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자크 상페의 그림 이야기
장 자크 상뻬 지음, 김호영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장 자끄 상뻬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동화다. 그림도 내용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니까. 그의 그림은 잘난체를 하지 않아서 좋다. 예쁘게 보이기 위해 극도로 미화된 부분도 없고 너무 심플하지도 않다. 호기심 똘똘 뭉친 어린 아이 그 자체의 모습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림 그리는 상뻬는 1932년 우리 나이로 치면 이미 할아버지 나이이다. 작가의 나이는 작품의 나이와는 상관없음을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며 느낀다.

 

꼬마 니콜라의 엉뚱함은 짱구가 보여주는 발칙함과는 또 다르다. 프랑스 정서를 100% 다 이해하긴 어려운 한국 사람이고 어린 아이의 감성을 100% 다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이 되어 버려 슬프지만 상뻬의 글과 그림을 보는 동안 만큼은 나이를 잊고 오늘을 잊고 나를 잊을 수 있어서 좋다. 프랑스에서 데생의 1인자였다는 그의 그림에는 푸근함도 담겨 있고 따뜻함도 담겨 있다. 세상은 숨 막힐 듯 목을 조아오는 곳일지 몰라도 그 세상 속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인 것 처럼 그림 한 장이 때로는 삶의 위안이 되고 안식처가 되어 주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뉴욕 스케치],[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아름다운 날들],[파리 스케치]등을 보아 왔지만 그래도 내겐 [얼굴 빨개지는 아이]가 최고다. 이야기 속에는 남과 다르지만 숨지 않고 불행해지지도 않는 아이들의 성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어쩌면 꼬마 마르슬랭 까이유와 르네 라토는 아주 불행해졌을지도 모른다. 바로 왕따 당했을테니까. 물론 아무런 이유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마르슬랭은 외톨이였다. 하지만 친구들이 그를 따돌려서가 아니라 한마디씩 하는 친구들을 견디지 못하고 그 스스로 혼자 있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르네 라토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주 매력적인 아이인 르네는 늘 재채기를 하곤 했다. 그래서 금새 친해질 수 있었지만 르네 가족이 이사가버리는 바람에 그들은 이별해야만 했다. 르네가 새 주소를 적은 메모를 부모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p13  왜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걸까?

 

마르슬랭은 스스로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부모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부모들이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해야할 일들이 쌓여 있고 항상 시간에 쫓기는....

 

아, 동심에 어린 어른들의 모습은 이런 모습인 것일까. 아이에게 이해받아야하다니...대체 왜 어른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는 것일까. 싶어지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그리고 그도 그런 어른 중 하나로 성장했다. 비오는 어느날 사람들이 가득찬 거리에서 기침소리를 듣게 될 때까지. 어른으로 살던 마르슬랭에게 어린 시절의 동심을 다시 안겨다 준 것은 역시 친구와의 만남. 그래서 나는 이 동화가 너무나 좋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 인생의 온도가 데워지는 순간이 바로 그때이기 때문에-.

 

내게도 이런 온도를 전하는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비록 내게 마르슬랭처럼 홀로 삭혀야 하는 고통들이 찾아와도 함께 그것들을 이야기하며 긍정의 에너지를 솟게 만들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토록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러면서도 너무나 유쾌하고 재미있다니...과연 이 한 편만으로 9백만부 이상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우뚝서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2009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데뷔한 요나스 요나손의 작품은 현재 영화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주인공 알란 칼손은 100세 노인이다. 기력없이 따뜻한 창가에 흔들의자를 두고 앉아 있을 법한 그림이 머릿 속에 그려지지만 그는 역동적인 면모를 보이며 양로원 창문을 훌쩍 넘어 탈출했다. 왜?

 

갱단의 돈을 훔치면서 도망다니게 되는 알란의 100세 인생은 허황 그 자체다. 100년간의 연보 속에는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했던 과거사도 포함되어 있고 스탈린을 만나기도 했으며 마오쩌뚱의 도움을 받았고 존슨 대통령에 의해 한 때는 미국 스파이로 활동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쯤되면 포레스트 검프가 떠올려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알란 칼손은 김일성까지 만난다. 황당 그 자체인 스토리지만 정신을 쏘옥 빼놓을만큼 정말 재미나게 읽힌다.

 

민주주의, 공산주의, 독일의 분단 현실, 원자 폭탄의 개발....연관성 없어 보이는 역사적 사건들이 이어지며 당황스러울 정도로 개연성 없이 이어지지만 "할매가 돌아왔다"처럼 유쾌하고 코믹하게 읽기 좋다. 그리고 묻는다. 과연 100세 라는 나이가 넋놓고 따뜻한 빛아래 앉아 있어야만 하는 나이인가. 그들에게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알란처럼 재미난 인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하지는 않을까.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살클럽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김성균 옮김 / 까만양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대한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자살클럽]은 작가의 전작들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이어지길 바라며 읽기 시작한 작품이었다. 코난도일이 추앙했다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그는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트씨]를 쓴 1800년대 작가다. 1850년에 등대건축기사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가업계승을 위해 공대에 입학했지만 가업을 잇지 못했고 아버지의 바램대로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했지만 변호사로 살지 않았다. 대신 1880년, 10살 연상의 아내 패니와 결혼한 후 소설집필을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특이한 삶을 살다간 작가지만 스티븐슨의 [자살클럽]은 잔인하거나 작의적이지 않았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보다 사실 번역자의 이름이 '김성균'이라 놀라고 말았는데, 동명이인이겠지만 '응답하라 1994'에서 인기몰이를 했던 삼천포역의 배우가 이전에는 '이웃사람'에서 살인범의 역할을 맡은 적이 있는지라 잠시 엉뚱한 상상을 하며 피식 웃음 지어버렸다. 혹시 살인범이 번역한 추리소설? 이라는.

 

보헤미아 왕자 플로리즐은 일생일대의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야 만다. 친구인 제럴딘 대령과의 산책길에 만난 크림파이를 나눠주는 청년을 따라 '자살클럽'에 발을 딛고 만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자살방법을 택한 이들의 모임이었는데, 총 52장의 카드를 섞어 스 중 클럽 에이스 카드는 자살도우미가 되고 스페이드 에이스카드를 고르면 죽어야 하는 복불복 게임의 형태였다. 우연히 참가한 모임 속에서 죽음을 보아버린 왕자를 대령은 한사코 말리긴 했지만 오만한 태도도 두번째 모임에 나타난 왕자에게 죽음이 내려졌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마치 일본 드라마의 원작인 '스트로베리나이트'의 가벼운 버전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 '크림파이를 나눠준 청년 이야기'는 '의사와 사라토가트렁크에 얽힌 사연'으로 이어짐으로써 왕자와 대령이 중심인물이고 이 단편들이 옴니버스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병약한 체력으로 인해 보헤미한적인 삶에 동경을 품었던 스티븐슨에게 이런 에피소드들은 환상이었을까 동경이었을까. 그가 후세에 태어나 셜록 홈즈를 읽고 루팡을 읽게 되었다면 그 상상력은 과연 얼마만큼의 폭발력을 지닐 수 있었을까. 이야기의 재미보다는 이런 상상력이 중간중간에 머릿속을 파고들어 자꾸만 나의 독서속도를 늦추고 스토리를 잇는데 방해가 되었지만 전혀 속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잠깐잠깐의 그 상상들이 휴식처럼 찾아와 도리어 즐거웟달까.

 

1878년 <런던매거진>에 여르부터 가을까지 연재되었던 3편의 단편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과 파리를 무대로 모험꺼리를 찾아나선 두 남자의 비밀스런 일탈이 더해져 흥미롭게 펼쳐졌다. 이후 라디오 드라마와, 연극,영화로 방연되어진 이 소설은 사실 가벼운 농담처럼 읽긴 좋아도 [보물섬]이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색다른 재미에 빠져들게 만들지는 못했다. 약간 싱거운 음식을 맛보았지만 좋은 음식점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어 나쁘지 않은 느낌과 동일한 느낌이 난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공포의 계곡 : 최신 원전 완역본 - 셜록 홈즈 전집 04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바른번역 옮김 / 코너스톤 / 2014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눈의 취향도 변하는 것일까. 홈즈라면 자다가도 벌떡 깨어날만큼 그 캐릭터에 흠뻑 빠져 있는 내게 다시 책으로 읽는 홈즈는 생각만큼 만만한 도전이 아니었다. 초등학고 4학년때 처음 문고판으로 접했던 홈즈 시리즈는 그 이후 크리스티의 할머니 탐정이나 프랑스의 신사, 괴도 루팡이 나타나도 언제나 1등 탐정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이야기는 내 머릿 속에서 상상 주머니처럼 부풀려져서 나만의 홈즈를 만들어냈고 어린 내가 마치 왓슨처럼 그의 사건파일들을 기록하며 함께 하곤 했는데 그 시절은 다 어디로 가고 영상에 그만 눈이 익고 말아 다시 글자 속 홈즈를 따라다니는 일이 이처럼 힘들 줄이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쉬엄쉬엄 읽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 읽은 뒤 심장이 두근 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처음 시작할때부터 홀릭 되어 있던 영국 드라마 셜록에서 '공포의 계곡'이 각색되어진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영상화 될까? 상상하ㅐ 보면서. 나는 차츰 다시 즐거워지기 시작했으므로. 홈즈시리즈는 읽고나서 각인되는 시간이 길다. 채공시간이 길다고 표현해도 좋을까. 아무리 재미있어도 김전일의 이야기가 몇몇 가지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 것과 달리 홈즈의 모든 이야기는 각각의 개성이 크기 때문에 스토리마다의 개연성이 적다고 해도 그 이야기는 오리지널로 기억의 뇌에 남겨진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이야기처럼.

 

가끔 아서 코난 도일과 그의 주인공 홈즈가 같은 인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는 홈즈의 날카로우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말투와 그를 글로 옮긴 코난 도일의 문체의 간결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치밀하면서도 세심한 분석력은 미스터리를 한층 더 신비스럽게 만들고 작년, 재작년의 가까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결코 오래되지 않는 스토리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마치 도민준이라는 외계인이 400년을 살면서 항상 그 현재성을 지니듯 홈즈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언제나 '현재'다.

 

[공포의 계곡]은 귀신이나 유령이 나타나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교양이 넘치고 호남형인 더글러스와 그의 아내는 부유하지만 사교계를 들락거리기보다는 은둔하며 지내는 것을 즐기는듯 보였다. 다만 팔에 이상한 문신을 새기고 있었는데 이 문신이 얼굴이 엉망이 짓이겨진 채 시체로 발견된 그의 신분을 확인할 단서가 되어 주었다. 지금처럼 증거를 통한 증명이 어려운 시절이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건은 더글러스 사망사건으로 처리되었고 당도한 홈즈는 분석 수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과거의 어떤 행적으로 인해 쫓기고 있으며 그의 과거가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 일으켰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가 정말 더글러스인지 아닌지 하는 것에 이르러서야 홈즈의 모든 추리는 아귀가 맞아 떨어지게 되었으며 사건이 해결된 다음 남아프리카로 떠난 부부의 최후에 대한 소식도 마지막엔 함께 곁들여져 나왔다. 아주 친절하게도.

 

책의 후미에 이런 글이 쓰여져 있다. 셜록 홈즈는 현존하는 모든 추리 소설의 시작과 끝 이라고. 어떤 서평을 쓰고자 했든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한 문장이었음을 마지막 장을 덮어며 깨닫게 되었다. 이 한 문장 외, 이 위에 쓰여진 서평의 전문은 모두 주절거림일 뿐이었음을. 서평을 다 쓰고 나서야 깨닫다니.....! 홈즈가 곁에 있었다면 내게 과연 어떤 투덜거림을 던졌을까. 궁금해지는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쥐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쥐'는 정돈되지 않은 선물상자를 건네 받은 것처럼 기쁨과 혼돈을 함께 맛보게 한 크라임노블이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시리즈를 통해 다양한 모습의 해리를 봐왔지만 이처럼 어설프고 풋풋한 해리를 만나보게 될 줄은 몰랐다. 시리즈를 거꾸로 읽은 느낌? 배트맨 영화를 다 보고 그 비기닝을 훗날 보게 된 느낌과 비슷했다.

 

[박쥐]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은 꽤나 묵직했다. 밤에 비행하고 동굴속에 숨어 살면서 그들만의 규칙을 통해 어둠을 지배하는 이 날짐승은 '드라큐라' 탓에 두려워한 적도 있지만 꾸준히 시청하고 있는 '동물농장'덕분에 관심있게 지켜보게된 생명체였다. 그런 박쥐의 어떤 면을 염두에 두고 작가가 제목에 갖다 붙였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책을 통해 제목의 의미를 유추해 보고자 했다.

 

'박쥐는 죽음을 뜻한다. 모든 것을 빼앗겨 본 사람들만이 그것을 안다"

 

라고 책의 후표지에서는 그 의미를 스포일러처럼 떠들어대고 있지만 읽고난 내 느낌은 약간 달랐다. 우리네 역사 시간이 이 땅의 역사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타국의 역사까지 밝은 헤안으로 바라볼 수 없기는 하지만 '도둑맞은 시대'라는 표현은 정말 생소한 것이었다. 어느 상식 책이나 인문학 책에서도 본 적이 없는 그 문구에서 심한 지식적 괴리감을 느끼면서 나는 소설을 읽고난 다음 지식 검색에 나섰는데 속이 시원할만큼 그 내용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곳은 없었다. 다만 역자가 후미에 덧붙여 놓은 몇 장 속에서 습득해보자면 원주민 가정을 미개하다고 규정짓고 혼혈아들을 겉모습으로 분류해 마치 과일공장에서처럼 그들을 배송했던 반 인류적인 일을 행한 일이 있다는 거였다. 자신의 부모와 생이별을 해서 백인처럼 생겼다고 백인의 가정에 입양되고 원주민처럼 생겼다고 해서 무턱대고 공장의 일꾼으로 보내진 아이들은 훗날 자신의 미래를 도둑맞은 채 남이 결정해 버린 삶에 순응하거나 반항하면서 나라의 문제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중간중간에 "그 흑인, 애버리진"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했더랬는데 애버리진이 바로 그들을 뜻하는 용어이며 이 부끄러운 역사적 사건을 두고 요 네스뵈는 여전히 사과나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를 고발하면서 연쇄살인 사건의 중요한 모티브로 끌고 들어왔다. 앤드류, 투움바, 조셉 같은 애버리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한 채 혼란의 삶을 살아나가야만 했다. 몇몇 우월주의자들이 내건 정책으로 다수의 국민들이 피해를 보았지만 가해자들의 사과는 없었다. 옆 나라의 만행으로 고통받은 세월을 사과받고자하는 그 마음은 비단 우리네 것만은 아니었던가보다. 급하게 입국해 특별비자를 들이대는 해리는 30대의 풋풋한 모습이지만 사건 전반에서 비중있게 중심을 잡고 있진 못한 듯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에 읽어왔던 작품 속에서 그는 노련하고 세상의 짠맛, 쓴맛을 두루다 맛본 중년의 형사였기 때문이다. 그 해리를 만들어온 사건 중 하나인 [박쥐]는 그래서 신선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어설픈 해리 탓에 타작품에 비해 집중도는 떨어지는 편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보고 읽은 자세부터가 틀렸음을 다 읽고나서야 깨달았으니....얼마나 어리석은 독서타임이었는지. 이 작품만큼은 해리라는 인물이 아닌 사건을 중심부에 두고 읽어야 혼란이 없을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