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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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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먼저 두 가지 정도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 책에 나온 시기 구분과 그에 따른 명칭들이다. 이 책 <코뮤니스트>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것이 10월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이기 때문이다)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기원'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체제를 '실험'으로 명명한다. 이 코뮤니스트들이 '도약'을 시작하는 것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밀어내고 집권을 확고히하는 1929년부터이다. 이 '도약기'는 소비에트 정권과 소비에트 블록 건설의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1947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코민포름의 결성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마셜플랜의 대응으로 만들어진 냉전체제인 '확산'의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소련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미소냉전의 축에서 소련이 소비에트 블록 안에 어떻게 보면 갇혀있던 시점이라 확산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과 북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공산주의의 '확산'의 시점으로 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1957년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변형'되기 시작한다. 데탕트가 일어났고, 쿠바, 중남미 등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며, 마르쿠제, 알튀세르, 사르트르 등이 맑시즘의 방향을 새롭게 잡으려고 하였다. 이 공산주의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고 '종언'으로 들어가는 것은 1980년 레이건이 미국에서 정권을 잡으면서부터이다. 브레즈네프나 안드로포프 등의 당시의 소련 서기장들은 레이건 이후의 미 행정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19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그 가느다란 생명줄을 거의 끊어버렸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다.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은 책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고, 나름의 답을 내리고 있다(그 답은 마지막 40장에 정리되어 있다). 1부 '기원'에서는 소련 체제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나, 당 독재였나, (공산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나라가 아닌, 왜 가장 가난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였는가 등의 질문을 한다. 2부 '도약'에서 묻는 것은 왜 소련은 공산주의 확산의 길이 아니라, 일국공산주의의 길을 갔는가, 주변국, 미국 등에서의 국제적인 봉기는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등의 물음이다. 3부 '도약'에서는 권력 투쟁 중에서 어떻게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는지, 소비에트는 나치즘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왜 그토록 커다란 억압의 체제가 필요했는지 등에 대해 묻는다. 4부 '확산'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냉전 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냉전 체제가 왜 스탈린에게 필요했는지, 그리고 작은 조직에 불과했던 마오쩌둥이 어떻게 거대한 장제스 군대를 이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5부 '변형'에서는 왜 모든 공산주의가 변형되며, 동일한 실패의 길을 걷는지, 그리고 공산주의가 모색한 탈출구는 왜 결국 실패로 가는 출구였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 6부 '종언'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개혁이 어떻게 달랐으며, 왜 중국은 성공하고, 소련을 실패하였는지, 그리고 공산주의는 왜 그토록 허망하고 급속하게 붕괴되었는지 돌아본다.

 

로버트 서비스의 이 책 <코뮤니스트>는 이 많은 질문들에 대해 나름 성실히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단편적인 사실이나, 의견의 제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과 풍부한 사료의 제시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되도록 여러 정황들을 제시하여 독자의 판단을 이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질문 자체가 그렇게 신선하지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뒤에 옮긴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파 역사가들에 의해 이 질문들의 상당수는 거의 결론이 내려진 이후이고, 로버트 서비스가 다른 점은 보다 성실한 자료조사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더 많이 확보했다는 것 뿐이며, 그 답 자체는 예전의 역사가들과 동일하게 상당히 편향적이다. 사실 이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답을 뭉뚱그려 보자면, 결국 로버트 서비스가 보는 최종의 답은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 체제는 태어날 때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욕이나 생존욕과 결합하여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괴물의 체제였다는 것이 로버트 서비스가 내놓은 최종의 답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급속히 무너질 것이라고 계속 오판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묘한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부터 당의 독재는 시작되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 체제에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차우세스쿠나 폴 포트 등의 잔악한 폭군들이 등장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는 감시와 억압으로 기능하는 체제이고(그것은 거의 모든 공산주의 체제가 비슷한 형태를 가진 소비에트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생존이 가능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된다. 즉 소비에트 모델은 결국 실패했지만, 그나마 그 모델이 일시적인 유지라도 가능케했다), 그런 체제라면 감시와 억압과 폭력을 가장 잘 수행해낼 자, 그러니까 가장 잔악하고 폭력적이며, 교활한 자가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것은 그가 말 그대로 '강철'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가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코뮤니즘의 역사에서 코뮤니즘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를 사상의 흐름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으로 치환하고, 모든 '주의'의 개념들을 독자의 머리 속에서 효과적으로 제거한다. 이 책에는 일견 비슷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주의'들의 명칭이 나온다. 공산주의, 맑시즘, 사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아나키즘, 나로드주의, 아나르코생디칼리즘, 사파티즘, 카스트로주의 등등 거의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을 대체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모르거나 귀찮아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위주의나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각각 한 챕터를 할애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코뮤니스트들을 탈코뮤니즘화하는 것은 이들 코뮤니스트들을 자신들의 이익이나 정권을 잡기 위한 정복욕의 화신, 혹은 쓸데없는 투쟁에 골몰하는 골치아픈 종자들, 혹은 죽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처럼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독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카우츠키의 맑시즘과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맑시즘은 얼마나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맑시즘이고, 무엇을 위한 수정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단지 권력에 목마른 멍청한 꼭두각시들로 보인다.) 이는 책의 내용 전체를 지루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저 이들이 결국은 사라질 권력을 잡기 위해 각종 잔악한 일을 저질렀던 그야말로 오류로 가득찬 인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같이 읽을 책으로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강의>를 추천.)

 

물론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수많은 폭력과 학살, 기근, 감시와 억압이 실제로 있었고, 공산주의는 현재 거의 종적을 감춰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책 역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며, 그 질문에 담긴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의 희망은 왜 절망이 되었나?" 즉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은 다르다. 자본주의는 이미 그 태동에서부터 그 잔악성을 수많은 사람들이 감지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출현하였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안고 탄생하였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것이 잔인한 뒷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많은 이들은 그래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 희망이 절망이 된 것일까. 로버트 서비스의 이에 대한 답은 예스다. 즉 공산주의의 희망이라고 믿어졌던 요소들, 그것들은 이미 잘못 만들어진 뿌리에서 길러졌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는 자연스럽게 절망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보면 농업의 국유화는 생산성 저하와 마치 직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즉 땅이 내 소유가 아니면 모두 생산을 할 생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문제의 요소는 이미 공산주의 그 자체에 들어있었으며, 미국이 조바심을 내지 않았어도 이 소비에트 체제는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이 질문에 내린 답이다. 즉 희망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은 절망이었다는 것. (이의 반대편, 그러니까 수정주의적, 좌파적인 시각에 물론 다른 해석이 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정치형식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고, 동시에 독재나 전제정치와도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산주의의 경우 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과 도리어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중들이 분배하여 나눠같자는 공산주의의 이상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공산주의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교묘한 용어를 내세워 어느 틈엔가 그것을 당 독재로 교묘하게 치환하였으며, 그런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절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를 교묘하게 변질시킨 레닌 등의 인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그리 고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도 있다. 그것은 그 희망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열광적인 찬성을 보내고 때로는 목숨을 걸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그 오류를, 오류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바보들이었는가, 단지 멍청한 꼭두각시들에 불과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희망을 보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어떻게든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의 폭력적인 현실들이 드러나고 그것이 거의 종말에 다다른 지금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내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내재된 가능성들이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도 책의 뒤편에서 쥐꼬리만큼 밝히기는 했지만, 자본주의가 저지른 폭력들도 결코 공산주의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더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공산주의의 완전한 종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책을 보며 저자의 시각과 다르게 사실 역으로 놀랐던 것은 온 세계에 공산주의자들이 이렇게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공산당을 콩사탕으로 말해야만 했던 우리의 시각에서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의 등장과 스러짐을 보며, 도리어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살아있는 한.

 

 

덧.

그러므로 사실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은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나 비우호적인 사람이나 어딘가모르게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면 공산주의의 피의 역사만을 줄기차게 서술한 부분이 마음에 걸릴 것이고, 비우호적인 사람이면 도대체 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를 찾기 못할 테니. (시작부터 망가져서 어차피 언젠가 당연하게도 끝날 운명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읽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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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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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2 0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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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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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소설)의 묘미, 혹은 쾌락은 대체로 전복에서 나온다. 현실을 뒤집는 것,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 말이다. 예를 들어 이 책 <가족 기담>에서도 '기담' 중의 하나로 소개된 <홍길동전>의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일종의 즐거움을 주며 널리 읽혔던 것은 그것이 결국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서자인 홍길동이 적서차별의 굴레를 넘어 한 나라의 왕이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상당수 이야기의 원천이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원천일 것이 분명한 복수극이 만연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소개된 <장화홍련전> 같은 것. 그것은 현실에서는 그러한 복수가 결코 쉽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복수가 그렇게나 쉽고,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이라면 누가 복수극 따위를 읽겠는가. <장화홍련전>에서 귀신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생각한다고 해도, 조선시대와 같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죽은 전처의 딸들이 가부장의 위세를 등에 업은 계모에게 복수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듣는 자와 말하는 자 모두에게 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 혹은 밀려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이야기(소설)는 패배자의 기록이라는 단적인 말을 굳이 가지고 오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이야기 속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읽는다. (그래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새드 엔딩은 해피 엔딩보다 사랑받지 못할 운명에 있다.) 하물며 조선시대와 같이 엄격한 신분질서가 짜여진 폐쇄적인 사회, 가부장적 질서가 사회의 기초에서부터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으랴. 평생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집안에서만 갇혀 지내야 했던 수많은 여인들, 벼슬길이 애초에 막혀있던 (서자와 얼자를 포함한) 수많은 양반들이 그나마 합법적으로 기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 뿐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마저도 완전히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다. 모여서 무엇인가를 쑥덕쑥덕 이야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권장되는 행위는 아니었다. 책에 보면 실상 비참한 이야기를 모여서 웃으면서 즐기는 부분을 부정적으로 보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자조적인 웃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자조적인 웃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와 같이 신분차별이 공고한 사회에서 이야기는 대체로 두 가지 것을 담는다. 하나는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꿈이다. 그러니까 "그리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결말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결말에는 수상쩍은 무엇인가가 남는다. 그것은 그 결말이란 너무도 간단하고 덧없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결말에는 "그들이 그래서 정말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을까?"와 같은 질문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두 번째 것, 그러니까 결국에는 한계가 있는 승리, 결국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담는다. 위에서 예로 든 <홍길동전>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홍길동은 결국 가상의 나라, 율도국의 왕이 된다. 조선이라는 거대한 신분제적 봉건 체제는 여전히 건재하며, 홍길동 역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 그 우두머리가 될 뿐이다. <구운몽>이나 <옥루몽> 같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말해주듯 한낱의 꿈일 뿐,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가 개입될 것 같다. 그 하나는 조선과 같이 공고한 봉건 신분제의 사회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몸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으로 남기는 방각본이나 필사 형식의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단지 구술로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일지라도 이야기에는 적절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결국 이 이야기들은 창작자의 내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어하나 당대의 현실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고,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어느정도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것은 묘한 시기와 질시를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소설의 창작자들, 그리고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기를 바라면서도, 그 완전한 성공의 모습을 보는 것을 불편해하며, 그가 결국 어떤 한계를 가지게 되었을 때만이 가까스로 안도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그것을 보는 현재 자신의 처지를 은연중에 의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 <가족기담>에서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은 결국 이 두 번째이다. 그들이 이루어낸 무엇인가가 아니라, 결국 이루어내지 못한 무엇인가를 볼 것. 그것은 그러므로 이야기의 판타지를 모두 걷어내고, 그 이야기 내면에 담긴 당대의 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무엇이 이야기 속 그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지어내고 듣는 모든 이들을 어떤 한계에 가로막히게 하는가? 저자 유광수는 옷고름을 들춰내고 이야기의 속살을 드러내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저자는 꽤 집요하다. 저자는 단지 뽀얀 속살,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저자는 집요하게 살과 핏줄을 발라내고 그 뼈 속까지 들여다본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기담이 된다. 단지 뼈가 드러나서 기담이 아니라, 우리는 그 뼈 속에 사무친 무엇인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과 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유교 이데올로기와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상 그 이데올로기가 뒷받침해주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의 기담들이다. 부모에게 희생당하는 아이, 반대로 아이에게 희생당하는 부모, 정절과 포르노그래피를 동시에 꿈꾸는 남자들, 무능한 가장들이 벌이는 타자화, 근친상간,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죽기를 바라는 열녀 만들기 등등.

 

뭐 그러므로 사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텍스트는 그 이면을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에서 겉으로 드러난 교훈과 하등 상관이 없이) 텍스트들은 자발적,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당시의 세계관을 담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는 무의식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또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는 (특히 유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은) 여러 번 행해지기도 했고, 우리에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다시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와 부모의 상호희생 강요, 정절과 포르노그래피의 이상공존, 타자화 같은 것은 우리에게도 낯선 키워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낯설다기 보다는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이야기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뉴스에서 본다. (그리고 동시에 현재에 만들어지는 수많은 텍스트들도 이 키워드들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아마도 먼 훗날 후세인이 우리시대의 텍스트들을 본다면 그 기괴함에 분명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들을 곱씹는 것은 단지 유교 이데올로기를 욕보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무엇인가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즉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새로운 버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책 <가족 기담>은 그만 이 부분에서 주춤하고 만다. 책 전반에 주로 흐르고 있는 약간은 과감한 성 담론들을 보고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기대했나 보다. (물론 예전 고려가요나 향가의 후렴구들을 성행위의 열락의 언어들로 보는 해석들에 탐닉했던 내 전력으로 비추어 볼 때 저자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책 전체 내내 각종 다양한 가족에 대한 기담들을 보여주던 이 책은 결말부에 이르러 다시 가족주의로 돌아온다. 이는 예를 들어 극 내내 잔인한 복수극의 전말을 보여주던 영화가 결말부에 이르러 "사실 복수는 나쁜거야. 그러니까 복수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말고 용서를 하렴."이라고 말하는 격이랄까. 상처에서 고름을 짜내고, 그 빈공간을 보게 해주었으면, 이제 약을 발라아먄 한다. 그 공간에 그 고름을 소독해 다시 집어넣으면 다시 곧 곪을 뿐이다. 예를 들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베트남 공항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족들을 이야기하며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들에게서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새롭게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론 그들 자신의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가족주의적인 각성의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시에 필요한 것은 그들을 가족으로 만들어(붙들어) 줄 시스템이다. 즉 유교 이데올로기를 걷어냈으면 무엇인가 다른 시스템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입을 다문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며 얼버무리는 책 속 이야기들과 비슷해진다.) 뭐 꼭 저자에게 묻는 질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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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9-26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상이라니까 생각난 건데 학교다닐 때 문예비평론이란 과목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블로그에 쓰는 글은 거의(맥거핀님은 제 이웃 중 유일하게 벗어나시는 것 같지만) 인상비평이잖아요. 좋게 말하면 감상문(느낌글) 나쁘게 말하면 잡글. 무언가를 보고 쓸 때 격식을 갖추면 절대 하면 안되는 것이기도한데, 이 책이 <홍길동전>이나 <구운몽> 같은 걸 시대상으로 풀어 가족을 얘기하는 것에서 뭔가가 (저 스스로에게) 환기됩니다..

토론시간에는 제일 먼저 분석하는 게 작가도 아니고 내용도 아니고 소설이 씌어진 시대상이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거든요. 저 요즘 글도 침체기..(쓸 욕망이 생기질 않..) 댓글은 쓰고나서 돌아서면 허무해져요ㅠ.ㅠ

뭘 보고 읽는데 도무지 느껴지는 것도, 지적욕망을 채우고픈 마음도 잃어버린 가을의 시작!

일어나요, 맥거핀님!!! (여기서 또..)

2012-09-27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8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동의 배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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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취재하여야 하는 대상들과 적당한 안전 거리를 둔 채, 사실은 아니지만 그럴듯해보이는 사실들과 사실이지만 적당한 왜곡을 뒤섞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는 이른바 일을 죽어라고 하지만 여전히 빈곤의 늪에 빠져 있는 '워킹 푸어' 계층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직접 워킹 푸어가 되어 그 한가운데에 뛰어들기로 한다. 즉 현재까지의 자신의 삶을 버리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도시로 가서 웨이트리스, 청소부, 판매원 등으로 일하며 최대한 버텨보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처럼 신통치 않다. 임금은 거의 바닥이었고, 근무환경은 열악했으며, 생활환경은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만 했고, 결국에 길게는 서너달, 짧게는 몇 주를 버티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도시로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물론 이 책 <노동의 배신>에서 저자의 성공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아니 어떠한 의미에서는 중요할 수도 있다. 저자는 여러모로 좋은 조건에 속했으니까. 그녀가 버티지 못했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가지를 시사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들 '워킹 푸어'의 생활에서 어떠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저자의 체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러한 일을 열심히 하지만 생활의 영위가 어려운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에서 문제거리, 일종의 위협이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그 위협은 실제적인 위협과 정신적인 위협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다시 이 실제적인 위협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 주거의 문제와 예기치 못하는 사태의 문제로 살펴볼 수 있다. 저자가 이런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에 가게 되면 늘 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거공간을 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직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구할 수 있는 직업의 수준에 따라 구할 수 있는 주거의 형태가 달라지는 가장 큰 이유 외에도, 주거공간과 직업공간이 얼마나 떨어져있는가, 주거의 공간이 얼마나 불편한가에 따라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저임금 노동자에 있어서 주거의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는가는 매우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이며, 늘 위협이 되기도 한다. 다른 나머지 실제적인 위협은 예기치 못하는 사태에 대비하는 안전장치가 없다는 문제이다. 실제로 저임금 노동자의 생활은 소득의 거의 전부분을 주거비와 식비 등으로 소비해야만 이어질 수 있는데, 이것에는 예를 들어 의료의 문제나 이혼, 갑작스런 해고, 사고, 범죄 등으로 일어나는 급작스러운 부수적인 비용이 전혀 고려될 수가 없다. 더구나 이러한 것은 대부분 노동자의 수입보다 훨씬 큰 비용부담을 초래하는 바, 저임금 노동자들은 이러한 돌발사태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 못지 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신적인 위협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구직을 하는 순간에서부터, 일을 하는 모든 부분에 걸쳐서 회사나 관리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심리적 굴욕감, 모욕감은 일상화의 단계에 이르며, 이것은 단순히 특정 관리인의 특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보다 큰 시스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저자가 볼 때 구직 시에 이루어지는 심리검사나 약물검사 등은 실제로 일할 만한 사람을 골라낸다는 실제적인 이유에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낮은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심리적으로 회사에 복종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다 큰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인 모욕감이나 굴욕감은 직업활동 시에만 사람을 짓누르는 것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걸쳐서 이런 저임금 노동자들을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들',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로 보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고, 여러 다양한 시스템으로 구별해내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기관의 종사자들마저도 비슷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즉 가난은 거의 순전히 이들의 잘못, 즉 일종의 범죄와 같이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이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들이 가지는 몇 가지의 함정이 있다. 즉 우리가 이것이 바로 저임금 노동자들이 가지는 진정한 실상이라고 완전히 믿어서는 안되는 몇 가지 함정 말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첫 번째는 저자 자신이 밝혔듯, 저자는 중년의 여성이라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꾸준한 건강관리로 일단 신체가 건강한 편에 속했으며, 가사노동이나 가족에 대한 부양에 따로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고, 다른 여러 귀찮은 상황들을 크게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에 속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주거의 문제에서만 봐도, 저자는 다른 많은 저임금 노동자와 달리 혼자서 지내는 비교적 여유로운 주거공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물론 범죄의 위협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두 번째는 저자가 마지막 후기에서도 밝혔듯, 이 체험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의 미국, 그러니까 닷컴 버블의 마지막에 들어서 있던 미국의 경제호황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즉 저자의 경험에서도 비추어 볼 때 당시는 여러 저임금 일터에서 일할 사람을 많이 모집하던 시기였으며, 저임금일망정 노동의 유연성은 분명히 지금보다는 더 있던 시기였다. 세 번째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는데, 저자의 심리상태는 분명히 실제의 저임금 노동자와는 다르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저자가 이 체험을 대강 했다는 의미도 아니고, 보다 더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저자에게는 그 심리적 무력감은 사실 거의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지긋지긋한 쳇바퀴말이다. 즉 저자에게는 이것이 언젠가 끝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고 해도, 이미 그것을 의식하는 데에서 만들어지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이 믿음의 강도는 아마도 다를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이 심리적 무력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는 말도 아니다.) 다르게 말해서, 이 책에는 저자의 세 도시에서 세 번의 다른 경험이 나와있는데, 사실 진정한 문제는 책에 집필되지 않은 그 이후일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 마지막 한계에 봉착했을 때 저자는 다른 도시로 옮기거나, 혹은 그만두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면 되지만, 다른 저임금 노동자들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함정들은 이 이야기들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더 덧붙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 사실은 예를 들어 왜 이런 상당히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뭔가 행동을 보이거나, 연대하지 않는가, 혹은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라는 질문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에는 저자가 여러 분석을 하고 있지만, 사실 한 가지 힌트가 될만한 이야기들이 있다. 앞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각각의 실험 장소에서 떠날 때 선택한 동료 몇 명에게 자신의 정체를 '커밍아웃' 했을 때 그들의 반응이 깜짝 놀랄만큼 실망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 중 제일 재미있었던 반응은 "그렇다면 다음 주 저녁 근무에 나오지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이야기가 뭔가 시사해주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즉 그들의 관심사는 어떤 노동에 대한 문제점의 파악 혹은 그 문제를 바탕으로 한 대안의 모색 같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나오지 않음으로서 다음 주에 새로운 동료를 만나거나, 본인의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저임금 노동자들이 시야가 좁거나,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환경에서 '서바이벌'하는 것이며, 현재의 어떤 시스템이 그들에게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몰아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저자의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들고 계속 그렇게 만드는 짓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정부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나 길에 나앉은 극빈자들을 제도적으로 괴롭히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 '그들이 원한다면 더 나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얻기 위해 조직을 결성한 권리를 주자'는 것 등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은 미국에서나 우리환경에서나 여전히 멀고도 험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것은 분명히 쉬운 싸움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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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이 책 <노동의 배신>은 쉬운 이야기 접근 방식과 그녀의 시니컬한 유머들로 술술 읽히는 책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책을 덮고, 이 책이라는 것의 작동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물론 이 책의 타겟은 저임금 노동자들이라기보다는 명백히 중산층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에 가깝다(물론 우려를 담아 말해두건대, 분명 이것에는 상당수 내 편견이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나는 이 두 그룹을 구분지으려는 의도로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자신의 책을 많은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은 워킹 푸어들이 읽어줘서 기쁘다고 말했지만, 저자가 묘사한 생활대로라면 이들의 생활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당히 모험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말에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이 책이 흥미로울까. 매일매일 최저임금을 받으며, 관리자들의 감시와 모욕, 전 사회적인 굴욕을 견뎌내며(애써 의식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이어나가는 것을 묘사한 이 이야기가 흥미로울까. 혹은 분노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반면 나는 책이 흥미롭고 저자의 문체도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저자의 이 시니컬한 유머들 - 그의 상당수는 자신의 중산층 이상 계급의 허위를 자각하는 데에서 나온다 - 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때로는 분노를 느낀다는 이 사실이 나의 어떤 계급과 연관되는 것인지, 혹은 고등교육 이상이라는 학력과 연관되는 것인지, 역시나 확신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노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 시간들에) 워킹 푸어의 체험을 담은 이 책을 읽는다, 그리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혹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블로그에 끄적거린다,는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아마도 이 덧붙인 이 모든 이야기가 나의 허위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것은 적어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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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8-28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정된 날짜보다 '역시나' 하루 늦었네요. 알라딘 서평단 담당하시는 분과 대장님에게 죄송한 마음 전합니다..

아이리시스 2012-08-28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운동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책'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영화도 물론이고! 황홀하게도 읽고 싶게 생기긴 했지만, 읽고 쓰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에 저도 한 표요!

적어도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같네요, 이 리뷰를 보니까.

이제 비가 오는 것 같네요. 문 닫으러 가요^^

맥거핀 2012-08-28 16:12   좋아요 0 | URL
뭐 잘사는 사람들은 스케일이 다를지 몰라도, 못사는 사람들은 어디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책에 있는 내용으로만 본다면 어떤 부분은 한국이 낫고, 또 어떤 부분은 미국이 낫고 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도토리 키재기같고, 거기서나 여기서나 가난한 사람이 무시받고 하는 것은 비슷한 듯 싶어요.

이제 아래동네는 좀 나아졌나요? 좀 있다 나가야 하는데 걱정되는데..

2012-09-04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장노동을 하면서 절망에 빠졌던 시몬 베유가 생각나네요.
어쨌거나 뭐라 말하기가 좀 그런 리뷰예요. 내가 저만큼의 저임금 노동자가 아니라서?! 맥거핀 님이 이런 글을 읽고 쓰는 자신의 행동을 허위라고 딱 잘라 말해서? ^^;; 여튼 이 세상 살기가 무척 힘드네요. 모두 모두.. (여기엔 나도 들어가요..ㅋ)

맥거핀 2012-09-06 00:25   좋아요 0 | URL
위에 아이리시스님도 이야기하셨지만, 노동에 대한 얘기들을 하는 것이 좀 어렵죠. 뭐 예전에 대학 때 집회에서 '철의 노동자' 같은 노래들을 부를 때 느끼던 어떤 감정들이랄까요. 저도 당연히 들어갑니다. 한국사회에서 이런 세상살이의 문제에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많나요? 잘 모르겠네요.

2012-09-06 08:11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런 이들이 많은지 적은지도 모르고, 그냥 처해진 환경에 살고 있는 게 우립니다. 진짜..ㅎㅎ -세상이 정확히 뭐가 몇 퍼센트로 구성되었는지 정말 몰라요~.

맥거핀 2012-09-06 21:52   좋아요 0 | URL
나이 좀 더 먹으면 알 수 있을까요? 별로 희망적이지 않은게, 나이 많은 먹은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 하는 짓거리를 보면...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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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몇 가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뱀파이어라는 것은 왜 탄생되었는가(왜 발명되었는가), 왜 특히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들은 각광받고 있는가, 뱀파이어가 마늘, 햇빛 등에 치명적인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뱀파이어는 왜 하필이면 박쥐로 변신하는가, 뱀파이어는 왜 늙지 않는가(도리어 젊어지는가), 뱀파이어는 피를 그렇게나 마셔대는데, 왜 그렇게 늘상 창백한가. 즉 내 질문은 '뱀파이어의 양상'에 관계된 것이라기 보다는 그 '기원'이나 '이유'와 관계된 것인데, 요하임 나겔의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그리 마땅한 해답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이 책은 뱀파이어의 기원이나 존재가치에 대해 고찰하는 책은 아니고, 그것을 다른 여러가지 것들과 연계하여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즉 이 책은 문학, 미술, 음악, 오페라, 뮤지컬, 영화 등에서 나타난 뱀파이어의 여러 다양한 존재양상들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일종의 '뱀파이어 백과사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며, 수많은 예술작품들 중에서 뱀파이어의 '정수'만을 다루고 있는 것들을 일별하여 잘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뱀파이어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내 관심은 그런 존재의 양상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이유나 기원에 관계된 것이므로 이 책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이유에 대해서 추측해보기로 한다. 책에 나온 이야기들에 따르면 뱀파이어의 기원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러 여자 악령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신생아를 잡아먹는 여자악령인 릴리트나 소년들의 피를 갈망하는 라미아, 복수의 여신들 에리니에스, 밤중에 나타나 몰래 동침하는 수쿠부스 등이 그러한 것들인데, 이는 죽은 자들이 되살아난다는 중세의 미신들과 결부하여 점점 뱀파이어라는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흥미로운 것은 이 기원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라큘라 백작과 같은 남성 흡혈귀가 아니라, 여성형 악령들이라는 것인데 이는 아무래도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남성 중심의 사회에 대한 위협, 남성 중심의 세계관에 대한 이면으로서 설계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기독교적 믿음이 제시하는 남성 중심적 세계의 안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뱀에게 유혹당한 이브)을 끊임없이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들에게 구원이란 남성들에게보다 엄청나게 멀리 있는 것, 남성들에게 복종하여야만 구원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할 필요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이러한 여성형 악령들의 출현이 에로스나 타나토스와 결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러한 악령들은 괴상하고 혐오스럽게 그려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때로는 매우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이는 또한 한편으로 남성들의 이중적인 심리와도 연관되기도 한다. 즉 위험하다고 여겨질수록 그 매혹의 강도가 더해진다는 묘한 역설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늘 성립하게 마련이고(모든 팜므파탈의 그 위험성의 강도와 매력의 강도는 정비례한다), 따라서 거의 모든 (여성형) 악령들은 극도로 위험해서 매혹당하지 않아야 하지만, 동시에 기꺼이 매혹당하고 싶은 존재로서 그려진다. 즉 이것에는 성적인 것에 대한 매력(에로스)과 죽음에 대한 유혹(타나토스)이 비슷한 비율로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물론 남성의 경우에만 성립되는 역설은 아니다. 이는 현대에 들어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가지는 위험은 최대한 제거되고, 그것의 매력만이 최대한 강조되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즉 (죽음이 그다지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예전보다) 종교가 가지는 구원의 힘이 상당히 약화되고, 현세의 삶이 중시되는 현재에 이르면 죽음의 근처에 머물러있는 뱀파이어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도리어 영원한 젊음의 상징으로서 뱀파이어의 능력들이 중심에 위치하게 되고, 뱀파이어들은 거의 슈퍼히어로와 비슷한 위치를 점한다. 즉 중세에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 예를 들어 늙지 않음, 변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 날 수도 있음 등에서 그 죽음의 그림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현재에 들어서는 도리어 이것이 부러운 슈퍼히어로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피부마저도 창백하고 으스스한 피부가 아니라, 하얗고 깨끗한 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최근에 들어 뱀파이어에 대한 어떤 각광들의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마늘과 박쥐에 대해서는 책에서도 그다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십자가나 성수, 햇빛에 대한 위험은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어느 정도 이해되는 반면, 마늘이나 박쥐는 조금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다. 단편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마늘은 그 생경한 맛과 향 때문에, 박쥐는 동굴에서 산다는 특징과 검은 색, 날카로운 이빨 등의 형상이 뱀파이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을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부분보다도 도리어 이 책을 읽고 새삼 생각하게 된 것은 모든 음악과 미술, 영화, 문학 등의 예술작품들은 당대의 습속과 지식, 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잉글랜드와 트란실바니아를 오가는 육로와 수로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1897년이라는 당대의 지리학적 관심과 문명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고, 또 이 소설은 흡혈귀라는 비과학적인 사실이 이야기의 원천이면서도 이야기의 내용에는 당대의 정신병리학과 범죄학의 최신사실들이 큰 비중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현재와 가까운 시기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책에 나온 1994년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를 보면 이야기 자체는 200년을 아우르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1980년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이르는 미국의 경제호황의 쾌락주의적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아마도 이의 상징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뱀파이어 레스타(톰 크루즈)가 모는 빨간색 무스탕 컨버터블일 것이다). 그런만큼 이 책 <뱀파이어, 아직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뱀파이어를 다룬 예술들이 당대의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며 변화해 왔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의 기회를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 1.
그래서 나도 당대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간단한 뱀파이어 이야기의 줄거리를 써본다. 장르는 <안녕 프란체스카>의 뒤를 이은 풍자시트콤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짧은 리뷰라 뭐 지면이 많이 남기도 하고. (...)

뱀파이어들이 공공연하게 출몰하는 근미래의 우리나라. 뱀파이어들의 자잘한 범죄들(이 시기의 뱀파이어들이 저지르는 것은 절도 등의 범죄들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들은 더 이상 인간의 피를 빨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피는 혈색을 좋게 만드는 피 성형, 각종 환경호르몬의 영향이 있는 음식들을 주식으로 먹은 탓으로 변해버려, 뱀파이어들이 마시게 되면 죽게 되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들은 특수처리된 정제된 피를 주기적으로 먹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매우 비싸다)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뱀파이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뱀파이어 진압 작전에 나선다. 그러나 무자격 신부들을 용역으로 투입하고, 초강력 마늘탄 등의 사용으로 진압 과정에서 뱀파이어들이 죽음에 이르는 등의 문제가 거듭되자 여론은 급속히 나빠지고, 마침 이 때 한 진압현장을 다루는 뉴스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어린 소녀 뱀파이어의 모습이 찍히는데, 인터넷에서는 이 소녀는 스타가 되고, 급기야 소녀의 가족들은 TV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다.  

소녀의 가족은 TV에 출연하여 그간 어렵게 살아왔던 여러 이야기를 밝히는데, 쉬운 농장일이라고 찾아갔더니 알고보니 마늘농장이었던 사연, 나무막대기 두 개만 붙이면 되는 단순노동이라고 해서 일하러 갔더니 십자가 제조 공장이었던 사연, 너희들은 원래 밤에만 일하는 종족이니 야간알바비를 주간알바비로 책정하여 지급하겠다는 악덕 편의점주의 이야기 등이 시청자의 심금을 울린다. 또 한편으로 이들 가족이 시킨 피자에 몰래 마늘 소스를 뿌리고, "뱀파이어가 마늘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며 변명한 피자가게 알바녀가 '뱀파이어 마늘녀'로 불리며 거센 비난을 받기도 한다. 여론이 뱀파이어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정부는 곧 태도를 바꿔서 이것도 다문화 정책의 일환이라며 뱀파이어들에 대한 진압을 멈추고 뱀파이어를 법의 테두리 안에 살게 하겠다고 공표한다.

그러나 관심도 한 때 뿐이고, 이들 뱀파이어 가족을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곧 법의 사각지대에 내몰리게 되는데, 정부는 '뱀파이어 자격 시험'을 치러 합격을 한 뱀파이어들에게만 정제된 피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하고, 뱀파이어들은 멸종 위기에 몰린 자신들을 '뱀파이어 특별 보호법'으로 희귀종으로 지정하여 보호해 달라고 하지만, 너희들이 이 사회에 기여한 게 뭐냐며 묵살당한다. 뱀파이어들은 다시 길거리에 나와 각종 알바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고, 급기야는 정제된 피가 가득있다는 트럭을 습격하지만, 그 트럭에는 인기가수 싸이코가 '뱀파이어 스타일'이라는 곡을 가지고 '피 흠뻑쇼'라는 공연을 할 때 쓸 가짜 피만 가득 담겨 있었던 일 등의 각종 사건을 겪는다. 결국 뱀파이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인간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대통령 및 모든 정부 각료들, 국회의원들을 모두 물어 그들을 모두 뱀파이어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즉 뱀파이어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최후의 계획.

치밀한 계획 끝에 청와대와 국회에 잠입한 뱀파이어들은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넣고 그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울린다. 시트콤의 마지막 장면은 드디어 대통령의 목에 이빨을 넣고 그들의 피를 빨아내려는(물론 삼키지 않아야 한다) 뱀파이어 대장과 흥분과 기대감에 차서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뱀파이어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빨아도 피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놀란 뱀파이어 대장은 급한 마음에 다른 정부각료들이나 국회의원들을 닥치는 대로 물어뜯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에도 피가 나오지 않는다. "아...나랏님들이 피도 눈물도 없다는 옛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를 내뱉으며 긴 탄식을 내뱉는 뱀파이어 대장과 망연자실한 주위의 뱀파이어들을 비추며 시즌 1 마무리.


덧 2.
개인적으로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이 리뷰를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책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괜찮은 블랙 메탈, 데쓰 메탈 그룹인 'Cradle of Filth'의 곡 중에서 하나. 책에 어울리도록 그들의 1996년도 앨범 <Vempire or Dark Faerytales in Phallustein>에서 뽑아봤다.

Cradle of Filth - Queen of Winter, Throned (with lyr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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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2-08-2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여기서 뭐하고 계신겁니까! 어서 충무로로 가세요!
아니면 시나리오를 씁시다! 맥거핀님은 여기서 이러고 있기엔 너무 아까워요_-
덧글이 너무 재밌어서 저 막 낄낄거렸어요.

지금 밖은 엄청난 강풍이 불어요. 문이 덜컹거리고 나무가 휠듯이 움직입니다.
뱀파이어보다 호러영화보다 무섭네요. 내일 신디는 보러 가지 않으시는게 좋으실 듯 합니다ㅠ

맥거핀 2012-08-28 01:45   좋아요 0 | URL
네..아는 충무로 감독 있으시면 소개 좀..ㅋ 마음 같아서는 제가 만들어서 찍고 싶은데 아무래도 돈이 좀 들거 같아서요. 제가 작품성은 쥐뿔도 없는데, 쓸데없이 비싼 배우나, 촬영스타일을 고집하는 스타일이라..

거기 부산이죠? 뉴스에서 보니까 아랫동네는 점점 후달리는 느낌이던데, 서울은 아직까지는 후덥지근하고 뭔가 먼바람 소리만 살짝씩 들리는 수준..뭔가 바다에서 거대한 고질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뉴스를 볼 때의 느낌이랄까요. 할게 아무것도 없는데, 왠지 마음만 불안한 상황.

Shining 2012-08-28 11:39   좋아요 0 | URL
이런 폭풍같은 날씨에도 깨알같은 유머를 날려주시는 맥거핀님 덕분에 오전이 즐겁네요, 감사합니다(꾸벅).

충무로의 아는 감독은 없고(독립영화 감독님이라도 괜찮을까요?)어떻게.. 연출부라도 소개를...ㅎㅎ

여기 부산 아니에요^^ 서울이 아닌 건 맞지만요ㅎㅎ 아침에 거의 바람에 밀려서 나왔어요; 지금은 눈 앞에 나뭇잎들이 가로로 날라가요; 간판이랑 유리, 특히 조심하세요ㅠ 그럼 살아서(?) 뵈요 :)

맥거핀 2012-08-28 16:15   좋아요 0 | URL
아이고 암튼 늘 깨방정과 오지랖이 문제군요. 근데 저는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요. 아무튼 제 오해를 너그러이 이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근데 진짜 미스테리하긴 한데..왜 그렇게 믿고 있었지..)

아이리시스 2012-08-28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뱀파이어 마늘녀ㅋㅋ 인기가수 싸이코ㅋㅋㅋ
자, 이번에는 시즌2 차례입니다ㅋㅋㅋㅋ

저는 외국에 와 있는 건지,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오는데요. 나무야 뭐 원래 항상 흔들리는 이파리소리가나서....^^ 내일은 가지 마세요! 아, 그 광대 감독 영화 보셨습니까?^^

맥거핀 2012-08-28 01:49   좋아요 0 | URL
아..사실 시즌 2와 시즌 3의 구상도 다 해놨는데, 그건 시즌 1의 성공을 봐서...암튼 최대한 B급, 아니 C급스럽게..ㅋ

위에 Shining님고 그렇고, 아이리시스님도 권하시고 해서, 낼 영화를 과감히 취소했습니다! 근데 그 광대 감독 영화가 낼 그 영화라는..^^ 그런데 놀라운 건 취소하면서 보니 매진인 거 아니겠어요. 저는 엄청나게 취소표들이 쏟아졌을 줄 알았는데, 아직 매진이라니..아...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나 따위는 댈 게 아닌듯.

아이리시스 2012-08-28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은 부산이고 샤이닝님은..어디사는지 몰라요!! 만약 부산이면 왜 지금까지 저도 부산이에요, 라고 안했지, 몹쓸 신비주의자잖아요.. 샤이닝님, 나 삐졌어.. 변명해봐요!!

맥거핀님, 그 광대 감독 영화가 낼이에요? 근데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검색해서 들어가보니까 아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영화도 하나도 없었어요 orz 태풍이 오는데 영화제는 강행한답니까!

Shining 2012-08-28 11:46   좋아요 0 | URL
제가 아무리 몹쓸 신비주의자라지만(인정합니다;;) 부산 살았으면 얘기했을 거에요. 전 훨씬 작은 도시 살아요, 그러니까 만날 독립영화 못 본다고 징징대잖아요ㅎㅎ 아이님 삐지지 마셔요ㅠ

자, 맥거핀님 어서 해명을! 제가 아이님한테 미움받지 않게 확실히 책임 져주셔요 :)

와 근데 이 날씨에도 매진이라니(아직 서울은 덜 심해서 그런가요;). 진정한 영화광들이시구나, 나라면 진작 취소했을텐데_-;;

맥거핀 2012-08-28 16:18   좋아요 0 | URL
네..아무튼 모든 것은 저의 믿을 수 없는 뇌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러니 Shining님을 미워하지 마시고 저를 미워하세요.;; 제가 아이리시스님은 저번에 들어서 부산이라고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데..

근데 막상 취소해놓고 나니 조금 아쉽긴해서, 아직 살짝 고민을 하고있기는 합니다..저같이 고민하는 분들이 있는지 취소표가 하나씩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하고 있네요..그 영화가 확실히 좋다고 하면 고민 안하겠으나, 영화도 잘 모르겠고..

아이리시스 2012-08-30 22:17   좋아요 0 | URL
저도 샤이닝님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을..하면서도..맥거핀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기 때문에.. 어쨌든 어디 사는 게 중요한 건 아닌 걸로..

그건 어차피 상관이 없는 거니까요 :)

광대도 안 보러가실거면서 태풍온 날 어디가셨던 거예요?;;
제 생각에도 영화인(?)들은 정말로 광기가 있는 듯해요. 피프오는 사람들도 보면 저는 정말로..뭐..타지인들이 훨씬 많더라고요. 영화 보러 다른 도시 가는 사람은 많지만 저는 생각도 안해본 일이라서.. 아, 물론 칸에 가는 건 생각해봤는데..(뭐라는 건지..)

맥거핀 2012-09-04 16:36   좋아요 0 | URL
답글이 많이 늦었죠? 태풍도 다 지나가고, 9월도 오고 했는데, 여전히 비가 오네요. 최근에 이사하느라고 거의 며칠 다른 거 신경쓸 틈이 없이 지냈습니다. 일단 급한대로 서평단 추천도서만 올려놓고 다른 할 말들은 또 천천히 해야죠. 있다가 글 읽으러 가죠.^^
 
[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물론 뭔가를 공부하고 싶어한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고등학생이 그렇듯 사회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당연하게도 지금도 잘 모른다.) 처음에 가고 싶었던 과는 신문방송학과였는데, 그건 왠지 더 자유분방한 학생들이 가는 과라고 생각했고, 가장 무엇보다도 점수가 모잘랐다. 그래서 사회학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문학 쪽은 원래 잘하는 편이 못되었고, 사학과 같은 쪽은 재미있어 보이나 취직이 잘 안된다 그러고, 심리학 쪽은 취향이 아니고, 경제학이나 경영학 쪽은 평소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뭐 사회학이 괜찮겠네,라고 생각했다. 뭐 잘 모르지만, 사회에 대해서 일단 전반적으로 어느정도 알게되지 않겠어, 나중에 신문방송학 쪽과도 연계해서 공부할 여지도 있을테고. 그래서 점수가 커트라인에 대롱대롱 걸렸지만, 호기있게 원서접수 첫째날 '사회학과'라고 쓰여진 원서를 들고 갔다. 그러나 이미 첫째날 사회학과는 경쟁률 1이 넘어 있었고, 나는 그만 자신감을 잃고는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아 '사회학과'를 벅벅 지우고는 다른 과를 적어넣었다. 아직 1이 넘지 않은 조금은 더 만만해 보이는 과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마지막날 최종 확인한 경쟁률은 사회학과는 그 숫자에서 크게 변동이 없었고, 내가 지원한 과는 6대1이 넘어 있었다. 모두들 나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후 내 인생에서 사회학이 거론될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노 사회학자의 유머스러운 지적 모험의 여정이라니. 사회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될 뿐만이 아니라, 뭐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유머러스한 글쓰기에 대해서 배우게 되겠지.

 

그러나 이것도 오판이었다. 일단 이 책에 나온 것만 보자면 사회학이 어떤 학문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의 저자 피터 버거가 책 중간중간에 늘어놓는 사회학에 대한 단편적인 부분들이 있다. "사회학자는 어떤 종교적인 현상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 현상의 실증적인 양상은 탐구할 수 있다.(p.91)""사회학의 분석적인 부분은 당연히 '가치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그 실제 적용은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이런 부분만 놓고 보면 사회학의 임무는 어떤 사회현상이 좋다 나쁘다의 가치판단을 가지지 않고, 그 현상만을 탐구하되, 다만 그에 대한 적용, 즉 그 사회현상을 이야기하는데는 인간주의적 관점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 '인간주의'라는 말이 가지는 허구성을 우리는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다. '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은 대체로 어느 특정의 관점을 정당화시키는 수사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모든 대선 후보들이 내미는 '인간 중심'이라는 슬로건 말이다.) 책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어보면 그는 그의 책 <현실의 사회적 구성>에 나오는 부분들과 구성주의의 영향에 대해 밝히며 자신은 구성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때의 시대정신이나 분위기, 실제로 일어난 경향을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음 집필의도를 봐줄 것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그런 사회적 사실들은 우리의 바람과 무관하게 발견될 수 있는 확고한 현실성을 가진다.(p.126)" 즉, 사회학적으로 봤을 때는 중요한 것은 그의 본래의도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은 것처럼 보이는 그 사실 자체일 것이다.

 

물론 그가 사회학자로서 그런 의도(입장)와 사실의 문제를 구별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도 당연히 어떤 것에 대해 입장을 가지고(그것이 설혹 '인간적'이라는 모호한 입장이라도), 모든 사실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 시민권'이라는 개념이 유용하다. 사회과학자는 두 개의 모자를 쓴다. 그는 특정 분석 규준을 충실히 지켜야 하는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도덕적인 고려를 해야만 하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그 두 모자는 상당히 다르다. 특정 진술을 할 때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서 정직하게 알려줘야 한다. (p.281)"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맞는 말은 본인은 잘 지키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어떤 모자를 쓰고 했는지 잘 알려주지도 않을 뿐더러, 때로는 일부러 모자를 바꿔서 쓰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성장의 신화(자본주의)'와 '혁명의 신화(사회주의)'를 모두 거부한다고 주장하였다가, 동아시아를 보고 나서는 그 생각을 바꿔 '성장의 신화'는 지지하되 '혁명의 신화'는 거부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달리 말해 성장의 신화는 대체로 경험적으로 타당한 약속을 제시한다. 반대로 사회주의 혁명은 약속을 이행하는 법이 없다.(p.176)" 반박할 수도 있는 주장이나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질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이것이 동아시아 사회를 정말 면밀히 관찰한 후에 나온 지적인지, 또 하나 성장의 신화가 경험적으로 타당한 약속을 제시한다고 했는데, 이 '경험적으로'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만 그의 이런 주장이 과연 사회학자로서 얘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지지하는 개인적 신념에 따른 정치적인 주장인 것일까,라는 것이 궁금할 뿐이다. 그는 이것을 사회학적인 연구로 인해 도달한 결론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가 가진 그간의 개인적 신념을 보면 그 개인적 신념과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과연 어떤 현상에 대한 탐구로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일까? 설혹 그렇다고 해도, 책에 나온 논거들로는 이는 너무 재빠른 단정이 아닌가. (그가 책에서 사회학 입문 과정에서 암기한다고 말한 유명한 '토머스의 금언'이 떠오른다.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이 실재한다고 규정하면, 그 때문에 그 상황은 실재하게 된다.')

 

잘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는 어떤 오해인지도 모르겠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그의 생각을 자세히 들어보고 싶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의 대부분은 그가 지은 저술을 짧게 요약하고, 그 연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과 자신의 관계와 그들의 간단한 약력을 늘어놓는 것으로 채워지고, 뭔가 생각이 좀 나온다 싶으면, 그가 재미있다고 주장하는 유머들 혹은 일화들로 모호하게 마무리된다. (그러나 이 유머들은 참 재미가 없다. 그는 심지어 유머에 관련한 책도 저술했으니 그 이유를 잘 알 것이다. 그에 따른다면, 우리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의 나이든 사회학자가 내뱉는 유머를 재미있어한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이 책은 피터 버거의 책으로 쓰는 긴 이력서 같다. 책을 통해서 그가 저술한 책의 목록들과 그가 여행한 나라들, 그의 동료 연구자들, 그리고 그의 대학 재직이력은 자세히 알게 되지만, 그것 뿐이다. 이력서는 말 그대로 저자의 이력을 말해줄 뿐, 그의 생각까지 말해 주지는 못한다. 즉 이 책을 통해서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게 되지만, 사회학에 대해서는 알게 되는 것이 거의 없다. 물론 어떤 한 사람의 이력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 이 책의 제목대로 그것이 어떤 '지적 모험'이라면 더구나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지적 모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모험을 할 마음 같은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모험이란 무릇, 여기저기 깨질 각오를 하고 이곳저곳에 부딪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처음부터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디에 심하게 부딪힌 적도 없고, 그러므로 깨진 적도 없다. 물론 깨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입장이 욕먹을 것은 아니며 중도 보수라는 그의 입장이 비판을 받을 이유는 없다. (보수 반동이라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겠지만.) 다만 자신의 반대입장에서 쏟아지는 비판에 대해 계속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이것이 사회학에서의 올바른 태도라고, 사회학적 당의를 씌울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이 두 가지 관점, 그러니까 정치적인 관점과 사회학적인 관점을 시종일관 흩트려 놓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과 보스턴과 미국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회학자로서 유럽과 중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과 그곳의 사태를 보고 있는 것이지, 그가 말한대로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는 때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정말 아이러니한 점 중에 하나는 그가 사회학자이면서도 사회운동에 알레르기를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연 운동이나 페미니즘 혹은 대중집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가 애정을 보내는 자본주의라는 것도 어찌 보면 거대한 사회운동 중의 하나가 아닐까. 즉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회운동과 아닌 사회운동을 구분하여 그것에 애정어린 분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요이상으로 비판이 길어진 듯 하다. (날씨와 LG야구 때문이다.) 피터 버거는 자신의 책에 달린 서평을 꼼꼼이 들여다보는 편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가 어느 촌구석 인터넷서점에 달린 이 글까지 읽어볼 확률, 그리고 그것을 읽고 어떤 나이든 사회학자가 자신의 입장을 수정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하므로 조금 더 생산적인 얘기로 글을 끝내도록 하자. 사회학을 지망하고자 했으나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로 체육관 바닥에서 지망하는 과를 바꿔야 했던 사람, 그래서 사회학에 대해 뭔가 알고자 했던 사람, 혹은 최소한 뭔가 유머러스한 글쓰기에 대해 배우고자 했던 사람에게는 비추. 대신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미국에서 대학교수, 학자라는 지식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곳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들 혹은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학자인 척하고 싶은 사람들. 이 책은 적어도 그런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사회학적 분석보고서는 된다. 다만, 하나 주의할 점은 이 책은 진짜 학자가 되는 법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진짜 학자가 될 수 있도록 생각하는 법 대신에 자신의 저술과 자신의 학문적 업적과 자신의 뛰어난 동료들과 자신의 훌륭한 박사과정 학생들을 독자들에게 최대한 거부감을 덜 느끼게 하며 나열하는 법 정도는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 정도면 학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어지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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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7-2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기다려주신 알라딘관계자분과 가연님께 감사드립니다.;; 발암야구 LG야구 때문에 생각보다 비판적인 글이 되었네요..(5회 역전당한 후 TV끄고 빡쳐서 쓴 글..;;)

아이리시스 2012-07-2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구나. 그럼 일반의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유익하지 못한 책이네요. 사실 사회학자(라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가 사회학을 공부해야만 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원래 그 분야가 이것저것 다양한 분야를 알아야 하고 관심 가져야 하고 그러니까.. 법대 나온 친구가 있는데 친구는 항상 공부를 잘했으니까 당연했거든요. 법대나 의대는..근데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막상 들어가보니까 난 법대말고 사회학과가 더 어울릴 것 같았다고. 거기 더 관심이 많더라고.

맥거핀님도 사회학과..라니.. 제 인생의 최대 반전은 제가 이과반이어서 화학공학과에 갈 수도 있었다는 거예요, 푸핫 :) 당시엔 교차지원이란 게 있었고 저는 이과,문과 구분없이 막 지원했었어요. 내가 잘하는 거나 체질은 문과쪽이 맞는데 전 이과반에서 '글 잘쓰고 말 잘 하는 공대생'이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ㅋ

LG는 맨날 지고있나봐요ㅋㅋㅋ

맥거핀 2012-07-26 02:20   좋아요 0 | URL
화학공학과라고 하시니, 뜬금없이 배수아씨가 생각이 나네요. (제가 알기로는 이대 화학과 나오신걸로..) 글잘쓰는 공대생 그거 괜찮겠네요. 영화 <은교>에서 서지우가 공대생이라는 게 일종의 컴플렉스처럼 작용을 한 것도 생각이 나구요.

근데 예나 지금이나 사실 뭘 공부하고 싶은지 거의 잘 모르는 상태에서 대학에 가지 않나요? 막상 공부해보면 이게 아니다 싶은 경우들도 참 많고..요새는 뭐 어렸을 때부터 많이 준비하고 간다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하긴 그래도 뭔가를 '공부하러' 간다는 것은 그나마 좀 나은 케이스 같기도 하구요.

LG는요. 유명한 말이 있어요. DTD라고.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뜻인데, 즉 초반에 순위가 높아도 언젠가 꼴찌 근처에서 놀게 된다 이말이죠. 근데요. 요새는 한 게임 내에서도 DTD를 실천해요. 역전당하기 위해 초반에 점수를 따요.ㅠㅠ 늘 재미있는 야구를 하기는 합니다. 근데 문제는 우리편보다 상대편이 늘 더 재밌다는 게 문제죠.


Arch 2012-07-25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은건 제목과 카피에 낚여 실망한 흔하디 흔한 경우 중 하나예요. 머릿말은 재미있었는데 50쪽까지 읽다가 지쳐버렸어요. 혹시나해서 다른쪽도 읽어봤는데 역시나. 작가가 어떤 성향이고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맘도 안 생기더라구요. 이야기는 단편적이고 유머도 없었으며 말 그대로 '긴 이력서'에 그치고 말았어요.

사회학에 관심이 있다면 '상식의 배반'을 추천합니다.

맥거핀 2012-07-26 02:25   좋아요 0 | URL
아..Arch 님도 비슷한 감상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사실 리뷰들보면 이 책에 대한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것 같아요. 근데 저도 초반보고 조금 마음이 상해서, 뒷부분을 읽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어요. 때려치고 싶었지만, 머 그래도 명색이 서평단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데, 다는 읽어야 할 것 같아서..그러길래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셨는지..쩝.

말씀하신 책 읽어봐야 겠군요. 저랑 비슷한 감상이신데 추천을 해주시니 더 신뢰가 가네요.

Shining 2012-07-29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 이 리뷰. 가독성도 높고 내용도 탄탄하고. 역시 맥거핀님의 글쓰기는...-_ㅠ

저는 신방과에요, 더 자유분방한 사람은 아니지만ㅎㅎ 별 생각없이 택했는데 다니는내내 이보다 더 (제게) 맞는 과를 찾았다는 느낌음 없어서 그럭저럭 잘 다녔던 것 같아요. 과 생활은 안했지만 학과에서 배우는 과목들이 굉장히 재밌었어요.

그래서, 맥거핀님은 무슨 과였는지 물어도 됩니까?+_+ (저렇게 말씀하시니 궁금해서요!)

맥거핀 2012-07-30 22:41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신방과. 저는 아직도 신방과에 대해서는 똑똑하고 샤프하고, 반질반질한(?) 이미지가 있어요. 뭐 당연히 신방과에도 이런저런 사람이 있겠습니다만, 사람은 아무래도 자기가 하려다 못한 것에 대해서는 환상이 있는 법이긴 한 모양.

저는 교육학 전공입니다. 늘상 이렇게 말하곤 하죠. XX교육과 아니구요, 그냥 '교육학과'요. (뭐 그런건 현재의 저에 대해서 하나도 말해주지 못하니까요.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죠.^^)

꽃도둑 2012-07-30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 님, 글쓰기가 일대 전환을 맞으신 것 같은데요....
너무 까셨어요... 어디 두고보자 하고 쓰신 글 같아요.,ㅋㅋㅋ
(물론 원인제공은 날씨와 야구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회학의 또 다른 관점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정량적인 방법론에서 조금 비껴나 있어 한결 부드럽고 유연했거든요. 이런 사회학자도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근데 맥거핀 님 리뷰 읽으면서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다시 책을 후벼파야 될 것 같은 우울한 예감이 드네요.,ㅡ.ㅡ

맥거핀 2012-07-30 22:47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꾸준히 까왔..(...)
글쎄요. 뭐 모든 게 다 그렇지만, 이런 시각도 있으면 저런 시각도 있는 법이니까요.^^ 저는 사실 사회학에 대한 기초가 거의 없는 편이라 정량적인 방법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대충 통계적인 방법을 쓰는 것으로 이해하긴 했습니다만), 그렇다면 그의 반대편에 있을 정성적인 방법이 궁금한데 그에 대해서도 책에 제대로 설명이 나온 것인지 좀 의문이에요. 저자의 시각이나 방법론을 좀 자세히 들어보고 싶은데 뭐 좀 얘기할라치면 일화나 유머로 빠지는 통에 저자의 생각이 뭔지 어렴풋해요. 단지 그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중도 보수주의자이다..정도? 사회학에 대해서 그가 추구하는 방법론이나 시각을 잘 알 수가 없어서 비판적이 된 부분도 있구요.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날씨와 야구 때문입니다.^^ 날씨가 진짜 덥기는 많이 덥죠? 여기도 심한데, 남녘은 더 심할 것 같기는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