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친구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용감한 친구들>의 원제는 '아서&조지'이다. 아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셜록 홈스의 창조자인 아서 코난 도일이고, 조지는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본 인물로, 결국에는 이 사건으로 영국 사법 시스템에 상고법원이 생겨나게 만든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두 인물의 소개에서 대략 짐작할 수 있듯이) 아서가 조지를 도와, 그가 혐의를 벗고 보통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실 이 한줄로 마무리 짓기에는 충분치 않은 점들이 있다. 아서가 단지 선의에 의해 조지를 도왔다고 보기에는, 그 자신에게도 조지의 사건에 뛰어들어야할 어떤 이유가 있었으며, 조지가 그렇다고 그로 인해 완전히 혐의를 벗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그 두 사람이 이 사건으로 인해 어떤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고 말하기에도 그다지 충분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소설의 원제, 그 자체에 더욱 충실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서와 조지. 이 소설은 그 두 사람이라는 인물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초점을 두는 것은 조지가 누명을 쓰게 된 이 사건 자체나, 아서와 조지가 잘못된 판결을 뒤집어내는 쾌감이 아니다. 그보다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것은 아서와 조지라는 이 인물의 모든 것을 천천히 차곡차곡 쌓아내 그려내는 것이다. 단지 분량으로 보았을 때도, 이 중요한 두 인물이 비로소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1권이 끝나고 2권이 시작되는 거의 중반부가 훨씬 넘어간 시점이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삶에서의 큰 사건들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조지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고 풀려났으며, 아서는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아내 투이가 시한부의 삶을 선고받고, 또 훗날 두번째 부인이 된 진을 이미 만나 사랑에 빠진 상태이다. 아마도 그들의 삶에 있어서 이보다 큰 사건들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서와 조지가 만나게 되는 시점에 이미 결말이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아서와 조지가 만나기 시작하는 3장의 제목은 '시작이 있는 결말'이다).

 

이로 인해 가지게 되는 효과는 무엇인가. 적어도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하나의 가정을 제외한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조지가 범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의 가정'이란 작가가 이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전략을 구사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조지에 대해 가감없이 기술하고 있다고 독자를 믿게 하면서, 동시에 범인이 될 수 있는 단서를 의도적으로 숨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비슷한 전략.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이야기는 미스테리를 추적하여,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을 꾀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가정은 제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줄리언 반스의 인도에 따라 그의 인생을 처음부터 봐왔기 때문에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인물이 아님을 안다. 이것은 사건 자체의 증거가 가진 허술함이나 그와 관련된 진술들의 빈약함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단지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이 아니다, 라는 것을 조지라는 인물에 그 동안 차곡차곡 쌓아 놓은 묘사들과 일화들을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아서가 조지를 만났을 때 그가 조지가 무죄라는 것을 '아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다.  

 

"아서 경, 제가...... 간단히 말해서...... 제가 무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서는 분명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조지를 내려다본다. "조지, 전 당신과 관련된 기사를 읽었고, 이제 당신을 만났습니다.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고 생각하거나 믿는 게 아닙니다. 전 당신이 무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조지로서는 아예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스포츠로 다져진 커다란 운동선수의 손을 내민다.  

- 2권 p.30~31

 

물론 이는 독자가 그가 범인이 아님을 아는 것과 유사하지만,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세심한 기술을 읽은 것이 아니라, 기사를 읽고, 단지 그를 '보았을' 뿐이니까. (책에서도 어떤 힌트가 나오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는 셜록 홈스의 추리법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셜록 홈스의 추리법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홈스는 단지 몇 분의 보는 것, 그러니까 주의깊은 관찰로부터도 어떤 이가 범인이고, 범인이 아님을 밝혀내고는 했다. 다시 말해서 아서에게 있어서 보는 것과 아는 것은 비슷한 것이었다. 보게 되면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엇인가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최초의 기억, 그러니까 할머니의 죽음과 그녀의 죽은 몸을 지켜보았던 기억과도 연결이 된다.

 

그러나 사실 이 '보는 것으로 아는 것'은 분명히 어떤 허점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서가 심령학을 믿고, 그것에 큰 관심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에 기술된 아서라는 인물로 짐작해 볼 때) 아서가 그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것에서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것에는 허점이 없을까. 대다수의 사람은 설혹 영매가 죽은 사람과 소통하는 광경을 보아도, 바로 이를 믿는다, 혹은 안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구축된 어떤 다른 믿음들(이성적인 믿음이거나 혹은 종교적인 믿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서는 강한 자기확신으로 보는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이는 그의 단점이자, 동시에 장점이었다. (그러니까 심령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이전의 이성적인 믿음이나 종교적인 믿음이야 말로 '잘못된 선입견'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이야기에는 그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 즉 조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조지와 아서는 거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형적인 잉글랜드인이자 작가로서 명성과 부를 쌓은 인물, 그리고 인도(파르시) 혼혈인으로서 단지 지방의 평범한 사무변호사라는 외적인 면에서 물론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역설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아서는 보는 것을 중시하지만, 그 보는 것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멍은 그가 겪어온 다양한 삶의 경험과 선의에서 우러난 자기확실성이 메워준다. 반면 조지에게는 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가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 보이는 것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음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서와 같은 자기확신이 없었고, 보이는 것을 믿으려면 눈에 보이는 그것은 적어도 그 자체로서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법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가 보기에 적어도 법은 일종의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체계이기 때문이다(물론 그가 그 법에 의해 삶이 망가지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기는 하지만).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보는 것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두 사람의 어떤 좋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보되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않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아서는 보되, 그것에는 선입견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조지는 자신이 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 보는 과정에는 주의가 따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은 그렇지 못했다. 조지에게 부당한 혐의를 덮어 씌우는 켐벨 경위나 앤슨 지서장과 같은 인물은 조지의 외양과 가정환경을 토대로 선입견을 가졌으며, 이는 그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에서는 이런 마무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조지가, 아서가 죽은 후에 그를 불러내려는 심령추도회에 참석하게 되는 이 마무리 말이다. 즉 아서가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조지의 사건을 받아들였다면, 조지에게도 선입견을 가지지 않고 아서가 믿었던 것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무엇을 보는가?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는 무엇을 볼 것인가?' 이 소설은 이 질문으로 끝난다. 이것은 조지가 '보는 것'에 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독자를 향해 던지는 줄리언 반스의 질문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보는가? 혹은 무엇을 보았는가? 혹은 무엇을 볼 것인가? (그러니까 사실은 이 소설 자체가 어떤 다른 전략을 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과연 반스가 범인을 숨기는 전략을 쓰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어쩌면 조지가 범인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적어도 '명확하게는' 이를 밝혀놓지는 않는다...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법의 측면에서 보자면 적어도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는 한, 그는 무죄라고 추정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반스가 만약 전략을 썼다면 그 전략은 '페어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으며, 그가 그러한 전략은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페어함'을 믿으니까. 아..이거 선입견인가.) 

 

 

덧.  

그리고 이 소설은 현재형의 문장에서 과거형의 문장들로 점점 옮아 온다. 1권에서는 거의 현재형의 문장들인데, 이는 2권에 이르러 점점 과거형의 문장,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설에서 읽게되는 익숙한 문장들로 바뀐다. 이는 의도적인 것일까, 아닐까. 만약 의도적이라면 이는 과거형의 문장이 가지는 어떤 무게를 중화시키려는(그러니까 독자가 조지의 결백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려는, 다시 말해서 과거형은 어떤 것이 '확정적 사실'이라는 인식을 주니까) 의도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글쎄....내가 보기에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어떤 명확한 구분이 있지는 않고 과거형과 현재형의 문장이 혼재된 부분도 있으니..(다만 비율로 보자면 2권에 와서 과거형의 문장이 주가 되기는 한다.) 개인적으로는 현재형의 문장들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초반에 진도를 빼는 데 어려움을 겪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혹시 단지 번역상의 문제인가..?

 

 

  


댓글(7)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06-24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을 읽었더라면 신나게 얘기해 볼 거리가 많을텐데 아쉽;_;)

맥거핀 2015-06-25 11:09   좋아요 1 | URL
후에라도 책을 읽게 되신다면, 그 때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저야말로 Agalma님이 쓰시는 글에 읽은 책이 없어서 말을 못걸고 있어요.

양철나무꾼 2015-06-24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장르소설은 좀 멀리 했었는데,
이 리뷰를 보니 의욕이 생기는 걸요, 불끈~!
아참참,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5-06-25 11:10   좋아요 1 | URL
저도 아마도 서평단 안했더라면 보지 않았을 책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괜찮았어요. 더운 여름날에는 머리 아픈 책보다 장르소설이 제격이죠.

2015-06-26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7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30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익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익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바다 밑 조류가   

소곤대며 그의 뼈를 주워올렸다.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다  

곧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갔다.  

- T. S. 엘리엇, 후카세 모토히로 번역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도 하지 않고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   

비 내리지 않는 계절의 도쿄에서,   

노년기에서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네.  

- p.28

 

두 편의 시가 있다. 작가 조코 코기토가 이른바 '익사 소설'을 준비하면서 떠올린 T. S. 엘리엇의 시와 조코 코기토와 그의 어머니가 같이 쓴 시. 이 시들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익사>에서 계속 반복하여 등장하는 일종의 화두와 같은 시다. 이 시들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 엘리엇의 시와 코기토 모자가 쓴 시가 모두 다루는 것은 '익사'이다.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네'라는 시구는 조코의 어머니가 쓴 것인데, 이는 조코의 설명에 따르면 마을에서 통용되는 말로, 강에서 익사한 사람이나 살아났다 해도 한번 홍수에 떠내려갔던 사람들을 강물결이라고 지칭해 왔다. 그러나 연결되는 것은 이뿐만은 아니다. 이 두개의 익사는 모두 특이하다. 엘리엇의 익사자는 '떠오르다간 가라앉으면서 나이와 젊음의 계단들을 오르내리'고 있고, 코기토 모자의 익사자는 '강물결처럼 돌아오지 않'는 상태에서 '노년기부터 유년기까지 거슬러오르며 돌이켜보'고 있다. 즉 이들은 익사한 상태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것은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과거에 있는 것은 익사와 '익사 소설'이다. 조코 코기토의 아버지는 익사했다. 홍수로 강이 불어난 날, 그는 어린 조코와 함께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싣고 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조코를 돌려보내고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여기에는 어떤 미스테리가 있다. 그는 왜 어린 조코를 데리고 '붉은 가죽 트렁크'를 실은 채로 강을 건너려고 한 것일까. '익사 소설'은 그것의 의미를 밝혀내려고 이제 나이든 작가 조코가 쓰려고 하는 소설이며, 이 소설 <익사>는 결국 그 '익사 소설'이 소설이 아닌 다른 기이한 방식으로 완수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보이던 시기, 조코의 아버지는 일단의 군인들과 연루되어 있었고, 그 군인들은 이른바 '궐기', 그러니까 전쟁에 진 천황과 함께 폭사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농담이었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성립시킨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익사이다. 물론 이 간단한 설명은 빈 군데가 많고, 그 '익사'는 여러가지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미망인이 된 조코의 어머니처럼 그것을 겁이나 도망치려다 죽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혹은 ('하나'님의 좋은 리뷰대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로 볼 수도 있으며, 결국 천황과의 폭사를 '다른 방식으로' 실행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다른 방식'이란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이 된다. 하나는 아버지가 읽었던 정치 교재로서의 프레이저가 쓴 <황금가지>와 그 속에 등장하는 '숲의 왕'의 신화. 숲의 오크 나무를 지키는 인간신(人間神)이 늙고 쇠약해져 생명력이 다하면 세계 또한 같이 멸망하기 때문에 그 인간신의 생명력이 쇠약해지는 징후가 보이면 강건한 후계자가 그 전에 그 인간신을 죽여 영혼을 옮겨받아, 세계의 쇠퇴와 파괴를 막는다는 이야기. 이를 어떤 정치적 텍스트로 읽으면, 당시의 군인들과 아버지가 벌이려던 일을 이에 연관지을 수 있다. 즉 전쟁의 패배가 불러오는 국가의 위기, 혹은 세계의 쇠퇴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쇠퇴한 인간신, 즉 전쟁이 패배했음에도 죽지 않은 천황을 죽이고 새로운 후계자를 세워야만 한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하나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연관이 된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서 '선생님'은 친구를 죽게 만든 죄책감을 가지고 자살하며 그 유서를 화자인 '나'라는 청년에게 남긴다. 그러나 이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거기에는 이것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창 더운 여름날,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습니다. 그때 나는 메이지 정신이 천황에서 시작해서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강렬하게 메이지의 영향을 받은 우리가 그 후에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시대에 뒤처지는 것이라는 느낌이 사무치게 나의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솔직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웃으면서 상대하지 않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그럼 순사(殉死)라도 하지 그래요, 하면서 놀렸습니다. (......) 나는 아내를 향해, 만약 내가 순사를 한다면 메이지 정신을 따라 순사할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 나쓰메 소세키 <마음> 중에서, <익사> P.183~184에서 재인용"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죽을 것을 알면서 불어난 강에 배를 띄운 것은 단지 농담에 그친 군인들과는 달리, 일종의 정치적인 시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멸되려고 하는 일본 제국과 같이 순사하는 것이기도 하며, <마음>의 '선생님'과 통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아버지나 '선생님'은 당 시대의 시대정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당 시대의 소멸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새 시대를 이끌 강건한 후계자를 세우기 위한 시도였기도 했다. <마음>의 '선생님'은 청년에게 '기억해주세요.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며, 한편 아버지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다이오의 해석에 따르면 아버지가 코기를 배에 태운 순사 시도는, 단지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후계자로 조코를 세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원령과 빙의자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즉 <마음>의 청년이 원령을 이어받는 빙의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는 것이라면, <익사>의 코기토는, 혹은 결국 익사를 시도하는 다이오는 아버지의 원령을 이어받는(혹은 이어받는 데에 결국 실패하는) 빙의자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더욱 거대한 시대정신과 연관이 되는데, 메이지 시대의 종언과 일본 제국의 소멸이 그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미심쩍음이 남는다. 원령과 빙의자라는 이 기이한 관계는 차치하더라도, 시대를 따라, 혹은 시대정신을 따라 순사한다는 어떤 극우적인 껄끄러움 말이다. 그것은 이런 물음으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이 새로운 빙의자들은, 즉 <마음>의 청년이나, <익사>의 조코 코기토나 다이오는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가? 사실 다이오나 그의 스승, 즉 조코의 아버지는 모순되고 이중적인 인물이다. 조코의 아버지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정치적 텍스트로 읽도록 권유받았지만, 그것의 문학적인 아름다움에도 어쩔 수 없이 이끌리는 인물이었으며, 천황과 같이 폭사하자는 계획에 동참했지만, 그 폭사를 위해서 마을의 오래된 숲을 훼손하는 것에는 격렬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그것은 '다이오'라는 인물도 마찬가지인데, 그 자신이 전쟁에서 한 팔을 잃은 희생자이지만, 극우적인 청년을 기르는 훈련도장을 이끌기도 하며, 또 동시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조코와 아사 등의 무리와도 관계를 맺고 그를 이해하려고 공부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코도 마찬가지인데, 그는 아버지의 익사를 비판적인 눈으로 보며, 그것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군국주의적이고 극우적인 찬가에 눈물을 흘리거나 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폭력적인 언사를 내뱉기도 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시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것을 열망하면서도 바로 그 시대가 가지는 폭력적인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모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오에 겐자부로가 보기에) '전후 일본'이라는 세계의 반영이기도 했다. 전후 일본은 바로 그런 시기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반성한다고 하고, 전쟁 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반성된 것은 없고, 약한 자들에 대한 폭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이는 책의 표현을 따르자면 일종의 붕괴의 지속이다. 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uins'를 조코는 지금까지 '이런 글 조각 하나로 나는 나의 붕괴를 지탱해왔다', 즉 붕괴되지 않도록 글 조각 하나에 의지하여 버텨왔다는 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그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조코는 깨닫는다. 사실 정확한 해석은 지금도 나는 붕괴 위기에 처해있고, 그 '붕괴라는 양상'이 '글 조각 하나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 라고 조코는 생각한다(아마도 그 붕괴를 막기 위해서 거대한 현기증은 그를 엄습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일본의 '현재'이기도 하다. 다가올 붕괴를 막기 위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붕괴되고 있었고, 바로 그 '붕괴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 즉 붕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속되고 있다. 여자들은 강간당했으며(위안부 문제), 그리고 지금도 강간당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이다. 그렇다면 이 현재에는 희망이 없을까.

 

소설 속에는 그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다. 바로 조코의 여동생 아사라든가, 그의 아내 치카시, 그의 딸 마키, 조코의 이 '익사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알게 된 우나이코와 릿짱과 같은 여성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희망처럼 보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연극이다.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죽은 개를 던지다' 방식의 연극은 일방통행적인 연극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을 실제로 연극의 주인공으로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방식의 일종의 토론극이며, 새로운 형식일 뿐더러 더욱 많은 지지를 얻은 쪽이 승리하는 민주적인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와 어떤 특유의 소통방식이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연극, 편지, 독백 등의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시도하며 새로운 방식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간다. 이들의 소통과 공동체 결성은 위의 남자들의 시도와 대비되는데, 예를 들어 원령과 빙의자라는 으스스하고도 폭력적인 시도는 논외로 하더라도, 소설 속에서 이 남성 중심의 관계들은 단절의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코기토는 익사라는 형식을 통해 단절되어 있으며, 코기토와 그의 장애를 가진 아들 아카리는 직접적인 소통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 공동체의 시도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영화 <'메이스케 어머니' 출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유신의 시대, 구체제의 '번'이 아닌, 새로운 국가의 '군'에서 파견된 군대에 대항하여 '메이스케 어머니'와 '환생한 메이스케'가 벌이는 여자와 아이들이 중심이 된 이 봉기(여기에도 다시 이 원령과 빙의자가 등장한다. '메이스케'와 '환생한 메이스케'). 이것은 이 아사, 우나이코, 릿짱, 마키, 치카시 등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여성 공동체의 원형이며, 남성 중심의 부계 사회에 맞선 모계 사회로서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과거와 현재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남성들에 의해 파괴되는데, 과거에서는 '메이스케 어머니'가 과거 '번'의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면, 현재에서는 우나이코가 큰아버지로 대표되는 구세력들에 의해 강간당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이렇게 볼 수 있는데, 남성들은 시대정신이니 시대의 종언이니, 후계자를 세우느니 하며 법석을 떨었지만, 사실은 '번'이 '국가'로 바뀌거나, '쇼와'가 '헤이세이'로 바뀌었을 뿐, 실제로는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과 그들이 만든 국가는 여전히 강간하고 있고, 약자들(물론 이 약자들에 남성이지만 장애를 가진 '아카리'와 같은 인물들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은 여전히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부계사회가 모계사회로 바뀌는 정도는 되어야 새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다시 반복되는 익사를 통해 다이오 혹은 조코의 아버지와 같은 모순적인 중간자적 인물(전쟁에서 패배했고,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그 반성은 행동으로 수행되지 않으며 과거의 향수에 어느 정도 사로잡혀 있는)은 시대에서 퇴장하지만(위에서 말했듯이 작가의 분신인 코기토도 그렇게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에는 결국 오에 겐자부로 자신과, 더욱 철저한 비판이 기반이 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는 동시대인 모두를 향한 일종의 자기반성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내용보다 이 소설 <익사>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여성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시도에 대한 그치지 않는 묘사이며, 그러한 묘사를 표현하는 이 소설의 특유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서사 중심의 소설이 아닌, 일종의 특이한 논픽션 형태로서의 소설 형식이기도 하고(예를 들어 자신의 예전 소설들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작가의 이름을 조코 코기토라고 하는 식의 시도 말이다), 편지글이나 대화글을 어떤 설명 없이 연결짓는 낯선 시도이기도 하며, 소설과 연극, 영화 등의 적극적인 크로스를 그대로 글에 풀어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이 소설은 그 내용을 과거의 형식이 아닌 새로운 형식에 담아냄으로써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보인다.

 

그것이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이 새로운 세대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그것은 우나이코 등이 만들어내는 연극이 중학생과 같이 자라나는 세대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에 계속 반대를 하고, 폭력을 가하는 인물들이 교육에 관계된 인물(예를 들어 우나이코의 큰아버지가 교육 행정에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설정)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소설의 1부의 제목은 '익사 소설'이며, 그 익사 소설은 결국 소설 속에서 쓰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익사 소설'이라는 과거가 결국 다시 쓰여지지 않아야 함을, 그것은 코기토 세대의 종말로 인해 끝나야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여자들이 우위에 서며 가능성이 모색되고(2부의 제목 '여자들이 우위에 서다'), 그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의 문제에 이른다. 그것은 우나이코의 강간이 다시 반복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은 중단될 수 없다. 그들은 과거와는 근본부터 다른 세계를, 붕괴가 지속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시로 돌아간다면 조코의 어머니는 조코에게 물었다. '코기를 산으로 올려보낼 준비'를 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죽음을 대비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코기토가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한 대비, 즉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아카리와 같은 약한 자들도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는가,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가 그런 세계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노작가는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것이 "그러고는 무성하게 우거진 풀숲에 고여 생긴 빗물 웅덩이에 얼굴을 담가, 선 채로 익사할 따름(p. 427)"이어도 말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5-05-26 16: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참 여러 결로 읽을 부분이 많은 소설이다. 이 소설 같은 경우에는 서평단 사람들끼리 책을 다 읽은 후 같이 모여서 여러가지로 이야기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한 잔도 하고...언젠가 알라딘 서평단도 이렇게 독서 이후에 같이 모여서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괜찮지 않을까. 같은 시간에 같은 책을 읽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니..

2015-05-27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03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5-30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무도하가.. 생각나요. <황금가지>, <마음>도 새삼 담아보고.. `익사`가 다른 익사인 줄 알았더니 그 익사가 맞네요. 하긴 익사에 또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닌데.. 그나저나 다음도서는 네 권인가요? 맥거핀님, 책 도착했어요? 갈수록 태산..같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부러움.. `맥거핀님 네 권 읽네.. 리뷰 보면 나도 읽은 것 같아..`

맥거핀 2015-06-03 22:56   좋아요 0 | URL
네..다음 도서 네 권 벌써 왔어요. 아직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쌓아두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이번 달보다 재미(?)는 더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담번에 평가단 같은 거 같이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아이리시스님이랑 몰래 책 헐뜯기도 하고..쓸 거 없으면 서로 리뷰 살짝 베끼기도 하고..그럼 좋을텐데.

맥거핀 2015-06-03 22:58   좋아요 0 | URL
근데 그나저나 잘 지냅니까..저는 요새 알라딘도 잘 안 오고, 북플도 잘 안들어가고 그러고 있네요. 아무래도 슬럼프(?)인가 봅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의 표지가 인상적이다. 아무 무늬도 없는 노란 바탕을 세로로 가로지르고 있는 검은 틈. 그리고 그 검은 틈 사이에서 불길하게 삐져 나온 것처럼 다음의 열 글자가 그 틈새 옆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오래 들여다보면 빨려들어갈 것 같은 검은 틈. 이 틈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의 어둠은 아까보다 부피가 커져 있었다. 틈에서 벌레 떼처럼 기어 나온 어둠은 부분부분이 거의 동일한 명도였는데도 어딘가 주름이 잡힌 느낌을 주면서 원근감을 자아냈다. 어둠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고 가장 깊은 암부에는 소실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지금의 자신이 가장 원하는 자리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미온은 구멍에 손을 넣었다.   

- p.94 <관통貫通> 중에서

 

이 틈새는 관통할 것을 유혹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이라는 것이야말로 그런 관통의 욕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소설을 통해 다른 세계를 엿본다. 소설의 지면에 있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틈은 점점 벌어져, 그 틈새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지금의 이 현실이 어떻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아, 나는 좁은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얼마나 그 틈새를 은밀하게 들여다보았고 들어갈 것을 욕망했던가. 아마도 <관통>의 미온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에는 손을 밀어넣다가, 결국에는 그 틈새로 다리를 밀어넣고, 그 구멍을 통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멍을 통과한 그녀는 날렵해지고 우아해진 몸매와 3분백 내지는 영희백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보스턴백과 태어나 처음보는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천장이 높고 빛이 잘 드는 이층집 화실과 전도유망한 신인작가라를 타이틀을 얻었다. 그것은 '단순명료하며 속물적이고 몰개성적'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가, 그저 좋다. 그런데...구병모는 불안한 후기를 거기에 덧붙인다. 이편의 세계에 아직 놓여져 있는, 사업을 수차례 말아먹고 어딘가로 사라져 잘 연락도 되지 않는 남편과 난장판이 된 원룸, 악을 쓰고 있는 정신질환을 앓는 시누이, 미온이 유명한 화가가 되어 한몫 챙겨다주리라는 가망 없는 꿈을 믿었던 친정이라는 현실을 피해 미온이 끌고 나왔던 재활용쓰레기 장에서 주워온 낡은 유모차와 그 안의 울고 있는 아기, 그리고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이 내린 '무책임한 부모들이 술이나 인터넷 게임에 빠져 아이를 깜빡 잊어버린 부주의 소행 또는 정신 질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아 망실 행위의 일환'이라는 진단. 이것들은 다 무엇인가.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혹시 이것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라는 니체의 유명한 말을 이렇게 비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틈새를 들여다보면 틈새도 우리를 들여다본다. 틈이 생기면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지만, 어찌 그 틈새에 좋은 것만, 그러니까 보스턴백이나 옥색 실크 블라우스와 이층집 화실같은 것만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그래서 어린아이들은 틈만 나면 좁은 틈새로 기어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때마다 부모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질질 끌려나오게 되는 것이다). 현실이 갈라진 틈새에서는 때로 이상한 재난이 몰아닥친다. 예를 들어 영화 <미스트>. 기분나쁜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현실을 감쌌고, 그 안개 사이에서는 무시무시한 '그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괴한 '그것들'은 다른 차원에서 왔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열어서는 안되는 틈을 열었고, 그 틈 사이로 '그것들'은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상한 재난, 초현실적인 재난.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단편들이 그리는 세계들도 이러한 초현실적인 재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파르마코스>의 지독한 가뭄과 입에서 벌레를 내뿜는 여인이 불러오는 물, 혹은 <식우蝕雨>에서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강한 산성의 비, <이물異物>에서 다세대 주택 부엌에 나타난 이름모를 거대한 생물, 아니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서 보여지는 덩굴손 비슷한 무엇인가로 변하는 사람들. 그것들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하고 불길한 거대한 재난의 형태이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무엇인가만 재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이창裏窓>에서의 아이의 죽음이나, <어디까지를 묻다>에서의 카드사 콜센터에서의 일들, 혹은 위의 <관통>에서 미온이 겪는 일들도 일종의 재난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있을까. 그 일들은 보다 현실에 가깝게 발을 딛고는 있지만, 역시 근원을 알 수 없으며,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은 이유를 전혀 모른채로, 어느 틈에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어찌할 줄을 모른채로.

 

그러나 영화 <미스트>가 단지 재난의 양상과 스펙타클을 그려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그래서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의 '안개'를 홀로코스트의 '가스'와도 연결짓는 질문들이 있었다), 구병모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은 그 재난 속에서 어떤 윤리를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윤리적 질문은 때로 노골적이기도 하고(<파르마코스>), 보다 은밀하기도 하며(<식우>), 때로는 관찰자의 시선에서(<덩굴손증후군의 내력>), 때로는 가해자의 시선(<이창>)이거나, 혹은 피해자의 시선(<어디까지를 묻다>)에서 이 재난 속에서 작동하는, 혹은 작동했었어야만 하는 윤리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은 불명확하며, 때로는 질문이 명확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 답을 내리기는 적어도 구병모의 소설들에서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쉬운 길은 이야기 속에서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고, 종종 인물들은 여러 중첩된 질문 속에서 갈 길도 없이 내버려진채 이야기는 갑자기 막을 내린다. 그러니 덩그러니 놓여진 우리들은 복잡한 마음들을 보다 쉬운 형태로 바꿔 하릴 없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물>의 양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쉬운 형태로 바꾼, 질문만 있되,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들을.  

 

방난이 데려온 게 아닌 이상 손대면 깨질 유리처럼 거리를 두어 대해야 할 까닭은 없으므로 긴장이 풀린 양선은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드러난 놈의 눈꺼풀이 꿈틀거리며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평화로운 숙면을 방해하는 자를 확인하려는 듯 양선을 정확히 응시하더니 ─  

- p.210 <이물>의 마지막 문장

 

돌아오지 않는 답. 그것은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구병모 특유의 만연체는 이 소설들과 묘하게 어울리는 면이 있는데,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아무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말하려 애쓰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작품 전체가 긴 독백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창>이나 <파르마코스>, <어디까지를 묻다>와 같은 작품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무엇인가를 최대한 말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이 재난 속에서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혹은 자신이 왜 이 재난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이라는 단문으로 요약된다. 다시 영화 <미스트>로 돌아간다면 기도하는 말많은 자들이 결국 원했던 것은 '그것들'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구를 잡아가는 것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재난들은 어떤 질문들을 하기 위해 마치 만들어진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미스트>의 슈퍼마켓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마치 다양한 인물군상을 몰아넣고 만든 인위적인 실험실처럼 보였던 것처럼, 구병모 소설의 재난들은 제한적인 기이한 형태로 몰아닥친다. <이물>의 생물은 거기 그 좁은 부엌에 그냥 웅크리고 있을 뿐이며, <식우>의 강산성비는 그 도시에서만 내리는 것처럼 보이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이나 <파르마코스>의 기이한 현상들도 한 도시 혹은 한 마을에서만 일어나는 제한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이 좁은 도시 혹은 마을에 가해지는 일종의 징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일방통행의 좁은 세상, 단지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원하는 세상에 내리는 (결국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징벌. 

 

그러나 무엇인가 자신의 입장을 열심히 얘기하려 하는 이들을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재난이 가장 먼저 집어삼키는 것은 늘 그랬듯이 가장 약한 자들이고(예를 들어 <식우>의 강한 산성 비가 먼저 부식시키는 것은 결국 약하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약하고 궁지에 몰린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어필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 반대로 강한 자들은 결코 무엇인가를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늘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많이 한단 말인가). 소설이라는 것의 가능성도 어쩌면 그런 것은 아닐까.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애쓰는 이들의 것이고, 아무 이야기도 내뱉지 않는 것보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만 어딘가에 가닿을 가능성이라도 생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의 U가 무심결에 덩굴손 줄기들에 손을 뻗어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자 애쓰는 것이며, <어디까지를 묻다>의 카드사 상담원이 예전 성우였던 택시기사를 알아보고 그에게 예전의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대사를 들려달라 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물>의 양선이 무심코 놈의 털을 쓸어 넘기고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물은 결국 양선 자신이거나 혹은 방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이 재난 속에서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을 말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약한 자들. 그것은 U와 덩굴손들, 그리고 카드사 상담원과 택시기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약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알아보는 수밖에 없으며, 닿지 않는다 생각해도 어떻게든 얘기를 하려고 애써 보는 수밖에 없다. 가득한 재난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5-24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5-05-26 16:29   좋아요 0 | URL
아마도 `그것`을 무엇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말씀하신대로 `나만을`의 뜻은 이중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저는 처음 이 소설 제목과 표지를 봤을 때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어요. (노란색으로 표지를 한 것은 그런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저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솔직히 말해서 한편으로는 `내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 소설의 어떤 사건들은 분명히 그 사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사건은 다르지만 그것의 어떤 작동양상을 보면요.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제 생각에는) 결국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를 말할 수밖에 없는 약한 자들의 목소리라고 봅니다. 현실에서는 그것이 단지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것으로밖에 나타나고 있지 못하지만요. 세월호 유족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바로 그들도 사실은 약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그들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다구니를 퍼붓는 거겠지요.) 어쩌면 약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잡아먹는 세계, 그러니까 <킹스맨>이라든가 <설국열차>의 세계가 이미 공고히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15-05-26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30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55세부터 헬로라이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55세부터 헬로라이프 스토리콜렉터 29
무라카미 류 지음, 윤성원 옮김 / 북로드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 이야기의 인물들은 무엇인가를 마신다. 혹은 마시려고 애쓴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홍차를,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맛있는 물을, '캠핑카'의 토미히로 타로는 커피를,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는 보이차를,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는 햇차를 마신다. 왜 이들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일까.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할 때 먼저 마실 것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이 진정될 것이다. 그것은 의식 같은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전에서 자살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얼마나 힘든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저 사람은 뭔가 좋아하는 음료를 천천히 마시면 마음이 진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결혼상담소' p.58

     

"왜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패닉이랄까, 너무 슬프거나 괴로워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진 사람에게 심호흡을 하라고 하면서 물을 마시게 하잖아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차를 즐길 여유가 없지요. 저는 그래서 차라든지 음료는 단순히 수분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천천히 차를 마시면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 '펫로스' p.247~248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다. 왜 어렵고 힘든가. 예를 들어 그것을 일본 경제와 맞물려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인 소설 속 인물들이 한창 활동하던 예전의 일본은 버블 경제의 시대였다. 호황이 이어졌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버블은 꺼졌고, 이제 그 시절은 끝났다. '여행 도우미'의 시모후사 겐이치의 말을 빌리자면, "버블 붕괴 이후밖에 모르는 세대는 이처럼 혹독한 노동 환경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고도성장과 버블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일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목에도 있는) 55세라는 나이는 그런 시기인지도 모른다. 직장과 사회에서는 이제 물러나야하지만, 자식들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고, 수입은 없지만 여기저기 돈 들어갈 일만 많이 남은 시기.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 뿐만이 아니다. 가족 간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배우자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보이며, 자식들과의 대화는 점점 어려워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 두렵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애매한 시기, 무엇인가를 이뤄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제 무대 뒤편으로 물러날 것을 요청받는 시기. 그러나 무대 뒤 불꺼진 대기실에서의 삶은 아직도 너무나도 길게 남아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압박과 세대 일반으로서의 중압감은 이들에게 두 가지 이상(異常) 증세로 나타난다. 먼저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이상에 대한 묘사.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에서 나타나는 만성적인 허리 통증, '캠핑카'의 토미히로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적인 불안증과 우울증, 혹은 '펫로스'의 다카마키 요시코의 급격한 현실감 상실. 이 이상 증세들은 현실의 문제들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인들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며, 해결책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다른 하나의 이상 증세는 일종의 분노이다. 주인공들은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혼상담소'의 나카고메 시즈코는 남편의 말투는 물론 숨소리까지 불쾌하게 여기고,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는 자신도 모르게 길을 막고 있던 노숙자에게 호통을 치며, '캠핑카'의 토미히로는 인재 파견 회사의 콧수염을 기른 젊은 직원에게 알 수 없는 적의를 느낀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러한 분노는 사실 그렇게 명확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을, 감정을 쉽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과 연결지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닌 이제 무대에서 퇴장할 것을 요청하는 사회 일반에 대한 분노에 더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삶을 꾸려가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분노를 포함한 모든 감정을 다루는 법을 인물들이 점점 잊어버리게 된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분노는 격정적이고 뜨겁게 타오르는 분노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마른 분노에 가깝다. 말라버린 감정의 끝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알 수 없는 적의.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든 마르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의 하나로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마른 것은 불타기 쉬우며, 불은 상대방을 태우기도 하지만, 그전에 결국 본인을 태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안하다는 것은 한편으로 소멸에 대한 불안감이기도 하다. 아무 것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삶을 충분히 즐기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불타 소멸해버리고 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기에는 배어있지 않을까.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결국 무엇인가를 마신다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있어서 어떻게든 삶을 연장시키겠다는 의지이다. 예를 들어 '펫로스'에서 다카마키 요시코가 기르는 늙은 개 보비가 심장 이상 증세로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먹이를 먹고, 물에 적신 스폰지에서 물을 빨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은 삶의 의지라는 것의 의미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다카마키 요시코와 그녀의 남편은 그것으로 예상치 못한 위안을 받는다. 어떻게든 살고자 애쓰는 그 존재로서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말이다. 혹은 '하늘을 나는 꿈을 다시 한 번'의 인도 시게오가 죽어가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아주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분투하는 후쿠다를 보고 결국 얻게되는 정신적인 도움 말이다. 55세는 그대로 소멸하기에는 너무도 이른 나이니 말이다. 그들 앞에는 아직도 긴 삶이 남아있다. 그것이 고통으로 남을지, 혹은 감사함으로 남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어떤 가능성으로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었다. 내 기억에는 2000년에 처음 출간된 <공생충> 이후로 처음 읽는 것 같다. 다시 그의 책을 잡게 된 것은 오랜만이지만, 1990년대 말 책 좀 읽는다,하는 대학생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나도 류의 소설들은 나름 꽤 읽었다. 글쎄. 무엇이 그의 소설을 읽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가 유려한 문장을 쓴다거나, 혹은 어떤 삶의 진실이나 통찰을 전달해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누구나의 이야기이다. 책의 후기를 보면 아마도 그것이 류의 의도였던 것 같다.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그리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보통 이웃들, 혹은 현재와 미래의 나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들은 통속적이다. 사실 '통속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흔히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있는데, 예를 들어 소위 막장드라마들이 통속적이라고 말해질 때의 어떤 이질감말이다. 왜냐하면 그 막장드라마의 세계들은 사실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우리가 가까이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세계는 통속적이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러나 이 류의 이야기들은 현실에 아주 가깝게 발을 붙이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주 통속적이다. 이것은 류의 어떤 변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예전의 그의 이야기들은 특정의 세계, 특정의 문화, 특정의 인물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아주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정한 통속적인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 역시 마음을 예상치 못하게 건드릴 때가 많다. 그러니까, 통속적인 이야기를 볼 때의 민망함을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한다. 아이씨,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울고 있지.

 

아니 통속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관심을 두지 않은 때에도 사실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있었으니까. 책 날개의 지은이 약력을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다. 무라카미 류. 1952년 일본 나가사키 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이렇게 나이들었었단 말인가.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다시 그 나이를 보면서 생각한다. 1952년생 작가가 쓴 55살 나이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나이의 어떤 것을 지금의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 리뷰의 끝은 이렇게 맺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르겠다. 정말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55세가 되었을 때 이 책을 다시 읽고 리뷰를 다시 쓸게요. 물론 당신이 다시 읽지는 않겠지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5-04-2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사람이 예전보다 오래 살아서 쉰다섯이라고 하면 많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적지 않군요 그때가 되어도 마음은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지만... 어쩐지 지금보다 더 우울할 것 같기도 합니다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다니...

맥거핀 님이 쉰다섯이 되면 이 책 다시 보실 건가요 쓰기도 하겠다니 그때는 어떻게 쓸지... 여기 나온 사람들과 같은 나이가 되면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할까요(그 나이가 아니어도 언젠가 찾아오겠다 하겠군요) 그러고 보니 제가 읽은 책에 나온 사람도 쉰다섯에서 쉰여섯이 됐습니다 그 사람은,

“쉰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나이를 확 먹은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지만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오십 줄에도 완전히 익숙해졌고, 환갑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아직 그렇게 늙은 건 아니다, 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제가 본 책에 나온 사람과 여기 나온 사람은 나이만 같고 처지는 다르군요

나이를 먹는다고 해도 서글프지 않으면 좋을 텐데, 벌써 서글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음은 자라지 않고 나이만 먹는 것 같아서 말이죠 앞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이런 생각 자주 하지 않고 아주 가끔 합니다 사람은 본래 안 좋은 것보다 좀더 나은 것을 생각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것도 살려는 뜻일지도 모르죠

기분 안 좋을 때 차를 한번 마셔봐야겠군요 마음이 가라앉는지 보게... 그런 걸 느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예전에 ‘아침에 아버지가 내려준 커피를 마셨다면 그날 안 좋은 일이 없었을 거다’ 하는 말을 들은 적 있군요 무슨 일이 있는 사람한테도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고 했네요 그건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라는 뜻이기도 하겠죠


희선

맥거핀 2015-04-29 15:11   좋아요 0 | URL
사람이 과거의 나나 미래의 내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니까 지금 쉰다섯의 감정을 미리 느끼거나, 혹은 쉰다섯이 되었을 때, 이십대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저는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지금 제가 나의 쉰다섯일 때는 이럴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것은 있겠지만, 막상 그 때가 되면 그렇게 상상하는 것과는 아마 많은 부분에서 다른 사람이겠지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쉰다섯살 때, 내 나이 이십대때에 느꼈던 어떤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지금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쉰다섯살 때라니요. 아무튼 그래서 분명히 쉰다섯 살 때 혹여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느낌이 지금과는 아주 다르겠지요. 그런 경우들 많이 있잖아요. 예전에 분명히 보았거나, 읽은 이야기인데, 지금와서 다시 보았더니 매우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한 두번이 아니죠. 지금보다 더 풍부하게 느낄지, 더 빈곤하게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르겠지요.

나이를 먹는게 서글프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소리겠지만, 서글픔도 어쩌면 나름 중요한 감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그 서글픔마저도 망각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날이 온다고 생각하는 그런 멜랑꼴리함이 나중에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확신할 수가 없군요.

네..저도 책을 읽고나서 기분이 안좋을 때 무엇인가를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음이 그럴 때 좀 안정이 되려나요. 이왕이면 차가운 것보다는 천천히 마실 수 있는 뜨거운 것이 좋겠죠.

아이리시스 2015-04-2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아님.

아놔 맥거핀님, 평가단도서 말고 다른 리뷰도 좀 써달란말입니다 부대에 읽을거리가 없단말입니다 심심해요;;

맥거핀 2015-04-29 15:13   좋아요 0 | URL
평가단도서 리뷰도 겨우 쓰고 있어요. 허허허. 아이리시스아님님, 아이리시스님한테 읽을 거리 많은 거 알고 있으니 열심히 읽으시라고 전해주세요.^^
 
[우리동네 아이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여러 해설이나 리뷰에서 이야기하는대로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굳이 애를 써서 보려고 하지 않아도, 약간의 종교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즉 자발라위, 아드함과 이드리스, 까드리와 후맘, 자발, 리파아, 까심 등이 누구를 의미하고 있는지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서 자발라위는 하느님을, 아드함과 이드리스는 아담과 사탄을, 까드리와 후맘은 카인과 아벨을, 자발은 모세를, 리파아는 예수를, 까심은 무함마드를 의미하며, 이 소설은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행적을 묘사함으로써,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각 기본바탕에 내재해 있는 것들을 알레고리 기법을 통해 각각의 이야기로서 들려준다. 그러므로 사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각 종교에 내재해 있는 어떤 물음들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우리 동네 이야기> 속 이야기대로라면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이다. 자발라위는 왜 얼자 아드함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장자 이드리스를 내쳤는가(하느님은 왜 악을 탄생시켰는가). 자발라위는 왜 형 까드리가 아니라 동생 후맘에게 나타났고, 후맘이 까드리에게 죽도록 내버려두었는가(우리는 왜 살인자 카인의 후예가 되었는가). 자발라위는 왜 리파아를 구원해주지 않았는가(왜 하느님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도록 구해주지 않았는가)...등등의 물음들. 물론 이 중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은 책에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반복되는 질문이자, 종교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왜 자발라위는 대저택에 은거하고만 있는가, 왜 그는 직접 나서서 재산이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도록 하지 않는가, 왜 그는 모든 사람이 핍박받고 고통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 다시 말해서 신이 있다면, 왜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직접 나서서 구원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누구든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물음. 

 

물론 이 물음은 세상의 누구라도 쉽게 답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 알레고리를 그려내는 작가 마흐푸즈도 마찬가지다. 대신 마흐푸즈는 하나의 이야기를 이 알레고리에 덧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라파의 이야기이다. 책의 마지막에 붙은 아라파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유일하게 어떤 종교적인 알레고리를 벗어나는 부분으로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직접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었을 것이다(그래서 사실 그전 까심의 이야기까지는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 부분부터는 이야기가 약간 활력을 되찾는 것처럼 보인다). 동네에 나타난 마법사 아라파가 자발라위의 비밀을 밝히려다 자발라위를 죽게 만들고(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하인을 실수로 죽여 그 충격으로 자발라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설정이다. 즉 자발라위는 처음 아드함과 이드리스의 이야기에서는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만, 그 이후에는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자발이나 리파아가 자발라위를 만나는 장면도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발이나 리파아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로서 전해질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설정을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라파가 자발라위를 결과적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이런 물음을 여기에서 덧씌울 수는 있다. 자발라위가 죽은 것인가, 자발라위가 죽었다고 믿는 것인가), 폭력을 휘두르던 수장들을 제거하지만, 그가 결국 폭력과 억압의 중심에 있던 관재인과 한패가 되고, 그런 자신에 환멸을 느끼고 도망치려다 죽게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물론 해설에서 이야기하는 바대로, 마법사 아라파를 '과학(이라는 이름의 이성)'이라는 것에 대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라파가 마법사라는 상징은 물론이거니와(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 아서 클라크), 예를 들어 그가 '본의 아니게' 자발라위를 죽게 만든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즉 오랫동안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이 자발이나 리파아나 까심의 이야기, 즉 종교라면, 그 이후 새롭게 등장한 것이 마법사 아라파, 즉 과학이며, 과학은 '본의 아니게' 종교가 가졌던 신비를 상당부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었다. 또 그와 동시에 마법사 아라파가 마법의 병을 통해 수장들을 제거한 것처럼, 과학은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날 어떤 가능성을 또한 제공해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물론 흥미로운 것은 마흐푸즈가 이런 마법사 아라파를 결코 긍정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위에 얘기한 대로 마법사 아라파는 모든 이를 억압하는 관재인 까드리의 시녀가 되었으며, 과학은 또한 동시에 거대한 억압과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세계를 휩쓴 두 차례의 전쟁이 그렇게 거대해진 것이 결코 과학기술의 발달과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을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이 약하게 만들었던 종교와 연관지어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아라파도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어 있어요. 불로 죽든 물로 죽든 마귀에 의해 죽든 몽둥이에 맞아 죽든 말이죠."- 2권 p.214 "우리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은 이들의 자식입니다." -2권 p.332). 그리고 관재인은 자발라위가 죽고 동네가 그의 것이 되었는데도,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즉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관재인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발라위가 죽고난 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종교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이는 종교의 역할을 마흐푸즈가 결코 완전히 부정하지도, 부정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아라파가 죽음의 과정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아라파의 파멸은 결국 그의 오만, 즉 자발라위가 그를 죽게 만든 아라파를 흡족해하면서 죽었다는 착각, 혹은 죽은 자발라위를 다시 살려낼 수도 있다는 맹신에서 시작되었으며, 아라파는 결국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내게는 이 결말이 마흐푸즈가 찾은 어떤 적절한 균형점처럼 보인다. 과학과 종교의 어떤 균형점 말이다. 반복되는 리벡 연주에 맞춘 자발과 리파아와 까심의 이야기가 핍박받고 억압받는 동네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아라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예를 들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자발라위는 죽었다고 믿어졌지만, 사실은 완전히 죽일 수도, 혹은 죽을 수도 없으며(아라파는 그를 죽일 의도가 없었으며, 그를 끝끝내 어떤 형태로든 되살리려 애썼다), 아라파는 산채로 매장당했다(아라파의 죽음은 모호하게 처리되는데, 이 묘사는 그를 결국 죽일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서 종교든 과학이든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그것은 모든 이를 완전하게 구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나를 흥미롭게 만들었던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앞에서 이야기한 자발라위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과 같은 종교적 선지지가 아닌 평범한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이다. 작품 내내 이 '우리 동네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긍정적이지 않다. 일부 현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탐욕적이고, 서로를 시기하고, 남자들은 싸움을 즐겨하며, 아이들과 여자들은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약한 자를 짓밟으며, 강한 자에게 금새 아첨한다. 그들은 핍박받고 억압받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방법도 모른채, 매일 해시시 담배를 물은 채로 반복되는 리벡 연주를 들으며, 선지자의 이야기, 그러나 현재는 그저 한낱 종교적인 신화가 되버린 그 이야기만을 들을 뿐이며, 미망에 빠져 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반복되는 폭력을 불러온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한 가지 다행스러운 구원의 가능성은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하지만 사람들은 이야기꾼의 거짓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경멸스러운 내색을 보였다" -2권, p.357). 그리고 아라파의 마법의 노트를 가진 하나슈는 해방의 날에 대비해 청년들에게 마법을 전수한다.

 

이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 그것은 종교를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과학을 맹신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마법을 전수받는다는 것은 마법을 부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제어할 능력도 배우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숭배하지 않는 것이며, 아라파를 자발이나 리파아, 까심의 위치에 올려놓지 않는 것이다. 마흐푸즈는 가능성과 불안을 동시에 열어놓는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불안인가, 희망인가. 구원의 가능성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자발라위의 살해범이라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설사 그가 자발라위를 죽였어도 동네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를 추앙했고 드디어 각 구역마다 그를 자신들의 구역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중략)  

동네는 다시 폭력 행위가 난무하고 증오와 공포가 팽배한 험악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내하고 끈질기게 학대와 억압을 견디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밤이 지나면 낮이 되듯 불의는 반드시 사라져.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압제가 멸하고 기적과도 같은 날이 훤히 밝아 오는 것을 분명 보게 될 거야."

 

- 2권, p.358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5-04-2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로도 어렵군요. 그렇게 느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D

오랜만에 궁금.
점심 메뉴를 말해줘요 :)

맥거핀 2015-04-25 15:33   좋아요 0 | URL
이야기가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닌데, 그렇게 느껴졌다면 제가 리뷰를 못 써서 그렇죠 뭐.^^

오늘은 낮에 비빔국수를 먹었습니다. 사먹은 게 아니고 제가 만들어서 먹었어요.^^

아이리시스 2015-04-25 15:35   좋아요 0 | URL
오..간단한데 의외로 귀찮은 국수.. 종교가 등장하면 난해해서 그렇죠. 리뷰탓은아닌게아니지아닙니다ㅎㅎ 맛있겠다 비빔;;

맥거핀 2015-04-25 15:40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간단하게...면 삶은 다음에 대충 있는 거 잘라서 넣고 오뚜기 비빔양념장을 넣습니다.-_-

아이리시스 2015-04-25 15:47   좋아요 0 | URL
오뚜기비빔양념장 아... 요즘 엄마 안계시니, 생전 부엌일 잘 안해봤는데 예전엔 안사던 온갖걸 다 사서 먹어봅니다.. 맥시멈 1주면 이제 엄마밥 먹을수있어요~!

맥거핀 2015-04-25 15:51   좋아요 0 | URL
밥 중에는 엄마밥이 제일이죠. 그래도 곧 퇴원하신다니 다행입니다. 퇴원하면 얻어먹지만 말고 아이리시스님이 맛있는 것도 해드려요,^^(물론 잘 하시겠지만.)

희선 2015-04-2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믿는 대로 된다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와 같을까요 이건 종교는 아니고 사람은 어떻게 되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기도 하잖아요 그랬을 때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건 이루어지지 않죠

세 가지 종교가 나오고, 과학도 나오는군요 세 가지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고 그냥 종교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죠 종교와 과학으로... 두 가지 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은 주지만, 그것만 믿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얼마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봤는데... 거기에서는 하늘이 정말 있느냐, 있는데 왜 힘든 사람을 도와주지 않느냐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신이 사람을 도우면 잘못할 수 있다는 말을 하더군요 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사람은 잘못을 하죠 신이 사람을 도우면 더는 신이 아닐지도 모르죠 결국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건 사람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거겠죠

저는 이 소설 보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를 것 같네요


희선

맥거핀 2015-04-25 15:46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모든 것이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는, 모든 것이 종교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든 그것의 한계를 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어떤 구조나 시스템의 한계로 돌리는 것도 위험하지만, 인간의 의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위험하겠지요.

저는 작가가 마지막에 나름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봤어요. 물론 그런 태도가 한편으로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졌겠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종교에 대해서 비판적이다,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에게는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신을 믿는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저도 잘 모르는 얘기를 하고 있군요.)

2015-04-23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25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25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