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 - 하 - 가면의 주인
박혜진 원작, 손현경 각색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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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와 거지>의 사극 버전일까? 첫방송을 재미있게 봤기에 기대감이 컸던 드라마였다. 유승호, 김소현, 인피니트의 엘, 허준호, 윤소희, 박철민, 김병철...출연진도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왕권을 좌지우지하는 숨은 권력의 폭주도 당시 정세와 맞물려 그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었으니...끝까지 시청할 줄 알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이야기는 재미있었는데 종방까지 본방사수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소설을 펼쳐들었고 가독성 높게 각색된 덕분에 2권을 단시간내에 가볍게 독파했다.

결말은 좀 슬펐다. 사랑을 위해 가문을 버렸던 여인도 죽었고 사랑을 위해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던져야 한 가짜 왕도 죽었다. 그들은 한없이 가엾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나마 정의가 바로서고 지켜질 것들이 바로 잡아지는 모습은 통쾌했다. 현실도 이렇게 돌아가면 참 좋으련만.....

전후사정 모르고 정의감에만 불타던 철없던 세자가 부모를 잃고 추락한 건 '영웅의 일대기'처럼 통과의례였다. 평생 궁에서 누군가의 시중만 받아왔던 그가 왕좌를 내려놓은 후 접한 세상은 달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백성으로 살면서 백성을 위하는 일들이 어떤 일인지, 백성이 앞장설 땐 용기와 함께 목숨까지 담보로 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나갔고 끊임없이 반문하면서 그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해나갔다. 바르게 선 어른이 진정한 왕이 되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군주>를 재미있게 읽을 수 밖에 없었나보다.

 

읽는 내내 머릿 속에서는 배우들이 분주히 움직여 주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영상들이 머릿 속에 꽉 채워진 건 이 소설이 얼마나 잘 쓰여졌는지 그리고 얼마나 탄력적으로 리드미컬하게 쓰여졌는지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지루하게 늘어지는 부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달려 마지막장까지 이르게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드라마 <군주>를 끝까지 보지 못한 사람 혹은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소설도 다시 읽고 싶은 이가 있다면 2권이 금새 읽힌다고 귀뜸해주고 싶다. 망설이지 말라고. 당장 시작해도 된다고.

 악역이었지만 '편수회'는 매력적이었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한다는 것 자체가 큰 욕망이었고 거대한 파워였다. '뿌리 깊은 나무'의 정기준이 움직였던 '밀본'보다 훨씬 더 세속적이면서 거무튀튀하게 느껴졌던 그들. 그들도 원래는 힘없는 백성의 억울함에서부터 출발했으나 종국엔 명분도 방향도 상실한 채 오로지 권력욕만 앞세웠기에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점은 아쉬웠다.

교훈만을 강조했다면 그 반듯함이 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영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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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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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이 일기를 쓴다? 의아한 일이었다. 완전범죄를 꿈꿨을 킬러가 발목잡힐지도 모를 빌미를 남겨두다니. 흡사 족적이나 DNA를 현장에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주인공은 얼치키 초짜인가? 아니다! 십대때 폭력가장이었던 아버지를 죽이면서 시작된 살인은 그의 나이 마흔 여섯에 멈추었지만 그동안 그는 잡히지 않았다. 노련했고 냉철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일기를 쓴다. 솔직하게. 빠짐없이.

WHY?

그의 병명은 알츠하이머. 마지막 살인을 저지를 당시 사고가 있었고 그로 인해 뇌에 문제가 생겼다. 가까운 과거부터 지워지는 병이기에 그는 잠시 전에 무엇을 했는지,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인지,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온갖 기억이 뒤죽박죽되어 있지만 자신이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았나보다. 그래서 최근 마을에서 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혹시 내가 한 일일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때로는 이토록 잔인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영화로 먼저 보고 뒤이어 원작소설을 읽은 케이스다. 물론 순수문학도인 친구에게 매력적인 이야기라고 소개를 받은 적 있지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후 김영하 작가의 책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당시 절친이었던 또 다른 친구가 홀딱 빠져 지낸 작가였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작가의 책을 읽고난 후 많은 것들이 혼란스러웠으므로. 최근 한 예능 방송을 통해 보여진 작가는 생각보다 밝고 위트있는 사람이었다. 급호감이 발동해서 읽을 소설을 고르던 중 <살인자의 기억법>이 떠올려졌다. 그런데 영화가 한 발 빨랐다. 책읽기를 결심한 남 저녁, 충동적으로 영화부터 보고왔다. 더 좋았다. 결말이 다른 두 이야기는 서로에게 윈윈이 됐다. 만약 원작이 묘사가 상세하고 그로인해 문장이 긴 소설이었다면 혹여 상상에 제한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문체는 토끼꼬리처럼 짧았다. 문단도 길지 않았다. 한 줄 혹은 서너 줄 일때도 있어서 이 길이로 어떻게 영화  한 편의 이야기 분량이 나왔을까? 책 한 권이 쓰여졌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작가는 노련했고 또한 영리했다. 과거 연쇄 살인범이었던 주인공의 머릿 속을 옮겨놓은 즉 1인칭의 내레이션이 팔할인 작품이기에 문장은 짧막짧막할 수 밖에 없다. 문장이 곧 그였으므로. 왕년의 연쇄살인범은 냉철하면서도 치밀하며 감정이 배제된 인물이므로. 그의 생각 속 문장이 늘어지거나 길어진다면 그답지 않았을 것이다. 문장의 길이조차 주인공을 대변할 수 있다니....왜 진작 김영하 작가의 책들을 섭렵하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일관성 있는 독자는 못되는 모양이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독자로 살아온 내게 <살인자의 기억법>은 재미와 반성을 함께 가져다 주었다.

 

>>> story

표면적으로는 전직 수의사였던 일흔의 남자가 실은 연쇄살인범이었던 내면의 비밀을 간직한 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살인은 마흔 여섯에 멈추어졌고 이대로라면 그의 죽음과 함께 미제의 살인사건들은 조용히 묻힐 판이었다. 그런데 천형처럼 그에게 '알츠하이머'가 찾아왔다. 마지막 살인을 저질렀던 마흔 여섯 때 겪은 사고로 조금씩 진행되던 병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죽박죽 섞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지금 혼란스럽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부족한 표현력을 보강하기 위해 시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기록이 더 풍성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등단할 것도 아닌 그가 기록에 더 집착하게 된 것은 또 한 명의 연쇄 살인범과 마딱드리면서부터였다. 자신과 똑같은 죽음의 향기가 나는 사내. 자신의 어린 딸이 표적이 되어 사내의 그물에 걸려 있었다. 지킬 자식이 있는 아비는 용감했다. 하루의 모든 포커스가 놈에게 맞추어졌다. 그 사이사이 병은 빠르게 진행되어 갔고 종종 그를 잊었다. 마주할 때마다 그는 낯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기를 들춰보며 '그 놈이었다' 각성하곤 했다. 그리고 결말에서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의 진실을 함께 목도하고 만다.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일어난 형벌의 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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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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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의 손에 죽어나간 사람이 열 명. 연쇄살인범의 행적을 쫓듯 글이 올려지던 '우리들의 킬러 카페' 카페지기가 마지막 피살자로 밝혀졌다. 제 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저스티스맨>은  쉽게 읽혀졌으나 도리어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많은 화두를 던져주는 소설이었다. 그 옛날 미드 <덱스터>를 재미있게 보면서도 '과연 이것이 옳은가?'에 대한 딜레마에 빠졌던 것처럼 <저스티스맨>도 '이것을 정말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남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너무 잔혹하게 느껴졌던 <한니발>과 달리 <덱스터>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단죄할 수 없었던 죄인들을 살해하는 '우리들의 사형집행인' 같은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 연쇄살인마를 죽이는 연쇄살인마. 보는 입장에서야 이야기 속의 인물이고 현실에서 어쩌지 못한 답답함이 해갈되는 부분도 일부 느껴볼 수 있어서 통쾌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달리 보자면 개인대 개인의 살인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말아 '옳고 그름'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저스티스맨>에서 차례차례 죽임을 당했던 인물들 역시 소위 '죽어 마땅하다'는 인물들이었다. 멀쩡한 얼굴로 사회 생활을 영위해 왔던 그들의 민낯은 추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법망에 걸리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 story

'오물충' 사건으로 인터넷 도마 위에 오른 이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사회 속에서 언제나 갑이 아닌 을이었고 억압되고 매사에 성실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적이 따라주지 않는 비운의 보험설계사로 살아왔다.  굴욕감은 수없이 찾아왔고 누르고 눌러온 스트레스가 회식을 기점으로 폭발해 버린 날 그는 정신줄을 놓았다, 그날의 일탈이 그의 인생을 시궁창으로 처박아버리게 된 건 누가 인터넷을 통해 그의 사진이 유포되면서부터였고  곧이어 신상이 털렸다. 어마어마한 댓글이 이어지자 주변 지인들도 그가 오물충임을 알아봤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설에 따르면 이 사건이 연쇄살인의 신호탄이 된 셈이다.

최초로 인터넷에 사진을 올렸던 사람이 피살되고 그 사진에 오물충의 고등학교 사진까지 첨부해서 올렸던 그의 동창이 두 번째로 피살, 세 번째는 인터넷 언론사의 사회부 기자, 네 번째는 성매매를 했던 유부남 선생의 휴대폰을 수리했던  엔지니어였고, 성인 사이트의 운영자인 엔지니어의 친구가 다섯번째로 피살된다. 여섯번째 피살자는 자신이 성매매했던 여학생 또래의 딸을 둔 공립 고등학교의 국어 교사였는데 그는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지 펜션에서 살해되었다. 개연성 있게 이어지는 듯한 킬러의 연쇄 살인은 펜션지기를 쥐꼬리만한 권력으로 좌지우지했던 여행자 카페 운영자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는 유부남이면서도 펜션지기를 찝적댔던 파렴치한인 동시에 실생활에서 잔망스러울 정도의 정치력을 펼치면서 그것을 처세력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놈이었다.

저스티스맨이 밝힌 글 속에서 피살된 모두는 '유죄'. 총맞아 줄을만한 행동을 일삼던 사람들이었다. 총기소지자 일반화 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이마에 탄흔 두 발'을 맞고 사망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1. 총기에 의한 살인 / 2. 이마 탄흔 두 개 / 3. 저스티스맨의 글   이 세 가지만으로 연쇄살인의 띠가 채워졌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의문이 들고 말았다.

저스티스맨의 글은 선의일까? 악의일가?  또 인터넷에 써진대로 믿어도 좋은가?

왜 사람들은 이 같은 거름망 없이 덥썩 그의 말을 믿어버렸던 것일까.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 가장 잘 투영된 모습은 아닐까. 약간 씁쓸해지고 말았다. 쉽게 믿고 쉽게 분노하는 사회.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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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애 김별아 근대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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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을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로 인해 '박열'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실>의 김별아 작가의 소설로 드디어 그와 만났다.

 

 


김별아 작가가 주목한 인물은 이번에도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었다. 1926년 봄, 도쿄 대심원 대법정을 흔들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그 자체가 '인간증명'이었으며 용맹스러웠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 길을 걸어가면서 한치의 두려움도 없었던 것일까. 어린 나이의 그들은 열정적이었고 독했다. 그들의 인생에 있어 가장 강렬했던 순간을 담아낸 작가의 문체는 생각보다 쉽고 간결했다. 술술 읽히는 페이지 사이로 분노보다는 존경을, 상처보다는 다짐을 담게 만드는 일 역시 작가의 필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 같은 역사가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오늘을 가열차게' 살아낸 것일까. 우리는. 과연.

 

 



책을 읽으면서 박열과 가네코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너무 느슨하게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얼마전 읽었던 발레리나 강수진의 책 속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한 걸음만 걸어도 나인줄 알게 하라." 이 말에 어울리는 삶을 살다간 사람인데, 역사를 배우면서 그들의 이름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미안하게도 그랬다.

 

 

 

1923년 9월 도쿄를 중심으로 무려 진도 7에 해당하는 큰 지진이 발생했다. 아비규환 같은 상황 속에서 누가 만들어냈는지 악랄한 괴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는데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푼다더라'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물에 독을 푼 사람은 없었고 이로인해 사람이 죽는 일도 없었다. 누구의 입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온 말인지 간에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이로 인해 조선인은 억울하게 6천여명이나 학살 당했다. 사과를 하고 범인들을 단죄해도 모자랄 판에 일본은 이를 덮기 위해 조선인 한 명을 지목했고 그의 이름이 바로 '박열'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왔지만 여전히 굶주린 삶을 이어나가야했던 남루한 옷차림의 청년 박열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소설 속 박열은 의젓하고 당당한 사내로 그려지고 있지만 조선을 짓밟은 일본땅에서 그는 얼마나 외로운 사람이었을까. 가네코 역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외면 당했던 여자였다. 누군가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채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며 자식에 대한 의무를 저 버린 어머니와 여러 여자를 거느리다가 결국 이모와 도망가버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가네코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났다. 성폭행을 당했고 진심을 외면당한 채 잠자리 상대로 만난 남자 몇몇과도 이별하고 학업과 알바를 이어나가던 중 박열의 시를 읽고 그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남루한 차림 속에서도 감추어지지 않는 당당함에 반해 그의 연인이 되기를 자처했고 가장 든든한 동지로 그의 인생에 걸어들어갔다. 요즘 같은 세상도 아니고 1920년 대, 그것도 일본인 여성이 조선인 남자를 선택한다는 건 보통의 용기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박열과 함께 감옥에 갇히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일본측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녀는 감옥 안에서 자살했다. 박열처럼 버텼다면 함께 출소해서 인생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 박열은 이후 재혼 했지만 가네코는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태어나서부터 줄곳 외롭고 쓸쓸했던 그녀에게 사랑하는 이의 고향땅은 따뜻한 위로가 되었을까. 영화 제목은 <박열> 이었지만 김별아 작가의 소설 제목은 <열애>다. 박열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열과 가네코. 조선인과 일본인, 남자와 여자. 이 모든 이야기와 더불어 서로의 외로움과 생각까지 끌어안았던 그들의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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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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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뉴욕발 서울행 KAL 007여객기
탑승객 269명 전원 사망

 

 

이런 사건이 있었는 줄도 몰랐다.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예언>이라는 제목만 보고노스트라다무스급 예언가의 대재앙 예고나 토속신앙에 얽힌 이야기일거라고만 상상했었다.이렇게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쪽같이 하늘 위에서 사라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1983년 대한민국의 대응은 적절한 것이었나. 치밀한 취재를 거쳐 완성본을 내어놓는 작가 김진명의 소설을 읽으며 그 사실에 주목하고 싶어졌다. 2017년을 살아가는 지금도 국가가 한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때가 많은데, 하물며 1983년이라니......!

#  왜 그들은 입을 다물었던 것일까?

소련과 대치중이던 미국은 비밀 군사시설인 '포스트 굿윌'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KAL 007기의 비행을 묵인했다. 소설에서는 민항기와 교신하려는 이튼 중위의 입을 '군법회의'로 막아서면서 '고지의 의무없음'을 각인시켰다. 만약 미국의 민항기였다면 그들은 같은 논리를 내세웠을까. 무엇보다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그들이건만 우리는 왜 늘 세계평화 수호국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일까. 정말 그들이 세계평화를 먼저 생각했다면, 탑승객 중 미국시민권자들을 보호하려했다면 발견 즉시 교신해야만 했다.



예민한 지역인 브레즈네프 특별구역에 가깝게 날고 있던 KAL 007기를 격추시킨 소련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소설 속에서는 소비에트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격추를 명령하는 당간부의 간악한 외침이 도입부에서부터 터져나온다. 착륙지시, 착륙유도가 아닌 격추를 선택한 그들의 저의는 과연 저것 뿐이었을까. 당시 대한민국이 미국이나 유럽 강대국들처럼 힘있는 국가였다면 그리 쉽게 격추되었을까. 한숨이 절로 쉬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007 피격 사실을 알았던 일본은 감청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입을 다무는 대신 미국과 거래했다. 한국에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이익이라는 이유로. 분명 격추된 비행기는 대한민국의 민항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간 독자를 가장 답답하게 만드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다. 삼국을 다 제쳐두고 정작 우리 국가는 자국의 비행기가 격추되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소설은 어린 시절 헤어진 남매의 상봉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풀어나간다. 여동생 지현의 미국입양으로 헤어지게 된 남매는 14년 만에 다시 만날 기회를 얻었다. 공항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오빠 지민에게 처음 전해진 소식은 '비행기 연착'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실종'소식이 전해졌고 이는 '격추소식'으로 이어졌다. 전두환 군부시대. 청와대를 아무리 자극해봤자 소용이 없자 지민은 미국으로 가기 위해 외무부 영사국장을 폭행했고 바램은 이루어졌다. 마침 지현의 양부였던 켄싱턴은 정보계통에서 일을 해 온 사나이였고 그의 도움을 받아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다. 먼땅 미국에서.

물론 소설을 읽다보면 감상적인 부분이 짙어지는 페이지도 있고 기대했던 바를 비켜가는 부분도 등장한다. 독자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예언>은 특히 더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이 강하지 않았나 싶은 대목들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KAL 007 사건은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반추하는 거울처럼 삼아야하는 비보'임을 잊지 않게 만든다. 그것이 김진명 작가의 필력이고, 힘이 아닐까.

 

이 같은 사건이 다시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고려, 고구려, 신라, 백제, 조선 등의 고대사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근대사/ 현대사에 중점을 두고 토론하며 생각하는 힘을 길러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외워서 쓰는 역사 수업이 언제나 아쉬웠던 내게 작가의 소설은 언제나 지금 현재, 우리가 해야할 일들을 깨닫게 만든다. 읽는 동안 만이라도.

소설의 말미에서 언급된 것처럼 정말 2025년에 통일이 되는 것일까. 기다려볼 일이다.
소설의 제목이 <예언>이었던 건 마지막 한 문장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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