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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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기 시작했다. 두꺼운 책 3권이 주는 위엄과 언제가 한번은 들어보았을 간략한 줄거리의 명고전이기에 안 읽어도 읽은척 할 수 있고, 이탈로 칼비노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치 처음 읽으면서 두 번째 읽는 것 같은 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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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기억력과 집중력이 쇠퇴하고 있지만 이해력은 이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그거 하나 믿고 더디지만 이틀에 걸쳐 1권을 읽었다. 보통 무슨 책을 읽더라도 사전정보를 접하지 않고 책을 보고 이후 다른 사람들이 책에 대해 쓴 글을 보는 편인데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등장인물과 그 형제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사전에 석영중 교수가 쓴 인간만세까지 읽고 나서야 이 책을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 하건데 석영중 교수가 이야기한 여러 가지 분석적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교수님께서 중간 중간 언급하여 주신 주요 부분에 대한 부분들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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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덕분에 어쩌면 그냥 큰 감회 없이 넘어갈 부분들은 더 많이 붙잡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이것은 예습인 것이고 일찍이 나의 독서 라이프에선 볼 수 없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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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는 총 1, 2부의 이야기가 다루어진다. 작가의 서문을 시작으로 하여 먼저 핵심 등장인물에 대한 외적, 내적인 모습을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소묘를 하듯 세세하게 전달하여 준다. 그러니까 많은 부분 이미 책의 도입부부터 인물설명을 하고 있어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인물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은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책을 읽게 된다. 그리고 1권의 경우 단 이틀의 이야기가 펼쳐지게 되는데 그 사이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수도원에서의 가족모임과 조시마 장로가 그를 찾아온 러시아의 민초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일정부분 하나님의 사랑, 즉 그리스도교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언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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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지속이 되는데 그 사이 알료사와 드미트리가 나누면서 이야기의 뼈대가 형성되고, 카체리나가 그의 약혼녀가 되고자 하는 배경, 카체리나가 그루센카를 만나는 장면등을 통해 자신의 미덕으로 인해 감정 파열을 일으키는 과정을 통해 카체리나가 어떤 여인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의 그루센카가 카체리나의 그런 위선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후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이루어져 나갈지 매우 기다려 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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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료사는 이런 인물들 속에서 전적으로 중심에 있다. 그러니까 사건의 발생과 인물들간의 갈등의 한가운데 있지는 않으나 그들을 연결하고 인물들의 심리를 독자들에게 전달을 하는 과정에 언제나 알료사가 있다. 알료사는 퇴역군인 스네기료프와의 대화 과정을 통해서도 러시아 민중의 뿌리 깊은 가난의 삶을 보여줌과 동시에 모욕과 치욕에 대하여 굴복하지 않겠다 것을 스네기료프와 그의 아들의 대화를 통해서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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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야기는 2부로 넘어가면서 이반과 알료사의 대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한 형제로서 자란 이들이 서로를 좀더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고, 이성적인 이반과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알료사와의 대치적인 장면에서 인간이성 중심과 신의 세계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솔직히 이 부분은 호흡도 길고 쉽지는 않았지만 알료사가 이야기의 끝에서 이반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반 역시 그에 응답하는 부분이 있어 대심문과 이야기가 이 책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나 핵심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실제 이반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언급이나 그의 말을 통해서 이반은 상당히 사상가적인 부분을 볼 수는 있다. 특히 그가 대심문관 이야기를 통해 언급되는 아이들을 향한 이야기나, 그가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상, 그의 통치에 대한 부분에서 자신은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를 매우 장황하게 설명을 한다. 마치 신의 존재를 믿기 위한 단 한순간을 찾기 위한 노력보다 신이 만든 이 세상의 부조리를 언급하는 일에 매우 치밀하게 대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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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은 그럼에도 이야기 자체만으로 흥미로운 부분들이 무척 많았다. 석영중 교수님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교만에 대한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를 통해 보여준다. 스메르자코프의 이야기나 페어몬트 신부와 멀리서 온 수도사의 이야기, 그리고리, 카체리나, 이반, 표도르의 이야기를 통해 교만의 다른 모습들, 오만함, 경멸, 자신이 타인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자기확신의 모습들을.. 결국 이것이 인간에게 정도의 차이일 뿐 그렇게 내재된 모습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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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면서 뇌전증이라고 쓴 부분이나, 알레고리라고 쓴 부분을 보면서 김희숙 교수님께서 상당히 현대적으로 변역한 것임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책은 보지 못했으나 이 기나긴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데 어느 정도는 스토리텔링과 같은 해석도 한 권을 마무리 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놓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많은데 우선 1권을 보면서 든 생각 중 하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한 사건을 통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없어서는 안 될, 그저 스치고 지날 갈 이야기들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2권으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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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illa 2018-07-2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로쟈 선생님의 글을 본 후 ㅠㅠ 큰 실수를 수정하였다. 김희숙 교수님...ㅠㅠ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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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죄가 있고, 각자의 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뭉뚱그려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 평평해질 뿐이다. 죄는 그때 반복되는 것이다.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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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것 때문 아니었을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마음 편히 쉴 수도 없는 삶. 나는 조용하면 조용할수록, 평안하면 평안할수록, 생각이 많아졌으니까. 그 생각들을 견딜수가 없어서 매번 다른 남자들과 동거를 했으니까.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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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진은 어디로

일반적으로 모욕감은 누군가로부터 모욕을 받음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내 안의 감정인데, 첫 번째 단편 최미진은 어디로에서는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받은 사람은 있는 그런 상황이다. 아니 적어도 행위자와 그로 인해 느끼는 자 사이의 대응성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정황이 가끔은 너무도 합리적 귀인으로 느껴진다. 살면서 그런 날들이 내게도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주는 사람은 없고 받는 사람만 존재하는 그런 사실들을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감정을 돌아보다보면, 여전히 내공이 부족함을, 모욕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를 돌아보고 싶어진다. 타인은 나의 삶에 그렇게 깊숙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싶을뿐... 앞부분 박형서작가님 언급부분에서 좀 많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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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봄

일상에서 언제나 정면이 아니라 주변부만 건드리다가 스스에게 위로를 건낼 뿐 위안이 될 수가 없다. 김연수 작가님이 말한대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이고, 뭔가 삶의 밑바닥에 퇴적되어 마음에 회오리바람이라도 한번 불면 다시금 잔잔했던 그곳에 파문이 인다. 그것은 어쩐지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삶의 모습과는 좀 다른 모습이지만 그 누구의 위로나 격려로 해결되는 일은 아닌 듯 하다. 지난간 날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다하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지나간 날이 쌓여 지금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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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찬과 착한사람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읽었지만 다시 읽었다. 부랑인시설로 끌려간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았던 남은 사람들은 잊고 지낼까. 자발적으로 선한 마음으로 권순찬씨의 사정을 돌아보았지만 그의 속사정, 그가 원하던 것을 들어줄 수는 없었던 사람들. 나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행위로 인하여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이 싫은 것. 그게 싫어서 애꿎은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 어쩌면 그것은 자기자신에게 내는 화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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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

마흔셋을 살아온 숙희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 생각났다. 내게는 작품집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았던 작품이었고(‘한정희와 나는 일전에 읽고 아직 생생해서 두 번 읽지는 않았다) 어둑했던 그녀의 삶에 빛으로 다가오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녀가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자신의 외도를 밝힌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남편이 알아주기를.. 그녀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염치)이 있었기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수치)이기에 나는 그녀가 수치에서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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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김숙희는

야이정재민이나쁜엑스엑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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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

윤희의 지난했을 3년의 시간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다 주웠어 하면서 무심한듯 시크하게 주는 선물속엔 마음이라도 있었을터인데 누구에게도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에겐 친절은 있으나 마음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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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말

이런후기 너무너무너무 좋습니다. 이건 마치 영화관에서 막이 다 내린 후 보여주는 보너스 상영과도 같은 것. 이 부분을 보면서 결국 지난 단편집 모두를 떠올렸다. 내가 이기호 작가님의 단편을 읽으면서 경험했던 여러 가지 감정들, 내 행위의 동기들, 이야기의 즐거움,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우리가 타인에게 베풀수 있는 관대함이나 친절은 과연 어디까지인지.. 그런 이야기를 읽고 들여다 보게 만든 작가님의 글들이 모두 좋았다. 전작 김박사는 누구인가에서의 탄원의 문장화라지송침을 떠올리면, 가끔 내 삶이 거기서 한발작 더 나아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절대적 환대''절대적 윤리'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 다시 신적인 면을 생각하게도 한다. 나는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쓰기를 바랬던 김애란 작가의 글을 생각하며 이 소설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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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설을 다 보고는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쓸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적으려고 보니 비슷한 감정인 듯 했지만 다른 면면들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으로 뭉치기에는 숙희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았다. ‘한정희와 나는 김박사를 다시 읽고 후기를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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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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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전 세계가 고도성장기를 지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장기간의 경기침체를 거친 저성장 시대는 큰 도시와 작은 타운에까지 영향을 미쳐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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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베어타운 역시 20세기의 저성장이 머무는 그런 마을이다. 중앙정부로 부터의 투자도 없고, 자연스럽게 인구는 도시로 빠져나가 해마다 인구는 줄어들고, 청년들은 학교를 졸업한지가 오래 되어도 특별히 갈 곳이 없는 그런 도시.. 그럼에도 전통적인 시골 마을이 갖는 유대감은 남아있다. 사람들과의 거리는 가깝고, 공동체가 지향하는 슬로건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버지 세대들은 오랜 기간 고향에서 살았거나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함께 지내는 친구들이고, 그들의 자녀들은 타운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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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도 하이츠타운, 베어타운, 할로타운에 이르기까지 부와 빈곤으로 계층화를 이루고 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마을에서 자라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무시하며 힘을 과시한다. 그럼에도 이동네 아이들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하키를 배우고 하키와 함께 성장한다. 그것은 아버지 세대에도 일어났던 일이며, 한때 베어타운은 아이스하키로 꽤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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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에서 아이스하키는 스포츠 정신으로 즐기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때문에 마치 공동체에나 어울릴 법한 슬로건인 문화, 가치, 공동체는 사장의 사무실에도, 하키경기장에도, 사람들의 마음에도 새겨져 늘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는 어떤 문화와 어떤 가치와 어떤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이 책은 바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표면적 이야기는 유소년 팀에서 청소년 팀으로 그리고 A팀으로 성장해서 향후 국가프로리그로 나가는 개인의 열망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하키는 경기이다. 저마다의 포지션에서 담당해야 하는 일들, 자신의 부족이 곧 팀의 승패에 영향을 미친다면 곧바로 자리에서 내려올 줄 아는 그런 경기이다. 이런 아이들과 달리 마을을 이끄는 어른들에게 청소년팀 하키는 그 이상이다. 작은 마을의 하키팀이 그해 청소년 리그에서 우승을 하게 될 경우, 하키 학교 설립 부지로 선정됨에 따른 부수적 효과르 마을에 자본이 유입되고 경기 활성화로 연결 될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을은 이 시점에 케빈이라는 장래가 촉망되는 공격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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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마을에서 어느 날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다. 분명 가해자는 남학생인 케빈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미래가 되어줄 케빈의 잘못도 인정하지 않는 단계를 너머 모든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인 여학생 마야에게 돌린다. 또래들은 또래들대로 마야를 걸레 취급하고, 어른들은 마야의 아버지가 신고를 한 시점을 두고 공방을 벌이고, 한 쪽에서는 자신들의 일이 아니니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아무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을 동시에 듣고 판단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다함께 모인자리에서는 너무도 비합리적인 논리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과연 자신의 논리가 피해자의 입장에 섰더라면, 자신의 아이가 마야처럼 피해자였더만 할 수 있는 말들일까 싶은 그런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결국 성폭행 과정을 목격한 아맛이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진술을 하게 됨으로서, 제 이의 목소리가 나오고, 사람들은 한쪽으로 몰린 이야기를 다시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물론 사건은 결국 그 마을의 부와 권력을 쥐며진 케빈의 아버지와 일당들이 사건을 예심에서 종결을 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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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아버지시절 하키선수였고 지금은 베어타운에서 대형슈퍼마켓을 하는 프락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아들은 자신의 누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퍼붓는 말을 듣는 순간 프락은 이성을 잃고 아들을 두들겨 패게 된다. 누가 이 이아이들에게 이런 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퍼트렸는가, 왜 아이들은 너무도 큰 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는지, 베어타운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허용하였고 권장하였는지.. 물론 그들은 어떠한 행동으로 말로 그러한 것들을 권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 사회에 퍼져버린 잘못된 아이들의 행동을 허용하고 권장하게 한 것이다. 부모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언제나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되는 상황에도 피해자가 되는 상황에도 연루될 수 가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가해자가 되면 신기하리 만큼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피해자와 그 가족이 당한 지울 수 없는 내면의 깊은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고 되려 가해자가 피해자인냥 당한 고통을 호소한다. 베어타운은 이렇게 아이들의 문제로 인하여 어른들이 말하고 행동했던 그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인간적인 용서와 법적인 책임, 그것은 피해자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위한 최소한의 것이기도 그것은 가해자에게도 꼭 필요한 과정이다. 소설은 법적으로는 죄를 면죄받았을지 몰라도 인간적 뉘우침이 없었던 캐빈이 십년이 지나는 시간동안 여전히 그의 잘못으로 인한 고통에서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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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베크만은 공동체가 갖고 있는 허상과 실상을 잘 아는 작가이다. 그는 오베라는 남자를 통하여 최근 우리사회가 지양하는 공동체성을 보여주기도 한 따듯한 작가이지만, 이처럼 공동체가 어떤 잘못된 행동에 대해 집단으로 침묵하거나 왜곡 했을 때 나타나는 모습, 공동체의 미래를 냉철하게 이 소설을 통해서 알려주었다. 꽤나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였고, 리뷰에서는 스토리를 중심으로 적게 되었지만, 소설 속 중간중간 들려주는 의미 있는 메시지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더 데레사 수녀의 기도문은 이 소설에도 어울렸지만 그럼에도 정도를 걷기를 원하는 그 메시지가 나는 너무도 좋았다. 어쩌면 베어타운에서 권장되어야 하는 문화, 가치, 공동체에 꼭 필요한 메시지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삶속에서도 꼭 필요한 메시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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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이현우 지음, 조성민 그림 / 현암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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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전공과 전혀 다른 정보통신분야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대학원을 진학했는데 학기 내내 학생들에게 발표만 시켜서 한마디를 하였다고 한다. 나는 강의를 들으러 대학원에 왔는데 왜 학비를 내고 우리가 발표를 하고만 있는지 모르겠다고..

 

교수방법에 대한 효과성은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나 역시도 발표 수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가득 남아 있다. 발표 준비를 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발표를 하고 코멘트를 받고 토론을 하는 과정이 무의미 한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에서 강의를 이끌어 가는 분이 이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정리를 해주는 분이 있는가 하면 대다수가 자신의 강의 준비 대신 학생들에게 발표를 시키고 별다른 코멘트 없이 그냥 수업을 마치던 무책임한 강사(교수)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교수는 수업을 위해 온전히 자신의 지식과 자료를 총동원하여 3시간을 꾹꾹 채워 학생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그런 수업을 들었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런 강의가 얼마나 등록금 값을 하는지 말이다.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그런 강의를 생각나게 했다. 강의를 통해 그 다음으로 스스로 나갈 수 있다면 그 강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작가의 시대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작품만으로 작가의 생각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작가에 대한 지식으로 작품을 더 잘 읽어내려 갈 수도 있다. 이 책은 작가에 대한 배경 지식과 더불어 방대한 독서량으로 축적된 지식으로 작가들의 작품을 또 천천히 읽어내려 준다. 문학사에 대해서 나라별로 시대별로 읽어 내려가는데 흥미를 주는 책임이 분명하다.

 

나는 문학도가 아니기에 입문서라는 것이 어느 정도이면 충분한지 잘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책은 입문 정도가 아니라 작품해설로 소설가가 창조해 낸 여러 인물까지 접할 수 있어 원작을 꼭 읽고 싶게 만든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문학의 경우 우리가 짧게나마 고등교육을 받는 동안 접하게 되지만 해외문학의 경우 일반인이 그 계보를 알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욕심 같아서는 다른 나라 작품들도 이렇게 누군가가 정리를 해준다면 좋겠다.

 

러시아 문학은 작가가 19세기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언급한 것처럼 체호프 이후 작가와 작품의 세계에 대해서는 일부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잘 모르는 상황이다. 그토록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는 러시아 문학의 19세기 이후를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로쟈님이 20세기 문학 강의로 다시 만나겠다고 하신 마지막 말씀을 꼭 지켜주실 것을 기대한다. 19세기 이후 러시아 소설을 접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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