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디 얀다르크 - 제5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염기원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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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작의 존재 의의는 수작의 품격과 가치를 드높인다는 데 있다. 이 책을 일독하니 ˝미생˝이나 ˝누운 배˝ 같은 작품들의 성취도가 각별하게 보인다. 직장사職場史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면 좋았을 것을 잡다한 개인사(연애사, 가정사 등)까지 과하게 곁들이니 디테일은 살아있으나 군더더기도 살아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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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지평 컨템포러리 총서
조디 딘 지음, 염인수 옮김 / 현실문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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팸플릿으로는 뛰어나나 전략서로서는 아쉽다. 잃어버린 대의를 복원하려는 진심과 노력은 훌륭하나 오늘날 공산주의적인 당이 인민에게 제시해야 하는 구체적 청사진은 희미한 감이 있다. 그럼에도 ‘좌파 멜랑콜리‘와 ‘소통 자본주의‘와 같은 개념들로 현 시대의 실상을 고찰하려는 시도는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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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11-21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공산주의의 전격적인 복원을 역설하는 대목보다도 ‘좌파 멜랑콜리‘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이 개념은 과거에 발터 벤야민이 좌파에서 (사실상) 전향한 이들을 비판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혁명적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과 대안을 포기/폐기하고 자기 절망과 허무에 탐닉하는 이들의 내면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부언하면 이들은 겉으로는 ‘나는 위대한 대의와 혁명에의 열정을 가졌던 사람이나 이제 그것들이 망실되고 잊히는 형편없는 세상이 되었기에 더없이 절망하고 한탄하노라‘와 같은 자학적인 언사를 보인다. 그리고 좌파 멜랑콜리는 이러한 이들의 심리를 다음과 같은 세 개의 과정으로 나눈다.
1. 만민 해방은 절대로 실현될 수 없다(대의의 용도 폐기).
2. 정부 및 자본가의 탄압과 횡포를 막는다는 것도 불가능하다(적극적인 현실 인정과 순응).
3. 그럼에도 이 따위 세상에서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대의의 귀함과 중요함을 기억하고 있기에 절망하고 슬퍼하는 인간이다(그래도 고고한 가오 잡기).

이 책을 읽던 도중에 갑자기 신형철의 평론집이 떠올랐다. ˝몰락의 에티카˝에 있던 평론으로 기억하는데 예전에 그 글을 읽다가 심한 혐오감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제는 얼마만큼 이해가 된다. 그가 쓴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나는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글에 나타나고 있는 심리는 좌파 멜랑콜리자들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내면 세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그는 몰락ㅡ이것을 혁명의 실패라고 부르건 대의의 실현 불가능이라고 부르건ㅡ을 사랑하고 예찬하나 그 자신이 몰락자가 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와 같은 것들을 애도하고 상찬하고 기억하면서, 그러한 자기 자신도 고고한 윤리적 존재로 철저하게 자리매김하려는 어떤 저의가 엿보일 뿐이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1 15:37   좋아요 1 | URL
신형철은 철저하기 특권층에 기대어 기득권을 획득한 문단 엘리트‘라는 점에서 매우 기회주의자적인 아첨꾼이죠. 그런 그가 몰락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만입니다. 역겨운 거죠. 제 식대로 말하자면 ˝ 만찬 앞에서 굶주림의 비참 ˝ 을 이야기하며 과식하는 미식가의 태도라고나 할까 ? 한국 문학이 어렵기 때문에 비판보다는 칭찬만 하고 싶다는 평론가의 자질에서 신형철의 설레발을 엿봅니다. 수박 씨 발라 먹을 것들....

수다맨 2019-11-22 10:31   좋아요 0 | URL
아첨꾼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의 비평적 태도에 어떤 결여나 단점이 있다고 느껴져서 긴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몰락 예찬을 쓴다는 것은 당사자가 타인(들)의 몰락과 구별되는 위치에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그는 몰락(하는 이들)의 기억자이자 매료자임을 자처하면서 그 자신도 어떤 숭고함을 가진 윤리적인 존재임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죠. 말씀하신대로 신형철의 비평에는 (그 자신의 문학적/사회적 위치와는 대조적인) 어떤 기만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 참고로 필자는 DC 유니버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렇기에 이 평은 순전히 영화 "조커"만을 보고서 쓰는 글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우리말에는 '담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로 하나는 액체에 무언가를 넣는 것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김치/젓갈/장/술 따위를 익히거나 삭힐 때 주로 쓰인다. 그리고 사전에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담그다'는 조폭 계에서 은어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그 뜻은 칼질이나 총질로 인명을 해하는 것이다.

 

나는 "조커"를 보면서 담금이라는 말을 수차례 떠올렸다. 누군가를 담그는 행위,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가 작중에 나오면서 이것이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문학적/사회적 의의를 지녔던 경우가 얼마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적은 나로서는 예전에 읽었던 이 나라의 몇몇 문학서를 생각했다. 최서해의 '홍염', 조세희의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정도가 우선적으로 떠올랐다. 전자에서는 소작인이 자신의 딸을 강제로 빼앗은 중국인 지주를 죽이고 후자에서는 난장이의 큰아들이 은강기업의 중역으로 보이는 화자의 삼촌을 살해한다. 정리하면 이들은 정상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불우한 상황을 극복할 수 없을 때 살인을 통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피억압자의 극한 심경을 폭로한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인 아서 펠렉의 외양과 심경의 변화는 앞서 말했던 소작인/노동자의 모습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아서 펠렉은 고담시라는 지역에서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속해 있다. 그는 고용주로부터 무시 받고 동료에게 배신 당하며 이웃과 모친의 관심을 바라나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주인공의 장래희망은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코미디언이지만 병적인 웃음(pathologic laughing)이라는 장애가 있어서 혼자만 발작적으로 웃어댈 뿐 그 누구도 웃기지 못한다.

 

무엇보다 아서 펠렉의 이성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던 사람들은 그가 친부라고 생각하는 고담시의 부호인 토머스 웨인과,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유명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부의 획득이나 직업적인 성공을 넘어서,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고 있는 이들이 베푸는 인정과 애정이다. 그는 토머스 웨인을 만나서 자신을 한 번만 안아달라며 애원하고, 대형 무대에서 머레이 프랭클린에게 칭찬 받는 본인의 모습을 환각한다. 그러나 그가 믿는 혈연으로서, 자신이 바라는 미래상으로서 작중에 나타나는 아버지들은 아서 펠렉에게 더없이 무례하게 군다. 웨인은 아서의 코에 주먹을 내리꽂고 머레이는 그의 병적인 웃음을 관객들 앞에서 조롱한다.

 

바로 여기, 사회적 약소자가 있다.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인간적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국가에서 받던 지원도 끊겼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려 해도 사람들로부터 사회의 방외자, 하급자, 낙오자, 실패자 취급을 당한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인지하게 되면서 아서 펠렉이라는 이름을 내던지고 그를 버러지처럼 보려는 이들에게 총질도 마다하지 않는 조커로 환골탈태한다.

 

위근우 같은 평자는 어느 칼럼에서 조커를 가리켜 '각성한 혁명가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타락에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관종'이자 '자의식 과잉의 범죄자'라는 혹평을 내린다. 헌데 나로서는 이러한 진단을 읽노라면 일종의 엘리트 의식과 자기 우월감, 약자에 대한 혐오 감정이 느껴진다. 이 영화는 애초에 혁명(가)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도 않았고 세계사적 의미를 얻고자 애쓴 것 같지도 않으며 살인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지도 않았다. 다만 힘없는 사람들이 더할 수 없는 물질적/심리적 곤경에 처해 있고 사회로부터 아무런 희망과 도움을 기대할 수 없을 때, 이들의 감정이 극단적인 폭력 행위로 분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위근우 같은 이들이 말하는 신념(세계사적 의미를 깨우친 명민한 혁명가들이 타락하지 않은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설령 광기나 반동이란 이름으로 표현될지라도, 가난하고 차별 받는 이들의 분노가 사회의 상층부와 심장부를 어떻게까지 난도질(담금)할 수 있는지를 강도 높게 서사화한다.

 

조커는 각성한 순간부터 비극의 희생자가 아닌 희극의 주동자로 맹활약하기 시작한다. 아서 펠렉이 계단을 오르는 순간은 소외자의 피로감과 슬픔을 보여주지만 조커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이 세상을 난장판이자 우스개로 보려는 인간의 경쾌감이 느껴진다. 그는 빈민이자 장애인의 처지를 흥밋거리로 써먹는 머레이를 향해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라고 일갈하면서 총을 쏜다. 그리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형사와 금융사 직원)의 죽음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자신과 같은 하층민들의 실존을 하찮게 여기려는 이 사회에 대해서 신랄한 저주를 퍼붓는다.

 

광대 가면을 쓴 고담시의 시위자들은 조커의 살해 장면과 독설을 방송으로 접하면서 더욱 격렬하게 폭동을 일으킨다. 이 과정에서 시의 빈민들을 무능력자로 취급했던 토마스 웨인은 어느 시위자에게 (조커가 머레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어도 마땅하다는 말을 듣고 총에 맞아서 사망한다. 조커는 화마에 뒤덮인 고담의 시가지와 열광하고 있는 시위자들을 보면서 춤을 춘 다음 피를 입꼬리에 묻히면서 웃는 모습을 내보인다. 이 장면은 관객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하나는 모든 통제에서 벗어나서 거리낌없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이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쾌감(위근우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에만 착목하고 있는 것 같다), 또 하나는 빈민을 천시했던 이들이 비참하게 죽고 약자들이 세상을 잠시나마 뒤엎는 데서 비롯하는 통쾌감, 마지막 하나는 이와 같은 파멸적인 결과를 방지하고자 한다면 사회 안전망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이다.

 

제대로 만들어진 '담금'의 서사를 볼 때면 부피는 늘었을지 모르나 내실은 어딘가 약소해진 듯한 한국 문학의 실태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총칼로 유산계급과 그들의 부역자를 담근다'는 식의 서사는 폭력적인 데다가 충분히 근본적이지도 못하고 자칫하면 조야한 누아르나 신파적인 복수극으로 변질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럼에도 환대와 친애와 치유와 사랑과 같은 말들이 어느 때부턴가 매가리가 없어 보이고, 나약하고 서글픈 마음으로나마 우리가 서로서로 연대해서 살아가는 삶에는 복됨과 소중함이 있다는 (어느 순간부터 흔해진) 류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진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영화 "조커"는 달달하거나 물렁해진 이야기에 싫증이 난 분이라면, 이 엉망인 세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돌아보려는 욕구를 가진 분이라면, 기꺼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본 다음 오래전에 "넘버 3"에서 한석규가 했던 대사를 내 식대로 바꾸어 보았다.

 

'아무리 대단한 자본가도 심장에 기스나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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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11-26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리뷰를 뒤늦게 읽었네요. 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 개봉하자마자 볼려고 찍은 영화였는데, 요즘은 의욕이나 흥미 자체가 없어요. 모든 장르에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수다맨 2019-11-26 16:09   좋아요 2 | URL
주변 친구들이 이 작품에 대해서 호평을 하기에 저도 간만에 영화 관람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위근우와 손희정 같은 평자들은 조커에 대해서 혹평(조커는 무지하기 짝이 없으며 거칠고 한심한 관종일 뿐이다)을 하던데 저는 이런 이들의 평론을 읽고 나니 지식 좀 있다는 사람들의 어떤 거드름과 선민의식 같은 것이 느껴지곤 합니다. 이들은 조커를 가리켜 관종이니, 인셀이니 하는 식으로 폄훼하던데 저는 저런 용어들을 함부로 난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들이 혐오하는 조커 만큼이나) 유해하고 폭력적이라고 봅니다.
 
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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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소설의 당대성과 신진 작가의 감수성이 느껴진다. 사회인의 길목에 들어선 이들이 소외와 모멸을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이면 속물화나 보신주의에 침윤되는 과정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다. 이대로도 충분히 좋지만 세태를 넘어서 계급과 적대에 대한 발본적인 탐색이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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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11-18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알라디너(ROOM46님)은 이 책에 대해서 ‘안락한 이부자리 밑 콩 하나의 불편함‘이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아주아주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나로서는 신진 작가가 이만한 이해력과 관찰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만큼 호평 받을 자격은 있다고 본다.
다만 ROOM46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작가가 향후 콩의 발견이 아니라 콩의 발생에 대해서 심도 있게 사유하기를 주문하고 싶다. 작가가 앞으로도 ‘콩의 발견‘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이의 작품 세계는 ‘꽤 읽을 만한 세태소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추신: 해설자는 표제작을 가리켜 역작이라고 고평하던데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비평가의 그러한 평가는 (문학적 제스처이건 진심에서 우러나왔건) 때때로 역작의 기준에 대해서 나로 하여금 회의하게 만든다.
 
위안의 서 - 제3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박영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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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을 만드는 방식에서 작위성이 느껴지고 죽음(을 맞는 이들)에 대한 서술은 다소 과잉적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웠던 부분은 두 중심인물이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태도(애도와 복원)와 구덩이 안에서 남녀가 서로를 껴안고 체온을 나누는 대목이다. 고평하고 싶진 않으나 기대를 품게 만드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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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11-16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사위원인 류보선은 이 작품이 한동안 우리 문학이 외면해 온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서 상찬하지만 죽음과 상실과 (이를 극복하는) 교감에 대한 서사는 솔직히 흔하디 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작품에서 눈여겨본 지점은ㅡ 두 남녀가 서로를 껴안는 부분이 어딘가 클리셰처럼 느껴지면서도ㅡ 이 진부함을 인정하고 긍정하게 만드는 어떤 필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