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강탈자 - 당신의 심장은 나의 것
딘 R. 쿤츠 지음, 김진석 옮김 / 제우미디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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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스릴러 혹은 추리물적인 성격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읽어보면 이러한 성격 규정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실 일종의 스릴러나 추리물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원하는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않을 것 같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 강도는 낮으며, 어떤 명확한 적이나, 혹은 보이지 않는 적들이 주인공을 뒤쫓는 것도 아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주인공 라이언 페리는 몇 번의 이상스런 심장발작을 겪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어떤 그를 도사린 음모나, 보이지 않는 적들이 존재한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가 여러모로 미약하다. 대신 소설은 주인공 라이언 페리의 심리묘사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조밀한 심리묘사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그 힘을 발휘한다.

사실 결국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약간은 맥이 빠지는 부분이 있다. 그 결말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맥빠짐은 적어도 우리가 그 결말에만 주목할 때만 그렇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그가 나중에 겪게 되는 일들은 부수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가 후에 겪게 될 여러 일들이 단지 그가 모르는 어떤 일들(혹은 그가 어쩌면 예상했음에도 애써 모르는 척 했던 어떠한 일들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제외하기로 하자)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 그러한 결말은 상당히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상당한 부분에서 우스꽝스럽게 보이기조차도 하다.

아마도 그에 대한 해답은 소설 중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되는 이 말 “폭력의 가장 근원적인 원뿌리(‘근원적인 원뿌리’? 이상한 번역이다)는 진실에 대한 증오다.” 속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나중에 당해야 했던 일들, 그리고 그가 행한 죄악들이 이 말 안에 있을 것이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 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 합리적으로(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공정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적어도 돈의 힘은 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을 또 적절히 이용할 줄 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주위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다. 여자친구인 사만다를 매우 사랑하면서도, 자신에게 계속 심장발작이 일어나고, 점점 자신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자, 그녀를 의심하고, 그녀의 어머니나 주위 사람을 의심한다. 그리고 집안일을 해주는 싱 부부도 철저히 뒷조사를 하고 채용했음에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래서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스꽝스러워지지 않으려면, 주인공 라이언 페리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을 때에만 이 마지막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도달해서야, 즉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서야 진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진실을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그는 또다른 변명으로 또다른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 진실의 일부란, 이런 것이다. 그가 쌓아온 부가, 그가 사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가 살아나가는 세상에 그 자신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가 결국 보아야 하는 진실은 그가 구축한 세상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 어쩌면 그가 진실을 깨닫고 살아나가는 그 후의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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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사실 이야기의 중간에 약간 모호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간호사 이스메이 클렘을 둘러싼 이야기들이라든가, 사람들의 자살(혹은 안락사)을 도우며, 그 사체를 수집하는 스티브 바게스트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부분을 둘러싼 어떤 상징성들은 강하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 이야기인가를 생각해보면, 약간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것에 대한 어떤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작가의 철학적인 사유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자극적인 도구로만 이러한 이야기들을 억지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판단은 딘 쿤츠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본 후에 행해야 할 듯하다. 책 소개에 보면, 오컬트적인 요소를 잘 사용하는 작가이나,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상당 부분 배제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난 소설들이 어떤 이야기들인지 궁금해진다. 구미권에서는 스티븐 킹과 비슷한 명성을 지닌 작가라고 하는데, 이것이 출판사의 어떤 선전문구에 불과한지, 아니면 스티븐 킹이 지닌, 어떤 불가해한 일들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서 어떤 철학적인 상징성을 끌어내는 능력을, 이 작가도 갖추고 있는지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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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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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시작머리에서 김연수는 말한다.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질문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을 할 권리’. 과연 여기가 어떠하길래, 우리는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말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여행기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눠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른바, 정보 전달 유형. 세계 각국의 신기한 풍물과 다양한 공간들, 음식들, 음악들, 그림들을 소개하며, 그곳에 다다르는 방법들과 즐기는 방법들을 가이드가 된 심정으로 자세하게 소개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자기 과시 유형. 이런 유형의 저자들은 대체로, 꽤나 방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외우기가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음식을, 그보다도 더 긴 이름을 가진 와인을 곁들여 먹고는 그것을 자랑스레 사진을 찍어 실어 놓는다. 마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을 찍어서 올려놓고는 밑에 짤막한 감상을 단 많은 미니홈피들이 그러하듯이, 그 커다란 사진 밑에는 아주 짤막한 감성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게 매끄러운 감상이 달려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이 김연수의 책 <여행할 권리>와 같은 유형이다. 여행기를 가장한, 사실은 여행기가 아닌 유형. 이런 여행기에서는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누구를 만났는가, 혹은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만나지 못했는가가 훨씬 중요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여행기에는 글 전체를 꿰뚫는 맥락, 또는 스토리가 있다. 그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와 얽혀진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다음의 여행지의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 그 마지막에는 그 여행기를 쓴 저자 자신이 있다.


이 책에 실린 11곳의 여행기, 아니 정확히 말해서 11가지의 이야기를 꿰뚫는 키워드는 ‘월경’, 즉 국경을 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 넘지 못하더라도 국경 근처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국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인 ‘국경’ - 총을 든 군인이 지키는, 혹은 철조망이 세워져 있는 - 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국경, 또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암묵적인 국경. 따라서 이 국경이라는 말을 ‘한계’라는 말로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개인들이 가지는 한계란, 어떻게 만들어져서 각 개인들을 어떻게 억압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공유되고, 어떻게 넘어서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국경을 넘는다는 것, 즉 한계를 넘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 실린 몇몇 여행기에서 살펴본다면, 조선족 이춘대 씨에게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향한다는 것은 그에게 깐두부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 풍요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아버지가 해방 후 일본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리얼리티를 버리고 막연한 이상을 찾는 것이었다. 일본어로 소설을 써 아꾸따까와 상 후보가 되었던 조선인 작가 김사량이 1945년 중국 태항산 조선의용군 근거지로 탈출하는 것은 미래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 이상(李箱)이 현해탄을 건너 토오꾜오로 가는 것, 즉 국경 근처까지 가는 것은(아직 해방되기 전이었으므로), 경계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 혹은 경계 바깥의 세상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말을 빌자면, ‘어두운 방, 오들오들 떨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일’.

이상(李箱)의 죽기 직전 몇 달 간의 행적을 좇는 마지막 여행기를 제외하자면, 김연수는 여행을 간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 사만부가 채 안 팔리는 소심한 작가 김연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꽤나 긴장하지만, 결국 그가 마지막에 얻는 깨달음은 하나인 것 같다. 그 사람들이라고 별 것 없다는 것.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는 것. 참 별 것도 아닌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인 것은 이는 우리가 국경을 넘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혹은 국경 근처에 가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만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 혹은 이상과 김수영과 같이 ‘국경을 넘어보지 못한 몸으로 월경’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 그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아마도 김연수가 명쾌하게 지적한 바대로 최소한의 나를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김연수의 ‘공항의 우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중략)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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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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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세계사, 음악사, 미술사, 문학사...대부분의 사람들이 ‘-사(史)’로 끝나는 책에 가지는 공통적인 선입견이 있다. 책에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이 나올 것이며, 그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과 년도들은 종국에는 우리를 매우 지치게 만들 것이라는 점. 하기는 이것은 그간 우리나라의 수많은 교육에서 행해온 방식이기도 하다. 역사 그 자체를 다루는 국사와 세계사 시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어라는 과목도 따지고 보면 결국 하나의 문학사를 배우는 과정이며, 물리나 수학 등도 그간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이 구축해 놓은 거대한 그 나름의 역사들을 배우는 과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무튼 간에 우리는 1492년과 1592년 중 어느 것이 임진왜란이고, 어느 것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인지 고등학교 이후로 내내 헷갈려하며, 여전히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서양미술사 I>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로 겁이 더럭 났다. 이 책에는 또 얼마나 많은 년도들과 작가들과 작품들이 출현하여 머리를 아프게 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지 진중권의 ‘말빨’ 때문이었다. 그가 여러 지면이나 방송에서 보여주는 현란한 말솜씨를 또 여기서는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그는 복잡하고 고루한 이야기들을 또 어떤 방법을 써서 가공하여 들려 줄 것인가. 그리고 그런 나의 기대는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이 책은 각 장을 시대 별로 분류하면서도 교묘하게 시대별 분류가 낳을 수 있는 지루함을 피해간다. 즉 언뜻 보면, 1장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미술을 다루고, 2장은 중세의 예술을 다루는 식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표면상의 시대구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이 책에서 각 장을 구별하는 것은 미술의 근원적인 요소이다. 즉 미술의 근본 요소인 ‘형태’를 1장에서 다루고, 또 다른 근본 요소인 ‘색채’를 2장에서 다루고, 다른 요소인 ‘공간에 대한 투시법’을 3장에서 5장까지 다루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서술이 시대 구분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진중권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미술의 각각 원리들의 발전이 곧 서양미술의 발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형태를 구상하고 그것의 색을 생각하고, 그 형태를 공간에 배치하듯이, 서양 미술은 인체의 적절한 비례 묘사를 중시했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미술에서부터, 초감각적 빛(색채)을 중시했던 중세의 예술, 그리고 자연과 공간의 재현을 중시했던 르네상스의 예술로 발전해나가는 식이었고, 결국 이 자체가 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단순한 시대구분을 놓고 서술하는 방식을 벗어남으로써 역사 서술에서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지루함의 함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각 장을 형태, 색채, 공간, 양식의 변화, 비평 등 하나의 소주제들로 통일성 있게 이끌어갈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동시에 위에서 말했듯이 ‘서양미술사’라는 큰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구성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를 의도적으로 각 장을 하나의 중요한 미술사의 문헌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도 있다. 즉 1장에서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논문을 토대로, 각 시대와 문화가 인체의 묘사에 각각 어떤 비례를 사용했는지를 고찰한다면, 2장에서는 로사리오 아순토의 저서를 토대로 미와 예술에 대한 중세인의 생각을 살펴본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은 12장으로 이루어진 서양미술사임과 동시에 12권의 논문(저서)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공시성과 통시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다 보면 이러한 구성이 갖는 단점이 생길 수 있다. 12개의 주제를 12권의 논문을 통해서 살펴보다 보니 책이 어려워지고 방대해지기가 쉬운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각 외로 상당히 쉽다. 미술에 대한 문외한인 나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가 유명한지 처음 알았다;) 쉽게 술술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다. 아마도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효과를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는 각각의 내용을 실제의 작품을 놓고 설명하듯이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자 ○○○의 이 작품을 보자”는 식의 문장이 매우 많이 나온다. 용어나 설명이 어려워도 대부분 그림을 보다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또 하나는 문장력이다. 진중권 씨의 인터뷰 기사 등을 자주 보는데, 그 때마다 내용 자체를 떠나서 비유를 써서 설명하는 능력이나, 주어와 서술어의 일치, 조리 있게 문장을 끊어서 말하는 능력 등에 감탄할 때가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화술’이 ‘문장력’으로 어느 정도 살아나는 느낌이다. (아무리 쉬운 내용도 문장이 엉망이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와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문장이 정확하고 깔끔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예전의 서양 철학 책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용 자체가 난해하기도 하려니와, 엄청나게 난삽한 번역 문장들이 한 몫을 했다면 내가 지나치게 말하는 것일까.)

 

361페이지로 이루어진 17000원의 책. 책의 가격을 단순히 페이지와 가격의 비례로 따질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비싸다. 그러나 비싼 만큼 값어치가 있고, 게다가 모든 그림은 올 컬러다.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ps. 다만 몇몇 오기나 이상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165페이지의 표에서 ‘해석의 교정원리’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I과 III이 모두 똑같이 ‘양식사’로 되어 있는데, 책의 내용상으로 보면 III에는 ‘상징사’가 들어가는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330페이지의 그림 18은 내용상으로 보면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이 아니라 ‘앵그르’의 그림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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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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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게 일종의 트렌드였다. 폼나게 지하철에서 일본 소설을 한 권 꺼내서 읽는 것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각수의 꿈>이니, 시마다 마사히코의 <악마를 위하여> 같은 그런 일본 소설들 말이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니, 스탕달의 <적과 흑>을 들고 있는 것도 꽤나 폼나 보이기는 하나 너무 고루해보이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들고 있자니 얼치기 운동권 같고, 그렇다고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은 너무 경박해보이고. 그래서 적당히 가볍고, 또한 적당히 무게 있어 보이는 그런 조건에 충족되는 소설들로는 일본 소설들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걸까. 그 당시(1990년대 말) 도서관에는 일본 소설 코너에는 은근히 사람이 붐볐고, 마음먹고 도서관에 임무 수행을 떠났다가는 쓸쓸히 빈 손으로 돌아오는 패자들이 생겨나곤 했다. 아무튼 그 때부터 내 독서에는 하나의 패턴이 생겼다. 조금 무겁다 싶은 것을 하나 읽은 후에는 중간중간 일본 소설들을 하나씩 끼워 넣어 읽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자만심에 빠져서 ‘자기를 동정하는 것은 가장 비열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따위의 문구들을 나우누리 자기소개란에 올려놓고 슬며시 웃는 것이다.

  그런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게 있음- 이것은 오늘 날의 한국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일본 소설 에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재미있기는 하되, 너무 무겁지 말 것, 그러면서도 너무 경박하지는 말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잘 팔리는 오쿠다 히데오니, 요시모토 바나나니, 히라노 게이치로니 하는 작가들의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아니겠는가. (물론 여기에서 또 일군의 경향을 이루고 있는 추리물이나 에쿠니 가오리 류의 일종의 로맨스 소설은 제외하고 말이다.) 여기에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방금 다 읽은 <악인>의 작가 요시다 슈이치다.

  이 소설 <악인>은 한 여자에게 일어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그 살인사건에 휘말린 그녀 주위의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 그 남자들이 만났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과연 악(惡)이란 무엇인가’를 좇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고자 하는 추리물이나, 범인을 밝히면서 긴박함을 강조하는 스릴러물은 아니다. 단지 이 소설은 사건의 전개를 조용히 따라가며, 우리 인간에게 악의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악의란 것을 가지게 되며, 그 악의에서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등장인물을 따라가며 영화를 찍듯, 그리고 등장인물이 사건의 경위를 경찰에게 설명하듯, 조용히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일단 먼저 느끼게 된 것은, 때로는 그 묘사가 지나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절하게 답을 알려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가끔 어쩌다가 낮에 집에 있게 되면, 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로 드라마가 방영될 때가 있다. 그 때 난감한 것은 이러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치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화면을 보고 그냥 ‘느끼면’ 된다. 그러나 화면해설 방송은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바라봅니다’라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서로를 적의를 가지고 바라보는지, 애틋하게 바라보는지, 그냥 한 번 무심히 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oo이 oo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oo도 oo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느낌이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 그저 이 정도만 설명해주어도 좋을 텐데 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만다. 즉 묘사와 설명의 중간에서 무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이 무리한 줄타기가 자꾸 엇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솔직히 ‘독자의 사유가 선과 악을 판별하도록 남겨두는 것이다’라는 옮긴이의 말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를 보여주는 것 자체도 비교적 명확할 뿐 아니라, 혹 그것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드라마에서나 보여주는 어떤 트렌드적인 경향에 길들여진(혹은 지나치게 패턴화된) 선과 악이기 때문이다. (즉 이는 이미 많은 독자들에게 너무 익숙한 이야기 구조이며, 일견 복잡한 듯하나 너무 평면적인 주인공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시작부터 그런 기미가 조금 보여지고 있기도 하다. 부잣집 도련님과 어머니가 항구에 자기를 버리고 간 청년. 뭐가 느껴지는가?)

  여기에서 다른 많은 일본 소설들과 같이 이 소설도 같은 한계점에 머무른다. 잘 짜여진 드라마 한편을 보긴 하였고, 잘 짜여진 좋은 이야기들과 좋은 대사들도 있으나, 일시적인 감정 그 이상의 무게를 주지는 않는 것. TV를 끄고 나면, 그 불우한 청년이 어쩌다 실수로 한 사람을 죽였으나 사실 그는 나쁜놈이 아니라는 것, 실제로 나쁜 놈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산’이 노론 척신들의 반발을 잘 무마하건 말건,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이라는 점과 동일하듯이 말이다. 좋은 소설이 가지는 공통점인 일시적인 감정의 고양 그 이상의 어떠한 것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 나의 삶에의 어떤 것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는 이는 우리 독자들이 져야 할 책임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그간 독자들이 요구해온 일본 소설의 경향이 그런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것이었으니, 출판사도 그런 작가들의 책을 중심으로, 또 ‘아쿠타가와상’이니, ‘나오키상’이니 그런 적당히 무게감 있는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번역하고 출판해온 것일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분명히 나에게도 일정 부분은 책임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분명히 번역문학이라는 것의 태생적 한계가 존재할는지도 모르겠다. 이 번역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번역가의 문장을 읽는 것이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레이먼드 카버’의 간결한 문장을 읽는 것이 아주 좋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에 대한 것은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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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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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이라는 말에 대하여 여러 그 기원에 대해 논의들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저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작은 이야기’라고 보자면, 소설은 누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 혹은 자신이 머리속에서 만들어낸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던 것에서 시작하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은 부분은 골라내어 다른 이야기로 대체하여 점점 살을 붙여 나가 하나의 틀에 잡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라 함은 그 소설의 효용에 대한 것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든, 혹은 정교하게 축조된 허구이든 간에, 그 소설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즐거움을, 혹은 어떤 깨달음을, 혹은 어떤 정신적 고양을 주는 데에 그 일차원적 효용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역시도,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주는 데에서 느끼는 정신적인 쾌감, 이야기를 내려놓음에서 느끼는 안도감,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것을 주었다는 만족감 등이 복합된 또 다른 효용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혹은 어쩌면 그리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누군가와 누군가가 연결되었다는 것, 그 자체가 어쩌면 이야기의 가장 큰 효용일지도 모른다.

 

2.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1990년대 초 불안한 시국에서 살던 운동권 대학생인 ‘나’의 이야기를 전반부에는 여자친구인 ‘정민’과의 연애담을 중심으로 후반부에는 그가 대학생 예비대표로서 북한에 입국하라는 지령을 받고 독일에 건너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및 그가 겪게 되는 이야기, 특히 그 중에서도 그가 비디오로서 그리고 나중에는 실물로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강시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큰 흐름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 ‘정민’의 삼촌 이야기, 독일에서 만나게 되는 ‘이길용’, ‘레이’, ‘헬무트 베르크’ 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의 특징과 저마다의 다른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정민’과 ‘나’는 ‘더이상 이야기가 하고 싶지 않게 된다면, 우리 둘의 관계는 그 순간 끊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혹은 자신 주위의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애쓰며,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길용’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종내에는 서로 뒤엉켜 서로의 존재를 입증하는 도구가 된다. 즉 나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부터 먼저 받아들여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그 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야기 속에서 ‘나’의 할아버지와 '이길용'의 할아버지가 연결되고, 또 ‘정민’의 삼촌이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현재의 ‘나’의 존재를, ‘정민’의 존재를, ‘이길용’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3.

소설이 앞에서 말한대로 ‘작은 이야기’라고 한다면, 소설은 줄곧 거대담론에 맞서서 사람들 각각의 작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애써왔다. 거대담론 속에서는 ‘1987년 5월에 몇 만의 군중이...’라는 식으로 숫자로만 모든 것을 기록하지만, 그 몇 만은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그 거리로 나섰으며,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또한 무수한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것이다. 여기 소설 속에 있는 ‘나’, ‘이길용’, ‘정민’도 그러한 역사의 거대담론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이다.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숫자로 밖에 기록되지 않을 그런 일들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에게, 그리고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 말을 건다.

다른 누군가는 절대 알지 못할 -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포장마차에서 이야기하던 사람들처럼 -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그러한 이야기들로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결코 그 자신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이 이야기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을 증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 그 존재를 증명해주며,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자면 거대담론 속에서 인간이 ‘살아남게’ 해주기 때문이다.

 

4.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거짓일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 소설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허구이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소설의 모든 작중 화자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끼워맞춰’ 말이 되는 것으로 만들고 말았을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그들은 거대한 시대에 거대한 힘에 맞서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 김연수가 의도한 바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거대한 어떤 것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 그 자신의 이야기를 동력 삼아, 살아나갈 것. 거대한 어떤 것을 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거대한 세계가 될 것이라는 점 말이다.

 

5.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거대한 이야기, 거대한 힘이 몰락했다고 말해지는 지금 이 세기. 이 세기에서 개인은 이제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야기들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야기들은 분절되고, 개인은 자신의 존재들을 증명할 기회를 잃고 있다. 왜냐하면 서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할 뿐, 이야기라는 것은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만난 것이 반갑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네 얘기를 해봐. 들어줄테니. 이것이 바로 개인들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작가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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