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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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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의 사진을 한참을 들여다 본다. 지젝의 책 <시차적 관점>과 다른 지젝의 책 몇 권, 그리고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책(혹은 그를 다룬 책) 사이로, '한 그루의 사과나무'라는 제목과 함께, 이현우라는 이름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성실한 북리뷰어, 혹은 '인터넷 서평꾼' 아니면 '서평가' 로쟈의 본명. 한 그루의 사과나무? 출판된 책 같지는 않고, 혹시 기약없는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책인지, 아니면 그의 그저 노트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 사진은 서평가의 숙명같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서평가의 숙명이란, 결국 언젠가 출판될 자신의 책을 기다리는 것. 그 책의 서평을 써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다른 경우에도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수없는 영화를 본 영화평론가들은 언젠가 자신의 영화를 만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정성일이나 김정 등 여러 평론가들의 영화를 우리는 접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요리를 맛본 미식가는, 자신만의 완벽한 요리를 언젠가 만들어낼 것을 꿈 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수많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써온 서평가는....누군가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읽는 것을 고대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과는 크게 관계가 없는 문제다. 재능이 없어도 꿈 꾸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숙명과도 같다.

아마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로쟈의('이현우의'라고 해야겠지만, 우리에게 더 친숙한 이름이니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 이 책 <책을 읽을 자유>에는 아직 탄생하지 않은 여러 복잡하고도, 흥미로워 보이는 주제를 가진, 미래의 책들이 등장한다. 로쟈가 앞으로 쓰게 되거나, 혹은 결국 쓰지 못하게 될 몇 권의 책들. 언젠가 그 책들이 써질 수 있을까? 글쎄. 뒤의 발문에서 신형철이 그를 '기계'라고 표현한 내용도 있고, 로쟈 자신의 약간은 자조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앞에는 그가 읽는 속도의 몇 배나 될 정도의, 그가 아직 읽지 않은, 그러나 그가 어쩔 수 없이 손을 대고야 말, 수많은 책들이 등장할 것이고, 그는 그 책을 읽고는 무언가 몇 개의 짧은 코멘트들, 혹은 긴 논의들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분명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가 쓰고자 하는 새로운 주제를 가진 책들의 출판 시기는 조금씩 유예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책을 쓰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모든 서평가에게는 또다른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조지 오웰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서평가의 일단을 밝힌 바대로, 어쩌면 대다수의 서평가들은 서평을 쓰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며, 최대한 그것을 마감이 다가올 때까지 미뤄두려고 하고, 또한 그 책들의 상당수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좋다, 나쁘다의 기준을 내린 후에는 그것을 합리화하는 작업을 재빠르게 해내는 족속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맞다고 해도, 적어도 확실해 보이는 한 가지는, 서평가들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아마도 죽을 때까지도 한 권의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책은 정말 쓰레기군. 이제 다시는 책 같은 것은 읽지 않겠어."라고 결심한다해도, 그의 흥미를 자극할 다른 책은 그가 말하는 그 순간에 어디선가 출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위대한 저작이 말이다.

그럼 서평가의 숙명을 생각해 보았으니, 그런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의 숙명을 생각해보자.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두 가지 부류일 것이다. 소개된 그 책들을 읽을 마음이 있는 사람과 그 책을 읽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 누군가는 읽지 않고서도, 그것을 읽었다는 지식을 내세우려, 혹은 읽었다는 충만감을 느끼려 이러한 서평모음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면 다른 누군가는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의 어떤 길잡이로 생각하고 이러한 책들을 볼 것이다. 즉 앞으로 읽게 될 책들의 어떤 맛보기로. 아무튼 확실한 것은, 전자이든 후자이든 간에 서평모음집을 읽는 사람들은 머리 속이 꽤나 복잡해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또한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가 별로 관심없던 주제들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내용을 머리 속에 단편적으로나마 집어넣게 될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앞으로 그가 사게 될 책들의 목록을 생각하고, 그 가격을 어림잡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전자의 사람이나, 후자의 사람이나 이 책 <책을 읽을 자유>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인문학적인 교양에다, 지젝, 데리다, 라캉, 고진 등 주요 현대철학자들의 간단한 이론적 개괄까지 머리 속에 넣게 될 것이고, 후자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구입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책은 전자의 사람들보다는 후자의 사람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신형철이 얘기한 바대로, 로쟈 서평들의 강점은 두 권 이상의 책을 무리없이 연결하는 것이다. 즉 로쟈는 어떤 주제에 대한 개괄적인 책들에서부터 심화된 책들까지 부드럽게 독자를 이끌고 간다. 그리고는 그 주제에 있어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책들도 은근슬쩍 끼워넣는다. 그리고 책의 내용에서부터 번역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각 책들을 짚어 나간다(이 책의 또다른 강점은 로쟈의 번역에 대한 지적이다. 로쟈만큼의 인문학적 내공을 갖춘 번역가들이 많지 않은 탓이다 -). 그것은 아마도 로쟈의 오랜 독서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누구나 쉽게 흉내내기란 어려운 것이다.

글쎄.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기에 약간 주저되는 부분은 있다. 전체적으로 주제별로 서평들이 잘 분류되어 있으나, 철학이나 문학비평 등 일부의 주제들로 편중된 경향이 있고, 일부의 글들은 너무 깊게 파고 들기도 하고, 혹은 너무 훑고 지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표되는 지면들이 달랐던 탓으로 보인다. 그는 책의 앞 부분에서, 서평꾼과 서평가, 서평자와 그들이 쓰는 리뷰를 구분하고 있는데, 지면의 성격에 따라 요구되는 리뷰의 급도 다르며, 내용적인 밀도도 분명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주간지, 문학비평지, 신문, 인터넷 공간 등 여기에 실린 글들이 다양한 매체에 수록된 것이었던 것 만큼, 약간은 산만한 경향이 있고, 중첩되는 내용의 글들도 있다. 즉 그만큼 책의 전체적인 구성의 밀도는 떨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괜한 트집잡기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로쟈의 책읽기 2000-2010'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는 대로, 이것은 그저 지난 10여 년간 로쟈가 성실하게 써 온 독서일기들을 묶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가 요구하는 대로, 다양하게 써온 것이 아마도 로쟈의 잘못은 아닐 터. 그저 독자는 취사선택하여 잘 읽으면 될 일이다.

어쩌면 나의 이 볼멘소리는 다른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보다도 로쟈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리송해 보인다는 물음이다. 신형철은 "예나 지금이나 로쟈는 "회색인"이다"라고 썼고, 또 "그러나 나는 인간 이현우가 아니라 필자 로쟈에 대해서밖에 모른다. 인간 김해경이 필자 이상李箱으로 변신한 뒤 김해경을 거울 속에 가둬버린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로쟈의 글에서도 이현우의 모습은 흐릿하다."고도 했다. 내가 보기에도 로쟈는 자신의 여러 글들에서 모호한 입장들을 내비친다. 그것도 아주 군데군데에서만. 그것은 분명 이 서평집이라는 책의 속성에서 기인된 문제일 것이다. 영화평론가들이 영화 뒤에 숨어 있는 것처럼, 음악평론가들이 객석 한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것처럼, 서평가들은 책 뒤에 숨어서 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자신을 아주 조금씩만 내비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로쟈의, 아니 이현우의 책들을 어서 보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그가 자신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에 어서 굴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책을 읽을 자유'가 있는지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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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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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1903년에 태어나서, 1950년에 죽었다. 1903년에서부터 1950년은 전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유럽에 있어서는 격동의 시대였고, 구체제가 몰락하는 시기였으며, 일종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시기였다. 책 뒤의 조지 오웰의 연보를 살펴보면, 그가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서 얼마나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명문 이튼 스쿨을 졸업했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하였고, 유럽의 밑바닥 생활을 스스로 자원하여 체험하였으며,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였다가 적과 내통하는 자로 몰리기도 하였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BBC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의 다양한 경험들은, 그가 집필한 수많은 에세이에 여실히 녹아들어가 있다. 그 일부인 29편의 에세이를 묶은 것이 바로 이 책 <나는 왜 쓰는가>인데, 이 에세이집은 그간 <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로만 널리 알려졌던 조지 오웰의 여러 다른 면모를 잘 드러내 준다.

먼저 드러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및 '정치와 영어', '작가와 리바이어던' 등에서 보이는 엄정한 작가로서의 면모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의 글을 쓰는 동기를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의 4가지로 나누어 말하면서, 본인이 지난 10년을 통틀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중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정치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비추어 보듯, 그가 정치적 사유와 그에 따른 태도를 글쓰기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놓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글들이 어떤 정치적 팜플렛이 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리고 정치적인 글들이 정치적인 팜플렛의 지위를 벗어나는 순간은 그것이 하나의 예술이 될 때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짧은 에세이 '작가와 리바이어던'에서 적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정치와 영어'를 보면, 그의 작가로서의 언어를 다루는 태도, 그리고 동시에 그가 하나의 예술가인 작가로서, 좋은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 얼마나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 번의 붓터치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단 한마디의 글에도 가장 최적의 표현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것은, 그가 생각하기에 작가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또다른 면모는 그의 정치 저널리스트로서의 면모,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가로서의 면모이다. 그의 정치적인 에세이들을 읽어보면, 사실 그의 정치적인 소견이 상당히 이질적인 것들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이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밝힌 것처럼, 그는 생애 내내 전체주의에 맞서는 것을 일종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또한 식민지 시대 버마에서 경찰 생활을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지만,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졌으며, '간디에 대한 소견'에서 밝히는 것처럼. 맹목적 평화주의에도 그것의 비현실성을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숙청 등을 예로 들며, 공산주의에도 내내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애국주의에 찬성하였으며, 본인 스스로 2차 세계대전 중 국가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사실 그가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것도, 이에 비추어 보면 조금은 모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가진 정치적 견해의 의미보다도, 이러한 견해들의 원천이 된 그의 경험이다. 즉 그의 이러한 일견 복잡해 보이는 정치적인 스탠스는 그의 철저한 경험의 산물이다. 이 말은 역으로 그가 그저 앉아서 사색과 글쓰기에 몰두하는 그런 류의 인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소위 '행동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고, 그가 쓰는 거의 모든 글들은 그가 휘두르는 일종의 무기였다. 그는 그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가 글쓰기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이 꽤나 강력한 무기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페인 내전에 달려가 직접 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서기도 하였고, 전쟁 기간 중 국가의 선전물로 이용되는 BBC에 기꺼이 군에 복무하는 심정으로 일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전생애에 걸쳐 글과 그의 온몸으로 일종의 정치적인 투쟁을 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즉 그럴싸한 철학 이론을 내뱉다가, 스위치 하나를 바꿔다는 것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태연하게 그와 가장 극에 있던 이론을 내뱉는 '앉아서 말만 하는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었다.  

동시에 이 에세이집의 많은 글들에서 그의 통찰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통찰에서부터 미래 세계의 세상에 대한 통찰, 우리 일상 생활에 대한 통찰에까지 미쳐있다. '당신과 원자탄' 같은 글에서는 어떤 정치적인 통찰이 소름을 돋게 하며, 일부의 글들은 지금 시대에도 어떤 미래 리포트의 일부로 가져다 놓아도 손색이 없다. '코끼리를 쏘다', '행락지'와 같은 글들은 우리 미래의 생활에 대한 일종의 예언으로서,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숙한 통찰로서 놀라운 식견을 보여주며, '"물속의 달"'을 통해 일종의 자기반영적 예언이 된다. 

   
  (전략) 그리고 그렇게 되면 지고의 행복이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고, 포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데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울러 삶이 점점 더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공포가, 옛것을 선호하는 감상적 취향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십분 정당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행락지' 中, p. 247-248.
 
   

 

한편으로, 그는 현실을 꿰뚫어보는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 냉소적이었다. 그의 어떤 냉소들은 그가 쓴 글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미래 사회의 끝을 어느 정도는 예견하고 있었고, 동시에 현 시대의 세상이 어떠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막연하게나마 깨닫고 있었다. 그의 그런 깨달음은 분명히 막연한 것이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막연한 깨달음이나마 갖추고 있지 못하기에 그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를 괴롭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가 이튼 졸업생으로서 유일하게 식민지 경찰 생활을 택하고, 그 이후에 빈민의 삶에 스스로 뛰어든 것은 천재적인 통찰가들이 흔히 보여주는 일종의 '부조리함에 스스로 처하기' 혹은 '운명에 맞서기'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많은 글들은 그가 밝힌대로, 전체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이지만, 동시에 어떤 불안한 예감 같은 것들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냉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우려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가 <1984>와 같은 소설을 구상한 것도 아마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그는 우리의 세계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분명히 1984년에는 그와 같은 전체주의의 세계가 거대한 권력을 이루리라고 믿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의 글로서, 그리고 온 몸으로서 끊임없는 투쟁은 나에게는 어떤 두 가지의 심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 하나는 일종의 연민이다. 이미 끝을 아는 사람들, 혹은 전체적인 면모를 아는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일종의 패배주의가 깃든 자기방어. 그리고 현실주의자들이 가지게 되는 냉소들과 그것이 자아내는 일종의 자기 혐오들이 일으키는 연민 말이다(물론 이것은 조지 오웰에 대한 연민만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고귀함이다. 패배가 주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병약한 몸의 뼛가루를 재료 삼아 글을 쓰며, 계속 맞설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는 고귀함 외에 다른 무엇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는 현실의 통찰을 통해 인간이 결코 선한 동기로만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 선함을 믿으려고 애썼다.

오웰의 예상과는 달리 1984년에 우리는 조금은 다른 세계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조금은 다른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1984년도 세계의 상당수는 전체주의의 세계였으며, 전체주의의 세계는 아직도 여기저기 곳곳에 그 기운이 남아있다. 그리고 내가 오웰만큼의 통찰력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적어도 거의 확실해보이는 것은 이 전체주의의 기운은 영원히 어딘가에는 남아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지나간 역사를 바꾸려 들 것이고, 단어의 의미를 바꾸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아직도 수많은 오웰들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오웰들에게 깊은 연민을. 그리고 고귀함을.   

   
 

스코티 말고는 모두가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압수당해 혼자만 담배 없이 있는 그를 보기가 너무 딱해서 나는 담배 말아 피울 재료를 그에게 좀 주었다. 우리는 부랑자 감독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린 학생들처럼 숨겨가며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묵인해주되 공식적으론 금지였던 것이다. (중략)
그 때 뒤에서 서둘러 다가오는 발소리가 나더니 누가 내 팔을 두드렸다. 키 작은 스코티였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우릴 쫓아온 것이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녹슨 깡통 갑 하나를 꺼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세 진 걸 갚으려는 사람의 표정 같았다.
"자 이거, 친구."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네한테 담배를 좀 빚졌잖아. 어제 나한테 선심을 썼지. 아침에 나올 때 부랑자 감독이 내 담배꽁초 갑을 돌려주더라구. 친절은 베풀면 돌아온다니까. 자 여깄네."
그러면서 그는 내 손에 눅눅하고, 다 썩어빠지고, 구질구질한 담배꽁초 4개를 쥐여주는 것이었다.

                                                                               '스파이크' 中, p. 1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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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1-13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허허..다 쓰고 나니 조지 오웰이 가장 쓰지 말라는 식의 글이 되어 버렸음..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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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쇠망사 - 한 권으로 읽는
에드워드 기번 지음, 나모리 시게나리 엮음, 한유희 옮김 / 북프렌즈(시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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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를 서기 96년 네르바 황제의 즉위, 즉 5현제 시대의 개막에서부터 다루고 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요약한 이 책 <한 권으로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의 편역자 가나모리 시게나리는 기번이 그 이전의 시대, 즉 포에니 전쟁,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기번이 살았던 18세기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이전의 '역사'는 이른바 상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번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거대한 로마를 돌아보면서 말이다. 이 거대한 제국,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로마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는 어떤 이유로 쇠약해지고,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일까. 기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의 쇠퇴는 뛰어나게 위대한 문명의 종착지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였다. (중략) 따라서 인공적인 이 대건축물을 떠받치고 있던 각 부분이 시대나 상황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기 시작하자마자, 훌륭한 건축물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로마의 멸망은 단순한 요인에 의한 것이고 불가피한 것이었다. (p.288)- '옮긴이의 말' 일부분    
   

 

그래서 아마도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라는 자신의 글을 로마 제국이 가장 융성하던 시기인 5현제 시대부터 다루기 시작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무릇 어떤 것이건 간에 최정점에 오른 시기가 쇠퇴가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번의 설명식으로 보자면, 로마를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이 생겨나는 그 순간 이후부터 필연적으로 이 기둥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겨나기 마련이었을 것이고, 그 균열은 결국 로마라는 거대한 건물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로마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기번이 말한 그런 것일 것이다. 즉 로마라는 이 대들보가 너무 거대해졌다는 것, 상대적으로 그것을 떠받드는 기둥들보다도 말이다. 따라서 이민족의 침입과 같은 것들은 근본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그 기둥에 가해지는 도끼질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미 허약해진 기둥들은 몇 번의 도끼질로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로마가 쇠퇴하고 멸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먼저 무상으로 제공되는 밀과 끊임없는 전차시합과 검투시합과 같은 볼거리의 제공이 야기한, 로마 제국민들의 정신적인 나약함, 또 하나는 로마 제국 내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권력 암투, (그리고 그것에 기름을 부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국의 4분할통치책), 부르군트족, 고트족과 같은 이민족들의 거듭된 침입과 로마제국 후기에 이르러 이민족들의 동화와 융합 정책에 실패한 점, 이슬람 세력의 급격한 성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 등등. 이 중 과연 어느 것이 로마 멸망의 가장 큰 이유인가라는 물음에는, 아마도 기번의 말에서 힌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이 중 어느 한 가지가 근본적인 이유였다기 보다는, 로마가 이 모든 것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이미 너무 몸집이 거대해져 버린 거대한 공룡과 같았다는 점 말이다. 다만, 기번이 그 이유 중의 하나를 기독교에서 찾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기번은 말한다. 내세 지향적인 성격을 가진 기독교가 로마에 널리 퍼지고, 국교가 되면서, 제국민들은 현세의 황제에 충성할 필요를 느끼게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 그것이 로마 제국 멸망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흥미로운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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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권으로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는 제목에서 말하듯이, 기번의 6권으로 된 <로마제국 쇠망사>를 한 권에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5현제 시대 이전의 로마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앞 부분의 역사까지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러다보니 잃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6권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축약하다 보니, 인물들의 등장과 사건의 전개 중심으로 급박하게 설명이 이루어져, 어떤 부분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나,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즉 가끔 TV에서 시간 때우기 용으로 하는, 몇 부작의 이야기를 짧게 축약한 드라마 스페셜 편을 보는 것처럼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해하게 되지만, 그 안의 세부적인 잔재미(?)들을 놓치게 된달까. 그리고 사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렇게 앞부분의 이야기들을 무리하게 집어넣다 보니,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이 원저의 본질적인 의미, 즉 '로마 제국이 왜 쇠망하게 되었는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는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즉 각각의 사건들을 흐름을 알게 되기는 하나, 이 모두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시각을 얻기는 아무래도 모자르다. 나 역시도 기번의 이 원저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앞에 옮긴이의 말 일부분과 몇 가지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이 무리한 리뷰를 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물론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독특하게 각 장이 질문을 던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사건들에 대한 서술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도 나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용어의 설명들도 충실하게 잘 되어 있는 편이며, 사진이나 연표도 잘 제공되고 있다. (일본애들이 참 이런 거 잘한다.) 다만 나는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 아름답다는 기번의 문장들을 읽지 못해서 말이다. ('훌륭한 건축물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라니..아 표현좋고!) 그러니 아마도 언젠가는 그것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조금은 덜 무리한 리뷰를 써야만 할 것 같다.

아무래도 패스트푸드가 가끔 맛있고 편하기는 한데, 배는 금방 꺼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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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05-20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지금 쓰다니..큰일이야..큰일.

cyrus 2010-10-0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떻게 보면 독자들에게 딜레마를 안겨 주는거 같네요.
저도 원전으로 된 6권을 볼 것인지 아니면 축약본을 읽을 것인지 고민을 했거든요.
지금도 고민중이라서 아직도 읽을 엄무도 안 나고 있답니다^^;;
맥거핀님의 축약본 관련 리뷰 덕분에 어느 정도 고민이 해결되었네요.
좀 시간이 걸리고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원전을 읽어봐야겠네요.
안 되면 축약본으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0-10-06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원전을 읽어봐야겠다..계속 그러고 있지만,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뭐 정 안되겠다 싶으면, 축약본이라도 읽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름 이 책은 축약이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구요. (물론 원전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교양인의행복한책읽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 - 독서의 즐거움
정제원 지음 / 베이직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는 인문학 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아마도 자기계발서 쪽에 조금은 더 가까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은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기획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란 간단히 말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읽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교양을 쌓게 해주는 책'들을 말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 들어 다양한 교양 매체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독서는 교양을 갖추는 가장 쉽고도 편리한 방법이다. (중략) 책이 전달하는 지식이나 정보가 잊혀도 남는 무엇, 바로 그 무엇이야말로 생각의 소득이며 교양의 원천이다. 그 무엇이 우리가 존재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물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p.17)   
   

 

그러면서 저자는 30권의 책을 통한 30가지의 독서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한 권의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을 통해 그 책을 읽으면서 갖추어야 할 독서법을 제시하는 것. 그러면서, 저자는 조금은 특이한 방식으로 각 책들을 연결지으며, 논의를 이끌어간다. 예를 들어 첫번째 독서전략으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책을 읽는다'를 제시하며, 강준만의 <지성인을 위한 교양브런치>를 읽을 것을 제안하면서, 다음 책으로는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읽는다'라는 테마를 제시하며, 강준만의 <행복코드>를 읽도록 하는 것, 그리고 또 그 다음 책으로는 '같은 테마의 책을 읽는다'를 화두로 내세우며, 버트란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제시하는 식이다. 즉 저자의 목적은 어떻게 보면 꽤나 명백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목적이란 30권의 책을 독자가 읽어나가면서 '교양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의 조금은 더 적합한 제목은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라기 보다는 '교양인이 되기 위한 조금은 덜 행복한 책읽기'가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싶다. ('조금은 덜'이 붙은 이유는 어떤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수단이 될 경우에는 '완전히'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이다 -.)

내가 굳이 이런 딴지 아닌 딴지를 거는 이유는. 이 책의 제목을 혹여 오독하여, 이미 일정 정도의 독서 이력을 갖춘 사람이 이 책을 읽게 되면 살짝 실망하지 않을까 해서 해본 얘기다. 즉 이 책은 독서력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일정 수준에 이른 사람들에게 더욱 풍성한 책읽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별로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들, 특히 인문학 부문의 책들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런 책들을 읽도록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기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들의 선정에서도 보면, 작가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식이 아니라, 이 책을 쓰기 위하여 거의 새롭게 책들을 읽고, 새롭게 구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소개된 책들의 면면을 보면 간간이 인문학의 고전들도 끼어 있지만, 최근에 발간된 책들이 상당수이다. 즉 이 책의 주 목적은 소개된 책들을 읽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소개된 예시의 책들을 통해서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를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꼭 '그 책'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작가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문에서도 언급했지만, 독서법에 관한 책이면서 이렇듯 책을 구체적으로 선정해 일독을 권하는 것은, 독서법만 알고 실제로 그 독서법에 맞춰 독서는 할 줄 모르는 병폐를 없애기 위해서다. 훌륭한 독서법은 독서 행위 밖에서 관념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독서 행위 내부에서 우리에게 현시될 뿐이다. (p. 17-18)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은 서평 모음집으로 보기에는 약간 함량미달이다. 소개된 책들의 내용이나, 그 책들이 어떠한 측면에서 좋은 책들인지, 그 책들이 어떤 측면에서 훌륭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지를 소개하기 보다는 거의 그 책과 그 작가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찬사로 일관하며, 상당수의 내용이 소개된 책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당연하게도 이를 가지고 이 책의 글쓴이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목적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책에 어떤 평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책을 읽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그 책의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제시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책들을 단지 몇 구절에 반하여 구입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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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자들에게 인문학 책을 읽도록 한다'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상당히 효과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책들의 연결된 구조 또한 인상적이다. 아마도, 저자가 말한 대로 제시된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인문한 책을 평소에 잘 읽지 않던 사람들도 인문학의 재미를 조금씩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따라 30권의 책을 덮은 순간에는 어느 틈에 교양인이 되어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그 다음에는 저자가 제시한 마지막 독서법 대로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이 선택한 책을 읽'으면 될 것이다. 아니, 아마도 그 때쯤이면 어떤 기준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읽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음 가는 대로 읽는 것' 그것이야 말로, 독서가가 갖추어야 할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어떤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책이 읽고 싶어서, 재미있어 보여서 선택한 책들이 나를 더 살찌우고, 삶을 풍족하게 이끈다면 그보다 좋은 독서법이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가장 최고의 독서법이란 '어떤 필요가 있어서 읽는 책(바로 이 책?)을 집어치우고, 마음 가는 책을 읽을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아..참고로, 이 방법은 고수 이상의 독자들만 시연해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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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차가운희망보다뜨거운욕망이고싶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짦은 문구이긴 하지만, 책 표지의 소개는 꽤나 강렬하다. 

   
  나는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닌다. 사람들은 나를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추켜세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장애를 극복한 적이 없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  
   

그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몸, 우리의 몸, 가난과 질병과 추함에 빠져들까 불안해하는 몸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게 된 것 한 가지는 장애인은 장애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나는 모순된 존재가 될 것이다. 장애를 극복했다면서 왜 나는 여전히 장애인인가.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장애인인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내가 세상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는 왜 안되는가. (p.7)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 책은 보통의 에세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골형성부전증에 걸려, 휠체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던 저자. 그가 갇혀 있던 조그만 세상에서 벗어나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서울대학교 로스쿨에 다니고 있는 지금의 모습. 이 몇 가지 사실 속에서 우리는 이미 책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갖는다. 아마도 이 책은 누군가의 가슴아픈, 그러나 그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인생승리의 이야기로구나. 장애인도 저렇게 노력해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만 되겠어. 우리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지..하는 그런 이야기일 것이라는 긍정적이지만, 조금은 지루한 추측.

그러나 저자는 선언한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될 생각은 없다'고. 그리고 저자의 그 도발적인 선언답게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다. 물론 몇 가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저자가 시작하게 된 것은 분명, 자신의 개인사에서 비롯된 것이고,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가 어떤 큰 뒷받침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저자는 책의 지면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할애한다. 그것은 저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어떤 '희망의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개인사에 대한 토로도 아니고, 어떤 성취에 대한 자신감도 아니며, 그 성취가 '희망의 증거'로 보이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저자는 도리어 현재의 시점에서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 책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그것도 아주 불투명한 현재 진행형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보통의 장애인들의 인간승리 에세이나 혹은 젊은 친구들이 수능 만점을 받고, 혹은 미국의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 쓰는 에세이와는 거의 반대의 지점에 와 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이루어내었다는 관점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이루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는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뜨거운 욕망'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단순하게는 '야한 장애인'이 되는 것,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사회적인 연대를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은 장애인을 일단 사회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장애인들이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일차적 조건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하는 대로, 장애인들은 사회에 의해, 애써 사회와 분리되어 있다. 장애인들은 우리의 이웃으로서,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어떤 시설을 통해서 분리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호'라고 부르지만, 보호는 결국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을 사회와 분리시켜 가두는 것이다. 즉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장애인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 책에서 줄곧 주장하는 것은 장애의 사회적 관점,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자립 생활 운동(Independence Living Movement)'이다. 즉 더 이상 장애인들은 시설에 갇혀 있어서는 안되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이웃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회나 학교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장애인을 위한 보조인력을 두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어떤 시혜가 아니라, 사회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이며,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는 남는다. 단순한 예를 들어 장애인이 지하철에 타려고 할 때, 아무리 보조 인력이 있다해도, 여전히 주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장애인에 대한 시혜없이, 이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연대'이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연대라니, 여기서 연대라는 용어는 뭔가 어폐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장애인의 입장에서 '연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옳은 것이냐는 물음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장애인이라서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누군가와 연대할 수 없다. 우리가 장애인과 연대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우리보다 낮은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인데, 결국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마찬가지로 연대할 수 없다. (만약 다른 낮은 사람들과는 연대할 수 있는데, 장애인들하고만 못 하겠다면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사람과도 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와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우리와 연대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연대에는 여전히 어떤 벽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장애인으로서 결코,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몸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저자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있는 다른 장애인들(저자는 지적장애가 없는 것, 그리고 '혼자 휠체어도 밀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비교적 나은' 몸,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행운 등등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며, 동시에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것의 의미가 다른 장애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다)과 비장애인들과의 사회적 거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인들을 바라보았을 때 생겨나는 부수적인 문제들(장애인들이 사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은 사회의 물질적 계급과의 어떤 충돌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당신보다 훨씬 잘 사는 장애인을 용납할 수 있는가?)일 수도 있다. 아니, 굳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저 그 벽은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불편한 감정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자각하며 느꼈던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위에서도 잠깐 썼지만, 이 책은 이것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 중의 한 가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자의 생각이 아직은 완전히 여물지 않았다는 점, 즉 그는 여전히 길 앞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일 뿐이라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것이다. 결국 이 책은 해답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사회는, 우리는, 그리고 나는 여전히 대답을 해야 한다. 아마도 그 대답이 어떻게 행동으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이 책은 완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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