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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에게는 문제가 있다 작가는 자기 글이 출판되어 많이 팔리면 자기가 위대한 사람인 줄 안다. 자기가 쓴 글이 출판되어 중간 정도 팔려도 자기가 위대한 줄 안다. 자기가 쓴 글이 출판되어 아주 조금 팔려도 자기가 위대한 줄 안다. 자기가 쓴 글이 출판되지 않고 자가 출판할 돈도 없으면, 자기가 진정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위대함이라고는 거의 없다. 존재가 너무도 미미해서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하지만 가장 최악의 작가는 자신감은 철철 넘치되 자기 의심은 전혀 없는 사람이다. 어쨌든 작가들은 피해야할 존재고 나는 그들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당최 가능하지가 않았다. 작가들은 일종의 형제애, 어떤 친교를 원했다. 그런 감정 중 어느 것도 글쓰기와 관련이 없고 타자 치는 데 도움이 안 됐다.

-찰스 부코스키, "여자들", 열린책들,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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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코스키의 이런 정직함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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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2-04 0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동의, 이 구절 좋죠. 사랑스러운 부코스키 할아버지 !

곰곰생각하는발 2014-02-04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 문장 제가 가져가겠씁니다. 마침 쓸 글이 있는데 인용문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책 찾아서 직접 타자를 칠 수도 있으나 이렇게 수다맨 님이 직접 타자를 치셨으니 전 그냥 긁는 수밖에.... ㅎㅎㅎ

수다맨 2014-02-04 08:42   좋아요 0 | URL
넵, 마음껏 가져가셔도 됩니다 ㅎㅎㅎㅎ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온몸의 피가 심장을 향해 역류하는 것이 느껴졌다ㅡ 천운영, '행복고물상', "바늘", 창비, 160쪽.

이 소설의 첫 대목에 나오는 문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 오문이다. 오문이란, 문법적으로 정확해도 뜻이 통하지 않는 문장을 말한다.
왜 뜻이 이상한가. 피가 심장으로 역류하면 사람은 그 순간 죽는다. 피는 언제나 순류 [順流]해야지 한 순간이라도 역류해서는 안 된다. 굳이 위 문장을 고쳐 보자면 '온몸의 피가 심장을 향해 역류하는 듯했다' 정도가 알맞다.
물론 이 한 문장을 가지고 작가의 역량을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장을 미려하게 가꾸려는 마음이 강한 나머지, 정확한 문장을 쓰려는 작가의 의지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바늘"에 나오는 몇몇 단위 문장들을 보다가 이런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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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전 위 문장을 읽는 순간, 왜 이게 오문이지 ?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그런데 말씀 돌어보니 정말 피가 역류하면 , 정말 무시무시한 순간이 되겠네요. 공포 영화 속 한 장면이 연상됩니다. 비평가들은 < 바늘 > 이란 작품지베 대해 극찬을 하던데 ( 뭐, 단편의 교과서다.. 이런 식..) 전 잘 모르겠더라고요. 기교는 좋은 데 진심을 담지 않는다고 박진영이 뭐라 할 타입의 참가자라고나 할까요 ?

수다맨 2014-01-16 20:22   좋아요 0 | URL
'바늘'이라는 단편집은 첫 신인의 창작집이라 보기에는 굉장히 준수하죠. 꼼꼼한 묘사력과 더불어 현장감도 나름 충실하다고 봅니다. 오늘날 문창과에서 중요한 교재로도 쓰이죠.
하지만 곰곰발님 말씀대로 기교가 압도적으로 드러나니 저자의 진심이 흐리게, 더 심하게 말하면 안개처럼 보이더군요. 오로지 묘사에만 온 역량을 집중시키니 정작 왜 이런 캐릭터를 선보이고, 왜 이런 서사를 보여주여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빈약해 보이더군요. 그래서 아쉬웠습니다.
 

레이꼬 미싱

                        백무산

옛집 어둑한 방 구석진 곳에 칠이 벗겨진 발재봉틀 한 대
일찍 집 떠나 삼십 년은 넘게 보지 못한
나와 동갑내기 레이꼬 미싱

전쟁 통에 서로 곁을 잃고 빈자리만 보고 만나
내가 태어나던 그해 전쟁을 깁고 새살림 일궈볼 꿈으로
읍내 공설시장 작은 가게 창가에 처음 놓였던
신식 미인처럼 반짝이던 그 미싱

알록달록 다홍실 명주 무명 색실과 나일론 옥양목 포플린
색단추와 동정 리본들이 어우러져 강강수월래
춤추듯 돌고 돌아 크고 작은 날개를 잣던 그 미싱

짐꾼들의 남루에 누비천 덧대어 누비고
코흘리개 아이들 내리닫이 개구멍바지가 되고
헐벗음에도 있어야 할 품위 한 조각 깃을 세우기도 하고
능금밭 과수원집 처녀들 설레는 바람을 꾸밈실로 그려넣고
폐허의 거리에 다홍실 풀어 박음질하던 그 미싱

어머니 버선발로 미싱을 타는 밤이면
처걱처걱 드르륵 처거처걱 드륵 드르륵─
멀리 기관차 소리가 나고 종일 목구멍 깔딱이던 
우리들 갈대 기둥 하나에 매달린 비비새 둥지 같은 집으로 먹을 걸 싣고
밤길 고갯길 가윗밥 날리며 숨가쁘게 달려오던 그 미싱

내 꿈을 동무들은 부러워하였지
순사나 특무상사가 되고 싶다던 아이들에게
내는 말이다 증기기관차 기관수가 될 끼다
압록강 건너고 만주벌판 달려가는 기관수 말이다
시베리아까지도 달려갈 끼다, 자랑을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마이 멀리나? 천리만리도 넘겠제? 눈길에도 갈 수 있나?
마치 곧 떠나기라도 하려는 듯이 내게 묻곤 하였지
꿈길에 달려가던 기관차 소리에 깨어보면
늦은 밤 돌아가던 그 미싱

그 소리에도 몰랐던 한숨이 배어들고
슬픔이 물컹물컹 묻어나곤 할 무렵
내 꿈도 질척질척 폐허를 달리고
쌍엽기에서 삐라가 뿌려지고
공회당 담벽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담화가 나붙고
군용차 들이닥친 꼭두새벽 군홧발들이 마을을 뒤지고
밤새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던 눈 내리던 새벽에도
야밤 사이렌 소리 가슴 태우며 애를 끓이듯 돌아가던 그 미싱
조각 천 이어 눈물 많던 이웃들 눈물수건이 되곤 하던
그 세월 깁고 이어 박음질하였지만 어머니
정작 기운 것 하나 없다 하시네
그 아픈 상처 하나 깁지 못했다 손 놓으시네
한 몸에 난 조각들조차 알록달록 살아보지 못했다 맥을 놓으시네
아, 일찍이 그 일은 우리들 몫이었으나
그 어둡고 거친 노동으로도 다 이어 넘지 못해
더 긴 세월을 짐 지시게 하였네 그 시절 더욱 눈물겹게 하였네

어머니의 근대가 그렇게 저물고
어둑한 방 구석진 곳에 다소곳이 앉은 나의 슬픈 동무
차갑게 숨죽였으나 꿈꾸듯 뜨거움 깊이 감추고
손끝 가 닿으면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 덥석 잡고
옛길 그 푸르고 슬픈 길을 다 보여줄 것 같은 
동갑내기 계집아이 레이꼬 미싱


-백무산 "거대한 일상"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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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른 정서도, 탁월한 감각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시간"에 나왔던 시들 모두가 명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시를 만나면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아득한 과거의 한쪽을 돌아보게 된다. 백무산은 이 땅에서 보기 드물게, 시를 아주 정직하게 쓰는 시인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대로, 본 대로, 느낀 대로 쓴다. 때문에 기교를 탐하거나 별다른 감각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조선소 노동자로서 험난하게 살아온 자신의 과거와, 지금은 산속 깊은 절간에서 살아가는 나날의 일상을 꾸밈없이 쓴다. 그럼에도 그는 남진우나 (최근의 고은처럼) 천상의 도인 같은 시를 쓰려고 하지는 않는다(물론 아예 안 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가 살아온 나날이 그만큼 험하고 굴곡졌던 탓이리라. 

어쨌거나 이 시는 명편의 반열에 들 만하다. 이웃인 곰곰발님 말씀처럼 시는 (감각이나 기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심이 반영된 진술'로 쓰이는 것이라는 오래된 (그러나 지금은 진부해진) 진리를 다시금 확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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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제부터인가 수사가 화려한 시에 대한 의심이 들고는 해요.
솔직하게 말해서 수사가 화려한 시'를 쓰는 능력, 어렵지 않습니다.
전 시에 수사가 잔뜩 붙으면 마치 사탕에 침 바른 상태에서 설탕가루까지 잔뜩 입힌
맛 같아서 싫더군요. 과잉이란 말이죠. 과잉...

수다맨 2014-01-04 15:1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서 요즘 시를 잘 안 읽습니다. 손에 잡히는 걸 멏 권 읽기는 하는데 솔직히 다 그게 그거 같더군요. 수사의 과잉이나 말장난의 극치로 가던데, 이런 방식의 시 쓰기가 특색은 있을지라도 별다른 감응은 없더군요.
이제는 뭐랄까, 소박한 글들이 그립습니다. 사탕가루 많이 바른 글 말고 담백한 밥상 같은글이 생각납니다. 차라리 요즘은 부족이 과잉보다는 낫다고 느낍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란 늘 싸워야하는 거요. 싸울 줄 모르는 인간은 송장이오. 그러나 반드시 저보다 강대한 적과 싸우는 싸움만이 신성합니다. 약자끼리의 싸움이란 언제나 강자를 위한 자멸입니다.
ㅡ손창섭 '인간동물원초' 중에서

ㅡㅡㅡㅡㅡㅡ
이런 구절을 만나면 확실히 옛날 작가들의 인식이 굉장히 강렬하고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래전 어떤 여성 작가의 문학 강연에 간 적이 있었다. 굉장히 명랑해 보이던, 명랑한 작품을 즐겨 쓰던 작가는 객석의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문단 선배님 들에게 이런 말하면 혼날 테지만 그래도 저는 저희 세대가 윗세대들보다 글을 더 잘 쓴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집으로 들어와 책꽂이에 딱 한 권 꽂혀 있던 그 작가의 단편집을 읽었다.빠르게 몇 편을 읽고 나니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녀는 문학상 네다섯 개는 휩쓴 문단의 중견이었다.
각설하고, 손창섭의 단편을 새벽에 읽으며 착잡한 느낌에 젖어든다. 이 작가는 인간의 똥창자를 한번 훑어보겠다는 각오로 글을 쓴다. 평론가 유종호의 평에 따르면, 손창섭 소설 속 인물들은 누가 더 불행하고, 얼마나 각자가 더 처절해질 수 있는지 내기를 벌인다. 이것은 얼핏 유희에 가까워 보이지만, 유희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작중의 상황은 처참하다.
어쩌면 손창섭은 '관념소설'을 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관념소설이란 단순히 현학이나 이념을 늘어놓는 소설을 뜻하지 않는다(이런 건 박상륭의 표현대로 그냥 잡설이다).엄밀한 의미에서 관념소설이란 저자의 확고한 관념에 의해 세상과, 사회와, 인물을 재단하는 소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손창섭은 그야말로 비극적 인식으로 덧칠된, 모종의 벽화를 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손창섭은 비극적 상황의 나열에만 열중했던 작가는 아니었다(만일 그랬다면 그는 사디스적 변태일 것이다). 그는 타인 모멸을, 그보다 더 심한 자기 부정을 하면서,그럼에도 약자들이 결연한 태도로 강자의 세상과 맞서야한다는 것을 진술한다. 물론 이 진술은 현실이란 격랑 에 휩쓸려 무의미해질 때가 많다. 하지만 그는 침울해진 목소리로, 이러한 진술을 작품의 곳곳에 드물게 포진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다수의 작가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손창섭의 미덕이다. 그는 자기 부정과 세계 부정을 누구보다 가열하게 시도하면서도 그래도 세상이 사람의 노력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본인의 신념을, 알게 모르게 표현한다. 재기만 넘쳐서 감각을 탐하는 작가들, 키치나 다름없는 것을 시도하면서 그것을 전위라 외치는 작가들, 자기 명랑에 주저앉은 작가들과는 손창섭은 격부터가 다르다. 적어도 손창섭은, 자기 부정의 극한까지 가서, 인간 세계의 한 '이면'을 발견해려했던 귀한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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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1-03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창섭은 정말 존재부터가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죠. 어쩌면 그게 한국 문단의 비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그에 대한, 손창섭 작가론을 본격적으로 다룬 평론가가 거의 전무한 상태입니다. 그나마 유종호 평론가가 다루기는 하나 그냥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듯,
이런 거목을 거의 다 다루지 않는다는 현실이 씁쓸하죠. 나같은 문학 무지랭이도 이 작품의 아우라에 숨을 못 쉴 정도인데 문학을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손창섭을 외며하는 것은 이해가 안 갑니다.
손창섭은 자기 혐오'가 극에 달했던 것 같아요. 문단에 대한 혐오도 매우 강했고 말이죠.
그는 자기 존재 부정을 통해서 스스로 아버지 세대에 대해 욕을 던진 인물입니다.
그는 혈맹'을 매우 혐오했어요. 그의 소설을 보면 가족 해체 주장을 하기에 이르거든요.
삼부자'라는 소설도 세태소설이지만
전 이 소설에 나오는 전복적 가족관계에 브라보 100000000000번 외쳤습니다.
확실히 독보적인 인물이비다. 비교 대상이 거의 없어요.
정말 손창섭은 미친 인간입니다. 굉장한 소설가입니다.

수다맨 2014-01-03 14:06   좋아요 0 | URL
손창섭 작가론이 그래도 꽤 있을 겁니다. 다만 염상섭/최인훈/이청준/이광수 같은 이들에 비하면 다소 적겠지요.
사실 이 작가를 오해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신의 희작'이라는 소설 때문인지 사람들이 소설 주인공=손창섭이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심지어 유종호조차도) 이런 함정에 빠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손창섭을 일러 변태나 자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손창섭은 굉장히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사람 만나기를 꺼리고 문단에 출입하는 것을 꺼린, 염결한 작가였죠.
말씀하신 "삼부녀"같은 소설은 (저는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통상의 가족 로망스를 해체한, 선구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한국에서 가족 로망스는 여전히 심하죠(일례로 신경숙이 아직도 득세하는 것을 보면요). 그런데 가족 로망스를 들여다보면 거대한 남근(이것은 엄마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가족이라는 공동체 전체일 수도 있죠)을 소속원들이 선망하고, 거기에 환상을 덧씌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손창섭은 어쩌면 가족이야말로 상상적(더 나아가 기만적) 공동체에 다름아니며 이것을 해체할 수도, 마음대로 변형할 수도 있다고 본 듯합니다. 무려 50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확실히 경이로운 일이며, 저자의 인식이 얼마나 도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봅니다.
물론 한국에 남아 있었어도 그의 자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손창섭, 장용학 같은 작가들은 당시의 구세대(김동리, 조연현)와 신세대(백낙청, 김현, 김승옥) 사이에서 일종의 낀 세대에 가까웠거든요. 손창섭이 문지나 창비와 같은 에콜에 속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한국에 남아 있었더라도 그의 영토가 그렇게 넓어지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1-03 14:25   좋아요 0 | URL
그나마 유종호 평론가가 작품을 발굴하고 노력을 많이 하시더군요.
말씀하신대로 신의 희작을 자서전으로 이해하는 것을 보고
전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국문과 교수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통탄할 일이죠. 손창섭을 지나치게 리얼리즘 작가로 판단한 결과에 따른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번 손창섭이 궁금해서 도서관에 있는 평론집을 다 뒤졌으나
그 많은 평론집 가운데 손창섭을 건드린 평론가는 거의 없더군요.
지금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어느 구닥다리 평론가가
손창섭에 대한 소사를 썼는데 신의 희작을 그대로 따랐더라고요.
욕이 나오더군요....

저는 신형철 같은 젊은 비평가가 손창섭을 반드시 건드리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름 석 자 언급한 적 없는 거 보고 실망했습니다.

수다맨 2014-01-03 15:57   좋아요 0 | URL
신형철 평론가야 손창섭을 평론할만한 시간이 없겠지요(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저는 신형철이 굉장히 바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중견들은 가득하고, 신인들이 넘쳐나니 그들의 작품을 읽고 평하는 데만 해도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겁니다. 죽은 작가까지 건드릴 여력은 없겠지요.
손창섭은 자신의 비극적 관념과 정서를, 소설로 체현하려 했던 사람 같습니다. 따라서 그의 소설을 리얼리즘의 범주에 묶어서 재단하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성마르고 조야한 태도이지요. 제가 예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셀린느, 장 주네, 우엘벡, 손창섭 (그리고 곰곰발님도^^) 등은 삶의 외부적 조건(법, 제도, 정부 등)이 아무리 바뀌더라도 인간 삶의 비극적 성격이 사라지진 않을 거라고 보지요. 손창섭은 정확히 이 관점에 서서 세상의 극단을 향해 달려갔던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인간을 동물에 불과한 것으로, 가족 로망스를 부숴야 한다는 불온한 발언들을 가감없이 할 수 있었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12:48   좋아요 0 | URL
전 평론가가 너무 바쁘다는 게 바로 치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 수도 없을 만큼 바쁘다는 것은 직무유기죠.
그건 마치 정치학 교수가 휴강 남발하면서 티븨에 나와 정치평론하면서
사람은 자기 일에 성실해야 한다는 말을 아무 죄책감없이 남발하는 모습 같아요.
모 유명한 정치평론하는 사람 이 교수로 있는 학교 학생들의 원성이 정말 하늘을 찌르더군요. 수업 절반은 휴강이라고 욕 나온다고....

하여튼 신형철이 너무 바쁜 것은 사실입니다. 팍캐스트 방송하려, 책 읽으랴, 각종 서평 쓰랴... 요즘은 신간 나올 때 책 광고 100자평에 신형철이란 이름 안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전 늘 궁금해요. 100자평 써서 돈을 벌려고 하는것인지, 아니면 100자평이 평론가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말입이다.

수다맨 2014-01-04 15:14   좋아요 0 | URL
아, 격하게 공감합니다.
평론가가 글에 관계된 일이라면 몰라도 팟캐스트 방송이나 북 콘서트 이런 건 삼가야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신형철의 100자평, 일종의 '표사'글이 수작의 보증수표처럼 되는 것도 좋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표사글 써서 신형철 씨가 돈 벌려 하기보다는(제가 알기로 그거 써줘도 돈 얼마 못 받습니다) 출판사의 이익 창출에 기여(?)하려는 것이겠죠.
솔직히 그가 이런 관계 저런 인연 다 끊어버리고, 오로지 글에만 전념했으면 좋겠습니다. 문학동네라는 출판사에 너무 오래 묶여 있는 한 (그가 설사 부인하더라도) 그의 글이 고급스러운 카피라이터라는 격한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16:48   좋아요 0 | URL
오호, 그런 것을 표사'라고 하는군요.....
표사'를 쓰는 이유는 아마 인지상정이겠죠.
글 써주는 대가로 나중에 그 공인 잊지안겠다는 것.
출판사가 말할 자리를 마련해 주고 돈도 준다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문학평론이 업이라면 적어도 출판사에 소속된 것보다는
독립적 군단에서 활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계속 문학동네에서 놀면 절대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을 나빠도 씹지 못합니다.
불공평한 거죠....

수다맨 2014-01-04 17:05   좋아요 0 | URL
넵 그렇습니다^^
사실 한국 평론가들이 흠모하는 맑스나 지젝은 굉장히 독설가이지 않습니까. 점잖은 축에 속하는 고진조차도 노벨상 받은 오에를 가리켜 '늦게 온 구조주의자'라고 조소하고, 역시나 당대의 일류 작가였던 아베 코보에게도 '추상화된 인간관계가 드러나는 소설'을 쓴다고 질타한 적이 있었죠.
신형철이 만일 진화를 꾀하고 싶다면 (단순히 독설이나 비판을 하라는 게 아니라) 자기가 소속된 영역ㅡ 문학동네라는 출판사일 수도 있고 문단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ㅡ을 아웃사이더의 정신으로 돌아보아야할 겁니다. 훌륭한 비평가라면 아웃사이더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불온한 상상과 대담하고도 치밀한 사고를 가져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4-01-04 19:58   좋아요 0 | URL
정말 해외 평론을 종종 접하다 보면 신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작가들과 평론가는 서로 앙숙이죠. 으르렁거린단 말입니다. 한번은 모 평론가가 몇몇 작품에 비판적 자세를 취했더니 신기하게도 모 평론가가 나와서 그 평론가를 애비에미도 없는 놈 취급하더라고요. 신기했습니ㅏ 알고 보니 자신이 소속된 출판사 옹호해주느 멘트였더군요.
한국 평론은 주례사 비평이에요. 이들이하는 말 들어보면 노벨문학상 1000명은 타고 남을 것같은 극찬입니다.

수다맨 2014-01-05 00:55   좋아요 0 | URL
상투적인 주례사나 덕담을 줄이고 정말로 급진적인 평론을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오늘날 평론가들은 백낙청/김현이 자기 선배 평론가들(조연현, 백철, 김기진 등)과 얼마나 맞서 싸웠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곰곰발님 평소 말씀처럼 살부 (殺父)의지란, 세대투쟁이란 바로 이런 거죠.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저는 과거의 유산과 싸우고, 극복하지 않는 평론가를 일류로 보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감식안 좋고 문장력 좋은 평론가에 그칠 따름이지요.
 

-무라카미의 '나'는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정확히' 읽고 있다고 해도 좋다. '나'는 모든 판단을 취미, 그러므로 '독단과 편견'에 지나지 않다고 간주하는 어떤 초월론적 주관인 것이다. 그것은 경험적 주관(자기)이 아니다. 무라카미의 작품은 매우 사적인 인상을 주지만 사소설이 아니다. 사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경험적인 '나'가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다-143쪽


-이런 자기의식은 결코 상처를 입지 않으며 패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적 자기나 대상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내면'의 승리는 '투쟁'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145쪽


-현실적인 투쟁을 방기하고 그것을 내면적인 승리로 바꿔버리는 속임수의 재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근대문학의 '내면'이나 '풍경'을 부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가 가져온 것은 새로운 차원의 '내면'이나 '풍경'이고, 그런 독아론적 세계가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 자명한 베이스가 된 것이다-155쪽.


-'즐겁게 무로 향하는 무리(1973년의 핀볼)'란 '즐겁게 의미로 향하려는 무리'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결국은 붕괴과정에 지나지 않다'라고 말하는 이는 바로 그것에 의해 초월론적 자기의 우위성을 확보한다. 이것은 이미 말한 낭만적 아이러니다... 그것은 아직 '인간'이나 '역사'라는 의미에 매달린 사람들에 대한 경멸 속에서 자신의 우위성을 확보한다-163~4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정보론적 세계인식 또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인식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 '현실성'으로부터의 도망이고 낭만파적 거부다-177쪽.


-아포리아의 소멸이 작가들에게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를 회고하게 만든다. 다만 그때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보내는 편지"에는 상실과 '비탄'의 감정이 넘치고 있는 데 반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태연하다. 그는 "1973년의 핀볼"에서는 아이러니에 의해 회피되었던 세계를 문제 삼는다. 한마디로 말해, 무라카미는 이미 '나오코'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역사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낭만적 아이러니에서 아이러니가 빠지면, 낭만적(romance)만 남는다. 즉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라카미는 그저 로맨스(Iove story)를 쓴 것이다-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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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21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 제목이 무엇입니까 ?

수다맨 2013-12-21 04:31   좋아요 0 | URL
아,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이라는 책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2-21 07:51   좋아요 0 | URL
끝내주는군요....읽어봐야겠습니다.

수다맨 2013-12-21 17:02   좋아요 0 | URL
중간 부분만 죽 읽어봤는데 어려운 대목도 많고 흥미로운 부분도 많더군요.
아무래도 고진은 나카가미 겐지(고목탄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이자 고진의 절친한 친구)라는 작가까지 근대문학의 적자로 보고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읽은 바로는) 미시마ㅡ오에ㅡ나카가미 까지는 근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작품에 투영되어 있었거든요.
하지만 무라카미에 와서는 그러한 고민 자체가 옅어지거나,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세계를 무의미한 것이라 여기고 가벼운 유희나 즐기는) 저자의 자의식 뿐이죠. 아마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는 것을 보면서, 결국 가라타니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일종의 사표(문학이여 바이바이!)를 쓴 듯합니다.
저도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습니다 ㅎㅎ 그럼에도 흥미로운 부분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꼭 읽어 보시라 권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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