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의 '나'는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정확히' 읽고 있다고 해도 좋다. '나'는 모든 판단을 취미, 그러므로 '독단과 편견'에 지나지 않다고 간주하는 어떤 초월론적 주관인 것이다. 그것은 경험적 주관(자기)이 아니다. 무라카미의 작품은 매우 사적인 인상을 주지만 사소설이 아니다. 사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경험적인 '나'가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다-143쪽
-이런 자기의식은 결코 상처를 입지 않으며 패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경험적 자기나 대상을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내면'의 승리는 '투쟁'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145쪽
-현실적인 투쟁을 방기하고 그것을 내면적인 승리로 바꿔버리는 속임수의 재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근대문학의 '내면'이나 '풍경'을 부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가 가져온 것은 새로운 차원의 '내면'이나 '풍경'이고, 그런 독아론적 세계가 오늘날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 자명한 베이스가 된 것이다-155쪽.
-'즐겁게 무로 향하는 무리(1973년의 핀볼)'란 '즐겁게 의미로 향하려는 무리'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결국은 붕괴과정에 지나지 않다'라고 말하는 이는 바로 그것에 의해 초월론적 자기의 우위성을 확보한다. 이것은 이미 말한 낭만적 아이러니다... 그것은 아직 '인간'이나 '역사'라는 의미에 매달린 사람들에 대한 경멸 속에서 자신의 우위성을 확보한다-163~4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정보론적 세계인식 또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인식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 '현실성'으로부터의 도망이고 낭만파적 거부다-177쪽.
-아포리아의 소멸이 작가들에게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를 회고하게 만든다. 다만 그때 오에 겐자부로의 "그리운 시절로 보내는 편지"에는 상실과 '비탄'의 감정이 넘치고 있는 데 반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태연하다. 그는 "1973년의 핀볼"에서는 아이러니에 의해 회피되었던 세계를 문제 삼는다. 한마디로 말해, 무라카미는 이미 '나오코'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역사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낭만적 아이러니에서 아이러니가 빠지면, 낭만적(romance)만 남는다. 즉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라카미는 그저 로맨스(Iove story)를 쓴 것이다-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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