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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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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이라는 것은 어느 논쟁에도 비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발전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이며, 이뤄내야 할 것이다. '김예슬 선언'에서 비슷한 표현을 가져와 본다면, 보수가 발전을 원한다면, 진보는 의식있는 발전을 원한다. 자본주의자가 자본주의식 발전을 원한다면,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식 발전을 원한다.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면, 빈자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 북반구의 여러 나라들이 초일류대국을 위해 발전을 원한다면, 남반구의 여러 나라들은 북반구의 나라들의 대열에 올라서기 위해 발전을 원한다. 그러나 이 책 <反 자본발전사전>은 그러한 발전의 레이스에서 벗어날 것을, 이제 발전에 대한 헛된 희망을 버릴 것을 우리에게 권한다. 아니, 권한다기 보다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책임 집필자인 볼프강 작스를 비롯한 이 책의 저자들이 이러한 발전 본위 사회에 경고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문제이다. 하나는, 문화적인 식민화, 상상력의 식민화의 문제이다. 정치적 의미의 탈식민화는 상당수의 국가들에서 이루어졌고, 경제적 의미의 탈식민화 역시 일부 국가들에서 이루어졌지만, 발전 담론이 세계를 휩쓸면서 문화적인 식민화, 상상력의 식민화는 오히려 강력해졌다. 발전 담론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 세계 어느 곳의 사람들이나 공통적으로, 서구 유럽인, 혹은 미국인처럼 사는 것을 꿈꾼다. 그 여파로 세계 곳곳의 고유한 생활 양식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즉, 문화적인 다양함은 사라지고, 오로지 소비 중심인 서구인들의 생활 양식이 하나의 규준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태학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소비 중심의 북반구식(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활 방식은 지구의 자연을 절대적으로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들 잘 알고 있듯이, 지구의 자원들은 한정되어 있고, 동시에 이러한 생활 방식은 지구 전체의 기후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이러한 발전 중심 모델은 지구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경제 중심 세계관이 강화되는 문제이다. 이러한 발전 중심의 세계관은 오로지 경제만을 중심에 놓고, 전 세계의 모든 국가를 1등에서 꼴찌까지 줄을 세운다. 그래서 아무도 원치 않았고,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는데,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1949년 1월 20일의 취임 연설로, 세계의 일부 지역은 '저발전 지역'이 되었으며,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낙후되고, 좋지 않은 것'으로 규정되어 버렸다. 이는 한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경제력만이 규준이 될 때 나라안의 일부 지역은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이 되어버리며, 그 곳 사람들의 인간적인, 문화적인 가치는 완전히 무시된 채, 그저 '가난한 사람들'로 인식되어 버린다. 동시에 이러한 경제 중심 세계관이 가지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경제력만이 중심이 되다보니 경제력이 낮은 사람들의 기본권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시되고,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예를 들어 지난 용산 철거 문제에서 오로지 경제적인 문제로, 그 사람들의 기본적인 권리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돌이켜보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탈발전 운동을 끌어올릴 것을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탈발전 운동은 크게 두 가지 주제를 포괄하는데, 첫째는 화석 연료 자원에 기반을 둔 경제에서 생물다양성에 기반을 둔 경제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지구의 자원을 소모하는 경제 체제가 아니라, 지역 생태계의 에너지 흐름을 중시하는 미국와 유렵의 '녹색 경제', 타이의 '자급 경제', 인도의 '지구 민주주의' 요청, 페루의 '안데스 세계관' 같은 것들이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경제 체제는 현지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운영된다는 강점도 있다. 둘째는, 위에서도 말한 경제 위주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는 발전 위주의 경제 체제에 매몰된, 공동체의 고유한 생활방식과 문화, 민주주의, 정의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복구함으로써, 물질에 덜 기반한 번영을 모색하면서, 인간의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복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의 행복이란 경제에 달려 있지 않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 시도이다.

이 책 <反 자본발전사전>은 이러한 주제를 조금은 특이한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것은 발전의 여러 키워드들을 하나하나 끄집어올려 논파해 가는 방식이다. 즉 발전에 뒤따르는, 혹은 발전이라는 전체를 구성하는 여러 키워드들을 각 장에서 한 가지씩 제시하며, 그 키워드들의 역사적인 기원과 현재적 의미, 그리고 그 이면에 담겨 있는 뜻들을 새롭게 살펴보며, 그 키워드들을 다시 재정의하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이 책에서는 총 19개의 키워드를 17명의 저자가 각각 논파하고 있는데, 이 키워드에는 우리가 예상 가능한 '시장'이나 '생산', '자원', '국가' 등만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여기에는 의외의 키워드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평등'이나 '사회주의', 혹은 '도움'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평등'은 범세계적인 평등이라는 줄세우기적 사고에 기반한 것으로, 실현 불가능하며, 동시에 실현되어도 (지구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재앙에 가까운 것이며, 결국은 현실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는 이유로 '발전이 약속하는 먼 미래'라는 새로운 이름표를 받는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사회주의도 결국 사회주의식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발전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레닌과 스탈린의 러시아는 결국 무엇을 만들었는가. 그것은 어쩌면 '국가 자본주의' 혹은 그것이 너무 앞서나간 표현이라면, '권위주의 국가' 혹은 '관료주의적 집단주의'가 아니었는지를 이 책은 묻는다. 그리고 결국 '사회주의'란 '오해와 오류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누군가는 이러한 이 책의 논의들에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러한 물음. 이 책에서는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지구 자원의 한계를 말하며, 지금의 소비적인 생활 양식을 버리자고 말한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어떤 불평등을 내포한 것이 아닌가. 즉 발전이 이미 상당수 이루어진 서구 사회가 발전 과정에 놓인 국가들을 '저발전' 상태에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다. 이 책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인도 얼음처럼 차가운 콜라를 바로 냉장고에서 꺼내 마실 권리가 있지 않은가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타당하지 못한데, 하나는 그 질문은 이미 전체적인 발전 레이스에 기반한 질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즉 '전지구 수탈'이라는 발전 레이스에 뛰어들어서 끝이 뻔히 보이는 파멸로 같이 달려가는 선수가 될 필요는 절대 없다는 점. 다른 하나는, 이미 그러한 생활 방식은 인간의 삶의 질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그 콜라 꺼내 먹어 본다고 해서, 우리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또다른 예상되는 질문은 조금 더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가 발전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는, 어떤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면 그런 의문이 들기는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농업 위주의 경제체제, 혹은 예전의 삶으로 회귀하는 것인가. 지금보다 평균 수명도 훨씬 낮고, 지금의 관점으로 보자면, 우리가 쾌적하게 누리는 많은 것들을 거의 포기해야 하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 자체가 지금의 발전 위주의 체제에 매몰된 시각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공유지에 대한 강조, 생물과 밀착된 경제 체제, 특수한 개별의 공동체적 가치를 되살리는 삶이 어렴풋하고 흐리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우리 모두가 발전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즉 이러한 생활 양식 이외의 다른 삶을 우리가 상상해 본 적이 없는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상상해야 한다. 새로운 삶을. 그 대안이 미심쩍더라도 거의 가까이에 다가온 파국을 우리 모두는 알기 때문이다. 지구가 몇 백만년 동안에 차곡차곡 쌓은 자원을 우리는 거의 수십년 만에 다 썼다. 이 책에서 말하듯이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거짓말에 가깝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없다. 오로지 '지속 불가능한 수탈'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읽으면서 무릎을 쳤던 구절(이 책에는 이밖에도 새롭게 깨닫게 되는 써먹고 싶은 구절들이 많다).


   
  경제학자들의 경제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규칙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회는 경제적 본성을 가진 제도와 접촉 형식을 만들어낸 다음에도, 경제를 들여앉힌 다음에도 경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경제 규칙은 현대 사회에서 만성이 된 희소성에서 비롯된다. 희소성은 모든 인간 사회를 관류하는 철의 법칙이기는커녕 역사적 우연일 뿐이다. 그것은 시작이 있었기에 끝도 있을 수 있다. 희소성이 막을 내릴 때가 왔다. 지금은 주변부와 보통 사람이 나설 때다. (p.68)

 
   

 

그리고 이것은, 다른 책에서 본, 우리 대통령 혹은 우리 시장님에게 들려주고 싶은 구절. 
 

 
라틴아메리카의 한 대통령이 "우리는 제1세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제1세계로 진입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제1세계가 되자면 범죄를 유도해야 하기 때문에 그 대통령은 투옥시켜야 마땅합니다. 요컨대 당신이 "나는 몬테비데오가 로스엔젤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몬테비데오가 파괴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 <시대의 양심 20인 세상의 진실을 말하다> 중에서,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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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2-2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보다 훨씬 폭넓게,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셧네요. 꼼꼼이 새겨 읽으면 재미가 쏠쏠할텐데 주말에 지방을 가야해서 마감에 마구쫓겨 읽었습니다. 모자란 점을 맥거핀님의 리뷰로 보충합니다.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1-02-26 13:43   좋아요 0 | URL
저도 항상 다른 분들의 리뷰를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내용 면에서도 그렇고, 글을 쓰는 방식에 있어서도요. 간만에 왠지 도전정신(?)을 자극하는 책이었는데, 아무튼 다 읽으니 괜스레 뿌듯하네요.

꽃도둑 2011-02-2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결국 로긴하게 만드는군요..
글 참 좋아요, 진지하고 깊이가 있어요. 일목요연하게 한 줄에 꿴 것을 보니 맥거핀님이 책을 지대로! 소화했다고 생각돼요. 이런 리뷰들은 미처 몰랐던, 또 놓쳤던 부분들을 보충해주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끔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 참 좋아요. 건필~~ ^^

맥거핀 2011-02-26 18:17   좋아요 0 | URL
아이고..민망스럽습니다. 이번 책은 어렵기는 했는데, 중간중간에 참 좋은 이야기들, 많이 곱씹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와서, 책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책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제가 특정의 시각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를 곱씹어 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구요. 꽃도둑 님의 리뷰도 기다리고 있을께요.^^

네오 2011-03-02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개념들이 차곡차곡 책에 나열되어있다는 생각이 드네여..탈발전, 생태계보전(?), 녹색 성장(?), 평등, 사회주의, 도움, 공유지(2009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중 오스트롬의 학문적 내용도 공유지의 비극을 어떻게하면 잘 해결할까였는데)의 강조등등, 지속 가능한 발전은 없다. 오로지 '지속 불가능한 수탈'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 이 문구는 거의 산업화된 나라로부터 식민지를 경험한 제3세계 국가에서 사용하던 개념이 아니던가여? 아~ 잘은 모르지만 윌리스틴의 세계근대체계(?)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본 기억도~ 수탈이라고 하면 그냥 즉각적으로 남미가 떠올라서요,, 이 책은 겉표지만 봐는데, 상당히 중요한 책이군여..그냥 전 제목만보고 패스할려고 했어요,,반자본 발전사전..이미 뭔가 백과사전같은 뉘앙스가 풍기잖아여^^ 그래서 그냥 단어설명만 하는 줄 알았어여,,경제학자와 정치가를 예를 들어서 그러는데..이미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은 미성장주의자들에게 학문적 근원의 영혼을 내비친것 같아여..지금 서울대를 비롯해서 각대학교의 칼리큘럼을 뒤져보면 미국의 아이비리그에서 철저하게 트레이닝을 배운 분들이신데 그런 분들이 좌파적 상상력의 교육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겠어여..국회의원들도 그렀구여,,약력보면 미국대학나온분들만 수두룩 하시니..으흠~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1-02-28 21:11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 말하는 수탈이란 북반부가 남반구에 행하는 수탈이라기 보다는(물론 그것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전지구에 대한 전체적인 수탈에 가깝습니다. 이 책이 백과사전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고 하셨는데, 한편으로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백과사전이라고 보아도 괜찮은 면도 있구요. 제가 리뷰에 적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책을 보고 나서 단어의 사용, 용어의 사용이란 얼마나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인가 다시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모든 용어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마련인데,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고 막 썼다가는 무식을 넘어서, 심각한 왜곡을 저도 모르게 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그러한 역사적인 의미를 체득하려면 더욱 많은 다른 글들을 읽는 수밖에는 없겠지만요.
우리나라 경제학의 미국 종속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어디 경제학 뿐이겠습니까. 거의 모든 학문분야가 미국의 종속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림은 없겠지요. 그것이 또 미국의 무서운 점일테구요. 아무튼 저도 이 책을 읽고 미국적 생활, 미국적 사고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네오 2011-02-28 22:25   좋아요 0 | URL
단어의 사용과 용어의 사용을 흐음, 저도 남발하는 경향이 엄청나게 있는데여~ 오~ 단어사용의 신중해야 겠네여,,미국적 생활과 사고방식 으음,,어떠한 것을 가리키는지 (귀찮으시겠지만) 소개좀 부탁합니다. 꾸벅(사실 많이 궁금해여~~)

맥거핀 2011-02-28 23:18   좋아요 0 | URL
미국적 사고나 미국적 생활방식은 뭐 다른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구요. 그저 우리 삶이 지금 미국적인 것을 추종하고 있다는 뭐 그런 얘기죠. 소비, 소비, 소비하는 삶 말이예요. 단어의 사용에 대해서는 정말 제 스스로도 경계하여야 합니다..;
 
<진보집권플랜>을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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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때때로, 아니 의외로 꽤나 자주,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도마 위에 오른다. 그리고 술자리에서건 어디에서건, 많은 경우 그것은 의도치 않은 논쟁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생산성있는 논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것은 어떠한 '반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그래서 이 다음에는 어떻게 하자는 거야,라는 말에 이르면, 논쟁은 이미 김이 빠져 버리고 만다. 뭐..그걸 내가 꼭 신경써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 건 정치인들이 열심히 생각해야지. 그러나 아주 불행하게도, 사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런 건 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책 <진보집권플랜>을 읽기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에는 MB정부의 실책들이 들어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주를 이루겠지, 그리고 말미에는 그래서 진보가 집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논의하고 있겠지. 그러나 이 책의 전체 줄거리는 내가 생각한 내용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오마이뉴스의 기자 오연호가 서울대 법대 교수인 조국과 문답을 벌인 이 책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앞으로 진보가 만들어가야할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이는 것이다. 조국 교수는 사회 경제 민주화, 교육, 남북 문제, 권력의 크게 4가지 부분에서 앞으로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 진보가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진보 세력이 실제로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을 짜야하는지, 실제의 인물들과 조직들을 거론해가며 논의를 펼치고 있다. 즉 이 책의 제목인 '진보집권플랜'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플랜'이란 '진보가 집권하기 위한 플랜'이 아닌 '앞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방법(디자인)'이라는 측면에 가깝다. 다른 말로 하자면 '권력'이라는 말보다는 '정의'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단, 물론 이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권력이든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는 것이 사실이라는 점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이 '反 MB'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음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좋은 세상은 '反 MB'로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결국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좋은 세상을 어떠한 형태로,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것인가라는 디자인이, 플랜이 필요하다. 그것은 진보가 흔히 공격을 받는 지점과도 맥이 닿아 있다. 진보는 대체로 '듣기 좋은 소리를 하지만,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즉, 되면 좋기야 한데, 그것이 실현 가능하냐,는 논리이다. 그러나 조국 교수는 이 책에서 현재의 실정들을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새로운 대안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제시된 대안들의 상당수는 정책의지만 있다면 실현 가능성이 높고, 일정 부분에서는 기존에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엿보인다. 즉 조국 교수의 말들은 과거에 무게중심이 놓여있다기 보다는 명백히 현실지향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한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마음에 걸리는 점도 있다. 먼저 한 가지는, 미래에 대한 논의는 과거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소위 '진보 정권'(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동안에 이루어진 몇몇의 실정(失政)들에 의한 비판은 이루어지지 않거나, 두루뭉술하다는 인상을 준다. 한미 FTA 문제,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문제, 카드 대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등등. 물론 몇몇 말들을 첨언할 수 있다. 먼저 조국 교수가 사실 이에 대한 반성을 할 직접적인 의무가 없다는 점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것이 실정인지 아닌지의 문제도 여전히 일종의 진행선상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문제들을 보는 시각이 앞으로의 진보 세력의 연합에 있어서 하나의 무게추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단적인 질문들이 그렇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민주당 정부를 진보 세력과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조국 교수는 이에 대해 사실 이미 '그렇다'라는 답안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짜여진 정치지형에서 '反 MB'의 구도에 주목하면 민주당을 넣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조국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사실 '反 MB'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떤 세상을 이야기할 것인가,라는 점이 아닌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두 가지를 첨언하고 싶다. 하나는 전체 논의의 틀을 '진보'가 아닌 '진보, 개혁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조국 교수의 단적인 선택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 한편으로는 책의 전체 논의가 너무 故 노무현 대통령의 유산에 기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점이다(오연호 기자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은 이외에도 있다. 예를 들어 아직도 남아 있는 민노당의 북한에 대한 태도, 국민참여당과 민주당과의 차별성의 문제, 진보신당의 비유연성 등등. 물론 누군가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킨 손가락만 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같이 그려나가야 할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려면 그 좋은 세상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만들어놓고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정권을 잡기 위한 연대는 긍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자면 현재 진보 진영의 각 당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세상들의 '다른 점' 그리고 연대가 어려운 점들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그 다른 점들을 깎아 나가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감춘 연대는 언젠가 깨질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달을 보랬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이는 점은 또 있다. 좋은 세상도 좋은 세상이지만, 그 좋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사람'만 자꾸 보이는 탓이다. 오연호도 뒤의 에필로그에서 말했지만, 조국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조국 교수에 주목하게 된다. 진보 진영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책에서 거듭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 조건들에 부합하기로는 조국 교수만한 인물도 몇 없다.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문제점을 이렇게 조목조목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면도 그렇거니와 (약간 농담을 섞자면) 그의 외모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꼭 농담만은 아닌 것이, 정치에 있어 겉보기의 중요성은 한나라당의 모 의원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은 조국 교수의 전체적인 틀을 딱히 가늠하기가 주저되는 면도 있다. 그의 전체적인 논의 중에는 우리나라의 아직 수준으로는 이 정도, 더 나아가고 싶지만 이 정도..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들이 종종 있다. 물론 그의 말에는 우리의 현 지점에 비추어 긍정되는 면도 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는 실제로 더 나아가고 싶은 것일까. 그는 처음부터 이 정도만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과연 그에게 그가 말한 세상의 조건들이 일정정도 성립되면,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니 그의 앞날이 궁금할 밖에. 책의 말미에 그는 '폴리페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나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폴리페서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하긴, 누구에게나 정치 행위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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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2-02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읽었습니다..아~ 요새 글쓸시간이 없어서 후속글 남겨지는게 계속해서 미뤄지네요^^ 그리고 영화보러 영상원, 아트시네마 열심히 다녔습니다. 감독들 GV있을때마다 거의 참석을 하면서 도대체 무슨이야기 하는지 궁금해서요,,맥거핀님도 아트시네마에서 이마무라와 에릭을 보셨군요^^, 그럼 좋은 구정 되시길~

맥거핀 2011-02-02 21:35   좋아요 0 | URL
후속글은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 저도 뭐 그렇게 열심히 글쓰는 편도 아니니, 다른 분 탓할 거리도 못됩니다.아..좋은 영화 보러 다니느라 바쁘시군요. 저도 말씀하신대로 시간이 좀 있어서, 이마무라와 에릭 로메르를 만나고 왔습니다. 좋더군요. 특히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위 영화는 상당히 감탄하면 봤습니다.
좋은 영화들 많이 만나셨으면, 언젠가 그 얘기도 좀 들려주세요. 이거, 요청만 많아지는 것 같네요. 연휴 잘 보내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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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라는 이 책은 1971년 네덜란드에서 벌어졌던 미셸 푸코와 노엄 촘스키, 두 사상가의 TV토론을 기본 축으로, 인간성과 정치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대비하여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토론의 사회자 폰스 엘더르스는 이들 두 사람을 소개하며 흥미로운 비유를 한다. 그는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분을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반대쪽 방향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부분을 보고 두 사람이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지향하는 바는 결국 동일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읽다보니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가 결국 어떤 하나의 목표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두 사람이 뚫는 터널이 언젠가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두 사람이 하나의 산을 서로 반대편에서 오르고 있다면 두 사람은 과연 정상에서 만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다.

인간성에 관련된 부분에서 두 사람의 차이가 먼저 벌어진다. 뒤의 '옮긴이의 말'에 잘 정리되어 있지만, 촘스키는 '인간성'이라는 어떠한 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또는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방식이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주전공인 언어철학의 문제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그는 어떠한 문명의 어떠한 어린이라도 언어를 배울 때에 제한된 정보로부터 고도로 복잡하고 조직된 지식을 이끌어내는 도식 체계(schematism)를 가지고 접근한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도식체계야말로 인간성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즉 다른 말로 하자면,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인간성의 요소가 있으며, 그것은 어떤 하나의 구체적인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푸코에게 인간성의 개념은 미심쩍은 것이다. 푸코에게 인간성은 어떤 시대상과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의 틀이 반영된 인식론적 지표에 불과하다. 즉 인간성은 어떤 하나의 과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 유형의 담론이 신학, 생물학, 역사학 등과 어떤 관계 혹은 갈등 관계를 맺는지 보여주는 지표인 것이며, 매우 가변적인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여 말한다면 촘스키는 관념론적 입장에 서 있으며, 푸코는 경험론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내 주전공인 교육학 식으로 (거칠게) 말하자면 촘스키는 객관주의적 입장에 서 있고, 푸코는 구성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입장은 그들이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두 사람의 의견은 충돌되지만, 예를 들어 다음의 부분만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촘스키는 어떤 실체적인 정의에 입각한 긍정적인 미래 사회가 존재할 수 있으며, 개혁가나 혁명가는 그 정당성에 입각하여(즉,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정당성에 입각하여) 혁명이나 투쟁을 행한다고 보았다. 반면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은 권력을 잡은 계급 혹은 권력을 잡으려는 계급이 내놓은 일종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개혁가나 혁명가는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하여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 즉 권력을 잡기 위해 혁명이나 개혁을 행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푸코는  "만약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지 확신이 안 선다"라고까지 말한다. 반면 촘스키는 인간성의 내부에 절대적인 기반이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바탕으로 정의 관념이 인간성의 바탕에 깔려 있다고 말한다.  

 

   
 

푸코: 하지만 저는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을 하는 목표가 더 큰 정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현재의 지배 계급을 축출하고 스스로 집권하게 되면 모든 계급의 권력을 억누르려 들 겁니다.
촘스키: 그러니까 미래를 위한 정당화라는 거지요.
푸코: 물론 그런 정당화를 내세우겠지만, 실제로는 정의보다 권력에 더 관심이 많을 겁니다.
촘스키: 하지만 정당화는 언제나 정의를 내세웁니다. 그렇게 해서 성취된 결과가 정당한 것으로 주장될 수 있어야 정당화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레닌주의자든 누구든 감히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 프롤레타리아는 권력을 잡을 권리가 있고, 모든 사람을 화장장으로 보낼 권리가 있다." 만약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집권의 결과라면, 그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1장. 인간의 본성_정의와 권력 中 (p.79)

 
   

 

이 부분은 이 토론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극명한 지점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숙고해 볼만한 부분이다. 푸코는 프롤레타리아건 부르주아건 간에 계급투쟁은 정의의 문제라기 보다는 권력의 문제를 담고 있다는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반면 촘스키는 계급투쟁이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해도, 그것은 정의의 이름을 걸고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당한 것, 정의로운 것으로 주장되어야(즉,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인간성 내부에 있는 정의의 관점과 부합하여야) 정당화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푸코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어떤 계급이 권력을 잡는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한 계급의 지배가 되고, 각 개인이 그것에 영속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그의 관점에서는 계급투쟁이란 감시의 주체가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이며, 목자권력이 바뀌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5장과 6장을 보면). 반면 촘스키의 입장에서는 어떤 계급투쟁이 진정한 정의를 바탕으로 정당성을 획득한다면, 그 계급투쟁은 정당화될 수 있으며, 그 집권은 긍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정의란 "모든 사람을 화장장으로 보낼 권리가 있다."라고 말해지는 것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칠게라도 다음의 몇 가지를 이에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니 내가 우리나라에서 진보 세력의 집권을 바란다고 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기 때문인가. 혹은 그것이 나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가.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 혹은 좋은 사회를 말할 때의 그 좋은 사회란 어떠한 형태의 사회인가. 그 집권한 세력이 내가 원하는 사회와 다른 모습의 사회를 구축하려고 할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푸코 식대로 좋은 사회란 것은 어떤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어떠한 지배 세력이든 감시와 국가이성을 가지고 개인을 옭아맬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그것을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 <진보집권플랜> - 과도 연관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보가 집권을 해야 하는 것은 어떤 사회를 만들기 위함인가. 우리는 그 사회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진보의 집권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사회의 모습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푸코가 암시하는 대로 진보의 집권이란 환상에 불과한가. 혹 그것이 환상이라면 우리는 무엇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

너무 1장의 두 사람의 TV토론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다른 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2장은 촘스키의 정치적 견해를 중심으로 촘스키와 프랑스 언어학자 로나 미추와의 대담이 이루어지는데, 촘스키는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비판을 허용하지만, 경제적 모순에 대해서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미국의 이중적 모습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3장에서는 촘스키와 로나 미추와의 대담이 계속 이어지는데 촘스키의 언어철학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1장에서 이루어졌던 푸코와의 대담을 요약하여 촘스키 자신이 정리하고 있다. 4장은 1976년 이탈리아에서 폰타나와 파스퀴노에 의해 이루어진 푸코의 대담이며, 담론의 지배(담론에 작용하는 권력의 문제), 감시와 억압 등의 푸코의 개념들을 푸코 자신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한 푸코는 자기 분야의 전문가나 학자를 의미하는 국지적 지식인과 전통적인 의미에서 보편적인 가치와 의미를 담지하는 저술가로서의 보편적 지식인을 구별하며, 진리와 관련된 이 두 가지 타입의 지식인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5장은 1978년 푸코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으로 그는 이 강연에서 원시 기독교가 목자(牧者)권력을 행사하게 된 역사적 기원 및 방식과 이러한 목자권력이 그리스 사상과 이질적인 것임을 밝히며, 이러한 목자권력 체제가 현재의 국가이성과 단속 이론(경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6장은 푸코의 간단한 성명으로 이 성명에서 그는 정부의 권력에 대항하는 개인들의 권리, 그리고 그러한 권리에 기반한 개인들의 연대를 주창한다.

다른 부분들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간 가지고 있던 의문의 실마리를 조금은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촘스키의 여러 저술들을 보면서 그의 언어철학에 대한 생각들과 정치에 대한 발언들이 어떻게 연관될까 궁금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가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본바탕 생각들이 그의 언어학이나 정치적 저술 모두에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언어학 역시 상당히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촘스키와 푸코의 사상에 담긴 기본의 밑받침을 살펴볼 수 있는 대략적인 개론서의 역할로도 손색이 없으며, 한편으로 이 두 사람의 사상이 충돌하는 지점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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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01-25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제목이 좋은데요. 서로 반대편 쪽에서 터널을 뚫고 오다가 언젠가는 서로 만날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말이긴 하지만 맥거핀 님이 말한 산 정상에서는 여차하면 서로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여하튼 그들은 만날 것이라 봅니다. 만난 지점에서 무척이나 놀라겠죠? 와~ 당신과 내가 생각하는것이 놀랍게도 맞닿아 있었다니?... 저도 이번에 받은 책들이 다 흥미로웠습니다..^^

맥거핀 2011-01-25 23:16   좋아요 0 | URL
읽기 전에는 두 사람의 사상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고나서는 생각보다 두 사람의 간극이 꽤 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왠지 TV토론에서는 푸코가 그걸 알아차리고(?) 별로 말을 많이 안하는 듯한 인상도 있구요. (물론 제 개인적인 인상이지만.) 조금 더 불꽃튀는 토론을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저는 이 책은 괜찮은데, <진보집권플랜>은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어요. 뭐가 나를 불편하게 할까..생각하는 중입니다.^^

네오 2011-02-0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책을 지금에서야 읽기 시작했습니다. 감시와 처벌을여ㅎㅎ, 촘스키는 상당히 좋아하는 분인데,,푸코와 다르다니 ㅋㅋ, 아 미셀공드리가 노엄촘스키 다큐멘타리를 만드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번 영화 좋지 않다고 계속 떠들던데요,,주위에서요 ㅎㅎ

맥거핀 2011-02-02 21:38   좋아요 0 | URL
저도 푸코 책은 대학 때 (어쩔 수 없이) 조금 읽은 게 다입니다. 항상 뭔가 공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여의치 않네요. 어렵다고 느껴지는 책은 점점 피하게 되고 말이죠. 그러면 안되는데.
음..맞아요. <그린호넷>평이 꽤 별로더군요. 저는 사실 공드리 영화는 좀..<수면의 과학>도 좋다는 평들이 조금 있었는데, 저는 별로였어요. 촘스키 다큐멘터리도 찍나요. 공드리하고 촘스키는 좀 안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왜 도덕인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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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다. 이 '잘 모르겠다'는 것은 책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책을 둘러싼 다른 여러 것과 연관된 물음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2010년 서점가를 주름 잡았고, 급기야 마이클 샌델은 한국에도 다녀갔다. 나는 사실 그런 열풍이 미스테리했다. <시크릿>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1Q84>가 일종의 신드롬이 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난데없는 '정의론'이 2010년의 우리나라 서점가를 주름잡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푸른 기와집에 계신 그 분이 새로운 정의론을 내뿜으며 독야청청한 이 시대에. 물론 모든 의문은 그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트렌디한 열풍에 맞추어 책을 구입하였음에도, 대책없는 게으름으로 끝끝내 책을 펼쳐들지 못했고, 뒤늦게 그 후속작 격인 <왜 도덕인가?>를 억지춘향의 심정으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왜 이 책이 그렇게 놀라운 화두가 되고 있는지. 그리고 총체적 난국의 우리사회에 어떤 비전을 던져줄 수 있을지. 아니, 거꾸로 말해보자. 우리 사회에서 '정의론'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도 많은데, 왜 우리 사회는 어떤 '정의'를 찾아보기 어려운지 잘 모르겠다.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왜 도덕인가?>에서 현재 미국의 상황에 대해 내내 우려를 표한다. '옳음(정의)'이 '좋음(선)'에 우선했던 지난 시대, 즉 어떤 공동체적인 가치는 쇠퇴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의 개인의 권리만이 우선되었던 지난 시대의 빈 가운데를 스며든 것들에 대해 마이클 샌델은 걱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 '스며든 것들'이란 절대적인 거대한 시장의 힘이기도 하고, 거대기업들에 의한 권력의 집중 현상이기도 하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근본적인 보수주의 가치관이기도 하고, 공화당 정부이기도 하다. 또 때로는 그 스며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그것은 일정한 조류의 흐름이기도 하다. 민주당과 공화당이라는 미국의 거대한 두 정당은 때로는 '옳음'을 강조하면서 그 대세를 장악하기도 하고, 그 장악된 대세 속에서 '옳음'만이 강조되면서 사라져간 공동체의 종교와 도덕적 가치들을 재빨리 선점하면서 다시 다른 대세를 가져가기도 한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은 걱정한다. 앞으로 이 오바마 행정부가 그간 민주당 정부가 해온 대로 '옳음'만을 강조하면서 공동체안에 그야말로 공동(空洞)만 남겨놓는다면, 공화당의 무책임한 시장주의와 근본적인 보수주의적 가치들이 그 공동을 채우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이 어리둥절함, 혹은 부러움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럼 우리는 뭘까. 우리는 그저 비어있기만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우리 푸른 기와집 사시는 분과 그들의 친구들은 그저 비어계실 뿐이라는 점이다. 즉 문제는 그들이 '나쁜 철학' 혹은 '동의하지 못할 철학'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그 '철학'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은 그 '철학' 대신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4대강을 위한 힘찬 발걸음이기도 하고, 북한에 대한 단호한 의지이기도 하고, '공정 사회'를 향한 멋진 슬로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아무리 잘 봐준다고 해도, 그것을 '철학'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들이 공정 사회를 이야기할 때, 그들은 '공정 사회'라는 것이 그간 전통적으로 무엇을 의미해왔는지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니 그저 부럽고 어리둥절할 밖에. 부럽다는 것은 그 정도 '철학'이라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부럽다는 것이고, 어리둥절하다는 것은 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심심한 인기를 끌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상황과 그간 미국사회에서 논의되었던 맥락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금의 한국사회는 이 책에서 말하는 미국의 자유주의적 맥락과는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형성된 사회다.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일본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오랜 독재정치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지형도는 상당히 왜곡되어 버렸다. 즉 우리에게는 현재 '옳음'도, 그렇다고 '좋음'도 없다.

또 철지난 패배주의의 관점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운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이 그야말로 들끓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사실은 대부분 텅 비어있는 한국사회에 마이클 샌델의 이 트렌디한 정의론은 조금은 수상해 보인다. 왠지 이 정의론은 익지 않은 라면 위에 올려놓은 양냄새 나는 치즈조각 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고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오지만, 속에는 익지 않은 면발이 꼬들거리는 그런 라면.
.................................

이 짧은 잡설이 이 책 <왜 도덕인가?>가 '읽을 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흥미로운 정의론이다. (책 제목은 <왜 도덕인가?>이지만, 도덕론이라기 보다는 정의론에 가깝다.) PART 1은 일종의 워밍업 단계로서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사회적 이슈들에서 왜 사회에 도덕적 가치가 우선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한다. 즉 이 부분은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전 단계로서 독자에게 한 가지 사태를 여러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며, 동시에 일종의 논리적 사고를 위한 연습문제들이다. 마이클 샌델의 본격적인 자기목소리는 PART 2의 말미와 PART 3에 집중되고 있는데, PART 2는 지난 여러 철학적인 논의들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정의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논거들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것은 칸트의 선험적 주체와 무연고적 자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고, 권리를 집착하는 자유주의를 버리고, 듀이의 공동체적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며,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종교 및 도덕성 간의 대립에서 도덕성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PART 3에서는 그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한 번 요약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그간 정치적 자유주의가 초래한 공동체의 비어버린 중심에 도덕적 가치를, 즉 공공선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사실, 진정으로 궁금했던 것은 그 마지막에 관계된 것이었다. 마이클 샌델은 책의 내내 공동체의 중심에 공공선이 자리잡도록, 즉 미국 자유주의 공공철학이 자리잡도록 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 공공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소개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4가지이다. 첫째, 자유주의 진영은 시민자치와 공동체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 둘째,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해하고 거기에 참여할 이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간곡한 권고로도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셋째, 정치권은 현대 경제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소비 중심의 경제가 아닌 자치 중심의 경제로), 넷째, 도덕적인 혹은 종교적인 담론을 공공생활과 분리시키려는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 즉 정부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는 점. 혹 마이클 샌델의 다음의 정의론에 관계된 내용이 또 출간된다면, 그것은 이 4가지의 요점을 다채롭게 논의 발전시키는 내용이 될 것이다.
.................................

아무튼 간에, 나는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이러한 일종의 작은 독서 열기가 공정하지 않은 공정사회에 저항하는 어떤 심리들이 반영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글쎄. 적어도 이 책만 놓고 본다면, 이는 절대 푸른 기와집과 친구들에 반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는 트렌디한 전범(典範)에 가깝다. 우리에게는 아주 잘짜인 본보기보다 조금 더 거친 목소리들이 필요하다. 원래 잘 치던 타자가 타격폼이 무너지면, 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을 다시 유심히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폼을 되찾을 수 있지만, 기초가 아예 없는 타자에게는 혹독한 러닝이 때로 답일 수 있다. 아, 그리고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깨끗하고 교과서적인 타격폼을 가지고 있다고 꼭 안타를 많이 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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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27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 글을 읽다보니, 제가 쓴 리뷰에 잘못된 부분이 있네요. <왜 도덕인가?>가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먼저 쓰여진 책이랍니다. 그러니, '후속작 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겠네요.

반딧불이 2010-12-2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네요.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맥거핀 2010-12-27 15:3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반딧불이 님의 리뷰를 보고 많이 공감했습니다.^^ 공감의 리뷰를 만나는 일은 늘 즐겁습니다.

꽃도둑 2010-12-2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분들! '철학없음'에 한표 던집니다. 책 한 권이 사람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그런것에 회의적인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정말 그건 지대로 된 뻥일수도 있겠지만 모든 것에는 순기능이 있는가 하면 역기능도 있는 법이지요. 저는 이번 센델의 책이 갖는 의미에 대해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어요. 짧은 시간안에 사람은 변하기 어렵죠 더욱이 사회는 더 느리고요. 변화되려면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인식의 틀이 바뀌어야만 의식과 행동의 변화가 오잖아요. 센델 책의 붐이 그 역할을 미미하나마 하리라 보거든요...^^

맥거핀 2010-12-27 15:37   좋아요 0 | URL
물론 저도 적어도 <시크릿>이 베스트셀러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혹시 또 그분들은 이것마저 자신들의 공으로 생각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네요. 이것봐라, 공정사회를 이야기하니까, 이런 책이 많이 팔리지 않느냐..이러면서요.ㅋ) 그래서 때로는 개인적으로는 붐비는 서점을 아주 싫어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붐비는 서점이 반갑기도 합니다. 뭔가를 읽으려는 시도는,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보다는 낫지요.
다만 저는 조금은 답답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샌델의 이번 책이 우리가 필요한 정의론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네오 2010-12-30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봤습니다..맨 마지막 구절, 야구의 잘 비유하셨네여, 양준혁이 우리나라에서는 배울만한 타격코치가 없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맥거핀 2010-12-31 13:59   좋아요 0 | URL
조금은 무리한 비유가 아닐까..생각했는데,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연말 보내시구요. 따뜻한 새해 맞으시길 바랍니다.^^

네오 2010-12-31 16:38   좋아요 0 | URL
네 새해복 많이 받으세여~~
 
<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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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었다. 이 책은 왠지 그 자신 '바다'를 닮은 것 같다.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 저자 쥘 미슐레는 거대한 폭풍우의 무서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아름다운 바다생물의 모습을 찬양하기도 하고, 믿기 힘든 인어의 모습을 닮은 바다생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다가는, 그 모든 가설들에 갑자기 의심어린 시선을 던진다. 그 때마다 책장은 내 손 끝에서 조금씩 부서져 하얀 포말로 변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버리고, 여전히 나는 바다 안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바다 주위에서만 맴돈다. 그리고 바다는 여전히 먼 곳에 떨어진 어딘가에 있다.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있다.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단순한 이유 몇 가지. 이 책은 바다의 거의 전부를 담으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대담한 시도를 하고 있고, 저자는 그 시도를 완수하기 위해, 당시(이 책이 출간된 것은 1861년) 존재하고 있던 바다와 바다 주변에 관한 상당수의 문헌들을 자유롭게 이 책에 인용하고 있다. 그 자유도는 생각보다 꽤 높은데, 아주 널리 알려진 책들도 있는 반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들도 있고, 후에 다른 책에 인용된 내용들이 재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19세기 중반부에 출간되었으며, 당시 최신의 과학적 지식을 담고 있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심쩍거나 아리송해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그런만큼 책에는 확인할 수 없는, 동시에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내용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그것은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 지속적인 어지럼증을 안긴다. 또한 저자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묘사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프랑스의 어느 한 해안가이기도 하고, 때로는 알려지지 않은 바다생물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물의 모습을 닯은 무엇인가이기도 하고, 가끔씩은 실체를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 예를 들어 폭풍우의 형상 - 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누구나, 끊임없이 머리 속에 어떤 심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심상의 모습은 항상 흐릿하다. 우리 머리 속에 박힌 몇 가지의 관념들이나 그간 알고 있던 바다생물들의 모습은 그 심상들을 그리는 데에 계속 방해만 줄 뿐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묻고 싶어진다. '그라브의 환한 곶'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뗏목처럼 생긴 '벨렐'은 어떠한 모습인지, '캉크르'는 상대방을 위협할 때 어떤 '폼'을 잡는지 말이다. 조악한 그림이라도 좋으니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사실 보다 근본적인 책읽기의 난관은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의 주된 글쓰기가 그간 우리가 접해왔던 글쓰기와 다른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1800년대 중반은 낭만주의가 절정을 지나고, 거의 끝마무리에 이르던 시기였고, 새로운 기술과 과학문명의 발달로 실증주의 및 사실주의가 촉발하던 시기였다. 이 책에서도 그런 사조의 분위기가 여실히 녹아들어가 있다. 즉 이 책 <바다>는 멸종해가는 바다생물에 대한 과학적 보고서이기도 하고,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과 과학적 발견들을 전하는 탐험기이기도 하고, 바다를 둘러싼 인간들의 사투와 침략을 보여주는 문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의 예찬이기도 하다. (각 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부는 바다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그것의 거대함과 위엄에 대해, 2부는 생명의 원천인 바다의 신비함에 대해, 3부는 바다에 대한 인간의 정복욕과 그것이 불러온 비참한 실패들,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생명(다른 류의 인간을 포함한)의 고갈에 대하여, 4부는 (은유적인 의미가 아닌) 치유의 힘을 지닌 바다에 대하여) 즉 이 책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가지의 글쓰기 방법론을 동시에 실천하고 있다. 그것은 정밀한 분석과 아름다운 예찬이다. 저자 쥘 미슐레는 대상을 캔버스 가까이에 올려놓고는 아주 극사실주의적인 묘사로 그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묘사하고는, 뭉툭한 유화물감으로 그것을 뭉게고 덧칠해버리고는 우리에게 그것의 아름다움을 볼 것을 주창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당연히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세밀화인가, 아니면 어떤 인상파 화가의 작품인가, 아니면 그 둘 다 아닌가.

그것의 답을 모른다고 해도, 적어도 한 가지 거의 확실해보이는 사실, 혹은 이 책에서 얻는 교훈은 있다. 그것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들에서 우리 인간들은 지금까지 그다지 많은 발걸음을 해나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심쩍거나 아리송해 보이는'이라는 오만한 표현을 나도 썼지만, 우리가 그 이후에 바다에 대해 알게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노력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다가 그만큼 거대하고, 수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폭풍의 회전 법칙을 처음으로 찾아낸 쥘 미슐레의 시대보다 폭풍에 대해 무엇인가를 조금 더 알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폭풍을 두려워하고, 폭풍이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힘을 넘어선 어딘가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천재지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저 수동적인 시도만이 가능할 뿐이다. 우리들은 그저 여전히 예보를 듣고, 그것에 대비하는 것 외에는 큰 방법이 없다. 인간은 여전히 바다의 바깥에서 바다를 바라볼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3부에서도 새로운 바다길을 찾기 위한, 또는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가보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 나온다. 그러나 그 탐험기들은 사실 대부분이 나약한 인간들이 거대한 바다에 부딪힌 실패의 기록들이다.

그리고 조금 더 엄밀히 말한다면, 우리 인간들이 바다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이 바다에도, 그리고 이 지구에도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을 읽기 얼마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전"을 다녀왔다. 그 사진전들의 수많은 사진들에서 내가 얻은 교훈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은 자연 그대로 놔두었을 때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의 자연을 향한 많은 시도들은 자연을 망가뜨렸고, 수많은 동식물들을 멸종위기에 빠뜨렸다. 자연은 그 나름의 자정작용으로 근근히 버텨왔지만, 그 한계는 거의 가까이에 보인다. 그것은 바다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저자인 쥘 미슐레는 마지막 4부에서 바다의 치유의 힘에 대해 말하며, 해수욕을 적극 권장했지만, 나는 그것에는 별로 동의하지 못하겠다. 바다의 치유의 힘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치유의 힘이 너무 강력한 것을 우려하는 탓이다. 

그 바다의 거대한 힘을 말하는 미슐레의 문장들을 사진전에서 보았던 몇 장의 사진들의 설명으로 마지막으로 붙여본다.   

   
 

지난 세기 동안 엄니 때문에 무차별적으로 사냥당해야 했던, 평균 몸무게 1,000킬로그램의 바다코끼리 떼가 이제는 미국 알래스카 주 인근 추코치 해의 한 작은 부빙 위에서 또 한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태양계의 한 작은 행성 위에 앉아 있는 인간 떼의 모습이 이럴까? 지금 당장 가라앉지는 않을 것 같다. ⓒ Alaska Stock Images / National Geographic ('지구를 담은 사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展 도록에서) 

 
   

   
  그 옛날 생물 가운데 가장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던 선량한 해표와 정다운 고래, 대양의 태평한 자부심, 이 모든 것들이 극지의 바다로 얼어붙은 살벌한 세계로 도망쳤다. 그렇지만 놈들은 그토록 힘든 생활을 모두 견딜 줄 안다. 여전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놈들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쥘 미슐레 <바다> p.232)
 
   

 

   
  바닷물 한 방울 속에도 생명의 드라마가 가득하다. 약 15배로 확대한 바닷물 속에 벌레처럼 생긴 요각류, 화살벌레, 필라멘트 같은 시아노박테리아, 직사각형 조류(藻類), 물고기 알, 쌀알만한 게의 유생 등이 보인다. 거대한 것에서 미세한 것까지, 인간에서 미생물까지,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찬란하다. ⓒ David Liittschwager / National Geographic ('지구를 담은 사진전' 내셔널 지오그래픽 展 도록에서)
 
   

   
 

그 표면에 젤라틴 성분의 도톰한 박피가 형성되었다. 나는 바늘 끝으로 그 작은 티끌을 떼어내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이런 모습이 나타났다.
통통하고 작달막하며, 힘차고 악착같은 소용돌이가 생명에 취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기묘한 바쿠스 축제로 탄생을 축하하는 듯했다.
그 배경에서, 아주 작고 미세한 장어나 뱀 같은 것들이 헤엄친다기 보다는 그냥 앞으로 튀어나오려고 떨고 있었다(이것을 '비브리오' 또는 콤마균이라고 한다). (쥘 미슐레 <바다> 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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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2-2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편집기는 참 부드럽게 다뤄줘야 하는 것 같다. 글 하나 올리기 힘드네...ㅎ

2010-12-24 0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4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오 2010-12-24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보고 갑니다,,추천 꾸우욱~~

맥거핀 2010-12-24 17:02   좋아요 0 | URL
항상 글에 좋은 평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