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
임레 케르테스 지음, 정진석 옮김 / 다른우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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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김현은 어느 책에서 이렇게 쓴적이 있다.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니까. 살아서 별별 추한 꼴을 다 봐야 한다. 그것이 삶이니까.˝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작가도 이렇게 말한다. ˝(야만의 시대에 대한) 크나큰 항명은 우리의 삶을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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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5-16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현재는 사실상 절판 상태이다)을 읽고자 한다면 임레 케르테스의 인생 편력과 그의 필생의 역작인 ˝운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다. 작가는 유년 시절에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갔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돌아왔다. 그는 성년이 되어서 기자와 번역가로 활동했고 13년에 걸쳐서 쓴, 자전적인 수용소 체험을 담아낸 ˝운명˝을 출판하고자 했지만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하는 시련의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1975년에 가까스로 ˝운명˝이 헝가리의 어느 출판사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시장과 평단의 반응은 싸늘했고 경제적 어려움과 무명의 시간은 계속 이어진다.
˝청산˝의 배경은 1990년의 헝가리이다. 동유럽에 혁명의 바람이 불면서 기존의 공산주의 정권이 ‘청산‘되고 주인공의 직장인 출판사도 ‘청산‘될 위기에 처하며, 주인공이 문필가로서 흠모해마지 않으나 평생을 궁핍과 고독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B는 존재의 ‘청산(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다. 이 소설은 정권/생계/생명이 ‘청산‘되는 어느 시대를 무대로 삼아서 그럼에도 살아남아야 할 것을, 우리의 실존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던 시대의 여러 중압들을 망각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고기로 태어나서 - 닭, 돼지, 개와 인간의 경계에서 기록하다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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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관념과 환상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실경험을 토대로 보편성과 감응력을 지닌 터프한 글을 쓴다. 가축들이 ‘대량적으로‘ 생산되고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며 ‘비극적으로‘ 살해되는 수라장의 모습을 구체성 있게 그려내고 있다. 감히 말하건대 영국에 조지오웰이 있다면, 한국에는 한승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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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5-04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2018년에 출간된 책들을 ‘다‘ 읽지는 못했다. 내 성격은 게으른 편이고, 독서의 폭도 좁다. 그럼에도 2018년에 나왔던 명저를 두 권만 뽑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1. 오혜진 외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2.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책을 안 읽고 죽는다면 손해이다, 라고 말하고픈 몇몇 저작들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는 이러한 반열에 들만한 책이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5-04 15:05   좋아요 0 | URL
오. 이 책 읽어보아야겠군요..

수다맨 2019-05-05 11:54   좋아요 0 | URL
작가가 실제로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 있는 농장에서 막일을 했더군요. 요즘은 보기 드문 작가이고, 그렇기에 귀하고 소중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5-0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 잘 들어가셨습니까 ? 어젠 기억이 하나도 없네요...
그리고 그때 추천해주신 책 제목이 뭐죠 ?
 
끝나지 않는 노래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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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지질하고 내핍한 일상을 관찰력과 통찰력을 갖추어 서사화하는 작가가 있는가하면, 신파와 감상을 덧붙여서 ‘싼티‘나는 저작을 만드는 작가도 있다. 전자가 공선옥과 권여선이라면 후자는 공지영과 신경숙이다. 그리고 장차 전자의 반열에 들만한 작가로 최진영을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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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4-2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보기에는 이 작가는 단편보다는 장편에서 본인의 진가와 특장이 더 발휘되는 듯하다. 부언하면 이 작가가 ˝팽이˝라는 단편집에서 보여 주려고 했던 재기才器와 실험은 나로서는 어느정도 심드렁하게 읽혔다.
그런데 여성 삼대의 수난사와 생활사를 형상화하려는 작의가 돋보였던 이 장편은 (뻔함과 식상함이라는 일부의 비판이 있기도 하겠지만) 서사와 문장을 이어 나가려는 작가의 저력이 엿보였다. 성마른 비유를 하자면 무척이나 신경써서 ‘모던하게‘ 옷을 차려입어도 옷거리가 별로로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위의 시선에 의식하지 않고 물 빠진 셔츠와 우중충한 바지만 입고 다녀도 그 태깔이 괜찮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나는 최진영은 후자에 속하는 작가라는 느낌이 든다. 이 작가가 문단의 흐름이나 풍조에 신경을 쓰지 말고 자신이 믿고, 걷고 있는 삶의 문법으로 근기가 넘치는 작품을 써주길 바란다.
 

 

 

 

 

양평역 2번 출구 앞에는 먼지가 날리는 중이어서 시야가 부옜다. 양복을 입은 세 명의 남자들이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면서 하느님을 믿는지 물었고 이차선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은 매연을 내뿜으면서 서행했다. 도로 양편에는 무언가를 부수고, 만드는 공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펜스 너머로 보이는 포클레인은 삽날로 쇳덩이를 부수는 중이었고 반대편에서는 노란색 안전모를 쓴 사람들이 비계 위에서 회색빛 타일을 건물 외벽에 붙인 뒤 이음새에 실리콘을 부어서 마감을 했다. 누군가는 이러한 풍경을 보면서 아쉬움이나 불쾌감과 같은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정서적 친밀감과 심적인 편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곳의 풍경은 안산의 어딘가를, 공장이 밀집한 공단 지역이나 개발의 손길이 크게 미치지는 않은 역사 앞, 피부색과 눈빛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생계를 도모하는 어느 거리의 정경과 닮아 있었다.

 

나는 직진을 하다가 외벽이 유백색인 건물에 도착했다. 유리문 앞에는 사진전과 관련된 내용이 쓰인 노란색 배너가 있었고 벽 너머에서는 남자 바리스타가 커피를 유리컵에 따르는 중이었다. 사진전이나 그림전을 간 경험은 드물었으나 카페 안에 갤러리가 있다는 애기를 들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왔고 카페 한구석에 있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니 개나리색 천이 드리워진 입구가 보였다. 그곳이 갤러리였고 작가는 구석진 곳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갤러리는 지하에 있어서 공기가 위쪽보다 상대적으로 서늘했다. 작가가 바닷속 온도와 질감을 살리고자 이러한 공간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피부에 찬기가 끼치고 회남색 타일들이 깔린 바닥을 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윳빛 벽에는 단원고 교실의 풍경을 찍은 사진들이 잇따라 붙어 있었고 갤러리 한가운데에는 작가가 그곳에서 직접 가져온 책상이 조명을 받아서 윤광이 흘렀다. 책상 위에는 바나나우유와 여러 종류의 과자들과 노란색 조화, 겉표지에 도라에몽이 그려진 책과 하트 모양의 포스트잇들이 있었다. 작가는 책을 펼쳐서 책상의 주인인 남학생의 아버지를 보여 주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고 책상에는 마른 꽃들이 많았다. 학생의 아버지는 교실에 들를 때마다 꽃을 가져왔고 그것이 시들어도 치우지 않았다. 그의 아내, 학생의 어머니는 교실에 들렀다가는 참척慽의 고통이 늘어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여지껏 이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작가의 설명도 이어졌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이라는 소설에는 월남전 참전 경력이 있는 레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온 뒤에도 살육의 경험들로 인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게 되면서 육체와 정신이 망가지는 지경에 이른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PTSD에 시달리는 재향군인들을 돕고자 여러 재활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있지만 레스와 같은 인물들이 비극적인 경험의 반복 재생에서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작중에서 레스는 (재활 프로그램의 일환인) 중국 식당에서 음식을 고르고 식기를 사용해서 식사하는 행위 일체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물컵을 드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을 흘리며 그곳에 있는 동양인들을 보면서 정글 속에서 맡았던 누군가의 땀내와 바닥의 흙내를 기억하며 몸서리를 친다.

 

누군가의 죽음에서 비롯한 개개인의 심적 고통은ㅡ 이것이 예상치 못했던 참척이건 원치 않는 살육이건 간에ㅡ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피의 정글을, 피의 바다를 결국에는 통과한 셈이니 더 이상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서 살아서만은 안 된다는 논지의 주장을 할 때가 있다. 그러한 논리의 주장자들은 피와 관련된 극적인 경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로 보인다. 피의 정글과 바다를 거쳐 온 뒤에도 해당자들의 몸에는 피가 묻어 있다. 앞으로 그 이의 생애에 행복과 축복과 관련된 사건들이 이어진다고 해도 그 피는 완전히 씻겨지지 않는다. 도리어 피로서 피가 씻기는 광경을 평생 동안 마주하는 고통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다.

 

갤러리에서 내 시선에 유난히 들어왔던 사진은 교실 안 풍경과 복도 정경이 겹쳐진 듯한 모습으로 찍힌 작품(맨 아래 사진)이었다. 하나의 사진 안에 두 개의 장면이 중첩되어 있어서 작품은 사실의 재현이라는 본래 목적을 초과해서 몽환적이고도 착란적인 이 미지를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작가는 카메라의 오작동으로 인하여 실수로 이 사진이 찍혔으나 그러한 결과물이 마음에 들어서 결국 전시회에 걸게 되었다는 사정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 '실수'는 단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안산의 교실에서 사진을 찍고 찍느라 길고긴 시간을 보냈던, 본인의 작가적인 노력과 열정에 따른 운 좋은 보상일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작가는 설명이 끝난 뒤에도 타인의 슬픔에 반응하고 공감하려 하는 공동체주의와 이타주의를 여러 번 말머리에 올렸다. 그 이의 창작 목적은 슬픔과 죄책감, 애도와 희망에 방점을 둔 것으로 내게 보였다. 나는 이 작가가 착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약간의 우려가 들었다. 이 사진들이 지닌 의의와 가치를 그 정도로 한정 지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에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선 이 사건의 반복 언급에 염증을 느끼거나 나아가 폭언을 일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이들은 크게 두 부류인데 첫 번째는 여전히 503에 대한 애정과 흠모를 가지고 있으며 세월호 사건이 그들의 영도자에게 부정적인 여파를 주었다고 보는 이들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세월호 사건과 비견될 정도인 비극적인 사건들(예컨대 천안함 참사)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오로지 전자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후자는 소홀히 대하고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 역사에서 일어난 끔찍한 비극들을 총괄적/복합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해도의 결여를 드러내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 다른 망자(들)의 존엄에 위계와 차등을 나누려는 저의(천안함 사건은 군인들의 위대한 순국이나 세월호 사건은 단순 사고사일 뿐이다)마저 엿보인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의견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무례하며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반성적/발전적으로 성찰한 만한 기회와 동력을 조금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나는 갤러리에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국가 권력의 폭압적인 작용(5.18 민주화 항쟁)과 국가 권력의 태만적/무책임적 행태(세월호 사건)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동전의 이름은 집정자와 그 추종 세력의 자격 미달이자, 정부의 존재 의의 상실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망자들에 대한 연민과 추도도 필요하겠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 이제 세월호 사건은 공식적인 기억의 장이자,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역사의 '아프고 부끄러운' 기록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 있다. 그럼에도 현재 이러한 과정에 반기를 들면서 503의 석방과 명예 회복을, 망자와 그 유가족들의 존엄을 훼손하려는 시도들이 여러 층위(인터넷, 광장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극언을 하자면 사람으로서 도리와 염치를 저버린 이들에게는 그에 따른 대접을 해야 한다. 이들의 발언을 '표현의 자유'라는 문구를 통해서 감싸거나, 관용주의적인 태도로 대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세월호 사건을 조롱/폄훼/왜곡하려는 이들에게 비난과 처벌이라는 이름의 몽둥이를 좀 더 제대로, 휘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망각에 맞서서, 재현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작가의 집념에 진정으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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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2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 제18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홍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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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양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호오가 결정되는 경우도 있다. 이 글이 중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면 나름의 칭찬을 곁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빈약한 서사에도 장편이라는 형식을 일컫고 있으니 감정선의 형상화 솜씨나 세상을 보는 투시력의 밀도가 더욱 얕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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