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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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그분에게는 망각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는 '경제'였고, 그것은 총 42번 언급되었다. 그 뒤로 많이 나온 단어는 '국민'으로 총 29번 언급되었으며, '경제'와 맥락을 같이 하는 '성장'이라는 단어는 16번, '개혁'이나 '혁신'은 통틀어 24번 사용되며 그 뒤를 따랐다. 반면 작년에 그분이 또르르 눈물을 흘렸던 어떤 담화에서 계속 반복되어 언급되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은 단어도 있다. '세월호', '희생', '위로'와 같은 낱말들. 박근혜 대통령의 원고 위에서만 무엇인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적어도 방송과 신문은 세월호를 '효과적으로' 제거한 것 같다. 굳이 시간을 들여 찾아보지 않는 한 언론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언급을 보기는 힘들다. 있더라도 특별조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인양을 하는지 안하지는 모를 알 수 없는 뉴스 뿐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정부와 언론은 사람들에게 이에 대한 어떤 피로감을 심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것은 제거되었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효과적으로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 그 사라져버리거나 대체된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반면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목소리들이 있다. 책 <눈먼 자들의 국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사회학자, 언론학자, 정신분석학자, 정치철학자 등등이 쓴 12개의 글.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글들에서 수차례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다. 세월호, 구조, 고통, 변화, 희망, 진상규명, 진실, 거짓말, 신자유주의, 국가, 정부, 시민, 그리고 우리, 우리, 우리, 그러니까 살아남은 자들. 모두들 동일한 시각에 같은 사건을 보았지만, 목소리는 약간씩 다르다. 누군가는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누군가는 분노하며, 누군가는 부조리를 말하고, 누군가는 살아남은 자의 윤리를 묻는다. 혹은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가 우리를 지배하는 공포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 대해 말하며, 다른 누군가는 미래를 보며,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상상력과 새로운 행동의 결단을 촉구한다. 아무튼 어쨌든 간에 이들은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이야기하려 애쓴다. 

 

여기에는 어떤 간극이 있다. 그것은 정확히 계량하고자 한다면 물론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간극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나에게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간극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책을 주로 TV뉴스들을 틀어놓고 보았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떤 물리적인 간극이 있었다. 문자와 소리의 간극.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책과 세월호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TV. 두 개의 다른 나라에서 들려 오는 두 개의 다른 이야기.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들은 점점 연결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어쩌면 세월호 이후의 '살아남은 자들의 세계'라고 불러도 될만한 것이었다.

 

2.   

문제는 소설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새로운 상식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돌이킬 수 없는 변화는 그런 것이 아닐까. 적어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변화는 그런 것들이다. "더이상은 공동체가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제 각자 살아 남는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다." - 배명훈 '누가 답해야 할까?' p.110

      

사실 신자유주의국가는 그 내부에 죽음의 그림자를 내포하고 있는 불길한 체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의한, 만인의 죽음을 방지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한 국가가 애당초 그러했다. 국가의 배후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중략) 그런데 신자유/신보수주의시대 국가권력/폭력의 불길함은 세월호에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확인된다. 권력을 독점한 국가가 그 권력을 공익을 위해 제대로 행사하지 않는 공백상태가 초래하는 치명적 폭력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0

       

각자 살아 남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 투쟁은 세월호 이후에 새로운 방식으로 새롭게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국가를 선택한 이후부터 우리에게 예견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세월호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지만, 이런 풍경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1월 21일자 JTBC 뉴스. 포상금을 노리는 전문 파파라치들과 이들을 양성하는 학원의 실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의 한 형태. 실제로 포상금을 받으며 활동하는 것은 파파라치들과 파파라치 학원이지만, 이들의 뒤에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양성하고 있는 정부와 지자체가 있다. 각종 포상항목(실제로 1100가지가 넘는 항목이 있다)과 포상액이 지난 몇년간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행해야하는 정당한 감시는 공백상태이며, 이 임무는 개인에게 '효과적으로' 이양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시와 고발은 파파라치가 아닌 우리에게도 더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요즘의 뉴스들은 거의 '괴물판독기'라 불러도 될 만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괴물들이 걸러져 나온다. 누군가는 땅콩을 집어 던졌고, 누군가는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며,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무릎 꿇렸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딸을 성추행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수많은 각종 다양한 형태의 괴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보도되고, 신상이 공개되고, 여론의 날서린 비판을 받는다. 괴물의 주변에는 그들을 늘 감시할 눈이 있고, 그 감시는 꽤나 효과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매일매일 이렇게 수많은 괴물을 걸러내는데, 왜 괴물들은 도무지 줄지 않는걸까. 아니 도리어 왜 그 숫자를 더 늘려가는 것처럼 보일까. 괴물을 걸러내는 우리의 방법론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줄어드는 만큼 새로운 괴물들이 늘 양산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괴물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물론 괴물들은 아무데서도 나오지 않는다. 감시를 행하고 괴물을 걸러내던 누군가가, 어느날 괴물이 될 뿐이다. 표창원의 말대로 우리 사회는 '공범들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죄를 감형받기 위해 공범의 더 큰 죄를 폭로하는 범인처럼 우리는 타인의 죄를 밝혀내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래야만 살아남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빠르게 학습한다. 자신을 정상처럼 보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타인을 더 괴물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세월호는 단지 그것을 더 강화시켰거나, 어떤 압축된 이미지로 보여줬을 뿐이다. 타인을 살리려 애쓴 이들은 죽게 하고, 타인보다 어떻게든 빨리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살리는 이미지로 말이다. 그리고 침몰하는 배에서 국가는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한 후 어떻게든 살아 나오려고 애쓴 이들을 유일하게 구조했다. 

 

3.     

'세월호'다. 대구 지하철 참사와 용산 참사를 잇는 것은 물론이고, 쌍용자동차와 삼성반도체, 밀양, 강정 등으로 표출된 구조적 재난과도 연속되는 현실이다. - 전규찬 '영원한 재난상태: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없다' p.162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다른 곳에서 성공했다. 대안 부재가 합쳐진 결과 사유화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진행된 곳은 바로 사회였다. 오히려 사유화가 가장 성공적이었던 동시에 아직 이 사유화를 돌려놓을 대안이 분명치 않은 영역은 바로 주체성과 사회적 관계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사유화했다. (중략) 사적으로 극히 유능하도록 요구받지만 공적인 능력은 완전히 결여된 주체성을 생산하고 그에 고유한 사회적 관계를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란 '정치'가 '경제'에 의해 대체되는 기획일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 홍철기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p.206~207

      

지난 1월 20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일로 쫓겨난 23명의 철거민 중 10명은 단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6명은 작은 가게를 다시 열었지만, 수입이 훨씬 줄어들었으며, 7명은 아예 직장조차 없음을 뉴스는 말해준다. 어쩌면 이러한 사실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철거된 남일당 건물 자리가 여전히 공터로 남아 단지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부분이다. 무엇을 위해서 그들은 그 건물에서 죽음에 이르러야만 했는가.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용산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성공했다. 철거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며 그 건물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었고, 사람들의 공적 능력을 제거하였으며, 그들 삶의 많은 것을 경제라는 화두로 대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경제가 지배한다. 오늘날의 뉴스에서 사람들을 진정으로 화나게 하는 것은 괴물들의 소식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은 단지 유흥거리에 불과하고, 보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연말정산, 세금의 확대, 담배값 인상과 같은 것들이다. 세월호라고 하면 보상을 떠올리고, 세월호 유족이라고 하면 보상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연상한다. IS에 잡혀있는 일본인 인질의 굳은 얼굴 뒤에 숨겨진 공포를 보기보다는 그를 돌려받기 위해 IS가 제시한 보상금이 얼마인지를 궁금해하며, 설마 우리나라도 저런 일은 없겠지, 있더라도 (내 돈이 들어간) 세금은 못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다른 건 다 필요없고, 경제를 살리는 데에만 힘을 쏟겠다는 경제 대통령을 뽑고, 그 댓가로 기꺼이 대통령은 '경제'라는 낱말을 42번, '성장'이라는 단어를 '16번',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단어를 24번 말해준다. 우리는 그 말을 듣는 것을 선택했다. '세월호'나 '희생'이나 '위로'라는 낱말을 듣는 대신 말이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다.

 

4.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자책과 죄책의 차원이 거슬린다면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중에 누구는 아닐까. 우리 중 누가, 문득 일상이 부러진 채로 거리에서 새까만 투사가 되어 살 일을 예측하고 살까. (중략) 아무도 이것에서 달아날 수 없다. -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p.95~96

      

안티고네는, 국가의 반역자로 낙인찍혀 장례가 불허된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 위에 흙과 제주(祭酒)를 뿌리고, 그에 대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장례가 금지된 상황에서, 이 마땅한 일들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윤리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 김서영 '정신분석적 행위, 그 윤리적 필연을 살아내야 할 시간' p.181

      

우리는 아니 나는, 분명히 그것을 선택했던 것 같다. 다른 말을 듣기를 말이다. 망각을 말이다. 사건 초기 열심히 뉴스를 보던 나는 어느틈엔가 뉴스를 점점 뜸하게 보게 되었다. 아니 도리어 그로부터 며칠 후 예정된 외국 여행 일정이 다가왔을 때는 조금 안도했었던 것도 같다. 한 십여 일 외국에서 있다 보면 그래도 조금은 조용해지겠지. 모두들 금방 잊으니까. 아니, 나야말로 금방 잊고 싶으니까. 그 때의 나는 무엇 때문에 뉴스를 점점 멀리하게 되었던가. 돌이켜보면 사건 당시에 TV를 지켜보고 있던 나를 지배하고 있던 정서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공포는 사고 그 자체에 대한 공포였다기보다는 믿기지 않는 부조리한 현장을 보고 있는 사람이 가지는 공포였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었다. 바다에 떠 있는 배는 당연히 언젠가 바다에 가라앉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배에 그대로 남아있던 누구도 구조되지 않았는데, 스스로 탈출한 배의 운전을 담당한 사람들은 구조되었고, 국가는 민간업체에 구조를 맡겼지만, 민간업체는 구조는 국가의 일이라 말하였다. 배의 운항을 맡은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었고, 낡은 배는 무리한 증축과 구조변경으로 망가질대로 망가진 상태였고, 재난신호는 엉뚱한 곳에 접수되었으며, 대통령은 사고 당시 몇 시간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히지 않은 채, 책임을 물어 해경을 해체하였다. 책 속의 박민규의 말대로, 혹은 박민규의 소설 속 풍경대로 그것은 온갖 부조리의 현장이었다. 아니 모든 것이 부조리했기 때문에 오히려 부조리한 모든 것이 당연해보이는 이상한 현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게 무서웠다.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저런 부조리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며, 어쩌면 저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을 뜨는 것(박민규)이거나, 권력에 기대지 않고 망각과 무지와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나아지는 길임을 자각하는 것(김연수)이기도 하며, 국가라는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것(황종연)이기도 하고, 윤리적 임무를 가지고 오빠를 애도했던 안티고네가 되는 것(김서영)이거나 재난의 시대에 맞서 글을 쓰는 것(전규찬)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약간씩 다른 맥락을 가지지만, 적어도 한 가지의 공통점은 가진다. 그것은, 이러한 것들이 공포에 매몰되어 얼어붙거나, 주입된 공포를 잊기 위해서 달콤한 망각과 은폐의 유혹에 빠져 '경제'와 '성장'과 '혁신'만이 있는 공범들의 사회로 기꺼이 돌아가려 했던 자신을 돌아보라는 메시지라는 점이며, 동시에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포의 이면에 있는 것을 직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니까. 

 

물론 누군가는 이것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조금 더 실제적인 무엇, 실체가 보이는 어떤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이 글들은 긴급한 필요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어떤 질문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필요한 질문을 생각해보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질문이 정리되면 이제 그 질문에 따라서 답을 그러모으는 과정이 진행될 것이니 말이다. 시인은 시를 쓸 것이고, 소설가는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며, 언론학자는 언론의 책임을 생각할 것이고, 정치철학자는 새로운 정치체계를 구상할 것이며, 또 우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답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되새겨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안다. 모든 구체성은 상상에서 시작된다는 것, 아무것도 상상해보지 않는 자에게 어떤 답을 찾을 가능성도 주어질 수 없다는 점을 말이다. 눈먼 자들은 눈뜬 세계를 상상하지 않고서는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상상하지 않는 것은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이며, 너무도 쉽게 스스로 공범으로서의 삶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너무나도 아프게 말해준다.

    

 

* 세월호의 빠른 인양과 정확한 진상규명을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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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1-29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으면 안 되는데 대통령이 말한 몇 가지 낱말 숫자를 적은 걸 보니 웃음이 좀 낫습니다 신자유주의 이런 말 잘 몰랐습니다 지금도 잘 모릅니다 세상이 빨라지고 경제만을 생각하는 게 이것 때문이었나 싶군요 나라가 가난해지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힘들겠지만, 늘 경제가 좋아지고 성장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잘 살 것 같지도 않은데... 잘사는 사람은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그대로 못살 것 같아요 가난은 나라도 구해줄 수 없다고 하잖아요

돈은 아껴야 할 때도 있지만, 써야 할 때도 있는데... 사람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배 안에 있던 아이들 구해주러 올 거다 믿고 기다렸을 텐데... 더 많이 구하기를 바랐는데......


희선

맥거핀 2015-01-30 17:21   좋아요 0 | URL
횟수는 저도 YTN 뉴스에서 본 거예요. 그걸 세고 있을 기자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기기는 하군요. (그러나 의외로 횟수는 대체로 꽤나 정확한 걸 말하죠.)

우리나라도 경제성장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죠. 10년째 경제성장을 얘기하는 대통령이 취임하고 있는데, 나라가 왜 이모양 이꼴인지...어제 뉴스를 보는데 오바마 대통령이 상위 1%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라고 선언하는데 어찌나 멋있어 보이는지요. 세계 최고의 자본주의 나라의 대통령도 그런 선언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그런 얘기 하다가는 난리나겠지요.

아무튼 돈과 상관없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세월호를 둘러싼 문제들도 그런 것이겠구요. 근데 벌써 조사위원회의 예산이 어쩌구..하는 기사를 보니 분통만 터질 따름입니다.

2015-02-26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28 0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02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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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책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자주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가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어떻게 정확히 되돌려줄 수 있을까."(p.70)"내가 정확히 동일한 고백을 동일한 사람에게 했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스무 살 청춘이 아니고 이 카페는 예전과는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p.86)"실로 지금 이 시대가 체념도 낙관도 모두 허용하지 않는 시대라면, 이 열차가 이상한 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현실 인식에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p.168) 그리고 그의 고백. "문학(글쓰기)의 근원적인 욕망 중 하나는 정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p.27) 이 '정확하다'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글들에서 '정확'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어긋난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 글들은 영화라는 형식을 가진 어떤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고, 모든 이야기는 일단 창작자의 손을 떠나면 어떠한 수용자, 혹은 어떠한 해석자에게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흔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영화를 자신의 느낌대로, 혹은 자신의 방식대로, 혹은 자신의 세계관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해가 적어도 공격적인 방식으로 재생산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나름의 이해나 해석에 대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신형철도 잘 알고 있다("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더 좋은 해석과 덜 좋은 해석은 있다."('책머리에') 이 '더 좋다'와 '덜 좋다'는 것.) 그럼에도 그가 이 '정확하다'라는 말을 책의 제목에까지 가져온 것은 두 가지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이 '정확하다'는 말이 수식하는 것에 대해. 단적으로 말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함'이란 정확한 해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포괄한 정확한 사랑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즉 작품에 대한 해석이란 작품에 대한 사랑의 하나의 형태임을 생각해 볼 때, 그가 말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해석 이상의 그에 대한 정확한 사랑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 영화, 한 이야기를 보며 순간순간 그에 대해 반응한다.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품을 때, 우리도 호의를 가지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때, 우리도 상처를 받고, 다른 누군가를 증오할 때, 우리도 누군가를 증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주인공이 누군가를 증오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그 순간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주인공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가질 때, 우리는 도리어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도 있다. 즉 이 증오나 호의나 상처는 주인공에게서 우리에게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번은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에서 굴절되어 다르거나 비슷한 '무엇인가' 혹은 그 '무엇인가'들이 합쳐진 '거대한 무엇인가'를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이 거대한 무엇인가'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어디에서와서 어떻게 만들어져,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이 순간, 나를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멍하게 만드는가. 이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모를 때 때로 고통스럽다. 신형철의 작업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를 보고 내 마음 속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이 거대한 무엇인가가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결합되어 있으며, 어떻게 분해될 수 있는지(혹은 분해가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히는 일. 그것을 위해서 신형철이 가지고 있는 도구는 단 하나다. 그것은 섬세하고자 하는 것, 혹은 섬세해지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것, 즉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또한 시간과 반복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한 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보고 나서 열 줄로 이루어진 단락 열네 개를 쓰고 나면 한 달이 갔다."('책머리에')) 많은 감상들이 '감동적이었다'라는 말로 뭉뚱그린 표현밖에 쓰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 '감동'이라는 녀석을 분해하여 들여다보는 것이 노력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그 노력을 시도해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그가 해석자이고자 하기 때문에, 즉 그가 말한대로 해석이라는 '기술'을 가진 '비평가'이고자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아마도 '정확하다'는 말을 책의 제목에 가장 처음 넣은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는 이것이 거의 비평가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어쩌면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늘 작품을 앞에 세워두는 글쓰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책머리에') 즉 그에게 있어서 비평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최대한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바 그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언어로 풀어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정확함'에 있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동시에 '노력'에도 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대로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고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실험은 무엇을 알고자하는 노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들은 일종의 실험이 된다. 정확해지고자 하는 실험 말이다.

 

이것이 그런 실험이라면 마지막으로 두 가지 정도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정확함'과 '실험' 사이에 있는 하나, 즉 무엇을 위한 실험인가라는 점. 그것은 물론 제목에 있는대로 '사랑'이다. 신형철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에서 견지하고 있는 자세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각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다. 그는 말한다. "조금도 애정을 느낄 수 없는 텍스트였다면, 대체로 그래왔듯이, 아무 것도 쓰지 않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p.153) 실험이란 기본적으로 잔혹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 실험이 잔혹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이 실험의 대상자들에게 계속 애정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며, 그 텍스트가 결국 그의 생각에는 의도한 바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텍스트였어도, 그것을 섬세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영화를 정확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다른 어떤 노력들은 왜 거부감을 불러오는가. 예를 들어 영화를 일종의 커다란 시험지로 보고, 최선을 다해 정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같은 것. 시험의 모든 정답을 찾은 학생에게 시험지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으며, 그것은 곧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실험은 결국 끝나지 않는 실험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아까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삶의 진실은 수학적 진리와는 달라서 100퍼센트 정확한 문장은 존재할 수 없을 것"(p.27)이기 때문이며, 문학은 '근사치'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정확함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말대로 어떠한 문학도, 혹은 비평도 완벽한 정확함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완벽한 정확함이 존재하는 순간, 그의 원본은 존재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다. 삶의 모사물인 문학, 작품의 모사물인 비평이 완전하다면 삶과 작품이 존재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p.27) 이 책은 우리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우리들이 받는 고통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덧.

정확하게 말해서 책을 모두 읽지는 않았다. 중간에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글은 건너 뛰었으므로 굳이 분량으로 말하자면 3분의 2정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한 내용을 미리 아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기 보다는 그 반대에 가깝다. 영화를 보지 않으면 그의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없을까봐서였다. 단지 세심한 그의 글을 조금이라도 더 세심하게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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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1-15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다가 한줄에 글자수는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걸 알고 싶어하다니... 그것을 언제나 맞추어서 쓸까 싶기도 하군요 열줄이 넘을 수도 있고 모자랄 수도 있잖아요 그때는 늘리거나 줄일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이상한 데 마음을 쓰는군요

저는 그렇게 정확하게 알려고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모르면 모르는대로, 뭔가 떠오르면 떠오르는대로...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군요 심지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쓰니까요(나는 별로라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은 다르겠지, 하면서) 제가 보고 쓰는 건 거의 책이지만... 어쩌면 제가 제 마음을 잘 들여다보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군요 그것을 글로 쓰는 것은 쉽지 않기도 하죠 그렇게 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별로 애쓰지 않는군요

영화, 책은 다 정확한 답은 없겠죠 학교에서는 정해놓은 것을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다른 생각이 있어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죠 저는 다른 생각이 별로 안 떠오르지만... 새롭게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네요

세심하게 보기 위해... 저는 그런 것도 잘 못하는군요


희선

맥거핀 2015-01-16 13:1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잡지에 연재했던 글이니 분량을 마출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뭐 아마도 그것도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의 하나의 특징이기도 하겠죠. 내용을 훼손하지 않고도 분량을 적절히 늘이거나 줄일 수 있는 능력 말입니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반성을 조금 하기는 했습니다. 누군가는 정확하게 보기 위해 정신적, 그리고 물리적으로 시간을 들여가며 노력하는데, 달랑 한 번 보고 뭔가를 알았다는 식으로 쓰는 게 너무 오만한 게 아닌가 싶어서 말이죠. 신형철 씨만큼 보아도 그렇게 쓸 수 없을텐데 말이죠. 물론 신형철 씨가 처한 입장과 제가 처한 입장은 다르겠습니다만, 노력한다는 그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노력 말입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비평을 대하는 사람들의 어떤 냉소적인 자세도 그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비평가들의 이야기를 일종의 답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말이죠. 그것이 답일 수는 없겠죠. 다만, 누군가가 그것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그만큼 노력했다면, 그 노력만큼은 적어도 진지하게 인정해주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은 작품을 보는 수준과는 그렇게 크게 관련이 없을 겁니다.

2015-01-16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19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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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가 본 것을 소설로 썼다. 누구나 자기 몫의 삶을 살지만, 사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응시했고, 그것을 썼다.
* 읽고나니 알트만의 <숏컷>이 얼마나 잘 만들어진 영화인지 다시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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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4-12-18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알트만의 영화들이 그리워지네요. 바로 얼마 전엔 레네 감독도 죽고... 점점 그리워 하는 이름의 목록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맥거핀 2014-12-19 11:24   좋아요 0 | URL
네..그는 카버의 작품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만들었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어 <숏컷>에 계속 반복하여 등장하는 TV화면을 보며,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었는데, 카버의 소설을 보니 그의 소설에서 TV가 그만틈 또 의미가 있는 것이더군요. 아마 카버도 그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희선 2014-12-19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뭔가 있어야 제 삶을 똑바로 볼 텐데, 볼 게 없어요 이 작가(레이먼드 카버) 삶이 남다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작가는 자기 삶을 보듯 다른 사람 삶을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예전에 책 읽었는데,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읽었다고 해도 잘 못 읽었어요 저는 그저 글자만 본 책이 좀 있군요(이 책은 우연히 봤지만 못 본 책도 많습니다) 그것은 봤다고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 삶이라도 똑바로 보고 싶군요 이게 더 편하기는 하죠(편해도 잘 못 보는군요) 그러다 문득 자신을 떠올릴 때도 있을 테죠

다시 생각하니 처음에 한 말 틀렸네요 저도 제대로 안 보는가봐요


희선

맥거핀 2014-12-19 11:30   좋아요 0 | URL
글쎄요. 꼭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삶이 남다른 것과 그 삶을 보는가는 별개의 문제에 가깝지 않나 생각해요. 아무리 남다른 삶을 살고 있더라도 삶에 대한 치열한 응시가 없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구요. 삶을 보는 것은 어떤 삶이든 관계없지 않을까, 생각하는 쪽입니다. 물론 저도 타인의 삶보다는 제 삶을 먼저 보고, 그것을 이야기해야만 하겠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아직 젬병입니다.)

아무튼 책을 읽고 나서 뒤의 그의 연보를 보니 그가 얼마나 자신의 삶을 보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조금은 알것도 같았습니다.

2014-12-24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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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소설의 프롤로그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나는 원래 눈물이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그 뒤로 이어진 모든 일들이, 끔찍했던 그 모든 일들이 그 눈물에서 시작됐으니 말이다."로 끝난다. 일단 이 프롤로그는 예고편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무릇 모든 예고편의 목적이란, 본편을 보게 만드는 것. 우리는 그 눈물이 없는 인간이, 눈물로 시작하여 보게 되는 끔찍했던 모든 일들이 무엇인지, 꽤나 궁금해지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이 프롤로그는 한 일화를 통해 주인공이 어떤 인간인지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부모님 장례 때도 울지 않은 고등학교에서 성인 영어반을 가르치는 교사 제이크 에핑. 그가 어느날 수강생들에게 낸 작문 리포트 주제는 '내 인생이 바뀐 날'이었다. 어쩌면 아마도 그런 주제는 내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쓰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좋은 주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인생이 동전처럼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을 때, 인간이 아무리 어떤 애를 써도,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고 알 수 있을까. 그것을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누구는 임신한 십 대 조카를 거두어 먹인 이모 이야기를 썼고, 또 누구는 용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던 전우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그 중의 한 리포트는 그런 리포트를 읽는 일이 가슴뭉클한 일이기는 하지만, 끔찍하고 사람 진을 빼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이 제이크 에핑을 울게 만들고 글 위로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눈가를 훔쳐가며 한 군데도 수정하는 일이 없이 결국 A+를 주게 만들었다. 그 리포트는 그가 '정규 교육이 가능한 정신지체인'보다 손톱만큼 낫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에게 두꺼비 해리라고 불리는,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혼내는 일 한 번 없는 고등학교 수위 해리 더닝이 쓴 것이었다. 그 리포트는 이렇게 시작했다. "어떤 날이 아니라 어떤 밤이었다. 내 인생이 바뀐 것은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두 형제를 주기고 나를 심하게 다치게 만든 밤이었다. 여동생도 심하게 다쳐서 혼수상태가 됐다. 여동생은 깨어나지 못하고 3년 만에 주겄다. 이름은 엘렌이었고, 내가 정말로 사랑했는데. 꼿을 따서 꼿병에 담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스티븐 킹의 소설 <11/22/63> 얘기다.

2.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인생이 뒤집히려는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동시에 이미 뒤집힌 사람의 기록 - 다시 말해서 해리 더닝의 기록과 같은 의미를 담은, 제이크 에핑의 기록("그 뒤로 이어진 모든 일들이...")이기도 하며, 또 한편으로는 착한 사람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당수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런 이야기에 약하다. 착한 사람이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분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온 후에 뒤늦게 그 일들을 돌아보는 것 말이다. 그것은 적어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몇 가지 장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즉 이는 모든 일들이 지나간 후의 기록이므로, 각각의 작은 사건에서 주인공의 후일의 감정을 붙이는 것이 가능하며, 그것은 동시에 어떤 복선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물론 그런 복선들은 읽는 이의 감정을 증폭시키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떻게든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데에 효과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스티븐 킹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음을 알려주면서도 이야기를 조금씩 지연시켜 독자의 궁금증을 끌어낼 줄 안다(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적절한 지연말이다. 물론 이야기로 지연하는 것과 숏으로 지연하는 것은 다르지만). 그리고 그것은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지배할 줄 아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때로 어떤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스티븐 킹은 자신의 이야기들이 위치해야 할 곳을 알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떤 기법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결국 독자를 해리 더닝의 리포트를 읽는 제이크 에핑의 자리에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해리 더닝의 인생이 바뀐 날을 읽는 제이크 에핑, 그리고 제이크 에핑의 인생이 바뀐 날(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을 읽는 우리들. 당신은 눈물이 많은 편인가, 아니면 눈물이 없는 편인가. 아니, 그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부모님 장례 때도 울지 않은 사람도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신은 부모님 장례 때는 울었겠지.

3.
많이 알려졌듯이, 그리고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이야기는 존 F.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를 밝히는 것은 이 리뷰의 몫이 아니고, 다만 내가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스티븐 킹이 보는 미국의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의 모습이다. 당시는 전후의 혼란에서 벗어나 번영이 시작되는 시기였고, 지금보다 모든 것이 덜 발달된 시기였을지 몰라도, 한편으로는 더 풍요로운 시기였다. 그것은 예를 들어 주인공이 처음 1950년대로 건너와 마시는 루트비어 맥주와도 같은 것이다. 즉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이 50년 전 세상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냄새가 지독했지만, 맛은 훨씬 더 훌륭했다.(p.63)" 사람들은 순박했고, 지금처럼 계산적이거나,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티븐 킹이 그 시기를 찬양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무서운 것이 그 시기에는 도사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종차별. 퍼거슨 시의 사건에서 보듯 인종 문제는 여전히 미국 사회의 뇌관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차별이 뉴스거리도 안되는 그야말로 당연시되는 시기였고, 그것은 작가가 소설에 묘사한 실개울 위에 가로로 걸쳐진 널빤지, 즉 '흑인용 화장실'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잊지 않고 경고를 한다. "만약 당신이 내 글을 읽고 1958년이 마냥 평화로운 세상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 비탈길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덩굴 옻나무가 즐비했던 그 길을. 그리고 실개울 위에 얹혀 있던 널빤지도.(p.415)"

그러니까 그것은 한편으로 작가가 소설에 건 한 가지의 장치, '과거는 고집이 세다'와 같은 것이다. 즉 이는 과거가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과거에서 미래로의 흐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느리고 때로는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은 조심스럽게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며, 우리를 조금씩 앞으로 밀어낸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가 만들어낸 다른 장치, '과거는 화음을 만들어 낸다'와도 통한다. 과거와 현재 혹은 미래는 시간 속에서 화음을 만들어낸다. 소설에서의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그것은 어떤 비유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때로 과거의 어떤 일은 현재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완전한 반복이라기 보다는 화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무엇인가가 살짝 바뀌어 반복된다는 것. 즉 과거라는 음악은 이미 연주되었고, 우리가 (그 음악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그 연주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어울리는 적절한 화음을 넣는 것 뿐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춤처럼 말이다.
 
4.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나는 과거로 돌아가 존 F.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제이크 에핑이 벌이는 일들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돌아가 만나게 되는 해리 더닝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물론 독자가 너무 큰 이야기나, 혹은 반대로 너무 작은 이야기만 읽다가 흥미를 잃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장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작은 사건들 속에서 살아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의 큰 사건들을 같이 겪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던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을 다룬 영화 <바비>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데,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는 로버트 F. 케네디, 즉 '바비'의 죽음이 있었던 하루를 다루기는 하지만, 그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와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이는 여러 사람들의 그 하루를 모자이크 식으로 엮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가 잡아내고자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끼친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시대성이며, 어떤 시간의 공기이다. 즉 이들 각자의 삶은 개별의 삶으로 분리된 것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묶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여준다.

다시 소설로 돌아온다면, 결국 스티븐 킹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비슷한 것이다. 하나의 삶은 과거의 어떤 것을 바꾼다 할지라도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의 삶은 분리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과거의 어떤 큰 사건(예를 들어 존 F. 케네디의 죽음)을 바꾼다 할지라도 개개인의 삶은 또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친다 해도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 당연한 진리를, 그러나 우리 종종 잊고마는 사실을 좋은 소설은 다시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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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12-03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자신한테 큰일인지 깨닫지 못하겠죠 그때가 지나야 그때가 지금까지하고는 아주 바뀌어버린 때라는 걸 알죠 갑자기 그런 때 있었던가 싶기도... 있었지만 제가 기억을 못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주제로 글을 쓰는 건 더 나중에나 할 수 있을지도, 아직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별로 기대는 안 해요 그것도 자신이 바라야 하는데 저는...... 그러면 결국 못 쓰겠군요 살면서 생겨나는 마디라는 게 떠오르네요 그건 어떤 나이를 지날 때 자주 말하기도 하는 듯하군요

뜸들여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왜 이렇게 늘여빼는 건가 할 때도 있어요 스티븐 킹은 더 보고 싶게 하는 쪽이군요 스티븐 킹 소설 별로 못 봤습니다 거의라고 해야겠네요 이 책 보고 싶기도 했는데 아직입니다

다른 소설에도 존 F. 케네디를 살리려고 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갑자기 그 사람과 제이크 에핑이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한사람보다 두 사람이 하면... 그냥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도 지난날은 바뀌지 않고, 지금도 그렇게 달라지지 않겠죠 아니 그렇게 열심히 그 일을 바꾸려고 한 제이크 에핑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희선

맥거핀 2014-12-03 22:42   좋아요 0 | URL
네..그렇죠. 제이크 에핑이야 말로 가장 인생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겠죠. 특히 정신적인 부분에서 말이죠. 그런데 정말 책에서 이야기한대로 인생이 바뀌려는 순간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다 지나간 후에 그 때...라고 어렴풋하게 깨닫는 거죠. 그나마 깨달을 수 있는 사람도 많치 않을 것이구요.

음..다른 소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나보군요. JFK는 미국 사회의 트라우마와도 같은 부분인데, 없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저는 읽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만약 이게 우리나라가 배경이라면 어떤 사건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까 말이죠. 아무튼 흔하다면 흔하다고 할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확실히 재미있게 잘 읽히는 것은 그만큼 스티븐 킹의 능력이 좋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도 같은 소재, 같은 주제를 그야말로 수없이 반복하지만, 감독의 능력에 따라 영화가 천차만별이 되잖아요.

희선님도 재미있게 읽으실 거라고 생각이 되네요. 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뭐랄까 책의 전반에 흐르는 따듯한 정서가 좋았습니다. 스티븐 킹이 참 그래도 마음씨가 따듯한 양반 같아요.

희선 2014-12-07 01:07   좋아요 0 | URL
책 제목은 그냥 REPLAY(켄 그림우드)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한 번 리플레이’로 나왔군요 예전에 책 보고 쓰기(거의 줄거리)도 했는데, 제목을 잘못 써서 바로 못 찾았습니다 아니 본래 제목은 맞지만 우리나라에서 나온 제목과 조금 달라서... 저는 리플레이로 찾았거든요 그것을 보니 틀린 글자가 있었는데 귀찮아서 그냥 놔뒀습니다 가끔 그런 게 보이면 고치고는 했는데...

예전에 쓴 걸 보기 전에 이 책에 나오는 것은 시간여행과 조금 다르지 않을까 했습니다 아주 아닌 건 아니지만, 자신이 자유롭게 옛날로 가는 게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지금 41살인 사람이 옛날 18살로 돌아가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시 살아요 그것을 여러 번 되풀이합니다 이 사람 제프는 죽어갈 때 그렇게 돌아간 거예요 겉모습은 어리지만 마흔한살이 될 때까지 산 기억이 있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았어요(이렇게 되면 어렸을 때 그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가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른 책에는 어린 사람과 더 나중 사람이 바뀌거든요 바뀌었다고 하기보다 자고 일어나니 나이가 많아졌습니다 시간을 뛰어넘는다고 해야겠네요 그래서 제목은 스킵skip 작가는 기타무라 가오루예요 이 사람이 켄 그림우드 소설을 말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켄 그림우드 작가소개에 ‘온 세계 모든 시간여행 소설가들이 오마주를 바치는 전설의 작품’ 이라는 말이 있군요)

제프는 여러 번 다시 살면서 다르게 살아요 케네디를 구하려고 한 것도 있었던 것 같은데 연도가 안 맞아요 이 책이 아니고 다른 책에서 본 건가봐요 어디에서 본 건지... 제프처럼 그렇게 어린 나이로 되돌아가서 사는 사람이 더 있었어요(어떤 사람은 좀 이상하기도 했어요 이런 게 있었다니, 다시 산다는 것만 기억했는데) 한 여자하고는 죽는 날이 같았어요 그 사람하고는 다시 돌아갈 때마다 만나요 돌아가는 시간이 달라지고, 끝은 찾아옵니다 마지막 괜찮았어요 제가 거기에 같은 시간을 다르게 사는 것보다 흘러가는 시간을 사는 게 낫겠다고 썼네요 이거 안 찾아봤다면 이 책에 케네디를 구하려고 하지만 구하지 못한 게 나왔다고 죽 생각했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한번밖에 살지 못하지만 제프는 같은 시간을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는 생각도 조금 듭니다 되돌아가서 다시 살아야 하는 건 시간의 감옥 같기도 하지만, 경험은 많아지잖요 본래대로 돌아와서 제프는 흘러가는 시간과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고 잘 살아가겠죠

우리나라 사람... 우리나라가 힘들 때 나라를 위해 애쓰다 죽은 사람들이 생각나는군요 한사람만 생각하는 건 어려울 듯하네요 한사람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지만, 다른 여러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요 맥거핀 님은 사건이라고 했는데, 저는 사람이라고 했군요

남은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맥거핀 2014-12-08 12:1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말씀하신 소설이 더 좋을 것 같아요. [11/22/63]에서는 과거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다시 젊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냥 과거로 돌아갈 뿐이죠. 나이는 그냥 나이대로 먹을 뿐입니다.

정신적인 상태는 그대로지만, 겉모습만 나이가 젊어지니 더 낫지 않겠어요. 정신상태도 과거로 돌아간다면 문제겠지만요. 글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지금도 뭐 그렇게 좋은 상태는 아닙니다만, 어렸을 때는 그야말로 어리버리의 전형이어서 정신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네요.

희선님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사람들은 대체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기를 원하는 것 같아요. 과거로 돌아가 예전에 한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고, 다른 선택을 해보고 말이죠.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과거로 돌아가면 잘못이 지워지기는 하겠지만, 또 역으로 잘한 일들도 없어지잖아요? 그리고 어떤 것을 바로잡았다고 해도, 그것이 또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100% 단정할 수 없는 일이죠. 좋은 의도로 한 일이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수도 없이 보니까요.

예를 들어 과거로 돌아가 박정희를 조금 더 일찍 암살한다면(그냥 만약으로 하는 얘기니, 국정원에서 그냥 넘어가주면 좋겠군요), 우리나라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갔을까요? 저는 확신을 못하겠어요. 박정희가 죽고 난 이후 전두환 같은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사람이 나온 걸 보면요. 그보다 더한 독재자가 나와 나라를 더 어지럽게 했을 수도 있죠(박정희가 잘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니면 더 거슬러 올라가 장준하나 혹은 조봉암을 살렸으면 많이 달라졌을까요? 그것도 여전히 단정짓기 어렵구요. 사람이든 사건이든 역사의 방향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말씀하신대로 한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거겠죠.
 
공중전과 문학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총 200킬로미터 길이로 늘어선 거주지는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도처에 끔찍하게 뒤틀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여전히 푸르스름한 인광이 깜빡이는 시체도 있었고 거무스름하게 타버려 원래 크기의 3분의 1로 쪼그라든 시체들도 있었다. 일부는 이미 식어 굳은 자기 몸의 지방 웅덩이에 엉겨붙어 있었다. 폭격이 끝난 며칠 뒤 바로 봉쇄 구역으로 선포된 죽음의 지대 안쪽에서는, 페허지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신 8월에 접어들어 징역대와 수감자들이 식은 잔해들을 치우는 소개작업을 시작했을 때,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여전히 책상이나 벽에 기대앉아 있는 사람들이 발견되었고, 다른 쪽에서는 난방용 보일러 폭발로 터져나온 끓는 물에 삶아져 덩이진 살과 뼈, 혹은 산처럼 쌓인 시체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또다른 이들은 섭씨 1,000도 이상 올라간 열기 속에서 숯이 되고 재가 되어버려서, 생존자들이 가족의 유해를 빨래바구니 하나에 다 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p.44~46) 


1943년 7월 말, 영국 공군은 미국 제8공군의 지원을 받아 함부르크와 그 일대를 연속적으로 폭격했다. '고모라 작전'이라 불린 이 프로젝트는 특정의 시설물 타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가능한한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었다. 폭격은 며칠 간 계속되었고, 이 폭격으로 하루 밤 사이에, 4000파운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었고, 하루에만 4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외에도 이차대전 막바지에 영국 공군은 독자적인 40만 번의 출격으로 100만 톤의 폭탄을 적국 영토에 투하했으며, 한 차례 또는 수 차례 이상 공격받았던 총 131개의 독일 도시 가운데 몇몇 도시가 거의 철두철미하게 붕괴되었고, 독일 민간인 60만 명 이상이 이 공중전으로 희생되었다. 100만 톤의 폭탄, 40만 번의 출격, 60만 명의 희생자. 때로 숫자는 무서울 정도로 잔혹하다. 그러나 그 무서울 정도로 잔혹한 숫자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숫자들은 그 이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거대한 폭격 이후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 공간에서 이제 인간들은 무엇을 해야할지 이 숫자는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이제 다른 것들이 나선다. 잔해를 치우고, 죽은 자들을 묻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호하고 새로운 도시를 재건해야 할, 수많은 사람들, 예를 들어 의사나 간호사, 경찰관과 소방관과 군인, 정치가와 행정가, 심리학자와 상담가, 건축가와 기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언뜻 그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할 일이 있다. 철학자들은 이 파괴의 의미를 물을 것이고, 사회학자들은 이 재난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할 것이며, 교육학자들은 이 재난 속에서 다음의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혹은 문학은? 이 거대한 공습, 폭격, 재난 혹은 범죄나 인간성 말살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발트의 <공중전과 문학>은 이것을 묻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단어 공중전(luftkrieg)과 문학(literatur) 사이에 놓인 이 'und'의 간극을 무엇으로 연결할 것인가? 물론 이 질문은 하나의 즉각적인 다른 문제 혹은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 그것은 혹시 이 질문이 그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연합군의 독일 공습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전쟁의 가해자인 독일 입장에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라는 물음이다. 책을 읽으면 이 질문은 오해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데, 제발트의 문제 제기는 전쟁의 전략적인 부분이나, 어떤 역사적인 맥락 혹은 특정 국가를 비난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즉 제발트는 영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전략적인 목적으로, 혹은 독일이 자행한 폭격에 대한 보복전의 성격으로 이 폭격을 실행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관점으로 이 사태를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폭격은 어떤 특정의 목표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단지 폭탄이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될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들어진 폭탄은 어딘가에 쏟아부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독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발트는 글의 말미에서 이를 더욱 강조하여 말하고 있기도 한데, 독일도 게르니카, 바르샤바, 베오그라드, 로테르담, 스탈린그라드 등에서 수많은 거대한 폭격을 실행했으며, 나치스의 공군 원수 괴링도 기술적 수단만 가능했으면, 런던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제발트가 이러한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을 무릅쓰고 50년도 더 지난 1990년대 말에 이 질문들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쟁이 불러오는 비인간성, 참화, 그 무상함에 다시 경고를 하는 목적 외에도 이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집단적 망각이다. 제발트가 여러 기록과 사례를 들어 논증하고 있는 바대로, 전후 독일 사회는 이 폭격이 불러온 거대한 파괴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꺼렸으며,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와 연괸되는데, 하나는 앞서도 이야기한 바대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이 불러올 불필요한 문제를 회피하고자 함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보다 큰 문제로 이를 일종의 부끄러운 과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치스와 관련된 부분은 수많은 독일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고 싶은, 터부시되는 기억이며, 따라서 그와 관련된 이들 폭격의 참상마저도 피하고 싶고, 잊고 싶은 기억의 일부분이 되었다. 따라서 전후 독일인들은 이 죽음을 애도하고 기억하기보다는 그 시체를 '빨리 몰래 묻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국가와 도시를 건설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으로 그 상황에서 독일문학이 보인 전반적인 태도이다. 즉 일반 국민이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빨리 잊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할지라도 '문학'마저도 그래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제발트는 전후에서 현재에 이르는 독일문학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답했으며, 일부 이 폭격이나 공습을 다루었다고 하더라도 부적절한 방식으로 다루었다고 말한다. 즉 이 연합국에 의해 이루어진 폭격을 다룬 문학의 수 자체가 많지 않으며, 일부 이 소재를 다룬 헤르만 카자크, 한스 에리히 노사크, 아르노 슈미트, 페터 드 멘델스존 등의 작품이 부적절하게 이것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있어서 부적절한 방식과 적절한 방식이란 무엇인가. 제발트가 말하는 부적절한 방식이란 허구화, 문학적인 수사, 통속적인 묘사, 비유의 남용 등이다. 그리고 이의 반대편에 사실에 입각한, 냉정하고 철저한 묘사와 같은 적절한 방식이 있다(예를 들어 가장 위에 인용한 묘사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것을 다룰 때에는 그런 방식이 필요하다고 제발트는 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와 역사가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역사가들의 영역이 아닌가. 제발트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작가와 역사가의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가 글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맥락이나 어조도 그렇고, 그가 글에 인용한 벤야민의 문구를 미뤄보아도 그렇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의 천사. "파편에 파편을 쉼없이 쌓아올리며 그 파편을 자기 발 앞에 내던지는 단 하나의 파국을 (본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깨우고 산산이 부서진 것을 한데 모아 맞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닥치더니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강하게 불어대서,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그러는 사이 그의 앞에는 잔해더미가 하늘까지 치솟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러한 폭풍이다.(p.95)"

 

아무리 역사가나 작가가 애써 뒤돌아서 이들을 묘사하려 온 힘을 다한다 해도 그들(과 우리)은 끊임없이 미래로 떠밀려 나간다. 진보라는 폭풍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는 뒤돌아 서서 무엇인가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모두가 앞을 보며 나아가는 사이에 잔해는 점점 하늘까지 치솟으며, 그 잔해를 그대로 둔다면 언젠가는 그 앞 길도 잔해로 뒤덮이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며, 예를 들어 역사가들이 그런 것을 한다고 해도 수많은 역사가들이 숫자만을 기록하느라 또 많은 것을 놓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 짐을 나눠져야 하며, 그것이 가장 처음의 질문, 즉 공중전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 혹은 문학이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제발트의 답이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제발트의 문학에 대한, 혹은 작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공중전의 이후에,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의 이후에도 문학과 작가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자부심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작가는 망각에 대항하는 자이며 그의 글은 망각에 대항하는 무기이다.

 


덧1.
이 책 <공중전과 문학>에는 이 글 '공중전과 문학' 외에도 독일문학의 원로로 추앙받는 작가 알프레트 안더쉬를 비판한 '알프레트 안더쉬'도 실려 있다. 여기에도 문학에 대한 제발트의 어떤 태도가 드러나는데, 그것은 문학은 어떤 작가의 생애를 교정하거나 미화하는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위에서 말한 어떤 문학에 대한 자부심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덧2.
전체적으로 번역된 문장들이 어딘가모르게 삐걱거린다. 상대적으로 뒤에 '옮긴이의 말'은 드물게 볼 정도로 훌륭하게 잘 쓰여져 있는데, 문장이 이런 걸로 봐서는 글을 못 쓰는 분이라기보다는 번역 능력이 떨어지는 분이 아닌가 싶다.

 

덧3.
맥락은 많이 다르지만, 2014년의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자꾸 어떤 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집단적 망각' 혹은 더 나아가 '망각의 강요'가 불러오는 어떤 심상 말이다. 어쩌면 예전 제주나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들만 보아도 이런 기억과 애도가 없는 '집단적 망각'과 망각의 강요, 더 나아가 왜곡과 희화화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계속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망각에 대항하는 우리의 작가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글은 어떠해야 하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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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11-21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하면 ‘아니 그럴 수가 있을까’ 할지도 모르겠는데, 저는 몰랐습니다 영국이 미국 공군 도움을 받아 독일에 그렇게 많은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거, 아는 건 미국에서 일본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생각해보면 피해자를 보여주는 글은 가끔 봤는데, 독일에 있었던 일은 거의 본 적이 없군요 있다 해도 알고 찾아서 봤을지 잘 모르겠지만... 폭탄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썼다 어쩐지 무서운 말이군요 지금도 만들고 있는 무기는 어떻게 될지...

다시 생각하니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본 적 있지만 거기가 정확하게 어딘지 몰랐군요 영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은데... 그곳이 어딘지 나왔을 텐데 제가 제대로 못 봤나봅니다 조금 창피한 이야기군요 대충 어떤 일이 있었다밖에 모릅니다 우리나라에 일어난 일도 그렇고... 다른 것보다 책으로 가끔 그런 것을 보기도 하는군요

일본과는 다르게 독일은 그때 일을 제대로 정리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그게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하네요 잊고 싶어하다니... 개인이 아닌 그 나라 사람이 모두 관계가 있기도 하니, 그렇게 하고 싶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좋은 것은 보이지 않게 묻어버리자, 하는 마음은 누구한테나 있을 거예요 시간도 많이 흘렀는데 아직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하지만 문학은 달라야 할 것 같네요

역사가는 크게 본다면 작가는 그 안에 들어가서 작은 것도 보아야 하겠군요

제가 그런 걸 잘 보는가 생각해보면 그러지 않는 것 같아서 작가한테 많은 걸 바라는 것이 미안하기도... 이런 말을 하다니... 이것은 바라고 싶네요 사실과 다르게 쓰지 않고 좋게만 말하지 않기... 책을 보는 사람은 거기에 나온 것을 모두 확인하지 않기도 하니까요 이건 저만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잘 모르는 것은 찾아보기도 해야 하는데...


희선

맥거핀 2014-11-25 00:29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은 정확히 몰랐습니다. 단지 공습이 있었다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독일인들에게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지 이 책을 읽고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낯선 풍경만은 아닙니다. 우리 역사 속에도 뭐랄까, 아주 철저하게 규명되어야 하는 사건들이 어떤 정치적인 논리에 휩쓸려 빨리 잊어버리자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만 보아도 그렇고요. 세월호는 분명 현재진행형이긴 합니다만, 지금의 분위기는 이제 다 끝났다 그런 분위기에 가깝죠. 사실은 밝혀진 것이나 사건을 둘러싼 문제들은 거의 밝혀진 것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데 말이죠.

그 사건에 대해 작가들이 쓴 `눈먼 자들의 국가`를 구입해서 앞에 조금은 읽었습니다만, 그런 것도 그런 거지만, 그 사건을 우리의 작가들이 자신의 문학 속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도 우리 작가들은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지금 이순간에도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가가 있겠죠. 그렇다고 믿고 싶네요.)

다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에서는 조금은 더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발트의 적절한 방식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또 생각을 더해 봐야겠죠.

아이리시스 2014-12-04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아요. 제가 이 책을 읽긴 했는데 깊이있게는 못 읽었고 이렇게 정리할 만큼 이해도 못하고 피상적으로 읽은 거라 당시 페이퍼 썼는데도 기억이 안 나요. 읽을 때 해당 역사를 좀 살펴야겠다.. 생각했던 정도.. 역시 재기억화에는 리뷰가 짱이죠, 그것도 맥거핀님 리뷰.. 저는 위에 스티븐 킹 소설도 읽었고.. 그렇지만 기억에 없고.. 벽장(?)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만 기억나고..하하..

맥거핀 2014-12-08 12:18   좋아요 0 | URL
저도 아이리시스님 리뷰를 재기억화라던가, 읽을 책 고를 때 많이 활용합니다. 하하. 그냥 요새는요, 저는 리뷰를 저 스스로 기억하려고 쓰는 것 같아요. 책이 너무 좋거나 잊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거나, 혹은 너무 문제가 있어서 반면교사로 삼고 싶거나...이 책은 무엇보다도 문학을 대하는 제발트의 어떤 자세랄까, 그의 문학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같은 것을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자부심도 없으면 책을 쓰기가, 혹은 읽기가 힘든 세상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