습니다

맥거핀 님이 쓰신 마지막 말, ‘謙而不羨 讚而不卑 (겸이불선 찬이불비)- 겸손하지만 부러워하지 않고, 칭찬하지만 우리 것을 비하하지 않는다.’ 좋네요 우리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남의 것을 칭찬해주면 좋겠죠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고 그것까지도 다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살아가는 것도 그렇군요

이 책을 본다고 일본을 다 알 수 없더라도 이 책으로나마 조금 알면 좋겠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4-11-12 00:53   좋아요 0 | URL
네..이번에는 약간 일본 역사서를 읽는 기분이기도 해요. 그런데 읽다보며 느끼는 것은 참 일본이라는 나라는 역사적으로 우리와 정말 많이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위에도 그런 얘기를 썼지만, 그래서 일본인의 어떤 기질 같은 것은 한국인이 결코 앞으로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가까운 나라지만 참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우리 바로 옆나라이고, 우리보다 여러 특징적인 면에서 앞서 있는 나라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우리가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나라이기도 하죠. 그러니 그들이 밉고 어떤 꺼림칙한 면이 있어도 어떤 실리적인 이유에서라도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겁니다.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라도 일단 그를 이해하여야만 하겠죠.

아무튼 저도 유홍준 교수님의 취지들에 적극 동감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상대방에 관해 깊숙이 알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이리시스 2014-11-1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안녕. (우리 사이에 인사생략 할랬지만 찔려서 그냥 함)

질문1.
1편하고 4편 리뷰를 쓰셨는데 그간 1,2,3,4편 쭉 읽었지만 1,4만 리뷰를 쓰겠다 하신겁니까, 아니면 리뷰쓰신대로 1,4만 읽으신 겁니까?

질문2.
제가 여름즈음(그러니까 6월!) 서울 갔다가 지하철 몇호선이더라, 강동/송파 어딘가를 지나는 거였는데.. 그거요.. 왜 지하철이 두갈래로 갑니까, 부산에는 그런 거 없는데..(있을지도 모름) 저는 그런 거 암스테르담..파리 그런데서만 보고 첨 봐서.. 시간 없는데.. 바쁜데..잘못타서(정확히 말하면 내릴 데 못 내려서..막 우루루 다들 내리는데 왜 다 내리는지 모르고) 식겁해서..나와서..택시 탔는데..아저씨가 제가 부산앤데 길 헤맸다고 막 이야기를 시작하니까..막상 도착해서.. 제가 급해보이니 (아저씨가) 정신없어서 미터기를 안켰다고 자체 택시비를 뜯김.. 싸게 해준거라 말했는데 믿을 수 없어요..그치만 뭐.. 어쩔 수 없었죠.. 결론은..서울 지하철 이상..한데 왜 그럽니까!!!

그 여파인지 얼마전에 발견한 건데 그때 제가 집에 오느라 서울역에서 자동기기로 티켓을 끊었는데 편도 티켓인데 할부가 무려 2..1..21개월..티켓값 5만 얼마인데 21개월!! 원래는 2개월 하려고 했었겠죠? 이것도 좀 웃긴데 5만 얼마를 왜 2개월 하려고 했지? 정신이 나갔었나봐요.어어어어엏

질문3.
이 책 네 권이 다 교토 관련인 거예요? 일본 지명이 잘 감이 안오기도 하지만 유일하게 안가보고 싶은 나라예요, 진심으로. 역사적 반감 때문만은 아니고 <금각사> 읽을 땐 교토가 가보고 싶었는데, 저는 제 스타일이 일본의 문화에서는 취할 게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산사 같은 건 좀 궁금하긴 한데..


*
질문에 답해주시면 좋겠지만 만약 모른다고 하셔도 저는 이 책들 읽을 겁니다. 도서관에 거의 세 권씩 있는데 아무도 안 빌려가요. 이상해요. 읽어야겠다는 오기가 생겨요. 그리고 진짜 결심하게 된 건 맥거핀님 두 편의 리뷰 때문이구요!

또 올거지만, 또 어딘가 댓글 달지도 모르지만 일단 즐주말!^-^

맥거핀 2014-11-18 20:47   좋아요 0 | URL
하아(여기에는 늦게 댓글 달아서 미안하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음) 안녕.

답1.
음..읽기는 다 읽었어요. 사실 원래는 1편만 리뷰를 쓰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 이후에 것에 대한 리뷰를 써도 결국은 같은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그런데 4편 리뷰 써주면 사인본 준다기에 썼습니다. 뭐 사인본에 리뷰를 판 셈이지요.

답2.
아..2호선 지선 갈라지는 거 타셨나봐요. 지금은 거기 살지 않지만, 저도 예전에 그 근처 살 때 많이 당했어요. 담에는 종착역을 잘 보고 타도록 하세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누구나 처음 가보는 동네 가면 어리버리해지고 안하던 실수도 막하고 그러는 거죠 뭐. 저도 예전에 부산에서 버스 잘못 타서 이상한 산동네도 가고 그랬어요. 거기 버스기사분들의 놀라운 곡예 운전에 감탄하면서 말이죠. 거기는 어떻게 그런 길에 버스가 막 다니는지..무슨 롤러코스턴지 알았음..

최근에 일본에 갔을 때에도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막 우르르 내리는거예요. 그래서 잘 몰라서 그냥 앉아있었는데, 어떤 친절한 아저씨가 내리라고 손짓해줬어요. 눈치를 보니 아마도 거기가 종착역인 지하철이었던 듯..그런데 웃긴 건 지하철에 그대로 남아있던 사람들은 몇 명 있었는데, 모두 외국인이었다는 거.

오..근데 철도 좋네요. 21개월 할부도 되는군요.

답3.
1, 2권에 나라, 아스카에 대한 부분이 조금 나오구요. 그 외는 교토에 대한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교토가 원체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니까요. 아무튼 취향이란 건 다 다르니까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서양 쪽에는 별로 관심이 많지 않아서요. 솔직히 서양보다는 중국, 일본, 동남아 이 쪽을 더 가보고 싶습니다.
............................

오늘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밖에 일이 있어서 돌아다니다가 조금 전에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감기 증세가 다시 도지는지 머리가 멍하네요. 열도 조금 나는 것 같고..아무튼 아이리시스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찬바람은 되도록 피하세요!

아이리시스 2014-11-1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르니까..21개월 할부가 된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죠. 이자가 원금보다 커지려고 해요ㅋ 역시 경험이 중요해요. 음하하하. 아하, 거기가 일본이었군요?! 생각해보면 (다른 데 비해) 일본이 별로라는 느낌적 느낌이지 안가고 싶은 건 또 아니고.. 우리나라도 여기저기 다니면 좋은데 하물며 일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뭐래..)

시간여유가 있었음 되돌아갔으면 되는데 당황했죠, 노선도를 계속 보고 있었는데 그게 갈라져있다고는 생각을 안해봤거든요..(흐흠)

그 노선도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가끔 당해요. 제가 파리에서 공항 가는 지하철 잘못 타서(제 기준에선 그걸 타는 게 맞았거든요, 그림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 비행기 놓치고 드골 공항에서 몇 시간 대기하고, 차지 물고, 항공권 재구입하고, 터덜터덜 파리 밤거리를 헤매고 방황한..그 유명한 일화를 예전에 말한 것 같은데..(엉엉)


서양문화든 동양문화든 역사든 그 분야 책을 열심히 읽는 분들 보면 진지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것 같아서 부럽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도서정가제에 대비하는 자세로 어떤 책 구입하셨어요? 뭔가 고민하다가 어쩐지 하나도 못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지지난주엔가는 또 당일배송 받으려고 급하게 막 주문하다가 제가 시뮬레이션 한 것만도(더 있었을수도..) 무려 9,000원인가 쿠폰사용을 깜빡해서 역시 급충동구매는 자제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얻었습니다. 당일배송이 10시까진데 제 주문 시간이 9시 30분에서 10시 사이였고, 아직 10시도 안됐는데 알라딘이 급출고를 해서 쿠폰 미사용을 알게 됐을 때 취소할 시간도 없었어요(엉엉), 그나마 그 책은 당일배송도 안 되고 그 다음날 왔.............................으으억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삶이 너무 삽질 천지예요, 맥거핀님. 감기조심하세요, 진심입니다^^b

맥거핀 2014-11-20 15:28   좋아요 0 | URL
으하..도서정가제. 제가 여러 군데 서점이나 카페에 가입해둔 게 많아서 오늘이 마지막날이라고 막 문자오고 쪽지오고 난리예요. 여기 더 할인해드립니다, 저기 더 할인해드립니다. 이래도 안살래?, `어머니, 여기가 전쟁터입니다` 뭐 이런 느낌이군요. 자꾸 마지막 날, 마지막 날 그러니까 낼부터 모든 출판사들 문닫나, 이런 생각도 들구요. (이런 날 급하게 사다보면 저도 삽질할 것 같아서 자제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막 조건이 좋으면서도 아닌 것 같고, 이상하죠.)

생각보다 산 거는 많지 않은데, 대신 큰 게 몇 개 있어요. 세트 같은 거는 도저히 안 살 수가 없는 가격이라서 산 게 몇 개 있고(알라딘 말고 다른 데서 샀어요. 도대체 여기는 이런 가격이 어떻게 나오나 이런 느낌. -_-), 어저께 알라딘에서 알사탕 털서 산 것도 몇 개 있고요. 반값할인 같은 거는 절대 안해, 이런 느낌의 출판사들이었는데, 하더군요. 도서정가제가 무섭기는 한 모양입니다.

저는 아무튼 도서정가제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글쎄요. 어떻게 시행될지는 미지수입니다. 그 단통법도 처음 취지는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상하게 되버린 것을 보면 말이죠. 출판사들 가격 내린다고 하는데, 그런 말들이 지켜질지도 궁금하고..(단통법을 봐서는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군요.)

아이리시스 님은 워낙 책 많이 읽고 사시는 분이라, 이번에 뭔가 많이 지르셨을 것 같은데, 마음도 많이 급하실 것 같고...자제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지르면 편해요, 이런 말도 하고 싶은 복잡한 마음이군요. 저도 지금 최대한 문자 씹고 인터넷 안보고 그러는 중인데, 또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남은 시간을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지..(잘 안될 때는 카드값 고지서를 다시 한 번 보세요.)

아무튼 이제 돈 쓸 일 많은 겨울이 옵니다. 감기조심, 삽질조심!입니다.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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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조금 특이한 소설집이다. 특이하다는 것은 (국내 출간본에서 나중에 추가한 '사랑하는 잠자'라는 소설을 제외하면) 각각의 소설들이 모두 같은 소재(그리고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일단 간단하게 말하면 소설의 주인공들이 모두 말 그대로 '여자 없는 남자'라는 점이다. 즉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이 '관계'라는 것은 육체 관계라고도 혹은 정신적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에 나오는 기타루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여자친구 구리야 에리카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육체 관계가 없고, 반면 '셰에라자드'에 나오는 하바라와 셰에라자드는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지만, 그들에게는 어떤 정신적인 연관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에게는 모두 현재 관계를 가지는 여자가 없다. 한편으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현재'라는 말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와 구리야 에리카의 관계는 이 소설의 시점에서는 이미 과거의 일이며, '셰에라자드'에서 셰에라자드와 하바라의 관계는 현재이지만, 그것이 이제 끝에 이르렀음을 소설은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소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현재' 여자가 없으나, 그들에게는 과거 어느 순간 여자가 있었고, 그들은 그 여자와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 이 소설들의 기묘한 공통점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생각은 어쩌면 그들의 '착각'이거나 '혼자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의 주인공 상대역들인 여자들은 과거 그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남자들과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관계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소설의 인물들은 과거에는 여자가 있었으나 현재에는 여자가 없는 남자들이며, 그 여자들은 과거에 자신을 만나면서 동시에 다른 남자들도 만났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것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없다'라는 말은 '현재'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시점(時點)의 의미를 담은 그 물리성을 의미하는 말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정신적인 없음, 혹은 아예 존재한적이 없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느 순간 그들 곁에 여자가 있던 순간에도 사실상 여자는 그들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은 주인공과 육체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육체라는 물리적인 실체는 비록 그곳에 있었을지 몰라도) 정신의 어느 부분은 자신과 관계를 나누는 남자들에게 분산되어 있었거나 어쩌면 그곳에 아예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예를 들어 소설 '세예라자드'는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하바라와 육체적인 관계를 나누는 순간에도 세예라자드의 어떤 부분들은 과거 자신이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가있고, 급기야는 하바라의 육체를 과거의 남자로 대체하여 관계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때 여자와 남자, 하바라와 세예라자드는 한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바라가 과거의 남자로 대체되어 있거나 세예라자드의 육체는 껍데기만 남고 그녀의 어딘가는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질문들이 다른 소설들에서 비슷하게 반복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가후쿠에게나 '기노'에서 기노에게나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에게. 왜 그녀는 나와 자면서 다른 남자들과 잤을까. 혹은 그녀는 그 때 그곳에 정말 존재하고 있던 것일까.

 


2.
다시 말해서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은 어떤 소재를 공유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같은 테마를 반복하는 여섯 개의 변주곡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루키는 능숙한 솜씨를 내보이며 같은 테마를 지루하지 않게 반복한다.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단조풍으로, 때로는 미스테리하고 음산한 기운을 담아서 말이다. 나는 이것이 하루키의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하루키는 이것을 하나의 소설집으로 묶어서 냈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책에서 같은 테마를 반복한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일종의 자기복제가 될 위험성이 있기도 하지만, 독자에게도 그것이 자칫 지루한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분위기와 시점(視點)에 미묘한 변화를 주며 책을 끝까지 읽도록 만든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말 그대로 소설가로서 구사하는 테크닉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으며, 그에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나는 그의 소설가로서의 테크닉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소설집은 그가 지금까지 자신의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여러 부분들이 고르게 들어있으며, 그것을 적재적소에서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간의 하루키 소설에 대한 오마주로서) 이것을 섹스로 비유하자면, 그의 단편소설은 어떤 체위를 실험해보는 듯한 느낌이 있었고, 그의 장편은 그 중 그가 특히 잘하는 체위로 집중 공략해서 쾌감을 증폭시킨다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 단편들은 짧은 단편들에서도 다양한 체위를 다양한 테크닉으로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달까. 그저 당신은 오르가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감각을 모으면 되는 것이다.

 

즉 이 하루키의 소설들에는 그간 그가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줬던 요소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분위기를 띄는 소설의 분위기('기노'나 '독립기관'에서 나타나는 어떤 기묘한 사건들, 혹은 하바라와 셰에라자드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배경), 어떤 현실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주인공들(예를 들어 하루키의 소설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본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등등의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소설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단적으로 말해서 소설의 시점(視點)이나 화자 같은 부분도 그러한데,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들에서 화자는 항상 '나'였으며 거의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었다. 그랬던 것이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라는 소설집에서부터 본격적으로 3인칭 시점이 등장하여, 그의 대표작인 '1Q84'같은 소설도 3인칭 시점으로 전개가 되는데, 이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이런 시점이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드라이브 마이 카' '세예라자드' '기노' 등은 3인칭 시점으로 그리고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은 '나'가 등장하는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각각의 시점 내부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드라이브 마이 카'나 '세예라자드'가 가후쿠나 하바라에 기반한 관찰자적인 시점이라면 '기노'는 보다 전지적인 시점이며, 같은 1인칭 시점이라도 '예스터데이'는 '나'가 이야기에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반면에 '독립기관'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보다 물러나 있다(그러니 예를 들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이 소설들에서 '나'의 존재는 왜 필요한 것일까(특히 '독립기관'과 같은 내용이라면), 흥미롭게도 이 두 명의 '나'는 글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이 둘은 같은 나인가, 다른 나인가,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신인가).

 

이것을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여섯 개의 이야기들, 혹은 여섯 개의 변주들은 묘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주제가 비슷하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소설의 형식이 낳는 어떤 기묘함들인데, 예를 들어 (위에서도 썼지만) '예스터데이'의 나와 '독립기관'의 나는 둘 다 글을 쓰는 남자이면서 동시에 '다니무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여자 없는 남자들'의 '나'에는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끼워넣어도 그렇게 크게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3인칭으로 전개되는 소설들이라 할지라도 이 소설의 어떤 인물을 다른 소설의 어떤 배경에 던져넣는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가 '기노'라는 술집에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세예라자드'가 사실은 '독립기관'에서 도카이 의사가 사랑한 여자였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즉 다시 말해서 이 단편들은 각각의 온전한 단편이면서도 연결되어 하나의 장편처럼 보이며, 혹은 (하루키의 여러 단편들이 그랬듯) 각각의 개별적인 장편의 하나의 단초들인 것처럼 보인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꼈을테지만 '셰에라자드'나 '기노' 등은 이것으로 부족한, 더 많은 이야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인다.)

 


3.
즉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은 과거 하루키 소설의 어떤 부분들을 더 풍성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분명히 비슷한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스터데이'나 '독립기관'에 등장하는 나, 그러니까 소설가 다니무라. 그 소설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화자. 그는 그렇게 특출나게 잘생겼다고도, 혹은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혹은 매력이 있다고도, 혹은 성격적으로 특별히 좋은 면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특정의 취미가 있고 어느 정도 삶을 즐길 줄 알며, 자신의 일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의 루틴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그들 주위에는 기타루나 도카이 의사처럼 어딘지 모르게 특이한 남자들이 있었으며, 그 인물들은 그(나)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들은 죽거나, 사라진다(즉 지금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즉 이 나의 주변에는 죽음이 어른거린다(그러나 이들 '나'는 죽음 근처에 있지만, 이들은 대체로 죽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그가 소설 속 화자인 '나'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여자들이 있다. 그 여자들은 대체로 외모가 뛰어나거나 아름다운 편이며, 하루키가 늘 주목하는 대로 대체로 가슴크기도 적당하다. '예스터데이'의 구리야 에리카, '사진에서 본 대로 멋진 여자였지만 실물을 마주하니 얼굴보다도 온 몸에 넘치는 순수한 생명력 같은 것이 주의를 끄는' 여자. 혹은 '독립기관'의 도카이의 그녀, 그러니까 '종합적인 존재, 강력한 자석처럼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여자.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내부는 여전히 미궁에 놓여져 있다. '예스터데이'에서 기타루는 구리야 에리카를 안는 것을 거의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며, '독립기관'에서 도카이는 그녀의 무엇이 사실 그를 그렇게 끌어당기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들의 내부는 거의 항상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가득차 있으며, 남자들은 늘 그것을 독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가후쿠의 죽은 부인이나, 하바라의 셰에라자드나 기노의 전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오르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시로'나 <1Q84>의 '후카에리'도 마찬가지다. 여자들은 겉으로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내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된다. 그리고 그녀들은 그렇게 되면 될수록 더 죽음 가까이로 간다.

 

그리고 다시 그의 반대편에 위에서 말한 평범한 '나'들을 포함한 남자들이 있다. 다시 반복하지만, 이들은 죽음의 가까이에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한, 적어도 생활고 때문에 죽음 근처에 가까이 갈 이유는 없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 고민은 이상하게도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죽기에는 너무 쿨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이 <여자 없는 남자들>의 전작의 남자들이라면 이 <여자 없는 남자들>에는 새로운 유형의 남자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독립기관'의 도카이 의사나 '기노'의 기노같은 남자들. 기노에게 보내는 메시지들은 거의 그간 하루키 소설 속의 남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그것이 하루키의 새 소설을 통해서 느끼는 미묘한 변화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p.266)

 

 

4.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이야기만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사랑하는 잠자'는 넣지 않은 편이 훨씬 좋았으리라는 점이다. 테마의 미묘한 변주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전혀 이질적인 음악이 들어가 있으면 되겠는가. 편집 과정에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정 넣고 싶다면 차라리 맨 뒤로 돌리는 편이 나았다. (아니면 원서에는 없지만 나중에 추가한 것이라고 최소한도의 설명을 붙이기라도 하든가 말이다. 다만 '사랑하는 잠자'의 그 뒤의 이야기가 많이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더 한 가지. 예전에 하루키의 소설들에서 늘 어떤 강조점, 방점들이 거슬린다고 했는데, 방점이라는 그 자체가 거슬리는 것인지, 그 '형식'이 거슬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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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9-24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에서 옛날에 여자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을 보니 남자들이 조금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느꼈을지 못 느꼈을지 모르겠군요 아주 모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 일이 소설에만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군요 그리고 없다고 하는 말을 볼 때는 어떤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예요 바로 떠오른 건 아니고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생각해내고 ‘이 소설도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네’ 했습니다 다른 건 생각 안 나고 제목만 생각났습니다 단편집입니다 그걸 봤는지 안 봤는지... 봤지만 잊어버렸겠지요

어쩐지 알 수 없는 여자를 말하는 것처럼도 보이는군요 꼭 여자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애쓰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람 마음...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군요 자기 마음을 다 드러내고 살기는 어렵겠죠 그런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가끔은 거기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말하는 저는 그러지 않을 테지만...

언젠가 이 가운데서 장편으로 나오는 것도 있을지 모르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건강하게 지내고 앞으로도 소설을 쓰면 좋겠군요


희선

맥거핀 2014-09-24 12:14   좋아요 0 | URL
아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는 저도 가지고 있는 단편집입니다...라고 쓰고 찾아보니 없군요. 아무래도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았던 듯 싶습니다. 무슨 물고기에 대한 얘기가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저는 하루키 책들을 거의 학교 도서관에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도서관에는 하루키 소설들은 거의 책들이 검정색 하드커버로 다시 제본이 되어 있어요. 하도 많이들 빌려가서 책표지가 너덜너덜해진 탓이지요. 그래서 늘 그 원래 표지가 어떤건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그 표지를 찾아보니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더군요(솔직히 너무 촌스러웠습니다). 물론 그 표지들도 최근에 보니 또 바뀌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단편집들도 새로 출간된 것들이 많더군요.

제가 (꼭 하루키 아니더라도)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까닭도 있습니다만, 하루키 소설들은 아무래도 단편이 더 좋아요. 안 끝날 것 같은데, 툭 끝내버리는 그 심플함이 하루키 단편들의 매력입니다. 확실히 하루키 소설들은 궁상맞게 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왠지 재즈 음악을 틀고 맛있는 수입맥주(되도록 이름이 어려운걸로)라도 하나 들고 봐야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2014-09-30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4-11-1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가 알기론) 하루키 팬들중 거의 유일하게(아니 드물게), 에세이,단편 다 때려치우고 하루키 장편 좋아하는 신기한(아니 독특한) 팬입니다.. 저는 그 세계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요. 단편은 제가 원래부터 장르 자체를 싫어하니 그런 듯한데 좋아할 거예요, 장르 편식 안하고, 좋아하려고 하는데, .... (툭 끝난 댓글)

맥거핀 2014-11-18 20:33   좋아요 0 | URL
하..그쵸. 하루키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단편이나 에세이를 많이 이야기하는데..드문 팬이군요. 저는 솔직히 하루키의 작가인생 초반의 장편들은 그닥, 이었는데(특히 `세계의 끝과...` 이거는 읽기가 힘들더군요.) 최근에 나온 장편들은 좋더군요.

저는 하루키 말고도 대체로 단편들을 더 좋아해요. 아무래도 읽는 끈기가 별로 없어서 그런 모양. 최근에 현대문학에서 나온 `세계문학 단편집` 세트를 샀는데, 그건 언제 읽게 될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대학 시절, 역사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해서 수 차례 답사를 따라다녔다. 답사를 가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답사, 특히 유적, 유물과 관련한 답사는 사전에 얼마나 많은 것을 공부하고 가는가에 따라서 그야말로 충실한 체험학습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숙취와 희미한 잔상과 줄어든 통장 잔고만 남는 거의 무의미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여느 때도 그렇지만, 이 경우에 특히 진리이고, 충실한 공부를 한 후에 답사를 가게 되면, 그간 공부한 게 억울해서라도 한 가지라도 더 보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그만큼 더 보게 된다. 그런만큼 여행 관련한 서적을 보게 되면 일반적인 여행기나 여행 가이드북 보다는 답사기에 더 손이 가는 편인데, 그런 답사기의 거의 대표격 책이라 할 수 있는 유홍준의 답사기를 오랜만에 펴들었다.  

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를 읽다보면 그가 가진 글쓰기의 장점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며, 왜 그의 답사기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독자의 사랑을 받아왔는지 알게 된다. 그의 글쓰기는 이른바 쉬운 글쓰기의 전형이다. 읽는 이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 이해하기 쉬운 사례의 제시, 적절한 균형 감각, 새로운 것에 대한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지식, 적당한 유머 등이 그의 글쓰기에는 들어 있다. 사실 짧은 잡문이라도 써보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쉬운 글쓰기야말로 아무나 하기 어려운 것이고, 술술 읽히는 글이면서도 그 안에 깊이 있는 내용을 담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아마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글쓰기이고, 아마도 혜안과 통찰이 필요한 것이리라. 즉 읽는 이들에게 아 그렇구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본인부터 아 그렇구나!를 해야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답사기들의 매력은 내용들보다도 그의 어떤 글쓰기 스타일, 혹은 형식적인 면에 있다고 해야할 것인데, 유홍준은 약간의 공백기를 지난 후 새롭게 돌아온 답사기 '일본편'에서도 그의 장기를 여실히 구사하고 있다.

그의 장기란 '답사기'라는 본연과 연관되는 것으로, 독자를 마치 그가 가이드하는 한 답사의 대원처럼 느끼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즉 그는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에 능하다. 역사와 관련한 답사를 다녀보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답사는 역사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에 적절히 균형을 잡는 것, 혹은 그 둘 사이를 연결짓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역사적 유물, 혹은 유적이 어떤 과거의 세계를 거쳐 만들어졌는가, 그것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개입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것이 지금 내 앞에 있다는 사실, 혹은 그의 어떤 부피나 질감이라는 물질성도 답사에서는 중요하다. 즉 과거라는 역사적 세계 외에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고 오랜 시간 후의 '나'라는 존재가 그것을 보고 만지러 왔다는 그 현실을 연결시키는 것이 한편으로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균형을 잡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그 균형을 잃어버리면 그 답사는 단지 역사책을 보거나, 단지 자연물을 보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런데 유홍준은 이 균형잡기, 혹은 연결에 능하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의 배경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주다가 어느 틈에 현실의 에피소드로 슬그머니 들어와 그것을 보고 있는 현실의 나와 우리를 느끼게 해준다. 즉 그는 현실에 서서 과거를 본다는 이 답사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충분히 보았으면 너무 그것만 보지 말고 다음의 무엇을 보러 가자고 슬그머니 소매를 잡아 이끈다.  

예를 들어 이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 규슈>에서 그가 말하는 '다음의 무엇' 중의 하나는 과거에만 얽매이지 않은 조금은 전진하는 시각이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무턱대로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는 시각이나 과거의 철저한 반성과 극복만을 주장하는 시각과는 조금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정확히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어떤 실리적인 시각에 가깝다. 유홍준은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들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문화를 무시한다." 즉 그의 시각에서 보면 삼한과 고조선, 혹은 백제의 도래인들이 일본 고대국가 건국에 (거의 중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은 부정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인은 수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과 거의 나라를 완전히 빼앗길 뻔한 아픔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그들(이 자체적인 힘으로 발전시킨 문화)을 무시하려 든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시각은 (그가 책에서 말하기도 하지만) 박노자의 <거꾸로 보는 고대사> 등에서 나타난 미래지향적인 시각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예를 들어 역사책의 삼국시대는 가야와 왜가 포함된 오국시대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등이 그러한데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의 왕을 죽일 정도로 불구대천의 원수에 가까웠지만, 왜는 백제가 멸명한 후 백제부흥군에 2만 7천명의 원군을 보냈다는 사실 등을 그 예로 든다), 이는 역사를 단지 일본의 입장에서, 혹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한일교류사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며, 일본과 우리 사이에 지금의 현실에서 보다 높은 신뢰가 필요하다는 실리적인 입장과도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듯이 이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은 위험할 수 있으며, 그의 표현대로라면 '쌍방에서 날아오는 독화살'을 맞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책에서 그의 장기인 적절한 균형감각을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데, 그것은 예를 들어 일본 속에 남아 있는 도래인들의 흔적을 주로 세밀히 살피면서도 그들이 발전시킨 것은 일본문화이지 한국문화가 아니라고 밝히거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도 단지 그들의 한이나 우수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꽃피운 이마리야키, 아리타야키, 사쓰마야키 등의 일본자기문화의 독자적 발전상이나 그들의 발전을 가능케해준 시스템에 대해 살피는 것이다. 또 그것은 이제 폐허가 된 히젠 나고야 성을 살피며, 조선이 결국 임진왜란의 승전국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자부심을 가질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7년 전쟁이 가져온 피해와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메이지 유신과 그들의 발빠른 개화를 눈여겨 보면서도 그들의 반복되는 '자살 충동'이나 군국주의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며, 또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반성하고 갖추어야 할 점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균형감각 혹은 균형을 위한 노력은 결국 다른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많은 지식을 갖추었다고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결국 '답사'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이러한 것들을 돌아보는 것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가 어쩔 수 없이 왜장들에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역사를 살펴보면서도 단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나 한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가 지금 현재에 서서 과거의 가마들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그 가마들에는 단지 당시의 고초와 한을 넘어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스며들어 있으며, 조선 도공들의 오랜 시간의 땀과 노력이 담겨 있다. 그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과거의 향수에만 매여 있지 않고 단지 강요에 의해서만이 아닌 더 나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려는 열정을 그 곳에 쏟아부었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메이지 시대의 유물들을 보며 조선 개국과정에서의 아쉬움과 일본에 대한 분노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다시 군국주의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는 현재의 일본을 보는 한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답사는 결국 과거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지 않기 위함이다. 지금 바로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의 것을 보며 그것은 한편으로 현재 혹은 더 나아가 미래를 보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것이 답사, 혹은 답사기의 매력이자 즐거움이다.


덧.
어쩌면 가장 큰 즐거움은 내 앞에는 아직도 두 권의 답사기가 남아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나라나 교토에 대해서는 그 곳에 다녀온 경험도 있으니 더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겠지. 물론 꼭 다녀오지 않아도 반가운 경우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이 책에 나온 가고시마의 경우가 그러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배경이 되는 곳이 가고시마와 사쿠라지마인데 아는 곳을 돌아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물론 나는 그 화산재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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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1 01: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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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1 1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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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7-11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다 본 건 아닌데, 몇 권 봤습니다(얼마나 봤는지 잘 모르고, 잊고 있다가 제주편부터 봤어요) 사실 다른 책(우리나라 문화유산을 말하는 책은 많이 있을 테지만)은 거의 본 적 없습니다 문화유산으로 보는 역사, 라는 생각을 예전에 했는데 역사를 말하는데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때 사람 이야기를 해주기도 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만 보는 게 아니고 지금도 보게 해주는군요

조선시대 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우리나라에 있을 때보다 잘 살았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도공을 낮게 봤잖아요 그게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말도 다르고 낯선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자기를 만들던 사람을 신으로 모시고 있기도 하죠 일본은 그런 게 많습니다 사람을 신으로 모시는 일

화산재 이야기 본 듯도 합니다 저도 다른 책에 나온 곳이 나왔을 때 어쩐지 반가웠습니다 지금은 좀 잊어버렸지만... 규슈에 있는 가마쿠라가 생각나는군요 역사에서는 <원피스>가 생각나기도 했어요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 좋아져야 할 텐데, 인정할 건 인정하면 좋을 텐데 그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남은 두 권 재미있게 보세요 나라, 교토 가 보신 적 있군요


희선

맥거핀 2014-07-11 19:34   좋아요 0 | URL
저는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최근에 나온 일본편 빼고는 거의 본 것 같습니다. 몇 권은 집에 있고, 몇 권은 도서관에서 봤던 것 같구요. 아무튼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재미있고, 또 유홍준 선생님 글은 나름의 위트가 있어서 즐겁게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읽을 때는 늘 다음번에 책에 나온 곳을 꼭 가봐야지, 하는데 그렇게 되는 경우는 잘 없는 것 같습니다. 아..예전에 경주에 한 번 갔을 때는 약간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요. 아는 척 하는데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네..저는 일본 도자기 문화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게 많은 조선도공이 일본도자문화에 영향을 끼친 것을 몰랐습니다. 유홍준 교수님 말씀대로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도 예전부터 일본 막부처럼 도공들에게 조금 더 나은 대접을 하고, 여건을 마련해주었더라면 훨씬 더 융성한 도자기 문화를 지금 갖추게 되었을지도 모르죠. 물론 지금도 훌륭합니다만..

저도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일본정부의 우경화나 일본우익들의 행태가 우려되는 면도 있습니다만, 일부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일본을 비하하는 태도도 그렇게 나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싫어도 어차피 옆나라이고 앞으로도 꾸준히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니 그들이 싫더라도 배울 점은 배우고,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꿔야겠죠.

교토는 저에게 참 좋은 기억만 있는 곳입니다. 가본 곳들도 거의 좋았고, 먹었던 음식들도 대체로 좋았습니다. (철저히 보행자와 탑승자 위주인) 버스 시스템 같은 것도 좋았구요. 가끔 우리나라 버스들을 보면 교토 버스가 생각날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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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체포하라 - 14인 사건을 통해 보는 18세기 파리의 의사소통망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40년 전인, 1749년 봄의 파리. 의학을 공부하던 프랑수아 보니라는 학생이 경찰이 고용한 첩자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혐의는 왕(루이 15세)을 비난하는 시를 써서 여러 사람에게 읽어주었다는 것이었으며, 그는 시를 읽어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며, 그도 누군가에게 전달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보니를 비롯한 총 14명이 왕을 비난하는 여러 편의 시를 짓고, 유포시킨 혐의로 연쇄적으로 체포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시를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들려준 것은 사실이나 자신들이 시의 원저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모두 법학생, 의학생, 철학과정 학생, 성직자, 법률서기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웠고, 프티 브르주아이지만 단지 약간의 학식을 가진 보통의 대중에 가까웠고, 경찰이 벌인 일련의 조사에서도 이들이 이 시의 원저자라고 밝혀낼 만한 핵심적인 근거를 찾아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들에게 본보기로서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이후 이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은 <시인을 체포하라>의 저자 로버트 단턴이 '14인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단턴은 당시의 경찰 기록 및 여러 문헌을 토대로 이 사건의 의미를 세심하게 추적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파리 경찰 당국 및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은 왜 (어떻게 보면 하찮은) 시를 추적하는 일에 그토록 열을 올렸을까? 왜 이 14인은 대중 속에서 끌려나와 일벌백계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 시들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유통되었을까? 이 시들은 대중 속에 어느 정도로 퍼져나갔으며, 그것은 어떠한 기능을 했을까? 당대의 대중들은 이 시들을 노래하며 어떤 생각을 가졌고, 그것은 그들의 향후의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아마도 이 질문들은 다음의 질문으로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은 '여론'이라는 것의 탄생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사건으로 당대의 '여론'이라는 것의 실체를 살펴볼 수 있을까?

'여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저자의 논의를 따른다면, 여론에 관한 역사연구에는 두 가지 구분되는 입장이 있다. 하나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입장으로 여론을 인식론과 권력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입장으로 여론을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을 통한 합리적 결정 도출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저자의 나중의 논의에 비추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는데, 하나는 철학적 형태의 여론으로 진실의 확산에 관심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형태의 여론으로 의사소통 회로를 통해 유통되는 메시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p.149). 단턴의 논의는 이 두 가지 모두와 약간은 거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는 이론적인 논의보다는 경험적인 연구이며, 하나의 실제사건을 놓고 실제의 메시지의 형태와 그 유통방식, 그리고 그것에 대중들에 보이는 반응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며, 그것에서 도출되는 대중의 면모를 조심스레 살피는 것이다. 즉 이 사건에서 단턴이 보는 대중의 면모는 어떤 진실의 담지자이거나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는 공공성이 작동하는 무엇도 아니다. 그보다는 더욱 복잡한 무엇, 새롭게 등장하게 된 실체를 가진 수많은 목소리를 가진 힘에 가깝다.

 

어떤 "여론"인가? 그것은 이성의 목소리도 아니고, 모를레와 콩도르세가 채택한 철학의 개념과 멀게라도 닮은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회적 혼종물인 메르시에의 "대중이라는 분"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이제 새로운 리바이어던(Leviathan)과 같다. (중략) 그러나 철학적 이상과 사회적 현실은 결코 일치한 적이 없다. 대중이라는 분은 철학자들이 여론에 관해 논문을 쓰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대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여론조사자들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말이다. 대중이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했다는 뜻은 아니다. 18세기 파리에서 구체제 특유의 대중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내며 끼어들기 시작했다. 대중은 계몽사상가들이 상상해낸 추상이 아니었다. 대중을 담론적으로 구축하려는 계몽사상가들의 시도에는 터럭만큼의 관심도 없이, 계몽사상가들을 포함해 앞에 놓인 모든 것을 쓸어버린 대중은 거리에서 길어 올린 어떤 힘이었으며, 이미 14인 사건의 시기에도 분명하게 보였고 40년 후에는 멈출 수 없게 된 힘이었다. (p. 155~156)

 

즉 단턴의 논의는 보다 조심스럽다. 역사학자로서 그가 결국 말하는 것은 여론이라는 것의 어떤 거대한 맹아라기보다는 이 사건에서 드러난 초기적 정보사회에서의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이며, 불확실한 가설보다는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재빨리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즉 그는 이 '14인 사건'에서 드러난 대중들의 의사소통체계와 프랑스 대혁명을 단선적으로 연결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혁명이라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18세기 중반의 파리는 시와 노래라는 하나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대중들에게 어떤 사건과 그에 대해 나돌던 세간의 논평을 전했다는 것이다(즉 이 시와 노래들은 현재의 호외와 비슷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정보를 전파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 대중들에게 일종의 공적 사건에의 개입이라는 공통된 의식을 갖추게 함으로써 '대중'을 형성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방법론이 가지는 한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책 <시인을 체포하라>는 부록과 주석을 빼면 162페이지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분량이고, 그의 논의 방식과 서술 형태를 볼 때 대중서라기보다는 연구논문에 가깝다. 이 연구논문에서 단턴의 방법론은 방대하고도 다양한 사료에 대한 철저한 문헌연구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주제에서 문헌연구의 한계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문헌을 통해 당대에 실제로 유통되었던 시나, 그것으로 인해 벌어진 사건의 경과들을 추적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이 실제로 대중들에게 어느정도 퍼져있었는지(페이스북 '좋아요' 개수나 트위터 팔로워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대중들이 어느 정도 그것에 열광하였는지, 혹은 그들이 그것을 듣고 노래하며 어떠한 생각을 가졌는지 정확히 밝혀내기란 어렵다(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해도 그 기록은 대체로 일반대중이 남긴 것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시와 노래라고 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불렸는지 알기란 어려운 것이다(악보로 곡조와 가사가 남아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을 어디에서 어떻게 - 음울하게, 혹은 활기차게, 혹은 비꼬듯이 - 불렀는지는 정확히 추론하기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역으로 이 책의 가치는 그 내용적인 부분보다도 그 방법론적인 시도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단턴은 철저하게 문헌연구에 의존하면서도 그 문헌연구에 다양한 시도들을 가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경찰기록, 일기, 샹송집, 재판기록, 벽보 등 다양한 문헌을 수집하는 소재적인 면에서, 또는 통계를 내거나, 노래의 변천과정을 추적하거나, 정치적이거나 문학적인 배경을 추론하거나 하는 등의 방법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당대의 노래를 실제로 녹음하여 그것을 독자들이 들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 등이 그러하다(그 외에도 옮긴이는 이 책 자체가 시집이나 노래책의 구조를 모방하고 있다고 하는데...글쎄?). 물론 이는 단턴의 논의대로, 아마도 당대에 실제로 불렸던 것과는 상당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를 통해 단지 문자로서 시와 노래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일부분을 맛볼 수 있게 해주며, 우리도 그로 인해 이 구어적 의사소통체계의 힘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는 일부분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턴의 논의를 따라 이 14인 사건에서 나타난 구어적 의사소통망과 40년 후의 프랑스 대혁명을 무리하게 연결짓지 않는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경찰과 베르사유의 내부자들이 이 '14인 사건' 등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일벌백계를 가하는 등 이 시와 노래의 유통과 확산을 막기 위해 애썼지만, 결코 대중들의 입에서 이러한 노래가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의 원저자의 추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원본이나 사본을 없앤다고 해도, 그것의 여러 다양한 변형본들은 계속 대중들에게서 대중들에게로 전파되었다. 문자체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암기와 가창이라는 구어적 형태로서 말이다. 즉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 이야기와 노래들, 혹은 그 대중들의 비판적이고도 풍자적인 의식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즉 당시 18세기의 파리는 시와 노래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였으며, 이는 21세기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비록 인터넷과 트위터와 페이스북이라는 다른 것이 지배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3세기나 지났지만, 위정자들이 벌이는 행태는 비슷하다. 지난 정상회의 포스터를 둘러싼 사건, 혹은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에서 보듯, 위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의사소통체계에 틈입하여, 그것을 조작하거나 부수려 한다. 그러나 대중의 머리와 의식이 남아있는 한, 그 입을 완전히 막아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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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4-03-03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나 소재는 좋은데 쉬이 읽히지가 않아서, [고양이 대학살]을 찔끔찔끔 몇개월째 읽고있는걸보면요, 그것보다 이게 더 논문같을 듯하네요. 예전엔 조금 언론, 정보, 대중 이런것들에 관심 있었는데 요새는 별로 없어요. 인문학이랑 다르게 사회과학도서에는 이상하게 별관심이 안생겨요. 희한한 글쓰기방법론인건 분명한듯해요. 그런데 단턴이 계속 단테로 읽히는건 제가 요즘 단테를 읽고 있어서...

잘은 모르지만 여기서도 구어,민담,마더구스이야기 같은 소재들이 보이네요. 암기와 가창..

맥거핀 2014-03-04 00:46   좋아요 0 | URL
<고양이 대학살>을 언제 읽었을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그 책 대학 때 과제 때문에 읽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이 책이 참 오래된 책이긴 한듯..아무튼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이 책도 조금 재미있으려니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조금 더 딱딱한 책이었어요. 확실히 논문같은 느낌도 있구요. 근데 또 논문이라고 보기에는 또 특이한 면도 있어요.

아무튼 전체적으로는 나는 할 말만 하겠다, 뭐 그런 인상이랄까..지나친 추론과 섣부른 결론을 상당히 경계하는 듯 보였습니다.

근데..요새 단테는 왜 읽어요? 재미있어요?

아이리시스 2014-03-04 20:28   좋아요 0 | URL
표지보면 이책은 정말 유들유들하고 재미있어보여요. 기대했는데 맥거핀님 리뷰보면서 또 내 생각이랑 달랐구나 했어요. 그렇지만 소재나 주제, 방식면에서 저는 단턴이 괜찮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식의 글쓰기라니, 제가 시대사,문화사 좋아해서 그런것도 있고요. 나는 할 말만 하겠다, 좋네요.

그냥 단테 있길래.. 신곡은 어려워서.. 연암서가에서 나온 아우어바흐의 '단테'요. 신곡해석해주겠죠, 단테어떤사람인지 알려주겠죠, 책도 대여중이기때문에 저렴하죠, 여러모로 읽을수밖에 없었........^-^

맥거핀 2014-03-07 00:46   좋아요 0 | URL
저도 '신곡'을 실제로 읽었다기보다는 해설서로 주로 봤는데, '신곡'이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방대하며, 가치가 매우 큰 작품이더라구요. 아무튼 해설서들을 나름 꽤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아우어바흐의 단테는 모르겠군요. 찾아보니 꽤 최근에 출판된 책인듯 합니다.

네..그래도 소재가 신선해서 기본적인 재미는 있었어요. 당대의 시와 노래들도 나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구요.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재미있는 건 누군가를 까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ㅋ

희선 2014-03-0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와 노래가 퍼졌다는 말을 보니, 이정명 소설 《별을 스치는 바람》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에는 감옥에서 책을 돌아가면서 읽는 모습이 나오지만,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겠죠 시와 노래를 사람들이 보고 듣고 생각한 일... 아니 어쩌면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조금 달라졌지만 사람 마음은 아주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대중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큽니다 안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올바른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더 많겠죠 위에서 누르려고 해도 누워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 말을 하니 김수영 시 <풀>이 생각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7 00:53   좋아요 0 | URL
위정자들은 항상 대중들이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지만, 대중들은 과거에도 지금에도 알 건 어느정도 알죠. 다만 알아도 비겁해지거나, 혹은 눈을 감아버릴 때도 있는 것 뿐이죠. 물론 그건 저도 어느정도는 마찬가지겠구요. 어떨 때는 정말 몰라서 못하는 것도 있지만, 알아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확실히 위선적이죠.

그래도 결국 희선님 말대로 사람 마음은 결국 비슷해서 아마도 어떤 발전방향, 혹은 역사라는 것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간에 어떻게, 얼마만큼 에둘러 가는가의 문제가 있는 것이겠죠. 이 책에서도 직접적으로 연결짓지는 않지만, 결국 이 시와 노래들과 프랑스 대혁명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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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 문학과 예술로 읽는 서울의 일상
류신 지음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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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당신이 서울에 살고 있다면 한 가지의 실험을 제안하고 싶다. 아니, 아마도 이런 경험은 한번쯤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굳이 실제의 실험을 행하지 않고 사고실험으로 그쳐도 좋다. 그것은 최소한도의 교통비만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이 넓은 도시에서 홀로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보는 것이다. 실제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넓은 도시에는 참으로 갈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거리에는 수많은 건물과 상점과 공공기관과 종교시설과 영화관과 은행과 커피숍과 쇼핑몰들이 있지만, 우리를 반겨주는 곳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기껏해야 도서관이나 대형서점이나 공원 정도일까. 그러나 도서관은 어서 이 도서관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수많은 무리 혹은 갈곳 없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인해 점령당한지 오래고, 대형서점은 점점 책을 읽을만한 공간들을 없애나가고 있으며, 공원마저도 긴 시간을 보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도심의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공원은 누구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이야기되지만, 그곳의 출입자격은 여러가지에 의해 암묵적으로 제한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양복을 차려입고 공원에 장시간 앉아있다면 딱딱한 나무로 된 벤치를 견뎌내는 것보다 누군가의 시선을 견뎌내는 일이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주머니에 현금을 가득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꽤 다르다. 각종 다양한 상점에 들어가 이것저것 쇼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영화관이나 문화시설에서 좋은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은행에 들어가 VIP고객 대접을 받으며 장시간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커피숍에 들어가 오랜시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이도저도 귀찮다면 호텔이나 모텔같은 숙박시설에 들어가 잠을 청할 수도 있다. 즉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의 많은 곳은 출입자격을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규정한다. 아예 돈이 없다면 출입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공간도 있고, 어떤 공간들은 출입은 할 수 있되, 어떤 어색함, 빨리 나가줄 것을 요구하는 암묵적인 분위기, 자괴감, 비우호적인 눈초리, 물리적인 불편함등을 견뎌내야만 한다(예를 들어 요즘의 상당수의 은행들은 출입구에 안내원을 세워놓고 번호표도 뽑아주고, 어떤 업무인지도 물어보고 하는데, 그것이 어떤 '서비스'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감시'나 '걸러내기'를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은행의 편의시설은 그 은행에 돈을 많이 예치한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이 이 사회에 어울리는 사고방식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이 출입자격은 누가 결정하는가. 그것은 자본이 결정한다.

 

아마도 그것이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저자 류신, 혹은 그의 분신인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서른 일곱살 룸펜 구보가 서울 거리를 산책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과 소설가 구보씨를 끌고 들어온 이유일 것이다. 이 책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 구보가 하루동안 서울거리를 전전하는 이야기이다. 아니 이것을 이야기라도 불러도 좋을까. 작품에 대한 평론과 인문학적 단상과 창작된 소설과 저자의 실제경험이 혼재되어 있는 이 이야기 속에서 구보는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경복궁, 서울광장, 롯데호텔, 세운상가, 홍대입구를 돌아 다시 서울의 강남으로 내려가 코엑스몰, 가로수길, 강남역을 거친다음 다시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간다. 즉 그가 돌아보는 곳은 소위 서울의 중심가들이다. 그리고 중심가라는 의미는 이 자본이 만들어내고 스스로 자라고 있는 도시 서울에서 가장 자본이 집약되고 있는 공간들이라는 의미도 된다. 아마도 그것이 발터 벤야민이 등장하는 이유이어야 할 것이며, 이 책이 그저 '서울 프로젝트'가 아니라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이유일 것이다.

 

아케이드(arcade)란 "원래 열주(列柱)로 지탱되는 아치형의 천장을 가진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를 의미하는 말로서, 이 책에서는 "유리 지붕이 덮인 상점가를 위시해 유리 돔이 설치된 홀, 상점이 늘어선 지하도,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지하 통로나 공중 가교, 투명한 차양이 설치된 노상 시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지칭하는 광의의 개념(p.11)"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그의 생애 말년 13년 동안 19세기 초반 '세기의 수도'로 군림했던 프랑스 파리에 등장한 새로운 쇼핑 공간(아케이드)을 미시적으로 탐사함으로서 자본주의의 기원을 천착하려 했으며, 이를 '아케이드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였다(저자는 이 책에서 '파사주(passage)'라는 용어가 아케이드보다 더욱 적확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사상과 개념을 빌어 이 드넓은 도시 서울을 지배하고 있는 다양한 유형 무형의 쇼핑 공간(아케이드)에 서려 있는 자본주의의 면면을 살피고자 하는 시도다. 아니 역으로 말해서 자본이 출입자격을 결정하는 이 서울의 공간들에 기어이 출입자격을 얻기 위해 발터 벤야민을 과거로부터 소환해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해지는 것은 발터 벤야민 외에 저자와 사상적으로 동행한 또하나의 인물,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1930년대 경성 거리를 하릴없이 산책하는 소설가 구보씨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가 구보씨라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가 벌이는 행위, 즉 '산책'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공간에서의 미덕은 그저 단 두 가지, 즉 그저 빠르게 스쳐지나가거나, 아니면 자본을 소비하며 머무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공간들은 자본이 없는 자들은 어서빨리 스쳐지나가도록 하고, 자본이 있는 자들은 그들을 이 공간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산책은 이 두 가지에 모두 반하는 행위다. 산책은 조용히, 천천히, 혹은 유유히 공간안으로 들어가 공간 속에서 어떤 사유를 수행한 후 다시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유유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사유는 개인적인 사유일수도, 공간이 연상시키는 어떤 작품에 대한 사유일수도, 혹은 다른 인문학적 사유일수도 있다. 즉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서 생활에 편입되지 않고 문학과 공간을 사유하던 소설가 구보씨와 2010년대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자본과 유리되어 공간에서 문학과 사유를 곱씹는 룸펜 구보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닮아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 식민지 현실에, 혹은 자본주의적 현실에 나름의 저항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완전한 저항이나 급진적인 저항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양가적인 감정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들은, 그리고 그와 거의 마찬가지인 우리들은 이 현실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현실의 단물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어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의 정보지상주의, 어떤 인간관계의 단절, 사유의 정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스마트폰을 누구보다도 오래 손에 쥐고 있는 자들이며, 그것을 완전히 손에서 내려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각종 고가의 물건들을 파는 유리로 만들어진 진열대가 가득한 지하의 아케이드를 돌아보는 다음의 사유는 어떤가. 아...우리는 그 아케이드에 가면 결국 우울하게 나오게 될 자신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케이드로 발걸음을 돌리고마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혹은 어쩌면 산책이 그런 것이 아닐까. 즉 우리가 그 현실을 완전히 거부한다면 굳이 그것을 '돌아보러' 나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케이드는 도취의 공간이자 우울의 공간이다. 아케이드는 지상의 빡빡하고 누추한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시켜 주는 판타스마고리, 즉 요술 환등의 성전이지만, 갖고 싶은 상품을 향한 리비도가 이 상품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각성과 꼼짝없이 독대하면서 우울이 생성되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다. 소설 속 여인은 갈구한다. "저걸 가질 수 있다면, 황실의 여인들이 선택할 만한 저걸 가질 수 있다면, 나도 항성처럼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다.(정미경 <호텔 유로, 1203>)" 환상과 현실, 매혹과 각성이 진자처럼 오가는 곳이 아케이드인 것이다. 아케이드의 쇼윈도는 '거리'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투명한 유리 뒤에서 명품의 특권적 지위와 행인 사이의 '거리(距離)'를 유지시킨다. (p.101)


그러나 소설가가 혹은 저자가 이 양가적 감정에 휘둘리는 누군가, 즉 어쩌면 당신을 등장시킨 것은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스스로가 진자처럼 오가면서 이 물신이 지배하는 도시 서울을 기꺼이 걸어가고 있는데 누구를 비판하겠는가. 발터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보고자 하는 것도 그것만은 아니었다. "벤야민은 대도시와 그 속에 매몰된 소비 대중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결코 유토피아적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화된 인간의 욕망이 정치적, 혁명적 실천의 에너지로 전화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p.268)" 그리고 저자 역시도 홀로 긴 시간 서울 거리를 산책하고 돌아온 구보와 그를 기다리는 지친 노모에게 작은 위안을 선사한 다음, 어떤 희망들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끝낸다. 그것은 공간에 매몰되지 않고 그곳을 꿋꿋이 산책하고 있는 산책자 자신, 혹은 수많은 '나'들을 긍정하는 것이며, 1930년대의 소설가 구보씨와도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며("구보는 좀더 빠른 걸음걸이로 은근히 비 내리는 거리를 집으로 향한다.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혼인 얘기를 꺼내더라도, 구보는 쉽게 어머니의 욕망을 물리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인용한 다음의 문장과도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니 길이 생긴 것이다. (루쉰, <고향>)"

 


덧 1.
사유의 기본은 세심한 관찰이다. 이 책은 적절한 인용도 인상적이지만, 세심하고도 집요한 관찰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구보는 맥도날드에서 고객에게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이 보이지 않는 매뉴얼에 충실히 따랐다. 시장이 반찬인지,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러나 서둘러 먹을 수 없었다. '패스트푸드'라지만 먹는 과정은 매끄럽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빵 두 조각이 힘겹게 덮고 있는 고기 패티와 야채 더미를 손에 쥐고 먹는 일이란 여간 힘들고 번거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포장지에 압사당한 야채들이 기필코 틈을 비집고 탈출에 성공하기 일쑤였고, 소스는 노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구보는 포장지 안으로 햄버거를 요리조리 돌려가며 가능하면 토핑을 떨어뜨리지 않고 남김없이 모두 씹어 심키려는 자신의 허기와 맹목적인 식탐에 비애를 느꼈다. 햄버거는 거인 같았고 그걸 감당하기에 자신은 난쟁이 같았다. 구보는 자기가 햄버거를 먹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가 자신을 집어삼킨 것 같은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햄버거 속 토마토가 먹잇감을 보고 날름거리는 표독한 독사의 혀 같았다. (p.125)


덧 2.
혹시 어쩌면 누군가 한명쯤은 이 묘사를 보고 한 영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는 거의 이와 비슷한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영화 역시도 어쩌면 한 남자의 서울 유랑기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주인공 영수(신하균)를 계속 감시하는 것처럼 따라다니는 서울타워이다. 아마도 구보가 드넓은 서울을 돌아보는 와중에도 이 서울타워는 상당부분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노모에게 돌아가는 것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마지막에 이르러 구보는 서울타워에 오르는 반면에, 이 영화에서는 노모에게 돌아온 영수를 여전히 서울타워가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영화 <카페 느와르>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비극 버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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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2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첫 문단을 보고 서울에도 갈 만한 곳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서울을 한바퀴 도는 버스도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아주 적은 돈으로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산에라도 올라가면 모를까^^

어딘가에 들어가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니 조금 우울한 이야기네요 그래도 그런 것에 기죽지 않으면 좋을 텐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은행,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디나 그런 것은 아니니 다행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희망을 찾기를 바라고 이 글을 쓴 것 같군요 산책은 어디에서든 할 수 있고 생각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도 막을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들어가서 깊이 생각한 적은 별로 없군요 그냥 걸을 때나 이것저것 생각하지, 다음에는 어딘가에 들어가면 한번 잘 살펴보고 싶군요^^


희선

맥거핀 2014-03-03 17:52   좋아요 0 | URL
불성실한 서재에 늘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깍제깍와서 얘기도 나누고 그래야 하는데..많이 늦었네요.

저는 아주 가끔 위의 실험을 실제로 행해보고는 합니다. 뭐 의도할 때도 있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만, 서울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 서울에서 살고 있고,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서울 거리를 걷는 걸 나름 즐깁니다.

위에 쓰지는 않았지만, (참 갈만한 데가 없다는 것과) 동시에 느끼는 것은 참 이곳은 빠르게 많은 것이 바뀌는 도시라는 점입니다. 그것도 참 이상하게도 늘 갈만한 곳이 제일 빨리 없어지고는 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명동 거리를 돌아다닐 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참 조용한 데가 필요하다 싶으면 가는데가 있었습니다. 명동의 중앙시네마인데, 참 이렇게 조용해도 되나 싶은 영화관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지요. 어쩌면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없어진게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꼭 영화관만은 아니고, 서울 거리는 이상하게도 조용한 꼴을 못 보는 듯 싶습니다. 여기 조용해서 참 좋네..하면 이상하게도 요란시끌벅적한 무엇인가가 어느 틈에 들어서 있고는 합니다. 참 왜들 그러나 싶을 정도죠. 그럼에도 아직도 참 좋은 몇몇 군데가 있어서 저는 여전히 서울이 (어느정도는) 좋고요. 앞으로도 가끔은 여전히 산책을 나갈 것 같습니다.

희선님 댓글을 읽다보니 왠지 여유가 조금은 생기는 것 같기도 하네요. 우리 기죽지 말고 살아야겠죠.^^

아이리시스 2014-03-03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2014-03-03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03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4-03-03 18:42   좋아요 0 | URL
새로운 형식 실험 아니고, 맥거핀님, 하고 뭐 써야지 하다가 비밀로 해야될 부분있으니 비밀로 쓰자 하고 바꾼 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hining 2014-03-04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글은 언제나 좋지만 이 글 특히 좋네요. 제 마음에도 쏙 드는(응?) 글, 주제이기도 하고요.

요새 몸이 좀 둔해진 듯 싶어 걷는 양을 늘렸는데 걸을만한 길을 갖는 것도 실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산책 코스가 있는데 한 시간 정도 유령처럼 걷다 오면 미세먼지는 있어도;; 마음은 좀 나아져요. 한 곳에서 오래 살게 되면 반드시 숨은 장소 몇몇은 찾을 수 있고 아직은 나 혼자 바람 쐴 곳이 있다는 것도 안도 될때가 있죠. 산책 코스에 앉아서 책을 읽게 되는 장소가 있는데 거의 앉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도 별 없다보니 날씨가 좋을 땐 간식을 먹거나 헤드폰을 끼고 가만히 앉아있기도 하는데. 말은 안 되도 저는 그게 '제 자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런 곳들을 찾다보면 가끔 흡연하러 오시는 분과 조우하게 되는 뻘쭘한 상황이.....

맥거핀 2014-03-07 00:33   좋아요 0 | URL
요즘 Shining님 마음에 드는 글들이 늘어가고 있군요. 다행입니다.ㅋ

음..산책코스에 책을 읽을 만한 장소가 있나요? 그것 참 좋습니다. 요즘에는 조용히 책을 볼 수 있는 곳들이 점차 '희귀해진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말 그대로 마음 편히 앉아있을 만한 곳이 참으로 찾기 어렵습니다. 말 그대로 '공유지'라고 부를 수 있는 곳들이 점차 없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집 근처에 나름의 산책코스가 있기는 한데, 책을 읽을만한 장소는 없구요. 그저 거리가 그래도 보기 좋고 조용한 편이라서 가끔 나가고는 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참 공기가 너무 안좋아서 잘 안나가게 되는군요.

안 그래도 공기도 안 좋은데, 담배까지 피면...아무튼 흡연자들이 여러모로 민폐이기는 합니다.

감은빛 2014-03-06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글은 언제나 좋지만, 이 글은 특히 더 좋네요!
제가 하고픈 말씀을 요 위에 샤이닝님께서 하셔서 한번 더 따라 씁니다. ^^

저 대략 이십년 전쯤에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던 적이 있었어요.
신천(여기서 선배한테 술을 얻어 먹었거든요.) -> 잠실 -> 신촌 -> 종로 -> 대학로 등등
혼자였고, 딱히 할 일이 없었고, 서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무작정 걸었어요.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돈이 없으면 머물 공간이 마땅히 없다는 것.
맥거핀님의 멋진 표현들을 읽으며 새삼 깨닫습니다,

맥거핀 2014-03-07 00: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칭찬은 언제 들어도 늘 좋습니다.^^

저는 태어나기도 서울이고, 대학도 서울에서 다녔고, 일도 서울에서 했고..아무튼 거의 서울을 벗어나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 거리를 많이 안다고 자부했는데, 점점 또 시간이 흐르다보니 제가 잘 모르는 곳도 참 많더군요. 아무래도 서울에 살아도 늘 가는 곳만 가게 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한 장소들은 거의 다 그래도 아는 곳들이라 반가웠습니다.)

요즘에는 시간도 잘 없고, 체력도(...) 없어서 잘 못 그러지만 학교 다닐때는 참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기는 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다 추억이고,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이 많습니다. 같이 돌아다녔던 사람들도 생각나구요. 물론 그 때도 돈은 별로 없었지만요. 그래도 젊다는 패기로 그냥 그래도 즐겁게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실제로 그런건지, 아니면 제가 패기가 없어져서 그런건지 요새는 돈이 없으면 아예 가기가 겁난다고 해야할까요..그런 곳들이 너무 많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