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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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윤성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그녀가 문장을 매우 잘 쓴다거나, 묘사력이 뛰어나다거나, 읽다보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거나, 늘 참신한 소재를 이야기한다거나, 혹은 놀라운 서사 전개 능력을 보여준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느날 소설의 신이 나타나, 그간 소설이라는 무용한 것에 시간을 낭비한 벌로(혹은 상으로) 남은 삶을 내가 읽은 소설들 중에 어느 하나로 반드시 들어가 보내야 한다며, 대신 그 중 어느 소설을 고를지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준다고 한다면, 나는 그다지 주저하지 않고 윤성희의 소설들 중에 하나를 고를 것이다. 나는 적어도 그녀가 그려내는 소설 속 세계만은 아낌 없는 지지를 보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려내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윤성희의 소설 <구경꾼들>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은 이야기들의 연쇄이며, 이유와 결과의 퍼레이드이다. 주인공 '나'를 비롯한 나의 가족들, 그리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주변인물에게는 나름의 이야기가 있으며, 어떠한 행동, 즉 결과에는 거의 반드시 그 행동을 하게 된 이유, 원인이 따라붙는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성추행을 당할 뻔한 아이를 구해내는 장면의 한 대목을 보자. "아이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상가 이층에서 파마를 하던 여자였다. 여자는 파마를 말던 미용실 원장에게 무슨 소리 안 들려? 하고 물었다. 젊었을 적에 뚱뚱했던 여자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 여자는 늘 귀를 쫑긋하며 걸었다. 저 여자 좀 봐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여자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침을 뱉곤 했다. 더 심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쫓아가 심한 욕을 퍼붓기도 했다. "무슨 소리요?" 미용실 원장이 되물었다. 여자는 그후로 삼십 킬로그램이나 감량을 했지만 청각만은 여전해서 멀리서도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틀림없어. 비명소리네." 미용실 원장과 여자는 파마를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면 결석이 잦은 주인공에게 담임이 찾아오는 다음의 대목. "커피는 굳어 있었다. 할머니는 뜨거운 물을 커피 통에 부어 간신히 커피 물을 우려냈다. 하지만 프림이 없었다. 할머니는 대신 설탕을 네 스푼이나 넣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커피의 비율은 커피 두 스푼, 프림 두 스푼 반, 설탕 세 스푼이었다. 커피를 마신 담임이 얼굴을 찌푸렸다. 담임은 단 것을 싫어했다. 일곱 살 무렵에 집을 나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준 음식이 설탕물이었다. 담임은 두 동생들과 난방이 되지 않는 반지하방에서 설탕물을 마시며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커피를 마시다가 담임은 이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엄마를 떠올렸고, 그러고는 갑자기 무단결석을 한 나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결과가 있다. 두 여자가 달려와 쓰러져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젊었을 때 뚱뚱했던 여자의 청각이 발달한 덕분이었다. 담임이 무단결석이 잦은 주인공을 용서해주었던 것은 커피가 달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단 커피가 자신의 어머니를 연상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이렇게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이야기들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이 소설을 촘촘하게 구성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의 세계가 단지 인과율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말하기에는 주저하게 된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작동하는 것이 단지 인과율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뒤로 돌아가 보자. 두 여자가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의 청각이 발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청각이 발달한 여자가 그 시간에 상가 이층에 파마를 하러 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담임이 주인공을 용서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필이면 커피가 굳었기 때문이며, 주인공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주고 간 음식이 하필이면 설탕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이 인과의 법칙들의 빈 구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수많은 우연들이다. 어떤 우연들. 그 우연들은 때로 인과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인과들은 또 우연의 충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우연과 인과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소설에 계속 등장하는 죽음들이다. 언뜻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던 이 소설은 순간순간 독자를 멈칫거리게 한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죽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차가 뒤집어지는 큰 교통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주인공 가족에게 예기치 않은, 어떻게 보면 어이없는 죽음이 찾아온다. 주인공의 큰삼촌이 치료받던 병원 건물 앞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병원 옥상에서 자살하려고 뛰어내린 여자에게 깔려 죽은 것이다. 물론 인과와 이야기의 퍼레이드인 이 소설에서 이 두 사람이 거기에서 바로 그 시각에 부딪히게 된 것에는 나름의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의 충돌을 단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온전히 필연적인 죽음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인과가 작동하였다고 해도, 그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에 결국 작동하는 것은 인과보다는 우연이다. 큰 삼촌이 커피를 조금만 더 늦게 마셨더라도, 혹은 여자가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길을 건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발견했다면 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인과는 사실상 우연이 빚어낸 인과, 혹은 인과로 가장한 우연이다.

그것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적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 말이다. 주인공의 아버지, 그러니까 죽은 큰삼촌의 형은 어느날 신문을 본다. 거기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실려있었고, 그 내용은 자신들이 겪은 사건과 동일했으나 결과는 달랐다. 한 여자가 건물에서 뛰어내렸는데, 하필이면 그 아래를 지나가던 한 남자를 덮쳤지만, 놀랍게도 둘 다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두 개의 사건이 한날한시에 벌어졌을 것이라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혀 그 기적을 찾아가 확인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게 되는 것은 어떤 우연의 집합체인 기적이라기보다는 인과와 우연이 혼합된 나름의 긴 이야기이다(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이 한날한시라는 기적에 대해 묻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 만남을 계기로 주인공의 부모는 여러가지 기적과 같은 사연을 만나는 긴 여행을 하지만, 그것들도 역시 단지 기적이라기보다는 인과와 우연이 교차하는, 그것들이 빚어낸 수많은 각각의 삶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삶에 작동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시간이다.    

즉 기적의 반대편에서 작동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다. 기적이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적이라고 불리는 것 중의 하나는 시간을 압축시키는 것이다. 두 시간 전에 서울에 있던 사람이 그 후에 부산에 나타난다면 아주 오래 전의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이라 부를테지만, 그러나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현재의 우리는 그것이 '시간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며, 그것이 단지 기술적으로 시간을 압축시킨 것임을 안다. 마찬가지로 현재에는 30분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 것은 기적으로 보일테지만, 미래의 어느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즉 기적적으로 보이는 일도 아주 긴 시간이 주어진다면 가능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한 예는 바로 이 주인공의 성장이다.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소설 <구경꾼들>이 결국 이 주인공 '나'의 성장담이라는 사실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잉태로부터 시작하여,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추억하는 주인공 나의 기억으로 끝난다.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모자란 단지 아주 작은 것이었다가 어느덧 누군가를 추억하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가 된 이 아이의 이러한 성장은 기적과 같은 무엇이 작동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긴 시간이 작동했을 뿐이다. 윤성희는 긴 시간 속에서 인과와 우연을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시키면서 그저 차분히 이 아이의 성장을 지켜본다. 그것이 아마도 이 소설에 '구경꾼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스펙테이터(spectator)로서의 구경꾼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긴 시간을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비유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찰과 비슷하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지켜보는 자들이 그 지켜보는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그것은 지켜보되,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다. 냉소나 방관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것을 공을 들여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그 긴 시간을 어떻게든 같이 견뎌내며 지켜봐주는 것. 그것이 윤성희의 '어떤 태도'다. 우연과 인과, 혹은 인과가 만들어내는 우연이나 우연이 만들어내는 인과는 우리의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작은삼촌은 퇴근을 하자마자 내 운동화부터 살펴보았다. "정말 달렸네." 나는 작은삼촌에게 사인받은 종이를 주었다. "두 시간 삼십 분 걸렸어."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작은삼촌이 종이를 보더니 맨 아래에 있는 사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니가 몰래 하려다 실패한 거지?"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작은삼촌에게 조카를 폭력청소년으로 만들어서 좋았냐고 되물었다. 사실대로 말하려다가 작은삼촌이 거짓말쟁이가 될까봐 꾹 참았다고 나는 덧붙였다. 내 뒤통수를 때릴 줄 알았지만 작은삼촌은 예상과 달리 내 두 손을 잡고는 미안해, 하고 말했다. "불쌍한 놈이 되는 것보다는 한심한 놈이 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어." 작은삼촌이 말했다. 나는 햇볕에 그을린 작은삼촌의 얼굴을 보았다. "작은삼촌!" 나는 조용히 불러보았다. 작은삼촌이 왜? 하고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속으로 작은삼촌, 작은삼촌, 하고 두 번을 더 불러보았다. 영원히 작은삼촌이라고 불려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참고 있었을까. 또 고모가 막내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어떻게 견뎠을까? 내겐 이젠 삼촌이 한 명밖에 남지 않았고 고모에게도 오빠는 한 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삼촌, 오빠, 라고 부르지 않는 걸까. "사인한 종이, 선물로 줄께요." 나는 작은삼촌에게 학교에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학교도 가고 일요일마다 달리기도 하겠다고 나는 말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제야 식구들에게 솔직히 말했다.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제가 잘하는 건 요리가 아니라 청소예요." 어머니는 소파 아래에 쌓인 먼지나 화장실 변기의 찌든 때를 닦는 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삼촌들은 어머니가 자신의 방을 청소하는 걸 싫어했다.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할머니는 며느리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할머니도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발가벗은 채로 화장실을 청소하곤 했다. "나도 그렇단다." 누가 뭐라 해도 큰며느리는 내 편으로 만들어야지, 할머니는 생각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밥을 먹고 있는 식구들에게 말했다. "그렇게 먹고 싶은 게 많으면 직접 해먹어. 아님, 요리사를 고용할 만큼 돈을 많이 벌든지."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입안에 있던 밥을 씹지도 않고 삼켰다. 목이 메어왔고, 물을 두 컵이나 마신 후에도 계속 마음이 아려왔다. "얘야, 넌 장래희망이 뭐였니?" 괜찮니, 라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현모양처는 아니었어요." 어머니는 대답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 때마다 장래희망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봐주었던 그날의 아침식사를 떠올렸다. 그러면 섭섭한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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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2-13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을 들여서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 그 긴 시간을 어떻게든 같이 견뎌내며 지켜봐주는 것. 그것이 윤성희의 '어떤 태도'다. 우연과 인과, 혹은 인과가 만들어내는 우연이나 우연이 만들어내는 인과는 우리의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긴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렇군요.. ~~




감사합니다.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깝네요.. ~~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4-02-14 12:5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새벽숲길님. 닉네임이 참 좋네요. 새벽숲길..저야말로 시간내서 읽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

2014-02-13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도 맘에 들고 (빨리 읽어보고 싶다! 고 생각했어요.) 이 글도 맘에 들어요. 둘 다, 속할 수 있다면 속하고 싶은 세계입니다.^^

맥거핀 2014-02-14 12:52   좋아요 0 | URL
여행에서 돌아오셨군요, 섬님.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좋은 소설이예요. 재미도 있구요. 윤성희 작가의 특유의 따듯한 시선들이 있는데, 그게 참 좋습니다.

희선 2014-02-15 0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 세계에 들어가고 싶은 소설, 갑자기 저는 그런 게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있었지만 지금 생각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죠 아니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소설이 있다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저 바라보기만 할 건가요 아니면 다른 일이 일어나게 할 건가요 소설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지금에서 지난날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일어나는 일을 알잖아요 어쩌면 소설 안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될 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니...^^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시간이 필요하죠 이것은 실제 경험해서 알기보다는 글이나 다른 것을 보고 깨닫는 것 같습니다 기적처럼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 뒤에는 많은 사람과 많은 시간이 있었야 했겠죠 말을 꺼냈지만 제대로 못 끝내겠습니다^^

윤성희 라는 이름 알고 책도 조금 봤는데, 사실 생각나는 것은 없습니다 단편 하나만 기억에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 남자의 책 198쪽>입니다 도서관과 책이 나와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맥거핀 2014-02-17 23:2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소설 속 세계가 일어났던 일이 일어나는 세계인지, 아니면 새로운 일들을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세계인지는 생각을 안해봤습니다. 되도록이면 제가 주인공이 되어 다른 일들을 일으킬 수 있으면 좋겠죠. 아..그렇게 되면 그 소설이라고 볼 수가 없는 걸까요?

윤성희 작가의 소설이 대체로 좋지만, 이번 소설은 뭐랄까..읽다가 중간중간 울컥거린다고 할까요, 마음을 건드린다고 할까요..뭐 그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 작가가 마음에 들면 그 책들을 찾아서 읽으려고 하는 편이라, 윤성희 작가의 책들은 꽤 찾아서 본 편입니다. <그 남자의 책 198쪽>도 분명히 읽은 기억은 나는데, 어떤 내용인지는 사실 생각이 정확히 안나는군요. 아마 제 기억으로는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있었죠.

Shining 2014-02-1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 굉장히 재밌게 읽었고 좋아합니다. 다만 다른 단편소설들을 그리 인상깊지 않았던 걸 보면 저는 윤성희가 아닌 이 책, 이 좋았던것 같기도 하고요. 평가단과 영화 외 책 리뷰는 오랜만인 것 같아요 맥거핀님. 이 책을 다시 읽으신건지, 문득 리뷰가 쓰고 싶어진건지. 어떤 연유인지 궁금합니다 :) 좋네요, 책이 떠올라서, 리뷰도 좋고, 오랜만에 제가 읽은 책 써주셔서;; 더 좋아요^^

맥거핀 2014-02-17 23:37   좋아요 0 | URL
태블릿을 하나 샀거든요. 처음에는 여러 용도로 쓰다가 최근에는 밤에 잠이 안올 때 그걸로 책을 보고는 합니다. 몰랐는데, 전자도서관이라는 것도 있고, 그냥 클릭 몇 번으로도 책을 대여해서 볼 수 있더군요.

근데 대부분 인문서는 조금 쓸만한 책들이 별로 없고, 소설들은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그래서 소설들을 보고 있지요. 물론 밤이나 새벽에 잠이 안올때만 보는 터라 진도는 상당히 느릿느릿한 편입니다만, 덕분에 좋은 소설들을 여럿 읽기는 했습니다. 의외로 최신간도 있구요. (위에 인용에 페이지가 없는 건 전자책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읽다보니까 리뷰를 써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리뷰를 쓰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책이나 영화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저 어떤 느낌을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뿐이죠.

올해는 소설 리뷰를 써볼까요. 아무래도 소설들을 새벽에 잠이 안올 때 읽어서 그런지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명작순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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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유홍준의 책 <명작순례>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화 49점을 중심으로 명작의 내력과 거기에 깃는 예술적 가치를 소개하는 책이다. 사실 이런 책은 읽을 때에는 좋으나, 리뷰를 쓰기에 가장 난감한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중심주제나 스토리가 없이 여러 미술작품을 나열하는 형식인 책의 구조도 그러하거니와 책에 있는 미술작품을 보는 나의 안목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물론 안목 자체가 모자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며, 이 책의 목적은 저자 유홍준 교수가 밝히고 있듯 나같이 안목이 부족한 독자에게 명작을 감상하는 아주 기초적인 안목을 길러주고자 함에 있기도 하다. 그러나 리뷰를 써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떠한 작품을 단지 글과 사진을 통해 2차적으로만 감상한 느낌인 데다가, 그마저도 안목이 떨어지는 자의 필터를 거친 거친 감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유홍준 교수는 나와 다르게 일생을 거쳐 한국미술을 감상하고 평가하며, 대중들에게 자신의 감상을 전달해 온 말 그대로 이 분야의 전문가이고, 그의 필터는 적어도 수없이 단련이 되었다는 점에서 범인의 필터와는 다르다. 그러나 아마 그의 고민도 결국에는 나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즉 그 고민이란 이 좋은 작품들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며, 어떻게 읽는 이에게 이 감상을 조금이라도 덜 훼손시킨 상태에서 전달할 것인가라는 고민이다. 그런 그의 고민은 이 책의 서문에서도 절실히 드러나거니와 한편으로는 그가 여러 교양프로그램, 혹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텐데, 그것은 우리 역사 속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나라의 사람들이 알아보고 깊이 감상할 안목을 길러주기 위한 그 나름의 다양한 방책들일 것이었다.

예술작품의 감상을 전달하는 방법은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의 작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그 작품을 만든 배경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오로지 작품 자체에 천착하며 그 작품의 의미와 숨겨진 함의를 해석하고 찾아내어 전달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또 여러 작품들과 동시에 놓고 비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며, 작품의 아쉬운 점이나 모자란 부분을 비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어떠한 방법이든 간에 그것은 유홍준 그 자신이 많이 사용하기도 한 다음의 용어, 즉 추체험(追體驗)이란 용어로 집약할 수 있겠는데, 추체험이란 간략하게 말해서 타인의 체험을 자신의 체험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고, 유홍준은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추체험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유홍준의 체험의 정도와 독자들의 체험의 정도는 안목의 차이로 인해 결국 비슷한 수준에라도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홍준이 고민끝에 택한 실제적인 방법론은 약간은 우회적인데, 그것은 감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상의 전단계를 전달하는 것이며, 그것은 유홍준 자신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그의 감상도 결국 이런 지식의 집적에서 시작했을 것이므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나의 작품 보는 안목이 아니다. 오히려 나의 작품 감상은 되도록 절제했다. 대신, 한 화가가 어떤 계기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사회적·예술적 배경이 있었으며, 화가의 예술적 노력과 특징이 그림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액면 그대로 친절하게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림의 기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예술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도록 마음 쓴 것이다. (p. 4)

 

 

그래서 유홍준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작품의 기법상의 특징이나 역사적 의의, 혹은 예술적인 특질이나 인문적인 비평이 아니라 그 작품을 그린 작가가 누구이며,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의 삶이 이 예술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며, 이미 잘 알려진 화가의 경우에는 작품을 제작할 당시의 상황을 중심으로, 그리고 비교적 생소한 화가의 경우에는 간략한 전기를 에피소드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달마도>로 유명한 연담 김명국의 경우 작가보다는 작품만이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그의 다양한 기행들을 소개하고(그는 조선시대 회화사의 3대 기인 중의 한명이다. 17세기 인조 때의 연담 김명국, 18세기 영조 때 호생관 최북, 19세기 고종 때 오언 장승업이 그들이다), 그가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널리 명성을 떨쳐 그림주문이 쇄도했던 일화 등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그의 명성을 듣고 왜인이 몰려들어 그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울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단원 김홍도의 경우에는 그의 일생보다는 어떤 작품이 탄생한 배경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서원아집도>나 <기로세련계도>의 경우 각 작품의 탄생 배경과 작품 자체에 주목하여 비교적 세세하게 작품에 대해 논하며, 작품 자체를 조금 더 주목해서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예술적인 감상법으로 말하자면 유홍준 그 자신의 글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이는 봉래 양사언의 글씨에 얽힌 '비자설(飛字說)'을 소개하는 대목에 나오는 이야기다(p.210~213). 그의 현판 글씨 중 가장 잘 써졌다고 자평하던 '날 비(飛)'자를 쓴 족자가 없어진 날이 그가 먼 곳에서 객사한 날과 일치한다는 기이한 이야기가 여기에 담겨져 있는데, 유홍준은 이것을 소개하며, 이는 양사언의 혼과 함께 그의 예술작품이 사라진 것이라고 해석하며, 예술론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즉 예술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미적대상론(美的對象論)에 입각한 '자연의 모방'이다. 근대적인 정의로는 미적체험론(美的體驗論)이 말하는 '예술은 표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현대미학에서는 미적상관론(美的相關論)에서 '예술은 이미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양사언의 전설이 말하는 예술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술은 혼(魂)이다."라는 말이며, 다른 용어로는 예술은 '에스프리(esprit)'라는 것이 유홍준의 주장이자 오늘의 예술가들에게 던지는 조언이다.

유홍준의 이 책에 담긴 글들은 그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그가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예술에 담긴 모방의 정밀도나 표현의 참신성이나 이미지의 감수성이 아닌, 그 예술가들의 혼이다. 그 예술가들의 어떠한 삶의 태도와 정신과 사상, 즉 혼이 이 그림을, 혹은 이 글씨를 낳게 했는가를 보라고 유홍준은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양사언을 소개하는 글의 마지막을 "혼이 담기지 않은 작품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맺었는데, 나는 다음과 같은 문장도 추가하고 싶다. "예술가들의 혼을 보려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예술 감상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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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07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림이 있고 그 그림을 말해주는 책은 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잘 몰라도 그림 보는 것을 조금 좋아하기도 했는데, 책을 보고 쓰고 난 다음부터는 그런 책은 거의 안 보게 되었습니다 그저 책만 봐도 될 텐데, 그렇다고 예전에 그런 책을 자주 본 것도 아니군요 실제로는 아니더라도 책에 실려있는 그림이라도 자주 보면 그림을 보는 눈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과 글씨도 마찬가지겠죠 옛날에 그림을 그린 사람 가운데 이름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글씨는 김정희밖에... 이 분은 그림도 잘 그리셨군요^^) 그저 잘 알려진 사람밖에는, 여기에는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것 같은 사람도...

예술은 혼이다, 예술가들은 혼을 담아서 작품을 만들겠죠 그것도 제대로 봐야겠군요^^


희선

맥거핀 2014-02-07 23:54   좋아요 0 | URL
예전에 시간도 있고, 마음의 여유도(물론 돈의 여유도) 조금 있을 때에는 미술관에 가서 그림도 보고 했었는데요. 최근에는 거의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뭐 하긴 그 때도 알고 본 거는 없구요. 그냥 유명하다니까, 혹은 남들이 보러간다니까 따라나서는 정도였지요.

아무튼 저도 안목이 조금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도통 알수가 없어요. 특히나 서예나 추상미술 쪽은 더하구요. 근데 아무튼 미술이든 영화든 간에 지름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일단 많이 알고, 많이 봐야죠. 그냥 보기만 하는 건 또 소용없고, 열심히 그만큼 알고 읽어야 하고, 또 그냥 읽기만 하는 것도 소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시간과 돈과 마음을 투자해야 하는데, 적절하게 그 비율을 유지시킨다는 것이 참 생각보다는 어려운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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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정복자 -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최재천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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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아주 오랫동안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애써왔다. 언어학, 문학, 역사학, 법학, 철학, 비교종교학, 윤리학 등등의 소위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학문 분야는 물론이고, 사회학, 과학, 예술, 종교 등 여타의 다른 부분에서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특질과 기원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그것은 인간을 수식하는 수많은 용어들의 범람에서 그 결과물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호모 로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하는 인간), 호모 아르텍스(Homo artex; 예술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 등등의 넘쳐나는 수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넘쳐나는 설명들에도 인간이라는 이 특수한 종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여전히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원과 특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거의 영원한 난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의 이 책 <지구의 정복자>는 이 영원한 난제에 도전한 또 하나의 시지푸스적 시도이자 사회생물학자가 내놓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원과 특질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윌슨의 화두는 한편의 그림이다.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거의 모든 것을 뭉뚱그린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보통 사람이라면 움츠러들고 말 이 거대한 질문 앞에서 오랫동안 사회생물학에 천착해 온 노학자는 조심스럽고도 거침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시작은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 인간이라는 종을 이렇게 특수하게 만들었는가?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는 종은 다른 여타의 종들과 다르다. 각종 기술과 도구를 사용하며, 서로 언어로서 소통하고, 상당한 지능을 소유하였으며, 사회를 이루고, 때로는 협력하고 경쟁한다. 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학자들이 진사회성 동물(eusociality animal)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p. 27). 집단의 구성원들이 여러 세대로 이루어져 있고 분업의 일부로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가진 동물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이런 존재로 만들었을까.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면 되겠지만, 사회생물학자인 윌슨이 내놓은 답은 다르다.

그의 답은 인간이 몇 가지의 선적응(preadaptation)을 거쳐 이러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첫번째 선적응은 육지에 살았다는 것이었고, 두번째 선적응은 지구 역사상 육상 동물 중 소수만이 갖춘 수준의 큰 몸집이었다. 이 두 가지 선적응은 불을 사용할 수 있다는 큰 이점을 가져다 주었는데, 기술의 발전에는 불의 사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선적응만으로는 부족했는데, 그 다음의 선적응은 사물을 쥐고 조작할 수 있도록 진화한 부드럽고 납작한 손가락이 달린 움켜쥐는 손의 출현이었다. 이는 기술의 발달을 촉진할 뿐더러, 지능의 발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 다음의 선적응은 혹은 그로써 일어난 결과는 상당한 양의 고기가 포함되는 쪽으로 식단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편으로 다른 여러가지 것과 연관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뇌를 발달시킬 정도의 충분한 에너지를 고기에서 얻을 수 있었다는 일차적인 사실 외에도 다른 중요한 변화를 불러왔다. 그것은 '무엇을' 사냥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냥하는가의 문제였는데, 고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보금자리와 사냥하는 동안 그 보금자리를 지켜줄 협력이 필요했고, 이는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은 다른 말로 '진사회성 진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진사회성 진화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단계들을 포함한다. 윌슨 박사는 개미, 흰개미 등 진사회성을 갖추었다고 생각되는 다른 여러 (무척추) 동물들을 살펴봄으로서 이 조건들을 밝혀내고 있는데, 이는 집단의 형성, 집단을 치밀하게 만드는 선적응 형질 조합의 출현, 특히 그 중에서도 가치 있고 방어 가능한 보금자리(그리고 그에 대한 의존), 집단의 지속성을 빚어내는 돌연변이의 출현 등을 포함한다. 곤충들의 경우에는 로봇같은 일꾼과 같은 창발적 형질들이 '집단 수준의 선택'을 통해 군체의 생활사와 사회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며, 때로는 기이한 초유기체까지 발전하기도 한다(즉 집단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어 개미 집단의 경우 어떤 개미는 계속 번식기능만 담당하고, 어떤 개미는 계속 먹이를 구해오는 데에만 집중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이와는 상당히 다른데, 인간에게 있어서 이러한 집단 수준에서의 선택은 유전적 과정과 문화적 과정의 결합이다. 

이는 우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의 전환이기도 하다. 즉 같은 진사회성을 갖추었으면서도 우리 인간과 곤충을 갈라놓는 지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윌슨이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이는 아주 조악하고 간단하게 말해서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별개의 과정으로 이루어지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제하거나 뒤집는 것이 아니라, 그 두가지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서로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의미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성인의 젖당 내성 발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전의 모든 인류에게서는 우유를 소화할 수 있는 효소인 락타아제는 유아에게서만 생산되었다. 그러다가 9천에서 3천년 전에 북유럽과 동아프리카의 다양한 지역에서 독립적으로 목축이 발달했을 때, 성인이 되어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락타아제를 계속 생산하는 돌연변이가 문화적으로 퍼졌다. 또한 그것은 새로운 주요 식량 원천으로서 소의 가축화를 가능케했다. 즉 이 돌연변이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조직의 유지와 발전에 이로웠기 때문이다(다른 집단보다 성인이 우유를 마시는 집단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전자-문화 공진화는 근친상간의 금지, 색깔의 인식, 언어의 발달 등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즉 우리가 언어를 더 잘 배우고, 특정의 색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는 유전자가 문화적 발달에 따라 진화했기 때문에, 혹은 문화가 어떤 유전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유전자-문화 공진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것의 전제이자, 이 책의 일종의 분기점, 혹은 논란지점이다. 즉 유전자-문화 공진화에는 그것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유전자의 변이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어느 정도는 전제로 깔려있다. 즉 이것에는 집단 수준의 이타주의적 본능이 조금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윌슨이 다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는 개별 구성원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선택압과 집단 전체의 형질을 표적으로 삼는 다른 선택압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된다(p. 72). 다시 말해서 인간은 각각의 개체 수준에서는 이기적인 방식으로 유전자를 진화시킬지 몰라도 전체 집단 수준에서는 이타적인 방식으로 유전자를 진화시킨다고 윌슨은 말한다. 바로 그것이 한편으로는 인간이 개미나 흰개미 등의 다른 진사회성 곤충과 다른 점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미나 흰개미의 경우에는 집단이 거의 하나의 초유기체로 보일 정도의 극단의 이타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개체 수준과 집단 수준의 선택압이 다르며, 그것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거나 혹은 충돌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준 선택에서의 상호작용과 충돌이 도덕, 종교, 창작예술 등등의 기원과 발전에 크게 연관되어 있다고 윌슨은 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혹은 인간의 유전자는 개체 수준에서는 약간은 이기적일 수 있으나 집단 수준에서는 결국 이타적이라고 윌슨 박사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집단 선택'이 결국 이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를 지배한 원동력이라고 그는 본다. 이는 인간의 진화가 '혈연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능의 결과'라는 그간 학계를 지배했던, 그리고 그 자신이 그동안 주장했던 혈연선택의 관점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이 포괄 적합도 및 근친도 개념에 기반한 혈연선택에 대해서는 솔직히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있었는데, 해설을 한 최재천 교수가 "논쟁의 핵심을 이루는 적합도와 근친도 개념은 수많은 학자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의조차 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남아 있"다고 하셔서 힘을 얻기로 했다. 이 분야의 권위자인 최교수가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왈가왈부하겠는가. 다만 그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윌슨의 이 다수준선택에 기반한 자연선택으로의 회귀는 급작스러운 반동이라기 보다는 예정된 회귀이며, 그것들이 그렇게 완전히 대립되는 것만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가 보는 우리의 미래, 즉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긍정적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지닌 맹목적인 믿음을 고백해야겠다. 우리가 몹시 원한다면, 22세기쯤이면 지구는 인류의 영원한 낙원이 되거나 적어도 그 초입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p. 363)." 그는 우리를 이렇게 만든 원동력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선택이며, 그 이타성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혹 인간은 개미의 군체와 비슷하게 될까). 그러나 윌슨의 이 주장에 그대로 올라타기에는 아직 이르다. 이 책을 통해 제기된 물음들이 계속 새로운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으며, 명확한 결론은 아직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질문과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것일 것이다. 이 노학자의 통섭의 결과물들도 결국 가능성 있는 하나의 추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노학자가 우리에게 가지기를 권하는, 과학에 기반한 태도의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 역시 필요한 것은 긍정적인 태도와 열린 마음이다. 나는 다만 이 노학자의 긍정성에 나의 소박한 긍정을 더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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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07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도 사람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있어서 아직도 그것을 알아보려고 하는군요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이것은 진화하고는 조금 다른 것이기도 하군요 어쩌면 저는 지금까지 사람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사람이 어떻게 바뀌어왔다고 배웠다 해도... 진화는 멈추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 자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군요^^

그런데 22세기라니, 그때 저는 이 세상에 없겠군요 이 글을 쓴 분도... 그래도 누군가 이어서 이 문제를 알아가고 있겠죠


희선

맥거핀 2014-02-08 00:00   좋아요 0 | URL
아마도 지금의 인간들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무엇인가로 진화하고 있을 겁니다. 이 책을 쓰신 윌슨 박사는 상당히 긍정적이신 입장이지만, 저는 부정적인 인간이라, 그렇게 좋은 쪽으로 진화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는 솔직히 그렇게 크게 되지가 않네요. (예를 들어 저도 이 인터넷 상당히 좋아합니다만, 이것이 인간을 긍정적으로 진화시키고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뇌를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요..)

아무튼 윌슨 박사는 인간이 집단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이타적으로 진화해 갈 것으로 보고 있고, 인간이라는 군체도 일종의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근데 그게 혹시 인간종에게는 좋을지라도 지구 수준에서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만..
 
[플루토 크라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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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플루토크라트'라는 용어는 조금 생소하다. 플루토크라트(plutocrats)는 경제적 권력, 그리고 동시에 정치적 권력을 손아귀에 쥔 경제사회구조의 최상위층을 지칭하는 말로, 이들은 여러가지 비슷한(그러나 매우 다른 느낌을 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조금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서 부자(rich) 혹은 '특권계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조금 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강도 귀족(robber barons)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의 다른 이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슈퍼엘리트, 혹은 '1퍼센트'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가. 사실 많은 것은 이름이 좌우하는 법이다. '적대적 인수합병'이라고 하면 무엇인가 음험한 기운을 풍기지만, 조금 돌려서 '사모펀드'라고 하면 왠지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좋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저자가 굳이 '플루토크라트'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 어느 것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일단 무엇인가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중립적인 서술'과 같은 용어를 쓸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이 책은 결국 '플루토크라트'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플루토크라트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을 조금은 벗어난다는 점이다. 이런 플루토크라트들을 묘사한 영화나 책들이 보여주는 어떤 일반적인 이미지들, 혹은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99%, 혹은 99.9%의 나머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한 어떤 믿음들이 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들은 매우 부유하지만, 가정은 온갖 불화로 가득차 있으며, 성격은 괴팍하나 내 여자에게는 따듯하고, 돈이 많아 허구헌날 빈둥거리며(드라마의 재벌가 아들들은 도대체 일은 언제하는가), 정신적으로 어떤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라는 어떤 이미지, 혹은 믿음들 말이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한 농부와 불행한 백만장자'의 패러독스 말이다. 그것은 이미지이며, 동시에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사람들이 세상을 견뎌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저들은 저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지만, 사실은 불행할 거야, 라는 믿음. 그러나 그것은 결국 아무런 확신이 없는 믿음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이들에 비해 더 똑똑하고, 더 신념을 가졌으며, 더 일을 많이 하고, 어쩌면 더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고, 무엇보다도 더 행복하며, 심지어는 도덕적으로도 더 나은 인간이라고 판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물론 도덕을 기부액으로만 판단한다면 말이다).
 
즉 이 시대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예전의 부자들처럼 부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자인 자들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의 도금 시대(Gilded Age), 즉 산업혁명의 수혜를 받은 신흥 백만장자들이 급속도로 나타나던 시대만 하더라도 새로운 기술문명의 혜택을 받은 자들과 기존의 왕가, 귀족 세력이 뒤섞여 있었으나, 지금의 쌍둥이 도금 시대, 즉 세계화와 기술혁명과 워싱턴 컨센서스(로날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등의 친기업 정책)의 혼합으로 탄생한 신흥 플루토크라트들은 일하는 부자이며, 그들은 이자, 배당금, 임대료 등 자본소득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급여 소득, 그러니까 일해서 받는 돈으로 플루토크라트가 된다. 즉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아버지가 물려준 부동산 등에서 나온 임대소득과 정치적 권력을 적절히 조합하는 등의 방식, 혹은 단지 자본을 축적하여 '돈으로 돈을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버드의 금융관련 학과를 졸업하여 일찌기 월스트리트에 들어선 다음, 자신의 아이디어와 당대의 기술혁신을 적절히 조합하여 결국 투자회사의 CEO에 오르거나, 자신만의 벤처회사를 여는 사람들이다. 즉 이들 중의 상당수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좋은 교육을 받았고, 당대의 기술혁신이 가져오는 새로운 분야를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남들보다 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신흥 시장들을 적절히 공략하며, 세계화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즉 이들이 플루토크라트들이 된 것은 어느 정도는 이들이 남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이 책의 하나의 관점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에는 몇 가지 질문, 혹은 잔상이 따른다. 잔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로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일단 플루토크라트가 되면 비슷한 생활방식과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지만, 그들이 플루토크라트가 된 이유 자체는 훨씬 더 다양하기 때문이다. 위에 든 월스트리트의 루트나 벤처기업의 루트도 있지만,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켜 시장전체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 아닌, 지대 추구(rent-seeking)와 같이 단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플루토크라트가 된 사람들도 있고, 권력층에 깊숙이 밀착하고, 보다 착취적인 방식이나 혹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플루토크라트들이 있다. 즉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플루토크라트들의 공통점은 사실 이것 밖에는 말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것이란, 이들은 모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한 놓치지 않으려 했으며, 그들에게는 동시에 (아주 큰) 운이 따랐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본다면, 이들을 일괄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상당히 어리석은 일이다. 이들은 어떤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처럼 악마나 악인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영웅들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플루토크라트들이 큰 영향을 가지고 있는 이 시스템은 이들에게 쉽게 어떤 이미지를 씌우려한다. 예를 들어 카네기, 록펠러 같은 이들이 위인의 목록에 들어가 있는 것이 과거의 방식이라면, 백만장자가 지구를 구원하는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의 이야기는 보다 현대적인 방식이다. 물론 현실에서라면 이들의 착취보다 이들의 기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플루토크라트들의 상당수는 기부와 자선에 큰 뜻을 가진 인물들이기도 하다. 단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기부를 하지만, 왜 그 기부가 필요한 이들이 탄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거나, 그것을 애써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주교의 말대로 누군가에게 빵 한덩이를 주면 훌륭한 성직자가 되지만, 그들에게 왜 그것이 필요한지에 대해 알려고 하면 빨갱이가 될 뿐이다.) 이들은 단지 그 나머지 사람들 모두와 동일하게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의 인간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 즉 그들이 사실은 우리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다음의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플루토크라트들은 누가 제어하는가, 즉 CEO의 월급은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혹은 배트맨, 당신은 도대체 누가 감시하지,라는 조커의 질문. 그러나 현재대로라면 이들을 제어할 어떠한 안전장치도 튼튼하지가 않다. 영화 속 배트맨은 너무나도 착해서, 혹은 너무나도 초인적이어서,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가 있었지만(영화 <다크나이트>는 이 관계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다), 현실의 배트맨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이 보통의 우리와 동일하기 때문에, 즉 그들이 '슈퍼히어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보다 튼튼한 안전장치, 보다 튼튼한 자물쇠가 필요하고, 그것은 보다 '플루토크라트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된 정부의 정책, 혹은 행동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큰 차원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다음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스위스에서는 회사의 최고경영자의 임금이 그 회사의 최저임금의 12배를 넘지 못하게 하는 '1대12법'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가 결국 부결되었다. 그 부결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위스의 수많은 기업들이 해외로 나갈 것이고, 그로 인해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세계화는 자본과 기술을 자유롭게 이동시키고 있으며, 한 국가 내에서만 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플루토크라트의 관점에서 보면) 더할 데 없는 어리석은 일이 되었다. 즉 플루토크라트들이 세계 시민으로서 그 번영을 누린다면, 그것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세계 시민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져있다. 다시 말해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마르크스의 호소는 공산주의가 하나의 실패를 보여준 지금에도, 다른 의미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이다. (책에서도 말하지만, 이 극도의 불평등이 완화되었던 도금시대와 쌍둥이 도금시대의 사이에는 강력한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은 엘리트 계급이 그들의 재산을 기꺼이 나누도록 자극했던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즉,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 개혁을 향한 가장 강력한 동기로 작동했던 것이다. 볼셰비키 선봉대가 권력을 장악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노동 계급에게 정치적 발언권과 사회적 안전망을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p.425)" 이 문장을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덧.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예를 들어 이 책의 다음과 같은 칭송을 보면서 이 책의 어떤 '중립적인 서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좌파 진영의 몇몇 비평가들과 달리, 프릴랜드는 부자들을 헐뜯지 않는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서술 방식은 이 책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렵게 한다. - <USA 투데이>"  중립적인 서술이란 늘 위험하고, 동시에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늘 되묻게 만든다. 그것은 물론 책을 읽는 우리들이 대체로 중립적이지 않기 때문인데, 이 책을 읽는 내 관점에서는 이런 중립이 무너진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꽤 많았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프린스의 해고는 타당했다. 그가 리더로 있는 동안 시티그룹은 서브프라임 시장에 대한 노출 수위를 높였고, 기존 스와프 상품들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규 신용부도스와프를 더욱 확장해 나갔다. (중략) 물론 음악이 나올 때는 춤을 춰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이 멈췄을 때, 앉을 자리가 없는 사람이 바로 패배자이다. (p.263)" 이 대목은 혁명(여기서의 혁명이란 흔히 말하는 혁명이 아니라, 돈을 벌 기회로서의 '혁명'이다)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리더들의 실패를 조명하며 2007년 시티그룹의 CEO였던 척 프린스의 실패를 그 하나의 예로서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이 책에는 이처럼 돈을 벌 기회를 놓친 실패자, 혹은 패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실패와 패배의 이야기로 끝날 부분인가. 그 신용부도스와프는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앉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었는가. 그러나 이 책의 많은 부분은 그저 이들을 실패나 패배로 규정지을 뿐이고, 이 패배자 이면의 고통받는 피해자들, 그러니까 이들 때문에 큰 고난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문제는 이들의 패배나 실패가 아니라, 영화 <월스트리트>에 나온 고든 게코의 말처럼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다 쓴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이 책은 몇몇 부분에서 이 영화 <월스트리트>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도리어 그 뉘앙스를 보면 약간 조롱에 가까운 것 같다. 그것으로부터 돈을 더 벌 기회를 놓쳤느니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관점은 곳곳에서 나오는데, 예를 들어 253 페이지에서도 중국의 라이창싱이나 러시아의 호도르콥스키 같은 비리로 얼룩진 갑부들의 예를 들며, 이것을 단지 '최상류층의 불안정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이 단지 그런 언급으로 끝날 문제인가(물론 이 사건들이 일종의 본보기를 보이는 것에 불과하거나, 일종의 권력다툼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쩌면 저자의 경력이나 이력으로 볼 때 이 서술들에서 어떤 중립을 찾는 것은 난센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어떤 글로벌 포럼에서 사회를 맡고, 누군가와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내세우며, 각각의 등장하는 플루토크라트들의 이력을 빼놓지 않고 적절히 인간미를 담아 소개하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 포스트>,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하고, <파이낸셜 타임스>와 <글로브 앤 메일>의 부편집장을 지낸 저자의 이력이야말로, 아마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마셜 효과(일종의 낙수효과. 즉 플루토크라트의 근처에 있으면 콩고물을 얻어먹게 된다는 말. 그러나 콩고물이 묻으려면 그만큼 가까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의 한 예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뉴욕의 한 논픽션 베스트셀러 작가는, 문학 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난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성공비결은 기업인들이 대서양을 건너는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려준다고 한다. (p403.)" 그런데 '그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책' 중에 이 책도 분명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그리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런 칼럼을 가끔 싣는 잡지이다. 이렇게 충실하게 재인용을 해주는 '조선'의 친절함을 보라. 그리고 또 하나, <파이낸셜 타임스>의 부편집장 출신의 저자의 책이 2012년 <파이낸셜 타임스>지 선정 '올해 최고의 책'에 선정되었다고 광고하는 것은 개그인가?

 

중간에 2장부터 5장까지가 거의 지루한 나열(플루토크라트 영웅전)로 채워지고 있다는 단점(개인적으로는 책의 시작과 끝, 즉 1장과 6장만 읽어도 이 책을 이해하는데 거의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은 넘어가더라도 이 얘기는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다.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이 책은 그 출판사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자체적인 문장부호 표기법을 쓰고 있는데, 예를 들어 따온 말은 홑낫표(「」)를, 그 안에서 다시 따온 말은 꺾은 괄호(<>)를 쓰는 등의 표기법이 그러하다(또 그 안에서 강조하는 말은 두 겹 꺾은 괄호(《》)를 쓰고 있다). 이러한 표기법은 영화 제목을 꺾은 괄호로 쓰고, 출판물이나 잡지를 홑낫표로 쓰는 등의 기존표기법과 맞물려 글을 상당히 어지럽게 만든다. 왜 '열린책들'만 이런 표기를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혹여 그렇게 쓴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표기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일러두기' 등을 통해 간단한 설명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덧 2.
이번 서평단의 두 책 <일베의 사상>과 <플루토크라트>는 내가 관심이 없던 세계, 혹은 나와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솔직히 <일베의 사상>을 이 책보다 더 열심히 읽은 것은 사실인데, 그것은 책의 흥미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단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플루토크라트가 될 수 없지만, 대신 당장 오늘밤에라도 일베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상을 본다고 해서, 그것을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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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12-2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베충 되지 마요, 맙시다, 될 수도 있긴 있겠지만. <플루토크라트>는 읽으려고 했으나 읽지 않은 책인데 별이 두 개라니.. '1대12법' 좋은 방법 같아서 우왕, 하고 있는데 그런 반전이 있구나, 에잇. 세상에 쉬운 게 없어요. 그래서 저는 재벌남과 가난한 캔디녀의 달콤한 로맨스 후에는 반드시 경제서 한 권 흡입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전혀 하고있진 않지만. 판타지와 현실의 균형이 필요하죠. 그런 의미에서 한달에 두 개쯤 '다큐' 리뷰코너를 만들까 생각중인데..(우선 남몰래 함 해볼게요)

이 부분 특히 맘에 안들어요, [누군가와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내세우며,] 이거 정떨어진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걸 누군가에게 숟가락 얹어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특히 '과시'적인 사회가 된 것 같아서요. 심지어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렇고.

맥거핀 2013-12-29 21:56   좋아요 0 | URL
아..답글이 많이 늦었어요. 벌써 주말이 다 지나갔네요. 그렇다고 주말에 뭐 특별한 것을 한 것도 아닌데...

저는 애매한 별점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해야한다면 그저 호불호를 밝혀주는 게 낫다고 봐요. 제 별점은 업 앤 다운 정도로 생각해주세요.ㅋ 업이 아니라 다운 쪽인 건 제 생각에는 아무리 이 책을 읽어도 그들에 대해서 결국 알 수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도 결국 우리와 같은 보통의 인간이라는 결론에 가까워지는데, 인간 속을 어떻게 알겠어요. 다들 탐욕도 부리고, 나쁜 짓도 하고, 가끔은 선의도 보여주고 그러는거죠. 물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기는 하지만요. 왜냐하면 누구나 스스로 브레이크 걸기 어렵잖아요?

아무튼 그 1대12법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그것이 결국 부결되었지만, 그래도 저 곳은 우리사회보다 참 여러모로 성숙한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저런 비슷한 법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떤 반응들이 나올지 익히 짐작이 가잖아요. 그래도 적어도 저 사회는 토론을 거쳐 그것을 투표에 부치기까지 하니까. 지금도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최소한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죠. 참 답답합니다. 후..

아..그리고 '다큐'리뷰 쓴다고 약속한겁니까? 어디다 몰래쓰면 내가 꼭 찾아내야지. 익명으로 악플달리면 저인줄 아십셔.ㅋㅋ 저는 반대로 판타지가 많이 모자라요. 어떻게든 판타지를 좀 채워야 하는데..

 
[일베의 사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박가분의 책 <일베의 사상>은 일베, 혹은 일베라는 어떤 현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기가 조금은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라는 사이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모른다'라고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 굳이 따지자면 '하지 않는다'와 비슷한 의미가 될 것인데, 과연 어느정도까지를 '안다'라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제쳐 두고라도, 아무래도 들어가서 글 몇 개 본 정도로 일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란 곤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지금 상황은 영화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떤 영화를 본 평론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댓글을 남겨야 하는 상황인데, 아무래도 이런 댓글은 무엇인가 방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적대적 호수성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 책은 '일베의 사상'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아마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제목만으로도 무엇인가 의아할 것 같은데, 도대체 일베에 '사상'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있는가, 혹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의 사상>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아는 상당수의 인터넷 커뮤니티, 혹은 현실의 집단에서는 일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물론 여기서의 금기란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에 대해 조롱하거나 비난을 퍼붓는 것은 거의 일상화된 수준에 가깝다). 예를 들어 방송에서 (실수이든 다른 무엇이든) 일베의 용어를 쓴 아이돌 가수가 사과문을 올리고, '일밍아웃' 같은 용어가 있는 것은 그런 풍경을 어느정도 보여준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그것의 이면에는 일베를 어떤 '쓰레기'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런 입장에서라면 일베는 매우 더러운 무엇인가가 모여 있는 어떤 곳이며, 굳이 들출 필요가 없으며, 곧 폐쇄시키는 것이 마땅한 무엇인가이다. 예를 들어 저자도 이 책에서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이야기하며, 코끼리, 그러니까 보수주의의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일베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혹은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문제는 보다 간단할 수 있다. 쓰레기는 버리거나, 어딘가에 묻어두면 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 사이트라면 그 사이트를 폐쇄하거나, 법적인 제재를 가하거나, 접속을 차단하거나 하는 등의 방안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것이, 이것이 쓰레기라고 했을 때, 그것은 썩지 않는 쓰레기라는 점이다. 즉 썩는 쓰레기라면 그것을 어딘가에 버리면 언젠가는 한낱 유기물로 돌아가겠지만, 이 괴이한 쓰레기는 썩지 않고 계속 엄청난 악취를 풍기는 데다가, 때로는 사람에게 달려들기도 한다. 다시 인터넷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아마도 이 일베를 없애거나, 제재를 가하거나 한다면 분명히 비슷한 다른 무엇인가의 형태로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오백원 건다). 그러니 적어도 이것이 현재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그것을 없앨 수 있는 다른 방안을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의 시작 방법 중에 한 가지는 이 책처럼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길래 안 썩지,하고 보는 것이다. 혹은 조지 레이코프처럼 굳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을 쓰는 것이다(물론 '코끼리'를 정말로 쳐다보기도 싫다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굳이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박가분은 인터넷 논객답게 마지막에 자신의 이야기를 '세줄 요약'의 형태로 제시한다. 그것은 첫째, 일베는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의 사상을 계승하며(이 말이 정 불편하다면 일종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둘째, 일베는 현실의 국가, 현실의 요구를 단념하고 인터넷에서의 인정투쟁 방식을 현실로 '끌고 오는(이 말이 특히 중요하다)' 새로운 유형의 젊은 우파이며, 셋째, 이러한 일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광장, 즉 인터넷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이상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은 저자의 일종의 제언이기 때문에 제쳐두고라도 첫째와 둘째, 특히 첫째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베가 이 촛불을 든 내 손에서 시작되었다고, 나한테서? (물론 모든 쓰레기는 쓰레기가 아닌 것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쓰레기였던 것은 없다. 쓰레기는 결국 버리는 자, 그 자신이 애초에 만들어낸 것이다.)

 

직관적으로 보이듯이, 이 첫째와 둘째, 셋째는 각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이 미래, 즉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터넷의 인정투쟁을 현실로 끌고들어오는 현재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며, 이 현재는 과거, 그러니까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에 의해서 배태되었다. 즉 박가분의 방식은 일종의 거슬러오르는 방식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의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 그 기원을 거슬러 올랐던 것처럼, 아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왜 썩지 않는지 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만들어진 공장을 살펴봐야 하는 것처럼, 박가분은 그 기원을 거슬러오르는 작업을 시작한다. 물론 가장 가까이에, 즉 시작지점에 있는 것은 디시인사이드의 인기자료를 저장해 놓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출발했던 일간베스트저장소, 그러니까 일베지만, 그 이전에는 디시, 혹은 디시와 비슷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공유했던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은 예를 들어 부정과 긍정의 양식이 공존했던 증여와 답례의 호수성(짤방이나 콘텐츠를 공유하는 것이 한 예이다), 인정투쟁과 계급투쟁, 혹은 정상국가에 대한 열망과 같은 것들이 그와 같은 것들이다. 

 

즉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일베의 어떤 행동양식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자생적으로 자라난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의 어떤 행동양식이나 공유하는 무의식이 일베의 행동양식의 초석이 되었고, 일베는 그것을 더 위악적으로 변형시켰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변형이라기 보다는 집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일베라는 것은 집적된 데이터베이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집적은 여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촛불도 결국은 집적의 한 형태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파의 집적이 일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좌파의 집적은 촛불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2002년에 시작된 촛불은 현실의 정치인 노무현을 탄생시켰으나 노무현 정권은 궁극적으로 촛불의 의미를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 2002년의 반미정서는 이라크 파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실패한 무엇인가는 두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다시 한번 반복하는 것, 즉 2008년의 촛불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미완이었고, 이것은 곧 일종의 그 거울의 형태, 혹은 전향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곧 일베이다.

 

물론 이것은 거친 도식화이고, 일베의 모든 것이 일종의 '전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이는 촛불에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향의 형태가 그렇듯, 전향자와 전향하지 않은 자들은 공유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일베가 감성적인 이상주의를 비웃으며 '몰이상의 이상'을 추구했다면, 촛불은 중심에 구속받지 않으며 즐기면서 외치고 싶은 것을 외친다는 '몰이상'을 공유했으며, 일베가 인터넷의 인정투쟁을 현실에 끌어왔다면, 촛불 역시 자신들의 목소리를 국가가 들어달라는 인정투쟁의 한 형태였다(물론 이 부분은 촛불의 형태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 정상국가의 양태는 다를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각자 다른 의미에서 정상국가가 도래하기를 꿈꿨다. 즉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결국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고 국가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일베는 이러한 것들, 즉 과거의 인터넷 무의식과 촛불에 대한 반동이 뒤죽박죽 얽혀 있다. 그들의 최종의 정언 명령, 즉 '인터넷의 방식으로 다같이 동물이 되자'는 것은 집밖으로 촛불을 들고나온 촛불집회에 대한 반동과 과거인터넷의 행동양식이 결합되어 있으며, 다른 일베의 행동양식들, 그러니까 팩트의 (나름의) 논리적 정합성을 찾는 행위(누군가의 글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과거 글을 논박의 재료로 삼는 태도와 같은 것이 일례이다. 이른바 '팩트'를 찾는 일베 유저의 태도는 일베충을 몰아내기 위해 그의 과거글을 찾는 다른 커뮤니티의 자세와 통하는 점이 있다), 혹은 타인혐오(와 자기혐오)에 깃들여 있는 것들도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무의식의 계승과 촛불(로 대변되는 무엇인가)에 대한 반동이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정념덩어리인 것이다.

 

물론 다시 강조하자면 결국 이 모든 것, 즉 과거로 거슬러오르는 것은 미래를 끌어내기 위해서 하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그 미래란, 일베라는 것을 없애지는 못해도, 적어도 현재의 어떤 형태에서 바꾸기 위함이다. 다시 비유로 돌아가면 썩지 않는 쓰레기에서 썩는 쓰레기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리고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그 기원에서 보게 되는 것은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나의 손, 촛불을 든 나의 손, 혹은 촛불의 대의에 일정부분 공감한 나의 모습이다. 이것은 위험한 끝맺음일까.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잡아 족치려고 애타게 찾아 헤맸지만, 그것이 결국 나라면, 문제는 더 간단할 수 있다. 내가 안버리면 되니까. 물론 저자가 제시한 해결책(위에 셋째)은 미완의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정투쟁이 불필요한 공간, 최소한의 인정이 가능한 각자의 공간을 만들자는 것, 그것은 환멸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이니까. 환멸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과거의 촛불에서 참가자들은 축제가 지속되기를 바랬다. 환멸을 견뎌내야 하니까. 축제가 영원히 지속된다면 환멸을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축제는 끝났고, 환멸을 견뎌내지 못하는 누군가는 일베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축제의 일상화가 아니라, 일상의 축제화다. 나의 일상이 작은 나만의 축제들로 이어진다면 외부의 축제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는 '국가'가 하등 필요하지 않다. 저자가 인용한 조윤호의 글(나는 '국가'를 넘어서지 못한 '국민'이 촛불집회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조윤호 <개념찬 청춘>, 248p, 박가분 <일베의 사상> 257p에서 재인용)도 그것을 말해준다. 나의 축제에 국가가 초대받을 이유란 없다.

 


덧.
가연님도 지적하셨지만, 과연 이 책에 수많은 사상가들의 이름이 필요했나 하는 것은 의문이 든다. 이것은 그 옳고그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다(물론 솔직히 말해서 지적할 능력이 안된다). 개인적으로는 닭을 잡는데 소잡는 칼을 쓰는 듯한 느낌이다. 예를 들어 한 영화에 대한 분석에서 약간 포커싱이 나간 장면을 두고, 이것은 우울하고 몽환적인 당대의 배경을 담아내며, 키예슬롭스키에서 소쿠로프로 이어지는 유미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시도라고 말하는 격이다(그냥 손에서 나오는대로 쓴 문장이다). 사실은 단지 촬영감독이 어제 마신 술이 덜 깼거나, 카메라 포커싱을 맞추는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 뭐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다시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개인적으로 어떤 영화에 대한 글에 동의하기 위해서 는 일단 그 글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있으면 되지 않을까라고 (나를 방어하는 차원에서) 생각한다. 그가 설혹 잘못된 인용이나, 얼토당토 않은 이론을 끌어온다고 해도, 일단 그 글의 구조, 혹은 분석이 나름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뭔가 들어맞는 듯 보이면서도 미심쩍게 만드는 이 수많은 사상가들의 인용목록이 다시 한 번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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